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Else is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86)
나 빼고 다 회귀자-86화(86/356)
◈ 나 빼고 다 회귀자 (86)
Chapter 17. 내가 보스다 – 1
―똑똑
기준이 루시로부터 이번 사태의 전모를 전해 듣고 한창 심란해하던 그때, 그의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준, 한잔할까?”
물론 야밤중에 그를 찾아올 만큼 대담한 이는 그의 파티원 가운데에선 신틸라뿐이었다.
외부 상황만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친절하게도 알려 주는 그녀의 등장에 머리를 싸매 쥐며 대꾸하는 기준.
“또?”
“너랑 마시고 싶어. 응?”
기준이 아니라 그 누가 됐든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에는 이길 수 없을 터였다.
물론 그녀의 유혹에 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녀를 지배하는 미혹을 벗겨 내겠다는 의도에서였지만.
결국 오늘도 기준은 신틸라와 함께 숙소의 3층 바를 찾게 되었다.
사실 루시의 얘기를 듣고 답답했던 차에, 술을 마시자는 그녀의 제안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오늘은 방해를 안 받고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어.”
“다른 애들은, 무슨 수라도 썼어?”
“쓰러트렸어.”
기준은 아직 눈앞에 놓인 술을 안 마시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시는 중이었더라면 그대로 그녀에게 뿜어냈을 테니까.
“쓰러트려?!”
“대련했어.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확실하게 서열을 정리하자고 제안했거든.”
루시가 있었다면 굴러들어 온 돌 주제에 염치도 모르고 나댄다고 한마디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엔 루시가 없다.
기준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본 신틸라는 양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크게 다치게 한 건 아냐, 그냥―― 움직일 기력이 안 남을 때까지 상대해 줬을 뿐이지. 세 명 다.”
“세 명?!”
우니카와 지혜까지 포함해 대련했단 말인가!
기준은 새삼 평소의 신틸라가 얼마나 능력을 자제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살의만 담지 않을 뿐 그와 대련할 때도 전력에 가까운 힘을 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
“들어 봐. 세 명 모두 내가 너한테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야 그렇겠지.
그렇게 인간 출신이라고 주장해도 믿어 주질 않는데.
기준은 눈앞의 술을 마시며 나직이 신음했다.
역시 그의 요리로 사람의 정신을 치유한다는 것은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준은 믿어 줄 거지? 난 널 찾아낸 그 순간부터 내 남은 평생 널 지키겠다고 맹세했는걸.”
“그건 네가 날―― 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건.”
당연한 얘기다.
애초에 신틸라가 기준을 찾은 이유부터가 그를 염인이라 생각해서였으니까.
“다른 애들은 그래서 널 어려워하는 걸 거야. 너와 나 사이의 연결 고리, 그걸 제외하면 너와 이 파티를 잇는 끈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심지어 그 연결 고리는 거짓이다.
그 사실을 누구나가 알고 있는데, 오직 신틸라만이 모르는 척하고 있다.
신틸라를 이 파티에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허상, 거짓뿐.
그러니 과연 파티원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끈…….”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고.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잖아.”
기준은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 애쓰며 술잔을 내밀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잔을 들어 그의 것과 맞부딪친 신틸라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의 사소한 스킨십마저 그녀에게 있어선 자신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내가 염인이 아니라도, 우리가 이렇게 술 한잔하면서 만든 추억이 훼손되는 건 아니야. 그치?”
“하지만 준, 레타 대륙은 결국 같은 종족이 아니면 믿을 수 없어. 여러 종족의 화합을 표방하며 만들어진 종족 길드 연합에서 무슨 짓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너도 좀 더――.”
잘 알지.
신틸라보다 더욱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신틸라, 내겐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근거로 어떤 짓을 하든 중요하지 않아.”
기준은 단숨에 잔을 비우곤 신틸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내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거야. 그러니 지금 확실히 말해 두건대―― 내게 있어 동료의 종족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네가 동료라고 믿는 소녀가 사실 네 피를 호시탐탐 노리는 흡혈귀에 불과하다고 해도?”
“조금도 상관없어. 로라가 날 얼마나 진심으로 따르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데. 본능을 탓할 수는 없지.”
물론 좀 놀라긴 했는데.
피 정돈 말하면 줄 수도 있는데, 어쩌면 로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느라 감히 그에게 부탁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먼저 말을 꺼내 봐야겠다, 하고 생각하며 기준은 신틸라와 마주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신틸라.”
“우린 같은 종족――.”
“우리가 다른 종족이더라도.”
기준은 신틸라의 말을 다소 과감하게 끊으며 말했다.
“넌 이미 내 동료야. 사실 처음엔 조금 짜증 났지만――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았거든.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고.”
“…….”
“네가 나를 더는 염인으로 부르지 않게 되어도, 나는 네 동료로 남고 싶어. 넌 어떻지?”
“하지만, 우린―― 같은 종족이라니까…….”
대답하는 신틸라의 목소리는 조금 작았다.
그래, 그동안 안 된 게 술자리 한 번에 해결될 리가 없지.
부디 마크 트웨인 선생님께서 우리를 지켜봐 주시기를.
기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추가 주문하곤 말했다.
“그럼 같은 종족이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기억해 줘. 우리를 진정한 동료로 만드는 끈, 종족을 초월해 서로를 위하게 만들어 주는 인연을 만들어 보자. 응?”
아니, 잠깐.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기엔 아직 취기가 좀 부족했던 것 같은데.
그가 쓰읍, 입맛을 다시며 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신틸라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노력은, 해 볼게.”
“고마워.”
“이미 너와 내 인연은 확고하지만.”
“그럼 그냥 내가 너랑 더 친해지고 싶은 거라고 생각해.”
“그건 나도……!”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신틸라가 반색하며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으려는 것을 막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동료애를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과한 반응을 보이던 건 예민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지혜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남자 친구는 한 번도 안 생긴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또 살짝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은 역시 예민이 한때 기준의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일까.
아, 다행히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술이 도착했다.
“역시 여기 있었네! 저도 갓 파더 한 잔!”
“후우, 후우, 안 늦었다…….”
“준 님, 무사하셨군요……!”
덤으로 지혜와 우니카, 로라도 도착했다.
이쯤 되면 긴도 끼워 줄 법한데 여전히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이 다들 너무하다 싶었다.
그건 그렇고.
“움직일 기력이 안 남았다며?”
기준이 놀리듯 하는 말에 신틸라는 정색하며 대꾸했다.
“다음엔 그다음 날 아침까지 못 일어나도록 해 줘야겠어.”
* * *
약속된 2주는 쏜살같이 흘러 세력전을 치르는 날이 다가왔다.
나비냐와 루시는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끼리 해내는 거야. 할 수 있지?”
―키이이!
아침.
기준은 마스크를 확실히 쓰고는 어깨에 앉은 우르를 쓰다듬으며 숙소를 나섰다.
일행은 그런 기준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따랐다.
아직 루시가 복귀하지 못한 것도, 종족 길드 연합의 뒤가 구리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는 만큼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빠, 정말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너희 몸으로 직접 겪어서 알잖아.”
잔뜩 찌푸려진 지혜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 주며 기준이 씩 웃었다.
팔다리를 모두 부러트릴 기세로 방패를 휘두르던 땐 악마처럼만 보였는데 지금은 또 천사처럼 보여, 지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느라 마음속으로 다시 목수의 이름을 염불처럼 외웠다.
“내구 스테이터스 등급 성장 축하한다. 근력은 아직 커먼이지만 이제 슬슬 레벨 업이랑 종족 등급 성장을 생각해 봐도 되겠어.”
“2주 동안 오빠가 절 얼마나 굴렸으면 성장했겠어요? 설마 저도 레벨 업 한 번 없이 스테이터스 등급이 성장할 줄은 몰랐다구요!”
“고맙지?”
“고마워요!”
역시 솔직하다니까.
킥킥 웃으며 돌아서는 기준을 이번엔 신틸라가 불러 세웠다.
“준, 난 아직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너는 위험할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번 의뢰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상해.”
“이거 내가 영 믿음을 못 주네.”
쓴웃음을 지은 기준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신틸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똑바로 지켜보고 있어. 한 대도 안 맞고 다 끝내 버릴 테니까.”
“……그래, 똑바로 지켜보고 있을게.”
“좋아.”
기준은 그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거짓말, 하고 중얼거렸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를 똑바로 본 적이 없는 주제에.
만난 지 고작 3주도 안 된 그에게, 둘 사이에 감정을 교류할 만한 일도 없었는데도 단지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착하는 그녀.
기준을 향하는 그녀의 모든 감정과 행동은 모두 그가 염인이라는 착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냉정히 말하면―― 신틸라는 그를 똑바로 보고 있기는커녕, 아직 그와 만나지도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래.
신틸라를 지배하는 혼몽(昏懜)을, 기준은 아직 벗겨 내지 못한 채였다.
“거짓말…….”
그때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뒤에 있던 로라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다행히 신틸라는 기준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어 듣지 못한 모양이지만―― 기준은 똑똑히 들었다.
“읏?!”
기준과 시선을 마주친 로라는 자신이 아니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내가 빤히 드러나는 그 모습에 기준은 무심코 웃어 버리고 말았다.
“로라, 신틸라랑 친하게 지내 줘.”
“네, 넵! 알겠습니닷!”
“난 자신 없는데?”
“같은 파티잖아.”
“……흥.”
로라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했을 텐데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역시나 두 사람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로라가 흡혈귀이니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도 신틸라였나.
신틸라의 증세를 아직 호전시키지 못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번 의뢰가 끝나면 파티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을 듯했다.
“그럼 다들 가자. 그래도 내 파티원이라고 특등석을 마련했다는데.”
“세력전은 몇 시간이나 진행될까요? 팝콘을 더 튀겼어야 했나.”
“100그램에 400칼로리――.”
“요즘 운동 많이 하니까 괜찮거든요! 나쁜 오빠야 아주!”
이번 세력전이 펼쳐지는 장소는 코르의 대귀족이 관리하고 있는 유적.
듣자 하니 평소 세력전과는 달리 오직 이번 세력전만을 위해 귀족과 협상해 얻어 낸 장소라는데, 디맨더의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된 지금은 그것조차 수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원거리 저격은 물 건너갔네요.”
“지혜 너 그걸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구나…….”
“그야 파티원이니까요.”
유적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이전 루스벤과 함께 찾았던 유적과 비슷하게 게이트였다.
세력전에 참가하는 세 개의 종족에서 전사를 각 300명씩 차출해 총 900명이 게이트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번 세력전의 하이라이트―― 보스 역할을 맡은 기준은 그들보다 먼저 들어가 지정된 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준 씨!”
유적으로 들어가는 게이트 앞에서 그를 맞이한 인간 대표, 크리스티앙이 환한 미소와 함께 그를 반기며 악수를 청해 왔다.
기준이 그의 손을 잡아 흔들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후우, 염인의 열기가 듣던 것 이상이군요! 혹시 염인이 아니라 그 이상 가는 종족이신 것 아닙니까?”
“간혹 더 뜨겁게 느끼는 이들이 있더군. ……넌 아닌 모양이지만.”
기준은 피식 웃으며 영문 모를 말을 하곤 그에게서 원반 형태의 마도구를 받아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일정 이상의 충격을 입으면 그를 안전한 곳으로 전송시켜 줄 전송 장치이자, 동시에 각 종족이 그에게 가한 충격을 측정할 딜 미터기이기도 했다.
그 수치를 기준도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
“이 장치가 발동했을 때 전송되는 장소는 어디지?”
“바로 이곳입니다. 연합원들을 배치해 둘 테니 장치를 반납해 주시고 귀족분들한테 인사라도 한 번씩 해 주시면…….”
“귀족과의 인맥을 얻어 나쁠 건 없으니까.”
“역시! 말이 통하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전송 장치에 별다른 수작을 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마법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장치를 조작해 그에게 해를 입히려 했을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역시…….’
기준의 눈이 깊어졌다.
“그럼 동료분들은 관람장으로 가시죠! 유적 내에 배치된 영상 송출 장치를 통해 실시간으로 각 종족의 투쟁을 관람할 수 있을뿐더러, 준 씨를 전속으로 담당하는 장치도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정된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거야.”
크리스티앙의 말에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신틸라.
그는 하하 웃으며 물론 그럴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힘내요!”
“준 님, 응원하겠습니다.”
“준 님……!”
“다녀오십시오, 준 님.”
“준.”
저마다 강한 의지를 담아 말을 건네 오는 동료들에게 자신도 같은 의미를 담아 손을 흔들어 준 후.
뒤로 돌아서며 장치를 가슴팍에 부착하고는, 망설임 없이 게이트 너머로 뛰어들었다.
그곳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었다.
기준이 착용한 전송 장치를 추적해 온 것인지, 하늘을 둥둥 떠오는 영상 송출 장치…… 카메라가 보였다.
―작전 시작. 위치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래. 바로 이동하지.”
통신 장치를 겸했던 걸까, 전송 장치를 통해 들려오는 연합의 안내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장 나무를 가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위치해야 할 곳은 이 유적에 위치한 거대한 화산의 최정상.
유적 안에 화산이 있는 것만도 깜짝 놀랄 일인데 심지어는 시시때때로 분출하는 활화산이라고 한다.
분화구에는 시뻘건 용암이 가득 차올라 용암 호수를 형성했다고 하니 어지간히 열 저항력이 강하지 않고선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할 터.
그야 달이 떠오르고 신수가 나타나 그것을 삼키는 유적도 다녀왔으니 이제 와 화산 정도로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내 컨셉에 맞춰 준 모양이야. 그렇지, 우르?’
―키힛!
용암 호수를 기대하고 있는지 우르는 계속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실은 근 2주간 루시의 방해도 없이 기준을 독점할 수 있었던 덕에 쭉 기분이 좋은 상태였지만.
애교를 부리는 우르를 얼러 주며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던 탓일까, 기준이 이상을 눈치챈 것은 위험이 코앞까지 닥친 뒤였다.
―카오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진 직후.
뿌리째 뽑혀 날아든 통나무를 피해 사뿐히 몸을 날리며 기준이 전송 장치에 대고 확인했다.
“저건 뭐지?”
―유적 안에 아직 처리되지 않은 괴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약서에 나와 있는 사항입니다.
대답이 심히 매몰차다.
그야 계약서에는 ‘세력전의 참가자들을 방해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에 공격당할 수 있음.’이라는 문구가 있기는 했다.
그래, 이런 정도의 장난질이라면야.
―크오오오오오오!
적의 정체는 바로 오우거였다.
거의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근육질의 몸집, 어지간한 공격은 박히지도 않을 것 같은 두꺼운 가죽, 산이라도 부술 수 있을 듯한 거력을 지닌 지상 몬스터의 제왕.
명실상부 유니크 등급의 몬스터.
“역시.”
기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바닥을 박찼다.
―크아하아아앗!
기준이 정면으로 덤벼 오는 것에 분노한 걸까, 오우거가 노란 눈을 희번덕거리며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러 왔다.
그러나 기준은 왼손의 방패로 그 주먹을 찍어 누르며 사뿐히 도약해, 단숨에 놈의 팔을 뛰어넘고는 놈의 거대한 머리통을 마주했다.
―캬악?!
눈 깜짝할 사이 자신의 눈앞으로 튀어 오른 그에게 놀랐는지 놈이 뒷걸음치려 하지만, 놓아 줄 생각은 없다.
있는 힘껏 뒤로 당긴 오른손의 방패에 화르륵, 우르의 불꽃이 피어난다.
광 마력을 연료로 삼아 빛과 위력을 더한 불꽃은 실시간으로 정련되어 초고열의 송곳니로 화했다.
핏빛에 가깝지만 보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거대한 송곳니.
―유적에 들어와 칭호 [배후 던전의 공략자(L)]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와 스킬의 효과가 20% 증가합니다.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적을 상대로 하고 있습니다. 칭호 [한계 초월자(L)]의 효과가 발동해 극적으로 긍정적인 보정을 얻습니다.
―자신이 만든 스킬을 다루고 있습니다. 칭호 [스킬 크리에이터(U)]의 효과가 발동해 스킬 능력이 20% 증가합니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적을 상대합니다. 칭호 [자이언트 킬러(U)]의 효과가 발동해 모든 능력이 15% 증가합니다.
적이 보스급이 아닌 탓에 최후의 용사의 효과는 발동하지 않았지만.
―콰아앙!
놈의 목을 뜯어내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보다 거대하고 등급이 높기까지 한 적을 단 일격에 처리했습니다. 많은 양의 경험치를 얻습니다. 칭호 [자이언트 킬러(U)]에 긍정적인 보정이 주어집니다!
―[불의 정령술(R)] 스킬의 레벨이 86이 되었습니다. 성장이 가깝습니다.
“후우.”
메시지를 확인하며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기준이 옅은 숨을 토해 냈다.
그의 활약에 감탄했는지 전송 장치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상관하지 않는다.
“어디, 그렇게 대박이라는 오우거 힘줄을 어디 채집해 볼까.”
어디 그뿐인가, 오우거의 뼈가 그렇게 단단하고 날카로워서 무기로 쓰기에는 그만이라던데.
가뜩이나 만나 보기도 힘든 희귀 몬스터인 오우거와 유적에 들어오자마자 조우할 수 있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혹시 이 유적에 있는 오우거들 전부 내가 잡아도 될까?”
―그건…… 세력전을 위해, 조금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떨려 나오는 안내원의 목소리.
기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자제해 볼게.”
너희가 자제한다면 말이지.
세력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기준의 딜 미터기는 물론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