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olution, how far had you reach? RAW novel - Chapter 16
진화, 어디까지 해봤니? – 16
내 분노의 발길질에 기계가 찌그러지며 튕겨나갔다.
그것은 한쪽에 놓여있던 셔틀과 부딪히더니 푸슉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동굴로 들어와 그 안을 둘러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저 전투기계가 내 포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을 마음대로 보금자리 삼았다는 것도.
포탑? 백날 쏴봐야 내 보호막도 못 뚫는다.
바닥에서 버르적대는 기계를 그대로 밟아주자 아까부터 삑삑 소리를 내던 셔틀에서 기다란 로봇 팔이 튀어나왔다.
세 개 달린 손가락 위로 원형의 플레이트가 얹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것도 박살내려고 할 때 플레이트 윗면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순간 섬광 공격인가 싶었지만 그냥 홀로그램이었다.
홀로그램이라.
내가 생전에 살던 지구에선 볼 수 없었던 기술이다.
아예 없었다는 게 아니라 돈이 많이 나가는 기술이었다는 이야기다. 평범한 서민이었던 내게는 먼 미래의 기술이나 다름없었다.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끝내 분노를 억눌렀다.
떠오르는 화면을 보니 영상이 흘러나왔다.
*
1월 20일 13시.
사령관은 어째선지 잔뜩 화가 나서 머신을 날려버렸습니다. 반파된 머신은 그대로 행동불능에 빠졌습니다.
제가 144일 동안 공들여 설계해서 만든 작품을 저렇게 망설임 없이 부수다니 정말 잔인하군요. 천천히 대화를 해보려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같은 오르그를 죽여서 화가 난 걸까요.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록물에는 오히려 오르그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되어있습니다만.
연산회로가 달아오르려는 것을 식히고 함선 내부에 장착된 영상 수신기를 끄집어냈습니다.
빨리 멈추게 하지 않으면 머신이 박살나기 때문에 서두릅니다.
급하게 이전 사령관과 저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상을 재생하니 그때서야 이쪽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상보다 수신기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만.
사령관의 성격을 고려하여 영상을 재생하면서 짧게 편집까지 마쳤습니다.
눈의 미묘한 떨림까지 스캔한 결과 사령관은 제가 송출한 영상의 88퍼센트를 인지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루카스 오델러가 남긴 기록들부터 시작해 제가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가 사령관의 얼굴 앞에서 복종을 맹세하는 그래픽까지. 필요한 부분만 딱 짚어낸 서사를-.
잠깐. 지금은 왜 때린 건가요.
아.
더 짧게 하라는 말씀이군요.
*
지금 내게 영상을 보여주고 있는 존재가 인공지능이며 인간들과 같이 이곳에 왔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런데 잡설이 너무 길어! 궁금하지도 않은 인간들 기록은 왜 보여주는 거냐.
깡!
셔틀의 전면을 손바닥으로 후려갈겨주니 전조등이 깜박이며 빛을 마구 내뿜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더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쓰러져 있는 나를 보호하려고 저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니 화풀이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냥 부숴버려도 상관없겠지만 해봐야 딱히 얻는 것이 없다. 생물도 아닌 걸 먹는다고 테크가 늘어나는 게 아니니까. 녀석이 죽인 쿠파 놈들이야 어차피 알아서 다시 늘어날 테고.
어쩌면 그 검은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대한 울분을 이 녀석에게 토해낸 걸지도 모르겠다.
고물 포탑이든 쿠파들이든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었을 텐데······ 어쩌겠어, 여긴 약한 놈은 잡아먹히는 세상이라고. 꼬우면 세지는 수밖에 없다.
폭력을 정당화하고 나니 조금 내 자신이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싫으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내가 전생에도 이런 사람이었겠어? 여기서 내가 인간들에게 해준 것을 보라고!
······막상 생각해보니 별 거 없었네. 결과적으로 걔네들 거의 다 죽었잖아?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대장 아저씨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떻게 생겼었지? 생존 잘하던 유명인 닮았던 것 같았는데. 이름, 이름이······.
탁!
그래, 에드 스태포드였다! 근데 그 아저씨 머리가 매끈했었나? 아니면 에드 쪽이 풍성했던가.
떠올리기 귀찮으니까 둘 다 매끈했다고 하자.
내가 쓸데없는 고민에 잠겨있자 인공지능은 다시 영상을 띄워 내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CG로 구성된 괴물이 셔틀을 마구 걷어차고 있다.
보아하니 왜 때렸냐고 묻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는 저렇게 많이 때리지 않았거든? 이 자식이 날조를 하네.
설명하는 거야 별로 힘든 것도 아니고 이 인공지능은 제법 부려먹을 구석이 보인다. 혼자서 수리하고 만들고 전력공급까지 다하는 걸 보면 손이 많이 가는 녀석도 아니고. 인간들보다 백 배는 쓸모 있겠어.
뭐, 공짜 노예라면 언제든지 좋다.
나는 촉수를 뻗어 포탑 중 하나를 가져와 셔틀 앞에서 작동시켰다.
이게 무슨 포탑이었더라.
*
오후 1시 반.
사령관이 화가 난 원인을 파악했습니다.
제가 실험 자료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완성품이었던 모양입니다. 불량품이기는 하지만 오르그들이 쓰는 특수 에너지를 사용하니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촉수들이 튀어나와 작동시킨 사령관의 얼굴을 둘러싸는 것을 보고 도와줘야 하나 싶었지만 사령관은 입에서 불을 내뿜는 것으로 없애버렸습니다. 스캔된 정보에 따르면 순간 온도가 섭씨 15000도에 달하는군요.
기록되지 않은 능력인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혼자서 포탑을 연구, 제작한 오르그는 어디에서도 목격된 바가 없습니다. 방벽을 쌓아 요새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 대체 어떤 진화과정을 거친 걸까요.
이전 사령관이 왜 이블 원을 언급하며 인간 혹은 그 이상의 지성을 지녔다고 평했는지 알겠습니다.
이 정도의 지성이라면 그의 분노는 지당합니다. 자신의 제작물을 부수고 그것을 다른 것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으니까요. 사령관이 방금 머신을 박살냈을 때 제가 화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도 사령관이 제 실수에 대해서 더 질책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방금 전 보여준 능력만 봐도 머신 수백기가 있어도 당해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제가 머신을 수리해도 되겠는지 묻는 영상을 띄우자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습니다. 저 행동은 이곳에 상주했던 인간들을 보고 배운 것 같군요.
*
인공지능이 기계의 수리를 시작했다.
내가 만든 포탑을 더 이용할 수 없으니 주변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열심히 깨작거리고 있었다. 조금 위축된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다시 동굴 밖으로 향했다.
아까는 기계와 쿠파들이 싸우는 것을 보느라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동안 방치되었던 요새 내부는 가관이었다.
얼마나 날랐는지 광석이 쉘터를 가득 메우다 못해 방벽 뒤쪽까지 쌓여있다. 이 정도면 저기 동굴 안에 있는 셔틀도 만들겠다, 이 자식들아!
대체 얼마나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거야?
보기만 해도 답답해지는 광석 더미를 보고 있으니 저 아래에서 쿠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오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수백에 달하는 쿠파들이 언덕을 포위하고 있었다. 뭐야, 노예 반란이냐? 하긴 이렇게 빡세게 일했으면 나라도 못 참았겠다.
내가 내려가자 갑각을 두드리며 포효하던 쿠파들이 조용해졌다. 그 중 제일 덩치가 큰 개체가 나를 빤히 보며 기웃대더니 앞으로 다가왔다. 대장인가?
나는 막고라라도 신청하려는 줄 알았지만 녀석은 광석을 한가득 꺼내 보여주었다.
녀석은 더 이상 쌓을 자리가 없다는 듯이 요새를 향해 두툼한 팔을 흔들었다. 계속 시키면 두말 않고 할 기세였지만 당장은 저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찰싹!
나중에 부를 테니까 이제 전부 쉬도록!
내 손짓에 쿠파들은 신이 나서 돌아갔다. 나는 녀석들의 터전을 살필 겸 그보다 먼저 바위산으로 향했다.
*
바위산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완전히 딴판이 되어있었다.
중앙은 쥐가 파먹은 것처럼 크게 뚫려있고 그 절벽에 구멍이 수백 개가 나있었다. 콜로세움 같아서 뭔가 마음에 드는데.
아래를 쭉 내려다보니 밑에서 작은 쿠파들이 열심히 광물을 나르고 있었다. 그 중간에서 덩치가 큰 쿠파 몇몇이 감독관처럼 감시하는 것이 보였다.
뭉.
우엉!
작은 쿠파 하나가 광석 하나를 슬쩍하려다 덩치에게 들켜서 마구 두들겨 맞았다.
뿔처럼 난 갑각이 노란 광물로 된 쿠파는 내가 했던 것처럼 그 녀석을 완전히 곤죽으로 만들어 놨다. 나한테 배운 게 분명하다.
잘 생각해보면 저 작은 녀석들은 큰 녀석들이 낳은 새끼들이잖아. 인간이었으면 아동 착취 + 학대로 쇠고랑행이다.
나는 곧장 벼랑을 타고 내려가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는 덩치의 덜미를 붙잡았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너희들 머리에 달린 이 금속은 뭐냐?
번쩍번쩍한 것이 황금처럼 보이면서도 그 강도가 상당해 보인다. 시험 삼아 레이저를 쏴보니 과연 보스 쿠파의 등껍질에 필적할 정도로 단단했다.
이 자식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나 했더니 제 놈들이 먼저 뒷주머니 차고 있었네? 니들은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라.
방금 돌아온 너희들도 이리로 컴.
무우우-!
*
우걱우걱.
나는 쿠파들에게서 강탈한 금속들을 삼키며 바위산 주변을 간단히 훑었다. 다행히 검은 녀석이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시간이 꽤 길게 흘렀는데도 안 왔다면 활동 영역이 더 멀리 있다는 말이다. 목줄을 차고 있던 걸로 봐서 어디에 매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심하며 동굴로 돌아온 나는 수리를 상당히 마친 기계를 볼 수 있었다. 내 포탑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한낱 인공지능이지만 그 참을성을 인정해서 요새 안의 광석들을 이용하게 해줄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처리가 곤란하기도 했고.
내가 요새 쪽을 가리키자 녀석이 여러 영상을 띄워 보였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니 기뻐하는 그림을 내보냈다.
[요새를 재료로 넘기시다니 통이 크시군요. 감사히 쓰겠습니다, 사령관님.]감사의 말을 하는 것 같다.
진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인간들의 기술력이 얼마나 발전한 거지?
인공지능이 알아서 뭔가를 판단하고 만드는 건 정말 먼 미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미래로 전생할 줄이야.
인간들과 우주선을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안 들었지만 인공지능과 직접 마주하고 난 뒤에는 격세지감이라니. 왜 그런 걸까?
조금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인간들이 너무 궁핍하게 살아서 문명의 발전이니 뭐니 느낄 새가 없었던 것이다. 하도 연료가 부족해 되도록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뭘 느꼈다고 하면 그게 더 신기한 거다.
위이이잉.
인공지능이 반쯤 수리하다 말고 보낸 기계가 재료를 한가득 가지고 들어왔다.
시꺼먼 광택이 번들거리는, 아주 단단한 금속이었다.
······개새꺄, 그건 요새 벽이잖아!
*
오후 7시.
머신이 두 번째로 박살났습니다.
사령관이 말한 것은 요새 자체가 아니라 쉘터 안의 광석들이었던 것 같네요. 앞으로는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본 뒤에 일을 진행해야겠습니다.
-이제 그만 좀 부쉈으면.
-고양이가 눈물을 머금는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