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hampion Too Good at Exorcism RAW novel - Chapter 108
108.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마역 전체에 짙게 끼어있던 안개가 갑자기 사라졌다.
뒤쪽을 돌아보니 안개가 하얀 벽처럼 쌓여 있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안개가 안쪽으로는 침입하지 못하는 모양.
그 대신 앞으로는 시야가 탁 트였다.
그러자 드넓은 황무지와 함께 마역의 주인이 있을 둥지가 보였다.
“저거…산인가요?”
김다영은 앞쪽으로 보이는 하얀 기둥을 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안개로 빚어진 기둥이 있었다.
마치 주변의 안개를 빨아들인 것처럼 더욱 짙게 농축되어,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듯한 모습.
게다가 그 크기는 김다영의 말처럼 산과 같았다.
기둥의 지름만 킬로미터 단위.
높이는 그야말로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저것이 마역의 주인이 만든 둥지인가.
역시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
나는 높이 솟은 안개 기둥을 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마역은 령이나 괴이의 시점에서 보면,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만드는 일종의 요새와 같다.
그래서 마역이 넓으면 넓을수록 령이나 괴이의 힘이 마역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었다는 뜻이기에.
반대로 본신에 남은 힘이나 둥지에는 그만큼 소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저 둥지는 아니었다.
둥지의 규모는 과연 마역의 크기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그 생김새 또한 비범하기 짝이 없다.
눈으로 봐서는 무슨 신령이라도 살고 있을 법한 분위기가 아닌가.
“일단 가보죠.”
“…네.”
김다영 역시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당한 건지, 다소 소극적으로 답했다.
그렇게 우리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쿵!
멀리서 들려온 둔중한 울림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설마…!”
김다영은 또다시 괴이의 공격인 줄 알았는지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직 멀리 보이는 안개 기둥에 눈을 돌렸다.
주변에 괴이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괴이조차 이곳이 주인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개미 새끼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한 상태.
그렇기에 이 진동은 땅속이 아닌, 저 둥지 방향에서 전해진 것이었다.
그 속에 공격의 의도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단지, 무언가 발로 땅을 내디뎠을 뿐이었으니.
“걷고 있다고…?”
자세히 바라보니 안개 기둥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쪽에서는 일정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울림이 발생했다.
저 안개 기둥에 가려진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강진우 씨, 이건…”
김다영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모양이었다.
이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LB 아카데미에서는 이 마역을 질병과 관련된 악령의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바탕으로 악령의 정체를 마마, 즉 천연두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저 둥지는 그런 모든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제들이 전부 틀렸다는 건가?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이 틀렸다기보다는, 내 지식이 모자란 탓에 이를 발전시키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서 나는 김다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영 씨는 저게 뭐 같아요?”
LB 아카데미는 각종 분야의 강의를 들을 수도 있는 대학과 같은 곳이다.
그러니 그 소속인 김다영이라면 영체, 특히나 토속 신앙에 관해서는 나보다 깊은 지식을 갖고 있으리라.
“글쎄요. 힌트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힌트라면 있죠. 저는 저게 천연두, 그러니까 마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추리했던 내용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김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아…그렇네요! 사실 정신이 없어서 악령의 정체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들어보니 강진우 씨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근데 저건 뭡니까?”
내 물음에 김다영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마마라면…토속 신앙에서는 관련된 전승이 많아요. 특히 무속 쪽으로는 마마 자체가 강한 신을 뜻해요. 예전에는 천연두를 사람의 힘으로 낫게 할 수 없어, 이를 관장하는 신의 권세가 강하다고 여겨졌으니까요. 하지만 저건 그 이상의 전승, 그러니까…”
김다영은 거대한 안개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마고 할미의 전승 같아요.”
마고 할미라.
나도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전에 바리공주 이야기에 나왔던 마고 할미의 까마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토속 신앙 쪽이네요.”
“맞아요. 그래서 마고 할미의 전승은 여러 측면이 뒤섞여 있는 경향이 있어요. 제대로 정립된 상태에서 퍼진 게 아니거든요.”
이어서 김다영은 마고 할미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고 할미는 중국 도교의 마고 여신의 이름이 한국으로 들어오며 기존 토속 신앙과 결합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결합한 신성 중 하나는 먼저 질병, 즉 마마를 관장하는 신성.
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이나 단체의 건강을 지켜주는 수호신 측면의 신성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고 할미는 악신, 혹은 귀신의 측면도 갖고 있어요. 자신에게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으면 반대로 마마에 걸리게 하는 식이죠.”
거기에 더해 원래 도교에서의 마고는 할머니가 아닌, 선녀의 모습을 하고 있단다.
김다영의 말대로 마고 할미에 대한 전승은 중구난방이었다.
형태가 있는 문서나 완벽히 종교화된 신화가 아닌, 단지 구전으로 퍼진 설화의 특성.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전승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마고 할미는 한국 신화에서는 창조신의 전승을 갖고 있기도 해요.”
“창조신…?”
“네. 그것도 거인 형태의 창조신이죠.”
“……”
그 말에 나는 말없이 하얀 기둥을 노려보았다.
창조신에, 거인이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과 너무나도 딱 맞아떨어지는 전승이었다.
이 광활한 마역을 만든 것은 땅과 하늘을 만들었다는 창조신의 전승 때문이고.
지금 저 안갯속에서 걷고 있는 것은 거대한 거인이라는 뜻이었으니.
“그럼 저게 그 전승을 구현했다는 건데, 적령이 창조신이라고요?”
“물론 저게 마고 할미의 본체는 아닐 거에요. 아마 마마로 인해 발생한 적령이 힘을 얻은 후, 역으로 마고 할미의 전승을 흡수한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그래도 령이 신성을 얻는 게 가능합니까?”
“마고 할미는 귀신의 측면도 갖고 있어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아마 령의 내부에서도 마고의 여러 전승이 뒤섞여 있겠죠.”
그렇게 뒤섞인 전승 중, 하필이면 창조신의 전승이 튀어나왔다는 건가.
아니, 우연은 아닐 것이다.
령도 지능이 있으니, 아마 모든 전승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창조신의 전승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전승을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만약 그랬다면 적령이 아니라 흑령이 됐을 테니까요.”
“그렇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령이 완전한 창조신에 이르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건가.
그 말은 결국 시간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움직였다.
“그럼 갑시다. 빨리 처리하죠.”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하얀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던 중, 문득 김다영이 물었다.
“그런데…어떻게 하시게요?”
어떻게 할 거냐니.
당연한 걸 왜 묻는 거지.
“퇴마해야죠.”
“거인인데요?”
“거인이 왜요?”
“혼자서는 힘들 텐데…”
쿵!
또 한 번 땅이 울렸다.
아직 거리는 꽤 남았건만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은 진동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내 착각을 깨달았다.
거인이라면 나도 이세계에서 수백 번은 더 만난 적이 있었다.
평균 신장이 20미터에 이르는 괴물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기간테스들은 그 3배가 넘는 70미터 수준의 몸집을 자랑했다.
하나하나가 결전 병기의 위력을 지닌 놈들과의 전투는 분명 힘들었지만.
그 발걸음이 이 정도의 충격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김다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고 할미의 크기가 어느 정도에요?”
“정확한 수치는 없어요. 창조 설화 자체가 손가락으로 땅을 긁었더니 그곳에 강이 생겼다, 그런 식이거든요.”
“……”
그 말에 나는 비로소 김다영의 걱정을 이해했다.
손가락으로 강을 만들어?
신화 속의 거인은 내가 알고 있던 거인과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내 예상을 한없이 초월하는 크기일 수도 있다는 건가.
“…일단 가보죠.”
하지만 물러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안개 기둥을 향해 돌진했다.
그 거대한 기둥은 이제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마치 높고 긴 안개 장벽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
나는 검을 들고 그 장벽을 뚫었다.
단지 시야를 차단하기 위한 건지, 휘몰아치는 안개에는 특별한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와 김다영은 문제없이 그 안으로 진입했고, 마침내 마역의 주인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와…!”
그 모습을 본 김다영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만큼 안개 속에 있던 붉은 거인은, 정말 신화와 같은 모습이었다.
쿵!
적색의 거인이 한 발을 내딛자, 지각이 파도처럼 요동친다.
거인의 발은 산과 같았다.
고층 빌딩이 있을 법한 높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거인의 다리뿐.
그래서 거인의 얼굴은 턱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거리로 따지면 수천 미터 위였으니.
그야말로 이 붉은 거인은 걸어 다니는 산, 그 자체였다.
“이제 어쩌죠?”
김다영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거인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원래 머리 위에 뜨는 레벨 표시는 내가 보기 좋게 놈의 발목 부근에 표시되었다.
70 레벨.
저렇게나 거대하건만, 놈의 레벨은 딱 적령의 최대 한계에 걸쳐 있었다.
“이게 70이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레벨은 저놈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지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능력치의 총합을 수준별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저 거인의 레벨이 70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청룡의 권능을 사용해 벼락을 불렀다.
콰릉!
잠시 후 하얀 벼락이 하늘에서 거인의 다리에 떨어졌다.
아무리 벼락이라도 거인의 크기에 비하면 작은 바늘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우어어어어-”
거인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하늘 위에서 우레와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거인은 우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건지 그대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편 다리에는 거대한 화상 자국이 남았다.
그걸 보며 나는 내 예측을 확신했다.
“저거 물살이네.”
말하자면 놈은 모든 능력치를 자신의 크기, 즉 HP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래서 크기는 무진장 거대하지만, 방어력은 낮고 공격조차 할 수 없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형적인 상태.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김다영의 말대로, 령이 아직 마고 할미의 전승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탓이었다.
즉 저건 일종의 번데기다.
만약 놈에게 시간만 있었다면 저렇게 키운 몸집으로 내실을 다지고.
번데기에서 나비가 우화하는 것처럼 강대한 흑령이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나를 만난 이상,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공격이 잘 통하네요?”
“그러게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래도…저희 둘만으로는 저걸 쓰러뜨리기는 힘들어요. 다른 사람들만 있었어도…”
한편 김다영은 그렇게 말하며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적령의 방어력이 낮다고 한들 적령의 몸집, 즉 놈의 피통은 너무나도 컸다.
킬로미터 단위에 달하는 저 몸집은, 나와 김다영이 모든 영력을 쏟아부어 하루종일 공격한들 다리 하나를 채 잘라내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싸우기보다는 여기에 들어온 퇴마사를 전부 긁어모아 오는 게 먼저였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없었고, 나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딱 이런 놈에게 맞는 필살기가 하나 있었으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김다영을 뒤로 물렸다.
그녀는 잠시 놀란 눈을 했지만, 이내 그것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뀌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남은 영력을 쥐어짜네 구름을 불렀다.
마역에는 존재할 수 없는 짙은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는다.
낮도 밤도 없던 마역에 어둠이 내리깔리고, 동시에 내 영력은 바닥을 보였다.
“……”
준비는 이걸로 되었다.
이어서 내가 개방한 전승은 마후라가.
나가 여왕의 축복으로 강화된 마후라가는 영력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과 더불어, 전승 개방 시 30초간 영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잠깐이지만 영력이라는 한계를 벗어던진 나는 하늘을 보았다.
그러자 검은 구름은 그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로 요동쳤고,
“콰과과과과과-”
수천에 이르는 벼락이 순백의 용이 되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신성을 머금은 새하얀 전격의 빛이 시야를 뒤덮는다.
태산과 같은 거인이 용의 턱에 삼켜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타오르는 백광뿐.
거인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내 귀에는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굉음만이 들려왔다.
“……”
옆에서는 김다영이 그것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시야에는 하얀색밖에 없을 텐데도, 뭐가 보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시선을 옮긴다.
“이게 진짜…용사…!”
김다영의 중얼거림 역시 굉음에 묻혔다.
지면은 너무 많은 전기를 흡수하며 그 위에서 스파크를 튀겼고, 이에 흡수되지 못한 전격 중 일부는 공기를 타고 발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약속시간인 30초가 끝나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며 폭주하던 빛을 거두었다.
짙게 뭉쳐있던 비구름도 서서히 옅어져, 원래 있던 적색의 하늘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있던 태산, 전격에 삼켜졌던 거인만큼은 이전과 달랐다.
그 붉은 거인은 더 이상 붉다고 할 수 없었다.
살이란 살은 모조리 까맣게 변해 있었다.
비명을 내지르던 거인의 입도 어느새 침묵하고 있었다.
느리긴 해도 천천히 움직이던 걸음은 이제 완전히 멈춰있다.
“…해치웠나?”
그 일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나는 일부러 부활 주문을 입에 담아 보았다.
하지만 그 최상급 부활 주문에도 놈이 살아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놈의 한쪽 다리가 뚝 잘려, 서서히 옆으로 기운다.
뼛속까지 재로 변한 건지.
그 다리는 고층 빌딩이 가루가 되어 옆으로 무너지는 것처럼 부서졌고, 그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다만.
“어?”
다리를 잃은 거인의 몸 역시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방향이…이쪽이었다.
“이런 미친.”
나는 김다영과 함께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거인의 몸은 점점 더 빨리 기울기 시작했고.
쿵! 소리와 함께 바닥과 충돌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겨우 그와 직격하는 것은 피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속까지 전부 재가 된 거인은 그대로 박살나며, 그 재를 사방으로 쏟아냈다.
그야말로 재로 만들어진 산사태.
그것만은 피할 새도 없었다.
“꺄악!”
그 앞에서 김다영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재의 해일이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어?”
시야가 반전했다.
어느새 우리는 우리가 들어왔던 마역의 입구였던, 주왕산의 골짜기 아래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