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4)
나 빼고 다 회귀자-334화(334/356)
나 빼고 다 회귀자 (334)
Chapter 63. 마지막 무대를 걷다 – 3
순간 그게 무슨 말인지 기준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속에서 불쑥 ‘역시 그랬구나’ 하는 탄성도 튀어나왔다.
논리적으로는 지구와 레타, 나아가 다른 소환자들의 세상이 모두 같은 세상이었다는 황당한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감성적으로는 여태껏 지구와 다른 문명에서 보이는, 기원이 같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공통점이나 레타의 유적에서 발견했던 지구의 흔적들 따위를 볼 때마다 느꼈던 의혹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답이 이뿐이라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게 어떻게 가능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이는 누구도 아닌 틸라였다.
“시간을 되돌렸다……는 건 알겠어, 신들이 수백 년 이상 특수한 방법으로 모은 에너지를 동원해서 했다는데 한낱 염인인 내가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하겠어? 하지만 시간을 되돌렸다고 세상이 바뀐다는 게 말이나 돼?”
―예를 들어 평범한 인간의 유전자에 살짝 개입해 불꽃을 다루는 힘을 더해 줬다고 하자. 특수한 힘을 얻은 원시 인류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을 거듭해 끝내 완성형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염인이다.
“…….”
―나를 노려보지 마라. 나는 그분의 피조물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으니. 모두 저들의 우스운 발악의 결과물이로다.
―아아, 그래. 거기서도 물론 좋은 데이터를 얻었지.
기준이 미카의 그 말에서 마음에 걸리는 점을 발견하고, 틸라는 그 말에 얼음처럼 굳어 버리는 그 순간에.
식이 완성되었다고 믿고 한결 여유를 되찾은 신들 가운데서 얄미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번의 붉은 용의 인자는 강하지만 폭력적이고 성질이 급해 미래를 맡기기엔 적절치 않았다. 해서 ‘이번엔’ 황금 용의 인자를 발전시켰으나…….
―그들은 강하되 동시에 지혜로워 우리의 뜻을 잘 따라 이번 무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파벌 싸움에 치중하여, 서사의 벽을 초월하는 존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외신에 맞서 대륙의 안정을 오래 유지시킬 만한 종족은 아니었지.
―하여 다음에는…… 우선 저 이레귤러를 완전히 배제한 후에.
―허나 그 녀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겠지. 저 건방진 고유능력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혼을 다루는 능력에는 특기(特記)할 가치가 있다.
―그래, 다음의 무대를 주도할 종족으로는 영혼의 힘을 다루는 이들이 좋겠다.
―이레귤러를 배제하기 전 정보를 뽑아내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지.
이 순간만은, 기준은 탁월한 자신의 이해력에 원망을 품었다.
이 레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독자 문명으로 손꼽히는 ‘크림슨 드라코니안’.
그리고 레타 대륙을 주도하는 제국의 지배자 ‘골든 드라코니안’.
이 둘이 모두 신들이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종족이고, 심지어 저번, 즉 지금 세상으로 회귀하기 직전의 세상에서는 크림슨 드라코니안이 지금의 골든 드라코니안이 차지하고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 너희는…… 이런 방식을 유지하고 있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다만 가다듬으며 기준이 말했다.
―무슨 말이지, 인간?
“어차피 외신의 침입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거라면 괜한 수작질을 벌일 필요는 없잖아. 그냥 전쟁의 역사를 반복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째서 매번 세상을 새로 빚어 내고 절망을 겪는 이를 양산하는 거야?”
신들은 이번 회귀를 앞당기게 만든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기준이 증오스러운 나머지 그와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으나, 이미 그들이 주관하는 시스템의 영역을 벗어난 기준의 드높은 매력이― 달리 말하면 존재감과 기세가 억지로 그들의 입을 열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멸망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구인류, 구인류의 단점을 거세하고 새로운 특징을 부여한 신인류. 그들을 부딪치게 만들어 생산하는 에너지로 우리는 회귀를 위한 힘을 얻는다.
―그 가운데서 탄생하는 새로운 가능성, 그로 인해 강자가 축적되어 간다. 대륙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며.
―동시에 위대한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한 인큐베이터이다.
이 순간 떠올릴 생각은 아니지만, 기준은 마치 최종 보스를 만나 그 나름의 위대한 포부가 담긴 일장 연설을 듣는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딴 터무니없는 짓을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는 목소리들로 인해 쉼 없이 샘솟는 분노가 그의 마력과 영력과 함께 체내를 거세게 회전하며 이윽고 다른 무언가로 변질되어 갔다.
―물론 처음엔 이런 형태가 아니었지.
―하지만 몇 번인가의 실패 끝에 우리는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간섭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희 중 누군가는 이미 몇 번 반복된 세상에서 똑같이 소환자라는 이름으로 소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모두가 한 번쯤은 ‘레타인’이었겠지.
―혹은 레타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세상에서 왔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너희가 개량을 받지 못한, 하등한 구인류임을 증명할 뿐이니.
―인간 따위가 어째서 이레귤러가 될 수 있었는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것이 의문이야.
틸라와 미카의 대화를 들으며 떠올렸던 의문이 해결된 순간이었다.
그래, 아마도 이 세상 인류의 원류는― 바로 기준과 같은 인간이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지구야말로 이 세상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몇 번이나 변하고, 인간이 변질되고, 다른 무수한 종족이 태어나고.
그들 모두가 세상을 주도했다가, 실패작으로 낙인찍혀 그들 중 선택받은 일부만이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고.
그런 식으로 선택받은 ‘소환자’들과, 개량된 신인류 ‘레타인’들이 멋모르고 ‘빛’이니 ‘어둠’이니 ‘문명 전쟁’이니 떠들어 대며 충돌해― 다음 무대로 넘어가기 위한 연료를 생산하는.
그것이 이 대륙의 실체였다.
‘문명 전쟁의 승자가 있었다고 했던가? 굉장히 우스운 농담이네. 그들 문명이 인정받지 못한 결과가 소환자라는 입장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다 거짓말이었구나.’
자신의 인생이 쇼였음을 깨달은 트루먼이라도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그의 인생을 감독한 것은 같은 인간들이었다.
그는 탈출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이 만든 무대에서는, 필멸자들은 결코 탈출할 수 없다.
그들의 의지대로 몇 번이고 반복되는 무대 위에서― 조금씩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것 없는 쇼를 반복할 뿐이다.
“나는…… 나도 이미.”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당연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무대에 포함될 수 있었음을 기뻐하라, 너희 원시 인류 가운데 레타로 소환된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하지만 다음은 없어. 태초의 모습이기에 특별히 포함시켜 주었으나, 설마 거기서 이런 함정이 발견될 줄은.
그들의 말마따나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하며 지성이 날아간 탓일까, 자가당착의 극치를 달리는 신들의 모습에 기준은 코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너희 뜻대로만 인류를 굴리고 싶어 하면서, 거기서 정말로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겨난 가능성으로 무얼 할 수 있지?”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인류의 개량을 거듭해 언젠가 우리는 외신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계약자도 알겠지? 그게 저들이 유일하게 변명으로 삼을 수 있는 회귀의 이유야.
그때 어째 들은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기준은 자신의 옆을 돌아보며 순간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는 존재라고 여겼던 이가, 지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번 외신에게 꼬리를 붙잡히기 싫어 과거로 도망치는 주제에, 저들은 언젠가 외신을 함께 물리칠 인류를 빚어 내겠다고 변명하고 있어. 새로운 종족은 그들 나름의 시도야. 하지만 정작 계약자처럼 자신들의 영역에 도전할 만한 존재가 나타나면 이레귤러라 규정하고 지워 버리려 들지……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하찮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 증거야.
―저 남자는 달라! 존재 자체가 위험하단 말이다!
―예정된 길을 벗어나도록 만드는 존재다. 대륙 위에서 간신히 성립시킨 균형을 단숨에 무너트리는 존재!
―그런 존재를 우리는 초월자라고 부르지.
루시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신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기준은 루시가 본질적으로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어떻게? 아니, 그러고 보면…….
신들이 ‘누군가’를 지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무수한 이면을 갖고 있어. 나를 특히 싫어했던 누군가 덕분에, 굉장히 많은 조각으로 나뉘었거든.
―아니, 잠깐.
―설마…… 말도 안 돼!
―헬의 신성은 온전히 식에 쏟아 부어졌다!
―도둑질한 권능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말을, 원주인을 앞에 두고 쓰면 안 되지.
신성으로 가득한 공간, ‘식(式)’의 중심이 되는 공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소멸한 헬의 신성을 일부나마 수습한 루시가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미소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코어다.
신은 코어였다!
―너, 루시!
―다 알고 있어, 가브. 우리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잖아? 내가 선수를 쳤을 뿐이야.
그게 정말이었는지 가브는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뒤통수를 쳐? 무슨 수로?
검을 쥔 미카가 어리석은 자에게 향하는 표정으로 루시를 노려보았다.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결국 회귀하고 나면…….
―그걸 막기 위해 나선 거야. 나는 계약자에게 모두 걸겠어.
루시가 신은 코어를 흡수했다.
신위의 일부가 담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루시의 몸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다음 순간, 황금의 빛이 공간 전부를 메웠다.
―레전더리 등급 스킬 [루시]가 진명과 기억, 신성의 일부를 되찾고 태초의 모습과 비슷하게 회귀합니다. 에픽 등급 스킬 [루시퍼]를 얻었습니다. 영력(E) 10, 광마력(E) 5, 매력(E) 3이 올랐습니다.
―루시퍼가 신위를 일부 흡수하며 한층 많은 권능을 회복합니다. [루시퍼(E)]가 50레벨이 되었습니다.
루시의 등 너머로 눈부신 열두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의 그녀가 길게 늘어난 머리칼을 휘날리며 기준에게 윙크했다.
―진실을 모두 깨달은 우리 계약자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거야?
“막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해, 계약자.
“하지만 뭘 어떻게? 여태까지 몇 번이고 내가 거기에 휩쓸려 왔다면 이번에도…….”
―왜 갑자기 약한 소릴까? 잘 생각해 봐, 계약자. 저들이 말하듯 구인류의 잔재에 불과한 계약자가, 어째서 유니크 등급에 달하는 고유스킬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떻게 튜토리얼 채널의 회귀를 무시하고 악마에게 선택될 수 있었던 걸까? 계약자라는 존재에는 변함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번 무대’에서만 이렇듯 신들에게 대적하는 이레귤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머리가 징징 거세게 울리는 듯했다.
에픽 등급의, 한층 본래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간 그녀에게는 한낱 신의 분신들로부터는 느낄 수 없는 위엄과 매력이, 그녀가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 그녀로부터 오직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무한한 애정과 신뢰 속에서― 기준은 간신히 정답을 찾아냈다.
“회귀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저들이 계약자의 스킬을 단련시켜 준 거야.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종말의 순간까지 조금 더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던 언커먼 등급의 고유스킬을, 그런 능력으로도 끝까지 살아남아 회귀를 맞이한 계약자의 노력 덕분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단련시켜 준 거지.
―불가능해! 회귀가 이루어질 때마다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렇지 않기에 이레귤러인 거야.
루시가 모든 날개를 펼쳐 기준을 감쌌다.
그녀의 빛이 기준의 전신을― 정신과 영혼까지도 보듬으며 그의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그 안에서 조그맣게 들려오는 듯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단서는 모두 얻었잖아. 자신만 지켜 내는 걸로는 안 돼. 계약자의 의지로, 타자들까지도 보호하는 거야. 개인에서 비롯되어 세상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거야.
그것을 누군가는 메시아라고 부른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어느 순간인가부터 규칙적인 시계 소리가 기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귓가에도 맴돌았다.
가장 등급이 낮은 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식의 발동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신들의 귓가에까지.
그의 시계가 이 공간과 공명하고 있었다.
기준은 루시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방패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