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13
Chapter 13
* * *
요한나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역할은 탐색. 니시아나가 힘을 흘렸다면, 그 힘을 가장 잘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정령이다.
왕태녀가 구태여 그녀를 데려온 이유를 알 만했다.
“그래서 나였던 거지.”
요한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제 손위 남자 형제, 올로고스의 왕태자가 아닌 저를 데려왔나 했건만, 합리적인 이유였다.
올로고스의 왕태자라고 하여 그녀보다 유독 권능이 강한 것은 아니다.
능력이 비등하다면, 이런 유의 위험한 임무는 왕태자가 아니라 왕녀인 그녀가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가끔은 그녀에게도 왕녀로서의 의무가 불거지는 법이니까.
“갑자기 왕위를 포기한 게 억울해지는데…….”
뭐, 왕태녀와는 이쪽이 더 친하니 잘 화합해서 일을 잘 해내리란 생각도 했겠지.
같은 여자끼리니 같은 곳에서 머물면 호위도 갈릴 필요 없겠고.
일리가 있다. 조금은 찜찜하지만.
‘그럼 왕태녀가 회복을 마칠 때까지 나는 좀 돌아다녀 봐야겠군.’
잘하면 니시아나의 흔적을 잡을 수 있을지도.
왕태녀는 아직 요한나가 파레사의 존재를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건 파레사를 용서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여기서 활약해둬야 왕태녀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쓸모 있으니 용서해 준다는 식으로.
황궁 안을 정체 없이 거닐던 요한나 왕녀는 저편에서 눈에 익은 옆모습을 발견했다.
“베녹스 후작. 여기 계셨군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제도를 방문할 당시, 요한나는 베녹스 후작과 연회에서 얼굴을 마주한 터였다.
올로고스의 권능을 가진 요한나는 베녹스 후작의 관심을 끌었고, 그의 멀끔한 외형과 지적인 말솜씨는 요한나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무도회에서 담소를 나누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후일을 기약하며 헤어진 터였다. 말이 통하는 사이 정도랄까.
“아아, 요한나 왕녀님. 다시 방문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취하며 베녹스 후작은 그녀를 맞았다.
뒤나미스의 왕태녀와 올로고스의 왕녀가 어떤 일로 방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터였다.
눈치 빠른 이들이나 니시아나 황녀에 관한 일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잠시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던 차에, 후작이 직설적인 물음을 섞어 넣었다.
“황후궁에서 소란이 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계셨는지.”
“아아, 잘 해결되었어요. 그저 조금, 오해가 있어서요.”
귀족들에게도 얼마간 정보가 들어간 모양이다. 특히 이 베녹스 후작은, 혐의점은 찾을 수 없었지만 니시아나와 교류한 사이라고 들었다.
“그렇군요.”
요한나의 의심을 알아챈 건지, 그는 순순히 받아넘겼다.
“어쨌거나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저야 왕태녀를 따라온 것뿐이니까.”
능청스럽게 넘기며 요한나는 가벼운 투로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지냈던 날들이 워낙 즐거웠거든요. 왕태녀가 볼 일을 마치기까지 무엇을 하고 지낼까 고민이에요.”
이렇게 둘러대 둬야 자신이 제도를 쏘다녀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도, 요한나는 혼자서 황궁 밖을 돌아다니곤 했다.
“관심사가 다양하시지 않습니까. 제도는 문화적인 소양을 누리기에 좋은 곳이지요.”
“맞아요. 혹시 그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있나요? 제도는 변화가 빠르니, 제가 방문한 이후로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네요.”
그저 화제를 바꾸기 위한 질문이었다.
글쎄요, 라며 말을 끌던 후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말씀하신 오페라가 상연한다는 것 같군요. 입궁하는 길에 크게 광고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혹시 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맞습니다. 올해 공연은 이미 끝났지만, 성황에 힘입어 단 일주일간만 다시 상연한다고 하더군요. 아직 기간이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요한나가 제도를 방문하기 몇 달 전 상연한, 공연 수준이 높기로 유명한 란티어스에서도 대표적인 오페라였다.
요한나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게 그걸 못 본다는 사실이었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공연이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세상에! 이런 행운이 다 있다니!”
꺼림칙한 기분으로 제도까지 끌려왔던 게 언제냐는 듯이 요한나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럼 얼른 알아봐야겠군요. 이번 기회를 놓쳐버리면 전 정말이지 죽고 싶어질 거예요!”
“그 정도…… 입니까. 귀빈이시니 표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겠지요. 요새 사교계가 뒤숭숭한 터라, 공연을 즐길 만한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거 듣던 중 다행이로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베녹스 후작!”
요한나는 쾌활하게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대화를 마친 베녹스 후작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기색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 * *
어둠의 개화인지, 니시아나 황녀인지 알게 뭐냐. 요한나는 오로지 한 가지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표를 구했어!”
그녀는 방방 뛰었다. 귀빈이라는 건 이럴 때 좋다.
황궁에 문의하자 바로 표가 전달되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소풍 온 것처럼 신난 상태였다.
“바로 오늘 저녁 공연이라니!”
이렇게 수월할 수가. 아침만 해도 난리통을 치렀건만.
물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회복 중인 왕태녀는 요한나가 오페라를 보러 가겠다고 하자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공연만 보고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돌아와.”
“응!”
오페라 공연장은 황궁에서 굉장히 가까이에 있다. 이 정도의 근거리라면 호위도 달고 갈 테니 괜찮을 거다.
‘괜찮겠지?’
위험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요한나는 오로지 공연을 보러 갈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이 겪을지 모르는 위험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페라 극장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호위 세렌에게 말을 건넸다.
“세렌, 잘 부탁해요.”
“……맡겨주십시오.”
느리게 끌리는 음성. 요한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딘지 이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른 데 신경을 빼앗긴 것처럼 눈빛도 어딘지 어두웠다. 충혈된 눈은 초점이 묘했다.
요한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렸다.
‘참, 그녀는 파레사를 싫어한다고 했지.’
왕태녀의 결정이 마음에 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렌은 충실한 호위였다. 벨로나 나이트로서 어김없이 제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속내가 어떻든. 이제껏 그래왔듯이.
‘그보다 라니!’
요한나는 팸플릿을 펴들며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세렌의 이상한 상태는 금세 그녀의 뇌리에서 지워져 버렸다.
오페라 극장에 다다르자 요한나가 5번 박스석으로 안내되었다. 홀로 조용히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특별 좌석이었다.
귀빈에게나 허락되는 아늑한 작은 방은 다른 좌석과 동떨어져 있었다.
문에는 작은 창문이 달려 있고, 반대쪽에도 큼직한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자 무대가 바로 보였다. 무대 전체가 훤히 보이는 특등석이다.
그녀를 보필하여 온 황실 기사 한 명이 말을 건넸다.
“호위 때문에 이 근방의 방들은 비워져 있습니다.”
“이런, 안타깝군요.”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관람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황실 기사는 박스석으로 통하는 입구를 지키겠노라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그를 위시하여 기사와 병사들이 바깥쪽을 지킬 것이다.
박스석 가까이서 요한나를 지키는 것은 세렌이었다.
“세렌도 보고 싶지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즐겁게 관람하시지요.”
무뚝뚝한 목소리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비치지 않았다. 요한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박스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럼,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즉시 말해줘요.”
“예.”
등 뒤로 문이 탁 닫혔다. 요한나는 난간에 재빨리 달라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 * *
세렌은 박스석 근처에 서 있었다. 벨로나 나이트답게 곧바른 자세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정신은 어딘지 혼란했다. 극장에 오기 전부터, 줄곧 그랬다.
‘대체 왜…… 이런 거지?’
세렌은 뭔가를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했다.
어딘지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도통 뭘 했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있었던 사건의 여파가 자신을 잡아먹은 걸까?
호위를 서던 중, 시녀의 부름을 받아 어딘가로 이동했던 기억이 난다. 황궁에서의 부름이었다.
다른 벨로나 나이트가 있었기에 세렌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비웠던 터.
그곳에서, 누가 있었나? 기억을 떠올려 보려던 순간, 거세진 음악이 고막을 강타했다. 회상이 뚝 끊겼다.
아마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렌은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돌렸다. 저절로 손이 목으로 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갈증이 날까.’
아까부터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마치 배 속에 있는 심지에 누군가가 불을 붙인 것처럼.
살을 기름으로 삼아, 활활 타고 있는 불.
왜 이런 걸 느끼는 거지? 몸에 뭔가 문제가 있나.
‘……호위를 마치고, 왕태녀님에게…… 좀 쉬겠다고 말씀드려야겠어.’
세렌은 텁텁함에 목을 어루만졌다. 문득 박스석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아까 그 황실 기사일 것이다. 피로인지 잠인지 모를 것이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세렌은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극이 중단됐나?
세렌은 눈을 깜빡였다. 마비된 감각이 일순 서늘하게 깨쳐졌다.
세렌은 스산한 기분과 함께 깨달았다. 누군가 제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여자. 머리끝까지 후드를 눌러써 보이는 것은 하얀 턱선뿐.
“……당신은.”
“내 말 잘 생각해 봤어요……? 아니, 당신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네.”
사근사근하게 흘러드는 목소리.
“그렇지. 때로는 자신을 태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답니다.”
마치 신화에 나오는 바다 요정의 노랫소리처럼……. 홀릴 듯이 부드러웠다.
검은 바다로 그대로 이끌려 가는 것처럼. 불가해한 인력이 정신을 빨아당겼다.
세렌은 퍼뜩 이 오페라의 스토리를 떠올렸다.
바다 요정의 노랫소리에 홀려 배를 몰고 가던 선원들은 이내 소용돌이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그때, 가냘픈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다 요정의 노랫소리처럼 높고 가느다란 소리. 파멸을 향하라 유혹하는 그 목소리. 지독히도 달콤한.
세렌은 이를 악물었다. 견뎌야 한다. 하지만 몸이 뜨거웠다.
세렌의 심지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그것은 그녀를 살라 먹고 까만 그을음으로 남길 불이었다.
세렌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어둠이 그녀를 삼켰다.
* * *
. 흔하디흔한 신화에 비극과 좋은 노래를 잘 버무려 낸 오페라였다.
극이 상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나는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표정과 몸짓으로 제 감상을 고스란히 토해내면서.
‘아아, 최고야!’
이런 극을 볼 수 있다니. 오늘 가수들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음악도 완벽했다.
요한나의 두 눈에 환희가 가득 찼다.
왕태녀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 검의 권능은 정신의 힘이기도 하니까, 이런 극을 본다면 회복에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프리마돈나의 찢을 듯한 고음이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바다 요정의 노랫소리. 귀가 호사스럽다 느낄 만한 성량과 음색이었다.
점점 극이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아찔하게 손을 부여잡던 요한나는 문득, 정령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집중력을 흐릴 만큼 강한 움직임. 자아를 가진 정령은 위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등골이 오싹했다. 누군가가 근처에 서 있었다. 박스석들이 줄지어 있는 복도에.
‘세렌?’
넌지시 부르려던 요한나는 입을 다물었다. 덜컥 위기감을 느꼈다.
노래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묻혀서 비명을 지른대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기척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닫힌 박스석 문 위의 작은 창을 여닫으면서.
덜컥, 탁. 덜컥, 탁. 그 연이은 소리는 매우 빨랐다. 뭔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그 뭔가가 무엇일진 뻔했다.
가까이 오고 있다. 어떻게 대처하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요한나는 숨을 죽이며 작은 창 아래로 몸을 바짝 붙였다.
이어지는 노래가 그녀가 조심스레 움직이는 소리를 덮어주었다.
‘창문 바로 아래 붙어 있으면, 안 보일 거야.’
훤하게 빈 내부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척은 아주 가까워졌다. 바로 다음 차례였다.
이 작은 방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잠기지 않게 되어 있다. 문을 열면 상대는 바로 그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머리 위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요한나는 양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어김없이 창이 닫혔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소름이 쭉 끼쳐 올랐다. 창은 닫혔지만, 기척은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요한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무대를 향한 반대쪽 창문이 훤히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이쪽 박스석 중 관람객을 맞이한 건 오직 이곳뿐이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마치, 요한나의 어리석음을 비웃듯이.
그리고 이내, 미끄러지는 듯이 문이 열렸다. 요한나는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문을 잡은 새하얀 손. 그리고 그 위로 시선이 움직였다.
요한나는 후드 아래로 드러난 얼굴을 보았다.
요한나가 기억하는 얼굴의 음영과는 달랐다. 봄이 아닌데도 봄인 척 흉내 내고 있던 따사로운 얼굴.
그러나 음영 없이 새하얗기만 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죽음 같은 한기가 거기에 배여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아니,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가. 그래도…… 반갑군요.”
상냥한 목소리만은 여전했다. 요한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정령을 움직였다.
파앗! 쏘아져 나간 정령이 니시아나를 덮쳤다. 니시아나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때를 틈타, 요한나는 박스석을 비집고 뛰쳐나갔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 반역자야!”
목청껏 소리 높여 외쳤지만, 어쩐지 벽에 가로막힌 듯이 먹혀드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무대 위 음악과 노래는 고스란히 이곳을 향해 흘러들고 있었다.
요한나는 힘껏 바깥쪽을 향해 달렸다. 등 뒤에서 정령이 바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떤 거대한 힘에 사로잡힌 듯이.
그때 요한나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세렌!”
선 채로 잠들어버린 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벨로나 나이트.
그녀에게로 달려간 요한나는 손을 뻗었다.
“일어나요!”
어둠의 권능이 그녀를 잠재운 것일까. 니시아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또각이며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장송곡처럼 울려 퍼졌다. 이토록 두려운 순간이 없었다.
다행히, 요한나의 격한 손짓에 세렌은 눈을 떴다.
그러나 요한나는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세렌의 두 눈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암흑에 먹혀버린 것처럼.
‘맙소사, 이건…….’
다음 순간, 세렌의 손이 요한나의 손목을 콱 틀어쥐었다.
징표처럼 넘실거리는 검은 힘. 어둠의 개화를 이룬 자의 증거가 또렷이 보였다.
‘세렌이 어째서?’
뭔가가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벨로나 나이트 아니던가.
“세렌!”
힘을 주어도 소용없었다. 손아귀는 쇠로 만든 수갑처럼 단단했다.
육체적 힘만으로 벨로나 나이트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덧 다가온 니시아나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속박당한 정령이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다.
평생 요한나를 지켜주던 힘은 무용했다.
어째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지? 요한나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니시아나는 붙들린 요한나에게 손을 가져갔다.
어둠의 물결이 그녀를 향해서 덮쳐왔다. 요한나는 의식을 잃었다.
이내 정점에 이르러 소리를 토해낸 소프라노의 노래가 뚝 멎었다. 막이 바뀌는 정적.
갈취해낸 힘은 니시아나의 몸속에 녹아들었다. 그녀는 충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조건은 채워졌다. 한 번에 둘이라. 소득이 좋다.
축 늘어진 왕녀의 고개를 보며 니시아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죽일까?”
섬뜩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 하지만 답은 단호했다.
“아니, 그래선 안 돼.”
어둠의 권능은 살육과 맞닿아 있다. 살인을 시작하면 이미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한 그 힘은 더욱 빠르게 뿌리를 뻗으리라.
니시아나의 이지는 아직 또렷하게 살아있었다.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힘은 필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될 일이다.
니시아나가 돌아서자, 세렌은 요한나의 몸을 그대로 놓았다. 요한나는 맥없이 쓰러져 바닥에 몸을 뉘었다. 화살에 맞은 하얀 새처럼.
그 하얀 새의 목을 꺾으라 해도 세렌은 그에 따르리라.
임무를 받아 그녀를 지켰던 벨로나 나이트는 이 자리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막이 바뀐 무대에서는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니시아나는 기분 좋은 듯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녀도 이 오페라를 좋아했다. 바다요정의 노랫소리. 파멸로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 그 위험하고 절대적인 이끌림. 그 강력한 충동. 그 모든 게 깊이 와 닿아, 아름다웠다.
다만 니시아나는 충동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성과 감정을 다해 아주 오래도록 준비했다.
니시아나는 잠시 음악을 음미했다. 그녀가 가는 길을 축복하는 듯한 아름다운 노래와 음악이었다.
비록 비극일지라도. 어둠에 물든 이에게 어울리는 결말.
그러나 니시아나는 이미 비극을 겪었다. 그녀는 비극을 희극으로 뒤집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에겐 그럴 능력이 있었다.
지나치게 술술 풀렸다. 세상이 그녀를 돕는 것처럼. 아마, 그녀가 걷는 이 길이 바르기 때문이리라.
“가지요.”
니시아나는 뒤를 향해서 속삭였다. 두 눈이 검게 물든 세렌은 충실히 그녀를 따랐다.
주인을 바꾼 개는 더 이상 개가 아니었다. 충성심은 사라지고 열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둡고 탁한 열망.
“나를 따름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바람을 이루게 될 거예요.”
니시아나는 뱀처럼 속삭이며 웃었다. 사교계의 귀족들을 홀린 듯이 따르게 했던 바로 그 미소와 목소리.
그것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니시아나는 오늘 든든한 새 동지를 손에 넣었다. 길게 유효하지는 않겠지만.
우선 새로 얻은 힘을 소화하고 나서……. 니시아나의 입매가 깊어졌다.
형언할 수 없는 인간의 심연이 그녀에게 비쳤다.
그들이 사라진 복도에는 새하얗게 질린 요한나 왕녀만이 의식을 잃은 채 남겨져 있었다.
* * *
오페라 극장은 폐쇄되었다. 공연이 끝날 무렵에서야 바깥에서는 이변을 알아챘다.
박스석으로 이어지는 복도부터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두 개의 문으로 가로막혀 외부와 차단되어 있던 탓이다.
박스석 문 앞의 복도에는 황실 기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쓰러져 있던 것은 요한나 왕녀.
공연은 별 탈 없이 마쳤지만, 그 시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이 너무나도 컸다.
그것도 아무도 알지 못한 사이에. 오페라 극장은 곧 일대의 혼란에 휩싸였다.
요한나 왕녀는 극심한 피로에 원기가 쇠한 것처럼, 완전히 의식을 잃고 가사 상태에 빠져들어 있었다. 신체적인 훼손은 달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텅 빈 것처럼 모든 기운을 잃은 채였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적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니까.
황태자와 왕태녀, 파레사까지 모두가 오페라 극장에 모였다. 사건 현장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알아내 볼 요량으로.
너무도 순조롭고도 조용한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남은 증거라곤 약간의 파동과 공기 중의 기운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뭔가를 알아낼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녀가 여기에 있었어요.”
니시아나 황녀, 에레스 공작 부인. 반역자. 더 적합한 표현이 뭐가 있을까?
파레사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공기 중에 남아, 연기처럼 아른거리는 미세한 검은 힘의 흔적.
대담하게도 황궁에서 이렇게 가까이에 나타났다. 워낙 미세한 힘만을 사용하여, 감지되지 않은 것 같다.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니시아나의 능력을 간과했어. 그녀는 아무 힘도 가지지 못했을 때도 그 입놀림으로 사교계를 움직였던 여자지. 그녀는 마음속의 욕망을 꿰뚫어 볼 수 있거든.”
파레사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세렌이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접촉했다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어요.”
“그렇다고 뒤나미스에서부터 접촉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그녀에게…… 균열이 있었던 게 아닐까. 빠르게 포섭될 만한 무언가가 있었던 거지.”
어둠은 어둠에 끌리기 마련이니. 작은 구멍이라도 심연을 만나면 그에 녹아들고 만다.
황태자의 시선이 왕태녀를 향해 움직였다. 답은 그녀가 알고 있을 거였다.
왕태녀는 딱딱히 굳은 눈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다.
파레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마 니시아나의 능력도……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겠지요.”
사교계의 귀족들도 홀린 듯이 니시아나를 따르기는 했건만, 벨로나 나이트까지도 포섭하다니.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침묵하고 있던 왕태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좋은 함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토록 깔끔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목표만을 이루고 사라질 줄은.”
요한나를 부러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내보냈다고 말하는 왕태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의 실책이다. 서두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왕태녀는 오전의 싸움으로 소모한 힘을 회복하던 중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요한나와 꼭 같이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방만했던 것은 사실이다.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니시아나가 아무 소란 없이 요한나에게 접근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조금이라도 조짐이 느껴졌다면 바로 달려왔을 터.
“게다가 믿으면 안 될 이를 믿었군.”
왕태녀는 세렌을 중히 여겼다. 그녀의 충성심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요한나를 맡겼던 터.
그녀는 벨로나 나이트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력자였다.
문제가 생기면 어김없이 알려올 줄 알았건만. 도리어 그편으로 넘어가 버리다니. 그렇게밖에 설명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런 전투의 흔적도 없이 세렌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건 니시아나를 따른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다른 이유가 문제였다.
위협? 무엇으로 그녀를 위협한단 말인가. 뒤나미스에 있는 세렌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히지는 않았다.
세렌의 약점은 달리 없었다. 단지, 그녀의 마음만을 제외하고는.
그래, 그 마음이 문제였다. 왕태녀는 미간을 모았다.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것이 이런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슬에 젖었다고 호수에 뛰어드는 격이니까.
충격적이지만, 그게 실현된 현실이었다.
오페라의 극장은 마법으로 영상이 기록되는 장소.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모든 영상이 지워진 채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여기 남겨진 단서를 통하여 많은 것을 짐작해야 했다.
왕태녀가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아까 전 세렌이 시녀를 따라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군요. 황궁으로부터의 부름이었다고 하던데.”
벨로나 나이트의 움직임은, 그것도 전장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의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보고된다. 이는 다른 벨로나 나이트의 보고였다.
황태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귀빈에 대한 것은 제 소관입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아야겠군요.”
황궁에서부터 씨앗이 뿌려져 이곳에서 열매 맺은 일이다. 끝까지 샅샅이 파헤쳐야 했다.
파레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니시아나는 제힘을 잘 통제할 수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아직은 직접적인 살인이 없었어요.”
황실 기사들도, 요한나 왕녀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어둠의 힘에 삼켜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겠지. 증거를 인멸하려 시녀를 죽인 그녀가 새삼 사람의 목숨을 아낄 리 없으니.”
그것은 원하는 바를 뚜렷이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염원을 향해 진주해 나가면서, 완벽하게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다.
폭주하는 적보다 냉정하게 이성을 차린 적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은 당연하다.
“차가운 여자지. 그녀를 뜨겁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어.”
“가로막히기 전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겠군요.”
황태자는 조용히 고개를 움직였다.
사건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치 치닫고 있었다.
* * *
다음 날, 요한나 왕녀는 생각보다 이르게 눈을 떴다. 황태자가 권능으로 그녀를 치유시킨 덕이었다. 귀빈이니만큼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녀가 의식을 찾아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깨어난 요한나는 황태자와 왕태녀, 그리고 파레사를 앞에 두고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령이, 내 정령이…… 느껴지지 않아요.”
“왕녀님은 니시아나에게 권능을 강탈당했습니다. 그 영향이겠지요.”
말을 받은 건 파레사였다. 그녀의 능력이 다시 돌아올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지 못한다.
권능을 강탈하는 권능이라니. 이조차 유례없는 힘이니까.
황태자가 물었다.
“왕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시는지.”
요한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혼란한 와중에도 또렷이 기억났다. 칼로 그은 듯이 새겨진 기억.
“세렌이…… 어둠의 개화를 이뤘어요.”
침통한 목소리였다.
“세렌을 불렀는데, 그녀의 눈은 심연으로 물들었더군요. 나를 강제로 붙잡고 니시아나에게 바쳤어요.”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어둠의 권능에 물든 자를 원래대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는, 세렌이 더 이상 벨로나 나이트가 아님이 명백해졌다는 뜻이다.
그나마의 가능성은 전소되었다. 왕태녀는 이를 악물었다.
요한나가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된 거죠? 니시아나는 어디로? 난, 내 힘은 이제…….”
왕태녀가 요한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요한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살아서, 다행이야.”
그 말에 요한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나 사실, 죽은 건가……?”
왕태녀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왕태녀는 미간을 찌푸렸을 뿐 별다른 소릴 하지 않았다.
“이만 쉬어.”
왕태녀는 그녀를 뒤로하고 물러섰다. 황태자와 파레사도 함께 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곧 근처의 방에 들어서서 심각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녹청색 눈동자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도를 샅샅이 수색하라 일렀습니다.”
“쓸데없는 짓이 되겠군요.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어요.”
퍽! 왕태녀는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두 눈 가득 비쳐 나는 것은 분노였다.
“우리 모두가 방심했습니다. 이제는 다음을 생각해야 할 때지요.”
황태자의 말에 왕태녀가 휙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내 손으로 벨로나 나이트였던 자를 베어야 합니다. 내가 그녀를 선택하여 요한나에게 붙였는데.”
“왕태녀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을 한 것은 파레사였다.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왕태녀님은 제가 도망갈 것도 모르고 계셨잖아요?”
왕태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는 거겠지요. 예언이란 것은 절대적이고 강력한 흐름. 그러니 지금 상황은…… 예언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니시아나 황녀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세렌도 마찬가지예요.”
하긴 황제가 제 친혈육의 이변을 예측하지 못했던 게 더 심하다면 심하다고 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먼저. 갑작스럽게 일어난 화재. 그 방대한 화재를 잠재우려 황제가 권능을 소진했던 때부터인가.
그 때문에 니시아나에게 손쉽게 권능을 빼앗겼던 것이니.
왕태녀가 미간을 손으로 짚었다.
“예언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신화에 불과했어. 그저 그럴듯한 문장 한 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니시아나가 그에 부합하여 움직인다고 한들 막아내기 어렵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것은 오만이었지만 타당한 오만이었다. 정예만을 추려왔는데 어찌 벨로나 나이트가 배반할 가능성을 생각할까.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면, 더 이상 신화가 아니지요.”
세력이 있으면 흔적이 있고 땅이 있다. 추적하여 상대하고 응징할 방법은 충분하다.
하지만 니시아나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식과 남편도 버리고 제 오라비의 권능을 빼앗아 혼자서 도망쳤다.
에레스 공작은 자식과 함께 연금되어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니시아나가 그 근처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마치 그들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열망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살육을 벌이는 것도 아니니 흔적이 남지도 않는다. 까다롭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대였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예언은 ‘가장 큰 조각이 어둠에 물들 때, 태고의 신화가 눈을 뜨리라’라는 것이었지요. 그녀는 이번에 두 개의 권능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면 세 개의 권능을 모두 손에 넣게 된 것인데.”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디로? 거기서부터 막막해졌다.
파레사가 차분하게 읊조렸다.
“세 개의 권능은 각각의 조각이에요. 그걸 단순히 손에 넣는다고 해서, 아이기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이미 아이기스가 신화로 남을 만큼 오랜 세월을 떨어져 있었던 조각이니까요.”
“조각을 맞춰야 그녀는 비로소 아이기스의 권능을 손에 넣을 테지.”
“그러려면……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파레사의 물음에 황태자와 왕태녀 두 사람 모두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예.”
그 부름은 다른 이들을 배제시키고 있었다. 황태자는 선뜻 대답했다.
“곧 가마.”
어쩌면, 단서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송구합니다. 니시아나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전권을 가진 자로서 황태자의 사과는 온당했다. 하지만 황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조차 제대로 대응했어야 하는 게 제 몫입니다.”
황태자는 엄격한 투로 대답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서 조율되고 맞춰져 갔다. 최근까지 그러했다.
하지만 니시아나는. 그의 고모는. 그녀를 묘지로 불러낼 때만 해도 전혀 일어나리라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 균열은 왕태녀의 자존심이 박살 난 것 못지않게 그를 뒤흔들었다.
황제가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황태자는 젊은 나이에도 늘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해왔지. 이는 나의 실수이기도 하다. 황태자의 탓이 아니니 스스로를 탓하지 말거라.”
“황제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칭찬보다는 사실관계를 따지거나 허물을 지적하는 냉정함에 가까웠던 황제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따라 유독, 분위기가 무거워 보였다.
황제가 눈을 들어 침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신화에 남겨진 예언은 하나가 아니었다.”
황태자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렇다면.”
“제국에 남겨진 예언 또한…… 존재하지. 이는 황제에게만 전해지는 예언이다.”
황제의 입에서 예언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황태자는 호흡을 잊었다. 황제가 말을 마친 순간, 그에게 숨이 돌아왔다.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 뜬 황태자가 물었다.
“니시아나가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원칙적으로 다음 대의 황제에게만 알려지게 되어 있다. 하여 나는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모르겠구나. 선황은 그녀를 무척 아끼셨어.”
너무 아끼다 보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듯 누출된 비밀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녀가 다음에 어디로 갈지 아십니까.”
“아니, 모른다. 하지만…… 누가 알고 있을지는 알 것 같군.”
황제는 시선을 옮겼다. 창밖 너머, 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와 이야기해 보거라. 어쩌면, 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나의 직감이다.”
황제는 아직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주인. 그의 권능은 아직 그에게 예언과도 같은 직감을 가져다 주었다.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섰다. 그는 바로 누군가가 갇혀 있는 심문실로 인도되었다.
* * *
불이 환히 켜지고 황태자는 눈앞에 있는 자의 이름을 불렀다.
“베녹스 후작.”
감정이 깃들지 않은 호명. 그를 신속히 잡아들인 것은 황제다운 판단력이었다.
황제는 이미, 요한나와 그가 접촉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조차 황궁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니까.
그가 요한나에게 무어라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상관없다. 요한나는 그를 만난 직후에 오페라의 표를 구하려고 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요한나를 움직였으리란 추측은 자연스러웠다.
그 특유의 수상쩍은 분위기가 의심에 한몫을 하기는 했겠지만.
‘그는 권능에 관한 연구를 했어.’
그리고 니시아나도 그의 연구에 흥미를 보였다.
“저를 이리 붙잡아 놓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베녹스 후작은 양손에 수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양다리 역시도 수갑이 채워져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이는 이렇다 할 혐의 없이 제국의 후작에게 가해질 만한 처우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비공식적인 체포.
후작이 이곳에 붙잡혀온 것을 아는 이는 소수뿐이다.
황태자는 입을 열었다.
“요한나 왕녀가 당신의 말을 듣고 오페라에 참석했지.”
“그때의 대화를 되짚어 보라고 하시지요. 즐길 거리를 추천해달라 하신 것은 왕녀님이셨습니다.”
베녹스 후작의 신색은 태연했다. 그래, 늘 그에겐 문제가 없었다. 이미 가택을 수색해보지 않았나.
그는 언제나 사건의 변두리에 있었고, 무엇에도 관여치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황태자는 그가 수상했다. 하지만 그저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후작을 몰아갈 수는 없다.
그 때문에 그를 감시만 할 뿐 내버려 둬야 했다.
황태자는 늘 이성으로 움직이는 자이기에. 감정으로 움직일 때조차 그는 면밀한 계산을 거쳤다. 그래서 니시아나라는 변수를 놓친 것이다.
그에 반해 황제는 황태자보다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의 직감에 따라, 이렇듯 자리가 만들어졌다.
황태자는 차분히 의심을 토해냈다.
“난 그것을 우연이라 생각지 않아. 그리고 당신의 말은.”
황태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오페라 극장에서 왕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 것 같군?”
사건이 발각된 직후, 오페라 극장은 폐쇄되었고 시차를 거의 두지 않고 베녹스 후작도 붙들려왔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단단히 입단속 되었다.
소문이 새어나갔더라도, 그에게 이토록 빠르게 닿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베녹스 후작에게서는 조금의 동요도 엿보이지 않았다.
“간단한 추리입니다. 오페라 극장 쪽이 소란스럽더군요. 그리고 제가 붙들려왔지요. 그 사건이 저와 연결된다면, 별개의 두 조건을 잇는 건 왕녀뿐이시니까요. 안 그래도, 뒤나미스의 왕태녀와 올로고스 왕녀의 방문은 에레스 공작 부인 건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소문이 나던 참이었습니다.”
황태자는 그의 매끄러운 답변에서 확신을 얻었다.
“후작은 니시아나가 그녀를 노릴 걸 알고 있었군.”
“제가 그리 추측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후작 입장에선 그렇겠지만, 범인의 입장에서는 아니야.”
“여하간, 저는 왕녀님이 제게 묻지 않으셨다면 오페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리고 후작이 현장에 없었고, 직접적으로 관여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로서 그를 붙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잡아다 놓았다. 황태자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황태자는 서늘하게 미소지었다.
“후작은 아주 영리해. 늘 빠져나갈 수 있는 말을 하고,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키지. 하지만 그게 소용없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될 거야. 나는 후작을 ‘상관없다’는 말만으로 내보내 줄 생각이 없거든.”
황태자는 늘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몸에 익었다.
하지만 정당함과 타당함을 따져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니니까.
낭랑한 목소리가 우아하게 협박을 속삭였다.
“궁금하군. 후작은 먹고 마시고 자지도 못한 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베녹스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고통을 싫어합니다. 사실, 고문이라든가 불필요한 과정을 거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전 충분히 협조할 용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게서 쓸모 있는 것을 얻어내실 수도 있겠지요.”
말이 빨라진 걸 보니 고통받기 싫은 건 진심인 것 같다. 후작은 자세를 고쳐 등을 꼿꼿이 세우며 내뱉었다.
“질문하십시오. 답변하겠습니다. 그게 빠를 테지요.”
적극적인 태세였다. 황태자는 냉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거래를 하겠다는 건가.”
“협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 결백을 증명하지요.”
“후작은…… 니시아나가 다음에 무엇을 하려고 할지 알고 있나?”
세 개의 힘. 세 개의 조각. 란티어스와 뒤나미스, 올로고스까지. 세 개의 권능을 손에 넣었다.
다음 단계는 세 개의 권능을 합하여 아이기스의 권능을 손에 넣는 것.
아이기스의 권능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의 권능이 어둠의 개화를 이룬 자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너무 폭넓은 질문이군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그녀가 제게서 무엇을 알아갔는지를 토대로 한 추측 뿐입니다.”
추측을 넘어서 너무 잘 알고 있다면 그건 니시아나와의 공조를 인정한 셈이 된다.
베녹스 후작은 여전히 발뺌할 구석을 남겨두었다. 황태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말해 봐.”
“저는 아이기스의 권능에 대해서 깊은 흥미를 가지고 최근까지 연구해왔습니다. 3국의 권능의 존재 여부만으로, 아이기스의 존재는 입증됩니다. 해신 아이기스는 땅을 가르고 자신을 던져 녹여, 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신화를 연구하고자 해안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고대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지요. 아이기스가 땅을 가를 때, 그의 손에는 삼지창이 들려 있었더군요.”
후작은 분명한 어조로 선언했다.
“그 삼지창의 이름은 트리아이나. 저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아이기스의 권능을 다스릴 수 있는 신기, 그것이 저 바다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거라고.”
“……당신의 연구자료에는 없는 내용이로군.”
“외국에서 돌아오면서 방대한 연구자료를 모두 다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일부는 제 머릿속에 있지요. 무엇보다 이는, 확실히 검증된 자료가 없었는지라.”
베녹스 후작은 천재라 불린 학자였다. 비록 남들과는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진 터라, 학계에서는 그리 알아주지 않지만.
후작은 그저 쓸데없는 데 취미 삼아 공을 들인 괴짜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가문을 승계받고 나서는 그나마 연구를 거의 접다시피 했다.
“그녀는 제 연구에 유일하게 흥미를 보인 이였습니다. 권능에 대한 연구는 금지된 연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황녀에게 연구내용을 공유한 것 역시도 결코 범법은 아니지요. 제가 의심을 품었다고 한들 황가의 일원에 대한 의심을 함부로 내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부추기고 움직인 게 후작이라는 것은 의심이 드는데. 후작은 연구가 현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황태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권능을 전신에 휘어 감고 있는 그의 눈빛이 짓누를 듯이 후작을 조여왔다.
숨을 들이마신 후작이 토해내듯 말했다.
“무엇이 그녀를 움직였는지,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없는 마음을 만들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제게는 그런 능력도 재주도 없지요. 반대로, 그녀는 할 수 있습니다.”
니시아나가 후작을 조종하여 협조시켰을 수도 있다.
사교계의 다른 귀족들이 기꺼이 그녀를 따랐듯이, 베녹스 후작은 저항할 수 없었으리라. 그는 자연스레 니시아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황태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영리한 자야.’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황태자는 황제의 비밀스러운 고백을 떠올렸다.
‘이는 제국에 남겨진 두 번째 예언이다. 신의 권능을 얻는 자, 소원을 이루리라.’
니시아나의 소원이 뭔지는 확연하도록 뻔했다.
그녀의 길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길을 가로막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후작의 말을 들으니, 알 것 같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할지.
‘니시아나는 트리아이나를 손에 넣으려고 하겠군.’
예언은 함의적이고 예언과 예언 사이에는 중간 다리가 없었다. 베녹스 후작은 그 다리를 이어주었다.
세 개의 권능을 손에 넣은 니시아나는 그 권능을 합쳐 신의 권능을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다.
트리아이나. 삼지창이 그녀의 목적을 달성시키리라. 니시아나는 트리아이나를 통해 소원을 이루려고 할 터.
그 소원은……. 아마도.
황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니시아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그는 내버려 둬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오히려 도와야 하는 게 아닌가. 아들이라면.
‘내 어머니가 살아나는 일인데.’
얼굴도 가물가물한 모후. 그러나 어렴풋한 그리움만은 남아 있었다.
저를 낳기 위해 목숨을 바친 모후 아닌가. 살릴 수 있다면 살리는 것이…… 옳았다. 그것은 아들로서도 도리였다.
‘하지만 니시아나가 그런 힘을 손에 넣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차라리 가로채서 이쪽이 그 소원을 빈다면 모를까.
순리를 역행하는 일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를 뒤엎는 일이다.
황태자는 그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들로서든 황태자로서든.
일단 모후가 살아 돌아온다면 황제와 현 황후와의 결혼은 무효가 된다.
그러면 이혼을 바라는 현 황후의 목적은 손쉽게 달성될 테고, 황제도 살아 돌아온 모후를 내치지는 못하리라.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미래가 떨어지더라도 그 미래에 니시아나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제 자리를 파괴하고 떠났다. 니시아나도 알고 있을까?
‘광인에게 생각을 기대할 수는 없지.’
황태자가 입을 열려던 차에, 후작에게서 질문이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그녀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십니까?”
“후작은, 트리아이나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협박이 먹힌 것처럼 후작은 무척 협조적이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후작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니시아나를 막아서는 것이니까.
“……아직 시일이 좀 남았군.”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황태자도 동의했다. 쓸 만한 정보, 아니 아주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후작에 대한 심문을 그치지 않았다.
“당신이 실토한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당신을 제거하려 할 테지.”
“그녀는 제가 그녀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한 협력 관계. 그렇다는 건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황태자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당신을 제거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니시아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인데. 후작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글쎄요, 만약의 경우 저를 잡아가 뭔가를 더 알아내려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제가 가진 것은 이론이니까요.”
“그건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후작은 보호가 필요하겠어.”
감금을 확실시하는 결론에 후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바람이 있다면……. 저는,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되살아난 신화의 결말이 어떻게 맺어질지.”
그것으로 후작의 목적은 일정 부분 달성된다. 그 자체가 그의 연구 성과이니. 황태자는 그를 어떻게 할지 잠시 갈등했다.
베녹스 후작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서 의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조처토록 하지. 후작은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겠어. 다만, 이전에 말한 것보다 나은 처우를 해주겠다는 것만은 약속하지.”
감금이지만, 고위귀족으로서 편히 지낼 수는 있을 것이다.
심문을 마치고 방을 나서는 황태자의 등 뒤로 후작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쩌면 당신만이 그녀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란티어스의 후계자이자, 니시아나가 살리고 싶어 하는 전 황후의 친자로서.
그것은 자격이자 의무였다.
* * *
황태자가 사라지고 난 뒤, 베녹스 후작은 족쇄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빡빡하게 손목과 발목을 옥죄던 족쇄 자국이 남은 곳을 문질러보았다.
얼마 뒤, 그는 손끝으로 입가를 더듬었다. 저절로 드러나는 미소를 숨기는 것처럼.
‘그가 가야 계획이 완성된다.’
후작은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 황태자의 말대로 그 비정한 니시아나가 왜 그를 제거하지 않았겠는가.
후작에게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도구적으로 쓰이기에는 그의 역할은 다분히 주도적이지만.
베녹스 후작은 문득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굳게 잠긴 창밖에는 황궁의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중 한 지붕이 눈에 익었다.
후작은 얼마 전, 마차를 멈춰 세우고 지켜보았던 건물의 풍경을 떠올렸다.
아름답고 거대한 새장이었다. 그 안에서 새는 천천히 말라죽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진심으로 잘 지내기를 바랐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이제 와선 알 수 없다.
잊고 살다시피 했다. 애초에 제국을 떠난 자체가 연구에 매진하기 위한 것이니.
그러나 돌아와 제 발걸음이 향한 장소가 어딘지 알게 되고 나서야, 제 귀가 어떤 소식을 좇는지 알게 되고 나서야 그는 마음속에 남겨둔 바람을 깨달았다.
“그때는 그렇게 놓아버렸지만.”
훗날 돌아보건대 후회가 남았다. 후작은 자신에게 존재하는지 몰랐던 욕망의 불씨를 느꼈다. 그것이 그 과거에 남아 있었을 줄이야.
사람은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생물이라지만 저도 그럴 줄은 몰랐다.
베녹스 후작은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필요할 때 누구의 편이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누구의 편이 되어야 할지, 이미 선택한 터였다.
그의 목적은 연구의 결과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후작에게는 하나의 목적이 더 있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이미 멈출 수 없는 흐름이었다.
* * *
왕태녀와 벨로나 나이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황태자가 베녹스 후작을 만나는 사이, 전 황후가 묻혀 있는 묘지를 찾았다.
니시아나가 집착하는 게 전 황후고 그녀를 살리길 원한다면 시신부터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아니, 꼭 시신이 필요치 않더라도 니시아나는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런 그녀가 전 황후의 관이 파헤쳐지는 것을 이대로 내버려 둘 리는 없다.
그 때문에 진작부터 묘지는 철저한 감시에 들어간 터였다.
“만약 세렌이 나타나면, 내 손으로 그녀의 목숨을 거두겠다. 결코 마음 약해지지 마라.”
왕태녀는 남은 두 명의 벨로나 나이트에게 선언했다. 어둠의 개화를 이룬 니시아나가 제거해야 할 존재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왕태녀로서는 니시아나보다 세렌이 더욱 중요했다. 뒤나미스에서 나온 배신자니까.
그들은 살벌한 기세로 묘지에 당도했다. 전 황후는 한적한 곳에 조용히 묻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제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묘지에 묻혀 있었다.
그들은 전 황후의 시신을 확보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물론, 전 황후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며 그녀는 황태자의 친모이기도 하다. 따라서 함부로 무덤을 파헤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전 황후의 시신을 이관하여 황궁에 안치시키겠다는 명목을 세운 터였다.
물론,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은 묘지를 관리하는 자들과 황궁에서 보내져 온 인력들이었다.
왕태녀와 벨로나 나이트들은 그 과정을 지켜볼 것이다.
“그간 무슨 일은 없었나?”
왕태녀가 묻자, 묘지기가 대답했다.
“낮이고 밤이고 이곳을 감시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조용하기만 했지요. 저기 보십시오, 무덤가가 말끔하지 않습니까.”
왕태녀의 시선이 저편의 무덤을 향해 옮겨졌다.
만약 안쪽에 묻힌 것을 건드리고자 한다면, 무덤에 흔적이 남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무덤가는 잘 관리된 듯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하도록.”
“예,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흙을 내리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덮개를 열면, 그 안에 나무로 만들어진 관이 안치되어 있을 터.
쿠르르릉.
그러나 대리석 덮개를 연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럴 수가!”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 왕태녀는 그리로 다가서 안쪽의 텅 빈 공간을 쳐다보았다.
깨끗했다. 마치 그 안의 공간을 도려내어 옮긴 것처럼.
“관만을 이동시켰어. 이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렇다면 이건…….”
“니시아나가 선수를 쳤군.”
왕태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우선 황궁으로 간다.”
* * *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황태자가 심각한 분위기로 왕태녀를 맞이했다. 그 자리에는 파레사도 와 있었다.
왕태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의 고모, 철저하게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것 같군요. 움직임이 빨라요.”
이쪽에서 뭘 생각하고 움직일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처하기 전에 움직여 주저 없이 나아간다.
이미 그들은 니시아나로부터 한참 뒤처져 있었다. 서둘러 따라잡아야 한다.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그녀라면 이미 조처했겠지요.”
모후에게 그토록 집착하여 묘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니시아나이니, 이미 손을 써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고개를 낮추어 내뱉었다.
“다행히 긍정적인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일이 좀 있더군요.”
“성과가 있었던 겁니까?”
파레사가 묻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녹스 후작에게서 정보를 얻었지. 무슨 꿍꿍이인지, 흔쾌히 입을 열더군.”
미간을 좁힌 황태자는 제가 들은 정보를 털어놓았다.
“트리아이나라고.”
왕태녀가 굳은 얼굴로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래, 들어본 적 있어. 삼지창. 그리하여 세 개의 권능이 란티어스와 뒤나미스, 올로고스에 각자 내려앉게 된 것이라고.”
“해신의 권능이 담긴 신기이니, 바다에 있겠군요.”
파레사는 당연한 듯이 추측했다. 세 개의 나라는 아이기스 해를 둘러싸고 있으니까. 그 중심은 당연히 바다에 있다.
“그 넓은 바다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들었습니까.”
왕태녀의 질문에, 황태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해신의 유적이 란티어스와 올로고스 사이의 무인도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단서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말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분명했다. 황태자는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니시아나를 막기 위해서.”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왕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본국에 지원을 요청해보겠습니다. 빠르게 채비를 해야 할 겁니다.”
“내일 중으로 떠나도록 하지요.”
그것으로 대화는 마무리 지어졌다. 왕태녀가 방을 나서고 황태자가 파레사를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파레사는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저도 같이 가는 거 아니었는지요?”
“너는 기사가 아니야. 그리고 네 사명은 여기에 있지.”
그 사명을 떠올리며 황태자의 눈빛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위험할 거야.”
“그 위험한 곳에 란티어스와 뒤나미스의 후계자가 직접 가시는데 제가 가는 게 뭐 어때서요.”
혹시 제가 못 미더운 거냐는 듯이, 파레사는 덧붙였다.
“제가 황태자 전하보다는 전투 면에서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황궁에만 있었을 황태자가 전투를 경험해보긴 했을까. 그러나 황태자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가 위험하길 바라지 않아.”
동료는 곁에서 나란히 싸울 수 있어야 동료다. 왕태녀와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네가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성을 차리지 못할 테니까.”
그는 파레사가 얼마나 강하든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라는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파레사는 당혹스러운 눈빛을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절 걱정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낯설군요.”
뒤나미스에 있을 적에도 위험한 일에 나섰으면 나섰지, 뒤에 서 있으란 소리는 못 들었다. 그건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는 가야 해요. 아시잖아요.”
니시아나에 벨로나 나이트 세렌까지. 이쪽에서는 최대의 전력을 파견해야 한다. 파레사가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넓게 보자면 황후 폐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당신도. 파레사는 말을 삼켰다. 황태자가 파레사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파레사도 그랬다.
황태자가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다면 자신의 손으로 지키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배운 검이다. 벨로나 나이트는 싸워 지키는 존재지, 결코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너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
황태자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이제껏 줄곧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해왔다.
돌아가든 좀 더 유한 수법을 쓰든 어떻게든.
하지만 돌이켜보면 직선으로 나아가고 싶은 그를 막아서고 돌아가게 만든 것은 늘 파레사였다.
그는 파레사 앞에서 주춤거렸고 때로는 뒷걸음쳤고 때로는 관망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딛게 되는 걸음은, 늘 파레사와 함께 하는 길이었다. 그녀의 의지와 부합하는 길.
파레사는 확고하게 말을 받았다.
“이것은 저의 검명에도 부합하는 일이에요.”
그래, 황후에게서 검명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으나,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이 이 거대한 사건에 이끌려 제국으로 왔을 거란 게 느껴졌다.
파레사의 역할은 황태자와 함께하는 데 있었다.
황태자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이 말했다.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군. 너는 황후의 전속 시녀이니.”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올라앉았다.
“네 거취는 어머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겠지.”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 * *
예상대로 황후는 반대부터 했다.
“그 위험한 데를 네가 어떻게 가겠다는 것이냐!”
성을 내는 황후에게 파레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싸우는 모습을 보셨잖아요.”
그러자 황후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그날 황후는 적잖이 놀란 터였다. 제 전속 시녀가 검을 들고 싸우다니!
납치범들을 때려잡았다길래 강한 줄은 알았건만,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파레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황후는 다른 쪽으로 트집을 잡았다.
“네가 없으면 내 전속 시녀 자리가 비게 되잖아! 근무 태만이다. 네 의무는 나를 보좌하는 것인데!”
“제 의무를 대체할 사람이 있잖아요. 하이디인가 친구분이 오신다지 않았어요? 이미 제도에 와 있지 않나?”
요 근래 소란 때문에 입궁은 못 했어도, 제도에 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녀라면 파레사의 자리를 대체하기에 충분했다.
황후는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내 전속 시녀는 너야. 나는 너로 정했다.”
“그렇다면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제 자리를 잠깐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아직 사명이 다하지 않았다. 파레사의 역할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황후의 옆자리에. 그러니까 돌아올 것이다.
희미한 미소가 파레사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 사실이 번거롭다거나 거슬리지 않는 걸 보면, 저도 이곳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좋은 사건이라곤 별반 없었건만, 감회가 새로웠다.
“애당초 니시아나를 왜 막으려 한단 말이냐? 전 황후가 살아 돌아오는 게 어때서! 황태자도 제 친모가 살아 돌아오면 좋을 게 아니냐. 황제 폐하도.”
황후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나보단 조용히 뜻에 따르는 그녀가 더 맞겠지. 황후로서도 잘 해낼 테고.”
“그야 그렇겠지요.”
파레사가 선뜻 긍정하자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못마땅한 것처럼.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황후 폐하시잖아요. 그분이 아니라.”
“그랬다면 진작 잘했어야지. 이혼 소리를 나오게 할 게 아니라.”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여하간 죽은 자조차 살리는 힘이 니시아나의 손에 들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그녀는 너무 위험해요.”
“그 위험한 일에 하고 많은 자들 중 하필 시녀인 네가 가! 그렇게 인재가 없다더냐!”
“그런가 봐요. 제국도 큰일이네요. 그렇게 인재가 없어서야.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너무 유능한 것을요.”
황후의 입이 절로 닫혔다. 파레사는 미소 지었다.
황태자는 황후가 저를 막아줄 거라 생각했겠지만, 이기는 건 자신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무사히…… 다녀오거라.”
못내 토해진 그 말에 파레사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그동안 무탈히 지내시기를.”
황후야말로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할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