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olution, how far had you reach? RAW novel - Chapter 12
진화, 어디까지 해봤니? – 12
눈앞에 인간 여섯이 시꺼멓게 탄 채 가지런히 놓여있다.
진화하고 온 사이에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주위를 둘러보니 껌껌한 가운데 죄다 쪼그려 앉아있거나 벽에 기대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잠깐.
박살난 셔틀과 시체, 그리고 좌절이라. 뭔가 느낌이 오는데.
좀 더 주변을 살펴보았다.
셔틀 한두 개를 제외하면 전부 불이 꺼져있고 항상 힘차게 돌아가던 발전기도 침묵하고 있다. 연료 상황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딱 보니 저기 있는 시체들이 남아있는 연료를 가지고 셔틀을 작동시켰다가 이 난리가 났다는 건데······. 항상 연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인간들이 제 발로 동아줄을 걷어차는 짓을 했을 리가 없으니 시체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을 거라 보면 되겠군.
이런 외계 행성에서 아군의 트롤링으로 죽을 위기라니, 나였어도 좌절했겠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나?
*
인간들의 진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한정되어있던 자원이 바닥나니 서로 감정이 격해진 것 같다. 얼마 안 되던 인간들이 또 줄었다.
진지 바깥에 시체들이 또 불타고 있는 것을 보니 우습기만 하다. 저러면 본인들이 돌아갈 확률만 줄어들 텐데.
그나마 내가 식량과 물을 마련해줬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죄다 굶어죽었을 것이다. 어디서 났냐고? 식물 군집에 사는 생물체들에게서 얻었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이면 충분하잖아? 독성만 제거하고 줬으니 나머지 영양소도 거기 안에 다 있겠지.
연료를 사용한 발전기는 방치되고 요새는 인력을 이용해서 발전하고 있다. 셔틀의 수리는 꿈도 못 꾸는 모양새다.
확 그냥 다 죽으라고 내버려둘까 싶었지만 애완동물을 기르는 마음가짐으로 한 손 보태주기로 했다. 나야 어차피 지금까지 살 곳만 마련해주고 방관하는 편이었으니까.
나는 발전기를 살피다가 촉수를 펼쳐 그것을 더듬었다. 이 정도 크기로 여기 있는 셔틀 전부를 커버했단 말이지.
안 그래도 새로 얻은 테크를 실험할 필요가 있었는데 딱 공교롭게도 이런 사건이 터져버리네. 나는 둥지로 돌아가서 뭔가를 해 볼 생각을 하다가 만든 걸 다시 여기로 가져오는 게 번거로울 것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요컨대, 지속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장치가 있으면 된다는 거잖아? 나는 과학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내 방식대로 발전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테크의 ‘가능성’을 한번 믿어보자고.
내가 분주히 움직여 실험재료들을 가져와 진지 안에 쌓아두자 인간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테크의 생성은 막 뭐랑 뭐를 조합한다고 짠하고 생기는 게 아니다. 나도 무수히 많은 진화를 겪으면서 시도를 안 해본 게 아니거든.
지금까지 했던 실험은 전부 실패였지만 결국 언젠가 성공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내 성장은 점점 더뎌지는데 상위 테크로 가는 길이 전부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이 행성의 괴물들을 전부 한 종류씩 맛 볼 생각이 아니라면 알아서 개발해야만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시도해본 경험이 있어서 시작할 때 막막한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일단 재료들을 삼켜 체내에서 변환시킨 뒤 다시 뱉어 조합했다. 허허, 제대로 된 손가락이 생기니 일이 수월해서 좋구먼.
건설 테크와 전기 테크를 중심으로 다른 테크를 끌고 와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것이 이번 계획의 핵심이다. 테크들을 융합해서 그 위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옆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게 최종 목표라는 말이다. 어찌 보면 건설 테크의 생성 원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
테크를 분해해서 뜯어보는 건 정말 단순한 작업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계를 다시 원 상태로 되돌리는 거니까. 기본적인 독이나 전기 같은 테크는 당연히 분해가 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 실패했던 원인은 보고 참고할 예시가 없었다는 건데 이번엔 건설 테크라는 기출문제가 떡하니 나와 있네?
기존에 나온 문제만 열심히 풀어도 실전에서 80점은 기본으로 먹고 들어간다 이 말이야. 나머지 20점은 임기응변, 응용의 영역이다.
만들고 연결하고, 만들고 연결하고. 안 되면 다시 만들고.
뚝딱딱 뚝뚝딱!
결국 나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목표했던 테크를 조합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내 눈앞에 놓여졌다.
파지지지직!
괴수의 시체를 에너지로 삼아 그것을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초특급 외계 기술 장치다. 효율이 개똥망이라 시체를 닥치는 대로 갈아 넣어야 하기는 한데 그건 내 알바 아니고.
캬, 제가 이걸 만들어냅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늘에서 보고 계시죠? 아, 이쪽 엄마 말고.
*
‘???’
이블 원이 발전기를 만들었다.
루카스와 대원들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진지 내부의 모든 셔틀에 불이 들어왔다.
내게 이블 원이란 이름을 알려준 여자가 발전기를 가지고 뭔가를 측정하더니 그대로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좋니?
인간들이 좌절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흐뭇해졌다.(코쓱)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테크들도 만들어볼 수 있을 테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게 이런 거겠지.
나는 인간들에게 감사인사를 받으며 발전기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는지 지켜보았다. 중간에 픽 하고 꺼져버리면 갑분싸되잖아.
계속 보고 있으니 뭔가 부족해보이네.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큭, 이것이 내 글 구려, 아니 내 기술 구려 병인가?
뭔가를 만들었다는 뿌듯함이 사라지고 나니 다른 것도 만들어보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졌다.
나는 뭐라 하며 붙잡는 대장 아저씨를 무시하고 둥지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새끼 쿠파가 하나 보여서 납치해왔다.
반항하는 녀석을 독으로 제압해 진화 전용으로 만든 지하실에 가둬두었다. 광물 축적과 변환에 대해서 연구를 더 진행해볼 참이다.
나는 가시 촉수를 꺼내 놈 앞에서 흔들어보였다. 자 따끔해요, 따끔!
우엉!
얼마 후, 풀려난 쿠파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힘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른 쿠파들과 집게, 지네를 거쳐 공략 예정이었던 외눈 슬라임과 새머리 와이번이 차지했다. 둘 다 쉽게 잡을 수 있어서 나중에는 아예 놈들의 소굴 근처에다 작업장을 차려서 실험을 진행했다.
하도 그 짓을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놈들이 영역을 포기하고 튀어버렸다. 원래부터 다 쫓아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충분한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많이 있지만 이 시점에서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포탑 분야였다. 액체 괴물의 상위 분리 테크와 와이번의 에너지 압축 테크까지 얻고 나니 객관적으로 봐도 쓸 만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근방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고 판단한 나는 줄곧 동굴에 틀어박혔다. 원래 진득하니 앉아서 집중하는 성격이 아닌데 목표가 생기니 배고픔도 잊고 몰두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활용하는 건 다른 영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발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딱 거기에 맞는 테크를 만들어서였다는 사실도.
이거 쉽지가 않네. 새로 얻은 테크를 결합해서 딱 작동시키면 될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덕분에 내 동굴 안쪽은 실패한 포탑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망하긴 했어도 이것들을 한꺼번에 작동시키면 엄청난 위력이 나올 것이다.
각설하고, 나는 포탑 개발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답이 안 보여서가 아니고 인간들이 셔틀 수리를 마치고 연료까지 제작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것저것 만드는 동안 시간이 꽤 흘렀던 것 같다. 발전기만 만들어줬는데 다 알아서 잘 했구먼.
이번에 시험 비행을 한다고 한다.
하도 수선해서 꼬질꼬질하게 변한 장비를 입은 채 씩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대장 아저씨는 관리도 안 하는지 수염이 원시인처럼 제법 덥수룩하다.
이 꼬라지로 보냈다가 또 저번처럼 박살나는 거 아닌가 몰라.
부우우웅-!
엔진이 힘차게 작동을 시작하고 분사구에서 열이 뿜어져 나오자 기대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아직까진 멀쩡해 보이는군.
마침내 셔틀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음속을 넘어 소닉붐을 일으키며 우주로 쏘아져나간다. 그것이 작은 점으로 변해 진홍색 하늘 너머로 사라지자 인간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공한 거야?”
“기다려봐. 저쪽에서 결과를 알려줘야 하니까.”
그리고 잠시 후, 지상에 있는 수신기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인간들이 환호하는 것으로 보아 성공했나 보다.
이제야 돌아가는 건가? 나는 보금자리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쪽 동굴은 너무 노출되어있어서 불안했거든.
짐을 정리하는 인간들을 담담하게 보고 있으니 대장 아저씨가 다가왔다. 아까 전까지 마구 기뻐하던 것과 다르게 복잡미묘한 표정이다.
“빚을 졌네, 이블 원.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적대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별의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왜, 헤어진다고 하니 서운하나? 인간들이란 참 감성적이라니까. 어디까지 감정이입을 하는 거야?
그래도 나는 잘 가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장 아저씨가 환하게 웃었다.
모래폭풍이 불던 날.
베어그릴스 같이 생긴 아저씨와 따까리들이 떠났다.
*
아데카 행성 상공,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칠흑 같은 우주를 보며 루카스는 감격에 젖었다.
장장 1년 반의 고행을 마치고 드디어 귀환하는 것이다. 총 열 대로 출발했던 수송선은 두 대로 줄고 인원도 마흔 남짓하게 되었지만 저 지옥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는 장비의 손목 부분을 열어 가족들의 사진을 보았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마틸다가 그것을 보고 슬쩍 웃었다.
“돌아가면 애들이 많이 컸겠네요.”
“기지로 복귀한다고 해도 본국으로 가려면 또 한 세월이니. 아마도 그렇겠지.”
“어머, 전역하시려고요?”
마틸다의 물음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지쳤다. 아끼던 부하들이 죄다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감정 소모가 심해서 조금만 더 있었으면 다 같이 미쳐버렸을 것이다.
정신력이 강하기로 정평이 난 그조차 수십 번 자살을 고민할 정도였으니 일반 대원들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물론 돌아가면 가장 먼저 머틀 그 자식부터 죽여 놔야지.”
기껏 살려서 돌려보냈더니 기지로 도착했음을 알리고는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지원군을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것은 대원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아마 루카스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다른 대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아틀라스 행성 – 섹터12
제1전진기지.
셔틀에서 내린 루카스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기지는 완벽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대기권에서부터 보였던 무너져 내린 기지는 직접 보니 더욱 참혹했다.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건물의 잔해 사이를 뛰어다니며 부르짖었다.
“머틀-? 핸더슨! 미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 뭔가 돌아오긴 했다.
그게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을 뿐이다.
“…(알고있는생물체다굉장히오래살아남았다)”
“…(육질의상태는좋지않아보인다살과근육이단단히붙어서딱딱하다)”
“…(딱딱하게말라붙은살점은무슨맛일까)”
거대한 오르그를 보며 굳어버린 루카스의 코앞으로 그것이 스르르 미끄러져왔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겹눈이 어느 순간 그에게 딱 고정되었다.
“…(맛보기는한입이면충분)”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