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42)
나 빼고 다 회귀자-342화(342/356)
나 빼고 다 회귀자 (342)
Chapter 64. 선악의 저편 – 5
“어때, 어때?”
“너무 예뻐서 질투가 나네요.”
“후후, 그런 솔직한 태도 나쁘지 않네.”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저 웨딩드레스를 찢어 버릴 수 있었을까?”
“그건 첫날밤 신랑의 역할이니까 참아 줬으면 좋겠는데?”
“아냐, 역시 머리카락이 좋겠어.”
역시 종말을 앞둔 세상이라서 그런 걸까.
신부 대기실에서 한없이 흉흉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오늘의 새신랑이 넥타이를 매만졌다.
밖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또한 무시했다.
제국과 기준이 우여곡절 끝에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각국에서 그것을 어떻게든 방해하기 위해, 혹은 정보를 탐색하고 앞으로의 대응 방식을 강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있었던 탓이다.
물론 기준은 전 대륙적인 투쟁을 앞두고 있는 지금 빛의 진영에 속한 나라끼리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나서서 말릴 생각까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륙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스카이나를 통해 모든 나라의 수뇌부에 알린 후이고, 인간뿐만 아니라 대지에 발을 딛고 선 모든 이는 그 땅을 어떻게든 혼자 차지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발버둥을 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는 와전에 와전이 거듭되었을 뿐 사실이 아니다.
그 말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땅에 나무를 심는 것은 결국 그 땅의 소유권을 차지하겠다는 선전포고에 지나지 않으니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손에 쥔 자그만 쌀알 하나 놓치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들이다.
때로는 그것이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레타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들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것 같지 않았다.
쥐어패서라도 말을 듣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약자가 다른 철학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헛소리를 한다는 건 무척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지.
이젠 꼬마 모드로 돌아다니는 건 그만두기로 작정했는지, 늘씬한 성인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루시가 손가락으로 기준의 뺨을 쿡쿡 찌르며 정곡도 함께 찔렀다.
그나마 그 모습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기준이 대꾸했다.
“바로 맞췄어. 너무 긴장해서 토 나올 것 같아.”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사과나무를 심어 보겠다고 삽질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아니, 그는 놀랍게도 결혼식을 치렀을 다른 무수한 새신랑들과 같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기쁘기도 하고, 그만큼 걱정과 불안이 커지기도 했다.
그의 걱정에 타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안 그래도 비체를 편애하는 기준에게 불만이 많은 파티원들이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세상에는 자신과 비체밖에는 없는 듯했다.
어쩌면 비체도 이것을 예상하고 있어 그렇게나 결혼식을 서두르려 했던 것일까?
―계약자의 고유능력이 무색한 발언이네. 상태이상 내성은 어디로 갔어?
“결혼의 주인공은 신부니까 내 스킬이 잠깐 효력을 상실한 게 아닐까?”
―그런 립 서비스는 악마한테나 해 줘.
“지금 비체 얼굴 보면 울 것 같아서 좀…….”
―…….
이전부터 비체에게 최대한 은혜를 갚고, 그녀가 무리하지 않아도 되도록, 상처 입지 않도록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치르고, 그녀를 반려로 맞이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세상에 이 이상으로 깊은 연결이 있을까?
완전한 타인으로 태어난 둘이 서로를 위해 평생을 바친다는, 그런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만큼…… 그만큼 책임이 막중한 일이 또 있을까.
‘몇 번이고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수 형이 생각나네…….’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보다 커질 수 있음을 기준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어리석기 그지없어 보이는 배신을, 스스로도 승산이 거의 없음을 알면서도 저질렀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기준과 파티원들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무언가가 목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완전히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탓에 희생될 뻔했던 다른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여 줄 수는 없지만…….
“역시…… 대화를 좀 더 많이 해 봤으면 좋았을 거야.”
―사랑과 전쟁을 관장하는 내가 감히 단언컨대, 이성적인 대화로는 감성을 납득시킬 수 없기에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거야.
“말이나 못하면.”
용서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어제 자신이 했던 생각이 맞았다.
기준은 아마 비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리라.
스테이터스로 표시할 수 없는, 표시해서도 안 되는 어떤 거대한 의지가 심장에 단단히 새겨진 느낌이었다.
―다녀와, 새신랑.
미숙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계약자에게 축복을 던져 주며 루시가 말했다.
―다음은 내 차례인 거 잊지 말구.
* * *
침입자들을 막고자 한 제국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기준과 비체의 결혼식을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무려 황궁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의 주례를 맡은 것은 현 황제인 스카이나.
한때 비체를 배신했고 지금은 기준을 이런저런 의미로 노리고 있는 스카이나가 주례를 맡은 것이 실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으나 비체는 그 사실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고 스카이나는 비체의 미소가 무서워서라도 기준에게 헛수작을 부리지 못하고 결혼식을 진행했다.
또한 비체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는 놀랍게도 드워프 글리터토스가 만든 것이었다.
무구도 만들고 건축까지 하면서 심지어 드레스까지 만들다니!
“높은 분들이 생각하는 건 잘 모르겠어. 이 시기에 결혼식이라니.”
“용사와 제국의 관계를 증명하기에는 완벽한 퍼포먼스가 아니겠나. 그건 그렇다 쳐도 신부가 참 아름답네.”
“전대 용사 베아트리체는 미모로도 무척 유명했지. 그녀의 외모에 반해 어둠의 진영이 감히 덤비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으니까.”
“당시 그 전장에 있어서 아는데 그런 거 없고 그냥 용사가 모조리 죽였을걸.”
“두 사람의 아이가 기대되는구먼.”
제국민들 외에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한 지인 가운데에는 그라티아를 대표해 참석한 태자 렉투스도 있었다.
기준이 용사로 인정받기 전부터 활동해 온 무대인 만큼 그라티아의 대표만은 거부를 당하지 않고 하객으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
그라티아도 기준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덕에 앞으로는 제국에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물론 렉투스는 앞으로 있을 복잡한 일들보다는 당장 기준의 결혼식을 보며 손수건을 물어뜯는 예민을 어떻게든 꼬셔 내려 안달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자신의 점수가 깎인다는 사실은 애석하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써 대륙의 주인인 짐이 두 사람을 부부로 인정하니, 대륙의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식을…….”
“음?”
여러모로 대륙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새길 두 사람의 결혼식에 모인 많은 이들의 상념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와중에.
기준의 생각보다도 빠르게 식이 끝나고, 주례가 마무리 멘트를 내뱉을 준비를 했다.
“야 잠깐, 중간에 뭐가 빠졌잖아.”
다행히도 그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아리따운 드레스를 입은 비체가 순한 화장이 무색하게 눈을 치뜨며 황제에게 따졌으나, 스카이나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식을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식을 마치겠다. 모든 하객은 축복받아 마땅한 부부에게 갈채하라.”
“야! 우리 둘이 맹세의 키스 같은 거 해야 하잖아! 그리고 준이 나를 안아 들고 만세하거나 그런 거!”
―대체 어디서 그런 낡은 관습을 배운 건지 모르겠네. 세계를 못 해도 수십 번은 되감아야 할 텐데.
“대륙의 존망을 건 사태를 앞두고 그런 애정 놀음을 꼭 해야겠다면 짐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도록.”
온갖 망상을 이때다 싶어 토해 내는 비체에게 루시와 스카이나의 사나운 태클이 날아들었다.
둘은 비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만큼, 기준에게 직접적으로 수작을 걸지 않으면 비체가 드레스를 망치기 싫어서라도 날뛰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과연 비체는 자연스럽게 막을 내리는 식장 한가운데에서 난동을 피우지는 못하겠는지 눈만 부릅뜨고 있었으나 여기서 예상을 뒤엎고 행동에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새신랑 기준이었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아니, 그래도 이 자식들이 강제로 분위기를…….”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비체. 오늘은 우리 둘을 위한 날이잖아.”
“……그런가? 그럼, 뭐, 안아 줄래?”
“이리 와.”
“헷…….”
간단하게 설득된 비체가 기준의 품에 안겼다.
매력 스테이터스로는 이미 극에 이른 둘이 작정하자 폐막이고 자시고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사정없이 집중되기 시작했고.
더할 나위 없이 부담스러운 상황임에도 기준은 아랑곳 않고 비체에게 키스했다.
고유스킬 [기준]의 주인답게 상황을 억지로 바꿔 버린 것이다!
―계약자가…… 완전히 각성해 버렸어……!
“저게 준이 늘 말하던 위버멘쉬인가 뭔가 하는 그거야? 확실히 초인적인 뻔뻔함이긴 한데.”
“니체 선생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어요.”
기겁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환호하며 박수를 쳐 주는 이가 훨씬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죽어도 못했을 일이지만…… 이제 와 새삼 예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일일이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
기준은 자신의 어깨 위에 끔찍하게 무거운 책임감이 얹히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는 그것을 가장의 무게라고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의 책임감이라고 부르겠지만, 기준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닻으로 느껴졌다.
‘이래서야 외신 따위를 상대로 흔들릴 수는 없겠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기준은 비체를 안아 든 채 하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식장을 나섰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보랏빛?
“비체, 저거 뭐야?”
“외신들의 힘이네.”
그의 품에 안긴 채 양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비체가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염된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신성력하고도 비슷한 건데, 좀 더 짜증 나지. 경계에서 싸울 때는 많이도 느꼈어.”
“……외신들이 직접 오는 거야, 지금?”
“에이, 자기도 참. 그랬으면 이미 우리가 싸우고 있었겠지. 저건 그거야. 대기 중의 오염 농도가 높아진 거니까…….”
프런티어가 그만큼 개망했다는 얘기지.
비체의 말에 기준은 다소 안도했다.
“그럼 하루 이틀로는 어떻게 안 되겠네.”
“그치, 서둘러 봤자 이미 프런티어는 망했을 테고, 조금 늦게 간다고 외신들이 결계를 뚫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일단 신경 끄자.”
“그럼 어디로 갈까?”
“에이, 알면서.”
비체가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웃음을 치며 발가락을 뻗어 숙소를 가리켰다.
기준은 웃으며 그녀의 뜻에 따라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둠의 진영의 움직임이 관측된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후의 일이었으나, 프런티어 사태에 비하면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탓에 사람들은 감히 신혼부부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