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olution, how far had you reach? RAW novel - Chapter 49
진화, 어디까지 해봤니? – 49 >
외계 괴물인 내가 노출되지 않고 인간 세계를 활보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다소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도 그냥 넘어갈 수 있고, 이상한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낙인찍힌 인간을 꼭두각시로 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내게 잡힌 플랑드르 해적단의 두목 드웨인은 살아남았지만 죽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녀석은 로저스와 같은 세뇌를 거쳤으며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권력과 향락을 내게 빼앗기고 말았다.
구축함급 우주선만 8대를 보유하고 있는 함대는 물론이고 브뤼헤라는 행성에 세워진 해적 소굴까지 접수하니 플랑드르 해적단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게 되었다.
일생을 바쳐 이뤄놓은 것을 탈탈 털린 인간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분명 절망적이겠지.
그러나 해적 놈의 심경 따위는 내 알바가 아니다.
해적 함대를 이끌고 브뤼헤로 향한 나는 드웨인에게 바로 고대의 우주선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지시했다.
드웨인은 그 지시를 그대로 밑의 부하들에게 전달했고, 해적단의 졸개들은 갑작스런 명령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군말 없이 작업에 착수했다.
기함이랑 수송선이 박살난 걸 묻지도 않는 걸 보면 녀석들이 평소에 드웨인의 밑에서 어떤 방식으로 부림을 당했는지 짐작이 간다.
자기 명령에만 따르면 남은 시간에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건 내 스타일이랑 같군.
물론 조금 비슷하다고 해서 내가 드웨인 녀석을 조금 풀어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쪽 성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적단을 이끌고 있던 녀석이라 평범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정보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녀석은 매일같이 내게 시달렸다.
아무리 세뇌를 완벽하게 걸었다고 해도 내가 녀석의 뇌를 리케의 데이터베이스마냥 마음대로 들여다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밥을 먹든 똥을 싸든 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곧바로 대답해야 하는 처지였다.
고대의 인공지능 세라프는 해적들이 가지고 있는 동력원을 우주선에 적용시키려면 사흘이 걸린다고 했고, 나는 그동안 느긋하게 드웨인 녀석을 괴롭힐 수 있었다.
[그래서 성계 몇 개가 날아간 뒤는 인류가 그럭저럭 버틸만해졌다는 거군?]나는 중앙정부가 오르그들의 기습에 무너지고 인류의 전력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었다.
리케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중앙정부 방위군의 전력은 나조차도 질리게 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쳐들어온 오르그가 백억 단위였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당한 것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 올림포스 성계를 버리는 판단을 한 뒤로 인공지능 제우스의 권한이 대부분 박탈되었고 인간들은 제각각 뭉쳐서 세력 다툼을 벌이기 바빴지요. 그 중심에는 통수권을 넘겨받은 자치령의 영수들이 있었습니다.]인간하면 권력욕을 빼놓을 수 없지.
수도가 날아갔는데도 자기들의 권력을 키우겠다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모습은 지구의 역사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역시 이래야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이지! 라는 느낌이라고 할까.
[올림포스와 인접한 성계 넷이 더 함락되고 난 뒤에야 각 자치령 지도자들은 우리들끼리 싸워봐야 이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제우스를 불러들였습니다. 제우스는 자치령 지도자들로 하여금 오르그들에게 점령된 성계 근처에서 전부 이주할 것을 권고했고요.]그 즈음에는 군대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지도자들이 고만고만한 세력들을 많이 흡수한 뒤였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인간들의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발 물러나는 것으로 오르그들의 위협에서는 많이 벗어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환경에서 살아가려면 그만한 장치들이 필요한데 보통 인간 하나에게 들어가는 자원만 해도 상당한 양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자원을 소모하는 인간들이 한 자치령 안에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생각해보라.
그 혼란은 웃고 넘길 수준이 아니었겠지.
실제로 제우스 권고대로 시민들을 이주시킨 자치령 지도자들은 자원난이라는 난제에 빠졌다.
식민 행성에서 뽑아낸 자원 상당수가 1억 2천만의 인구가 거주하던 올림포스에서 소모되었고, 나머지 성계는 근근하게 살아가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곳 성계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자원난을 해적질로 해결하려는 것 같은데.] [우리 브르타뉴가 성계 간 무역로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관세와 더불어 통행료만 한 번 더 걷어도 수입이 짭짤한 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암석층으로 이뤄진 행성들이 상당히 많아서 몰래 뭔가를 하기에 좋은 환경이지요. 노예시장이나 환락가 쪽이 성행하는 편입니다.]우주로 진출한 세계 쯤 되면 물질적인 쾌락을 다루는 장사는 사라질 줄 알았는데 더 기승을 부리나 보다.
가상현실 같은 거 없나, 여기는.
내가 코웃음을 치며 비웃자 드웨인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내 경멸과 불쾌함이 그대로 전해진 탓이었다.
결국엔 몸뚱이 하나로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우주에 금속덩어리 몇 개 띄워놓고 자만하는 꼴이라니.
이번만큼은 퀸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속으로 혀를 차고 있으니 드웨인에게 직접 통신 연결이 들어왔다.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잠시 누군가와 쑥덕대던 드웨인이 곧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오베린이 저를 호출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정확한 것은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이런 일이 자주 있나?] [예.]드웨인은 제법 싹싹한 성격인지 정재계에 인맥이 제법 된다고 한다.
특히 이곳 브르타뉴 성계와 이웃한 엔타사 성계를 합친 엔-타뉴 자치령의 지도자 오베린이 녀석에게 보내는 신뢰는 보통 그 이상이었다.
나는 어차피 기함 토리노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을 불러들여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혹시 인공지능 세라프 녀석이 개수작을 부릴 것을 대비해 로저스에게 철저한 감시를 명령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저스. 우주선의 수리와 동력 공급이 완료되면 드웨인에게 연락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제법 말끔하다.
드웨인의 눈으로 본 행성 앤트워프의 첫 인상은 그랬다.
환락의 도시니, 암흑가 천지니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지저분한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건물들과 도로는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반듯하게 지어져있고, 둥근 반경에 세워진 도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높은 건물들이 산처럼 솟아있는 형태였다.
드웨인과 녀석을 호위하는 해적들은 도시 외곽에서부터 오베린이 제공한 시꺼먼 자동차를 타고 중심부로 향했다.
자동차는 리무진처럼 긴 차체를 살짝 허공에 띄워서 원통형의 터널을 빠르게 날아가는 방식이었다.
[이건 도시 위쪽으로 이어져 있고, 저 아래쪽에 있는 터널은 뭐지?] [시민은 계급에 따라 통과할 수 있는 터널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터널은 외교관이나 정부의 손님, 1등 시민만 이용할 수 있는 특급 터널입니다. 아래쪽으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지요.]드웨인은 내게 대답하면서도 불안한 듯 앞쪽에 동석한 검은 슈트의 인간들을 힐끔거렸다.
왜 그러냐고 묻자 녀석은 저들이 자신 정도는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고 대답했다.
[너도 개조인간인데 그렇게 실력 차이가 난다고?] [저들은 초능력을 씁니다. 주인님의 노예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저같이 불법개조시술을 마친 개조인간보다는 월등히 강합니다.] [뭐라고?]불법 개조가 일반 개조보다 두 배는 강하다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보다 더 강한 인간들이 있다고? 거기에 초능력까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드웨인의 얼굴에 통 같은 것이 씌워지는 바람에 멈추고 말았다.
보안에 상당히 신경 쓰는 것 같은 상황에서 드웨인이 내 질문에 대답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해적 놈들은 두목이 불의의 사고로 사라지면 폭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드웨인 녀석을 이용해 아데카로 돌아가려던 내 계획은 엉키게 된다.
내가 침묵하자 드웨인은 무사히 정부의 인간들의 지시에 따라 오베린의 처소에 도착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통이 치워지고 드러난 실내의 풍경은 드라마에서나 봤던 재벌가 서재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단독으로 60평은 되어보이는 방의 한쪽 벽을 꽉 메운 골동품 수납장은 둘째 치고 방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원탁은 여간 범상한 물건이 아니었다.
[저 둥근 탁자는 뭐지? 중앙에 무슨 장치가 있는데.] [일단 홀로그램 기능이 있는 것은 확인했습니다만 그 외의 기능이 더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드웨인은 잘못을 빌었지만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얻은 뒤였다.
탁자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에너지가 드웨인의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간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느낌이지만 조금 이질적인 그 기운은 나로 하여금 오베린이라는 인간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초능력을 쓰는 개조인간은 그렇다 치고 이런 물건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해적들과의 커넥션을 가지는 것을 넘어 지원까지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영화 대부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오베린은 거기서 한참 벗어난 생김새였다.
낚시터 어딜 가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흔한 노인의 얼굴에 체구도 작달막하다.
드웨인과 비교하면 허리나 조금 넘기는 정도일까.
그러면서 그 육신에 담긴 힘은 마리아에 비견될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그 힘은 본인이 갈고닦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인위적으로 부여한 것 같은 꺼림칙함을 품고 있었다.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다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겠으나 불행하게도 내 몸은 여전히 토리노 안에 있는 상태였다.
오베린은 원탁 앞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가 드웨인을 향해 앉으라는 듯 손짓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원탁 위로 성계 하나를 그려놓은 것 같은 지도가 떠올랐다.
“오늘 사고가 좀 있었다지? 잘 수습했나?”
“예, 마스터 오베린.”
“잘 되었군. 그러면 이제 사업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내가 전에 말했던 그것은 찾았나?”
[그것?] [골동품 애호가인 오베린은 고대의 유물을 모으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제게도 여러 유물들을 찾으라고 지시했었지요. 이번에는 800년 전의 존재했던 유적지를 찾으라고 해서 성계 바깥을 돌며 수색하던 중이었습니다.]······800년?
뭔가 냄새가 나는데.
오베린은 나와 드웨인의 대화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못 찾았다고? 하긴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내가 말해준 좌표 근방에 있는 것은 확실하네.”
“하지만 마스터. 우리 사략함대에게 허용된 구역은 전부 수색해봤지만 원하시는 장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멀리 나가게 되면 좌표와는 상관없게 되고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그 유적지를 찾아야 하네. 반드시! 이번 건만 잘해주면 자네에게 성계 하나를 통째로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대체 거기에 뭐가 있기에 조급해하십니까?”
드웨인이 내게서 전달받은 질문을 그대로 던지자 오베린은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보았다.
드웨인은 황급히 손사래 치며 변명했다.
“좀 더 정보가 있어야 찾는 게 수월해질 것 같아서 여쭤본 겁니다.”
“흠. 정보가 너무 부족하긴 했지. 그러나 이 이상을 알게 되면 자네는 나와 더 깊은 관계로 얽히게 될 텐데 괜찮겠나?”
오베린은 분위기를 확 바꿔 (드웨인이 느끼기로는) 묵직한 위압감을 조성했다.
그러나 내게 세뇌되어 있었던 드웨인은 위축되면서도 내 의지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단력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오베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키지는 않지만 조금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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