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01)
나 빼고 다 회귀자-301화(301/356)
나 빼고 다 회귀자 (301)
Chapter 58. 문명 이벤트 – 1
자신에게 주어진 막사로 기준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비체가 그를 돌아보며 살짝 매서운 표정으로 물었다.
“쟤 뭐였어?”
“내가 신이하고 지혜 사이 밀어주느라 방해했더니 삐져 가지고 투덜대더라고.”
“정말? 난 또 좋아하는 남자랑 잘 안 돼서 상처받은 여자의 빈틈을 노리고 접근하는 줄 알았네.”
“……어라, 내가 원래 비체한테 그렇게 이미지가 안 좋았던가?”
“나 말고 다른 여자랑은 일절 접하지도 않을 것 같던 애가 어느새 수백 명씩이나 되는 여자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좀……?”
자신을 비꼬듯 말하는 비체에게 말도 안 된다며 따지려던 기준은 자신이 200명의 무녀를 거두었음을 상기하곤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비체는 아까 밖에서 오우카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을 들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비체, 저번부터 말했지만 내가 딱히 엉큼한 의도가 있어서 무녀들을 거둔 건 아니야. 알지?”
“하지만 쟤네들은 너한테 엉큼한 의도가 있잖아.”
송곳처럼 날카롭게 날아드는 비체의 말에 순간 자신을 노리고 덤벼드는 200명 무녀의 모습을 상상한 기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난 정말 이상한 생각은 한 적 없는데…….”
“그게 다 네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네 성정이 모질기를 하니, 단호하기를 하니. 네 딴에는 안 받아 준다고 해도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앙탈을 부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니까 더 달려드는 거야.”
“앙탈?!”
그게 남자를 묘사하는 데 쓰여도 되는 단어란 말인가!
전율한 기준이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두 눈만 깜박이자, 그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 콧방귀를 뀐 비체가 자신의 양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슴을 당당히 펴며 말했다.
“물론 앞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겠지. 예쁘고 강하고 성격까지 좋은 내가 나타났으니까. 게다가 네가 나한테 목을 맨다는 걸 다들 알고 있잖아?”
“…….”
“하지만 주제를 모르는 애들도 개중에는 있는 법이야. 내가 널 완벽히 가드해 주기 위해선 누가 뭐래도 무너트릴 수 없는 단단한 형태, 그래, 관계의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계약자, 뭐라고 한 마디 해 줘. 여기에 악마 따위보다 훨씬 예쁘고 상냥하고 계약자만 바라보는 준바라기 빛의 여신님이 있다고 말해 줘!
“정령, 나 진지한 얘기 중이니까 빠져.”
훼방을 놓으려는 루시를 째려보며 비체가 말했다.
그러나 루시 또한 물러나지 않았다.
―정말 진지한 얘기가 하고 싶은 거라면 계약자의 감정을 방패 삼아 숨기 전에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잠깐만, 루시. 비체의 말이 맞아. 내가 비체한테…….”
―아니야, 계약자. 여기서 져 줄 필요는 없어. 계약자는 할 만큼 했고, 이제 악마 차례라구. 이건 계약자뿐만이 아니라 악마를 위한 일이기도 해. 악마, 서투른 것도 정도가 있잖아? 관계를 다지기 전에 스스로의 감정을 분명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 계약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너도 더 용기를 내.
루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준도 알고 비체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두 사람이 재회하고도 몇 날이 지나도록 진전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뭐라도 따지기 위해 입을 뻐끔거리던 비체는 귀 끝부터 턱 밑까지 새빨개진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 없어? 대륙에 위명이 자자했던 용사가 그것밖에 안 돼?
“아니…… 이쪽으론 경험이 없으니까아…….”
여태껏 기준이 들어 본 가운데 가장 약한 목소리를 내며 비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준은 그녀의 덩치가 줄어드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뿔과 날개가 사라지며 완전한 인간형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투를 치르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마왕 형태로 나타났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야 스스로 용기를 북돋을 겸, 처음 계약자와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자신감을 더할 겸…….
“그마안.”
비체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루시의 말을 틀어막았다.
“용기 내 볼 테니까, 둘만 남겨 줘…….”
―에휴, 진짜 이렇게까지 떠먹여 줘야 하다니 나이는 어디로 먹었담.
“그야 신격에 비하면 한참 어리지…….”
―뭣, 넛, 나도 어리고 젊거든?! 계약자랑 어울리는 파릇파릇한 새싹이거든?!
비체의 예기치 못한 도발이 훌륭히 먹혀들어 간 탓에 루시가 다시 길길이 날뛰긴 했으나 다행히도 냉정을 되찾은 그녀가 우르와 라피, 삼부카까지 끌고 사라져 준 덕에 막사에는 온전히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물론 비체는 루시를 완전히 믿지 못해, 그녀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양손을 펼쳐 둘이 있는 공간을 외부와 완전히 격리하는 결계를 만들고 나서야 표정을 풀었다.
“이제 그 망할 정령도 네 마음을 읽지 못할 거야.”
“응, 정말 그러네. 역시 넌 전투만이 아니라 마법도 대단하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2회차 튜토리얼 마지막 날 기준이 비체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자작극이었다.
비체 스스로 자신의 많은 전투 수단을 봉인하고 철저히 기준에게 어울리는 영역에서 맞춰 주지 않았다면 기준은 그녀를 쓰러트릴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를 적당히 봐준들 칭호는 얻지 못했을 터, 시스템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며 챙겨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준 그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할 따름.
“가능하면 이런 다양한 마법도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마법은 지나치게 특수한 재능을 요구하는 탓에.”
“너한테는 이미 지나치게 많이 받았지. 이제는 내가 줄 차례라고 생각해.”
“잠깐만.”
내친김에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던 그때 비체가 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정령의 말이 맞아.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줘야 할 것 같아.”
“으…… 음.”
그건 또 그것대로 부끄러운데.
사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아니, 정말 알고 있나?
자신이 비체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도 그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나?
어쩌면 그녀는 기준 자신이 아닌, 그가 지닌 재능 때문에 그를 신경 써 줄 뿐이 아닌가 의심했던 적은 없나?
이미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녀에게 분명한 말로 감정을 전달한 적이 있나?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온전히 전달받은 적이 있나?
‘의심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확인하는 게 무서웠던 건지도 모르겠네.’
지나치게 좋아한 탓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완성된 지금의 관계에 혹여나 금이 갈까 두려워 확인을 피한 탓이다.
어쩌면 그녀가 품은 감정은 자신이 품은 감정에 비해 가벼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이 적극적으로 다가간다면 최소한 그녀가 내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비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자신 곁에 붙들어 둘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지 그녀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녀에게 뭐라도 더 많이 해 주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받은 것들의 무게에 눌려 자신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 탓이다.
‘뭐지 이거, 개같이 한심한데?’
기준은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쓰게 웃었다.
그야 그렇다.
이제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지만, 그의 근본에는 여전히 줏대 없이 휘둘리던 지구인 시절의 기준이 있으니까.
자신을 바꾸어 놓은 것은 비체이고―― 바꾸어 말하자면 비체는 가장 한심했던 때의 기준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는 비체에게만은 강하게 나갈 수 없다.
그녀에겐 그를 부정할 근거가 있고, 물론 그녀는 결코 그를 부정하는 일이 없겠지만, 그것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만으로 기준은 그녀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말했듯이, 언제까지고 안전한 방패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더더욱.
“준.”
“잠깐만, 비체. 역시 내가 해야 맞는 것 같아.”
기준은 무의식적으로 꺼내 놓고 있던 광륜과 광익을 완전히 감췄다.
어째서 비체가 이 순간 마왕의 뿔과 날개를 감추었는지 절절히 이해했다.
무척이나 겁이 나고 부끄럽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온전한 자신을 내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 돼, 여태까지의 내가 한심해서라도 준한테 모두 떠넘길 순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장난 아니게 한심했던 건 나야. 네 상냥함에 의지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으――으럼, 동시에 하자.”
비체가 떨리는 눈동자로 제안했다.
기준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에 말하는 걸로 할까.”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어 진심을 토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상대방의 눈동자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첫눈에 반했어……!”
“사랑해, 비체!”
“응?”
“아.”
두 사람은 직후 눈을 깜박였다.
상대가 최고의 표현으로 자신을 긍정해 주었다는 것에 기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응?
“첫눈에?”
“아―― 잊어 줄래?”
“잠깐만, 자세히 듣고 싶어.”
“아냐, 잊어. 잊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방금 기준에게 들은 말이 너무 기뻤던 탓에, 일단 그를 좋아하지만 지금의 얼굴 표정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냅다 그에게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비체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생각해 보니까 그냥 좋아한다고만 하면 되잖아. 뭐지? 그 정령한테 속아 넘어간 탓인가? 아냐, 이 일대에 쓸데없는 마법 같은 게 걸려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비체의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올라 이젠 밖으로 노출된 새빨간 귀만 봐도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첫눈이라니…… 비체, 너 눈이 너무 낮은 거 아냐?”
“아냐, 멋졌거든. 필사적인 게 귀엽기도 했고…… 아무튼!”
“지금은 어때? 혹시 그 이후로 싫어지진 않았어?”
“바보,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더 좋아졌거든…….”
지나치게 흥분하고 부끄러워진 탓에 이상한 말투로 말하는 비체를 기준은 꽉 끌어안아 버렸다.
“나도 그래. 점점 더 네가 좋아. 너와 함께한 10년간, 그리고 헤어져서 혼자 노력해야 했던 1년간 쭉 네가 좋아졌어.”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내가 진 것 같아서 짜증 나는데.”
“지고 이기고가 어딨어.”
“언제부터 좋아했냐고오……!”
그의 가슴팍에 묻은 얼굴을 떼어 낼 생각도 않은 채 그의 몸을 쿡쿡 찔러대는 비체.
기준은 솔직히 답했다.
“3년 차? 아니, 5년 차였나……?”
“뭐야 그거! 구라치지 마, 너 그때도 나 엄청 좋아했잖아!”
“아니 그야 그렇게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데 좋아하지. 내 말은, 너를 사랑하게 된 때를 말하는 거야.”
“뭘 그렇게 오래 버텼는데! 씨잉, 난 처음부터 두근거렸는데 억울하게……!”
“오래 버틴 게 아냐. 단지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던 탓에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도 없었을 뿐이지.”
정말로 그때의 기준은 그랬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존재인 비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평가가 처절하리만치 낮은 기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과분하다는 마음을 먹으면, 짝사랑조차 마음껏 할 수 없다.
비체가 10년에 걸쳐 철저하게 그를 교정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의 정신상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진짜 한심하기는, 헷…….”
자신이 먼저 그를 좋아했다는 게 대놓고 밝혀져 부끄럽지만―― 기준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에 자신을 만나기 이전까지 여자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복잡한 마음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의 품에 뺨을 비비던 비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우리 이제 뭐 해?”
“응?”
“지금 엄청 행복하긴 한데, 이걸로 된 거야?”
“아, 아직 중요한 게 남았었네.”
기준은 헛기침을 하곤 품 안의 그녀에게 고백했다.
“비체, 사귀어 줄래?”
“응, 그것도 좋은데 우리 빨리 결혼하자.”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성격이 더럽게 급했다.
“그래야 너한테 덤벼드는 다른 년들 제대로 견제하고 관리하지. 원래 정부인이 있어야 다른 여자들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후딱 식 올리자.”
“음? 으으으음?”
“싫어?”
“아니, 그래! 알겠어, 결혼해! 결혼하자!”
……어라?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
“아니, 그…….”
기쁨에 넘치는 순진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묻는 비체.
기준은 그녀가 다 알면서 자신을 도발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꺼이 넘어갈 수밖에.
“이제 시작이지.”
“꺅!”
그녀를 침대에 던지자 비체는 누가 봐도 흥이 잔뜩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정으로 꺅 소리를 내며 멋들어지게 침대 위로 쓰러졌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유혹적인 자세를 취하며 그를 바라보는 비체.
기준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