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olution, how far had you reach? RAW novel - Chapter 42
진화, 어디까지 해봤니? – 42
보는 눈이 없다.
그 말인즉슨 들킬 염려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고, 더불어 에너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 문제는 저 삼각형, 정확히는 피라미드의 위아래를 뒤집어놓은 것 같이 생긴 녀석이 알아서 해결해주고 있었다.
녀석의 두 팔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보스 쿠파가 짓이겨놓은 시체들에서 에너지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흡수된 에너지는 녀석의 몸체 아래로 뻗은 촉수를 타고 부서진 건물들로 향했고, 그것들을 경이로운 속도로 복구시켜나갔다.
찢어진 그림 위로 누군가 빠르게 색을 칠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렇게 대규모로 에너지를 운용하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에너지를 써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에너지를 쓰는 것을 느낀 염소대가리가 이곳으로 바로 달려올 걱정을 줄여준 셈이었다.
나는 듬성듬성 솟아있는 건물들 사이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피라미드 녀석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 반 쯤 부서진 부화장 뒤에서 열심히 몸을 분해시켰다.
주변에 널린 시체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기 위함이었다.
에너지를 계속 흡수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자 그때서야 피라미드가 당도했다.
그 크기는 멀리서 봤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계단처럼 깎여나간 몸체에서 가장 밑에 위치한 층의 크기가 인간 하나보다 큰 정도였고, 그 정도 높이의 층의 개수가 백을 가뿐하게 넘기는 형태였다.
저 압도적인 질량으로 깔아뭉개기만 해도 나 정도 크기는 짜부라질 터.
피라미드가 내 옆에 있던 시체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갔다.
나보다 앞서 끌려간 시체들은 공중에서 잘게 분해되어 피라미드의 층마다 나있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몸을 분해시키려는 놈의 에너지에 저항했다.
그리곤 에너지가 주춤한 틈을 타 미리 준비해두었던 촉수를 꺼내 다짜고짜 피라미드의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촉수를 확 끌어당기니 내 몸이 녀석의 통제에서 벗어나 삼각형의 벽면에 달라붙었다.
에너지 소드를 최대한 작게 만들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부수자 녀석이 쿠왁 하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녀석이 더 난리를 피우기 전에 간섭력을 놈의 몸속에 잠들어있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에 쏟아 부었다.
염소대가리가 나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인데, 그것만으로 녀석은 내 간섭력에 저항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놈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빠르게 몸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마구 덩치를 불리고 촉수를 늘렸다.
종국에는 구멍에 꽂힌 촉수들이 피라미드 전체를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퍽!
피라미드는 에너지를 대부분 상실하자 빌빌거리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나는 땅에 닿는 즉시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이제 내 덩치가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피라미드는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려고 두 팔을 휘두르며 버텼지만 결국 지하 깊은 곳까지 끌려오고 말았다.
땅 속에서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쪽쪽 빨아먹은 나는 그대로 놈의 몸체를 부숴버리고 진화를 시도했다.
가장 먼저 습득한 테크는 피라미드의 에너지 흡수와 주입.
한 차례의 진화를 마친 나는 지하에서 거대한 촉수를 만들어 피라미드가 복구시킨 건물들에 꽂은 뒤 에너지를 마구 착취했다.
그렇게 모은 에너지로 다시 한 번 진화한 결과.
나는 사바르의 테크를 전부 획득하고, 그 형태로 변신까지 마칠 수 있었다.
굳이 사바르의 형태를 취한 것은 에너지를 알아서 흡수해 방출할 수 있는 놈의 전용무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무기의 제작법과 재료를 살핀 나는 과거의 내가 옳은 결정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사바르가 죽은 시점에서 파괴된 무기의 잔해를 리케에게 보관해두라고 했었던 것이다.
그 위치는 공교롭게도 지금 있는 위치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대협곡 너머에 있는 내 영토까지 갈 필요 없이 염소대가리와 처음으로 싸웠던 장소에 캡슐 형태로 박아두었으니까.
공간이동을 통해 그곳으로 향한 나는 캡슐을 파괴하고 손쉽게 재료를 획득했다.
만드는 과정은 일단 재료를 몸속에 흡수하기만 하면 신체가 알아서 만들어내는 형식이었다.
내가 한참 약하던 시절 달고 다녔던 독가시를 생성하는 기관처럼, 사바르의 육체는 몸 전체가 무기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공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무기는 한 번 만들면 분신을 만들어도 복제돼서 따라가는, 그야말로 마법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에너지를 한차례 순환시켜 인증을 마치고 나니 그것이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몇 번 허공에 던졌다 다시 소환하는 방식으로 시험가동을 끝낸 뒤 가차 없이 사바르의 형태를 버렸다.
드득! 드드득!
에너지 활용에 있어 극한의 효율을 발휘하는, 최고의 신체를 되찾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갔다.
데몬하트가 왕성하게 활동을 시작하고 그로부터 뿜어져 나온 무한의 에너지가 나름 준수한 사바르의 육체조차 쓰레기 같이 느껴질 정도의 전능감을 부여했다.
나는 마구 폭주하려는 정신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내 전력을 살폈다.
놈의 간섭력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가? 하면 아니오.
간섭력에서 밀려도 어떻게든 그 대가리에 죽창을 꽂아 넣을 수 있는가? 하면 예.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공간을 가르고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
기세등등하게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이리 오너라! 했는데 그곳이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였을 경우.
그것이 지금 내 상황이었다.
공간이동 포인트에서 단숨에 염소대가리가 있던 곳으로 날아들며 히어로 랜딩을 시전한 나는 이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바짝 말라 죽은 건물들과 방금 내가 착지하면서 박살낸 대지 뿐.
혹시 함정인가 싶어 주변을 면밀히 살폈지만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고민했다.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할 염소대가리가 어디로 간 것일까.
첫 번째 가정. 마리아에게서 진화에 대한 정보를 이미 얻어서 그걸 퀸에게 보고하러 갔다.
두 번째 가정. 지휘관들이 하도 답답하게 움직여서 본인이 직접 인간들을 잡으러 갔다.
그리고 마지막 가정. 그냥 열 받은 김에 내 영토를 파괴하러 갔다.
내 직감은 마지막이 제일 유력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사바르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돌아갔을 때 캡슐을 지키는 로봇이 하나도 없었다.
리케의 성격상 분명 전차를 끌고 와서라도 그 지역을 방어하려 했을 텐데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은 본진에 무슨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본체의 안위만큼은 끔찍하게 챙기는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가정의 경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두 번째 가정은 내가 인간들의 위치를 알려면 리케를 찾아가야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불안감과 흥분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끼며 다시 공간을 열었다.
***
하늘을 날아 도착한 내 영토는 겨우 복구시켜놨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지상을 완전히 점령한 군단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멀리 염소대가리가 동굴 입구를 막고 그 거대한 몸을 산봉우리에 기대어 거만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녀석은 이미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을 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나를 한껏 비웃는 녀석의 얼굴 앞으로 파괴된 리케의 본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인간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사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좀 더 냉정해져서 염소대가리 주변에 포진해 있는 네 마리의 괴수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지닌 건 군단 녀석들의 특징이지만 그게 넘버링급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양은 사바르보다 살짝 부족한 정도.
뮤츠가 양산형 네임드였다면 이쪽은 양산형 넘버링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를 등에 업은 염소대가리는 이미 자신의 승리를 자신한 듯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제법 귀찮게 했지만 이게 네놈의 한계임.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음. 그까짓 별 볼일 없는 몸뚱이를 믿고 군단에 대적한 자신의 멍청함을 탓할 것!
나는 그 오만한 도발에 대한 대답으로 지상에 우글거리는 군단을 향해 극한까지 압축된 에너지를 날려주었다.
-놈!
염소대가리를 서둘러 간섭력을 통해 내 에너지를 흩어버리려 했지만 내가 놈의 코앞까지 도달하는 게 더 빨랐다.
내가 에너지 소드를 휘두르자 언제 다가왔는지 양산형 넘버링 놈들이 그것을 막아내었다.
놈들의 간섭력에 에너지 소드가 파괴되자 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끝? 이게 끝임? 하. 하.
잠시 멈칫하는 나에게 염소대가리의 조롱이 쏟아졌다.
물론 지금까지 내게 당한 게 있어서 방심은 하지 않는 건지 에너지를 통제해 끊임없이 나를 얽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초월 테크에 에너지를 쏟아 부어 간섭력을 한계까지 강화한 나는 놈의 통제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사바르의 기술을 발동시켰다.
내 뒤로 나와 똑같이 생긴 분신들이 튀어나오자 놈의 웃음이 뚝 하고 끊겼다.
원래대로라면 놈은 내 분신이 몇 명이 되었든 충분히 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신을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숨겨두었고, 염소대가리가 품은 약간의 오만과 방심은 미세한 틈을 야기했다.
내가 분신을 꺼낸 것은 놈이 대처하기 힘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내 분신은 여덟.
나까지 포함해 양산형 넘버링들을 하나씩 맡아 상대하면 나머지 다섯이 놈을 타격할 수 있었다.
분신들은 내가 따로 조종할 필요가 있었지만 어차피 놈과 나의 싸움은 고난이도의 기술을 펼쳐가며 싸우는 방식이 아니다.
서로의 간섭력을 뚫고 피해를 입힐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단순 소모전은 내가 훨씬 유리했다.
놈은 짧은 순간에 내 분신 다섯을 막아야 하고 나는 다섯이서 하나를 공격해서 한 대라도 치명상을 입히면 끝이니까.
에너지를 극한까지 뽑아낼 수 있는 육체에 고유무기까지 사용하는 내 분신들은 놈이 당황하는 순간을 노렸다.
머리는 놈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라 판단 하에 위는 셋, 아래는 둘로 숫자를 나눠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놈이 급하게 방어막을 둘렀지만 이번에는 소용없었다.
분신들이 고유무기를 통한 간섭력 증폭으로 보호막을 상쇄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뚫린 구멍에 에너지 소드가 박혀 그대로 폭발하자 놈이 비명을 질렀다.
크와악-!
거대한 머리와 상체에서 흘러내린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머리가 거의 반쯤 박살난 지경이라 충격이 상당한 듯 놈은 간섭력으로 분신들을 묶는 것도 잊고 팔을 거세게 휘둘렀다.
물론 그 공격에 맞아줄 분신들이 아니었다.
잽싸게 놈의 팔을 피해낸 분신들은 빠르게 아물기 시작하는 놈의 상처를 후벼 파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야 놈이 혼란에 빠져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와 자리를 바꾼 나는, 놈이 정신 차리기 전에 양 팔을 거대화시켰다.
직접 놈을 처치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결국 분신들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분신들이 염소대가리를 죽이기 전에 놈이 먼저 정신을 차릴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분신들이 낑낑대는 놈의 간섭력을 깨부수고 한쪽 손으로 놈의 머리통을 붙들었다.
깊게 파인 살점 사이로 머리뼈가 보이자 그곳을 목표로 에너지를 압축시킨 반대쪽 팔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내려쳐 뇌를 단숨에 부숴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내 주먹이 놈의 이마에 닿으려는 순간.
파괴되었던 놈의 눈 하나가 복구되며 강력한 빔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보호막을 펼쳐 막았지만 기껏 거대화시킨 팔이 날아가 버렸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간섭력으로 주변의 에너지를 모두 묶어버린 염소대가리가 냅다 손을 뻗어 내 몸통을 붙잡았다.
-하. 하. 제법이었음······ 그러나 아직 부족함!
내 몸을 둘러싼 놈의 힘은 내가 뽑아낼 수 있는 한계치의 간섭력과 맞물려 어떤 방식으로든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옭아매었다.
그리고 그건 놈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전신을 분신들에게 난자당하면서도 머리만 겨우 방어하며 어떻게 해서든 나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 몸을 터트릴 듯한 압력이 갑각을 짓이기며 파고들었다.
서로 에너지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격차를 내는 것은 결국 덩치의 크기였다.
나는 양 팔에 힘을 주어 버텼지만 몸이 조금씩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분신들을 다시 흡수해 균형을 무너뜨려야 할까.
힘겨운 싸움을 각오하는 내 시야에 놈의 몸이 천천히 진동하는 게 보였다.
내게 온 힘을 쏟느라, 혹은 분신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원초적인 힘이 놈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거세게 요동치고 세계의 에너지가 모조리 하늘로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나와 염소대가리가 장악했던 에너지 역시 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풀려났다.
몸 안의 에너지마저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러도 우리는 그것을 붙잡을 수도, 다른 무언가를 해볼 수도 없었다.
에너지가 스스로 겁에 질린 듯이 제어에서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버리는 것이다.
양산형 넘버링들은 비행 동력을 잃고 추락했으며 내 분신들은 그대로 흩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원래부터 하늘을 날지 않고 있던 염소대가리와 그 손에 붙잡혀 있는 나뿐이었다.
염소대가리는 어찌나 놀랐는지 내 머릿속과 연결된 상태로 언어를 마구 쏟아냈다.
-왜 갑자기! 이건 말이 안 됨!
본인이 발휘할 수 있던 엄청난 힘을 상실한 녀석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현실을 부정했다. 나 역시 비슷한 혼란을 겪었지만 어차피 서로 에너지를 제외하고 싸우는 도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비교적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놈이 흔들리며 생긴 틈은 내게 절호의 기회였다.
느슨해진 손아귀를 박차고 날아오른 나는 고유무기를 손에 쥐고 놈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순수하게 날개의 힘만으로 나는 것은 처음이라 어색할 것을 각오했지만 급박한 상황이라 그런지 제법 자연스럽게 날 수 있었다.
턱.
염소대가리 위에 내려앉은 나는 놈의 눈이 공포로 마구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 두려움이 에너지가 도망간다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중요한 것은 이제 놈은 어떤 수를 쓰든 결국 내 손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고유무기가 놈의 머리를 꿰뚫는 순간까지 염소대가리는 내겐 보이지 않는 어떤 공포와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뇌가 파괴되어 쓰러지는 놈의 몸 위에서 날아올라 천천히 지상으로 향했다.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양산형 넘버링 놈들이 육탄전으로 달려들었지만 에너지를 잃은 이상 놈들은 전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자 그제야 내 보금자리에 평온이 찾아왔다.
모든 적을 처치했음에도 남은 것이 상처투성이인 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긴 숨을 내쉬며 동굴로 올라가는 계단에 드러누웠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낯익은 소형 로봇들이 펄쩍거리며 내 머리 옆으로 뛰어올라왔다.
나는 그 로봇의 주인을 짐작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 목숨 줄이 너무 질기잖아.
본체가 파괴된 것을 보고 영락없이 소멸된 건가 싶었더니 아직도 살아있다니.
하여튼 영악한 놈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자 로봇들은 염소대가리와 싸우면서 파괴되었던 통역기를 들어보였다.
잠시 후, 머릿속에 채널이 열리고 나는 다시 리케 녀석과 연결이 되었다.
나는 내가 없었을 때의 상황이 궁금했기에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본체가 다른 곳에 있었냐?]그러나 리케로부터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