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olution, how far had you reach? RAW novel - Chapter 38
진화, 어디까지 해봤니? – 38
하늘에서 빛이 점멸했다.
쏟아져 내리는 불벼락이 지상을 순식간에 작열하는 지옥으로 만들었다.
전투의 열기, 여태껏 갈고 닦은 힘에 대한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가슴은 적을 베기도 전에 부러져버린 칼날과 함께 가라앉았다.
마약과도 같았던 흥분이 식은 뒤에 남은 건 절망이었다.
눈앞의 괴물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감에 허덕이던 마리아는 위에서 불어 닥치는 압력에 칼을 놓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뒤이어 염소 머리를 한 거신(巨神)의 분노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진 언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아아악!”
놈의 말에 호응하듯 세계의 에너지가 요동치자 마리아는 육체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나뒹굴었다.
강력한 오르그와 싸우며 다시 한 번 한계를 초월한 그녀가 못 버틸 정도였으니 나머지 인간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버르적대는 그녀의 눈에 이미 심장이 정지한 잭과 소진이 들어왔다.
그들의 헬멧 안은 내장이 전부 뒤집어지며 뿜어낸 혈액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꺽!”
그나마 디버프 제거 능력으로 겨우 버티던 로버트도 끝내 단말마와 함께 고개를 꺾었다.
그의 숨이 멎자 배틀 슈트에 동력을 공급하던 소형 엔진의 빛이 사그라졌다.
후욱후욱.
마리아는 머리를 흔들어 자꾸 흐릿해지려는 시야를 되돌렸다.
호흡이 턱까지 걸쳐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지만 그녀의 의지는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팔을 뻗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쓰러진 동료들이 생명을 바쳐가면서 그녀를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양 손에 가득한 흙을 집어던지며 반쯤 땅에 파묻힌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푸른빛에 이끌린 칼자루가 날아와 그녀의 손에 잡혔다.
으득!
마리아는 슈트의 손아귀 부분이 터져나갈 정도로 칼자루를 세게 움켜쥐었다.
찢어진 손아귀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자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보통이었으면 그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 상태가 최악이었지만 무의식에 잠들어있던 본능은 계속해서 그녀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녀는 메마른 눈으로 팔을 치켜 올렸다.
손을 감싸는 부분이 사라졌음에도 슈트는 여전히 그녀의 팔에 달라붙어 작은 움직임으로도 큰 동작을 펼칠 수 있게 도왔다.
부러진 칼날 위로 솟구치는 에너지 덩어리를 힐끔 올려다 본 마리아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내리그었다.
대강 휘두른 것처럼 보이는 그 궤적에 스친 괴물의 피부가 찢겨나갔다.
아주 작은 실금.
그뿐이었다.
피부 속으로 파고들지도 못하고 그 겉면에 흠집을 남긴 것이었음에도 이 괴물의 자존심을 긁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던 걸까.
마지막 남은 힘까지 전부 소모하고 쓰러지려던 마리아의 몸이 하늘로 끌어올려졌다.
괴물이 가진 수많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에 따른 정신적 압박은 엄청났다. 힘겹게 꺽꺽대던 그녀의 목구멍뿐만 아니라 눈과 코, 귀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틱. 틱.
엔진이 파괴되는 소리와 함께 슈트가 해체되었다.
독성 가득한 공기가 마리아의 피부와 폐를 가득 채웠다. 피부가 검게 썩고 장기가 손상되어 구멍이 숭숭 뚫렸지만 여전히 그녀는 살아있었다.
이전까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거부했던 그녀는 이제 타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숨을 이어갔다.
괴물이 조종하는 에너지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저항능력을 상실한 그녀는 곧바로 괴물의 정신과 연결되었다.
-인간······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들. 정말 오랜만에 목격함.
-이 인간은 나약하지 않음. 전에 봤던 인간들보다 낫다고 여겨짐.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함.
마리아는 몸 속 깊숙한 곳까지 낱낱이 벗겨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녀의 것이었던, 마리아 자신의 온전한 통제 아래에 있던 에너지는 어느 샌가 적의 첩자가 되어 그녀에 대한 모든 정보를 괴물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에너지가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나자 괴물은 납득했다는 기색을 보였다.
-하. 하.
-인간. 진화했음. 여왕에게 보고해야함.
괴물은 손을 뻗어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리곤 자신이 나왔던 거대한 균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거대한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박살난 대지와 그 속에서 신음하는 괴물들만이 남아있었다.
***
핵미사일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미사일 자체가 소형이기도 했고, 애초에 오르그들은 방사선에 큰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행성의 공기부터가 미쳐 돌아가는데 거기에 적응하는 놈들이 방사능 좀 쬐었다고 난리 나는 게 이상하지.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금방 적응하는 게 오르그들이다.
작열하던 빛의 형상이 사라지고, 나와 사바르의 분신들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양 측 모두 뭔가 변했음을 느낀 것이었다.
꽉 막힌 것처럼 대지에서 찔끔찔끔 새어나오던 에너지가 다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염소 대가리가 있던 곳을 바라보니 놈은 마리아를 허공에 띄워놓은 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저대로 놔두면 뭔가 일이 틀어질 것 같은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에너지를 마구 흡수했다.
그것을 새로운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한편, 다시 시작된 사바르의 공격을 무시하고 하늘로 솟구쳤다.
염소 대가리는 이미 마리아를 몸속에 흡수한 뒤, 균열 속으로 사라지려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곳으로 날아가려 했지만 사바르의 분신들이 발목을 잡았다.
나를 막으라는 지령을 받았는지 사바르 놈의 본체까지 다가와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녀석들의 약점이 물몸임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해 상대하는 것처럼 사바르도 내 데몬 하트를 집요하게 노리기 시작했다.
다른 곳은 입자화를 해서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데몬하트는 절반이 기계이기에 입자화가 불가능하다.
결국 어떤 수를 써서든 놈들의 무기가 데몬하트가 있는 곳으로 파고드는 것을 막아야 했고, 그 사이 염소 대가리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놈이 들어가자 균열이 서서히 줄어드는 게 보였다.
저 새끼, 분명 인간으로 뭘 할 속셈이다!
위기감에 휩싸인 나는 뮤츠들과 싸우고 있는 로봇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내 명령을 받은 로봇 세 기가 전장을 벗어나 쓰러진 인간들에게 다가갔다.
사바르에게 발목이 붙잡혀 있는 내가 녀석들을 살리려면 이곳으로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바르는 내 데몬하트에 집중하느라 로봇들이 인간들을 싣고 날아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인간들의 시체가 내 버프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나는 공격적으로 앞으로 파고들어 사바르의 본체와 내 위치를 맞바꾸었다.
입자화를 포기한 탓에 왼팔이 날아가고 몸 여기저기가 깊이 파였지만 내게는 그것을 회복시킬 넘쳐나는 에너지가 있었다.
내 버프를 받고 되살아난 인간들은 금세 사바르의 표적이 되었다.
800년 전 인간들이랑 싸우던 녀석이라 그런지 인간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나는 분신 몇이 그쪽으로 돌진하려는 것을 압축된 에너지와 순간 거대화시킨 몸으로 틀어막았다.
[리케. 빨리 이 녀석들 데리고 염소 대가리를 추격해! 저 균열이 닫히기 전에 들여보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내가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 모아 사바르들을 저지하는 동안 인간들과 로봇 다섯 기, 그리고 보스 쿠파가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균열이 완전히 닫히자 나는 다시 몸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 짧은 사이에 걸레짝이 된 모습이었지만 나야 데몬하트만 지키면 그만이었다.
에너지를 마구 소모해 몸을 완전히 회복시킨 나와 사바르의 눈이 마주쳤다.
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량하기 짝이 없는 지상을 응시했다.
그 사이에도 분신들의 기습은 계속되었지만 완전히 그 속도에 적응한 나는 에너지 소드를 마구 뽑아내 막아내었다.
허공에 솟은 에너지 소드의 개수가 백을 넘어가자 분신들의 움직임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뽑아내고도 내 에너지 보유량은 끄떡없었다.
어깨를 돌리며 몸을 푼 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
잠시 후, 나는 박살이 난 사바르의 시체에서 테크를 흡수했다.
땅으로 내려온 내 앞으로 리케의 로봇이 다가왔다.
[이제 넘버링22를 달 수 있게 되셨군요. 비공식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딴 건 됐으니까 마리아 위치나 특정해봐라.]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목표는 첫 번째지 스물두 번째 같은 어중간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퀸이라는 놈에게 나를 숨길 필요가 있고.
당장 염소 대가리랑 사바르 둘 상대하는 것만 해도 이렇게 빡센데 넘버링 두셋이 몰려온다? 이번처럼 에너지가 묶인 순간 관짝 행이다.
[마리아에게 붙여놓았던 위치 추적기는 작동 불능이 되었더군요.] [드래곤이랑 싸울 때도 연결 신호가 에너지 간섭 때문에 먹통이 됐었으니까.] [그래도 잭을 비롯해 남은 셋에게 부착된 추적기는 온전하게 작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는 이곳입니다.]리케가 보여준 지도에는 현재 있는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훨씬 내려간 곳에 점 네 개가 번쩍이고 있었다.
[하나는 쿠파냐?] [예.]인간들로는 불안했는지 보스 쿠파 쪽에도 추적기를 붙여 보낸 모양이다.
그 녀석이라면 호위로도 충분할 테니.
내가 바로 추격하려 하자 리케가 갑자기 나를 붙잡았다.
[가시기 전에 이것 좀 봐주시겠습니까?]한시라도 빨리 염소 대가리의 뚝배기를 부술 생각에 가득 차 있던 나는 바로 거절하려다 리케의 로봇이 데려오는 오르그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로봇들이 뿜어내는 빔 감옥에 눈에 익은 뮤츠 하나가 갇혀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사바르와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계셔서 제가 직접 잡았지요. 에너지가 부족해서 다른 개체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그 대상에 몰래 환각 이끼를 심어두었습니다. 지금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충격을 주는 중입니다.]감옥 안에 갇힌 뮤츠 녀석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저래서야 공간이동을 쓰려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꾸오오옥!
리케의 로봇이 어떠냐는 듯이 두 팔을 몸체에 대고 으스대었다.
이때만큼은 나도 솔직하게 칭찬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악독한 자식. 잘했어!]나는 바로 뮤츠의 테크를 흡수해 진화를 시도했다.
마침내 공간이동 테크가 생겨난 것이 확인되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진화에 따른 희열이 차올랐다.
이것만 있으면······.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머릿속이 어떤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공간이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위치가 입력된 어떤 신경망 같은 것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차갑게 식었다. 잠깐.
이거, 어디서 전송되는 거야?
이쪽에 바로 연결할 수 있다는 건······.
이 능력을 쓰면 내 위치가 실시간으로 알려진다는 말 아닌가?
나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장 보이는 것은 없었다.
[대장님? 무슨 문제라도-.]심상찮은 기색을 읽었는지 리케는 내 눈치를 보다가 그대로 침묵했다.
녀석 앞에는 방금 내가 흡수한 뮤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정체는 나였다.
[여기까지 와서 군단 밑으로 들어가려고 하실 줄은 예측하지 못했는데요.]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