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10
Chapter 10
* * *
“부셰 백작 부인이 제도로 돌아왔다더구나.”
황후가 근심 서린 얼굴로 말했다. 요 며칠간 부쩍 한숨이 많아진 그녀였다.
전처럼 방에 틀어막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적으로 대외행사에 참석하면서도 신색이 어두웠다.
그런 때에 부셰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는 건 호조였다.
“문제가 해결되면 바로 돌아오겠다고 하셨지요.”
“그래, 헌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더구나.”
“어떻게 아시는지요?”
황후가 편지를 펼쳐 보였다.
“자 보거라. 글씨체도 그렇고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느냐.”
황후는 그간 부셰 백작 부인과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던 터였다.
파레사가 쓱 보니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비뚤어 써진 글씨는 곳곳이 번져 있었다. 깔끔한 백작 부인의 성격을 보건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네요. 몸이 좋지 않아, 방문은 미루어야 할 것 같다고 하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걱정이 되는구나.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올라와서 설명해준다고는 했는데……. 부셰 백작도 요새 입궁하지 않는다지.”
황후가 편지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황태자의 편지를 다룰 때와는 퍽 차별적이라고 생각하며 파레사가 말을 받았다.
“제가 한 번 백작 부인을 방문해 볼까요?”
그러는 게 속 시원할 터였다. 그리고 부셰 백작 부인이 영지로 급히 떠났던 게 에레스 공작 부인의 수작이었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럴래?”
반색해 보였던 황후가 큼큼, 헛기침했다.
“밖에서 위험한 일을 겪은 네게 부탁하는 마음도 편치 않다만.”
그래, 얼마 전에 마차 납치를 당할 뻔했지. 심지어 납치범들은 증거 인멸차 다 살해당하기도 했고.
아, 에레스 공작 부인의 저택으로 결국 납치당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별걱정은 안 되는 눈치였다. 기사 출신으로 알고 있는 파레사가 그간 때려눕힌 남자만 열이 넘었으니까.
물론, 파레사도 제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남몰래 슬쩍, 사복을 입고 조용히 다녀오면 괜찮지 않겠어요?”
저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은 참이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네 행적이 알려지는 모양이니 그러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잡으며 당부했다.
“몸조심하고 다녀오렴. 내 추가 수당은 넉넉히 챙겨주마.”
그것참, 의욕이 절로 솟는 발언이었다. 파레사는 흔쾌히 응답했다.
“다녀올게요.”
* * *
옷을 갈아입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쓴 파레사는 빠르게 길을 걷고 있었다.
부셰 백작저까지 거리가 꽤 되기에, 마차를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이 모자, 시야가 잘 잡히지 않는걸. 불편해.’
모자는 물론, 황후의 것이다. 황후의 모자가 너무도 화려하다 보니, 노라의 손을 빌려서 장식을 죄 떼어내야만 했다.
어두운 회녹색의 점잖은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눌러쓰자, 반쯤 얼굴이 가려진 파레사는 평범한 귀부인으로 보였다.
황후의 편지와 출입증을 챙긴 파레사는 황후궁에서 짐 마차를 타고 쪽문을 통하여 궁 밖으로 나왔다.
마치 정말로 뒤나미스의 첩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돌아갈 때는 정문으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제가 나온 건 아무도 몰라야 한다.
‘나라고 해서 자꾸 누군가를 때려눕힌 무적의 시녀로 소문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황궁 근처의 마차들에는 에레스 공작 부인의 손이 뻗쳐 있을지 모른다. 부셰 백작저라는 목적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특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파레사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마차에 탈 계획이었다.
지방 출신 귀족이기에 부셰 백작저는 귀족저택 밀집 지역에서도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걸어서 가기엔 먼 거리다.
‘다음부터는 아예 남장하고, 말을 몰고 나올까.’
변장을 할 거면 그러는 게 더더욱 나을 터였다.
황궁 시녀로서는 복장도, 탈것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행적이 파악 당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마침 지나가는 마차에 빈자리 표시로 빨간 기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파레사는 급히 마차를 타며 부셰 백작저의 주소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별문제 없겠지?’
파레사는 경계하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마부의 동태를 주시했다. 더 이상의 납치는 사양이었다.
다행히 마차는 수상쩍은 낌새를 보이지 않고, 충실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파레사는 제가 겪은 사건들을 떠올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납치와 도둑누명, 그리고 거기에 뒤이은 살인누명까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까?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에레스 공작 부인의 술수에 걸려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고 보니 마리는…….’
마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직으로 발령 난 데다가 파레사가 숙소를 옮겨 접점이 사라진 그녀였다.
숙소로 가서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 수는 있겠지만, 그러긴 꺼려졌다.
만약 제가 마리와 접촉한 게 에레스 공작 부인에게 알려진다면, 그녀는 파레사가 마리와 친분이 깊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마리가 파레사의 약점이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러셀 백작 부인의 명을 거부한 대가로 한직으로 발령 난 마리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서로 멀리하는 게 좋은 사이.
‘러셀 백작 부인은 마리의 친척이야. 제 손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마리를 제거하지는 않겠지.’
마리는 그래도 영향력 있는 후견인을 친척으로 두고 꽤 넉넉하게 살아온 귀족 영애였다.
반면 페이는 몰락 귀족에 멀디먼 연고를 통해 황궁에 들어온 데다가, 한직에 배치되어 있었다.
파레사는 만약 마리가 제게 누명을 씌웠다면, 페이와는 달리 도구처럼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보았다.
아무리 러셀 백작 부인이 냉정하다고 해도, 귀족이니 제 혈연을 그리 가볍게 소모하지는 않으리라.
‘당장은 그렇겠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에레스 공작 부인도 제게 화살이 돌아오게 되면, 저한테 이르는 실마리를 모조리 제거하려고들 테니까. 반기를 든 마리에게도 손을 쓸지 몰랐다.
나름 눈치 빠르게 이리 붙고 저리 붙고 잘하는 마리이니, 제가 위험해지면 얼른 그쪽에 붙긴 할 터였다.
‘난 그저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런 음모에 휘말린 거지?’
그보다 고작 사교계 세력 다툼이 이런 음모까지 번질 만큼 대단한 일인가. 이놈의 제국이란 여러모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파레사는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골치가 아팠다.
파레사가 생각에 빠진 새에, 부지런히 달린 마차는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마차에서 내려선 파레사는 철창 너머로 고요함에 잠긴 부셰 백작저택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백작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차례다.
* * *
파레사를 맞은 것은 부셰 백작이었다. 어두운 안색의 그는 잠이 부족한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아내는 지금,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안정을 취하고 있다면?”
“최근에 크게 놀란 일이 있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중입니다.”
그러니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부셰 백작께서는 입궁하지 않으시는지요?”
“당분간 휴가를 냈습니다. 아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여서…….”
그는 부셰 백작 부인이 있는 침실 쪽으로 근심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파레사는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황후 폐하께 편지를 쓰셨지요. 황후 폐하께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속 시녀인 저를 비밀리에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황후께서 신경 써 주심은 감사하나……. 글쎄요.”
부셰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은 생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많이 심약해진 상태여서요.”
“부인께서도 황후 폐하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인이 원하지 않는데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심려 마시지요. 혹여 제가 안정에 도움이 되어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 그렇다 하시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방을 나선 부셰 백작은 곧 무뚝뚝한 얼굴로 파레사에게 따라오시라고 말했다.
어렵사리 승낙을 받아낸 파레사는, 곧 백작 부인의 침실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파, 파레사!”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상체를 비틀거렸다.
“앉아 계세요.”
바짝 다가가자 그녀가 재빨리 파레사의 손을 부둥켜 잡았다.
“맙소사, 정말 이렇게 찾아와주다니. 저는 정말이지…….”
파레사는 차분하게 그녀의 신색을 살폈다. 헝클어진 머리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했다.
침실에서 저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녀는 최소한 이성을 붙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편지로는, 누군가가 엿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거겠지요.”
그래서 부셰 백작 부인은 별다른 내용은 적지 않고, 흐트러진 글씨체로 파레사를 이곳에 불러냈다. 아마, 의도하고 한 일이리라.
그녀는 성급히 물었다.
“황후 폐하께는, 혹시 무슨 일이 없었나요?”
“무슨 일은 저에게 있었지요.”
파레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다.
백작 부인의 얼굴에 혼란이 내리깔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저택에서 한 발짝도 나가질 못하겠더군요.”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제게 말씀해주세요.”
잔잔한 물빛 눈동자. 파레사의 동요 없는 태도는, 부셰 백작 부인에게 힘이 되었다.
전염된 듯이 차분함을 되찾은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일은 금세 해결되었어요. 단지……, 계속, 계속, 이상한 일이 벌어졌죠. 가는 길에도 고장 났던 마차 바퀴가, 오는 길에도 또 말썽이었어요. 마부의 말로는 마치 누군가가 정으로 내리찍은 듯하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일정이 많이 지체되었어요.”
다급히 침대 옆에 놓인 물병을 들어, 물을 따라 마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도로 반쯤 왔을 때 마을에서 여관을 들렸는데, 도둑이 들었어요.”
“도둑이라고요?”
파레사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예, 짐을 놓고 잠시 식사하고 온 사이에…… 방문이 열려 있더군요. 짐이 풀어 헤쳐져 있었는데, 기묘하게도 사라진 물건은 없더군요. 적게나마 액세서리가 몇 종류 있었는데…… 고스란히 들어 있었어요.”
“이상한 기분이 드셨겠네요.”
“예, 마치 위협당하는 듯한 기분이었죠. 너무나 불안하여 그곳에 묵지 않고 바로 출발했어요. 밤늦게라도 다음 마을에서 쉴 생각으로…… 한동안 그런 일이 없다 싶었어요. 그런데 제도에 도착하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들린 여관에서…….”
부셰 백작 부인은 다시 한번 목을 축였다.
“누군가가 잠들어 있는 제 방에 들어왔어요. 하녀는 바로 옆방이었고, 기사들도 옆방에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대요. 잠결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았더니, 누군가가 침대 옆에 서 있었어요. 복면을 쓴 남자……. 소리를 채 지르기도 전에, 그자가 제 목에 단검을 들이댔어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듯 백작 부인의 안색이 더욱 희게 질렸다.
파레사는 독려하듯 물었다.
“그리고요?”
“그자가 제 귀에 대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잘 생각하고 행동해.”
백작 부인은 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자는 사라졌어요. 저는 혼절하다시피 정신을 잃었고요. 다음날 들어 보니, 수면제를 먹였는지 모두가 죽은 듯이 잠들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절대로…… 꿈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목을 들어 내보였다. 실낱같은 상처가 그날 밤의 일이 현실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파레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건…… 소리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군요.”
“그래요, 황후 폐하와 관련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백작 부인은 힘겹게 이마를 짚었다.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서둘러 제도로 돌아와, 저택 안에 틀어박혔겠지.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면서.
‘이번에는 아주 끝장을 보려는 건가.’
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레스 공작 부인의 소행이라면, 도가 지나쳤다.
그녀는 이제껏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주변을 은근히 조종하여 티 나지 않게 황후를 압박해왔다. 황녀로서 고고하게.
그러나 공작 부인은 지금 제도를 떠나 있던 세월까지 포함하여 지난 십여 년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의 평판은 한결같이 좋았다. 그건 가면을 쓰고 선을 지키는 데 능숙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에, 이제껏 선을 넘지 않았던 거였나?
선을 넘어서라도, 황후를 짓밟고 싶은가.
‘대체 왜 황후를 그 정도로 싫어하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선을 넘는다면, 반드시 표가 나게 되어 있지.’
에레스 공작 부인은 이쪽에서 반격할 구실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허점을 드러내리라. 단지 당장 어떻게 대처할 거냐가 문제다.
냉철하게 생각을 마친 파레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간 고충이 많으셨겠어요.”
“당신도요.”
“백작 부인은 당분간, 마음을 추스르고 계세요. 황후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지요.”
백작 부인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혼란에서 벗어난 그녀의 두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굴하지 않겠다는 용기다. 그녀가 아직 황후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우정이나 신의, 충정에는 때때로 강단이 요구된다. 그녀는 귀족이었다. 좋은 의미로.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이건.”
“세상에는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하지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해결될 거예요.”
확신을 품은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백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레사도 조심하세요. 그리고…… 황후 폐하께 편지를 전달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부셰 백작 부인은 재빨리 편지 한 장을 작성했다.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문체였다. 이것이면 황후도 안심하리라.
“그럼 이만, 편히 쉬시기를.”
편지를 받아든 채 방을 빠져나온 파레사의 얼굴엔 심각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만나봐야겠어.’
황태자를. 이 사태에 대해서 힘을 쓸 수 있는 건, 역시 그뿐이니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파레사는, 예상 밖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 * *
마차에서 내린 파레사는 빗방울을 맞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덧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이런…….”
다행히 황궁에서 도보로 10분가량 떨어진 위치다. 파레사는 걸음을 서둘렀다.
‘우산을 빌려올 걸 그랬나.’
하지만 같은 제도 내인데도 백작저와 이곳은 날씨가 생판 달랐다.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두두둑. 선명해진 빗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파레사는 인파를 헤치며 빠르게 걸었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급히 처마 아래며 건물 안쪽으로 뛰쳐들어갔다. 그 덕에 점점 더 길은 한산해졌다.
‘이 모자, 나름 편리한데.’
비싼 모자답게 빗방울을 잘도 막아주고 있었다. 제 물건 하나는 살뜰히 아끼는 황후이니 안 쓰는 모자를 골라서 주었으리라.
‘상해도 어쩔 수 없고.’
빗줄기 너머로 저쪽에 황궁 입구가 언뜻 보였다.
그러나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서는 이제 거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쾅쾅! 번쩍! 푸른 섬광이 눈앞을 스쳤다. 빛과 소음의 향연이었다.
‘재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거의 황궁에 다 와서야 날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니, 재수가 좋은 쪽이라 생각하자. 이제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차박차박.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도 찰진 물소리는 제법 또렷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기에 교차하듯 다른 소리가 섞여 들렸다.
보행자는 자신뿐만이 아니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물소리는 제 것보다 간격이 좁았다.
한 인기척이 거의 뒤까지 따라붙자마자 소리가 늦춰졌다.
경계태세를 취한 파레사는 휙 몸을 돌렸다. 황궁 앞이기에 선제공격은 삼갔다.
‘누구지?’
우산을 쓴 남자였다. 우산이 슬쩍 위로 올라가고,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저, 우산을 씌워드리려고.”
불안한 듯 눈을 굴리는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절할 새 없이 그녀 위로 커다란 우산이 덮였다.
쏟아붓기 시작한 빗줄기에서 벗어난 파레사는 모자를 치켜들어 뚝뚝 흘러내리는 물을 털어 냈다.
“마차 납치범?”
“그, 그랬소만.”
떨리는 목소리가 초조하게 들렸다. 그는 곁눈질로 주변을 돌아보며 동태를 살폈다. 이쪽을 주시하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당신을 찾고 있었소. 나, 나를 좀 도와주시오. 내가 도움 될 정보를 가지고 있소.”
감옥에 끌려간 마차 납치범들은 모두 죽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파레사는 단박에 상황을 인지했다.
“당신은 감옥에서 나와 근위병을 따라간 자 아닌가. 왜 내 앞에 나타났지?”
“그, 그래서 쫓기고 있소! 자, 잡히면 나도 죽을 거요.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있소.”
파레사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안과 공포가 묻어나는 안색은 꾸며내기 어려운 종류였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저쪽에 가서 이야기하지.”
파레사는 구석진 곳에 있는 처마를 가리켰다.
살짝 골목으로 돌아드는 위치라, 보통은 저를 납치하려 했던 자와 함께 가려고 하지 않을 장소였다.
하지만 파레사는 거리낌 없이 앞장섰다. 남자 역시도 둘 중에서 제가 약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처마 아래 서자 그가 우산을 걷어냈다.
“다행이야, 비가 내려서……. 당신이 황궁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소. 내가 아는 얼굴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파레사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자는 종일 죽치고 기다려야만 했을 것이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거나 헛수작을 부린다면 여기서 죽게 될 거야. 아무도 모르게.”
파레사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이미 파레사에게 당해본 적이 있는 그가 찔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지, 진정하시오. 내게도 어차피 다른 길은 없으니까 온 게 아니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파레사는 차갑게 물었다.
“당신을 데려간 근위병은 어떻게 되었지?”
“주, 죽었소. 그리고 나, 나는,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소.”
파레사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찾아 헤매던 실마리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직접, 제 발로 찾아와서.
‘무슨 꿍꿍이지?’
경각심이 일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끔 자세를 잡은 파레사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 봐.”
남자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 내가 당신을 납치하려고 했던 건,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소. 높으신 분이, 황궁 시녀 한 명을 혼찌검 내주고 싶어 한다고…… 그런 의뢰였소.”
그의 이름은 랄프. 그 의뢰를 가져온 건, 모건이라는 이름의 황궁 근위병이었다.
이런저런 불법적인 심부름을 해왔던 하류 건달 랄프는 몇 년 전, 도박장을 드나들던 모건과 친분을 맺었다.
모건은 돈벌이를 위해서 높으신 분들의 불법적인 의뢰를 가져왔고 랄프는 그것을 수행하며 두둑이 의뢰비를 챙겼다. 둘은 형제라 칭할 만큼 돈독한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금전난에 시달리던 모건은, 큰돈이 될 만한 일을 가져왔다고 랄프를 꼬드겼다. 황실 시녀 한 명을 납치해달라는 의뢰였다.
‘그냥 겁만 조금 주고 적당히 돌려보내면 돼. 큰 문제 없을 거야.’
아무리 황실 시녀라고 해도, 다친 것도 아니고 죽지도 않았는데 범인을 찾겠다며 제도를 들쑤시지는 않을 터였다.
그 말에 혹한 랄프는 건달들을 불러모아 일을 추진했다.
하지만 파레사에게 제압당해 감옥에 갇히게 된 순간부터,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들이 감옥에 갇힌 날 남몰래 찾아온 모건은 ‘높으신 분이 곧 조처해줄 거야. 조금만 참아’라며 그들을 달랬다.
그들은 금방 나가게 될 테니, 입 다물라고 신신당부하는 모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일이 커지고 모건이 그들을 나 몰라라 하면, 하류 잡배에 불과한 그들은 감옥에서 영영 썩게 될지도 모르니까.
근위 기사니 뭐니 황궁에서 사람이 나와서 낮이고 밤이고 심문할 때도, 그들은 꿋꿋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모건이 찾아왔다. 그는 조사를 명목으로 랄프를 빼내며 말했다.
‘일이 크게 틀어졌어. 거액을 줄 테니, 외국으로 나가 있으라는군.’
‘다른 녀석들은?’
‘그들까지 빼내는 건 불가능해. 우리도 빨리 여길 떠야 돼.’
어차피 이번 건을 위해 손을 잡은 얄팍한 관계. 어떻게 되건 알 바 아니었다.
모건은 랄프에게 자신이 약속된 장소로 가서 돈을 받아오겠다고, 떠날 채비를 해두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소.”
누군가를 감시하는 의뢰도 종종 맡았던 랄프는 조심스레 모건의 뒤를 밟았다.
모건은 제도 외곽의 버려진 집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를 만난 순간, 심장을 검에 관통당했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는 숨이 끊겼다.
멀찍이서 뒤를 쫓던 랄프는 입을 틀어막았다.
모건을 살해한 그자는 귀족이었다. 그자는 부하들을 시켜, 모건의 시체를 치우게 했다.
랄프는 모건의 시체가 버려진 집 마당에 묻히는 것까지 똑똑히 확인했다.
‘꼬리를 자르려는 거군.’
별것 아닌 의뢰인 줄 알았건만, 사태가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랄프는 저만이 아는 은신처로 몸을 숨겼다.
감옥에 남겨진 이들이 모조리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날. 이제 살아남은 것은 그뿐이었다.
랄프와 죽은 모건은 바로 지명수배당했다.
모건이 랄프를 빼내 갔다는 사실은,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 ‘높으신 분’ 쪽에서도 알고 있으리라. 살아남은 랄프는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상대였다.
거기까지 들은 파레사는 물었다.
“왜 당신은 도망치지 않았지?”
“제도는 내 손바닥 안이오. 이곳에선 어디든 몸을 숨길 수 있지. 하지만 저 밖에서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여기서 방법을 찾는 게 낫겠다 싶었소.”
잡히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느 날 적발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며, 마냥 그물 안에서 맴돌 수는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뭔가를 해야 했다. 가능하다면 모건의 복수까지도.
랄프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당신을 납치하려고 해서 일어난 일이니, 당신이…… 나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기다린 거요.”
“적의 적은 친구라는 거로군.”
제대로 찾았다. 파레사는 바로 질문을 꺼냈다.
“그자가 누군지 아나?”
“코웰 남작. 귀족들의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는 대가로 작위를 산 남자지. 나는 은밀히 그의 뒤를 쫓았소.”
파레사는 그가 답을 찾아냈음을 눈치챘다.
하류 심부름꾼에 불과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그대로 죽느니, 뭐라도 해볼 배짱이 있는 자였다.
“그자가 찾은 곳은…… 어떤 대귀족의 저택이었소.”
랄프는 소리 죽여 털어놓았다.
“에레스 공작저택.”
랄프의 말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대체 그만한 지위의 남자가 왜 황실 시녀를 겁박하는 건지, 그보다 커다란 음모와 엮인 일인지…… 나로서는 모르겠소. 하지만 틀림없소. 그자는 요 며칠간 밤늦은 시간에, 그곳에 꽤나 자주 드나들더군.”
틀렸다. 공작이 아니라, 공작 부인. 에레스 공작 부인 니시아나의 소행이었다.
그리고 이 랄프는, 그 모든 음모와 니시아나를 연결 짓는 유일하고도 얄팍한 끈이었다.
“내가 말한 것들이…… 도움이 되겠소?”
대답을 요구하는 랄프의 눈빛에 절박함이 떠올랐다.
그가 파레사를 찾은 것은 이성적이면서도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저를 향해 달려들던 건달 여럿을 단숨에 때려눕힌 범상치 않은 시녀. 그 침착하고도 냉정한 태도가 떠올랐다.
진실을 수용할 만한 강함을 가진 여자였다.
파레사는, 그를 향해 어김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날 찾아온 건 좋은 판단이었어. 아마 당신 인생에서 최초로.”
그가 좀 더 판단력이 좋았다면,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쪽도 높으신 분이 뒤에 있거든. 누가 더 센지 알아보자고.”
파레사는 황궁을 향해 턱짓했다.
마침 황태자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다.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게 되어서 잘 됐다.
“따라와.”
혼자만 놔두고 기다리게 했다간 그대로 내빼거나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확보해놓은 자를 따로 약속을 잡고 보내거나 하는 건 안일한 짓이었다.
증인은 당장, 비밀리에 안전한 곳으로 옮겨 안치시켜둬야 했다.
우산을 들자, 남자의 머리가 다시 가려졌다. 그는 시중을 드는 것처럼 조금 뒤에서 파레사를 따랐다.
제가 나왔던 쪽문으로 향한 파레사는 마침 드나들던 시종 아이를 붙잡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봐, 근위기사 클로드 로렌에게 이곳에서 파레사가 찾는다고 전해주렴. 그는 황태자 궁에 있단다.”
황태자를 불러내는 건 너무 눈에 띄는 일이고…….
공작가의 자제지만, 클로드 로렌이 접촉하기에 그나마 만만했다. 그는 황태자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라지?
파레사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람?
잠시 후, 파레사는 황태자를 앞에 두고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사이길래, 황태자 전하를 이토록 쉽게. 애인이었나……!”
남자가 중대한 착각을 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파레사는 변명하는 대신 저도 놀랐다는 티를 냈다.
“황태자 전하, 어떻게 아시고…….”
클로드 로렌은 얼마 되지 않아 오긴 왔다.
하지만 자신의 권한으로 파레사와 남자를 황궁에 들인 그는, 바로 외곽의 빈 건물로 그들을 인도했다. 하도 심각하게 굳은 낯빛이라 파레사는 그가 첩자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이렇게 유인해서 해치우려는 건 아닐 테지?’
하지만 건물 안에서 대기하던 그들 앞에 이내 그가 나타났다. 황태자.
촛불을 켠 듯이 방안을 환히 밝히며 들어선 그는, 파레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클로드 로렌이 자기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왜 자기를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더군.”
클로드는 진짜 근위기사처럼 경직된 자세로 강조하여 말했다.
“맞습니다. 절대 아무 사이 아니고, 그녀는 제 취향도 아닙니다.”
“다른 이를 데려온 걸 보니, 아닌 것 같긴 해.”
뭐지? 이건……, 남녀 간의 문제로 불렀다고 생각하는 걸까. 파레사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마침 잘 되었군요. 황태자 전하를 불러낼 수가 없어서, 대신 그를 불러낸 것인데.”
그 말에 황태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그도 황궁에서 나름 인기가 있거든.”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도 제 취향은 아닙니다.”
클로드가 움찔했다. 주저 없이 돌려준 파레사는 뒤쪽에 선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자가 살아남은 마차납치범입니다.”
“근위병과 함께 사라진 그자인가.”
순식간에 진지해진 황태자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졌다.
황태자를 앞에 두고 자연스레 시선을 떨구고 있던 남자가 황태자의 안면을 목격하곤 입을 헤 벌렸다.
“나 언제 죽은 거지……?”
아마 죽어서 천사나 신이나 그 비슷한 뭔가를 목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린 파레사는 설명했다.
“그의 이름은 랄프. 그 근위병과는 막역한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정신입니다, 아마도.”
“예, 옛! 제정신……입니다.”
황태자는 그를 샅샅이 주시했다. 만약 그가 위장한 암살자라고 해도, 황태자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권능을 각성한 황족의 힘이란 그만큼 강력한 것이니까.
파레사는 그에게 기사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내 앞에서 했던 소리를 그대로, 황태자 전하께 설명드리도록.”
남자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즉시, 침묵이 깔렸다.
잠시 후, 고요하되 알 수 없는 기색으로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클로드, 잠시 저자를 데리고 옆방으로 가 있어.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
그새 의지해버렸는지 남자는 파레사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말 만한 덩치의 남자가 애처로운 눈으로 봐봤자 아무런 마음의 변화도 일지 않는다.
“당신의 신변은 앞으로 황태자 전하께서 책임지실 테니, 충실히 따라.”
“그…… 알겠습니다.”
남자는 깍듯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클로드는 왠지 기이하다는 시선을 던지고 남자를 끌고 나갔다.
황태자가 파레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째서 그런 차림으로 황궁을 나선 거지?”
온화한 눈매에는 드물게도 언짢은 듯한, 혹은 질책하는 듯한 기미가 배여 있었다.
파레사는 사실관계를 설명했다.
“황후 폐하의 명으로 부셰 백작저에 남몰래 방문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생각이 없으시군. 그런 차림이라면 황실 시녀란 걸 아무도 몰라볼 테니 무슨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황태자의 말투가 너무도 차가워 파레사는 조금 놀랐다.
황태자가 그런 식으로 황후를 비난하듯이 말하는 것은 처음 들었다. 황후가 그토록 냉대해왔음에도, 늘 무던히 받아넘기던 그였건만.
“저는 충분히 안전을 기했고, 부러 노리더라도 무슨 일을 당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이제는 아시지 않는지요.”
“……그래, 알지.”
황태자는 느리게 말을 삼켰다. 방 안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쑥 그들의 지난 만남이 기억 속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불편한 충돌이 있었다. 초상화니 뭐니 사건이 끼어 있긴 했지만, 어색한 사이가 되고도 남을.
파레사는 신분을 속이고 들어온 벨로나 나이트였고, 황태자는 그것을 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는 문제 삼지 않았고 파레사는 그가 문제 삼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필요든 호의든 믿음이든, 한순간에 박살 날 만한 기만이었건만.
‘나는 말했고, 그래서 납득한 걸까.’
그래, 파레사는 밝혀질 때까지 감추지 않았다. 제 입으로 털어놓았지. 허전한 듯이 아리면서도, 마음은 한결 후련해졌다.
가만히 파레사를 쳐다보던 황태자는 무언가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한숨과 함께 이내 물었다.
“부셰 백작저에는 어쩐 일로 방문했지?”
파레사는 자신이 설명해야 할 게 남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부셰 백작 부인에게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파레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미간을 좁힌 황태자가 턱을 짚었다.
“고모님이 도를 넘었군.”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를 납치하여 겁주려고 한 것이 공작 부인의 짓으로 밝혀진다고 한들, 대단한 문제는 아닐 텐데요. 왜 자신이 사주한 자들을 살해하기까지 한 걸까요.”
황녀이자 공작 부인을 고작 그 정도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녀로서는 그냥 황후의 전속 시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기껏해야 근신을 좀 당하고 벌금을 내겠지. 황녀니까.
단지, 그렇게 되면 황제도 앞으로는 황후의 편으로 확연히 기울어버릴 테지만.
“그건 공작 부인의 평판과 공고한 위치를 흔들 만한 일이다. 사교계는 명예를 중시하니까, 고모님은 만약 제게 본격적으로 혐의가 돌아온다면, 큰 흠집이 될 거라 여긴 거겠지.”
“그래서 흠집나지 않게 완전히 증거를 지워버리는 쪽을 택한 거로군요.”
“코웰 남작은 적임자지. 그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간 추적을 하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파레사는 문득 물었다.
“그런데 에레스 공작은 대체 뭘 한답니까.”
“공작은 원래 심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사람을 싫어하지. 1년의 반 이상을 지방의 별장에서 기거하는 터라, 에레스 공작가의 모든 것은 고모님 위주로 굴러가고 있어. 안다고 한들 고모님에게 별 말하진 못하겠지.”
“그런 무능한 자와 황녀를 혼인시키다니요.”
“고모님이 그를 선택하셨다고 들었다. 제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를 원했던 거겠지.”
“그래서, 이제는 어쩌실 겁니까.”
“듣기로는, 선황제께서 임종을 맞이하시기 전 황제 폐하께 고모님을 잘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기셨다더군. 고모님이 일찍이 돌아가신 폐하의 모후를 닮으신 모양이야. 그래서 생전 유독 고모님을 아끼셨다고 하지.”
황태자는 힘을 주어 덧붙였다.
“대대로 제국 황실은 금슬이 좋았거든.”
“……그랬군요.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에레스 공작 부인을 벌하실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렇다 한들 황실의 질서를 흔드는 일을 용납하지 않으실 분이니. 고모님의 지금 행동은…… 나로서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느껴지는군. 결코 위험이나 소란을 즐기는 분은 아니었는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뜸을 들인 황태자가 파레사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머님께는 당분간 함구하는 것이 좋겠어.”
“어째서요?”
“감정에 못 이겨 행동하실까 봐. 아직은 아니야. 아직 조사하여 확보해야 할 증거들이 남았으니까.”
파레사는 황태자가 무엇을 할지 알아차렸다.
코웰 남작. 에레스 공작 부인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를 파보아야 한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이후는 내가 알아서 하지. 수고했어.”
이제부터 황태자의 소관이었다. 전속 시녀로서는 나서선 안 될 영역이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제가 누명을 썼을 때, 즉각 왕녀를 데려온 대처로 보아 알아서 잘할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파레사는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역시, 신경이 쓰였다. 에레스 공작 부인이 어디까지 할지 모르겠다. 만약 마리도 위험한 상황이라면…….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이쪽으로 끌어들여 증언을 하게 해도 좋을 테지. 거절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파레사의 부탁을 들은 황태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보내두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함구하랬으니 뭐라고 잘 설명해야 할지, 가면서 생각해야 할 터였다. 인사를 마친 파레사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문을 빠져나가기 직전, 등 뒤로 황태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 사실 말인데.”
“…….”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무엇을……? 아니, 그 말은. 잠시 멈칫한 파레사는 발을 움직였다.
탁. 문이 닫히자 뒤늦게 혼란이 파도처럼 닥쳐왔다.
쫓기는 듯이 황후궁 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파레사는 중얼거렸다.
“짐작했다고? 그런데 어째서…….”
불현듯 걸리는 것이 있었다. 조금 지난 일이었다. 황태자가 제 정체에 가닥을 잡았다고 느꼈던 순간.
‘나는 기사의 손이라고 느꼈지만.’
자신을 보던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는 뒤이어 왕태녀를 언급했었지.
‘내가 권능을 가지고 있듯이, 뒤나미스의 왕태녀는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있지.’
‘검으로써 드러나는 권능.’
‘그런데, 뒤나미스에서는 왕족만이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래, 왕족이 아님에도 뒤나미스의 권능을 부여받은 존재, 벨로나 나이트. 뒤나미스의 검이자 영광.
파레사는 그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은 한 명이었다.
재능, 그리고 극도의 훈련. 검으로서 자신을 증명한, 선택받은 소수의 기사만이 벨로나 나이트가 된다.
자질을 가지고 도전하는 자는 제법 되나, 선택받는 자는 그들 중 일부. 벽을 넘어서는 자만이 벨로나 나이트가 될 수 있다.
그 벽은 어쩌면 재능이고, 어쩌면 노력이다. 두 가지 모두를 갖지 못하면 결코 넘을 수 없다.
파레사는 열여덟에 벽을 넘어서서 벨로나 나이트가 되었다.
황태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끌어 올려져 고막을 스친다.
‘그 권능을 가지는 데는, 조건이 따른다고 하지.’
그 말에 저는 대답했었다.
‘조건이 따르는 게 아니라,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벨로나 나이트의 권능은 검의 사명, 즉 검명과 함께 부여되는 것.
벨로나 나이트에게는 제각기 다른 사명이 주어진다. 그 사명을 따르는 것이 벨로나 나이트의 의무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파레사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어째서 나는…….’
왜 내게만. 파레사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사명이 어째서 뒤나미스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 희박하게 드문 현상이었다.
파레사는 열여덟에서 스물네 살에 이르기까지 줄곧, 벨로나 나이트로 살았다. 사명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어쩌면 이대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헀다.
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녀를 찾아왔다. 후려치는 듯한 깨달음으로.
권능이 똑똑히 알려주었다. 파레사의 사명이 뒤나미스에 있지 않다는 것을.
벨로나 나이트인 한, 파레사는 결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떠났지.’
언젠가 사명이 가리키는 바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으면서.
왜 다른 벨로나 나이트와는 달리, 자신에게만 유독 어려운 길이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음은 무거웠으나, 파레사는 한탄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길을 따랐다.
‘사실 뒤나미스를 떠나서…… 한동안은 즐겁기도 했고.’
새로운 경험, 낯선 땅. 여행은 그녀에게 평생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했다. 희망이 움텄다.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사명이 움직인다면 자신은 분명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파레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그것이 움직였다. 절대적인 의무가.
황후의 눈물 앞에서.
그런데, 정작 파레사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때 그는 분명히 말했다.
‘네가 뭐든…… 나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은 것 같군.’
그래, 이미 말했었다. 그 사실은 중요치 않다고. 의심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덮어 두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또 한 번 혼란이 닥쳤다.
‘어떻게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
벨로나 나이트, 파레사. 파레사와 그 칭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벨로나 나이트가 아닌 자신은 상상해본 적 없다. 권능이 그녀의 몸에 녹아든 순간, 결정된 일.
하지만 그는 파레사를 마치 평범한 한 여자처럼 대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눈치챘을 거란 의심을 지운 거야.’
그저 의미심장한 발언엔 다른 뜻이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알고도 황태자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교만일까. 차라리 그의 태도가 가벼웠다면, 한때의 유희려니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뒤나미스와의 충돌을 감수하겠다는 뜻이 된다.
‘말도 안 돼.’
파레사는 그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떠나 왔을지라도, 검명이 존재하고, 권능을 가진 한 파레사는 벨로나 나이트였으니까.
단순히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벨로나 나이트는 뒤나미스의 검이었다. 그리고 그는 란티어스의 황태자.
그들은 고작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사이였다.
‘그래, 당신과 나는 아니지.’
황태자조차 짐작하고 있었더라도, 덮어둔 것처럼. 그만큼 들춰내기 무거운 진실이기에.
어느덧 어스름에 잠겨가는 황후궁이 눈앞에 있었다. 마침 상념도 마무리 지어졌다.
남은 것은 변하지 않은 결론뿐이었다.
* * *
황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파레사를 맞이했다.
“왜 이리 늦은 것이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함구하랬지. 딴생각하느라 별다른 변명을 지어내지 못했기에, 파레사는 대충 뭉뚱그리기로 했다.
“좀 걸었어요. 황궁에서 거리를 두고 마차를 탔거든요. 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그래, 다행이로구나. 허면 백작 부인은 어떻게 되었더냐. 어디 아프다더냐?”
파레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고 하네요.”
“저런, 세상에! 다친 데는 없고?”
“네, 다행히도.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요양 중이랍니다. 백작이 곁을 지키고 있더군요. 여기 편지를 가져왔어요.”
파레사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 편지는 젖지 않았다. 옆에서 슥 본 바로는 전달해도 무방한 내용만 적혀 있었다.
황후는 그것을 펴들고 읽었다.
“심려 마시라고 하는구나. 그래도, 험한 일을 당한 것치고는 멀쩡한 듯해……. 회복되면 다시 나를 방문하여 담소를 나누고 싶다는구나.”
이번에는 빠르게 쓴 편지치고 글씨체가 안정적이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황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요.”
임무를 마쳤으면 자리를 떠야 한다. 황후가 캐물어서 이상한 점을 알아내기 전에.
파레사의 눈길이 시계로 슬며시 움직였다. 무엇보다 퇴궁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후의 시선이 파레사를 훑었다.
“그런데 너는 왜 얼굴이 그런 것이냐.”
“제 얼굴이 어때서요.”
“안색이 창백하구나. 옷도 축축해 보이고…… 모자, 아니 모자는 왜 그 모양인 것이야!”
황후가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달려들다시피 파레사에게로 다가섰다.
파레사는 순순히 모자를 벗어서 그녀에게 넘겼다. 축축해져서 볼품없어진 모자였다.
“오는 길에 비를 맞아서요.”
“우산을 빌렸어야지! 세상에, 그 모자가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 조심히 쓰고 반납해야 할 게 아니냐!”
“갑자기 내린 비였어요. 그리고 안 쓰시는 건 줄 알았지요…….”
파레사는 꼬박꼬박 대꾸했다. 울상이 된 황후는 모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한탄했다.
“아아아! 완전히 태가 망가졌구나. 이걸 대체 어쩐담. 안 그래도 요새 의상실에서 주문도 못 하는 데……. 이 모자는 맞춤 제작이란 말이다! 어쩐지 너한테 씌워줄 때부터 못 미덥더라니.”
“그렇게 아끼시는 모자면 다른 것을 빌려주시지 그랬어요.”
“이 모자가 네 그 차림에 딱이었단 말이다! 그게 가장 어울렸어!”
암행에도 패션코드를 생각하는 황후였다. 파레사는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버리고 새로 사시는 게 어때요. 어차피 모자도 많으신데.”
“무슨 소리냐? 그 모자는 하나뿐이야! 되었다. 노라에게 말해서 어떻게든 살려볼 것이다!”
황후는 초조한 얼굴로 모자를 더듬었다. 다행히 망가진 모자에 완전히 신경이 사로잡힌 황후는 평소와 다른 파레사의 기색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못했다.
파레사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옷은 안 돌려드려도 되나요?”
“옷은 주려고 했다. 하지만 모자는 고민했단 말이다!”
무슨 황후가 이렇게 통이 작담. 그냥 고민할 것 없이 이 김에 흔쾌히 둘 다 주면 되잖아.
파레사는 퉁명스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옷은 잘 빨아 입지요.”
모자가 비를 맞아준 덕에, 옷은 약간 젖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는 좀 씻고, 고단한 몸을 누일 때였다.
하지만 황후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부셰 백작 부인이 강도를 당한 일, 혹시…… 니시아나와 상관있는 게 아니냐?”
부셰 백작 부인은 말했다. ‘잘 생각하고 행동해’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하지만 파레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만약 백작 부인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편지에 적혀 있지 않았겠는지요. 저한테 직접 전달하게 했으니까요.”
누군가가 엿볼 만한 과정이 없이 전달된 편지다.
백작 부인은 단지, 편지에는 안부만 썼을 뿐이고 자세한 건 파레사가 말할 거라고 생각한 듯하지만.
“그……렇겠지. 좋아, 이만 쉬렴.”
수긍하는 황후를 두고 돌아서며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떠나는 파레사의 등에 대고 황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가는 길에 노라를 불러서 내게 보내오렴. 내 이 모자를 어떻게든 해 보아야겠다!”
“예.”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자는 수습 불가능의 판정을 받고 노라의 것이 되었다.
그날 밤 노라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조금 쭈글쭈글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위에 장식 붙여서 가리면 쓸만할 거예요. 손상된 물건을 황후 폐하가 쓰시기에 좀 그렇죠. 이건 빨 수도 없는 재질이니까.”
왜 내 모자를 빼앗긴 것 같지? 파레사는 왠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대신 황후는 보너스만큼은 잊지 않고 두둑이 챙겨주었다.
조금씩 쌓여가는 제 재산을 생각하며 파레사는 근심을 잊었다.
‘이젠 좀 여유가 생겼어.’
황태자와의 일이야,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좋다. 당분간은 그도 코웰 남작과 니시아나의 연결고리를 조사하느라 바쁠 테니까.
그러나 며칠 뒤, 황후궁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들었다.
폭풍의 징조를 안고서.
* * *
“아버지.”
황후는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는 문전까지 뛰어나와 상대를 맞이했다.
“이런, 황후 폐하. 앉으시지요.”
“아버지도 어서 앉으세요.”
두 사람이 모두 자리를 잡고 나자, 파레사는 차를 내왔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선 채, 난데없이 방문한 중년 남자를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패터스 자작. 황후의 아버지. 갑작스레 찾아든 자작은 권위적이고 깐깐한 인상이었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매와 찌푸려진 눈매, 반듯하고 깔끔한 무채색의 예복까지도.
웃는 날보다는 근심 속에 있는 날이 더 많을 것 같은 남자다.
준수한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도 대단한 미남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황후를 닮은 상이기도 했다. 아니, 황후가 그를 닮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부녀지간으로 보였다.
사이가 그리 돈독하지 않은지, 황후는 어색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어쩐 일로……. 오셨는지.”
“영지의 일로 갑작스레 황궁을 방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그동안 격조했던 듯하여 찾아뵈었습니다.”
느릿하지만 정중한 말투였다. 패터스 자작은 파레사가 내온 차를 들이마셨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파레사는 황후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정보를 떠올려보았다.
결혼 전에 황후는 패터스라는 하급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다. 아래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 한 명.
황후가 결혼한 직후, 패터스 가문 사람들은 제도에서 멀지 않은 지방의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고 그리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끔, 제도로 올라올 때마다 황후를 방문할 뿐, 조용히 살고 있다고 들었다.
애초에 황후가 결혼했을 당시,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아 자연히 그리되었다고도 한다.
모두가 패터스 가문에 눈총을 던진 이유는 하나였다. 황후를 배출하기엔 가문의 격이 너무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패터스 가문은 대대로 제도에서 자리를 틀고 살아오기는 했지만, 남작조차 아니고 고작해야 준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세습 귀족 중에서는 최하위의 신분으로, 제국의 법률상 가까스로 귀족으로 쳐주는 수준이다.
평민과 비교하면 부유한 축에 속했지만, 귀족으로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처지였다.
특히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즐비한 이 제도에서는.
그래도 황후가 황제와 결혼하기 전에는, 제도에서 그럭저럭 다른 귀족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잘 살아왔다고 들었다.
황후가 후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여 황제와 만나게 된 것도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였다.
그 이후에 모든 것이 비틀렸지만.
‘하필 이런 때에 찾아오다니, 이유가 뭘까.’
파레사는 비켜선 채로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주시했다.
패터스 자작이 건조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간 잘 지내고 계셨는지요. 요새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황후는 눈에 띄게 찔끔한 기색을 보였다.
“그럭저럭 괜찮게 지내고 있어요. 신경 쓰실 일은…… 없었어요.”
“그래야지요. 황자와 황녀 두 분께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계시니, 황후께서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면 되실 일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권위적이고 단정적인 음성. 그 말에 황후는 입을 다물었다.
파레사는 그녀가 어째서 힘든 와중에 방문한 아버지를 반기지 않는지 바로 깨달았다.
‘전형적인 제국의 귀족 남자로군.’
황후가 무어라 말하든 투정으로 치부해버릴 게 분명하리라. 그걸 아는 황후는 새삼 그에게 푸념하지 않았다.
황후의 모습을 훑은 자작이 말을 이었다.
“드레스가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감사합니다.”
“의상실에서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일 테지요. 결혼 전에는 누리기 힘들었던 호사가 아닙니까. 황후가 되셔서 얻은 것이 많습니다. 그것들을 생각하시며 위안 삼으시지요.”
“예, 아버지.”
“오랜만에 뵙는 황후께서 여전히 아름다우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귀족 여인에게 아름다움은 큰 재산이니, 갈고닦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황제께서도 한결같이 애정을 주실 것입니다.”
“예…….”
황후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떨궈졌다. 파레사는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급히 수습했다. 도무지 들어주기 힘든 설교였다. 게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끼고 베푸는 삶은 여인의 미덕입니다. 아름다움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은 좋으나, 드레스나 보석 같은 사치품에 씀씀이를 치중하시면 남들 눈에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가 대단히 호화로운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무도회에 참석하셨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그건 황제 폐하의 선물이에요. 요새는 사고 있지 않은걸요.”
“다행이로군요. 황제 폐하의 은총에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낌없이 표현하셔야 합니다. 또한, 다른 소양에도 힘쓰시는 게 어떤지요.”
“다른 쪽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자, 황녀 전하께 모범이 되셔야지요. 책을 읽고, 수업을 받아 여러 방면에서 교양을 갖추셔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그저 기본으로, 지혜와 겸양을 갖추셔야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지 않겠습니까.”
마치 황후가 어리석고 아름다운 것밖에 장점이 없어, 모두가 그녀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투였다.
이런 자는 대개 자녀의 흠을 먼저 보고, 다른 이들의 꼬투리에 감싸거나 반박하긴커녕 화살을 자녀에게로 돌린다. 누구보다 엄격한 눈으로 평가하면서.
“황후 폐하는 이미, 그림과 음악에 훌륭한 소양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불쑥 입을 연 파레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갑자기 끼어들어서 송구하오나, 황후께서는 자랑처럼 느껴지는 탓에, 부친께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동그랗게 커진 말린 장밋빛 눈동자가 파레사에게로 꽂혔다. 그녀는 비난도 지적도 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동조였다.
자작의 눈매에 못마땅함이 깔렸다.
“언뜻 듣기로는, 전속 시녀에 관한 일로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잘 해결되었답니다. 오해가 좀 있었을 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내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만―”
“폐하의 뜻에 순종하며 사셔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준남작에 불과하였던 우리 가문을 제대로 된 귀족 반열에 올려 주신 폐하의 은혜를, 평생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파레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또다시 입 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이런 소리를 듣고 참고만 있는단 말인가.
자작이 하는 말은 족족, 모욕처럼 들렸다. 그건 황후를 섬기는 입장에서는 용납해선 안 될 소리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그는 황후의 아버지였다. 시녀인 파레사가 감히 끼어들 문제는 아니기도 했다.
‘나한테는 할 말 다하면서.’
파레사는 눈에 잔뜩 힘을 주며 황후를 쳐다보았다. 등을 떠미는 듯이.
“아버지, 저는…….”
뒤늦게야 황후가 입을 열었다.
“저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한 것이지, 포기하고 인내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에요.”
“황후 폐하.”
“그리고 황후란 황제의 아내이지, 마냥 순종하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꽤 다부진 목소리였다.
잘하고 있어! 좀 더 격하게 말해도 좋을 텐데.
하지만 황후는 역시나 제 혈육 앞에서는 약한 듯했다.
자작이 철없는 것을 보는 듯이 언짢게 말했다.
“황후란 자리는 사시고 싶은 대로 사실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늘 자신을 갈고닦으며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귀족들의 인정이 따라오기 마련이지요.”
그들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치란 말이야! 파레사는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황자와 황녀, 두 분을 생각하며 조용히 사셔야지요. 그것이 황후로서든 귀부인으로서든 여인의 미덕일 것입니다.”
말하다가 목이 탔는지, 자작의 손이 찻잔으로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잠시 후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장창! 그대로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이 바닥으로 직격한 것이다.
화들짝 놀란 황후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버지, 찻잔이!”
“죄송합니다. 이런…… 찻잔을 깨버리고 말았군요.”
“이리 주시지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다행히 그새 차가 식어 있었던 터라, 파레사는 서둘러 찻잔을 수습했다.
자작의 상태를 살피던 황후가 문득 의아하게 눈을 떴다.
“아버지, 손이 왜 그리 떨리시는 거지요?”
“피로해서 그럴 겁니다. 요새 가끔 그렇더군요.”
패터스 자작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듯 그의 손에는 여전히 잔떨림이 일고 있었다.
새로 차를 내온 파레사는 그의 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예리한 감각이 신경을 긁고 지나갔다. 어딘지 걸렸다.
황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낯빛도 안 좋아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황제 폐하께서 제 전속 시녀를 내보내길 원하셨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자작에게선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황후는 마침내 의심을 꺼냈다.
“혹시 에레스 공작 부인이…….”
그 노골적인 언급에, 자작이 반응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배려심 넘치시는 분 같더이다. 종종 우리 가문을 살펴주십니다.”
“살펴주신다고요? 아버지!”
황후는 비명처럼 외쳤다. 파레사는 그녀와 자작의 반응을 보면서, 황후가 공작 부인 이야기를 부친에게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황제 폐하의 여동생이시지 않습니까. 하긴…… 제게 아무 말씀도 말라고 하시더군요.”
황후는 기절할 듯이 얼굴을 감싸 쥐며 물었다.
“무엇을요? 뭘 말하지 말라고 해요?”
“우리 가문을 챙겨주신 것을 말입니다. 오해가 있어, 소원해진 사이라 황후 폐하께서 불편해하실 거라고……. 이것저것 선물을 주시면서 필요한 것이나 도와드릴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황후의 목청이 절로 높아졌다. 득음한 황후의 목소리는 방안 전체에 가득 울려 퍼지고도 남았다.
고막이 얼얼한지, 자작이 귀를 틀어막았다.
황후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니시아나한테 받기는 뭘 받아요! 그녀와 제가 어떤 사이인 줄 알고!”
“황제 폐하의 여동생이시니, 황후께는 시누이 되시는 분인데…… 어찌 이리 언성을 높이십니까.”
자작은 정말로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황후는 미간을 짚었다.
그래, 맞다. 니시아나는 황제의 여동생. 그들은 친인척 간이었다.
그러니 선물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작이 그녀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에레스 공작 부인께서 황후를 무척 싫어하셔서 갖은 음모를 다 꾸며서 사교계에서 따돌리고 계시거든요. 뭔가 수작을 꾸미고 계실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습니다.”
친절하게 설명한 파레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보다 다른 것이 더 문제가 될 것 같군요. 실례하겠습니다.”
파레사는 후작의 손목을 움켜쥐고 소매를 걷었다.
“아니, 이 무슨! 황후 폐하…….”
자작은 혼란하고 당황한 나머지 미간만 찌푸릴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파레사는 손목 안쪽에 시퍼렇게 불거진 핏줄과 푸른 반점을 보면서 확신했다.
‘역시 그랬구나.’
제가 여기 있고, 그가 찾아와 바로 적발해서 다행이었다.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파레사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황후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황후 폐하, 이것은 중독 증상입니다.”
“뭐? 중독?”
“패터스 자작께서는 중독되어 계십니다.”
“내가 중독이라니! 이건, 대체 무, 무슨 말을.”
손목을 놓아준 파레사는 곧바로 자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사하듯 압박적인 말투였다.
“요새 몸이 좀 안 좋으시죠? 피곤하고, 손발이 떨리고. 밤이 되면 잠이 잘 오지 않고요.”
“그렇기는 하오만……. 황후 폐하, 저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파레사의 질문에 대답이나 하세요!”
황후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자작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자주 드시는 차가 있나요?”
“옆 영지에서 건강에 좋다는 차를 선물받아서, 그것을 주로 마신다오.”
“그 차 이름이 뭔가요?”
“나리움이라는 이름이었소. 그건 건강에 좋다고 소문나서 다들 마시는 차인데……. 나만 마시는 것도 아니라오.”
“그렇겠지요. 혹시 에레스 공작 부인께서 선물하신 것 중에, 자주 복용하시는 게 있나요?”
“그…… 약재와 귀한 음식과 술…… 같은 것이었다오. 그리 값지고 비싼 물건은 받지도 않았소.”
황후가 끼어들어 소리를 높였다.
“술을 드셨군요! 그게 틀림없어요! 세상에, 안 그래도 약주를 그렇게 좋아하시더니!”
“그 술의 이름은 뭔가요?”
“아콘이라는 이름의 술이요, 그, 자양강장에 좋다고 해서…….”
자작이 난감한 듯 고개를 숙였다. 파레사는 황후를 돌아보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뒤나미스에서 알려진 비법이에요. 나리움과 아콘, 둘 모두 원기를 돋우는 데 강력한 효능이 있어요. 각자 복용하면 건강에 좋지만, 두 개가 조합되면 독처럼 작용하지요.”
황후의 눈빛에 충격이 떠올랐다.
“독이라고?”
“서서히 몸을 좀먹고 마비시키고, 이지를 상실하게 해요. 그리고 마침내 광증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증상이 심화되었다면 거동이 불편해진 자작이 황궁에 오지도 못했겠지.’
그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그, 그 무슨!”
자작이 눈을 크게 떴다. 황후가 팔을 걷어붙였다.
“니시아나, 이 년이 아버지한테 독약을 먹여!”
황후의 눈이 희번득 돌아갔다. 자작은 조신한 모습만 보아왔던 딸의 격앙된 기세에 심히 당황했다.
“황후 폐하, 어찌 그런 언동을!”
파레사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복용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서둘러 치료하셔야 합니다. 자작님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에요.”
“그래, 치료.”
고개를 끄덕인 황후는 비밀리에 황궁 의원을 불렀다.
“확실합니다. 이는 중독입니다. 한 달간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졸지에 황후궁에 들른 자작은 중독 증상을 판정받고 병상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들으셨죠? 나으실 때까지는 궁 밖으로 나가실 수 없어요!”
엄포를 놓은 황후의 기세에 밀려, 자작은 그대로 황후궁에 감금되었다. 황후가 파레사를 향해 말했다.
“혹시 친정 식구들에게도 술수를 부려놓진 않았을지 우려되는구나. 다른 식구들은 술을 즐기진 않는다만.”
“사람을 보내어 살피는 게 좋겠어요.”
황후궁의 사람은 충분히 에레스 공작 부인이 손댈 수 있다. 그러니 그녀가 손댈 수 없는 사람들을 보내야 했다.
황태자의 사람이라면, 에레스 공작 부인이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할 터. 이번에는 황후도 순순히 편지를 썼다.
“이 녀석이 가끔은…… 쓸모가 있긴 하구나.”
못내 인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파레사는 슬쩍 편을 들어주었다.
“가끔은 이라니요. 여태까지 많이 쓸모가 있었는걸요.”
황후도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었다.
“그래, 그렇지. 이 황궁에 들어선 이후로 그밖에 없었구나, 제대로 내 편을 들어주는 이는.”
황후는 쓸쓸한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파레사, 어서 채비를 하거라!”
“채비라니요.”
“내, 니시아나 그 년을 만나봐야겠다!”
황후가 자청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잠깐 눌러두었던 분노가 터져 나온 황후의 두 눈이 번뜩였다.
“만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 물음에 황후가 주먹을 확 치켜들었다.
“머리채를 죄 뜯어놓든가 해야지, 내 그 망할 년을 진짜! 내가 황후가 아니게 되더라도, 그 년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진정하세요. 다짜고짜 쳐들어간다고 그녀가 만나줄 것 같은가요? 황후 폐하만 곤란을 겪게 만들겠죠.”
아무리 에레스 공작 부인이라도 황후와 육탄전을 벌이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화가 나서 쳐들어가면 따돌리며 발만 동동 구르게 만들겠지.
파레사는 신속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아예 들이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다.
“조금만 참으세요. 마침 며칠 후에 적절한 날이 오니까요.”
에레스 공작 부인도 도망치지 못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파레사의 설명을 들은 황후는 가까스로 화를 눌러 참았다.
“이 년을 내 가만두지 않겠어! 어쩜 이리 악독한 것이 다 있담!”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하며 황후는 홱 방을 나섰다. 아마 그녀는 오늘도 베개를 두드릴 참이리라.
이내 파레사도 조용히 움직였다.
‘사과를 깎아다 줘야지.’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일단은 화를 식혀야 했다. 파레사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토끼 모양으로 예쁘게.’
살아 숨 쉬는 듯한 토끼를 세공해다 바치면 황후의 기분도 조금이나마 풀리리라.
* * *
니시아나 에레스는 거울 앞에서 몸을 단장하고 있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그녀의 생일.
모두가 축복하는 가운데, 흐트러짐 없이 황녀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날이었다.
곱게 틀어 올린 은발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니시아나는 오연하게 턱을 들었다.
사교계에는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영애들이 있다지만, 그녀처럼 고고하며 은은한 기품을 풍기는 이는 없었다.
이제까지 그녀가 사교계의 꽃으로서 지위를 누려온 것은 그녀가 황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일 축하해.’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했던 그 목소리는, 어느 샌가부터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지만, 니시아나는 대답했다.
“고마워.”
그린 듯한 미소가 밴 얼굴은 어딘지 서늘했다.
황실의 혈통은 막강한 권능을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심장에 차가운 피가 흐르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니시아나는, 유독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졌다.
그녀의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도 냉정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표정일 뿐. 진정으로 웃어본 적이 드문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도 녹아버리게 하는 상대가 있었다.
그 유일한 상대를 마주할 때면, 니시아나는 제 심장이 무르고 부드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감상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부, 부인. 무도회에 갈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그녀의 생일을 맞아 돌아온 남편, 에레스 공작이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그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이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총을 받자마자 절로 숙여 드는 저 고개를 보라.
결혼한 이후로 줄곧, 그녀에게 짓눌려 살아온 남편은 기도 펴지 못했다.
‘나약하기는. 이 얼뜨기는 대체 언제까지 이럴 셈인 걸까.’
그렇기에 골랐건만, 가끔 비위가 상하여 견딜 수 없다. 니시아나는 경멸감을 감추며 남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니시아나는 마지막으로 공들여 머리를 손봤다. 그녀는 약한 것을 싫어했다.
아니, 세상은 그녀가 싫어하는 것투성이였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기에 특별하고, 그 특별함은 니시아나에게 삶의 의미였다. 니시아나는 그것을 잃은 후에야 절절히 깨달았다.
나약하기에 잃었다. 가장 혐오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녀는……. 달라지기로 했다.
그때 누군가 또 한 명이 방으로 들어섰다.
“공작 부인, 잠시 이야기를 나누러 찾아뵈었습니다.”
공작 부인의 처소에까지 당당히 들어온 낯선 남자.
하지만 에레스 공작은 그에게 감히 지적조차 하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만을 보였다.
“베녹스 후작.”
“자리를 지켜주시지요.”
그의 무심한 시선을 맞받은 에레스 공작이 위축된 채 얼른 물러났다.
니시아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화장대의 거울에 두 남녀가 비쳤다. 그들 사이에는 은밀한 공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온도만큼은 서늘했다.
그녀는 후작을 향해 온화하게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요?”
후작은 그녀에게 꿈을 꾸게 해준 남자였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으리라 믿었던 것을 그는 꿈꾸게 해주었다.
가장 쓸모 있는 존재. 그리고 동족.
후작은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니시아나와 공유했다. 니시아나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잘 되었군요. 우리는 이제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어요.”
“아직 시작일 뿐입니다.”
“그럼요, 그 끝까지…… 나는 기꺼이 나아갈 거예요. 아무렴요. 그럼 이제 무도회에 가볼까요?”
니시아나는 후작이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앞장섰다.
그녀의 등 뒤로 베녹스 후작이 느릿하게 뒤따랐다. 그리고 그녀의 얼뜨기 남편도.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무도회에서도 틀림없이 그러하리라.
그러나 예상은 비틀렸다.
황후, 에리카. 니시아나는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그녀를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가 난 듯한 눈빛. 자신을 향해 치닫는 빠른 발걸음.
‘낯선 모습이로구나.’
이제까지 겁먹은 새끼고양이만도 못하게 굴었던 황후였다.
‘악녀라니, 우스운 별명이지.’
제가 의도한 대로 소문나 있기는 하나, 니시아나는 황후에 대해서 잘 알았다.
과거엔 저를 향한 것이 호의인지 악의인지도 모르면서, 이쪽과 친해지겠다고 붙어 있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니시아나의 속내를 알아챈 이후에도, 에리카는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저 겁먹어 시선을 피하고, 도망치고…….
‘나약한 것.’
하지만 납죽 엎드리는 제 얼뜨기 남편과는 달리 현 황후, 에리카는 꽤나 괴롭히는 보람이 있는 상대였다.
에리카가 파르르 떨거나 애써 동요를 숨기려는 모양새를 볼 때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즐거움이 차올랐다.
니사아나 자신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던 가학적인 쾌감이었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었겠지. 니시아나는 때때로 생각했다.
그래, 에리카에게는 죄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 그녀조차도 알지 못한 채 덧씌워진 죄가.
황후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범이 되어버린 죄가.
만약에 모든 것이 비틀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예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면.
니시아나는 사교계의 꽃으로서 기꺼이 에리카를 포용했으리라. 아마 어떤 귀족과 혼인하여, 분명 눈에 띄는 귀부인이 되었을 그녀를.
넘실거리는 핑크빛 머리카락과 말린 장밋빛 눈동자를 가진 에리카는 아름다웠고, 오늘 역시도 그러했다.
그녀는 그 독보적인 매혹에 호의와 찬탄만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녀도 좋아했을지 몰라.’
하지만 운명은 에리카를 있어선 안 될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니시아나가 증오하는 것은 그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에리카를 짓밟아야만 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니시아나에게 황후는 오로지 한 명이었다. 그 자리를 이 나약한 하급 귀족의 여자가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나친 아름다움은 경계를 부르지.’
요녀라 칭해지는 그녀의 별명을 이용하여 이 상황을 그려내는 것은 퍽 쉬웠다.
누군가 하나를 고꾸라뜨려 짓밟는 건, 실은 모두가 은밀하게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 앞에 다다른 에리카를 보며 니시아나가 선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환상이 덧씌워져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자비롭게 보이는 미소였다.
“제 생일 무도회에 와 주시니 기쁩니다.”
황후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니시아나, 생일 축하해요. 내 선물을 받아주시겠어요?”
내밀어진 그녀의 손에는, 와인 잔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탁한 액체가 그 안에 가득 넘실거렸다.
“황후 폐하, 이 무슨!”
공작 부인의 추종자 하나가 끼어들어 제지했다. 하지만 황후는 눈썹 까딱하지 않았다.
“왜, 못 마시겠어요?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에요. 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받아주시지요.”
“송구하지만, 제가 비위가 약하여서. 색이 탁해 보이는군요.”
“이게 독으로 보이나요? 몸에 좋은 건데. 당신이 내 아버지께 먹였던 것처럼.”
그 말에 술렁임이 일었다. 얼마 전 황후궁에 패터스 자작이 방문했다는 소식은 들은 터.
니시아나가 곤혹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그저 소문난 약주를 선물해드렸을 뿐인데, 마음에 차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렇다 한들 독이라니요.”
술술 내뱉는 입술을 황후는 빤히 쳐다봤다.
말만 들어서는 누구도 그녀의 진의를 의심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황후는 저것이 얼마나 거짓과 기만을 반복하는 입인지 안다.
“당신은 알고 있었잖아.”
나리움과 아콘이 만나면 독이 된다는 것.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니시아나의 태연한 반응이 확신을 줬다. 가슴 속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황후 폐하, 오늘은 공작 부인의 탄신 무도회―”
누군가가 끼어드는 찰나, 황후의 손이 움직였다. 촤악!
그 구린내 나는 액체를 니시아나는 머리끝부터 뒤집어써야만 했다.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가운데 서 있어서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탓이다.
황후는 그대로 와인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콰장창!
이미 주목받고 있건만, 모두가 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소리였다.
황후는 환하게 웃었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니시아나. 꼴 좋군요.”
그리고 그대로 휙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을 박차고 나섰다.
“손수건!”
한 귀부인이 비명처럼 외치며 니시아나의 얼굴에서 뚝뚝 묻어나는 액체를 훔쳐냈다.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뒤늦게야 반응이 쏟아졌다.
“오, 맙소사!”
“공작 부인!”
“세상에, 어떻게 감히 황녀께 이런 짓을.”
그 짓을 벌인 게 황후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모두가 앞다투어 손수건을 내밀며 봉변당한 니시아나를 인도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무슨 액체인지 모르니, 어서 씻어내셔야 해요!”
“그런데 독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람.”
술렁임이 일었다. 누군가가 금세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이 있었던 거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한 단호한 말투. 니시아나의 수족인 러셀 백작 부인이었다.
영향력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잠시나마 인 의혹을 덮기에 충분했다.
파우더룸에 들어선 니시아나는 손수건으로 마저 얼굴을 훔쳤다. 머리며 화장이며 드레스까지. 모조리 엉망이었다.
그녀 평생 이만한 굴욕을 당해본 것은 처음이다.
“어쩜 이런 짓을, 그 천박한 여자가!”
“되었어요.”
니시아나는 웃고 있었다. 한 방 맞았음에도 어딘지 유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의 미소를 엿본 러셀 백작 부인이 다른 의미로 그것을 해석했다.
“아아, 이 사실을 황제 폐하께 고하여야겠어요. 어떻게, 황녀 전하께 이런 모욕을!”
그녀는 황녀 시절부터 충실한 니시아나의 추종자였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랬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부터 니시아나는 그들을 머리 꼭대기에서 지배해왔다.
그로부터 수십 년을 구축해온 공고한 사교계의 질서. 그것을 아무 기반 없는 황후가 새로 들어와 뒤흔들 수 있을 리 없다.
그녀가 황손을 낳는다고 한들, 평생 계승권을 살리지 못할 황족에 불과하니까.
“폐하의 귀에는 이미 들어갔을 거예요.”
니시아나는 확신하듯 말했다. 그리고 아마, 이 사건이 순탄히 무마되지는 않으리라.
니시아나의 입가가 조금 더 깊어졌다.
* * *
황후는 무도회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레사와 마주쳤다.
함께 마차에 오른 직후, 파레사가 말을 건넸다.
“잘하셨어요.”
“속이 후련하구나. 그래도 뺨은 때려주고 싶었건만.”
하지만 둘이 있을 때 뺨을 치면 몰라도, 남들 앞에서 치는 것은 과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선을 지켜야 했다.
“와인 한 번 제대로 끼얹으셨던데요. 머리부터 옷까지 싹 다 젖게.”
“피부에 안 좋은 성분이야. 분명히 두드러기가 날 게다. 냄새도 잘 빠지지 않을 게고.”
아무렴. 피부병이 잠깐 아프고 마는 것보다는 더 후유증이 오래가지.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황제 폐하도 곧 알게 되실 거예요.”
그것은 즉, 황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황후의 표정은 뭔가를 내려놓은 듯이 평온했다.
“알고 있다. 나는 이미 각오를 끝냈다.”
황후의 눈빛에 회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10년을 버텼나. 신혼에 생긴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그조차 힘들었으리라.
그 아이들조차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다. 황족의 자녀들은 그렇게도 일찍이 품에서 벗어난다.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세요. 잘 끝날 수도 있잖아요.”
파레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황후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그래, 다만 이번에는 이제까지처럼 입 다물고 있지는 않겠다.”
내 기분이 어떻고, 그 일이 어떻게 느껴졌고 누가 나를 싫어하고 내게 무슨 짓을 했고.
남편에게, 하물며 황제에게 토로하는 건 황후의 미덕이 아니었다.
귀부인의 미덕, 황후의 미덕, 여인의 미덕.
약자에게 엄격하게 지워지는 그 많은 미덕의 무게 앞에서 황후의 입은 자연히 다물렸다.
우악스럽게 목소리를 내어 싸우는 것보단, 참고 견디며 회피하는 것이 고상한 삶이라 했기에.
황제는 그 모든 사건을 별일 아닌 것으로 축소시켜 치부했다.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두에게 그렇게 느껴지도록 일을 사소하게 만드는 것은 니시아나의 특기였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그래선 안 됐다. 어떤 이유도 그의 무능력과 무심함을 납득 가능한 것으로 바꿔주지는 못했다. 적어도 황후에게는.
파레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 생각하셨어요.”
충돌 없이도 자연히 해소되는 것이 있는 한편, 충돌이 없다면 그저 묻어두는 것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이런 문제가 그랬다.
모든 것을 솔직하고도 명백히 드러내야 할 때였다.
* * *
그들이 황후궁으로 돌아오고 몇 시간 후, 저녁 무렵 황제의 방문이 있었다.
파레사는 잠자코 구석으로 비켜서며 상황을 주시했다.
“폐하, 어서 오세요.”
황제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노여움과 곤혹스러움이 섞인 눈빛.
그의 표정은 황후를 보고도 풀리지 않았다.
“황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선 들었소.”
엄격하되 가라앉은 말투였다.
“둘 간에 어떤 일이 있었든 오늘은 니시아나의 생일이었소. 꼭 이런 날 그랬어야 했소?”
권능을 가진 그가 언성을 높였다면 황후는 짓눌려 입 여는 것조차도 어려웠을 터. 아직 거기까지는 감정이 고양되지 않았다.
황후는 시선을 내리깔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내내 제 생일을 망쳐왔어요. 제가 하루쯤 못 그럴 것도 없겠지요.”
그리고 차갑게 덧붙였다.
“저는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황제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황후가 그토록 냉랭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단언컨대 오늘이 처음이리라.
‘아니군, 시선을 내리고 있어.’
파레사는 날카롭게 파악했다. 그건 마치, 파레사가 황태자를 앞두고 겪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하지만 파레사가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황제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니시아나가 황후의 부친께 독약을 먹였다는 건, 오해일 뿐이라더군.”
그새 니시아나와 대화를 나누었던가. 그래, 그 자리에는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황후가 떠나고 난 뒤 도착한 황제가 니시아나와 먼저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뭐든 오해라 하지요. 오해고 착각이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녀가 선물한 아콘이라는 이름의 술은, 나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명주요.”
“그게 나리움과 합쳐지면 독이 되고요. 그래서 제 부친은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고, 치료 중이에요. 원하신다면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지금, 이곳에 계시니까요.”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그렇게 아시는 게 많으면서 왜 중요한 것은 모르세요?”
황후의 눈매가 일순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바짝 말라오는 입을 움직였다.
“파레사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는, 하마터면 아버지를 잃을 뻔했어요.”
“그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이오. 패터스 자작가에는 주기적으로 의원을 보내어 신경 쓰고 있소. 니시아나는,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오.”
황녀로서 오늘 같은 날, 그런 굴욕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황제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그의 질책하는 듯한 눈길이, 가슴을 찢어놓는 듯했다.
황후는 일순 숨을 헐떡였다. 그 사이,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 시녀.”
그의 시선이 파레사를 향해 꽂혔다. 권능을 담은 시선은 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담고 있었다.
“저 시녀가 들어온 후로, 황후가 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소. 뒤나미스에서 온 저 시녀가 황후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 같소만. 아무래도 내보내는 게―”
“변한 게 당연하지요. 제가 그녀 덕에 이제야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으니까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황후는 언성을 높였다. 짜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우리 결혼, 다들 좋아하지는 않았지. 힘들었을 거요. 많이 참아야 했을 테고. 하지만 황후는 그간 현명하게 처신해왔잖소. 왜 갑자기―”
“현명이요?”
황제의 말이 뚝 잘라 끊겼다. 황후의 눈빛이 노을 지듯 짙게 물들었다.
“입 다물고 있는 것이 현명인가요?”
그 눈에 비친 것은 절망이었다.
“폐하는 제가 참고 견디고…… 그저 입 다물고 있는 것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황제의 눈이 흔들렸다. 이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소. 곡해 마시오.”
“그것이 현명한 황후라면, 저는 차라리 어리석고 우둔한 여자가 되겠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얽혔다. 누구 하나,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대립이었다. 그것은 최초의 충돌이기도 했다.
황후가 재차 입을 열려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가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한 사람이 재빨리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자작님!”
황후궁 한쪽에서 치료 중이었던 황후의 부친이었다.
그는 파레사가 만류하듯 내뻗는 손을 무시하고 황제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 송구합니다. 제가 여식을 잘못 교육시켜, 황제 폐하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황후가 비명처럼 외쳤다. 황제도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자작이 나설 일이 아니오.”
하지만 자작은 이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공작 부인께서는 그럴 의도가 아니셨을 겁니다. 제가 나리움을 복용했다는 것을 모르시겠지요. 그저 좋은 의도로 하신 일에 우연이 겹쳤을 뿐일 겁니다. 아무렴요! 부디 여식의 도가 지나친 무례에 노여워 마십시오.”
황후가 그에게 성큼 다가서며 소리쳤다.
“아버지! 뭘 하시는 거예요?”
“에리카, 내가 언제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황제 폐하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 거라!”
자작의 눈빛이 간절하게 황후를 찔러 들었다.
제발 그만두거라. 황제의 여동생과 문제를 빚어선 안 된다. 네 앞날을 위해서. 네 자식들을 위해서. 우리 가문을 위해서.
황제와 이렇듯 다투다니. 그러다 황제의 총애를 잃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황제께서 널 벌하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네가 누리는 것은 모두 황제 폐하께서 주셨는데.
뜯어말려야 했다.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것이 그의 고루한 두뇌를 점령하고 있는 생각 전부였다.
그리고 파레사는 상황을 난장판으로 만든 자작을 강제로 끌고 나가야 할지 고심했다.
그가 난데없이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 미처 대처할 수 없었다. 눈앞의 광경이 감각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결국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황제였다.
“일어나시오, 자작. 여기 있는 에리카는 당신의 여식이 아닌, 내 아내이자 황후요. 자작은 나서지 않는 게 좋겠소.”
“소, 송구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그만…….”
황제의 말에 비굴한 개처럼 공손히 비켜서는 자작을 보며 황후는 가슴 한가운데가 턱 막혔다.
아찔해질 만큼 막막해지며, 감정은, 곧 한계점까지 치달았다. 그녀는 토해내듯 말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해요. 결국, 제가 입 열면 이렇게 되는군요.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렇게…….”
황후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 떨어져 내렸다. 이마를 짚던 황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후, 정히 그렇다면 내 니시아나를 다시 제도 밖으로 내보내겠소. 그녀가 어쨌든 자작을 중독시킨 건 사실이니까. 그럼 마음이 나아지겠소?”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내 황후는 기이하게도 잠잠해진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전이었으면 그걸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선을 넘어서면,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어지는 것이다.
“폐하께서 제 말을 들어주시지도,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지도 않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마침내 황후의 입에서 선언이 떨어졌다.
“우리 이혼해요.”
찰나처럼 간격을 두고, 황제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지독한 충격이 뇌리를 강타한 듯이.
“에리카!”
“황후,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황제와 자작, 심지어 파레사까지도. 모두가 선불 맞은 듯이 놀랐다.
황후는 물기 서린 눈동자로 고요하게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이내, 또렷해졌다.
“아내인 저보다 니시아나의 말을 더 믿으실 거면, 그녀와 결혼하지 그러셨어요?”
내쏘듯이 사납게 말하며 황제를 노려보는 얼굴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황후!”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주세요.”
“에리카, 그 무슨!”
경악하여 황후를 부르짖는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나가달라고요, 두 분 다! 아직 저는 황후고, 여기는 제 처소예요!”
황후는 쿠션을 들고 와 사납게 바닥에 패대기쳤다. 황제와 자작이 망연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건 파레사가 이 황궁에 들어와서 본 것 중, 가장 후련한 광경이었다.
황후의 불행에는 안 됐지만, 파레사는 어쩔 수 없이 쌤통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이윽고 패터스 자작이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일어나선 안 될 상황이 펼쳐지는 현실. 그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황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분하게 명했다.
“파레사, 어서 아버지를 모셔가렴. 치료 중이시잖니.”
“예, 자작님. 어서 가시지요.”
파레사는 급히 자작을 부축했다. 방을 빠져나오자 다른 시녀들이 그녀를 도왔다.
파레사가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자작을 침대에 눕히고 돌아왔을 때, 방안에는 황후 혼자뿐이었다.
문을 닫은 파레사는 뒷모습을 보이고 선 황후를 향해 다가섰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되셨나요?”
“가셨단다. 다음에 다시 오시겠다더구나.”
황후가 파레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니, 형태만 미소일 뿐, 그것은 미소라고 할 수 없는 비틀린 무언가였다.
“다음에 오실 때는 이혼장을 가지고 오셔야 할 텐데 말이지.”
마음이 무거워진 파레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괜히 이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닐지요.”
황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란다. 감히 떠올리지 못한 것뿐이지, 네가 그 말을 꺼낸 순간 내 마음이 움직였단다. 사로잡힌 듯이 이끌렸지.”
황제의 마차가 떠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나는 되돌아보게 되었단다. 그간 종종 그리하였지. 그러자― 어떤 생각이 들더구나.”
“어떤 생각인가요.”
“……내가 지난 10년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폐하를 사랑해왔던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황후의 목소리는 아득히 침잠된 채, 아래로 흘렀다. 마치 제 안 깊숙한 곳에 닿는 듯이.
“그 사랑조차 없었다면 내가 어찌 버텼겠니. 그간 마모되며 내게 남은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거든.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신분 상승을 노리고 황제를 사로잡은 요녀에 지나게 되고 싶지 않았어.”
“…….”
“그런데 오늘, 폐하께서 나를 탓하시는 것을 들으니 내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내렸단다. 그리고 깨달았지. 진작부터 조금씩, 그래왔다는 것을.”
말린 장밋빛 눈동자에 아련한 빛이 서렸다. 황후가 중얼거렸다.
“사랑이 무너질 수가 있더구나.”
“…….”
“그렇게 무너지는 것이더구나…….”
여운이 길게 그림자를 남기는 목소리였다.
황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언가를 꾹 눌러 참듯이 그녀는 떨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파레사는 그녀의 어깨로 향하려던 손을 거두어 곱게 말아쥐었다. 그 대신,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자신을 모욕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학대지요. 황후 폐하는, 그렇게 될 만큼 스스로 무너지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대신, 사랑을 무너뜨린 것뿐이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마치 세월의 흐름 같은 마음의 변화였다.
“우셔도 좋습니다.”
보고 싶지는 않지만. 파레사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하지만 황후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어딘지 비어버린 시선을 허공에 던지며 말했다.
“폐하와 대화하며, 무엇이 가장…… 마음을 무너트렸는지 아느냐.”
“무엇이…….”
“내 남편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거.”
“…….”
“내 남편이…… 제가 뭘 하는 줄도 모르고 기꺼이 나를 상처입히고 있다는 게 슬프더구나. 그래서―”
무지와 무심함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피 철철 흐르는 꼴을 눈멀어버린 양 못 본 척하면서.
“다시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황후는 비통하게 내뱉었다.
“실망? 내가 선택한 것이 고작 이런 남자였구나! 내가 내 마음을 가치 없이, 시궁창에 처박아왔어! 나는 그리 느꼈단다.”
파레사는 누군가의 눈동자를 보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보석 같다고 느꼈던 순간을 떠올렸다.
황후의 마음은 역시도 보석이었다. 고이 아껴 간직해야 할 것을 시궁창에 처넣었다.
황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남편이 어찌 남편이겠니. 그는 남이나 다름없으니, 남이 되어야 하는 게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등 돌리는 게 가장 치명적인 법이지요.”
제가 내뱉으면서도 저를 찌르는 듯한 말이었다.
뒤나미스에 두고 온 이를 생각하며 파레사는 시선을 내렸다. 황후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걸 배신이라고 하지. 그래, 나는 배신당했다고 느꼈단다. 그것이 사실이겠지.”
“황후 폐하…….”
황후는 쓰라리게 웃었다.
“내가 모질어지면, 다 괜찮을지도 몰라. 어차피 귀족들은 정략결혼을 하는걸.”
실로 황제답게도, 그는 이성과 의무에 따랐고 충돌과 갈등을 안전하고 조용하게 조율하고 싶어 했다. 언제나 황후는 뒷전이었다.
정략결혼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단다. 세간에서 말하는 요녀는 되기 어려울 성싶은가 봐.”
애초에 마음 없는 관계였다면, 없었던 그대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무너진 마음을 견디면서 살 수는 없었다.
정떨어진 남편이라도 부여잡으면서 제 지위를 보존하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이만한 충돌을 빚지도 못했겠지.
황후는 돌연, 파레사를 쳐다보며 내뱉었다.
“그러니 남자는 낯짝만 보고 결혼하는 게 아니야. 명심하렴.”
“……예.”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황태자는 뭐 다르겠니. 그 핏줄이 그 핏줄인 것을.”
“명심……할게요.”
왠지 항변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와의 비교는 심하잖아?’
적어도 황태자는 파레사를 탓하지 않고, 어려울 때 도와주기 위해 힘썼다. 그는 좀 더 섬세한 타입이라, 황제처럼 되기도 어려울 거다.
‘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황태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떠올려보던 파레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떤 남자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내 파레사는 황후를 향해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깊게 생각지 마시고, 좀 쉬세요.”
“그래, 쉬어야지. 밤인걸.”
“간단히 요기하실 것을 들여올게요.”
파레사는 오늘은 사과로 어떤 예술을 선보일까 고심했다. 토끼 정도로는 안 될 것 같다. 장미라도 깎아올까?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조각도를 떠올리면서 파레사는 방을 떠났다.
아마 오늘은, 황후에게 긴 밤이 될 테지. 길고도 무거운 밤이.
파레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위로뿐이었다.
* * *
다음날.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스치듯이 뵙기는 했으나,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지요.”
황후는 제 앞에 서 있는 그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놀란 것은 파레사도 마찬가지였다.
‘안 올 것처럼 말하더니.’
찾아왔잖아? 황후가 먼저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베녹스 후작.”
“앉아도 좋을지요.”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후작은, 태연하게 청했다.
황후궁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을 그는 기이하게도 차분했다. 태도는 다정한 듯하나 어딘지 힘이 느껴졌다.
황제의 것처럼 적나라한 권위와는 다른, 차분하되 오연하게 공기를 틀어쥐는 힘이었다.
“그러세요. 헌데 당신이 찾아올 줄은…… 몰랐군요.”
“약속을 잡았다간 거절을 당할까 하여. 말씀을 편히 하시지요.”
그가 슬며시 웃었다. 고위 귀족이라곤 하나 그는 황후와 동갑이었다. 전에는 그가 황후보다 신분이 높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황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어젯밤 무도회에서 일이 있었지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황후께서 어딘지 불안정해 보여, 걱정이 되어 찾아뵈었습니다.”
불안정해 보이기도 했겠지. 에레스 공작 부인에게 와인을 끼얹고 나왔으니까.
“당신은 니시아나의 곁에 있었지.”
기억을 떠올려보던 황후의 눈빛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그 사실이 경각심을 돋웠다.
결혼한 이후로 제게 접근하는 것은, 황태자가 소개해준 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니시아나의 손길이 닿은 이들이었다.
결혼 전의 인연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후작은 안심하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제 연구에 관심이 많으시지요. 그뿐입니다. 제가 누군들 진정으로 가까이 지냈는지요.”
“그랬지, 당신은…….”
단숨에 과거로 끌려간 황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파레사는 그들 앞에 차를 가져다가 놓으며 살짝 소리를 냈다. 찰캉.
잔뜩 마음이 어지러울 때, 불화의 틈을 비집고 나타난 옛 연인의 의도란 뻔한 법이다.
심지어 베녹스 후작은 생각보다 더 누군가를 잘 휘두르는 타입으로 보였다.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베녹스 후작의 서늘한 시선이 파레사에게로 와 닿았다.
“이전의 그 시녀로군요.”
“이전의 …… 라니?”
황후가 의아하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얼마 전에 황후궁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차마 이곳으로 걸음하지 못해,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뉘앙스였다. 황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진지한 눈빛이 분명하게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 저는 지난 10년간 무던히도 생각했습니다.”
황후는 흠칫하며 파레사 쪽을 힐끗거렸다.
“시녀가 있는 자리에서 해도 좋을 이야기를 하지. 내가 황후라는 것을 떠나서……. 나는 아직 결혼한 여자야.”
그리고 여기는 황궁이다. 황제는 베녹스 후작이 황후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알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베녹스의 세가 낮지 않다지만, 권능을 가지고 반신으로 추앙받는 황제에 맞설 정도는 아닐 텐데.
황후는 굳어진 표정으로 제지했다.
“당신과 나눌 이야기는 그저 안부 정도로 그쳤으면 하군. 그간 잘 지낸 듯하여 마음이 놓여.”
그러나 후작은 차분하되 거스르는 태도로 제 말을 이어갔다.
“그때 제가 황후 폐하를 순순히 떠나보냈던 것은, 그것이 나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저는 후작가의 차남이었고…… 외국으로의 유학이 결정되어 있었지요. 기나긴 타향살이는 당신께 너무 힘든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에 반해 황후가 된다면 부귀영화를 누리실 수 있을 테니까요.”
황후의 눈동자가 커졌다.
“나는…… 당신이 베녹스 후작가를 생각하여 물러난 거라고 생각했어.”
황후라고 갈등이 왜 없었을까. 아무리 황제가 당연한 듯이 그녀와의 결혼을 추진하고 주변의 모두가 그것을 바란다지만.
단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 베녹스 후작은 어쩐지 선선한 태도를 보였다.
상대가 황제라면 제가 포기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귀족에게는 당연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황후도 그에게서 쉽사리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에리카 당신은, 그간 잘 지냈던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때의 결정을 돌이켜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눈빛이 일순 짙어졌다. 어쩐지 집요함마저 묻어나오는 시선이었다.
황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피했다.
“예전 일이야. 내겐 두 아이가 있어.”
“먹고 마심처럼 인간의 순리일 뿐이니, 그 부산물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황실의 혈통인 것을요.”
황실의 혈통은 황제에게 귀속되지 황후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다만 부산물 하니까 다른 게 떠오른 건 파레사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황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도 참, 성격이 독특하군.”
“그래서 당신이 날 만난 것이기도 하지요.”
“맞아, 하지만 내게는 까마득한 과거에 불과하지.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어.”
10년이다. 풍경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과 계절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의 인연을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피폐해진 마음에는 공허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황후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자코 그녀의 드러난 상앗빛 이마와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콧날을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의 아름다움은 변치 않았군요. 그리고 제 마음도.”
담백한 말투였으나, 듣던 파레사는 몸부림치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황후에게는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고개를 들며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을 할 땐가, 당신.”
“과거가 현재가 되기까지는 단 한순간이면 족합니다. 마음은 여전하고, 당신도 여전하니 그거면 된 것이겠지요. 제 말은―”
그가 강하게 말을 던졌다.
“이혼하고 나면 다시 당신의 곁에 서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그는 만약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확신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걸까.
파레사가 의문을 품은 그때 황후가 펄쩍 뛰었다.
“내가 이혼할 줄은 어떻게 알고!”
“이미 선언하신 게 아닙니까. 그럴 기세시던데.”
“그, 그랬지만…….”
너무도 황후를 잘 파악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결혼한 여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직이라는 건, 앞으로는 달라질 거란 뜻이지요.”
예리한 간파였다.
잠시 침묵 뒤, 황후가 넌지시 물었다.
“후작은, 황제 폐하께서 어찌 지내시는지 아는가.”
유학을 다녀온 베녹스 후작쯤 되는 자라면 관료로서 한 직함을 맡고 있을 것이다. 황제궁에도 드나들었을 법했다.
‘그런데 그걸 왜 후작한테 물어.’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후작에게 예지력이 있거나 아니면 남모를 비상한 육감이 있어 보이는 걸까.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혼하게 되길 바라고 있지요.”
할 말이 없어질 만큼 깔끔한 발언이었다. 황후가 볼멘소리를 냈다.
“나는 후작의 행복을 빌었건만. 너무하지 않은가.”
“가로채인 입장에서 할 만한 생각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미소가 실린 얼굴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이혼하시면 제가 행복하게 해드리지요.”
결혼한 여자에게 하기엔 선을 넘었다 싶은 발언.
하지만 어쩐지 황후는 눈만 흘길 뿐 평소처럼 호통을 내지르지 않았다.
“덕분에 기가 막혀, 기분은 나아지네.”
“다행이로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후작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너무 오래 머무르면, 황후와 부적절한 짓을 저질렀단 오해를 살 수 있다.
“또 뵙지요.”
주저 없이 몸을 일으키면서도, 후작은 그 분명한 기약을 남겼다. 그는 30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머물다가 떠났다.
그가 가고 난 뒤, 파레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찻잔을 치웠다.
슬쩍 곁눈질로 황후를 보니,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대화를 나누시는 걸 보니…… 잘 맞으시는 것 같아요.”
“그랬지. 예전에도 그와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편안했단다.”
“그래요? 그가 마음에 드시나요.”
정말 갈아타려나. 파레사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살 거면 이혼하라고 하기는 했어도, 그게 최선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뒤나미스가 아니고 제국이다. 섣불리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황후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인간으로서는 매력을 느끼지만, 남자로서는 아니다. 후작은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남자다. 무언가에 깊은 애착을 두지 않지. 그는 제 아내가 바람나도 상처 입지 않을걸.”
이미 만나던 황후가 냉큼 황제한테 갈아탔는데도 화내지 않고 보내준 남자다.
오늘도 후작은 그 사실에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게 싫으신가요?”
“그건 다른 의미로 무심함이니까. 나는 이미 무심함을 겪어보았지 않니.”
황후의 눈빛에 쓸쓸한 그림자가 졌다.
황제를 말함이다. 그는 애정을 품었음에도 어떤 일면에선 지독히도 무심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후작에게 나는 가지면 좋고 탐나지만, 간절하지는 않은 존재란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느냐. 그에겐 제가 유학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황후가 타향살이를 힘들어할 것 같아서 이별을 받아들였댔지.
배려심 넘치는 듯이 들려도, 나는 곧 죽어도 유학은 가야 했다는 소리다. 그녀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뭐 다른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상대가 황제이니, 저항해봤자 소용없다든가. 황후가 이미 그쪽에 마음이 끌린 듯이 보였다든가.
승산과 제가 잃고 얻을 것을 재어봤겠지. 그리고 낸 합리적인 결론이었으리라.
그때의 그는 유학 예정의 후작가의 차남에 불과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왜 파레사는 황후가 그는 아니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열정 없는 남자와 만날 수는 있어도, 그런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다.
후작의 열정은 적어도 황후를 향해 있지는 않는 걸로 보였다.
“그럼 편안해서 만나셨던 건가요?”
“그렇단다. 그는 학자란다. 독특하면서도 지적이고 늘 서늘하리만치 평온한 모습이 좋아 보였지.”
“그럴 만도 하군요. 황후 폐하와 반대의 타입이니까요.”
황후의 눈매가 단숨에 사나워졌다.
“……너, 그 말은 내가 지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냐?”
“아뇨, 좀 감정에…… 기복이 있으시다는 소리죠.”
“그건 부인하지 않겠다만. 후작과는…… 통하는 게 있었어. 단순한 편안함 이상이었지.”
황후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황후는 베녹스 후작과 니시아나가 별다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순순히 믿어버린 눈치였다.
애초에 냉정하고 차가워 누구한테 이용당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처럼.
하지만 파레사는 미심쩍은 기분을 느꼈다.
“베녹스 후작의 연구라는 건 무엇이었나요?”
“니시아나가 그의 연구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 그걸 묻는 것을 잊었구나.”
황후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후작은 부드럽지만 결코 존재감이 희미하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잊히지 않는 또렷한 기억을 새겨넣을 수 있는 남자였다.
“그건…… 권능에 관한 것이었어. 특히나 황가의 권능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했지. 어째서 제국에서는 후계자 위주로 발현하는 걸까. 하는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나.”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자신이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찔려서 그런 걸까. 파레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쥐었다. 눈치채지 못한 듯 황후는 말을 이어갔다.
“알다시피 제국에서는 황가의 권능을 신성시해. 여기서는 오히려 객관적인 연구가 어렵지. 그래서 떠나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단다. 이별한 이후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처음이로구나.”
황후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상념이 일기 시작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새, 파레사는 테이블을 치우고 방 밖으로 나섰다.
“베녹스 후작이라…….”
원래 그런 속 모를 자는 수상쩍어 보이기 마련이다.
다만 파레사에게는 기묘하게도…… 석연찮은 감각이 남아 있었다.
대체 왜 에레스 공작 부인은 베녹스 후작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녹청의 눈빛이 엄정하게 파레사를 향해 꽂혔다. 파레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요.”
황태자는 황후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황제의 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도 그에겐 친부인 황제가 계모인 황후보다 중요했고, 혈연을 떠나서 황태자로서도 그러했다.
그러니 황후가 에레스 공작 부인에게 그런 짓을 벌일 거라는 걸 말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말렸을 테니까. 황제처럼 집안싸움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오늘도 파레사를 황태자궁으로 불러냈다. 이번에는 황후가 억지로 보낸 게 아니었다. 파레사가 스스로 오겠다 해서 왔다.
“전속 시녀로서 상관의 잘못된 행위를 막아서지 않은 것은, 근무 태만이야.”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그럴 만했고, 당할 만했어요.”
“무도회에서 와인을 끼얹는 방식이 아니란 거다. 내가 일전에, 함구하라고 한 사실이 있었지.”
황태자는 피로한 듯 미간을 짚었다.
부셰 백작 부인을 협박한 괴한 건과 마차납치범의 접근. 파레사는 틀림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한 이유에 공감했기 때문에.
“황후 폐하께서 감정적으로 행동하실까 봐서요.”
“그래, 그런데 왜 감정적으로 행동하시도록 내버려 두었지?”
나와의 합의를 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간단히 말하지. 나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고, 얼마 후 그것을 폐하께 보여드릴 참이었어. 공작 부인을 축출할 만한 합당한 근거로서. 계획대로 되었다면 아무 소란도 일지 않고 잘 해결되었을 거야. 조용히. 그런데―”
황태자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 사건으로 두 분의 사이가 틀어졌지. 이혼 얘기까지 거론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해. 두 분 사이가 틀어진다면, 고모님의 뜻대로 되는 거겠지.”
“증거를 모으기만 한다면 결국 공작 부인을 축출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어머님에 대한 여론은 이미 안 좋을 대로 안 좋아. 증거가 있어도 고모님이 모함이라고 주장하면 그쪽에 귀를 기울일 만큼.”
황태자는 가감 없이 말을 이었다.
“애초에 사교계는 어머님께 적대적이었어. 이대로면 계획대로 되더라도 순탄하게 풀리지는 않겠지. 만약에 그 사건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별문제 없었을 터.”
파레사는 황태자가 느끼는 기분을 이해했다. 그로서는 난데없이 차근차근 밟아나가던 계획이 일순 망가진 기분이었으리라.
철저히 조력자의 입장에 선 그를 배제하고서. 기분이 편할 리 없다.
더군다나 이는 황실의 위신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파레사는 후회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는, 공작 부인만 사라지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군요.”
“고모님만 아니었다면, 지난 10년간 어머님이 자리 잡으시는 데 별문제 없었을 테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잖아요. 그간 있었던 다른 문제는 공작 부인만 사라지면 깨끗하게 없는 일이 되는 건가요?”
황제와 황후, 부부간의 문제. 황후가 이혼을 생각한 것은, 결국 그 때문이다.
공작 부인은 원인을 제공했지만, 그 원인을 키운 것은 황제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황태자 전하께서 이해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파레사는 서늘하게 대꾸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을 그였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한 적도,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려본 적도 없을 그였다.
제가 통제할 만한 문제만을 안고, 제 스스로 해결해낼 힘과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는 날 때부터 황제로 정해진, 권능을 가진 황태자니까.
“기대본 적도 기댈 일도 없으시잖아요. 그러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이에게 배신당하는 일도 없으시겠지요. 어떻게 그 마음을 이해하시겠어요?”
“내가 황태자라 하여.”
황태자의 눈빛이 위험하게 짙어졌다. 흡사 노여워하는 듯한 기색으로,
“사람이 아닐 것처럼 생각하지 마. 나 역시 마음 아파본 적 있으니.”
그는 말했다. 그 말은 파레사를 입 다물게 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저, 그건…….”
파레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토라진 기색을 보자니 죄책감이 절로 이는 것이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다투고 싶지 않아.”
자기가 먼저 따져놓고는. 파레사는 눈을 흘기며 물었다.
“황제 폐하는 어떠신 것 같은가요.”
“심히 충격을 받으셨다. 식사도 거르셨지.”
그게 뭐 어때서? 파레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황태자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는 결혼한 후로 처음 있는 일이야. 아무리 바빠도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드시거든.”
……그래, 식사는 중요한 일과지. 황제조차 소홀히 할 수 없을 만큼. 뜬금없이 의문이 솟았다.
“결혼하기 이전에는요?”
“……어머님을 처음 만난 날 식사를 거르셨다고 하더군.”
묘한 말투였다. 파레사는 잠깐 말을 잃었다.
그래, 황제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황후를 사랑하는 것 같기는 했다. 최근까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럼 잘해주기나 할 것이지.’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을 정신으로 황후를 조금만 더 돌아보고 그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으면 이 꼴도 안 났을 거다.
“아무튼 꼴 좋군요.”
무심코 말한 파레사는 슥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감히 황제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황태자 앞에서.
다만 마주 선 황태자는 냉정하게 반응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긴 하지만 곤란한 일이지.”
“곤란한 일이시겠지요.”
황제 인생에서 최초로 만난 제대로 된 위기 아닐까. 파레사는 내심 코웃음 쳤다.
하지만 황태자가 말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근심 서린 이마를 우아하게 어루만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얼마 전 화재를 진압하느라 권능을 크게 쓰셨어. 알려진 것보다 더.”
“그때, 화재가 컸다고 들었어요.”
“권능은 정신의 영역이야. 정신이 타격받으면 회복이 더뎌지지.”
“그 말씀을 제게 하신다는 건, 황태자 전하께서는 건재하시기 때문이겠지요.”
강력한 권능을 지녔다는 장성한 황태자.
황제의 권능이 한동안 약화되었다고 해도, 그의 존재 덕에 제국이 위기에 처할 일은 없다.
그러니 그런 민감한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것이리라.
“예리하군. 허나 황제의 권능이 약화 되었다는 건 그 자체로 탐탁지 못한 일. 회복에 힘쓰시려면 안정을 취하셔야 할 텐데, 그동안 산적한 국무는 누가 보겠어?”
“황태자 전하의 업무가 과중해지겠군요. 알겠어요.”
파레사는 비로소 깊이 이해했다. 물빛 눈동자가 진심으로 미안함을 비쳤다.
“황제 폐하의 몫까지 일을 떠맡게 되니 예민해지실 만도 해요.”
아무렴, 그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파레사도 갑자기 황후가 자신에게 일을 떠넘긴다면 싫을 거다.
야근을 하면 돈을 버니까 좋지만, 그래도 대체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바빠지면, 다른 데 신경을 쓸 시간도 줄겠지.”
그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곧게 찔러 들었다. 파레사는 능숙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참 잘된 일이로군요.”
황태자의 눈썹이 쓱 치켜들렸다.
“내가 어머님에 대해서 신경을 아예 끌까?”
치사하게 황후를 볼모로 삼는다. 파레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실언이었어요.”
그가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들었다.
“그리고 내 팔이 안으로 굽는다면, 너도 그 안에 있지 않을까.”
파레사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버지……잖아요?”
아들이 아버지 쪽을 편드는 건 당연하다.
‘황후도 말했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파레사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경각심을 굳이 일깨웠다.
“그래. 잊지 않고 있어.”
불효자마냥 무심히 말한 그가 단단히 엄포를 놨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는 폐하와는 달라.”
반짝거리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고였다. 적나라하게 직시하는 시선.
가까운 거리는 그림자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계산되어 놓인 듯한 그의 얼굴을 도드라지게 했다. 지나치게 선명했다.
“나는 내게 중요한 게 뭔지, 그걸 어떻게 손에 넣고, 어떤 식으로 아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할 테니까.”
귓가로 흘러드는 음성은 낭랑하고 부드러웠다. 시선을 내리깐 파레사가 단조롭게 잘랐다.
“일단 손에 넣는 것부터가 어려우시겠군요.”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는군.”
파레사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야 이토록 아름다운 황태자가 진지하게, 노골적으로 구애해 오는데 누군들 흔들리지 않을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흐려지고야 마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끌리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왜 상관없다는 건데.’
내가 벨로나 나이트라는 게. 뒤나미스가 우스운가.
뒤나미스와의 충돌 정도는 가볍게 감수할 만하다는 제국 중심주의야? 그건 의심할 만했다.
파레사는 가벼운 듯 대꾸했다.
“노력하시는 건 자유니까요.”
마음의 상처를 입었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시녀인 제가 뭐라겠는가. 상관의 마음을 지켜줘야지.
황실의 시녀란 황실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 자신이 봉급을 받는 이유였다.
“……그럼 마음껏 자유대로 해보지.”
기대하란 듯이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이내 황태자는 태도를 싹 바꿔서 낯빛을 굳혔다.
“이렇게 된 거, 서둘러야겠어.”
시간이 지나면 충돌이 패어버린 골은 그대로 고착되어버리고 만다. 상처는 제때 봉합해야지 방치하고 있어선 안 되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마침 이 황궁에 고모님이 무언가 했다는 것을 증명해줄 유일한 증인이 있으니까.”
황태자의 은근한 눈짓에 파레사는 그게 누군지 단숨에 떠올려냈다.
마리. 파레사에게 누명을 씌우란 사주를 가장 처음에 받고 그것을 거절한 사람.
마리를 대신해서 명을 수행한 페이는 살해당했다. 파레사를 노린 마차납치범들도 한 명 빼고 모조리 죽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그 일에 엮인 이들 중 유일하게 마리는 아직 존재했다. 그것도 이 황궁에.
“그녀는 러셀 백작 부인이라는 다리를 거쳤어요.”
“러셀 백작 부인과 고모님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건 누구든 알아. 그리고 마리라는 그 시녀는, 러셀 백작 부인과 꽤 긴밀하게 연결된 사이였던 것 같더군. 분명히 쓸 만한 증언을 할 수 있을 테지.”
“과연 마리가 증언할까요?”
마리는 러셀 백작 부인과 친척 관계다. 그 때문에 자신까지 제거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
반대로 그 이유 때문에 입을 열 수도 없으리라. 개인적인 감정이 어떻든, 귀족이란 가문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기색이었다.
“설득해볼 여지가 있지. 내 생각엔…… 고모님이 그녀를 순순히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거든. 이미 선을 넘으셨으니, 한 명 더 살해하려고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이곳은 황궁 안이잖아요.”
“네게 누명을 씌운 그녀도 황궁 안에서 살해당했지. 유감스럽게도, 고모님은 황녀로 자라나서 이 황궁 곳곳에 손길이 닿아. 외진 곳으로 갔다면 더욱 손쓰기 쉬울 테지.”
“황태자 전하께서 마리에게 접촉하면 그게 더 에레스 공작 부인을 자극하지 않겠어요?”
만약 마리가 증언을 바랐다면 파레사에게 스스로 말해오지 않았을까.
“이미 그녀는 고모님이 제게 손쓰지 않기를 바라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어. 그 살해 사건 이후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너와는 달리, 움직이기 쉽지 않을 테지.”
불길한 예감이 흘러들었다. 파레사는 눈살을 찡그린 채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레사도 이내, 화답하듯 고개를 움직였다.
* * *
요즘, 줄곧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밤에도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 마리의 안색은 파리했다.
‘페이가 죽었다니.’
그 소식조차도 뒤늦게 알았다. 이제는 사이가 데면데면해진 시녀 한 명이 은근히 전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소식을 전해주자마자 화급히 자리를 떠났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무섭다는 것처럼.
더 자세히 알아볼 여력도 없었다. 근무지가 바뀐 이후로 마리는 줄곧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더해서, 고립.
‘파레사는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견뎠던 걸까.’
모두가 마리를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괴롭히는 건 아니지만, 일적인 것 외에는 말도 걸지 않는다.
파레사라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황후궁의 일에만 심력을 쏟았을 터.
그 담대함과 무신경함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무력도.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러셀 백작 부인에게는 편지를 보내두었지만, 냉랭한 답장만이 날아들었을 뿐이다.
‘네가 선택한 일이니, 거기서 쥐죽은 듯이 살려무나.’
마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답장이 왔다는 사실 자체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아직, 러셀 백작 부인이 자신을 끊어내지 않았다는 뜻이기에.
당장 황궁을 떠날 수도 없고, 떠난다고 해도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다.
마리는 이 황궁에서 꾸역꾸역 버텨야 했다. 시녀로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면서. 그렇지 못하다면 쫓겨나고 말 테니까.
그것이 백작 부인의 뒷배에서 벗어난 대가였다.
‘각오는 했지만, 정말로…… 만만치 않구나.’
“오늘부로 이쪽 구역의 정리를 끝내길 바라네.”
시종장은 무뚝뚝하게 서류를 건네고 떠나갔다.
요새, 황궁의 빈 건물들이 갑자기 수리에 들어갔다.
마리는 그곳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낡거나 수리할 부분을 꼼꼼히 찾고 기재하는 일을 맡았다.
오늘부라고 했으니, 또 남아서 일해야 할 것이다. 마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수당은 꼬박꼬박 들어오니까.’
한때 파레사가 위로 삼았던 것으로 자신도 위로 삼게 되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크게 다투셨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파레사는 괜찮을까.’
마리는 지나가며 언뜻 엿들은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는 남들이 하는 말을 귀동냥으로 주워듣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파레사에게 접촉하는 것도 꿈꿀 수 없다. 그저 깜깜한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내 일을…… 해야지.’
마리는 한적한 건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은밀한 기척이 있었다.
“서둘러서 어두워지기 전에 끝내야지.”
중얼거리던 마리는 서류를 치켜들었다.
뒷배가 사라진 시녀는 능력을 입증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마리는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좀 어둑어둑하고 사람이 너무 없어.’
등골에 소름이 올랐다. 이 황궁에서 이토록 외진 장소가 있다니.
밖에는 병사들이 돌아다니니 비명을 지르면 닿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밀회를 벌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터져도 일어나지 않을.
마리는 불안함을 꾹 누르며 빈 건물에서 방 하나하나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곳에는 그녀 혼자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세한 소리가 섞여 들렸다. 꼭 저 말고 누군가가 은밀히 따르는 듯이.
마리는 마지막 방을 확인하고 난 뒤, 뛰다시피 걸었다.
‘내 착각이겠지. 아니, 다른 시중인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면, 그토록 은밀하게 기척을 숨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제가 바짝 긴장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는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두리번거리며 병사들을 찾았다. 저쪽에 병사 두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경비병!”
그들은 마리의 안면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마리 던컨이 맞나?”
“예…….”
대답하면서도 마리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이 변했다.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조사를 받아야 할 게 있어.”
“조사라니요? 제가 왜 조사를 받아야 하죠? 어디서 내려진 명령인가요.”
마리는 한달음에 물러섰다. 그녀의 눈빛에 두려움이 비쳤다.
“황태자궁에서 내려진 명령이다.”
“그럼 황태자궁 출입증을 보여주세요.”
그 당연하다 싶은 요구에 경비병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리에게로 빠르게 다가섰다.
“뭐 하는 짓이에요!”
그러나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었다. 그들이 억지로 마리의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리며 끌고 가려던 순간,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를 놓아라!”
순식간에 경비병 둘을 제압한 그는 마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은지요?”
마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는 인물이었다.
클로드 로렌, 황태자의 근위기사.
“어, 어떻게 된 건가요.”
“황태자 전하의 명이 있어 살피고 있었지요. 이렇게 때맞춰 노려 주다니……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는 곧이어 등장한 다른 이들에게 명령했다.
“붙잡아 황태자궁으로 데리고 가지. 누가 사주했는지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마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함께 가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는 이내 사태를 파악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자신을 찾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걷잡을 수 없는 운명에 휘말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 * *
“황태자, 무슨 일인가.”
위엄 있는 말투였으나, 그 말을 내뱉는 황제의 낯빛은 썩 좋지 못했다. 근심과 고뇌가 서린 얼굴.
황태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누가 황궁 내에서 살인사건을 저질렀는지 알아냈습니다.”
“누구인가.”
“고모님의 소행입니다.”
황태자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확실한 증거가 잡혔고, 증언 또한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는 정리된 서류를 내밀었다. 잠시 눈을 부릅뜬 황제는 침착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니시아나가…… 정말로, 이런 짓을.”
하도 태연하게 황후의 전속 시녀를 추궁하기에, 설마 그녀이랴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니시아나의 악행이 고스란히 적힌 서류를 읽으며 황제는 미간을 짚었다.
코웰 남작은 낱낱이 증거를 수집해두고 있었다. 약은 남자였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황족이고 그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선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라는 더 대단한 선과 닿은 순간, 야심 깊은 그는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
달리 압박할 것도 없었다. 황태자는 그 같은 자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황태자는 처벌에 대한 면책과 일정의 보상을 약속하고 그에게서 증언과 증거를 얻어냈다.
코웰 남작은 너무도 쉽게 에레스 공작 부인을 배신했다.
그리고 마리와 랄프라는 이름의 남자 역시도, 착실히 에레스 공작 부인을 지목하는 증언을 해줬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여과 없이 에레스 공작 부인, 니시아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패터스 자작의 중독 건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패터스 자작에게 나리움을 선물한 인근 지역의 귀족은, 고모님의 측근과 친척 관계입니다. 그가 제도로 올라와 고모님을 만난 직후에 패터스 자작에게 나리움을 선물했습니다. 시기가 묘하지요. 고의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네가 보기에도, 정녕 우연이 아닌가.”
“예.”
황태자의 단호한 대답은 황제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항상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해왔던 황태자니까.
황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탄식을 토했다.
“대체, 왜 니시아나가! 공작 부인씩이나 되는 아이가.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자신의 발밑을 허물어뜨리는가.
니시아나가 황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싫어할 수 있다는 것도.
두 사람이 꼭 친해질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엮이지 않게 하는 걸로 족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악랄하게, 고의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뿐이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황태자는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황제 가까이에 있는, 어쩌면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그의 후계자.
황태자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황제에게도 가감 없이 적용되었다.
그는 그들 황실 가족에게 일어난 일과 황제의 심리를 낱낱이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황후가 모르는 사연이었다.
그 때문에 황태자는, 이제껏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입을 열어야 했다.
“더 이상 부채감 때문에 그녀를 방관하실 때가 아닙니다.”
……그래, 부채감. 황제는 지독한 죄를 지었다. 그 죄로 황제를 탓할 수 있었던 인물은 니시아나 혼자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황제는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니시아나를 앞에 둘 때면 살아나, 황제의 마음을 공격하고 무르게 만들었다.
그를 초래한 것은 황제의 선택이었기에.
그러나 결코 이기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는 황제로서 응당 해야 할 선택을 했으니까.
하지만 니시아나가 그로 인해,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아무 죄도 없는 황후가 아니라.
“내 황후에게는 면목이 없구나.”
황제는 천천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오해일 것이다. 믿었던 것들이 무너져내리고, 투명하게 남은 것은 그간 겪어야 했을 황후의 고통뿐이었다.
이혼하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 황제는, 일순 분노마저 느꼈다.
그는 황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비단 재물만이 아니었다. 일생 누군가에게 주어 본 적 없는 황제의 애정까지도.
심지어 그들 사이엔 자녀도 있지 않은가.
황후는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제가 자주 찾고, 아이들도 장성하면 황궁으로 돌아올 것이니 점점 안정을 찾으리라.
조금 나쁜 소문이 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도 된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두가 그들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한낱 질투심과 경계심에 불과할 뿐.
그 대신 황제는 황후에게 남부러울 것 없이, 최고의 것만을 해줬다.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하도록.
그런데 이혼이라니? 충격에 뒤이어 짙은 배신감이 찾아들었다.
그간 별문제 없었지 않나. 왜 아무 소리 없다가 이제야?
황후는 늘 아름다우면서도 사랑스러웠고,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었다.
황제도 그녀에게 아낌없이 주었으니, 이는 받을 만한 대가이리라.
황제도 아예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황태자에게도 당부하고, 때때로 황족들에게도 압박을 넣었다. 황후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그 때문에 황후는 어떤 의무도 짊어질 것 없이, 그저 꽃처럼 고이 살아갈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꼭 해야 할 것만 하면서.
심지어 니시아나에 대한 부채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제도 밖으로 떠나보내기도 했었건만.
‘어떻게 감히.’
그는 황제였다. 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그렇게 자라왔고, 평생 제국민들의 추앙을 받아온 존재.
황후의 말은 그의 완전함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황제는 황후에게 약했다. 그토록 참담한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차마 그녀를 찾아가 대화를 청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저도 몰랐기에. 그 역시 억울함과 배신감에 사로잡혔기에.
한 번도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본 적도, 그럴 필요도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온 황제였기에.
그런데 오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고 나니, 뒤늦은 폭풍이 황제를 향해 닥쳐왔다.
황태자는 침묵에 잠긴 황제를 보며 생각했다.
‘고모님치고는 허술해.’
사교계를 휘어잡고 그들의 충성을 받으며 살아올 정도면 에레스 공작 부인도 만만한 수완을 가진 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도 쉽게 실마리를 드러냈고, 코웰 남작은 기꺼이 실토했다.
‘이상한 일이야.’
공작 부인의 성미라면 그가 저를 배신하지 못하게 조처해 두었을 텐데. 아주 뼈저린 대가를 치르도록.
아니면 제가 그녀를 고평가한 걸지도 몰랐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평생 황녀로서 곱게 살아온 인물이었으니까. 어설픈 음모를 꾸몄다고 해도 자연스럽다.
여하간 황태자는 제가 할 일을 끝냈다. 결정은 황제의 몫이었다.
고뇌에 빠져 있던 황제의 입이 열렸다.
“우선, 니시아나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
대체 왜. 어쩌려고. 수 가지의 의문이 황제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결론을 내야 했다. 처벌을 전제로 한 결론을.
황후에게로 가는 건 그다음이었다.
* * *
니시아나는 황궁 안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찾은 곳은 고요한 바람이 부는, 비어버린 궁이었다. 예전에 황후궁이라고 불렸던 곳.
황후궁은 황후가 머무는 처소. 그러니 황후가 새로이 들어설 때마다 다른 궁에 그 이름이 매겨진다.
보통 전 황후, 그것이 시어머니든 전처든 간에 뒤에 들어온 이가 같은 처소를 쓰는 일은 드물기에.
방치된 전 황후의 처소는 세월의 흐름을 맞았을 뿐 예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니시아나는 때때로 하릴없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누구도 동반하지 않은 채, 홀로.
가구며 장식들이 그대로 보존된 회랑과 정원을 거닐면서. 아무도 그녀를 방해하는 이는 없었다.
산과 강이 변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으나, 이곳에 서면 니시아나의 기억은 생생히 되살아났다.
눈에 그려지고 귀에 들려오는 과거의 환영. 가장 행복했던, 그래서 잊어버릴 수 없는. 그러나 잃어버린…….
‘니시아나.’
저를 부르는 음성을 떠올리며 니시아나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두 눈에 알 수 없는 기묘한 섬광이 스쳤다.
“나까지 놓아버리면, 정말로 끝일 테지.”
죽은 자는 산자와 함께 살아간다. 어렸던 황태자는 모후를 찾지 않고 어린 새 아내를 들인 황제는 그녀를 잊어갔다.
오직 니시아나만이 잊지 않았다. 니시아나는 고이 간직한 그녀를 제 안에서 살아 숨 쉬게 했다.
그녀는 니시아나에게 자매였고 혈육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니시아나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를 잃게 만든 모든 것들을.
‘이제 거의 다 왔어.’
좋은 조력자를 만났다. 그 놀라운 행운이 니시아나에게 알려주는 듯했다.
너는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노라고. 이 흐름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니시아나는 파멸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언제든 고꾸라질 수 있는 길을 두려움 없이 걸으면서.
‘두려워할 게 무언가. 나는 이미 잃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로 남은 것은 공허와 고독. 허울뿐인 남편과 저를 어려워하는 아들은 그녀에게 무가치한 존재였다.
실은, 그녀 외에는 모든 것이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제 곁에서 반짝이던 유일한 빛이자 온기.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느샌가 접근한 근위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시아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제법 강압적인 기세다. 그렇다면……?
“그럼 찾아뵈어야지.”
니시아나는 속 모를 미소를 머금은 채 흔쾌히 그를 따랐다.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기약은 없다.
그러나 다음에도 이곳을 찾는다면 그때에는…….
니시아나의 낯빛에 스산한 기운이 서렸다.
* * *
“니시아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에레스 공작 부인, 니시아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독대. 황제가 모든 사람을 물린 터라 사위는 조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실의 치부를 남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니시아나는 동요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요.”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탁! 니시아나의 발치에 서류가 던져졌다.
“보거라! 네가 한 짓을.”
니시아나는 허리를 굽혀 조용히 그것을 들어 올렸다.
몇 장 넘기지 않아도,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쉬웠다. 그녀가 벌인 짓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 있었기에.
“변명할 말이 있느냐.”
니시아나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사이가 데면데면하다지만 유일한 여동생.
그러나 그녀를 향한 황제의 얼굴은 노여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것은 황제에 대한 도전이며, 반역에 이르는 죄다. 그는 마음속에서 벌을 정해두었다.
하지만 부황에게서 그녀를 부탁받은 오라비로서 마지막으로, 물어야 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리 사악한 짓을 벌인 것이냐. 네가 본디 그런 아이는 아니었건만.”
본분에 맞게 우아한 귀부인으로서 황녀로서 살아온 니시아나였다. 어렸을 적부터 성숙하고 차분하여 걱정을 끼친 적도 어긋나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이것은 평생 제가 보아온 니시아나가 할 짓은 아니었다.
“착각하신 것이겠지요. 저는 원래 그랬어요. 이제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뿐.”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낸 니시아나로부터 감정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무표정했다. 늘 입가를 장식하던 상냥한 미소는 온데간데없는 삭막한 표정.
황제는 과거 그녀의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오직 하나에 관해서만 니시아나는 그 표정을 보였다.
황제는 탄식과 분노를 섞어 물었다.
“그토록 내가 원망스러웠더냐?”
니시아나는 단조로운 어조로 물었다.
“제가 무엇을 원망할까요.”
“전 황후가 죽은 일로, 나를 원망하여 황후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냐! 그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다니요.”
돌변한 니시아나의 눈빛이 번뜩였다.
“폐하는 막으실 수 있었어요. 그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차가운 진실이 토해졌다.
“라비아가 아이를 지우게 했다면, 그녀는 아직 살아있을 테지요.”
그래, 살아서 환히 웃고 있으리라. 전 황후, 라비아. 요절한 안드레아스의 모후.
16년 전 죽어간 그녀를 떠올리며 니시아나의 눈빛에 아련함이 감돌았다.
황제의 표정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너는…… 황태자는, 황태자를 아끼는 줄 알았다.”
그렇게 보였다. 니시아나가 황태자를 쳐다보는 눈길은 따사로웠다.
그래서 니시아나도 황제의 선택을, 그리고 라비아의 선택을 어렵사리 받아들인 것이라 믿었다.
그녀 역시도 황실의 일원이고 누구보다도 황족다운 이였기에.
“그 아이가 어떻게 태어났건, 그녀가 남긴 흔적인걸요. 그녀가 자신의 생명으로 빚어낸 최고의 걸작! 비록 그 강력한 권능으로 모친을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에겐 죄가 없으니까요.”
니시아나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웃음기가 가시고 그녀는 그 말을 떨어뜨렸다.
“그 아이를 낳게 되면, 라비아가 일찍 죽게 되리란 걸 폐하는 알고 계셨어요. 하지만 알고도 내버려 두셨지요.”
“라비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받아들였지.”
“그랬겠지요. 그녀는 일평생 황후가 되기 위해 자라나 살아왔으니까. 황제 폐하께도, 가여운 라비아는 그저 황후로서 가치를 다하면, 그만인 존재이니까. 죽더라도, 어미 뱃속에서부터 강력한 권능을 드러낸 황태자를 낳아야 하니까. 그게 그녀의 존재가치니까.”
“라비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코 강압 따윈 없었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오로지 너뿐이다.”
안드레아스는 뱃속에서부터 강력한 권능의 징조를 보여왔다.
그가 잉태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라비아는 이미 힘에 부쳐 말라가고 있었다.
황족의 핏줄이 아닌 한, 그 강력한 권능을 배 안에 품고 버텨내기는 어렵다.
통제되지 않는 권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느라 라비아는 제 생명력을 불태우고 있었다.
황제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후와 후사.
후사를 무사히 낳더라도 라비아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후사는 또 가지면 그만이다. 포기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황제로서는 강력한 후계자가 탐이 났다. 전례 없이 강한 권능을 태중에서부터 자각한 그 아이가.
강력한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황제의 의무이기도 했다.
갈등 끝에, 황제는 욕망을 누르고 라비아에게 선택을 맡겼다. 그리고 라비아는 주저 없이 아이를 낳겠노라고 대답했다.
니시아나가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그래요, 그리고 저는 너무, 늦게 알았어요. 알았다면 막았을 텐데.”
그리하여 니시아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잃고 난 이후에야 알았다. 이 모든 진실을.
임신하고 나날이 말라붙는 게 보이는데도 라비아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아이는 건강하고 자신도 괜찮아질 거라고. 조금 심한 임신 증상일 뿐이라고.
니시아나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안드레아스가 태어난 이후였다.
힘겹게 아이를 낳은 라비아가 어째서 회복되지 않는지,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는지…….
니시아나는 그녀의 죽음을 부정했고 삶을 이야기했다.
라비아는 오래 버텼다. 예상보다 오래. 아이를 낳고도 6년간이나.
그녀는 죽어가기 전 니시아나에게 말했다.
‘안드레아스를 잘 부탁해, 니시아나. 그 아이는…… 정말 훌륭하게 자라고 있어. 아주 특별하고도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태어났지. 나는 내가 제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낳은 게 자랑스럽단다. 비록 그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하겠지만.’
그 말에, 이상한 감각이 치달렸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라비아는 의식을 잃었고,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니시아나는 파고들어, 마침내 진실을 알아냈다.
‘어째서 라비아가 죽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그때, 니시아나가 보인 비통함, 그녀가 보인 지독한 절망과 공허감은 황제로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나는 너를 처벌할 수밖에 없다.”
“처벌하셔도 좋아요. 마음껏. 어차피 저는 상관없으니까요.”
니시아나는 느릿하게 황제에게 다가섰다.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단상에 앉은 황제보다 높은 곳에 머리를 둔 채로, 니시아나는 나직이 물었다.
“만약에 말이에요………. 같은 상황이 에리카에게 주어졌다면, 폐하께서는 그때에도 같은 선택을 하셨을까요?”
차가운 바람이 스미는 듯이 은밀하고, 날카로운 물음.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그것이 그의 부채감의 근원이었다.
만약 현 황후, 에리카가 낳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죽일 아이를 임신했다면 그는 황후를 택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황제는 여전히 황제였다.
그러나 상대를 달리 둔 가정 앞에서 그의 선택은 뒤집혔다.
그 때문에 그는 라비아에게 죄를 지었다. 황제로서는 틀리지 않았을지라도.
죽은 전 황후는, 틀림없이 후계에 대한 황제의 욕망을 들여다보았으리라. 그토록 충실한 여자였다.
황제는 실토하듯 말했다.
“……아니.”
니시아나는 그 대답을 분명히 들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들렸다. 죽음 같은 미소였다.
니시아나가 한 발짝 다가섰다. 비틀린 기색이 그녀의 얼굴 가득 번져 났다.
“그 잘난 권능을 믿고. 당신이 내 라비아를 죽였어.”
그 속삭임과 함께, 그 두 눈에서 선연히 드러난 것은 증오였다. 그녀의 손이 갈퀴처럼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니시아나!”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권능을 가진 황제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황제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나 그는 일순 멈칫거렸다.
니시아나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검은 기운.
마치 구멍 속에 도사리고 있던 뱀이 튀어나온 것처럼.
그녀의 손을 붙잡은 손아귀가 화상을 입은 듯이 뜨거웠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니시아나는 다른 손을 들어 황제의 심장에 가져갔다. 그리고 미소 지은 채 말했다.
“그래요, 나 역시 황족…… 그 권능이 당신에게 권좌를 가져다주었죠. 나는 평생 그것이, 내 것이 아닐 거라 믿었어요. 라비아가 죽기 전까지는.”
만약 내가 황제였다면, 내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분노와 절망 속에서 피어오른 염원은, 니시아나의 숨겨진 힘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핏줄 속에 깃들어 있는 권능이었다. 황제와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난 그녀에게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격은, 분노와 증오 속에서 갖춰졌다. 있어선 안 될 방식으로.
“이 사악한 힘을……! 니시아나!”
황제는 경악과 함께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러나 그의 힘은 급속도로 니시아나를 향해 빨려들고 있었다.
니시아나가 가진 그 힘은, 수렁이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소용돌이였다.
화재로 권능을 소진하지 않은 황제라면 저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그로선 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니시아나는 미소 지은 채 속삭였다.
“사랑하는 여자도 잃고, 힘도 잃고…… 비참하게 죽어가. 당신은 그래야만 해.”
당신도 나의 라비아를 죽였으니까.
니시아나는 그녀의 가면 속에서 제 진실한 얼굴을 꺼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오라비인 황제조차도, 아니 누구도 정면에서 목격하지 못한 것. 그녀의 차가운 온화함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은 뜨겁고 잔인한 격정.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야 마는, 집요하고 지독한 집착.
“니시……아나!”
황제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쾅!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
황태자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달려온 그가 목격한 것은, 황제를 붙들고 있는 니시아나와 그녀에게서 뻗어 나오는 검은 기운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니시아나의 살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잠재워졌다.
그녀의 아이였다. 만약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라비아가…… 슬퍼할 테니까.
니시아나는 황제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섣불리 공격할 수 없어, 멈칫거리는 황태자를 일별하며 니시아나는 냉랭히 말했다.
“여기서 죽을 운명은 아니신 것 같군요.”
혈육이라고 한들, 오라비라고 한들, 니시아나에게는 원수에 불과한 자였다.
하지만 됐다, 이젠. 그녀에겐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럼 안녕히. 다시 뵙게 될 날을 고대하지요.”
니시아나는 황제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검은 천이 그녀의 전신을 둘러싸듯 심연의 자락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모습이 허공에서 말끔히 지워졌다.
* * *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다고? 그게 무슨 소리요.”
황후는 말을 더듬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클로드 로렌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안전을 위하여 그곳으로 함께 가셔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지?”
클로드 로렌, 황태자의 측근이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다.
하지만 말이 되는가. 누가 감히, 아니 어떻게 반신이나 다름없는 황제의 안전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인가.
역사상 권능이 뚜렷하게 강하지 못한 황제도 존재했지만, 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진 적은 없었건만.
“일단 가셔야 해요. 황제 폐하께 위협이 가해질 만한 일이라면, 황후 폐하께서도 위험하시다는 뜻이니까요.”
파레사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차분한 물빛 눈동자는 신속하게 사태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그래, 어쩐지 심상치 않은 파동이 느껴진다 싶었어.’
조금 전, 파레사는 미묘한 공기의 떨림을 느꼈다.
그으으응. 피부를 얇게 훑고 지나가는 그 기이한 감각이 그녀를 일깨웠다.
황제궁 쪽이었다. 황태자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권능을 행사할 일이 있었던 걸까?
파레사는 의혹을 품었지만, 무엇이든,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클로드 로렌이 달려왔다.
“폐하께선, 많이 편찮으신 거요?”
“가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만.”
클로드 로렌은 말을 삼켰다. 그의 기색에서 말하지 않은 것이 읽혔다. 황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태가…… 많이 나쁜 게요? 세상에! 이,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가보아야겠다!”
언제 이혼 얘기를 했냐는 듯 황후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클로드 로렌이 더 이상 서두르라 말할 필요가 없었다. 파레사는 서둘러 그녀를 따랐다.
“황제 폐하!”
그토록 강건하던 황제가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침대에 쓰러져 있는 모습은 진실로 충격적이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어려워하던 황후에게는 특히나 그랬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황후는 파르르 떨며 황제의 손을 부둥켜 쥐었다. 기묘하게도 힘없고 차가운 손이었다.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마치 이 모든 게 제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찌 그에게 그토록 모질게 말했던가.
‘아니, 나는 그럴 만했는데?’
그 와중에도 서운함이 치밀어 마음을 고쳐먹다가도 다시 죄책감이 일었다. 황후는 혼란스러웠다.
침상을 지키고 있던 황태자가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의식이 없으십니다. 깨어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슨 일인가요? 황태자.”
말린 장밋빛 눈동자가 충격을 가득 담고 황태자를 응시했다. 황태자의 입이 막힘 없이 열렸다.
“니시아나의 소행입니다.”
황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니시아나의 짓이란 것도 놀라웠지만, 황태자가 그녀를 칭하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건 더 이상 그녀를 황실의 어른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황제를 공격한 이상 그녀는 반역자다.
수배령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근위기사들이 에레스 공작저로 파견된 터.
“그, 그녀가 어떻게…… 황제 폐하께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인지요?”
독살인가? 황후는 의아하다는 듯이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황태자는 잠시 말을 고르며 쓰러져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멀쩡한 듯이 보이는 황제이나, 황태자에게는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검은 자국이 황제의 가슴과 손에 남아 있었다. 마치 뻥 뚫린 구멍처럼.
‘그 힘은 대체…….’
니시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황태자의 눈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황제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확연히 줄어 있었다.
아무리 화재를 진압하느라 권능을 많이 소진했다지만, 황제는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었던 터다.
권능은 나이가 들수록 쇠하기 마련이나 황제는 아직 정정했다.
그런데 왜, 황제의 몸에서 영구히 뻥 뚫려버린 듯이 권능의 공백이 느껴지는 걸까. 통째로 뜯어간 듯이.
불길한 감각이 치달렸다.
‘그 여자의 기운은 뭐였을까.’
마법이라고 불리는 어둠의 힘에 대해선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마치, 권능처럼 느껴지는 것을.
니시아나는 제국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오롯이 황제에게만 주어졌으므로.
혹시 제가 모르는 것이 있던가. 황태자는 의구심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녀가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독대를 틈타,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요?”
황후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가 아는 니시아나는 뱀처럼 차가운 피가 흐르는 여자. 황제를 해치려 하기엔, 그녀에겐 잃을 것이 너무도 많건만.
그걸 떠나서, 황제의 여동생이 황제를?
“황제 폐하께서는, 벌을 주고자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벌이라니……?”
황후가 곤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그토록 제 여동생의 역성을 들던 황제가 아니던가.
“그간 그녀의 소행에 대해 조사해왔던 자료를 폐하께 보여드렸습니다. 몹시 분노하시며 그녀를 불러들이신 걸로 압니다.”
황태자는 황후를 쳐다보며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지위와 권한을 모두 박탈할 만한 엄중한 벌을 내리실 생각이셨습니다.”
“그, 그런…….”
황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수만 가지 감정이 안에서 휘몰아쳤다.
“온전히 깨어나실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심신의 안정을 찾으셔야 하니 부디 차가운 말씀을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와중에도 계모와 아버지 사이를 수습해보는 황태자였다. 상황이 어쨌건 그는 할 일을 했다.
“……알았어요.”
황후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황제를 쳐다보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실에 들어설 수 있는 건 황후뿐이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입구 너머로 황제에게서 황태자가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황태자와 달리 그녀는 그 현상이 의미하는 게 무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권능을 강탈당한 것 같군요.”
그 말을 한 것은 파레사였고, 그 말을 들은 것은 황태자뿐이었다. 두 사람은 방 밖에 서 있었다.
“권능을 강탈당했다고?”
“뒤나미스와 제국이 다르지 않다면, 권능은 개화하는 방식이 두 가지입니다. 일반적인 방식과,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이 있지요.”
파레사의 물빛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머금었다.
“후자는 어둠의 개화라고 불립니다. 일반적인 개화로서 얻는 권능은 빛의 힘. 그러나 어둠의 개화를 통해서 얻는 권능은 말 그대로 어둠의 힘. 무언가를 빼앗고 파괴하는 힘이기에…… 위험하지요.”
심지어 어둠의 개화는 빛의 개화보다 위험하다.
어둠의 개화로 권능을 가진 이는, 갖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에 휩쓸리고 힘을 탐하게 된다.
뒤나미스의 권능은 검의 권능.
따라서 어둠의 개화를 통해 뒤나미스의 권능을 얻은 이들은 결국은 광기에 들려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며 날뛰었다.
이는 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설명을 들은 황태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야.”
“제국에서는 전례 없는 일일 테지요. 뒤나미스에서는 권능이 오직 왕족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었어요.”
황태자는 태중에서부터 이미 권능을 발현했다.
제국의 권능은 핏줄을 타고난 이 중 하나나 둘, 아주 극소수에게만 개화하는 힘이었다.
배타적이고 그만큼 강력하다. 어둠의 개화는 빛의 개화보다 강력하니, 니시아나가 가진 권능은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알려진 역사에서는 일어나본 적 없는 일이라는 것.’
신중히 파레사의 말을 듣던 황태자가 물었다.
“그 힘을, 그녀가 어떻게 개화한 거지?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어.”
황태자도, 황제도 까맣게 몰랐다. 하여 황제는 방만하게 니시아나와 독대했다.
그녀가 아무 힘도 없는 귀부인에 불과할 뿐이라 믿었으므로.
“어둠의 권능은 빛의 권능과 달리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지독한 증오나 복수심,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루고 싶은, 강렬한 염원은 권능을 일깨우지요.”
니시아나가 가진 마음은 그중에서 무엇이었을까.
상냥한 미소를 장식처럼 단 한기 흐르는 얼굴을 파레사는 떠올렸다.
그토록 차가운 여자가 권능을 일깨울 만큼 강렬한 뭔가를 느낄 수 있다니. 그 또한 놀라웠다.
“어떤 강력한 계기가 있었거나. 아니면……. 조력이 있었거나.”
파레사는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려냈다.
“베녹스 후작?”
“그가 그녀와 교류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공작저에도 여러 번 드나들었더군.”
“그가 말했어요. 에레스 공작 부인이 자신의 연구에 관심을 보인다고. 그자의 연구는…….”
파레사는 기억을 더듬었다. 황후가 뭐라고 말했더라.
‘특히나 황가의 권능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고 했지. 어째서 제국에서는 후계자 위주로 발현하는 걸까. 하는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나.’
파레사가 응답했다.
“권능의 발현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가 관련이 있을지 확인해봐야겠군. 나를 도와주겠어?”
“물론이지요.”
하지만 호출된 베녹스 후작은 제게 제기된 의심을 정면으로 뿌리쳤다.
“저는 그저 제 연구자료를 보여드린 것뿐입니다. 때때로 부름에 응한 것은, 공작 부인께서 제 연구에 진척이 있는지 궁금해하셨기 때문입니다. 귀국한 이후로 승계받은 후작위에 적응하느라 그리 성과가 좋지는 못했지만요.”
단박에 연관성을 부인한 베녹스 후작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렇다는 말씀은, 혹시…… 에레스 공작 부인께서.”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실린 가느다란 미소를 파레사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 역시도.
하지만 의심만으로 아무런 증거 없이 후작씩이나 되는 고위귀족을 엮어 넣을 수는 없다.
니시아나는 사교계의 명사였다. 다른 귀족들과도 빈번하게 교류하는 터.
고작 두세 번 정도 그녀의 저택을 찾았다고 해서, 후작에게 혐의를 줄 수는 없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시오.”
만약 이자와 그 이상의 연관이 있다면, 지켜보다 보면 꼬리를 드러내리라.
“황후 폐하께서 부디 심신을 보전하시기를.”
전혀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모든 것을 알아챘다는 듯이 그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파레사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수상하지 않으세요?”
“원래 눈치 빠르고 수상해 보이는 자야. 그가 제국으로 귀국했을 때부터 의심했지만, 꼬리를 드러내지 않더군.”
“……그렇군요.”
하긴, 뭔가의 음모에 반드시 가담했을 법한 인상이다.
“이미 그의 연구자료를 확보했어. 클로드의 말로는,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더군.”
“그럼 다음으로 가지요.”
호출은 연달아 이어졌다. 황태자는 니시아나와 최근에 교류한 귀족들을 모조리 대면하여 조사했다.
그중 누구도 니시아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이는 없었다.
일이 터진 직후, 자택으로부터 진작에 붙들려 와 있던 니시아나의 남편, 에레스 공작조차도.
“니시아나가 무슨 짓을 벌였다고요?”
에레스 공작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면서, 니시아나에 대한 대답을 꺼렸다.
마치 그녀를 대단히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녀가 무슨 짓을 했든, 저는 모르고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요지였다.
아내에 대한 태도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기이한 반응.
머지않아 심문은 중단되었다.
파레사는 황태자에게 물었다.
“눈의 초점이 이상해요. 사고도 말도 정돈되지 않았어요. 에레스 공작은 심약하지만 총명한 자라고 들었는데…….”
“그래, 내가 아는 그가 아니로군.”
“공작 부인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요?”
“……제국의 권능은 상대의 정신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지. 물론,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황태자의 시선이 파레사에게 닿았다.
“그렇다면 공작 부인이 그를 세뇌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결국 실마리를 잡은 것은 없군. 그녀가 뭘 할지 모르니, 제재를 가해야겠어.”
제재를 가하려면, 니시아나가 하려고 했던 짓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집안싸움 정도가 아니었다. 반역이었다.
그리고 이내, 에레스 공작 부인의 수배령이 공표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가려진 채로.
죄목은 황제 시해 미수죄.
제국에서는 황제를 반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 때문에 그를 시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파급이 미칠 만했다.
그녀의 이름이 내걸리자 제도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나 그녀를 따르는 사교계의 귀족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 에레스 공작 부인이, 황녀가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고?
권능을 가진 황제를 상대로 그런 무모한 시도를?
그녀는 성공할 뻔했고, 황제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감춤으로써 그 사실은 은연중에 알려졌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졌다.
황태자는 감히 그에게 자세한 사건의 전말을 묻지 못하는 귀족들을 대신하여 황족들에게 시달렸다.
그들은 평생을 신뢰해온 에레스 공작 부인이 그 같은 일을 벌였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황태자를 비롯하여, 근위기사들이 두 눈 똑바로 뜨고 목격한 진실이었다.
제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짙은 혼란이었다.
황제를 대행하여 갖가지 업무를 처리하고 돌아온 황태자는 파레사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뒤나미스에게 공문을 보냈어. 어둠의 개화를 통해 권능을 얻은 자에 대한 자들에 대한 자료를 달라고.”
“도움이 될 테지요.”
“그녀의 목적은 무얼까. 폐하를 해치려다가 실패했어. 그 다음은? 어둠의 권능을 개화한 자는 어떻게 행동하지?”
어느 샌가부터 파레사는 그에게 든든한 동료처럼 된 모양이다. 실상 그가 이런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은 파레사 뿐이었다.
“폐하를 해치는 게 그녀의 목적이 아니었을 수 있어요.”
파레사는 황태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염원에 따르겠지요. 하지만 황태자 전하를 보고 도망쳤다면, 그녀의 염원은 황제 폐하를 살해하거나 권능을 빼앗는 게 아닐 거예요.”
만약 그것이었다면 그녀는 불타는 듯한 염원에 사로잡혀, 제가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목적을 달성했을 테니까.
그러니 니시아나가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게 다른 곳에 있다는 소리다.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일까요? 짐작이 가세요?”
에레스 공작이 답하지 못한다면, 그 답을 아는 것은 황태자뿐이었다.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이제껏 공작 부인을 겪어왔던 그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황태자는 가만히 시선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는 제 고모, 니시아나를 평생 보고 듣고 겪어왔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다.
늘 온화한 빛 속에 있되, 냉정하고 은밀하며 음산한 고모였다.
황태자는 그녀를 움직일 줄 알고,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하여, 황태자는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 미쳐있을 줄은 몰랐어.’
그 극단적인 광기. 내면에 그토록 강한 증오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니시아나는 서늘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잘 감춰왔으니까.
그러나 하나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황태자는 제 고모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늘 저를 보던 눈빛. 누군가의 일부를 바라보는 듯한 그 눈빛. 그것은 니시아나에게서 오롯한 진실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었어.”
“그게 무엇인데요?”
“죽은 내 모후.”
어린 시절부터 자매처럼 함께했던, 그러나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모후, 라비아.
황태자는 두 사람에게 얽힌 사연을 설명했다.
그리고 22년 전, 그를 두고 벌어졌던 선택까지도.
그가 알게 된 것은, 성년을 맞은 그에게 황제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황태자가 모든 것을 알기를 원했고, 모후의 희생과 그에게 짐 지워진 의무를 뼛속 깊숙이 새기기를 바랐다.
모후의 생명과 맞바꾸어 태어난 그였다. 그는 그 무게를 짊어지고, 어긋남 없이 완벽한 황태자로서 살아야 했다.
그의 모후가 바라던 대로, 그리고 황제가 바라는 대로.
황태자는 그렇게 필요로서 태어나 빚어진 존재였다.
무거운 진실을 털어놓으면서도 황태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비탄에 잠기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의 신색은 고요했다.
파레사가 물었다.
“저, 제가 이런 걸 알아도 되는 건가요?”
“알아도 되지. 내가 알려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니까.”
“황태자 전하.”
“나는 황제가 될 존재로 인생이 정해진 채, 태어났지.”
얼핏 자조적으로 들려, 파레사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예상과 달랐다.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은 없는 법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내가 대가로 치른 게 과연 무엇일까. 나는 강하고 부유한 것도 모자라 보다시피 아름답기까지 하거든.”
“그, 그렇군요.”
갑자기 자기 자랑으로 빠져버린 터라, 파레사는 당황스러웠다.
황태자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데다가 예비된 운명 또한 황제이니 완벽하지 않아? 나는 내 삶에 만족하고 있어.”
“……인간적이지는 않군요.”
처음 봤을 때 조각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조각처럼 인생 자체가 만들어진 존재.
하지만 온화하다 알려진 성품은 그저 가장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나라고 해서 고뇌가 없고 불만이 없고, 이 자리의 무게를 모르겠어. 하지만 몸에 익은 듯이 워낙 적성에 맞아서……. 그 또한 행운이라 여기고 있지.”
파레사는 자신이 완벽하여 운까지 좋다고 말하는 황태자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자랑일 텐데, 배가 아프다기보다는 왠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긴, 다 가지고도 징징거리는 것보다야 낫겠지.’
남들은 하루하루가 고달픈 시간에, 먹고 자고 일하고 놀 거 다 놀면서 공허하다느니 투정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녹청의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머금었다.
“그러니 이런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없지.”
“황태자 전하.”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파레사는 제 손을 움켜쥐는 손길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특별한 힘을 담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빨려드는 듯한 강제력이 있었다.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황태자가 가만히 속삭였다.
“나는 네게 많은 것을 보여줬어. 제국의 핵심에 이르는 내용까지도.”
파레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원래 핵심에 익숙한걸요.”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모든 사태에 대해서 곁에서 보고 듣고 겪고 의견을 냈다. 전속 시녀답지는 않은 일이었다.
왠지 점점 더 발뺌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언젠가 훌쩍 떠나버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렇겠지. 아마 너는, 벨로나 나이트 중에서도…….”
황태자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왕태녀와 가까웠나?”
파레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아주. 그분과 함께하는 게 제 삶이라 믿을 만큼.”
“그래서, 내 곁에 있는 게 배신으로 느껴질 만큼?”
무언가 뜨거운 마음이 훅 일었다. 파레사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가오고 흔들리던 마음이 마주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덜컥,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황태자는 그것을 정면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봄볕처럼 따사로운 눈길이었다. 이해와 애정이 공존하는.
그것이 못내 파레사의 입을 열었다.
“배신이라고 생각하실 테지요.”
파레사의 말은 차츰 단호해졌다.
“제가 그분의 곁을 떠난 건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이지, 그분을 배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나는 군주로서 너를 바라는 게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군주가 되실 거잖아요. 비슷한 이야기예요.”
장벽이 있다 한들, 벨로나 나이트는 한계를 극복하여 재능 그 너머의 무언가를 움켜쥐어야만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검사로서 혹독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러고도 거기서 선택받은 자만이 사명을 받아 권능을 얻을 수 있다.
파레사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데 익숙했다. 그러니 그가 황태자이고 자신이 벨로나 나이트라는 건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두고 온 자리에 있었다.
파레사는 왕태녀의 옆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거기에 남겨두고 왔다.
황태자는 조용히 턱을 쓰다듬었다.
“문제는 그거로군. 죄책감. 하지만 원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아니라고 해도, 저는 그렇게 했으니까요. 저는 제 행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는 괴로워 보여.”
“제 평생을 버려두고 떠나 왔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어요.”
“죄책감을 해소하려면, 그녀를 만나야겠군. 숨기고 있을 게 아니라.”
“……저를 가만 안 내버려 두실걸요.”
파레사는 왕태녀의 성격을 익히 알았다. 그리고 짧은 접촉만으로 왕태녀에 대해서 파악한 황태자가 동의를 표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문제지.”
황태자는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장벽이 무엇이든 돌파할 결심을 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파레사의 마음이었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이토록 강하고 위협적인 상대에게 이만큼이나 가까운 거리를 허용하다니.
옅은 긴장감 속에서 신경이 이완되는 듯한 편안함.
황후에게 그렇게 했듯이, 황태자에게 자연스레 할 말을 다 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게 아닐까.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언제나, 늘 모든 것을 포용할 듯이 바라보는 저 눈빛.
파레사는 의식에서 부러 배제하고 있었던 그 가정을 떠올려보았다.
‘만약 그와 내 사이에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답은 명료했다. 검고 탁한 진흙 속에서 반짝이는 유리 조각처럼.
그 반짝임이 아찔하여 파레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생각하신 이상일 거예요.”
왕태녀는 분노로 불타고 있을 테니까. 그녀와 부딪힌다면 반드시 어디건 깨어져 나갈 테지.
파레사는 솔직히, 두렵기도 했다. 깨어져 나갈 그녀와 자신이.
황태자는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
파레사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먼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 일이 불시에 닥쳐오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