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16
Chapter 16
* * *
황후는 빈번하게 황제궁에 드나들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거의 거처를 옮기다시피 황제의 곁에서 머물게 되었다.
“나를 감싸려다가 그렇게 되신 건데 모른 척할 수는 없잖니.”
그런 것치고는 꽤나 열성적으로 간호하며 말벗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파레사는 토 달지 않았다.
황후를 따라 파레사도 자연히 황제궁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황후의 두 아이를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건 파레사의 주된 업무였다.
황태자는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터.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회의가 열리는 기간이라 무척 바쁘다고 한다.
파레사는 안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제가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는 상황이 닥쳐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게 언제일지 어떤 방식으로일지 알 수 없었다. 그 불확실성은 파레사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컴컴한 밤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라니 퍽 낭만적이지 못하다.
‘더 이상의 사건은 사절인데.’
평화로운 황궁 생활. 파레사는 헛된 꿈을 꾸었다.
그리고 파레사의 바람과는 반대로 음모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 *
황후가 황태자에게 자작 부부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넌지시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한동안 그 문제에 신경 쓸 수 없었다.
황제가 공석인 이상, 그는 제국의 최고 책임자였으니까.
황후는 자작 부부를 의식적으로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을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 황제를 간호한다는 사실이 껄끄럽게 느껴질 터.
그렇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 자작 부부는 하이디와 함께 음모를 구체화했다.
하이디는 소위 말하는 윗분들과 연결되어 있을 터. 그 윗분들은 파레사의 존재를 경계하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자작 부부의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그 전속 시녀를 황후에게서 떼어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문제였다.
황후는 그 전속 시녀를 아끼고 신뢰했다. 황태자의 의중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그녀와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쉽사리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도리어 이쪽에 불똥이 튈지 모른다. 방법은 은밀하고 교묘해야만 했다.
윗분들로부터 여러 가지 조언을 들은 하이디가 말을 꺼냈다.
“추문이 생기면, 궁을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추문이라고?”
자작의 반문에 하이디가 찬찬히 설명을 풀어놓았다.
“그녀는 전에 도둑 누명을 쓴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그런 식으론 안될 거예요. 좀 더 확실하게, 증인이나 증거가 있어야겠지요.”
“궁을 나올 수밖에 없는 추문……이라면 귀족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종류여야 할 텐데.”
자작부인이 근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황태자 전하와 교제하는 사이라면, 더욱 치명적일 추문이 있지 않겠어요?”
자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를 붙인다는 건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란다!”
딱 잘라 부정한 자작부인은 단호하게 외쳤다.
“황태자 전하를 두고 어떻게 다른 얼굴이 눈에 들어올 수 있겠어!”
그녀 인생에서 그토록 단호했던 적이 없었다. 자작이 제 아내를 낯설고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야 그럴지 모르죠. 무엇보다 황태자 전하를 노리고 들어온 그녀가 웬만한 유혹에 굴하지도 않을 테고요.”
말을 내뱉으며 하이디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그녀가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로 보이기만 하면 충분해요.”
자작부인은 머뭇거렸다.
“그건 좀 너무 심한…… 일 같지 않니.”
“지금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에요. 이대로 황후 폐하께서 잘못된 길을 가시게 둘 수는 없어요.”
하이디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자작부인은 주저하는 반면, 승낙을 말한 건 자작이었다.
“좋아, 어떤 방법이든지. 그 여자를 황후 폐하로부터 떼어낼 수만 있다면.”
물론, 황후가 황제를 병간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황후도 입단속하고 있는 데다가 하이디의 정보통인 윗분들도 숨기고 있는 터. 황후를 위한다는 명분은 그 추잡한 음모를 정당화했다.
자작부인은 결정을 자작에게 미루며 우유부단하게 뒤로 물러섰다.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전.”
“부인은 생각할 필요 없소. 하이디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되고말고!”
남편의 역정 앞에서 자작부인은 별말을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그녀는 남편의 강권으로 황후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편지를 쓰는 정도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며 양심을 외면하면서.
* * *
편지를 받아든 황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곧장 파레사를 호출하여 편지 내용을 토로했다.
“아직도 영지로 돌아가지 않으셨다는구나. 심지어 아버지는 스트레스 때문에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대.”
“그 편지에는 답장하지 않는 것을 권하고 싶군요. 그편이 마음 편하실 테니까요.”
“동생도 제도로 오고 있다는구나. 많이 상태가 나쁘신가 봐. 의원도 거부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계시다니…….”
황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놓았다. 속으로는 고집불통 노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모르쇠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네가 저택을 방문해야겠어. 아버지의 상태도 보고, 가급적 잘 설득해서 그분들을 영지로 돌려보내도록 했으면 한단다.”
“저는 모른 척하시는 게 맞다고 봐요. 황태자 전하께 하신 말씀도 있잖아요.”
파레사는 냉정했다. 황후 또한 어떤 면에서는 그랬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그러다 제도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만 독한 년이라고 소문 날 게 아니냐! 살피는 흉내라도 내야지. 돌아가셔도 영지에서 돌아가셔야 해!”
“……그렇군요, 알겠어요.”
일리가 있는 말에 파레사는 승복했다.
“나가는 김에 휴가도 줄 테니, 황궁을 벗어나 며칠 쉬다 오려무나. 보고는 그때 하렴. 네 말마따나 모른 척할 수 있게.”
“예, 그럴게요.”
정말로 명목뿐인 방문이었나 보다. 그렇게 파레사는 오랜만에 공무에서 해방되어 궁 밖으로 향했다.
* * *
황궁을 벗어난 파레사는 별문제 없이 패터스 자작저에 다다랐다.
“황후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하지만 당연히도 자작가에서는 그녀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서 와요. 남편은 병환으로 누워있는 터라, 나와보지 못함을 양해해주세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지.”
자작부인은 파레사에게 원망의 시선을 던졌다. 파레사는 그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받으며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 그분을 대신하여 패터스 자작님의 용태를 살펴달라 명하셨습니다.”
“남편은 몹시 상심해서 앓아누워 있어요. 저러다 건강이 크게 상할 텐데.”
자작부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인위적으로 보였다.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의원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의원뿐만 아니라 아무도 만나지 않는걸요.”
“그렇다면 문을 잠그고 줄곧 틀어박혀 계신 겁니까?”
“네, 그래요.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벌써 며칠째인지.”
자작 부인은 2층을 힐끔거리며 눈물을 짜내는 척했다. 그녀의 어설픈 연기력은 파레사에게 쉽사리 간파당했다.
파레사는 주저 없이 말했다.
“안내해주시지요.”
“글쎄, 문을 잠그고 아무도 안 만나준다니까요.”
그리 말하면서도 자작 부인은 파레사를 자작의 방으로 안내했다. 파레사는 문을 똑똑 두드리며 자작을 불렀다.
“패터스 자작님, 황후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나 소식은 없었다. 파레사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쾅쾅 소리가 날 만큼 세차게.
하지만 여전히 안으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머, 문을 그렇게 세게 두드리면 어떡해요. 소용없다니까요. 저이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고집이 아니라 문을 열 수 없는 상태인지도 모르지요.”
무심한 어조로 대답한 파레사는 문에 귀를 붙였다.
“이상하게 조용하군요.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신 때가 언제이신지요.”
“그, 글쎄요. 며칠 됐어요.”
파레사가 자작 사망설을 제기하자 부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레사는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식음을 전폐하셨다고 했지요. 연세를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문을 열어야겠습니다. 혹시나 황후 폐하께서 장례식에 대비하셔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파레사는 말릴 새도 없이 문을 걷어찼다. 쾅! 문고리가 장난감처럼 부서지며 문이 끝까지 열렸다.
반동으로 튕겨 나오는 문을 걷어내며 파레사는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침대에 누워 있던 자작이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식음을 전폐하셨다는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의원을 불러주시지요.”
곧 달려온 의원이 자작의 상태를 살폈다.
그 와중에 언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맨손으로 문고리를 부순 파레사의 무력을 본 그들로서는 차마 그녀를 내쫓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황후의 명을 받들고 온 사람이었다.
“별문제 없으시다는 군요. 독도 중화가 되었고, 아주 건강하신 상태라 영지로 돌아가셔도 된다고 합니다.”
그 말에 자작 부부가 움찔거렸다. 파레사는 고압적으로 보일 만큼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황후 폐하께 거짓된 말로서 심려를 끼쳐드리는 것은 도리도 예도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의 황궁 출입을 막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근래 황궁은 큰 사건을 겪어 어수선한 분위기입니다. 두 분께서 말과 행동을 삼가실 만한 분별력을 보이셨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겠지요.”
“당신은 마치, 황후 폐하의 부모인 우리를 무시하는 듯이 말하는군요.!”
들켰나. 파레사는 자작 부부를 마음속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파레사는 자작 부인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렇게 들렸다면 유감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황후 폐하는 두 분을 살펴드리라 저를 보냈고, 저는 그분께 이 황망한 사건에 대해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내참.”
버럭 성을 내는 자작을 향해 파레사는 냉담히 말했다.
“영지로 돌아가시지요.”
“당신이 무슨 권리로 우리더러 영지로 돌아가라 마라 해!”
“이 자작저택은 황후 폐하의 앞으로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파레사는 언제든 그들을 내쫓아버릴 수 있음을 암시하며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두 분이 귀족으로서의 본분을 지켜주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두 분께서는 비록, 그분이 황후 폐하시라는 것을 잊고 계시는 듯하지만요.”
벨로나 나이트일 적에 익히 해본 일. 파레사는 고스란히 제 기운을 드러내며 그들을 압박했다.
꼿꼿한 자세와 힘이 깃든 말투. 무엇보다 그녀가 선보인 무력은 험한 일이라곤 겪어본 적 없는 자작 부부에게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져 왔다.
“귀족의 본분은 영지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사받으신 영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면 황후 폐하께 누가 될 겁니다.”
그 영지도 결국 그녀가 황후가 된 후에 하사받은 것 아닌가. 파레사는 입을 다무는 자작 부부를 훑으며 물었다.
“아드님은 어디 계십니까.”
황후의 남동생. 제도로 올라온다지 않았나. 그라도 말이 통했으면 좋겠지만, 이 부부를 보건대 가망성 없는 일로 보였다.
위축된 기색의 자작 부인이 웅얼거리듯이 답했다.
“오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아드님이 두 분을 모시고 함께 돌아가시면 되겠군요. 가까운 시일 내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파레사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안쪽에서 자작이 분통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파레사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리를 빠져나오며 살짝 갈등했다.
‘내가 너무 강압적으로 나갔나?’
왠지 빚쟁이가 빚 독촉하는 것처럼 자작 부부를 대해 버렸다. 그래 봬도 황후의 부모인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해서 황후가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았다. 통쾌해하면 모를까.
“뭐, 이미 끝난 일인 것을.”
돌아가라고 했지만,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또 뭔가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후에나 생각해볼 일이다. 황궁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휴가니까.”
파레사에게는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조금 적은 일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자그마치 제국을 구한 영웅인데.
‘그런 말을 붙이기는 낯간지럽기는 해.’
포상도 아직이었다. 하지만 주머니는 두둑했다. 파레사는 오랜만에 상점가를 거닐어 보기로 했다.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지는 화창한 날이었다. 직장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개운한 기분이 확 들었다.
“노라가 대신 사달라는 물건이 있었는데.”
파레사가 상점가를 돌아보고, 여관으로 가려는 때였다. 골목으로부터 누군가가 확 튀어나왔다. 그 누군가는 파레사를 보며 외쳤다.
“도, 도와주세요!”
천을 뒤집어써, 얼굴을 볼 수 없는 남자였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댄 그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파레사를 보며 외쳤다.
“누구…… 벼, 병사들을, 사람을 불러주세요!”
옷이 이리저리 찢기고 손목에 밧줄의 흔적이 남아있다. 잡혔다가 탈출한 것으로 보였다.
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납치인가?’
골목에서 우르르 달려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숨을 몰아쉬면서 남자는 그쪽을 돌아봤다. 더 이상 도망갈 여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파레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휴가 중인데…….’
또다시 이런 사건에 말려들다니. 하지만 그녀는 전속 시녀로서 휴가 중이지 여전히 벨로나 나이트였다. 불의와 약자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존재.
파레사는 성큼 앞으로 걸어 나섰다.
잠시 후 뻔한 사태가 펼쳐졌다. 남자를 쫓던 건달 다섯은 대화로 해결하자는 파레사의 제의를 당연히 거부했고, 무력을 행사하려고 들었다.
파레사로서는 그들을 때려눕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 저편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이런, 병사들이 왔나 봐!”
“가자!”
건달들이 우르르 자리를 피하고 난 뒤, 그 자리에는 파레사와 천을 뒤집어쓴 남자 두 사람이 덩그러니 남았다.
남자는 파레사에게 다가와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별로 제가 한 건 없지만.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파레사는 손을 슬슬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천 사이로 드러난 두 개의 눈이 그녀를 향해 꽂혀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파레사는 흠칫했다. 자수정 같은 보랏빛 눈동자. 깊은 광채의 그 눈동자는 시선을 빨아당기는 듯한 매혹을 품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주는 눈빛을 본 것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황후.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파레사는 시선을 골목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겠습니다. 병사들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면 그들이 다시 올 테니까요.”
상인들이 호루라기를 불어 그들을 쫓아내 준 모양이었다.
남자는 그제야 파레사의 손을 놓아주었다. 천 아래로 그가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실례를…… 해버렸네요.”
제도는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험한 꼴을 당할 뻔하다니. 꺼림칙한 건 꺼림칙한 거고, 무슨 일인지는 알아봐야 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를 옮겼다. 상인들이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는 불안한 듯이 파레사에게 착 붙어서 뒤를 따랐다. 마치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오리처럼.
적당히 한산한 장소에 이르자, 파레사는 몇 걸음 걸어 그와 거리를 두었다.
이상하게도 낯선 이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치근덕거린다고 생각했다면 떼어냈겠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말해주었으면 합니다.”
들어보고 기사나 병사에게 인계할 것이다. 파레사는 책임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벨로나 나이트로서의 습성대로.
남자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당신을 알아요.”
그리고 재빨리 얼굴을 가린 천을 내려버렸다.
파레사는 조금 놀랐다. 그 얼굴을 본 즉시, 어째서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지 이해되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박힌 새하얀 얼굴은 귀공자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내어놓고 길을 걸으면 온 사람의 시선이 쏠릴 만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우습지만…….’
황후와 비슷한 속성의 외모라고 할까. 눈 아래 찍힌 점이 묘한 느낌을 주는, 눈빛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인상이다.
물론, 몰락 귀족이라고는 하나 귀족가의 아가씨로 고이 자라온 황후는 천진한 데가 있는 반면, 이자는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 그대로의 성격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기쁜 듯이 물었다.
“그, 마차에서 납치하려는 놈들을 때려눕힌 시녀님 맞지요?”
“……그 사건이 익히 소문이 났나 봅니다.”
“그건 아닐 거예요! 우연히 그 광경을 본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워낙 미인이셔서 바로 알아봤어요.”
파레사는 심드렁하게 받아넘겼다.
“그렇군요. 그보다 어떤 일로 쫓기고 있었는지 말해주었으면 합니다.”
부디 골치 아픈 일이 아니길. 모처럼 휴가를 즐기고 싶었던 파레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인이라는 수식어에 파레사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남자는 위축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파레사는 자신이 골치 아픈 사태에 휘말렸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인신매매? 이 제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까.”
“네, 저도 조금 전 당할 뻔했고, 제 동생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남자는 처연한 몸짓으로 고개를 저었다.
“외모가 반반한 이들을 납치해다가 높으신 분들이나 해외에 팔아넘긴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고 있답니다.”
“그렇다면 고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고가 없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인 데다가, 고발해 봐야 소용없다고 해요. 윗선과 연결되어 기사들이나 병사들도 한통속이라더군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파레사를 납치하려 한 자들도, 감옥에서 탈옥하지 않았나.
‘이 나라는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군.’
그렇다고 해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려고 하다니! 파레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와 함께 가서 증인이 되어주시지요.”
기사들과 결탁할 정도면,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이 관여된 일이 틀림 없다.
그렇다면 그 윗선인 황족 선에서야 해결을 볼 수 있으리라.
마침 파레사가 잘 아는 황족, 아니 황족들이 있었다.
황태자 직속의 황실 기사들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아는 게 없어요. 누가 저를 쫓는지도.”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데 쫓겼다면서요. 당신 집을 알고 있는 자들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사실 제 친한 동생이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남자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말을 꺼냈다.
“함께 쫓기다가 납치당한 이가 어떤 마차에 실리는 걸 보았다더군요. 겁먹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그 아이가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워낙 겁이 많아서 여자분이 가서 설득하면…… 안심할 것도 같은데.”
“그렇군요. 그렇다면 함께 그에게로 가지요.”
파레사는 깊게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함정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고, 이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몰랐으면 모르되 알고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법이다. 수틀리면 때려 부수면 그만이었다.
다만 파레사는 다른 의미의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벨로나 나이트는 더럽혀질 수 없는 명예를 상징했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황후의 전속 시녀를 건드리는 건 반역에 달하는 죄니까.
“저를 따라오시길.”
파레사는 남자를 따라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시 얼굴을 가린 남자는 조금 앞선 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아까 전 소란이 벌어졌던 상점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상점가에는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곁에 선 상인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이 쫓기고 있었어요.”
아마 이곳에서 소란이 벌어졌다는 것을 듣고 달려온 기사인 모양이다.
‘직업의식이 투철하군.’
기사는 허리에는 검을 찼으나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 귀가 중이었던 듯하다.
파레사는 곧바른 자세와 특유의 꼿꼿한 분위기로 그가 기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 흠칫 놀랐다.
‘어라.’
기사는 파레사 또래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에 맑은 눈동자는 적갈색이었다.
다소 고지식하고 표정이 많지 않은 얼굴은 반듯하고 귀티가 났다.
서늘하면서도 선이 굵지 않은 유려한 이목구비는 사교계에서 선호하는 타입의 외모였다.
귀족가의 자제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띌 법한 인물이다.
‘오늘만 제도의 평균 수준을 훌쩍 상회하는 인물을 둘이나 만나다니.’
그 또한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청년도 파레사를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레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간을 모았다.
“황실 시녀로군요.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이 사람이 건달들에게 잘못 걸렸나 봐요. 몹시 겁을 먹고 있어서 집까지 함께 가주려는 참이었어요.”
파레사는 대충 둘러댔다.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그자들이 또 나타날지 모르니 저도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
파레사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은 황실 시녀입니다.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요.”
파레사는 잠깐 미심쩍은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람, 날 모르나?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제도에서 웬만한 기사들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터.
‘그래, 소문에 관심 없으면 모를 수 있지.’
파레사가 정중하게 거절을 말하기 전, 남자가 기겁하며 외쳤다.
“아, 안돼요! 제 동생이 기사님을 두려워할 거예요.”
기사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기사에게 뭔가를 당한 적이 있습니까?”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파레사는 그를 돌아보며 기사한테 말했다.
“예, 그렇다는군요. 제가 가보고 혹여 문제가 있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에드라고 합니다.”
그는 왠지 이름을 말하기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평민 출신인가? 성을 말하지 않게.’
파레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기억해두겠습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치안대로 찾아뵙지요.”
남자와 파레사는 성큼 기사를 지나쳤다. 기사의 시선이 뒤통수로 느껴졌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서 가지요.”
파레사는 남자를 재촉하며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20분가량 걸었을 때, 남자가 발길을 늦추었다.
“이쪽이에요, 거의 다 왔어요.”
등 뒤를 따르는 파레사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성공했군.’
과연 제 수법이 제대로 먹혔다. 위기에 처한 약자가 도움을 청하면 거부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건만.
‘뭐, 어쩌면 내 얼굴을 보고 내심 다른 마음을 먹고 따라왔는지도 모르지.’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목적지에 다가서며 남자는 얼굴을 가린 천을 자연스레 걷어냈다.
보랏빛 눈동자가 새겨진 새하얀 얼굴이 허공에서 선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보는 이들마다 시선을 빼앗길 만한 그 아름다운 얼굴은 그의 재산이었다.
남자는 파라모어였다. 파라모어는 단순히 푼 돈에 몸을 파는 자들과는 다른,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귀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정부가 되어주는 존재였다.
미모와 교양, 화술. 그 모든 것을 갖추지 않으면 까다로운 귀부인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다행히 그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는 그가 미숙했던 시절부터 자잘한 실수를 덮어줄 만큼 크게 작용했다.
그는 아주 쉽게, 웃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통해 부를 쌓아 올렸다.
여자들에게 뭔가를 얻어내는 건 쉬웠다. 그저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할 테니까.
그는 제도에서 제일가는 파라모어였다. 지나치게 위험성 있는 상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사로잡을 자신이 있었다.
늙고 못생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돈 많고 외로운 귀부인들은 그에게 홀딱 빠져 재산을 가져다 바쳤다.
그와 밤을 보내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돈과 보석을 만들어 그를 찾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만약 그가 여자였다면 황후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라서 그저 황족의 정부가 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등바등 살아가는 추하고 못난 남자들과는 달리 편하게 호사를 누리며 살아가는 제 아름다움이라는 재능에 우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남자들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아름다우면 이렇게 인생이 편한 것을.
따분하고 지루하게 흘러가던 하루하루. 그 와중에 남자는 자신을 자주 찾는 귀부인으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그것은 황후의 전속 시녀를 유혹해달라는 제안이었다.
‘그저 추문에 휩싸이게만 하면 돼.’
그 와중에도 그가 그 전속 시녀와 뒹굴까 봐 샘이 났는지, 귀부인은 무리하게 유혹할 것 없다며 신신당부했다. 물론 그는 그 전속 시녀를 유혹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흔쾌히 그 흥미로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벨로나 나이트 출신의 그 대단한 전속 시녀. 얼마나 색다른 상대인가.
다만, 그는 파레사를 처음 보는 순간, 그녀를 유혹하더라도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맑고 곧은 눈빛이었다. 그를 본 순간 조금 놀라는 듯한 기색이었으나, 말하는 투와 태도는 냉정하고 사무적이라 구미를 돋웠다.
파라모어로서 자부심과 정복욕이 제 안에서 솟구쳐올랐다. 아쉽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좀 더 수월한 방식으로 목적을 이루려 했다.
“이곳이에요. 들어가시지요.”
남자는 파레사를 보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파레사는 주변을 슥 돌아보았다. 그들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는 눈에 띄는 외형이었고, 시녀복을 입고 있는 파레사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여기는…….’
상점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 위치한 집이었다.
외관이 고급스러우나 어쩐지 은밀한 분위기가 흘렀고, 짙은 색의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주변 집들도 분위기가 비슷했다.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파레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점을 봅니까.”
“예?”
“점술가의 집 같은 분위기로군요. 커튼도 그렇고, 가려져 있는 것이.”
“네? 하하!”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손님들이 소문나는 걸 조심스러워 하셔서요. 제가 타로를 좀 볼 줄 알지요.”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파레사는 타로를 보는 게 숨겨야 할 만한 일인가 고심했다.
제국은 황제가 반신이나 다름없으니, 어찌 보면 이적 행위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오신 김에 한 번 봐 드릴까요?”
“아니요. 어서 동생분을 만나러 가지요.”
그들은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집 안은 조용했다.
2층으로 올라서자 어떤 방 앞에 선 남자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주드, 전에 네가 납치당할 뻔했잖아. 그 이야기를 해드려.”
방 안에서 나온 남자는 동생이라지만, 이 보랏빛 눈의 남자와 그리 닮아 보이지 않았다.
한두 살이나 어릴까. 매끈하고 잘 관리된 얼굴은 화사하기까지 했다.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아, 그놈들은 잡혀갔어요.”
“잡혀갔다고?”
“예, 그 왜 저번에 날 찾은 손님 있잖아. 다른 손님 받지 말라기에 거절했더니, 납치를 사주한 모양이더라고. 그 여자 진짜 진상이라니까. 단골들은 그렇게 안 굴어.”
말의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파레사는 물었다.
“친구가 잡혀갔다면서요.”
“그랬죠. 저랑 외모가 비슷해서 헷갈렸나 봐요. 근데 돌아왔는데? 내가 말 안 했나.”
“돌아왔군요. 전혀 몰랐는데!”
남자가 호들갑스레 반응했다.
“아무튼 괜찮아요. 단골분께 말씀드렸더니 잘 처리해주셨으니까. 그 애도 돌려보냈고 보상도 받았어요.”
남자는 파레사를 향해서 애교 있게 눈웃음쳤다.
“근데 황실 시녀는 월급이 좀 센가? 싸게 해드릴게.”
“주드.”
주드가 눈치를 봤다.
“아, 참 네 손님이신가. 그럼 말고.”
그는 냉큼 문을 닫아버렸다. 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 일을 당했을 땐 겁을 먹었어요. 하지만 잘 해결된 모양이군요.”
“아까 당신이 한 말과 다른데요? 인신매매가 횡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지.”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어, 뭐. 좀 과장이었어요. 우리들은 종종 그런 걸 당할 뻔하거든. 열정적인 손님들이 좀 계셔서.”
“당신들은…….”
파레사는 말을 삼켰다. 어떤 식으로 해도 노골적인 표현이 될 게 분명했다. ‘혹시 몸을 팝니까’ 같은.
남자가 생글거리며 답을 알려줬다.
“우리는 파라모어예요. 지체 높고 부유한 귀부인들의 애인이 되어주는 존재랍니다.”
그는 파레사를 향해 은근한 눈짓을 건넸다.
“놀라셨나요? 제가 파라모어란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별생각 없었다.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의도가 아니라 유혹하는 게 몸에 익어서 그렇구나 생각했을 뿐.
“그럼 당신도 손님이 납치를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죠. 사실, 처음 겪어본 일도 아니고. 신고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에요. 뒤에서 알음알음 해결하는 거지. 어차피 잡혀가도 내겐 권세 있는 애인이 많아서, 금세 구출되었을 거예요.”
“그럼 왜 그곳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당할 뻔한 이 자 역시도, 그리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으니까.
‘혹시 날 유인한 건가.’
일단 주변에 위협적인 기미는 없었지만, 파레사는 경계심을 세웠다. 남자가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데서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당신, 유명 인사이기도 하고 날 도와주려는 당신 마음 씀씀이가 와닿았어요.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데…….”
남자가 조금 다가서며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하얀 목덜미가 훤하게 드러났다.
제도 제일의 파라모어답게 자세를 조금 고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가 눈을 게슴츠레-파레사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떴다.
“나는 이런 방식의 보답에 익숙하거든. 어때요.”
‘아, 이건…… 유혹이라는 건가.’
낯설다 못해 신선하다. 파레사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게 익숙한 방식은 아니군요. 물론, 보답을 받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남자가 나긋한 동작으로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의외로 드러난 가슴팍에는 잘 잡힌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난 비싸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을걸. 난 제도에서 가장 귀한 파라모어니까.”
“그렇군요, 아쉽지는 않습니다만.”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거 아나요? 제도에는 많은 고귀한 여성이 있지만 그녀들은 거의 저보다 나이 많고 매력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제대로 타올라 본 적 없는 심지를 가지고 살아가. 나는 그녀들에게 불을 붙이지. 그 죽어 있는 심장에.”
그의 손끝으로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난 당신에게도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삶을 줄 수 있어.”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방화범을 쳐다보며 파레사는 무심히 대꾸했다.
“흥미로운 직업관이군요.”
그리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조금도 끌리지 않는데요.”
파레사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될 수 있는 벨로나 나이트였다.
이만한 유혹에 넘어가겠는가도 의문이거니와 사실 유혹처럼 와닿지도 않았다.
남자가 느긋하게 한 걸음 다가섰다. 집요한 눈빛은 묘한 긴장감을 실어날랐다. 그러나 그 눈빛과는 반대로 그의 말투는 가볍고 유쾌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언젠가 당신은 이 순간을 아쉬워하게 될 거야. 당신 평생 나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파레사는 단박에 긍정했다.
“예.”
이 남자는 부인할 수 없게 아름답지만, 파레사는 눈앞이 모두 빛으로 가득 차는 듯한 모습의 한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촛불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이었다.
그 남자가 파레사의 심장을 살게 했다.
“내 눈에는 당신의 심장도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돈 때문에 마음에 불붙지 않는 여자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나은 삶이 당신에게도 있을 겁니다.”
무심히 내뱉은 말에 남자가 코웃음쳤다.
“재미있는 훈계로군요. 벨로나 나이트라더니, 고지식한 기사님이에요.”
“떳떳하다면 이런 어둠 속에서 살지 않겠죠.”
파레사는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만.”
남자는 그 등을 보면서 단절을 느꼈다.
용건이 사라지면 그대로 호의처럼 보였던 감정마저 사라지는, 냉정한 벽이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완벽히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파라모어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작게든 크게든 그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 벽에 제 안에서 불붙는 무언가를 느꼈다. 오기인지, 자존심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이 그를 자극했다.
남자는 파레사의 등에 대고 내뱉었다.
“내 이름은 자하예요. 부디 앞으로도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그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자하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맺혔다.
* * *
‘가만, 내가 벨로나 나이트인 걸 알고 있었잖아.’
집 밖으로 나와 여관으로 향하면서 그 사실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파라모어의 집에 다녀오게 돼서 유혹까지 받은 파레사도 상황이 좀 혼란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 보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자는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일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 파라모어가 귀부인들과 잘 아는 사이라면 파레사에 대해서 들었을 만도 하니까. 보통 그런 자들은 정보에 밝다.
‘이상한 일이로군.’
파레사는 황태자와 제 사이에 염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궁 사람들하고만 거의 말을 하는데, 그녀가 하도 정색하고 부인을 해서 누구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뒤나미스에서는 전속 시녀가 파라모어를 만나더라도 별문제가 안 됐다.
‘뭘까.’
알 수 없는 찜찜함 속에서 여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저.”
파레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본 그 기사였다.
“아, 에드? 라고 하셨죠. 여기서 또 보네요.”
“이쪽 여관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황실 시중인들은 할인이 많이 된다고 하더군요.”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할인을 다 챙길 만큼 알뜰하다는 걸 알아보셨나 보군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까 일은 어떻게 되셨나 해서 말입니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기사였다. 파레사는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가늠했다. 하지만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그자는 파라모어였고, 손님들과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그런!”
기사는 기겁했다. 왠지 그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기에, 돌아왔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저도 그럴 거고요.”
“그렇군요. 참, 제도란 곳이…….”
악의 온상이란 것처럼 중얼거리며 그는 파레사를 힐끔거렸다. 이상하게 그녀를 살피는 듯한 기색이었다.
방금 웬 남자한테 유혹당하고 온 파레사는 자연스레 다른 의심을 품었다.
“혹시 저한테 관심이 있으신지.”
“예, 관심이 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남자는 서늘하게 생긴 얼굴과는 다르게 쩔쩔매며 대꾸했다.
“당신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절대로! 전혀!”
이쪽이 머쓱해질 만큼 격렬한 반응이다.
“……그렇군요.”
“부,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파레사는 복잡한 기분에 잠겼다.
“그럼 용건이 끝났으니 가보셔도 좋습니다.”
파레사는 가볍게 그를 잘라냈다. 하지만 남자는 머뭇거리며 그녀를 붙잡았다.
“예, 저. 당신은……. 황후의 전속 시녀 아닙니까. 저 황후 폐하께서 당신을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제야 파레사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를 아끼시지요. 누군가의 출세를 위한 사적인 부탁을 올리면 저를 해고할 만큼만. 그러니 저는 이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황후 폐하의 눈밖에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는 기사한테 파레사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그럼 이만.”
어쩐지 꺼림칙한 하루였다. 역시 황후의 부모를 만나러 간 것부터 재수가 없었던 게 틀림없다. 그건 명령대로 했을 뿐이지만.
‘휴가 때는 얌전히 지내다가 돌아와야겠군. 또 누군가와 엮이면 곤란하니까.’
파레사는 굳게 결심했다.
* * *
파레사가 휴가에서 돌아올 무렵, 황궁은 소문으로 들썩였다.
그 소문은 파레사의 귀에 닿기 전에, 먼저 황후의 귀에 들어갔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람.”
황후 앞에는 편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토록 많은 편지가 쏟아진 적은 처음인 데다가, 그 내용이란 것이…….
황후는 기막히고 황망하여 편지를 책상 위로 내던졌다. 몇 개 확인했을 뿐이지만, 안 봐도 나머지의 내용을 알 것 같다.
때마침 출근한 파레사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너, 혹시 휴가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죠.”
안 그래도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하지만 성질 급한 황후가 말을 가로챘다.
“그 일이 설마, 이런 일이니? 맙소사, 이 편지를 보렴!”
파레사는 황후가 내민 편지를 읽었다.
[황후 폐하. 전속 시녀의 이러한 부도덕한 행각은 황후 폐하의 위신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어리신 두 분 황자, 황녀께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파라모어를 찾는 전속 시녀라니요! 이는 제국과 황실의 명예가 달린 문제입니다. 부디 올바른 용단을 내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에게 결투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파레사는 결투를 신청해서 저 편지를 보낸 자의 턱뼈를 부숴주는 상상을 떠올렸다.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네가 시녀가 아니라 기사라면 그래도 되겠지.”
“말이 헛나왔어요. 아무튼, 저건 오해입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구나. 오해라면, 어디까지가 진실이라는 것이냐?”
황후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이자 파레사는 간단히 응답했다.
“그를 도우려고 그랬어요.”
“도우려고? 설마, 눈물을 짜내며 생계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 넘어가서 돈이라도 퍼주었단 말이냐?”
“……제가 그럴 리가요.”
“그렇지! 네가 얼마나 돈에 환장하는데, 파라모어 따위한테 넘어갈 리 없지. 그런 놈들한테 네 피 같은 돈을 내줄 리 있겠니?”
“저를 지나치게 구두쇠로 모시는군요. 돈 문제가 아니라, 돈이 많아도 그런 식으로 파라모어를 찾지 않을 만큼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만.”
파레사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쓰는 돈이 아깝기도 하고요.”
그럴 돈이 있다면 차라리 보석이나 드레스를. 가만, 왜 그런 걸 살 생각을 하고 있지. 파레사는 자신 스스로도 놀라움을 느꼈다.
하지만 파레사에게 황후의 전속 시녀가 된 이후로 돈을 쓸 일이란 이제 그런 것뿐이었다.
이게 다 황후가 그놈의 무도회 타령을 해서 그렇다.
황후는 답답한 듯이 외쳤다.
“그럼 대체 왜! 네가 파라모어를 도와. 너한테 그럴 일이 뭐가 있다고!”
파레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파레사의 설명을 들은 황후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해가 간다. 너라면 그럴 수 있지. 벨로나 나이트니까. 인신매매라니, 좌시할 수 없을 만해.”
‘그러게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따위의 비난은 패터스 자작이나 할 만한 것이다.
황후는 제가 아버지와 다르다고 믿었다. 함정은 당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파는 놈이 나쁜 것이다.
“하지만 목격자가 있었고, 나쁜 소문을 냈다는 것이 문제겠죠. 그 때문에 제게로 화살이 돌아왔고요.”
파레사는 남말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과연 누가 그랬을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황후에게 또다시 흠집을 내려고 시도해? 구심점이 될 만한 이가 있던가. 니시아나를 따르던 이들은 세를 잃었건만.
황제와 황후가 관계를 회복했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리라. 십여 년을 황후를 무시해온 관성이 있으니까.
황후가 책상을 탕! 내려치며 외쳤다.
“누가 그 파라모어한테 사주한 게 분명해. 돈이면 뭐든 하는 놈들이지!”
“그보다 이 소문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파라모어 녀석을 잡아다가 족쳐야지!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
파레사는 있을 법한 가정을 꺼냈다.
“이미 소문을 믿고 있는 귀족들은 제가 파라모어를 협박하여 원치 않은 고해를 하게 만들었다고 몰아갈 텐데요.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손님들은 하나같이 권세 높은 귀부인들이라더군요.”
“권세 높은 귀부인들? 그래…… 이야기를 듣기는 들었다만. 파라모어를 즐겨 찾는 귀부인들이 있다지. 뭐, 남자들도 뒤로 딴짓하기는 매한가지니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만.”
“공정하시군요. 제국에서 보통 그런 건 여자 쪽만 흠 잡히지 않는지요.”
“나는 이미 그렇게 나를 흠 잡는 이들을 무수히 겪어왔단다. 구태여 나까지 그런 이들이 될 필요는 없겠지.”
거기까지 말한 황후가 기가 찬 듯 코웃음 쳤다.
“그런데 이것들도 웃기는구나. 자기네들도 파라모어를 찾으면서 네가 찾는 건 왜 안된다니?”
“그러게나 말이에요.”
“분명히 말하건대 네가 파라모어를 찾은 게 만약 사실이라도, 그들이 그것을 구실 삼아 너를 내칠 수는 없다. 황실 관료들도 그런 문제로 보직을 잃은 적은 없으니까.”
“사실이 아니라니까요. 저더러 추문을 인정하라는 말입니까.”
“하지만 네가 그를 도우려고 했다는 증거가 없잖니! 네가 파라모어와 함께 있는 것을 본 목격자만 있어! 널 함정에 빠뜨린 파라모어는 네가 유혹에 응했다고 주장할 테고!”
두 명의 파라모어를 만났으니 둘 다 파레사가 자신을 상대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저는 벨로나 나이트고 제 말은 그 자체로 증거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겠지요.”
그제야 황후는 누그러든 기세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이는 나를 깎아내리기 위한 수작이니.”
그녀는 뒤나미스의 상징인 벨로나 나이트에게 이런 식의 추문이 얼마나 불쾌한지 이해했다.
그리고 새삼, 자신이 그런 대단한 인물인 파레사를 전속 시녀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속 시녀의 봉급이 후하다고는 하지만, 벨로나 나이트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갖은 모함은 다 당하는 직장에서 파레사는 박봉으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건 봉급을 올려줘야 할 사유였다. 굳건하던 황후도 일순 흔들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파레사가 입을 열었다.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기사 한 명이 제가 파라모어를 따라간 이유를 알아요.”
그 에드라는 이름의 기사. 거리의 상인들은 파라모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정황에 대한 증인은 되어줘도, 그 사건에 휘말린 게 그 파라모어라는 증인이 되어주진 못할 터.
하지만 그 기사는 사건 후에 이야기를 들었고, 파라모어의 목소리도 안다. 한 명이라도 증인이 될 만한 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황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자를 찾아보자꾸나.”
하지만 기사들의 명단을 뒤지러 간 하급 시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 고개를 내저었다.
“목록을 뒤졌는데, 그런 이름의 기사는 없다고 합니다만…….”
‘가명을 썼나? 그렇다면 기사를 사칭했거나, 드러낼 수 없는 신분이겠군.’
그런 자라면 찾아내려는 시도가 무용하다. 어차피 증인이 되어주진 않을 테니까. 황후가 한탄을 토해냈다.
“그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더냐? 난감한 일이야.”
정작 파레사는 그리 난감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주파하면 그만이니까. 그 파라모어가 거짓을 말하더라도.
다만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파레사는 그를 떠올렸다. 제국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신분의 남자. 황태자.
자신이 그를 신경 쓰듯이 황태자라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이는 황태자의 위신을 상하게 할 수 있다. 파레사도 황태자와 자신 사이에 소문이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혹시 그런 의도로 나를 견제하려는 거였을까?’
다른 쪽으로 의심이 찾아들었다. 황후의 의지가 단단하다면 그런 식의 추문만으로 파레사에게서 전속 시녀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
하지만 파레사를 황태자비 자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건 가능하다.
파레사는 이제 황후의 측근으로서가 아닌 스스로도 표적이 될 수 있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는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황후가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려무나.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마.”
이런 일이 있으면 황태자를 찾을 만도 한데, 황후는 의식적으로 그를 배제하는 듯이 보였다. 황태자가 이 일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일단 그 파라모어 녀석을…… 불러내서 추궁하든지 해봐야겠다. 돈으로 매수당한 녀석이면 더 큰 돈을 쥐여준다 하면 배후를 불어버릴지도 모르지.”
어떻게든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덮을 수는 있을 것이다. 황후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움직인 인물이 있었다.
황후가 편지를 받아들고 파레사와 대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황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 소문에 대해서 들었다. 누구한테 보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회의장에서 한 귀족이 휴게 시간을 틈타 슬쩍 운을 흘렸다.
“그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아아, 그 소문 말입니까.”
“이거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럴 수도 있는 거지요.”
“암암, 그럼요. 뒤나미스는 우리 쪽과 정서가 좀 다르니까.”
귀족들 간의 대화에 좀체 끼어들지 않는 황태자였지만, 뒤나미스가 언급되자 그도 관심이 갔다.
“무슨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겁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시면, 조금 언짢지 않으실까 합니다만.”
“뭐, 근거 없는 낭설일 수도 있잖소.”
“그렇다기엔 목격자도 있고…… 꽤 신빙성이 높아서.”
황태자의 시선이 찔러 들자, 한 명이 헛기침하며 고백했다.
“저, 그.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에 관하여 조금,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게 그녀가 웬 파라모어와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데. 그 장소가 또 하필 파라모어의 거처 앞이랍니다.”
“둘이서 굉장히 친밀해 보였다고 하던데…… 이런 이야기가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아닙니다. 흥미로운 소문이로군요.”
그 말을 하며 황태자는 미소 지었다. 어딘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하지만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는 어머님의 명예에 관련된 중대한 문제니까요.”
그렇게 입을 틀어막은 황태자는 바로 회의를 파하고 황실 기사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에게는 이것이 그 어떤 국가의 중대사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황궁에 너와 관련된 소문이 돌고 있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자하는 몸을 움찔거렸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황실 기사들에 의해 황궁으로 끌려온 그는, 어떤 높으신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감히 고개를 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상대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와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자하는 알 것 같았다.
‘황태자시로군.’
그 전속 시녀와 황태자 사이에 돌던 염문이 사실이었던가. 이렇게 직접 소문을 확인하려고 나선 걸 보면.
“네가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 같군.”
자하는 속으로 웃었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비록, 제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멀쩡히 나갈 방법은 하나.
“어떤 답을 원하시든 뜻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녀가 너와 함께 목격된 이유.”
나직한 목소리가 위압감을 품고 떨어졌다.
“그것을 말해.”
황태자는 이미 전속 시녀와 파라모어인 그가 함께 있었다는 게 사실이란 걸 확인한 듯했다. 자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제가 그분을 제 거처로 모셨습니다.”
“그녀가 널 따라간 이유는?”
이유라니. 파라모어가 여자를 제 거처로 들인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하지만 황태자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동요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너무 높으신 분이라 감정을 잘 감추는 걸까. 아니면, 그녀를 의심하지 않는 걸까.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불쑥 호기심이 솟은 자하는 모호한 답변을 던졌다.
“제가 그분을 유인했거든요.”
자하의 손님이 바라는 것은 황태자와 그 전속 시녀의 사이가 어긋나는 것일 터.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할지, 아니면 진실을 말해야 할지 자하는 재어 보고 있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자하는 황태자가 분명히, 그의 거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려온 말은 예상을 빗나갔다.
“누가 너를 사주했지?”
“……어째서 누군가가 저를 사주했다고 생각하시지요? 파라모어가 손님을 모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만.”
황태자는 그런 의심을 하지는 않는 건가. 그 전속 시녀가 파라모어의 유혹에 넘어가 그와 함께했다는 의심.
그러나 황태자의 음성은 굳건했다.
“나는 그녀를 곤경에 빠트리려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솔직히 말한다면 너를 처벌하진 않을 것이다.”
영리하지 못한 자가 그저 외모만 가지고 제도 최고의 파라모어가 될 수는 없다.
자하는 자신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분명하게 알았다.
자하가 솔직히 고했다고 해서, 그를 사주한 이가 그를 처벌하진 못할 것이다. 이래 봬도 여러 군데에서 비호받고 있는 몸이니.
다만 그 비호는 황태자로부터 그를 지켜줄 수 없었다. 황족이라고 해봐야, 황태자에게 댈 정도는 아니니까.
그리고 온화한 성품으로 소문난 황태자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리라.
갈등은 길지 않았고, 자하는 입을 열었다.
“실은.”
자하는 자신이 어떤 말과 연기로 그녀를 유인했고, 그녀와 거처로 들어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별일 없었습니다.”
선택을 했으면 확실해야 한다. 자하는 말끔하게 모든 의심을 지웠다.
“맹세컨대 그분은 제게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를 사무적으로 대하셨지요.”
“그랬겠지.”
무심한 말투였다. 자하는 넌지시 의문을 꺼냈다.
“그분을 의심하지 않으시는군요. 의심할 만한 상황이 아닌지요.”
“의심?”
황태자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맹수가 목을 울리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게도 벽을 세우던 그녀가 너 따위에게 혹할 리 없지.”
자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태자의 인간이 아닌 듯한 외형에 대해선 익히 들었다.
하지만 그는 반쯤 과장된 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반신으로 여겨지는 황태자의 모든 것은 실제보다 높이 평가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얼굴로 먹고 사는 자신에게 비할 바는 아닐 터.
그는 충동적으로 말해버렸다.
“부디 제게 고개를 들어, 확인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황태자는 주저 없이 승낙했다.
“그래.”
이럴 수가. 황태자의 모습을 목격한 자하의 동공이 떨렸다.
그가 본 것 중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거기서 빛나고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는 황태자의 확신을 단숨에 이해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생애 최초로.
“……이해했습니다.”
“그럼 내 약혼녀가 파라모어와 엮인 불쾌감도 이해하겠지?”
“예.”
그 아름다운 두 눈에서 불꽃이 이는 듯했다. 자하는 고개를 다시 수그렸다. 단호한 음성이 흘렀다.
“이제는 네가, 누가 널 사주했는지 말할 차례로군.”
황태자는 턱을 비스듬히 괴었다. 온몸이 꿰뚫리는 듯한 녹청의 눈동자.
그 시선을 받으며 자하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 * *
황후는 귀족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그 추문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자신의 전속 시녀에 대한 음해를 퍼뜨리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나도 남김없이 답장을 썼다.
“이것으로 그들이 납득할까요?”
파레사가 묻자, 황후는 버럭 성을 냈다.
“제들이 납득 안 하면 어쩌겠느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넌 떳떳하게 행동해야 해! 죄지은 것처럼 굴 필요가 없단 말이다!”
그러더니 황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게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될 텐데. 일단 병환 중이시고 내가 입단속을 해놓기는 했지만, 과연 숨겨질지 모르겠구나.”
“이왕 퍼진 소문인데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뭐 어때요.”
“뭐 어떠냐니! 어떻게 그리 태평하게 말해!”
“황태자 전하도 이미 아실 텐데요.”
여전히 무심한 어조였다. 하지만 파레사는 궁금했다. 황태자가 과연 그 소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가 자신을 믿지 않는대도 이상하지 않지만, 파레사는 왠지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만큼이나 널 알아. 그러니 괜찮을 거야.”
황후가 파레사의 손을 꼭 잡았다. 위로하는 듯이.
“그보다는 황제 폐하가 문제지. 참 반대하시면 곤란해질 텐데…….”
……뭘 반대해?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황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내일 있을 무도회에 너도 함께 가자꾸나.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 그들의 의심이 사라지겠지.”
“저는 죄지은 적도 없고, 무도회에 가고 싶지도 않군요. 죄지은 적도 없는데 벌을 받아야 한다니요.”
파레사는 그 점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가야 해!”
“물론, 황후 폐하께서 홀로 무도회에서 저를 변호해주시는 것보다는 제가 직접 맞부딪히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그게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황후는 뭔가 결심한 듯 비장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파레사, 난 모두가 너를 비난하고 내치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온다면 말이다.”
“예.”
“내가 너에게 파라모어를 찾아가라 시켰다고 주장할 용의도 있단다.”
“……예?”
파레사는 눈을 끔뻑였다. 황후는 진지했다.
만약 모두가 이 추문을 믿는다면 파레사가 황태자비가 되는데 크나큰 지장이 있을 터.
하지만 제가 덮어쓴다면 파레사는 당장의 화살을 피해갈 수 있으리라.
“뭐든 핑계를 대면 되지. 황실의 누군가가 그를 자주 찾으니 방문을 거절해달라고 요청하려고 했다던가. 내가 직접 그를 만난 게 아니니 직접 추문으로 불거지진 않을 거야.”
니시아나 사건 이후로 황후에게 나쁜 소문을 붙이는 것은 사교계에서 엄금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험 부담이 높은 일로 보였다. 황후도 구설에 오르기 딱 좋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 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 널 위해서.”
말린 장밋빛 눈동자가 눈앞에서 결의를 발하고 있었다. 감동적이어야 할 상황인가. 파레사는 헷갈렸다.
“그러니 너도 무도회에 참석하자꾸나, 나를 믿고.”
어떻게 흘러가는 논리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결국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망의 무도회였다.
오랜만에 찾는 외부의 무도회였다. 황후와 함께 무도회에 들어선 파레사는 이미 온 사교계에 제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게로 향하는 은근한 눈총들.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찼고 누군가는 눈을 흘겼다.
분명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황후가 이미 편지를 보내, 그녀가 파레사를 비호할 거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에.
요즘 들어 황후에게 잘 보이려는 이들이 태반이었고, 그녀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들도 뒷말까지 삼가지는 않았다.
“이래서 뒤나미스 출신이란.”
“아무리 제국과 문화가 다르대도 미혼의 아가씨가 파라모어를 찾다니요?”
“세상에나. 황태자 전하도 이 사실을 아셔야 할 텐데 말이지요.”
파레사는 청각이 지나치게 좋았다. 그래서 황후가 듣지 못하는 은근한 뒷말들도 다 들을 수 있었다.
황후도 분위기로는 느꼈는지 부채를 팔랑거리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다들 가십을 좋아해서 문제야.”
“제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군요.”
그 유명세 덕을 볼 일이 없다는 게 문제다. 황후가 미안한 듯 말했다.
“봉급은 조만간 올려주마.”
“유일하게 기쁜 일이네요. 하나쯤은 좋은 일이 있어야겠지요.”
“너와 내가 돌아다니며 떳떳한 모습을 보인다면 소문은 곧 잦아들 게야. 저들은 죄지은 듯이 굴면 더욱 물어뜯을 자들이니까.”
원래 한 번 당해본 자가 더욱 잘 알게 되어 있다.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행히 황후와 친한 이들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저열한 소문을 내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부셰 백작 부인은 특히나 분개하며 파레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파레사, 부디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라요.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들었어요. 얼마 전 큰 위험을 감수하고 모두를 위해서 싸운 사람에게 이 무슨…….”
귀족 중에서도 소수만이 파레사가 황태자와 함께 반역자 니시아나를 해치우려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트리아이나나 근원의 섬에 관한 것은 기밀.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될 종류였다.
그러다 보니 아직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시점에서 파레사의 공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파레사는 그 사실이 알려졌더라도 귀족들은 제 뒷말을 했을 거라고 장담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요새, 파레사에 대해서 험담하고 다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저쪽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황후 쪽을 힐끗 본 부셰 백작 부인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전 전속 시녀가 황후 폐하께서 파레사에게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더군요. 패터스 자작가에도 자주 드나든대요.”
하이디. 역시, 그대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건만.
“어떻게 조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황후 폐하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어요.”
“생각하시는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에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저기, 멘티스 후작 부인이 오네요.”
멘티스 후작 부인은 이 무도회의 주최자였다.
그녀는 명망 있는 귀부인으로 제도의 번잡함을 즐기지 않아 결혼한 이후로 줄곧 후작을 따라 지방 영지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활해왔다.
최근에야 제도로 올라오게 된 그녀는 황후가 구설에 올랐을 때도 관여한 적이 없었다.
상당히 보수적이며 엄격한 가풍을 유지해온 후작가의 사람답게, 그녀는 파레사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황후 폐하, 제 무도회를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황후 앞에 다다라 인사를 올린 그녀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외람되오나 제 무도회에 적절치 않은 손님이 참석한 것 같아, 황후 폐하께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후작 부인의 눈길이 그제야 파레사를 향해 움직였다.
“폐하의 전속 시녀를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파레사가 홀로 왔다면 그대로 내쫓았을 것이나, 그녀는 황후의 전속 시녀였다. 황후에게 전속 시녀를 내보내 달라고 말하는 게 순서였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웃고 있던 황후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후작 부인의 판단은 틀렸네. 나는 어디서건 박대받을 만한 이와 함께하고 있지 않으니까.”
“폐하의 전속 시녀에 관한 소문이 제도에 파다합니다. 그녀가 파라모어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전속 시녀의 복장을 입고! 이 얼마나 망측한 일입니까!”
후작 부인의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말린 장밋빛 눈동자가 분노로 짙게 물들었다.
“그런 헛소문 따위를 믿다니! 후작 부인은 남의 말에 휘둘리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야 할 거야.”
“제가 잘못 알았고 그것이 소문일 뿐이라면 기꺼이 사과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녀가 파라모어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본 여러 증인이 존재하니까요.”
“그 증인들이 대체 누구인가?”
황후가 팔짱을 끼자 후작 부인이 움찔거렸다.
“그것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왜 곤란한지 알려줄까? 파레사가 파라모어와 함께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녀와 함께 있는 게 파라모어라는 걸 알아야 하겠지? 아니면 그 집이 파라모어의 집이라는 걸 알고 있다던가. 어떻게 그걸 알지? 그 파라모어를 찾았던 손님이 아니라면 말이야.”
다른 귀부인이 슬쩍 나서서 변명했다.
“파라모어들은 귀족가의 행사에 얼굴을 비치곤 합니다. 꼭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알아봤다고 할 수는 없지요.”
황후가 코웃음 쳤다.
“제도가 부도덕의 온상인데, 무얼 말하겠나. 대놓고 파라모어를 찾거나 남편이 죽고 나면 찾을 이들도 태반인데 내 전속 시녀에게 그저 파라모어와 함께 목격당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해? 우습지도 않군!”
또 다른 귀부인이 끼어들었다.
“그와 함께 거처로 들어갔다지 않습니까. 그토록 공공연하게, 전속 시녀의 복장을 입고! 이는 황후 폐하의 면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녀는 파레사에게로 표적을 돌렸다.
“뒤나미스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제도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 이렇게 황후 폐하께서 감싸시는데 입을 다물고만 있을 건가요?”
제게 그 질문이 돌아오기 전에, 파레사는 격화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조금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자신의 결백이라고도 우스운 그것을 증명해 보일 생각도 했다.
그 파라모어의 목을 가져온다면. 그것이 입으로만 결백을 말하는 것보다야 기사다운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황후의 말처럼 파레사는 현재, 기사가 아니라 시녀였다. 파레사는 자신에게 편한 방법을 택할 수 없다는 데 아쉬움을 느꼈다.
‘뒤나미스에서 어떨지 모른다고?’
뒤나미스에서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조차 없었겠지. 란티어스다운 추저분한 방식이다.
하지만 파레사는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서 무도회의 모든 귀족을 적으로 삼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었다.
적절한 대답을 고르던 그때 문득, 저편에서 막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자였다. 그 에드라는 이름의 기사.
믿을 수 있는 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파레사가 본 그는, 거짓을 말할 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사람들이 모인 이곳으로 움직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파레사는 내뱉었다.
“저기, 제 증인이 되어주실 분이 있군요.”
남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귀족들 중에서도 그를 아는 이가 없는지 서로를 돌아보며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그를 본 순간, 황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에드몬……트?”
아는 사이였나? 에드라고 했으니, 낯선 이에게 본명의 일부만을 알려줬나 보다. 파레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는 곧바로 황후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어딘지 시선도 이리저리 돌리는 게, 쑥스러워하는 티가 났다. 황후는 당황한 기색을 수습하며 말했다.
“그래, 올라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그를 소개했다.
“내 동생, 에드몬트 패터스요.”
‘황후의 동생이었다고?’
파레사는 그제야 어렴풋하던 감각을 깨우쳤다. 그래, 어딘지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동자도 그렇고 생김새도.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두 사람이 남매라는 것을.
사람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에드몬트는 황후에게 말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제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 그럴 수 있지. 정말로 반갑구나.”
황후는 현재 틀어질 대로 틀어진 친정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패터스 자작 부부의 황궁 출입을 막아버렸으니, 그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입궁하여 인사드리는 게 맞는지 고민할 법했다.
멘티스 후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패터스 자작가에도 초청장을 보냈었지요.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에드몬트.”
“아, 예. 멘티스 후작 부인.”
후작 부인은 바로 황후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이분이 어떻게 증인이 되어주신다는 건가요?”
황후는 에드몬트에게 대놓고 물었다.
“에드, 너 파레사를 만난 적 있지. 내 전속 시녀 말이다.”
에드몬트의 시선이 파레사에게로 옮겨졌다.
“예. 저번에 그녀가 휴가 중일 때 본 적이 있습니다. 저, 그때는 소개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파레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를 쳐내다시피 돌려보낸 것은 자신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설마 황후의 동생이었을 줄은.
황후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에드, 네가 그날 파레사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들었어.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해보겠니?”
모두의 시선이 에드몬트에게로 쏟아졌다. 파레사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분명 패터스 자작 부부는 에드몬트에게도 파레사 욕을 했을 터. 그가 꼭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에드몬트는 그를 둘러싼 시선 속에서 입을 열었다.
“제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얼굴을 가린 한 남자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건달들에게 쫓겨 납치당할 뻔했다더군요.”
에드몬트는 파레사가 그를 따라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때 남자의 정체가 파라모어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만약 그녀가 당당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쉽게 파라모어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녀는 제가 경과를 알기 위해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으로 왔으니까요.”
에드몬트는 그때의 파레사를 보고 그녀가 그런 식으로 파라모어를 찾았다는 생각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멘티스 후작 부인의 표정이 확연히 바뀌었다.
그녀는 파레사에게 머리 숙여야 할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부터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다.
황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 내 동생의 말을 다들 들었지? 파레사는 그를 도우려고 했던 거요. 하지만 그 교활한 파라모어가 그녀를 유인하려 했다는 걸 알자마자 그곳을 빠져나왔소. 그게 다요. 어떻게 불의를 보고 기꺼이 도우려던 선의가 그러한 추잡한 소문으로 변질될 수 있단 말이오?”
귀족 한 명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동생분께서 이리 절묘하게 나타나 전속 시녀를 변호해주시다니. 조금 대단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난 이 아이가 제도로 올라오고 나서 처음 본 거라네! 짜긴 뭘 짠단 말인가.”
황후가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거짓을 말할 거였으면 내 전속 시녀를 음해하려고 누군가 비슷하게 꾸미고 파라모어와 목격된 거라고 하겠지! 내가 뭣 하러 내 동생까지 끌어들여서 굳이 말을 만든단 말이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요새 황후에게 맞서려는 이들은 드물었다.
조금 맞서려 들더라도 황후가 박박 우기며 주장하면 물러나게 되는 것이 수순이었다.
멘티스 후작 부인은 굳은 얼굴로 파레사에게 사과했다.
“소문만 듣고 속단한 내 어리석음을 반성해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귀족들은 지나가듯이 파레사에게 사과 한마디씩 건네고 재빨리 사라져갔다.
얼렁뚱땅 내뱉은 사과는 다행히도 그들의 졸렬한 자존심을 보전시켜 주었다.
썰물처럼 사람이 빠지고 나자 파레사는 에드몬트에게 말했다.
“찾고 있었는데, 때맞춰 나타나 줘서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당신에게, 그리고 황후 폐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에드몬트는 세련된 생김새와는 달리 순박한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누가 황후의 동생 아니랄까 봐 묘한 매력이 풍겼다.
그는 본의 아니게 제도에서 꽤나 인기를 끌 것처럼 보였다.
“사실…… 저는 무도회를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 오실지 모르는 큰 무도회라고 들어서 참석한 것인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황궁에 출입해도 될지 알 수 없으니 무도회에서 재회하는 방식을 택한 모양이다.
“요새는 좀 평화롭다 싶었는데 이런 일이 또 터지는구나.”
황후는 이마를 짚었다. 그것이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가 겪은 일들을 말해주는 듯했다. 에드몬트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간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도 황후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는 들은 바 있었다. 패터스 자작 부부라고 해도 황후를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단지 그럼에도 황후가 황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황후는 진이 빠진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회포를 풀기에는 적절치 못한 상황 같구나. 이런 곳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겠니?”
“허락하신다면 조만간 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궁으로 찾아오렴.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황후는 에드몬트에게 바짝 다가가 붙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절대로 부모님은 함께 오지 말거라. 너 혼자 와야 한다.”
“……예.”
그렇게 무도회는 곧 파장을 맞았다. 증인까지 나타나 부인했으니 소문은 얼마간 해소되리라.
그 파라모어가 직접 나서서 저를 모함하지 않는다면.
파레사는 빠르게 이 일이 종식되기를 바랐다. 물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자들은 잡아내야 할 테지만.
그리고 파레사가 알지 못한 새에 누군가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 * *
그날 볼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패터스 자작저로 돌아간 에드몬트는 달려나온 부모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에드몬트!”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도 없이 너무 늦었지요? 사실 오늘…….”
자작이 말을 뚝 잘라 끊었다.
“너 오늘 멘티스 후작 부인의 무도회에 갔었느냐?”
“예.”
일부러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고 초대장만 챙겨갔던 에드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터스 자작이 성을 냈다.
“황후 폐하를 뵐 거면 직접 가서 뵐 것이지 거기는 왜 또 가서 일을 쳐!”
“예? 제가 무슨.”
패터스 자작 부인이 슬며시 에드몬트의 어깨를 잡았다.
“왜 쓸데없이 끼어들고 그런다니.”
“끼어들다니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네가 전속 시녀의 편을 들어줬다면서!”
자작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에드몬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뭔가를 알아챈 듯이 굳어졌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누가 집에 왔다 간 모양이로군요.”
“그래, 다 알려줬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을, 하필 그때 또 그 여자를 만나선.”
에드몬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제 귀에는 제가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를 편든 게 잘못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제가 바르게 이해한 겁니까?”
“그래, 그런 말이다! 우리가 왜 황궁 출입을 금지당했는지 아느냐? 그 여자의 입김 때문이다. 그 교활한 여자를 황후 폐하의 곁에서 떼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건만.”
“이제라도 다시 말을 바꿔서…… 네가 날짜를 착각했다거나 하면 안 되겠니.”
자작 부인이 권하자 에드몬트는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두 분 다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건지?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잖아요. 아무리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건 모함이에요. 황후 폐하에 대한 공격이라고요.”
“그래, 그 전속 시녀가 들어온 이후로 황후께 이혼이니 뭐니 이상한 바람이 드시지 않았느냐! 내 눈으로 황제 폐하께 버럭버럭 대드는 꼴을 보았는데! 그 전속 시녀가 황후 폐하께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이대로 가면 이혼하게 되실 판이야! 그렇게 되면 우리 가문은 어떻게 된단 말이니?”
자작에 자작 부인까지 연달아 언성을 높였다. 에드몬트는 한숨을 내쉬며 정리했다.
“그래서 이혼을 막으려면 그 전속 시녀를 떼어내야 한다. 그런 말씀이신 거죠?”
“그래, 그렇게 얘기가 되었다. 그러니 너도 황후 폐하의 부탁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누구한테든 말하려무나.”
그제야 에드몬트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얘기가 되었다는 건, 그 모함에 대해서 아버지도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일에 두 분이 가담하신 거로군요?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를 음해하는 일에요.”
에드몬트는 어릴 때부터 줄곧 검술을 갈고 닦으며 반듯한 기사로 살아왔다.
속물적인 자작 부부와는 달리 에드몬트는 드물게도 올곧은 성정의 소유자였다.
변변치 않은 가문 출신인 황후가 출신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후에 제도로 올라가 황후의 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문 전체가 황후 덕을 입었으니, 그도 그녀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연스럽지만, 귀족가에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생각이기도 했다.
패터스 자작 부부만 해도 자기들이 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황제의 은혜에는 감사하지만, 황후의 희생은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지금 이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그를 강타했다.
부모님에 대한 실망, 그리고 황후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의를 목격한 기사다운 분노.
“두 분이 제정신인지 모르겠군요. 그간 제게는 황후 폐하의 가족으로서 누를 끼쳐선 안 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주신 가르침에 위배되는 짓을 하시는 겁니까?”
“황후 폐하를 위해서야!”
“제 눈에, 황후 폐하는 전속 시녀를 무척 아끼고 신뢰하시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속 시녀는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요.”
에드몬트는 파레사에게서 강직한 기사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기꺼이 약자를 도우려는 마음.
그 때문에 영향을 받은 그가 굳이 결과를 확인하려고 파레사를 찾아 갔었던 것이다.
에드몬트는 침착하고 빠른 말투로 단언했다.
“그건 결코 황후 폐하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두 분은 그걸 판단하실 수 없습니다. 월권이에요.”
“에드, 그러다가 에리카가 이혼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자작 부인이 비명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에리카가 이혼하면, 우리 가문에 대한 지원은 모조리 사라질 텐데. 그냥 그 많은 귀족 중 하나가 되어버리는 거라고!”
“어머니.”
“이건 네 미래를 위해서야! 네게는 우리 가문을 물려받아 책임지고 부흥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아버지 말 들으렴.”
자작 부인은 에드몬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작도 엄격한 눈으로 에드몬트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이혼이 그들의 미래와 가문에 재앙을 드리우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 전속 시녀가 재앙을 초래하는 존재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비약이 섞여 있었으나 그 논리는 사실이었고, 또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분명한 건 자작 부부는 이성을 잃었고 흥분에 빠져있었다.
황궁 출입을 금지당한 이후로 극단적으로 쏠려버리고 만 것이다. 마치 중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듯이.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딱 부러지는 음성이었다. 에드몬트는 가라앉은 눈으로 어머니의 손을 떼어냈다.
“저를 황후 폐하의 후광을 빌지 않으면 가문을 책임질 수 없는 못난 녀석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에드! 절대 네가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두 분은 저를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에드몬트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가문을 책임지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후에 황후의 곁에서 힘이 되고자 노력해왔다.
그의 부모님도 그렇게 말했다. 황후의 동생이니 그에 걸맞은 인물이 되어야만 한다고.
그는 오늘 그간의 노력과 믿어왔던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단순히 충격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속이 뜨거웠다.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답답한 녀석아! 이렇게 현실을 몰라! 에리카가 황후 자리에 있기만 하면 많은 것이 유리해지는데. 네가 아무리 잘나도 결코 손에 쥘 수 없을 것까지 쉽사리 손에 쥘 수 있어! 우리 가문 전체가 다!”
“누이의 희생을 딛고 말입니까. 이혼을 생각하셨을 정도면……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이 있는데 쉽지 않은 결심이셨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반복한 에드몬트는 경고했다.
“두 분의 생각은 귀족답지도, 부모답지도 않습니다. 부디 정신을 차리시길.”
“아이고, 이 녀석아!”
그는 등 돌려 제 처소로 향했다. 기사씩이나 되는 강건한 아들이 저렇게 나오자, 허약한 부부로서는 말리지 못했다.
에드몬트는 그날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존경했던 부모님이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영지에 있을 때 패터스 자작 부부는 번듯하고 멀쩡해 보였다. 그들은 지방 귀족들에게는 황후에 대해서 칭찬만을 했다.
제도에서 지내면서 사교계의 타락한 귀족들과 어울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남들 앞에선 연기했던 것일까.
그는 번민했지만, 결국 양심이 그에게 길을 알려주었다. 에드몬트는 다음 날 오전, 바로 저택을 나섰다.
패터스 자작 부부는 그가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에드몬트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충실한 아들이었으니까.
황궁에 들어선 에드몬트는 잠시 방황했다.
황후에게 찾아가 이 모든 사실을 고해하는 게 맞다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끄럽고 면목이 없었다.
찾아가기로 약속한 터라, 여기까지 왔는데 발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원을 서성였다.
고뇌에 잠긴 낯설고 잘생긴 귀족 영식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런 그를 재빨리 낚아챈 건 황궁에서 가장 정보가 빠르다는 황태자였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에드몬트는 낯설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지난밤 그를 번민하게 했던 그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였다.
황실 기사를 따라 그가 발을 들인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그곳의 한 방에서 그는 황태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분이 황태자…….’
황후의 아들. 자신한테는 누님의 아들이 된다. 그러니까 조카.
하지만 일반적인 조카처럼 편하게 느낄 수는 없었다. 피도 안 섞였고, 상대는 자그마치 황태자니까.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는 황태자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름다웠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한 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제게는 외숙부 되시는 분이니까요.”
“외숙부라니요, 황송할 따름입니다.”
“정원에서 뭔가를 고민하시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알아본 이가 있었군요.”
“어젯밤 꽤나 떠들썩한 소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모를 수가 없지요.”
에드몬트는 어색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그곳에 없었지만, 아마 소문이 날 대로 난 모양이다.
“어떤 고민을 가지고 계신지 말씀해주신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황태자의 미소는 마음을 은근하게 파고드는 매력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던 에드몬트는 멈칫거렸다. 그 망설임이 황태자에겐 신호로 읽혔다.
“황후 폐하께 드리기 어려운 말씀이라도요.”
에드몬트도 황태자와 황후 사이가 원만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황태자.
게다가 그도 기사로서 란티어스의 지배자가 될 황태자를 내심 동경하고 있었다.
에드몬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그가 패터스 자작 부부가 파레사에게 붙은 추문과 연관된 것 같다는 고백을 토하고 나자, 방안은 정적에 잠겼다.
에드몬트는 수치심을 참으며 이마를 어루만졌다.
“제가 황후 폐하께 뭐라 말씀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 고백을 가만히 듣던 황태자가 차분하게 물었다.
“부모님이 이곳에 오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던가요?”
“두 분은 제가 여기에 온 것을 모릅니다.”
“용케도 어려운 결심을 하셨군요.”
“두 분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옳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그를 빤히 바라보며 황태자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황후 폐하를 정말로 많이 닮으셨군요.”
뜬금없는 말에 에드몬트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예, 예. 어린 시절부터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닮은 것은 외모만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간.”
황태자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러한 불유쾌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서 해결책을 강구해 보던 참이었습니다. 외숙부께서 제게 큰 도움이 되어주실 것 같습니다. 이는 어머님을 위한 일이고, 또한 황실을 위한 일이며, 동시에 황제 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황태자가 틀어막고 있어서 황제는 이 상황을 몰랐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황태자는 파레사와 자신을 위한다는, 가장 큰 목적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에드몬트는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골 촌놈에 황태자와 처음으로 마주한 그로서는 황태자의 진의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나 황후 폐하를 신경 써 주시다니, 역시 소문대로 좋은 분이야!’라고 생각할 뿐.
“전하께 감사할 뿐입니다.”
“부모님은 얼마간 처벌을 피하실 수 없을 겁니다.”
“감당하셔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이 있군요.”
황태자는 곧바로 패터스 자작 부부를 불러들였다. 거절할 수 없는 부름이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황태자 전하께서 저희를 어째서…… 찾으셨는지요.”
황실 기사들이 우르르 와서 가자고 하니 오긴 했지만, 막상 황태자와 대면하게 된 패터스 자작 부부는 충격적일 만큼 당황에 빠졌다.
황태자라니. 황후의 아들이긴 하지만, 자신들과는 머나먼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해온 인물이었다.
내심 황후의 친자식들이 황위에 오를 가능성을 생각해왔던 터라, 이렇게 마주하는 게 꺼림칙하기만 했다.
“잘 오셨습니다. 반갑게 마주할 수는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듣기 좋은 울림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낭랑했으나 힘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외형과 거기에 담긴 힘은 자작 부부를 압도했다.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알고 계신 모든 것을 말씀드리도록 하십시오.”
“맙소사, 에드몬트! 이게 무슨.”
자작 부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다. 그들은 차마 황태자 앞에서 에드몬트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그들의 속내를 까발리는 듯이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이야기였으니까.
황태자가 심문을 시작하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를 위한 일이었어요! 그 전속 시녀가 황후 폐하께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게다가 하이디가 조금만 거들면 된다고 해서…….”
“그게, 우리도 황후 폐하께서 황궁 출입을 금지하셔서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저 그 전속 시녀가 올 수 있도록 편지를 쓴 것뿐이에요! 나머지는 그들이 알아서 하기로 한 거고요!”
그들의 변명 섞인 말을 듣던 황태자는 준엄하게 물었다.
“그 일이 전속 시녀를 곤란케 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두 분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라는 걸 모르셨습니까.”
파레사도 가끔은 황궁 밖으로 나설 때가 있으니 그때 노리면 될 것을.
굳이 이들로 하여금 파레사를 불러내게 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 이유는.
“자신들을 처벌하려면, 두 분을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황후의 부모다. 그들이 처벌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황후의 체면이 상하게 된다. 그것은 황후도, 황태자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음모라는 것이 탄로 나도 제대로 책하지 못하고 이 사건을 덮으리라. 그런 교활한 계산.
황태자는 참으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작 부부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 그런!”
“우리를 유혹해서…… 우리는 하이디가 그렇다길래 믿었을 뿐이에요!”
사실 패터스 자작 부부는 그저 동조했을 뿐이다. 그들 스스로 이번 일을 획책할 만한 배짱은 없었다.
그 자체도 죄가 되지만, 그보다 더 죄가 있는 것은 그들을 움직인 흑막들.
그게 누구인지, 황태자도 얼마간 유추할 수 있었던 터다. 이제 황태자는 그들을 끌어낼 수 있는 줄을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그 전직 전속시녀의 말을 들어보지요.”
황태자는 말끔히 웃으며 주저 없이 줄을 당겼다. 무엇이 끌려 나오든, 남김없이 도려낼 생각으로.
이어서 곧바로 하이디가 소환되었다.
“저는 황후 폐하를 위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하이디도 자작 부부와 비슷한 변명을 했다. 오랜 친구였는데 그렇게 쫓겨나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노라고.
그녀는 곧 자작 부부와 똑같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실토하게 되었다.
그녀를 통해 그 흑막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는 하이디의 입에서 거론된 인물을 즉시 소환했다.
잇따른 소환 끝에, 황태자라고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들이 불려 왔다.
이번 사태의 흑막. 그리고 오랜 세월 니시아나에게 동조했으나 쳐내지 못했던 이들.
그의 눈앞에는 황실의 원로들, 다섯 명의 황족이 서 있었다.
니시아나와 가까우며, 티 나지 않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그녀에게 가담했던 무리들.
하지만 그들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별반 처벌받지 않았다.
그들이 귀족들처럼 대놓고 행동한 건 아니었거니와 동조하면서도 뒷짐 지고 점잖은 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후에게는 얼마간 관대해 보이기도 했다.
황후가 마음에 안 차도 황태자 자리는 정해졌고, 그녀가 딱히 제국의 안정에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외가의 세력이 약하니 그녀가 낳은 황녀와 황자도 후계 구도에 별문제가 안 돼서 바람직했다.
하지만 황태자가 관련되자 그들에게도 위기감이 생겨났다.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뒤나미스 출신의 전속 시녀와 염문이라니!
이제까지 그들이 고상해서 더러운 술수를 쓰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럴 필요가 생기자 그들은 은밀히 물밑으로 움직였다. 귀족들은 황족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황태자는 이미 그들이 원흉일 거라고 짐작했다. 예상대로 어김없이 줄은 황족들에게로 이르렀다.
황태자라고 해도 황가의 일원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제가 어떤 일로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불렀는지, 이미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아, 뭐 그 전속 시녀에 관련된 소문 말이지요?”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고 한들, 고작 그런 일로 우리를 불러내다니.”
“그깟 전속 시녀 따위가 뭐라고 그러시는지.”
그들은 황태자를 자주 봐서 꽤 그의 외형에 익숙했다.
그 때문에 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그럭저럭 할 말을 자아낼 수 있었다.
황태자의 입가가 깊어졌다.
“전속 시녀를 끌어내리기 위한 모략을 세웠다고 인정하시는 겁니까?”
“본인이 행실을 똑바로 하지 않았으니 그런 소문이 난 것이겠지요.”
“애초에 파라모어를 따라가지 않았으면 되었지 않습니까. 제가 따라가 놓고 무슨 추문이라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이었다. 그들도 나름의 정보가 있으니 황태자가 이미 줄줄이 귀족들을 소환했다는 것을 알 터.
귀족들은 황족을 따르지만 더 큰 권력 앞에서 그들의 의리를 기대할 수는 없다.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파라모어인 줄 몰랐고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일단 걸리고 나면 핑계는 뭐든 댈 수 있지.”
“뭐, 아니라니 알기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평소 소행이 그랬으니 그런 소문도 난 거겠지요.”
“맞아요. 사교계에서도 평판이 안 좋으니 다들 소문을 믿은 거 아니겠어요? 제가 처신을 잘못한 탓이지요.”
“사람이 참 순진하군요.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가.”
“알고도 따라간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돌아 나왔을 줄 누가 알아요.”
황태자는 악의로 사람을 함정을 빠뜨려놓고 오히려 빠진 자를 탓하는 그들의 면면을 굽어보았다.
어느 쪽이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그 저열한 소문이 황후 폐하께서 직접 나서셔 변호하게 만들었지요. 저는 여러분이 이 일을 주도했다는 증거와 증인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부인하실 생각도 없으신 듯하니, 이제 벌이신 일에 책임을 지셔야겠습니다.”
“무슨 책임을 지란 말입니까. 고작 전속 시녀의 뒷말을 했다고?”
“우리가 그녀에게 무슨 해를 끼쳤나요?”
“황태자, 아직 어려서 분간을 할 줄 모르는가 본데, 고작 이런 일로 황족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황태자가 턱을 들어 올리며 냉담히 내뱉었다.
“고작 이런 일이라니. 이는 황후의 전속 시녀에 대한 음해로 황후에 대한 모독입니다. 충분히 처벌받을 수 있지요. 또다시 반역자 때와 같은 일을 반복하시는군요.”
“황후에 대한 모독이라니! 우리에겐 결단코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어디 황후 폐하에 대한 비난 한마디라도 했던가요? 전속 시녀의 처신에 관한 정당한 문제 제기조차도 모독으로 받아들이실 것 같군요!”
황족들을 아우성쳤고 개중 한 명은 황태자의 이유를 근사치에 가깝게 짚어냈다.
“황태자는 지금 눈이 멀어 있소! 그깟 전속 시녀가 뭐라고 이러시는 거요!”
“애당초 간택 무도회가 열리는 시점에 그녀와 어울리면서, 이상한 소문이 번지지 않았소!”
“연애를 좀 한다고 한들 뭐라 하진 않겠소. 자주 보면 마음이 혹할 수 있지. 헌데 황태자비라니 이게 될 말인가.”
“황후가 들어온 이후로 제도가 평안할 날이 없군! 그 전속 시녀마저도.”
“이래서 애초에 천것은 안 된다고 반대했었는데…….”
그 말은 명백히 실수였다. 황태자의 눈썹이 치켜들렸다.
“그 표현이 황후 폐하를 지칭하신 건지요.”
황태자는 다시 한번 분명히 읊조렸다.
“천것이라.”
개중 눈치가 있는 한 명이 조금 누그러진 기세로 나섰다.
“뭐, 정 그렇다면 우리가 심한 감도 있으니 적당히 보상금을 안겨주면 되겠지요.”
“그래요, 부족하지 않게 보상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사과도 드리지요. 공론화하면 황실의 명예에 누가 될 겁니다.”
“괜히 일이 커져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 황실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열정이 지나쳐서 한 일이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황태자의 신색은 고요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은 다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내릴 처분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져 내렸다.
“다섯 분 모두, 제도를 떠나셔야겠습니다. 기한은 평생.”
다섯 명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들에게 제도는 평생을 살아온 터전이며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그곳을 떠나서 사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충격이 파도처럼 그들을 덮쳐왔다.
“돌아오시는 것은 장례식을 이유로만 허가하지요.”
황족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황태자가 무슨 권리로!”
“저는 현재 황제 폐하를 대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 권리지요.”
황제도 냉정한 건 매한가지다. 그라고 해서 황족들을 아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다스려야 할 식솔들로 생각할 뿐.
하지만 그들이 정 말을 듣지 않는다면 버릴 수 있었다. 그 판단을 황태자가 내렸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따를 수 없어요!”
“그렇다면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어 추방당하실 겁니다.”
온화한 미소와 대비되게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차가운 말투였다. 그들 모두가, 황태자에게서 그런 말투는 처음 들어보았다.
“설령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황족이자 원로인데 이럴 수는 없는 거요!”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선 안 됩니다!”
“그럼 오늘부로 그간의 규칙이 깨지겠군요.”
무심히 말을 받는 황태자는 일견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재, 재판을 청구할 거요!”
“재판은 열리지 않을 겁니다. 모르셨나 본데.”
황태자의 미소가 한층 화사해졌다.
“제국에서는 제 말이 곧 법입니다.”
그것은 절대권력자다운 선언이었다.
“그조차 관대한 처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를 어기셔서 그보다 더한 벌을 자처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더한 벌. 황태자 안에서 어떤 선이 팽팽히 당겨지고 있었다.
황태자는 이 선을 차라리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황태자로서 자라난 그의 이성이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이것이 적절한 처분이었다.
물론, 그는 적절치 않은 수준으로 처결하고 싶었다.
당장 저들을 빛도 들지 않는 감옥에 처넣고 최소한의 식량만으로 죽을 때까지 살게 한다든가.
그들이 벌을 무시한다면, 거기까지 이를 수도 있으리라.
황태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분노를 느꼈다.
그가 직접 그런 일을 겪었더라도 이처럼 분노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알게 되는 감정이 많았다. 그 감정은 그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간은 실수를 하고 또한 잘못도 한다. 그러니 황태자가 황족들을 모조리 제도에서 내쫓은 정도야 조금 지나친 처결 정도로 여겨질 일이었다.
‘아니, 지나치지 않아.’
그들은, 아니 모두가 알아야 했다. 그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단지, 파레사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
“사흘을 드리겠습니다. 정리하고 떠날 최소한의 시간이지요.”
녹청의 눈동자가 그토록 차가운 빛을 띤 적이 없었다.
죽여 없애도 상관없지만, 그는 폭군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폭군이 되면 파레사에게 표적이 돌아올 것이다. 뒤나미스의 여자가 모든 걸 망쳐놨다면서.
그는 파레사가 비난받는 존재이길 바라지 않았다. 칭송과 아낌만을 받아도 부족한 여자였다.
그의 마음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그녀를 비난하는 것은 곧 그에 대한 공격이었다.
황제와 황후를 보고 자란 그는 이미 교훈을 얻었다.
어떻게 되든 비난은 반신인 그가 아닌 그의 곁에 있는 이에게 쏠린다는 것을.
황족들은 여전히 굴하지 않고 아우성쳤으나, 곧 황실 기사들에 의해서 끌려나갔다.
황태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방안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성적으로는 충분했지만, 충분치 않았다. 그 엇갈리는 감각이 그를 괴롭혔다.
황태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라는 말의 뜻을 오늘에야 비로소 이해했다.
아직 이번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해야만 한다. 완벽하게.
황태자는 숨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저 승냥이 떼들은 불명확함을 어떤 부정적인 가능성으로 보고 물어뜯으려고 한다.
그 불명확함이 명확함이 되기 전에,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걸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황태자는 판단을 내린 즉시 움직였다.
* * *
황족들에 대한 처분을 결정지은 그날 오후, 황태자는 예정된 회의에 참석했다.
이미 소식을 들은 관료들은 하나같이 황태자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비밀은 없다지만 황태자궁에서 벌어진 일이 이토록 빨리 소문이 번지다니.
황태자가 의도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하나. 경고.
지은 죄가 있든 없든, 지금 이 시점에서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다들 최소한의 말만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원로라 할 수 있는 가장 노회하며 지위 높은 귀족들조차도.
그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황태자는 태연하게 시급한 안건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회의가 파장을 맞이할 무렵, 그는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았다.
따악! 두터운 표지가 마호가니 책상과 맞닿으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황태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간단한 동작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황태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나와 전속 시녀와의 관계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녹청빛 눈동자가 그들을 움켜쥐듯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른 무성한 소문에 대해서. 이에 대해서 시급한 공무가 처리되는 대로, 밝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오늘이 그 적기인 것 같군요.”
잠시 술렁임이 일었다. 황태자가 말하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싶었던 바로 그 사실이었다.
황태자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간 늦춰지는 나의 결혼에 대해서 말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혼인은 황태자의 중대한 의무인 바.”
잠시 간격을 두어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황태자는 이내 선언했다.
“나는 황후의 전속 시녀 파레사 멘젤을 황태자비로서 깊게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 큰 술렁임. 귀족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뒤나미스의 벨로나 나이트지만, 제국 출신입니다. 뒤나미스에서는 왕태녀의 측근이었지요. 능력도 자질도 황태자비로서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결합은 뒤나미스와의 우호를 증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유는 구구절절 붙였지만, 황태자는 그냥 제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진정한 이유는 뺐다.
원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나의 생각일 뿐으로, 그녀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뒤나미스의 벨로나 나이트로서 제국의 황태자비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지요. 그 때문에 나는 줄곧,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는 유보이지 균열은 아닙니다.”
마치 시간을 주었을 뿐이라는 듯한 말투.
파레사에게는 안타깝게도, 제국에서는 모두가 그녀가 황태자를 거절할 리 없다고 의심의 여지 없이 믿었다.
“하지만 최근에 있었던 사태로 나의 침묵이 불순한 움직임을 용인케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여 밝힙니다.”
그의 눈빛이 귀족들을 향해 싸늘하게 쏘아져 나갔다.
“그 불명예스러운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저열한 음모이고 나는 그에 가담한 자들을 남김없이 처벌할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그 짤막한 말은 단지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의 부모와 그녀의 친구였던 하이디. 황후와 가까웠기에 그만큼 특혜를 받아왔던 그들까지도.
“또한 그녀는 뒤나미스의 권능을 가진 벨로나 나이트입니다. 뒤나미스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 중 한 명이지요. 나는 이 같은 일이 다신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결투’에 대한 권리를 선물할 생각입니다.”
황태자의 입꼬리가 깊어졌다.
“알다시피 결투에서의 생사는 승자의 자비에 달려 있지요.”
정당하게 파레사가 죽이고 싶은 놈들을 죽일 만한 권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에 듣던 귀족들은 영혼이 나갈 만치 놀랐다.
“아, 아니, 그런!”
“그러다가 그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짜고짜 결투를 청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파레사가 벨로나 나이트라는 사실은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지만, 전속 시녀라는 직함에 시녀복을 입고 돌아다니다 보니 다들 그녀를 시녀로만 의식했다.
그 때문에 마음껏 떠들어 댔던 터.
공공의 적이었던 황후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레 표적이 파레사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여기 있는 자 중에서 죄가 없는 이는 드물었다.
“벨로나 나이트는 무분별하게 결투를 신청하는 존재가 아니지요. 나는 그녀가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서만 검을 들 거라 믿습니다. 단지, 검을 들지 않는 귀부인에게는 결투를 청할 수 없으나 그 대신 남편이나 같은 가문의 남자에게는 결투를 청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시겠지요.”
일순 벼락이 떨어진 듯했다.
졸지에 패할 게 뻔한 결투를 신청 당하지 않기 위해 집안 단속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인 귀족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얹어졌다.
말 많은 귀부인을 아내로 둔 한 명이 손을 들어 항의했다.
“그, 여자들끼리 말을 해대는 걸 어떻게…… 다 막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관료 중 몇 안 되는 여자들이 그에게 눈총을 주었다.
“당신도 떠들었잖아요.”
황태자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가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는지.”
또 한 명이 격하게 손을 쳐들었다.
“사실,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결투를 유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요, 이것은 합법적인 살인 유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제 아내는 제가 죽길 바란단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마차에 치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건 당신이 바람을 피워서잖아!”
“……이 같은 문제가 있사오니 황태자 전하, 재고해 보심이 어떨련지요.”
“‘거부할 수 없는 결투’라니요.”
아우성은 차츰 커져서, 회의장을 덮을 정도로 번져나갔다.
황태자는 그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렇게나 벨로나 나이트와의 결투는 피하고 싶으면서, 이제까지 추문에 잘도 입을 대었던가.
추문이 퍼지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황태자는 이들 중 대다수가 그 추문을 사실처럼 떠들었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들어 보니 내 선물이 끼치는 해악보다 이로움이 더 클 것 같군요. 그럼.”
황태자는 곧장 회의를 파하고 자리를 나섰다. 그의 뒤로 회의장의 귀족들은 혼란과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그 속에서 파레사를 황태자비로 삼겠다는 소리는 어쩐지 이의를 제기할 겨를도 없이 묻혀버렸다.
이제 황태자에게 남은 것은 못다 한 처결과 파레사뿐이었다. 그 중 후자를 그리며 황태자의 눈빛이 짙어졌다.
* * *
황후의 부름을 받고 온 파레사는 저와 엇갈려 방을 나서는 마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을 보는 그녀의 묘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발 넓고 소문에 예민한 그녀는 황후에게 소문을 실어나르는 전서구로서 충실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잘 적응하고 있군.’
파레사는 무심히 안으로 들어섰다. 마음의 준비를 약간 했다. 또 뭔가 일이 터졌을 게 분명하니까.
“파레사! 왜 이리 꾸물거리는 게냐! 아니, 그보다 너 그 소식은 들었니?”
“예, 들었습니다.”
“들었어? 세상에 빠르기도 하구나. 난 놀라서 네게 말해주려고…….”
파레사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봉급을 올려준다는 소식 말씀하시는 거죠? 시종장이 말하던데요.”
“그놈의 봉급 타령!”
순간 고음으로 직격하는 외침에 파레사의 귀가 다 얼얼해졌다.
“그래, 올려주마. 올려준다고 했다!”
“어째서 마음이 바뀌셨어요? 절대 안 올려주실 것처럼 말씀하셔 놓고.”
“그야 네가 그런 일을 겪었지 않니. 좋은 상관 둔 줄 알아라!”
황후는 생색을 내며 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름다우시고 마음 넓으신 황후 폐하. 그런데 그 소식이란 게 뭘까요.”
봉급 이야기가 아니라면 또 무슨. 파레사는 새로운 소식이라는 자체가 달갑잖았다.
“황태자가 회의장에서 선포해버렸다잖니!”
“무엇을요?”
“너를 황태자비로 삼겠다고!”
뭔가 쿠구궁! 하고 떨어져 그녀를 강타한 것 같았다. 파레사는 충격 속에서 정신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잠시 버벅인 끝에 파레사는 물었다.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황후는 잔인하게도 단호했다.
“아니, 제대로 들었어! 너를 황태자비로 삼겠대. 네 결정만 기다리고 있대! 그 온 귀족들 앞에서 말했단다! 굉장히 확고한 말투로!”
파레사의 손바닥이 책상을 내려쳤다. 쾅!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말도 안 돼요!”
“얘! 책상 부서지겠다. 세상에, 힘도 쎄 가지고!”
“지금 책상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 책상이 네 봉급보다 비쌀 텐데?”
파레사는 움찔하며 손을 책상으로부터 거둬냈다. 그 말이 그녀에게 정신을 되돌려준 것처럼.
황후가 쯧쯧 혀를 찼다.
“보아하니 너는 몰랐던 것 같구나. 그럴 줄 알았다.”
“황태자 전하는 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네 추문 말이다. 그게 황태자 귀에도 들어갔나 봐. 추문은 사실이 아니고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단속한 게지.”
“……사실이 아니란 건 어떻게 아셨대요.”
“물론 너를 믿었겠지만, 확인도 다 해봤겠지. 그 파라모어 녀석도 끌려오고, 귀족들도 줄줄이 소환당했대.”
그 이야기를 하면서 황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네가 황태자와 염문이 도니까 황족들이 못마땅해서 벌인 짓이라더라. 그래서 황태자가 그들을 제도 밖으로 추방해버렸다고 해.”
“황족들을, 추방이요?”
“그래, 황태자가 화가 많이 났나 봐. 그렇게까지 한 걸 보면.”
“그랬군요.”
담담하게 말을 받았지만, 파레사의 속은 복잡했다. 해결되었다기보단 선반이 뒤집어진 것처럼 난데없고 방식이 과감했다.
어느 날 저 빼고 세상이 뒤집혔고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기분이었다.
황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에게 찾아가 봐야겠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야겠어.”
“예, 저야말로 들어야겠네요.”
파레사가 황태자궁으로 가는 데 그토록 흔쾌히 자청하여 따라 나선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곧장 황태자궁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파레사는 왠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왠지 사람들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요.”
“너한테 결투를 신청 당할까 봐 그런가 보구나.”
“종종 결투를 신청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요.”
황후가 흠칫하고 파레사를 쳐다봤다.
“나는 검을 들어본 적도 없다! 결투라니.”
“……황후 폐하는 아니거든요. 찔리는 게 있기는 하시나 보네요.”
“내가 아니라면, 날 위해서 결투를 하고 싶었더냐?”
그 말을 하면서 황후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다 보면 왠지 정의심과 분노가 솟구치거든요. 저는 그들을 보면서 제가 남다르게 바른 인간이라는 것을 실감하곤 했지요.”
“남다르게 바르지만 돈을 밝히지. 뭔가 조합이 이상하구나.”
“제가 돈을 밝힌대도 부정한 방법으로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하간 도착했군요.”
황후와 파레사는 단란한 대화 끝에 황태자궁에 다다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장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전보다도 더 공손해진 태도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황태자는 서재에서 평소처럼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 앞에 있는 그는 조금 야윈 모습이었지만, 태는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목깃이 살아있는 우아한 진녹색 예복까지도.
그는 그들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어머님. 그리고…… 파레사.”
그의 시선에서 유독 파레사에게 깊게 머물렀다. 움푹 들어간 자리에 고이는 듯이. 황후가 코웃음 쳤다.
“이젠 숨기지도 않고 티를 내는군. 그럴 만도 하겠지요. 그렇게 만방에 알렸으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최선이었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황태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노망난 늙은이들을 죄 제도에서 내쫓았다면서요?”
파레사의 중대한 문제를 쉽사리 넘겨버린 황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랬지요. 어머님도 달가워하실 조처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나는 진작에 그랬으면 더 달가웠겠지. 그런데 그래도 되겠어요? 그 늙은이들 항의가 만만치 않을 텐데.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반란을 일으킨다면 더 좋겠지요. 처벌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제도를 떠난다고 해도 그들의 삶에 큰 불편은 없을 터.
살 만큼 산 노인들에게 대단한 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예 재산을 몰수하고 신전 같은 곳에 넣어버릴 것을. 약간의 후회가 밀려들던 참이었다.
“어머, 황태자 많이 화가 났었나 보군요.”
“예, 아주.”
그는 다시 파레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또렷하게 찔러 드는 그 눈빛에, 파레사는 할 말이 사라졌다.
황후가 재촉하듯 황태자를 불렀다.
“황태자, 내 용건 아직 덜 끝났어요! 나 다른 이야기도 들었는데…….”
황태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황후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패터스 자작 부부와 전 전속 시녀 하이디가 이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짐작은 했답니다. 편지부터가 너무 수상했어. 그들은 어떻게 처분할 건가요?”
“어머님께는 송구하게도, 쉽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 말을 발음하는 황태자의 표정엔 어쩐지 싸늘한 기운이 비쳤다. 황후가 코웃음 쳤다.
“내가 그들을 감쌀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전혀 그럴 생각 없으니 염려 말아요. 파레사를 건드리는 건 나에 대한 음해지요.”
말린 장밋빛 눈동자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니시아나와 같은 짓을 내게 한 거야.”
황태자는 진의를 살피듯 황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그들은 감옥에 있습니다.”
“뭐라고?”
황후의 눈동자가 커졌다.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던 터.
뒤에서 듣고 있던 파레사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황족이 아닌 자가 황후의 측근을 음해한다는 건 큰 죄입니다. 형벌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조사할 것이 남아 임시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연금은 죄인에게 과분한 처사지요.”
귀족 전용 감옥일 테니 그렇게까지 험한 장소는 아닐 거다. 하지만 그래도 감옥은 감옥이다.
황후는 벌어진 입을 다물며 대답했다.
“그, 그래. 놀랐을 뿐이에요. 그럴 수 있지요.”
“아마 조사가 조금 오래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패터스 자작의 용태에는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래요. 아마 독을 드셔서 조금 훼까닥 하신 모양이야. 그전에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황태자와 파레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너도 그들을 감옥에 가두자더니, 황태자는 아예 실행에 옮겼구나. 어찌나 하는 생각이 이리 똑같은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파레사는 느긋하게 물었다.
“만나 보실 건가요?”
“만나 봐야 내보내 달라 네가 날 이렇게 대할 수는 없다. 뭐 이런 소리만 하시겠지.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 둬도 좋을 것 같구나. 끈 떨어진 신세가 되어 봐야 자신들이 한 일이 뭔지 깨닫게 되시지 않겠니.”
“옳은 말씀이세요.”
파레사는 황후의 단호함이 마음에 들었다.
무른 마음으로는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 도리어 악화시키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
검으로 베어버릴 듯한 날 선 마음이 필요했다.
황후는 지금 그것을 갖추고 있었다.
황태자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하지만 다른 이는 만나보고 싶어하실 것 같군요.”
“……누구?”
“에드몬트 패터스. 동생분이 패터스 자작 부부의 혐의를 제보해 주었습니다.”
황후는 또다시 눈을 부릅떴다.
“내 동생이? 이 녀석이 찾아온다더니.”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기가 면구했던 것 같더군요. 그는 조사차 황태자궁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나 보시지요.”
제법 강한 어조였다. 황후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여기서 자신을 배제하려는 시도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래요. 난 가보죠.”
곧 그녀는 시녀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 황태자와 파레사 뿐이었다. 황태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앉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왜 그러셨습니까.”
선 채로 불쑥 꺼낸 질문에 황태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위로 들렸다.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야만 했어.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내가 너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모두가 이유를 의심할 테지. 나는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
“부인하시면 됐잖아요.”
“그건 거짓말이지. 내가 말한 건 진실이고.”
말하면서 그는 발을 움직였다. 간격이 좁아졌다. 세상이 확대되고 공간이 좁아지는 듯한 엇갈리는 감각이 파레사를 침범했다.
“나는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리고 지난 여행으로…… 좀 더 확실해졌다고 생각했지.”
확신과 함께 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까워진 만큼 녹청의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듯한 빛이었다. 그토록 아름답고 예리했다.
그녀가 태어나 보아온 것 중에 가장.
“내 말이 틀렸다면, 그렇다고 말해.”
파레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듯이 파레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이제는 대답해주지 않겠어? 그간 나는 충분히 우리 사이의 장벽을 부숴왔다고 생각하는데.”
황태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파레사는 거기에 묻어 있는 불안의 그림자를 보았다.
반신이라 칭송받는 황태자도 결국은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사랑 앞에서.
그것은 때때로 가장 강인한 심장도 찢어놓는 칼날이 된다.
대답. 그가 바라는 대답이 뭔지 파레사는 알았다.
만약 또다시 이전과 같은 답을 내놓는다면 그는 물러날까. 그걸 자신이 바라나.
‘아니.’
답은 놀랍도록 단호했다. 그의 심장을 찢어놓고 싶지 않았다.
이전에도, 지금도.
황후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는 파레사도 그럴 때였다.
“저도 전하와 같아요.”
끓는 듯이 내뱉었다 생각했지만, 담담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파레사는 황태자가 그 말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내뱉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환하게 기쁨을 발하는 빛이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가득했다.
“얼마든지.”
“혹시 약혼녀가 있으신 건 아니겠죠?”
황태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니.”
“그럼 혼담이 오가는 상대는?”
“없어.”
“그럼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게 없겠군요.”
마음에 세워두었던 장벽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허물어져 내렸다.
파레사는 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변화가 낯설었다. 그러나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파레사는 성큼 다가서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안에 담기는 뺨은 매끈하고 보드라웠다.
“안드레아스.”
“……불러 달라고 하려 했더니.”
“그러실 것 같아서요.”
이건 직업병이다. 상대가 원하는 걸 빠르게 파악하는 것.
왠지 모르게 그의 피부를 손바닥으로 문지른 파레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사람이군요. 조각인 줄 알았더니.”
“무례하군.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그보다 더한 무례도 용서해주실지 모르겠군요.”
파레사는 미소를 띤 채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충동적이지만 흐름에 이끌려 가는 듯이.
그의 손이 파레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나도 무례해질 테니까.”
그리고 잡아당겼다. 두 개의 숨결이 포개졌다.
머나먼 길을 돌아왔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꿈꿔본 적도 없는 상황이 그저 펼쳐진 뒤에야 파레사는 깨달았다.
이 사람을 원한다는 것. 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은 오로지 그만이 줄 수 있다는 것.
잠시 후 조금 물러선 황태자는 숨을 토해냈다. 그의 입에서 곧 어떤 말이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그토록 흐트러진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 있는 말도 없었다.
“사랑해.”
파레사는 숨을 골랐다. 들썩거리며 흘러나오는 호흡이 낯설었다. 가슴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벨로나 나이트가 되었을 때도 이토록 벅찬 기분을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게 이런 느낌이었나. 속이 뜨거웠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나도 당신을. 황태자는 성에 차지 않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애매한 말이야.”
“확신할 수 있을 때…… 말씀드릴게요.”
명확지 않다. 이게 사랑일까.
하지만 황태자를 상대로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대부분은 이토록 가슴이 뛰지 않을까.
본능에서 비롯한 반응인지, 본능에 마음이 휩쓸려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설렘에서 시작된 울림은 이내 심장을 뒤덮어 몸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그 진동에 숨 막힐 만큼.
본능의 영역이든 아니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 어떤 마음도 이제껏 이렇게 자신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으니까.
황태자는 손을 뻗어 파레사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는 서늘하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꼭 숲에 파묻힌 것처럼 아늑하고 부드러운 냄새. 영원히 잠겨 있고 싶은 숲이었다.
파레사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보다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황태자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국에는 많은 준비된 여성들이 있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여성들.
그들을 두고 자신이 황태자비가 되는 게 적절한지 알 수 없었다.
파레사는 기사였고 기사로 살아왔다. 황태자비는 그와 동떨어진 곳에 놓여 있다고 여겨졌다. 전속 시녀와도 거리가 먼 곳에.
“나는 황태자야.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일이었지.”
황태자는 파레사의 턱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게 내 전부는 아니야. 나 역시 인간이고, 그 때문에 염원이 있고, 또 욕망이 있지.”
황태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쩐지 위험한 기운이 비치는 미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 특유의 온화한 가장에 가려졌다. 그는 단호하게 부연했다.
“누구와 결혼할지는 내가 결정해.”
그것은 반석처럼 단단한 의지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어나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틀어쥔 자의 오만함마저 실린 의지.
그는 황태자였고, 진정한 의미로도 그랬다. 누구도 감히 그에게 삶의 중대한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가지고 싶은 게 없었지. 근데 네가 나타났어.”
파레사의 등장은 처음부터 그의 영혼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 물빛 눈동자를 보며 그는 격변의 조짐을 느꼈다. 아니, 처음 새로운 황후의 전속 시녀에 관한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너는 내가 널 원하게 만들었어. 처음 자각한 순간부터 계속, 원했지.”
그리고 반드시 가지고 말 거라고 결심했다. 황태자는 그 말을 삼켰다.
눈앞의 여자를 꽃처럼 꺾어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꽃이었다면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정원에는 이미 수많은 꽃이 피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유일하게 원하는 하나를 가질 수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는 신중해야 했다. 어려운 상대. 하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그는 황태자였다. 그의 완벽한 인생에 실패한 사랑이라는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실패할 만큼 방만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무능한 자만이 사랑을 잃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해.”
황태자로서가 아닌, 그 자신으로서.
그래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도리어 황태자라는 지위를 이용해서라도, 너를. 파레사라는 이름의 여자를.
당당히 눈을 마주쳐오는 너의 강인함이, 너의 눈빛이, 너의 성격이. 아니, 그 모든 것이. 너라는 한 여자가.
존재 자체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마음에 들었다. 마치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이 마음을 멈출 방법을 알지 못해.”
낮아진 목소리가 본심을 토해냈다.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폭군이 되어도 좋을 만큼.”
“……폭군이 되시기엔 새어머니를 많이 신경 써 주시던데요.”
“이 따분한 황궁에서 그간 날 즐겁게 해주셨지.”
“그 말 들으시면 무척 기분 나빠하실 거예요.”
파레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젠 조금 사이가 좋아졌는데, 그걸 한 방에 뭉개버릴 만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때까지 어머님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어쩐지 토라진 듯이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냥 궁금했어요. 지금은 꽤 솔직하신 것 같아서.”
늘 속을 알 수 없이 모호하게 굴었던 황태자다. 속내를 숨기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파레사는 늘 그의 안에 어떤 생각이 떠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내친 김에 물어보았다.
“더 솔직해지실 것은 없나요?”
“무엇이 궁금한데.”
“제가 모르는 거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만한 거.”
황태자의 입꼬리가 위로 휘어져 올라갔다. 그는 한결 다정해진 어조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속삭였다.
“사실 난 질투심이 많아.”
“그렇군요. 근데 저한테 딱히 접근하는 남자도 없으니 질투하실 것도 없을 텐데요.”
“그 파라모어, 죽여도 좋을까.”
“……그도 벌을 받아야지요. 죽음은 좀 과하지 않은가 합니다만.”
“아쉽게도 그는 쓸모가 있더군.”
쓸모가 없었다면 그대로 치워버렸을 것처럼 말한다.
“또요.”
“사실 난 아주 그림을 잘 그려. 일부러 못 그리는 척 한 거야.”
“……왜요?”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아무리 못 그리는 척해도 그렇게 그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너무 완벽해 보이면 거리감을 느낄 테니까. 하나라도 못하는 게 있어야 사람처럼 보일 테지. 심리적인 거리를 허물기 위한 계산이었어. 실제로 효과가 있지 않았나?”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요. 전하는 겸손과는 거리가 멀군요.”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일. 황태자인 내가 나를 낮춰서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는 없지.”
반박 불가능한 말이었다. 파레사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내 동의했다.
“그건 그래요.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뭐지?”
“거짓말을 참 못하시는군요. 정직하게 사셔야겠어요.”
그 순간 황태자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잦아드는 모습을 파레사는 똑똑히 목격했다.
표정을 굳힌 황태자가 실토했다.
“……사실 난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어. 뭐든 부족함이 있어선 안 되지.”
“그러실 것 없어요. 전하의 얼굴이면 부족함도 말 그대로 인간적인 매력으로 바뀔 테니까요.”
황태자에게 있어서 가장 사기적인 장점은 그의 지위나 권능이 아니었다. 그 독보적이고 유일한 아름다움.
미간을 조금 찌푸린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일 년이면 궁정 화가만큼 그릴 수 있을 거야. 요샌 바빠서 통 연습을 못 했어.”
고집스레 말하는 모습에 파레사는 그가 좀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보다 두 살 어렸지.’
많은 나이 차이는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은 어린티가 나는 듯도 했다. 파레사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럼요. 일 년 뒤에는 궁정화가들의 그림과 나란히 둬도 단연 눈에 띌 거예요.”
황태자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역시 그런가.”
“그때가 되면 제 초상화도 또 그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마음에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계절별로 그려주지.”
초상화란 단어를 입 밖에 낸 파레사는 퍼뜩 뭔가를 깨달았다.
“아, 혹시. 제 초상화 왕녀님에게 넘긴 것도 계산이었나요?”
“네가 왕태녀와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
순순히 시인하는 황태자였다.
그 얼굴을 노려보며 뭐라 한마디 하려던 파레사는 제 마음이 저절로 스스로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가까이서. 도통 뭐라고 할 수 없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파레사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신 독단으로 그런 일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겠다 약속하지. 그런데…….”
황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이름을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익숙지 않아서요.”
“길어서 그런 거라면, 짧게 부를 방법을 생각해 봐.”
애칭을 지어보란 말을 돌려 하면서 황태자는 웃었다. 그로부터 빛이 발산되는 듯한 찬란한 미소였다.
“그럼 이제, 승낙을 얻었으니.”
그는 파레사의 손등을 끌어 올려 입을 맞추었다. 손등 위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간지럽게 스쳤다.
“공표할 일만 남았군.”
공표라는 단어는 부담스럽고도 무거웠다. 하지만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로 했으니까.
파레사는 비장하게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길을 택함으로써, 파레사는 이전의 황후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으리라. 황태자가 자신을 선택했듯이 파레사 역시도 그를 선택했으니까.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 * *
그 시각, 황후는 오랜만에 본 동생과 의외의 장소에서 면담하고 있었다.
황후를 본 순간 에드몬트의 눈이 바르르 떨리더니, 이내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꼭 죄인과 같은 반응에 황후는 한 마디 던졌다.
“나를 찾아온다더니, 황태자를 만났더구나.”
“제가 혹시 실수한 건지요.”
“아니다, 잘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거니? 내 말은.”
황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너와 줄곧 떨어져 살았잖니. 그런데 어째서 부모님을 고발하면서까지…….”
자연스레 의심이 들었다. 그가 이 기회를 틈타 제게 잘 보여서 권력을 잡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줄곧 그런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던 황후다. 주변 사람들이 변질되는 모습은 익히 보았다.
높으신 분들이 조금만 호의를 베풀면서 접근하고 이득을 안겨주면 금세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마는 것이다.
양심과 도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은 애초에 희박했고 운 나쁘게도 황후의 곁에 없었다.
어린 시절 떨어진 동생에게라고 그런 걸 새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는 패터스 자작 부부 아래서 자라났으니까.
“황후 폐하,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지요.”
에드몬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부모님은 뒤에서 술수를 꾸몄고 누군가를 음해하려는데 동참했습니다. 그게 남이라 해도 부끄러울 일일진대, 황후 폐하께 그런 짓을 하다니요.”
“에드몬트…….”
“차마 어디서 말 못 할 만큼 부끄러운 일입니다.”
에드몬트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의 감정이 패터스 자작 부부와 다투고 집 밖을 나온 이후로 줄곧 그를 괴롭혔다.
자작 부부의 말 속에서 그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제 영달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오만뿐이었다.
그들은 황후가 괴롭다가 지쳐 목숨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황후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그리 영화를 누렸으면서 뭐가 힘들다고 목숨을 끊었냐고 탓할 뿐 후회는 없으리라.
“저는 가족이라면 어려울 때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선 황후 폐하께서 어려울 땐 침묵하시며 혜택만을 누리시다가 종래 반대쪽에 섰지요.”
그들은 대단히 비싼 값에 여식을 팔아치웠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그 과분한 거래에 죄책감마저 느끼며 상품에 주기적으로 손대는 것이다.
사들인 이의 마음에서 벗어나 되돌려 보내지지 않도록.
그 거래를 무를 수 있는 것은 애초에 황후의 권한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후가 이혼을 한다고 하니 용납이 안 될 수밖에.
“황후 폐하, 저는 부모님과 대화하며 어째서 황후 폐하께서 그분들의 황궁 출입을 금했는지 이해했습니다.”
“……이해해주니 다행이군.”
황후는 물끄러미 에드몬트를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가문의 후계자로서 자란 아들이었다.
늦게나마 얻은 귀한 아들이니 얼마나 공들여 키웠겠는가.
그런 녀석이니 잘 자라댔대 봐야 물정 모르는 귀족 도련님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공들여서 잘 키워낸 모양이다. 패터스 자작 부부에게서 엿보이는 굴종을 그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귀족다우면서도 반듯한 흔치 않은 남자였다.
‘내 취향이군.’
황후는 잘생긴 남동생이 금세 마음에 들었다. 그는 괴로운 듯이 토로했다.
“진심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황후 폐하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경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황후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송구할 건 없단다. 그리고 네 진심은.”
황후는 이미 황궁에서 수많은 귀족을 겪었다. 노골적인 적대와 은근한 가시.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신호들.
가면을 뒤집어쓰고 가식적인 호의를 보이는 자들이 물론, 가장 까다로웠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류하기 힘들었으므로.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겪어낸 지금 황후는 누구보다도 더 잘 상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제 남동생이 어떤 녀석인지 뻔히 보였다.
“잘 알겠다. 하지만 이 이상 네가 내게 도움을 줄 건 없을 것 같구나.”
에드몬트는 좋은 녀석이다. 어릴 때도 참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고 이곳은 제도다. 착한 녀석도 나쁜 녀석으로 바뀌어버릴 수 있는 환경.
교활한 귀족들은 어떻게든 그에게 접근하여 이용하려고 할 터.
황후가 그를 지키는 방법은, 그와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 가까운 것은 모두 잃었으므로.
뒤에서 살펴줄 수는 있겠지만 제도에서 그가 무엇을 하건 직접적으로 관여치 않으리라. 황후는 다짐했다.
그녀는 한결 차가워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모님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패터스 자작가의 자산도 온전하지 못할 터.”
“예.”
에드몬트의 표정은 덤덤해 보였다.
“원한다면 황태자궁에 머물도록 하거라. 황태자에게는 말해두겠다.”
황후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에게는 뭔가가 고민될 때 가장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 황태자에게 맡기는 것.
그는 편리한 아들이었다. 키우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커서 문제가 생기면 기꺼이 도맡으며 처리해준다.
황후가 되고 나서 느끼는 어쩌면 가장 큰 이점이었다.
에드몬트의 문제도 그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잘 지내거라. 또 보자꾸나.”
어렸던 동생은 어느덧 성장하여 번듯한 남자로 자라났다. 감회가 새로웠다.
인사를 남긴 황후는 방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보다 둘은 진전이 좀 있으려나.”
언제까지 이도 저도 아닌 사이로 분위기만 풍기면서 있을 건지.
슬슬 결론 낼 때도 되었다. 잘되든 아니든 간에.
황후는 그게 오늘이 되길 바랐다.
* * *
“저 황후 폐하.”
느지막이 돌아온 파레사가 황후를 찾아왔다. 황후는 못마땅하게 시계와 파레사를 번갈아 봤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는구나.”
“선택권이 없었는걸요. 저를 놔두고 가버리신 분이 하실 말씀인가요.”
“별일 없었나 봐? 여행까지 다녀와 놓고 대체 언제쯤 확실해질 참이더냐?”
“저 실은.”
파레사는 그 말을 던지듯이 내놓았다.
“황태자비가 되기로 했어요.”
황후는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뭐? 마치 그 말을 ‘기사가 되기로 했어요’라는 것처럼 하는구나. 낭만이라곤 없어.”
“낭만도 있었는데 별로 듣고 싶으실 것 같지 않아서요.”
“그래, 난 네가 황태자와 얼마나 달콤한 분위기를 풍기며 붙어 있었는지 듣고 싶지는 않구나. 그림부터가 소름이 돋아. 하지만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궁금하구나.”
파레사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어색하고 낯설었다. 사실관계만 이야기하는 것이 편했다.
결국 그녀가 간략하게만 설명하자 황후가 표정을 찌푸렸다.
“사랑이라니, 그 녀석한테 심장이란 게 있었더냐. 정말로?”
“예, 조각이 아니더라고요. 만져보니 뺨도 말랑말랑하던데요.”
파레사의 실없는 소리를 황후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어리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어째서 그리 빨리 정하는 것이냐.”
“빨리라뇨. 제가 황태자비가 되는 걸 바라시지 않았어요?”
“바라긴 바랐지. 근데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
“황후 폐하도 제가 알기론 황제 폐하와 교제하신 지 한 달 만에 결혼을 확정 지었다고 하던데요.”
“그랬지만 나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니. 너는 다르지 않아? 게다가 난 이놈 저놈 다 만나 보고 개중 고른 게 베녹스 후작이었는데 황제 폐하가 그보다 나았잖니.”
“그러셨군요. 하지만 저는 제가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황태자 전하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남편감이니까요. 대외적인 평판에 맡기기로 했어요.”
황후는 진지하게 물었다.
“네 인생이야. 그렇게 결정해도 되겠니?”
파레사는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저도 황태자 전하가 좋아요. 얼굴이 심히 제 취향이세요. 그 얼굴만 보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요.”
그제야 황후는 온전히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황제의 얼굴을 보고 결혼한 게 반 이상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그 녀석이 남다르게 잘생기긴 했지. 딸을 낳든 아들을 낳든 예쁠 거야.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돈도 많으신데요.”
“그것도 중요하지. 세상에,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잖니!”
“그렇군요. 기쁨이 두 배네요.”
“그러면 곧 네 봉급 타령을 들어줄 필요 없게 되겠구나. 나보다 더 부자와 결혼할 테니까.”
“그래도 봉급 올려주시는 것까지는 받을 거예요.”
“어련하겠어! 내 곧 새로운 전속 시녀를 알아봐야겠구나.”
파레사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누가 될지 알았다. 황후도 파레사가 떠날 것을 대비해서 누군가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결혼을…… 꼭 해야 하나요.”
파레사는 심각하게 물었다.
“네 입으로 황태자비가 되겠다면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걸어 들어가는 게 대단히 낯설다 못해 기피하고 싶어지는군요.”
“어쩜 그리 로망이 없니! 귀족 영애에게는 호화로운 결혼식이 꿈이거늘.”
“전 이미 꿈을 이뤄서요. 벨로나 나이트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한마디도 지지를 않는구나. 아무튼, 결혼이 내키지 않으면 더 만나 보라니까.”
황후에게 황태자는, 최근에 좀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동안 내내 바퀴벌레처럼 싫어했던 존재였다. 그 괴리감이 컸다.
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결혼 압박을 받고 계시니까요. 미룰 수만은 없죠. 그분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이미 결심했어요.”
그러고 보면 황태자는 교제를 청하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교제는 곧 결혼이었다.
그것이 결혼 압박을 받는 황태자의 특수성인가.
“그리고 어떤 압박 때문도 아니에요. 제 마음은 정해졌어요.”
그보다 더 마음을 흔드는 누군가가 앞으로 나타날 것 같지 않다. 황태자에게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았다.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긴 그동안 날 핑계로 둘이 이래저래 많이 만났지. 이미 진도는 다 나갔을지 몰라.”
“그럴 리가요.”
“아무튼 앞으로 할 일이 많겠구나. 너도, 황태자도.”
황후는 근심 서린 표정을 지었다.
황후로서의 전권을 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의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는 그녀도 덩달아 바빠질 터였다.
황태자가 황족들을 죄 내쫓아 버렸으니 이제 그들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대신 그들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을 테지만.
황후는 문득 중얼거렸다.
“혹시 둘이 틀어지면 내 동생을 소개해 줄랬더니…….”
“예?”
“아, 아무것도 아니다.”
제 친정이라지만 패터스 자작가에 파레사라는 며느리는 과분했다.
자작 부부도 한 짓이 있으니 파레사를 보기 껄끄러울 터. 오직 황후에게만 즐거울 일이었다.
그녀는 아주 센 며느리가 자작 부부를 찍어누르길 바랐으니까.
“그러면 결혼에 앞서 이 일들을 매듭지어야겠지.”
황후는 중얼거렸다.
패터스 자작 부부의 감옥 생활은 생각보다 짧아지겠지만, 그들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좀 더 일찍 마주하게 되리라.
* * *
황후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으니 다음 순서는 황제였다.
다음날 파레사는 황제에게 가기 전 뒤나미스로 편지를 두 장 부쳤다.
하나는 부모님에게. 하나는 왕태녀에게. 두 편지는 모두 부모님에게 보내졌다.
아무나 왕태녀에게 편지를 부칠 수는 없었으므로 부모님이 받아서 전달할 것이다.
“자필로 써 보낸 성의 정도는 봐주시겠지.”
왕태녀는 대단히 황태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파레사가 그와 결혼하여 뒤나미스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결정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파레사가 전속 시녀로 있는 것보다는 황태자비일 때 왕태녀와 접촉할 일이 더 많을 터였다.
국가 간의 교류든 어쨌든.
부모님의 허락은…….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벨로나 나이트는 고작 누군가의 자녀로 머물기에는 너무도 큰 존재. 신에게 귀의한 신관이나 다름없다.
파레사는 그들의 딸이라기보다는 벨로나 나이트였고, 뒤나미스 인인 부모님은 그것을 자연스레 완전히 수용했다.
그렇기에 파레사는 진작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터였다.
자신의 인생 전반에 대한 모든 결정은 파레사 스스로 내렸다. 거의 모양새가 내놓은 자식이었다.
하지만 직장도 때려치우고 심지어 나라도 떠난 자식이 느닷없이 황태자비가 된다면 부모님도 놀랄 것이다.
믿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별 걱정하지 않고 그들이 종내에는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좋은 일 아니야?’
황태자비라면 대단히 높은 자리였다. 군주를 제외한 올라갈 수 있는 자리의 끝이다.
제국과 뒤나미스가 적국도 아니건만 자식이 출세했는데 부모 입장에서 나쁘게 볼 것도 없는 일이다.
파레사가 편지를 보내고 난 무렵 황후궁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저 파레사,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어.”
마리가 전했다. 친구가 방문했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들리는 말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자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내게 기별도 없이 내 궁을 정원마냥 드나드는군!”
“제가 좀 드나든다고 황후궁 문턱이 닳지는 않을 겁니다.”
그 울림이 좋은 낭랑한 목소리. 어쩐지 들떠 있는 것처럼 들린다면 착각일까.
“그건 파레사를 만나러 마음대로 드나들겠단 소리요?”
“여기서 허락해 주시지요. 파레사를 만나러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좋다고.”
“결혼도 안 한 남녀가 그렇게 내외 없이 만나서야 되겠나!”
“결혼도 안 한 남녀가 제 궁에서 자주 만남을 갖는 것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가가자 시녀들이 입 모양을 뻥긋거리는 게 보였다.
‘어서 허락하세요, 어서!’
그들은 황태자가 파레사와 연애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황태자의 눈부신 외모였다. 그걸 자주 볼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다.
마리는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웬 여우 같은 게 황태자비가 된답시고 굴러들어오는 것보다야 네가 훨씬 낫지!’
그래서 파레사는 사실 반대나 장애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황후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황태자가 언제 내 말을 잘 들었소?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드나드는 건 여기까지요.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건 안 돼!”
“어머님의 관대한 윤허에 감사드립니다.”
“파레사는 내 전속 시녀로서 일이 있건만. 이렇게나 자꾸 불러내면 봉급은 내가 아니라 황태자가 줘야겠어요.”
황후가 볼멘소리를 낸 직후, 그들에게로 다가서는 파레사를 발견했다. 황태자의 시선이 먼저 그녀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에.
“파레사.”
빛무리가 허공을 수 놓는 듯했다. 파레사는 왠지 모르게 발길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미소를 수식할 어떤 찬사도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제까지, 여전히 그랬다.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 조금쯤 이 증상도 가라앉을까.’
그러기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파레사는 목을 가다듬으며 인사했다.
“오셨군요, 황태자 전하.”
“그래, 널 보러 왔단다.”
황후가 그와 파레사 사이를 가로막으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파레사는 그녀를 향해 고했다.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근데 차림이 왜 그러니?”
황후가 파레사를 아래위로 훑었다.
“잘 차려입고 가도 모자랄 판에 전속 시녀복을 입고 가겠단 소리냐? 황태자, 드레스도 안 사주고 뭘 하는 거죠? 파레사가 돈이 없는 건 잘 알 텐데.”
면박이 황태자에게로 돌아갔다. 황태자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오늘은 그녀 스스로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님이 신경 써 주시는 줄 알았는데요.”
“나는 인사드리러 가는 게 오늘인 줄 지금 알았는데?”
“계산된 전략이에요.”
파레사가 당당히 말했다. 황후가 눈을 치켜떴다.
“전략?”
“어차피 황제 폐하는 저에 대해서 잘 아시잖아요. 열심히 꾸미고 가느니 황후 폐하를 보필하는 일에 충실한 모습을 좋게 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황제가 파레사를 황태자비로 맞이하는 것을 승낙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황제가 내보내길 원했던 저한테 새삼 좋은 감정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제는 많은 부분에서 황후를 괴롭힌 이들과 사고방식이 닮아 있었다.
황제도 파레사가 들어온 뒤로 황후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거란 뜻이다.
문제가 그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더라도 파레사가 쓸데없이 들쑤셔서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이성적으로 굴어도 파레사가 내키지 않는 마음도 여전할 터.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황후한테 충실한 것처럼 보이면, 그나마 황제의 마음도 조금은 풀리리라.
“저라고 딱히 황제 폐하께 잘 보이고 싶은 건 아니지만요.”
이미 황후에게 실컷 그를 비난한 터. 아무리 황태자의 아버지라지만, 한때는 최악으로 생각된 남자였다.
하지만 파레사도 그가 황후를 목숨 바쳐 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반대로 파레사의 마음을 풀어지게 했다. 그와 적당히 잘 지내볼 마음을 품을 만큼.
‘그래도 황제니까.’
“그래, 그토록 나이 많고 권위적인 이들에게는 검소하고 소탈한 이들이 며느릿감으로 좋아 보이기 마련이지.”
파레사가 오늘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후의 차림새를 훑으며 말했다.
“여성 취향과는 좀 다르군요.”
“오해하지 말렴. 이건 취향일 뿐이지 난 사실 전혀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단다. 젊은 시절에는 화려하게 하고 다니지 않았어.”
파레사도 내심 동조했다.
화려하게 꾸며도 아름답지만, 사실 황후는 아침에 간소한 차림으로 파레사를 맞이할 때도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단지 황후라는 직위에는 화려한 차림이 더 어울릴 뿐이다.
화려함은 사치스러움과 동의어가 아니었고, 파레사가 아는 황후는 예산을 넘어서는 지출을 하지도 않았다.
황후는 잠시 뒤 작게 덧붙였다.
“뭐 결혼 전에는 나도 딱히 부유한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뭐가 찔렸는지 파레사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도 결혼하고 나면 달라질지도 모른단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쓸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지.”
파레사가 황후의 엄청나게 화려한 드레스룸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그 발언에 동조하는 것은 황태자였다.
“그녀의 옷장을 채워주는 것도 색다른 재미겠군요.”
“그럼요, 황태자의 드레스룸도 꽤나 화려하다고 들었어요. 그에게 안목이 있으니 내가 딱히 신경 쓸 것도 없겠네요. 파레사는 이목구비가 수수해서 꾸미는 맛이 있지요.”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예산을 따로 준비해놓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녀에겐 없는 게 많아서요.”
“그럼요! 어쩜 귀족 영애가 저렇게 무심한지. 이 황궁 통틀어서 그녀보다 옷장이 비어 있는 시녀는 찾기 힘들 테지요!”
파레사는 침묵했다. 인형 놀이를 당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상황 같았다.
황태자도 제 옷차림에 황후 못지않게 신경 쓰는 듯이 보였으니 분명 파레사에게도 비등한 수준이 요구되리라.
하지만 파레사는 괜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주는 대로 옷을 입고 화장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면 될 테니까.
“그럼 가볼까. 기다리시겠군.”
황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파레사는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맞잡았다.
분명한 건 하나. 그는 파레사가 걸치는 모든 장식을 합한 것보다 더욱 화려하게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 되리라. 많은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살 만큼.
황제에게로 가는 길에 황태자가 문득 물었다.
“내 애칭은 생각해 봤어?”
파레사는 역습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생각이 많아서 미처 그것까지는.”
“너는 어린 시절 뭐라고 불렸지?”
“안 그래도 짧은 제 이름을 더 줄이실 건가요?”
안드레아스 정도야 기니까 줄여줄 만하다.
뭐라고 줄이지? 고심하는 그녀의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곧 네 이름으로 불릴 일은 거의 없게 될 테니까.”
그러니 자신이 열심히 불러주겠다는 소리다.
그래, 황태자비. 파레사는 머지않아 황태자비 전하로 불리게 될 터였다.
왕태녀조차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황후 폐하 정도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겠지.’
그 상황은 생각만 해도 낯설었다. 파레사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황태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봄바람처럼 다정하여 간지럽게까지 느껴지는 눈빛도.
“천천히 생각해 봐. 도착했으니까.”
파레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황제의 처소가 눈앞에서 위용에 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로운 전투였다.
* * *
“어서 오거라.”
황제는 침상을 벗어난 채 그녀를 맞이했다. 한결 건강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황후와 화해한 것이 그의 회복에 좋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권능은 정신의 힘. 파레사는 황제의 몸으로부터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권능을 느낄 수 있었다.
‘당분간 양위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좋겠어.’
열 살은 어린 황후와 결혼했는데 이혼 이야기가 물 건너간 이상, 건강을 회복해서 오래 살아야 한다.
파레사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시아버지가 될 이한테 느끼는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자리에 앉거라.”
그가 권하자 파레사와 황태자는 나란히 앞자리에 앉았다. 긴장될 만한 상황이었으나, 그건 차라리 이전 상황이 더했다.
파레사가 도둑으로 몰렸을 때. 그때에 비하자면 한결 우호적인 상황이었다.
황제는 그들의 결혼에 대해서 이미 결정된 사실인 양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무르고 싶다고 무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식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느냐.”
“석 달 후가 어떨까 합니다.”
황태자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파레사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전혀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건만.
“석 달은 너무 짧다. 우선 약혼부터 해야지. 약혼이야 당장 내일이라도 하면 되겠지만, 약혼 이후 석 달 만에 결혼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 약혼 기간은 충분해야 해.”
“그렇다면 적정한 시기가 있는지요. 귀족들은 제가 가급적 빨리 결혼하기를 강력하게 바라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랬다. 자신들의 여식을 황태자비 자리에 밀어 넣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황태자비를 선정하여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처럼 황제와 황실 어른들을 통해서 황태자를 압박하던 터.
“반년은 잡아야지.”
“너무 깁니다.”
황태자의 목소리가 너무도 확고하여, 파레사는 아예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눈썹을 찌푸리며 파레사에게 물었다.
“영애의 생각은 어떻지?”
“저는…….”
당연하겠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결혼을 하기로 했다. 파레사가 결정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그 후는 황태자와 황후가 알아서 할 것이다.
꽤 무책임한 생각이었지만 편안하면서도 누구와도 갈등을 빚지 않는 떠넘김이었다. 그 둘 모두가 자기주장이 강하니까.
어차피 제가 뭘 말한다고 해서 제대로 반영될지 의문이다.
일단 자신은 황태자와의 결혼 절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인사드릴 황족은 적어서 좋군.’
황태자가 죄 쫓아냈으니 그들은 황족이랄 것도 없다. 이제 무도회에서 귀족들과 인사만 나누면 되었다.
“특별히 생각하는 시기가 있나.”
파레사는 황제의 재촉에 맘대로 하시라는 대신 그럴듯한 대답을 자아냈다.
“아무래도 제 친지가 뒤나미스에 있으니 그들이 이 소식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됩니다.”
“그래, 이는 국혼이며 제국과 뒤나미스의 결합이기도 하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자, 황태자의 기색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뒤나미스에서 제국으로 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허례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굳이 반년이나 끌지 않아도 됩니다.”
“황태자는 아내 될 이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결정할 참인가.”
“그게 아니라…….”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생각하나 보군. 허나 벨로나 나이트가 떠나기로 마음먹는다면 언제 어느 때건 못 떠날까.”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황제로서도 완벽하여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황태자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 기회를 놓치기는 어렵다.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단지 기다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기에.”
황태자는 잠시 말을 삼키다가 내뱉었다.
“가급적 덜 괴롭고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시기를 정한 것뿐입니다. 아시다시피 폐하께서 병환으로 앓아누우신 지금, 저는 국정을 홀로 돌보느라 잠도 채 자지 못하고 심신이 지쳐 있습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일을 빠르게 매듭짓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뒷말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너는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있고 일은 내가 다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처럼. 황제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황태자는 아비가 병으로 앓아누워 있는데, 걱정하기는커녕 일을 떠맡는다고 불평하는 건가! 아들이 되어선!”
“불평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황후 폐하와 매일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소리치시는 것을 보아하니, 조만간 국정에 복귀하셔도 무리가 없을 것 같군요.”
파레사는 문득 황태자와 제가 파라모어 사건으로 인해 꽤 오랜만에 마주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말로 바빠 죽을 것 같은데 황제는 노닥거리며 황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배알이 뒤틀릴 만했다.
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황태자라고 해서 꼭 속이 넓지는 않았다.
“황태자는 내가 황태자의 짐을 덜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국정을 돌보다가 쓰러지더라도 전혀 상관없는 것 같구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물론, 가능성 낮은 일이라 봅니다만.”
왠지 모르게 대립을 시작한 부자간을 파레사는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파레사는 안중에도 없이 결혼 시기에 대해서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갖은 이유를 다 붙여댄 끝에 그들은 결국 합의에 이르렀다.
황제는 황후를 봐야 했고 황태자는 국정을 돌보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온 것이라 더 이상 언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레사의 방문은 본인이 배제된 채로 끝났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에게,
“황태자와는 서로 잘 맞으니 결혼을 결정한 거겠지. 앞으로도 그 마음 그대로 간직하기를 바라네.”
정도의 모호한 덕담만을 남겼다.
* * *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문을 나서자 황태자가 토라진 듯이 파레사를 쳐다보았다. 파레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별말 안 했어요. 제가 황제 폐하의 의견에 동조한 것도 아닌걸요.”
미리 귀띔을 좀 주던가. 하지만 파레사가 생각하기에도 석 달은 좀 짧았다.
“내 편을 들었어야지. 넉 달 반이라니.”
황태자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황제와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 끝에 날짜는 결국 석 달과 반년의 중간인 넉 달 반으로 정해졌다.
파레사의 의견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니 그가 파레사를 탓하는 건 부당했다.
“처음에 한 달로 부르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얼추 예상 시기에 맞게 합의를 보실 수 있었을 텐데요.”
“관여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어. 결혼 준비로 어머님께서도 바빠지실 테니, 빨리 끝나길 원하실 줄 알았지.”
“안 그래도 내키지 않은 결혼인데 빨리 치러지길 바라실 리 없죠.”
황태자가 흠칫하며 파레사를 쳐다보았다.
“신경 쓰여?”
“황제 폐하가요? 아니요.”
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이지 않아요. 결혼식에 참석 안 하신다고 길길이 날뛰셔도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만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폐하께선 분명 승낙하셨다.”
“그렇겠죠. 비유일 뿐이었어요.”
“그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 약혼 발표 때는 참석하지 않으실 거야.”
일단은 병환 중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약혼 발표는 언제인가요?”
황태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빨리 발표되었으면 좋겠어?”
“숙제가 계속 있는 것 같아서요.”
결혼이야 그렇다 치고 약혼은 어서 치렀으면 좋겠다.
파레사는 돌아가면 황후가 자신에게 무어라 말할지 잘 알았다. 분명 약혼 무도회를 대비하여 몸단장을 하자고 할 터.
후루룩 약혼을 끝내버리면 결혼식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녀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보다……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 봐도 좋지 않을까.”
그가 슬쩍 손을 잡아 왔다. 파레사는 그 손등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보들보들하게 미끄러지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어떻게 사람의 피부가 이런 느낌이지? 갓난아기의 것 같다.
“정말 고운 손이로군요.”
“……뭔가 구도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엔젤.”
“응?”
“엔젤이 어때요. 전하는 도저히 사람 같지 않으니까.”
파레사는 즉석에서 애칭을 고안했다. 엔젤이라고 불러도 다들 고개를 끄덕거릴 거다.
그가 길거리에 나가면 후광이 비치는 듯한 환상과 함께, 모두가 기꺼이 무릎을 꿇으리라.
황태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익숙하지만, 이런 식은 또 처음이야.”
“그렇군요, 다양한 방식으로 찬사를 받아보는 것도 좋죠.”
황태자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대단히 긍정적이군. 마음에 들어.”
“엔젤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래, 명색이 황태자인데 남들 앞에서 엔젤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 고심하던 파레사는 한 가지 사실을 끄집어냈다.
“부정적인 말씀 하나 드릴게요. 조금 전에 황제 폐하와 국정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요.”
“잠깐 낼 시간은 있어.”
이미 잠깐 내서 황제를 만나지 않았던가. 파레사는 의심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황태자의 얼굴에 미세하게 초조감이 서렸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어서 가보세요.”
“싫어.”
황태자가 그렇게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파레사는 한숨을 쉬더니 이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끌어당겼다. 쪽. 얕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보세요. 저도 일해야지요.”
늦게 갔다간 황후가 또 타박을 줄 게 뻔했다.
물론, 일찍 간다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현재 파레사는 황후의 전속 시녀였다.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그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이리 대담하지?”
“검으로 사람을 베는 것보다 대담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파레사는 덧붙였다.
“전 뒤나미스 인이에요.”
미소가 새겨진 파레사의 얼굴을 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화답이 돌아온 건 다음 순간이었다.
두 개의 입술이 겹쳐졌다. 얕고 애틋하던 그것은 금세 열정과 함께 깊어졌다. 미온에서 뜨겁게 변화한 그것은 이제 그들의 온도였다.
허물어진 장벽 속에서 그들은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욱 가까워질 미래를 향하면서.
* * *
“이로써 두 사람의 약혼이 성립되었음을 밝힙니다.”
나흘 뒤, 황후의 낭독 속에서 황태자와 파레사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두 번이나 바람이 몰아쳐 반대할 만한 귀족이며 황족들을 내쳐버린 터라, 이견이 있을 턱이 없었다.
짝짝. 박수 소리가 무도회장을 장식했다.
이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고 모두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축하해 주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도회장 내에는 엄숙한 분위기마저 돌고 있었다.
황후와 친한 몇몇 귀부인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띄웠다.
“축하드려요!”
“어서 반지를 끼워주세요!”
상체에 금자수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새하얀 예복을 입은 황태자는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은발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 윤곽을 감싸는 후광처럼 빛을 발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들여 꾸미기까지 하니, 그의 곁에 서 있는 파레사는 그저 정신이 없었다. 여러모로.
“이제부터 내 약혼녀로군.”
황태자는 파레사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파레사는 누가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치켜들어 반지를 모두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머쓱하게 황태자에게 속삭였다.
“황후 폐하께서 반지는 들어 올려 자랑하는 거라고 말씀하셔서요.”
오늘을 위해 짧은 기간 열심히 학습한 터였다.
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 위에는 녹청색의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가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기가 동공만큼이나 컸다.
분명히 엄청나게 값비쌀 게 분명한 화려하면서도 깊고 그윽한 색채의 에메랄드였다.
파레사는 이미 마리를 통해, 황태자가 경매장에서 이 반지를 구입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전하의 눈동자를 손가락에 매단 것 같아요.”
“항상 곁에 있겠다는 뜻이지.”
지켜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파레사는 미심쩍게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았다.
너무나 황태자의 눈동자를 빼닮았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감시당하는 기분이 든다.
“반지가 좀 초라한가. 급히 구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
“그건 아니에요.”
“결혼식 때는 더욱 화려한 걸 구해보지. 실은 원래 대대로 황가에 물려 내려져 오는, 어머님의 반지를 물려받아야 하지만…….”
황태자가 황후 쪽을 흘깃거렸다.
오늘만큼은 파레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기에 그녀의 손에는 어떤 반지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우아한 차림새였다.
“어머님이 자신의 보석을 내놓으실 것 같지 않아서.”
황후와 달리 파레사는 백조처럼 화사한 레이스와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백조처럼 화사한 드레스를 입었다.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레사도 황태자가 말하는 반지가 뭔지 본 적이 있었다.
황후는 파레사에게 자신은 아직 이 반지를 가진 지 십 년밖에 안 되었으니 십 년을 더 채우고 주겠다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런 반지는 가치를 아는 사람의 손에 있어야 한다면서.
‘어차피 너는 어떤 반지를 끼든 별 감흥이 없잖니.’
파레사는 그녀에게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황태자가 고심하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은 반지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저는 상관없어요. 반지야 어떤 것이든.”
“하긴 내가 곁에 있으니.”
그 자연스러운 말에 파레사는 잠시 후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요. 황태자 전하는 어떤 반지보다도 화려한 보석이니까요.”
“나만 한 액세서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지.”
황태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누군들 연인을 장식하는 액세서리가 되고 싶겠냐마는, 황태자는 도리어 그 사실에 자부심마저 느끼는 듯했다.
“모두가 부러워하겠군요. 이런 식으로 부러움 받는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알았어. 처음 널 본 순간부터.”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안겨줄 거라고, 자신은 그럴 만한 존재라고 황태자는 속삭였다.
어쩐지 밀도 높고 묵직한 선언을 건넨 황태자는 다시금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가지, 인사해야 하잖아.”
“……예.”
오만한 군주와 다정한 연인 사이를 넘나드는 그를 보며 파레사는 잠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환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하지만 두 모습 모두가 그이리라. 그러니, 상관없다.
그들은 곧 몰려오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황태자가 나이 지긋한 대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파레사에게 누군가가 다가섰다.
“축하드립니다.”
파레사는 제게 다가서서 인사하는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황후의 동생, 에드몬트였다. 그는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많이 놀라셨겠어요. 평소에는 전혀 아름답다고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에드몬트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파레사는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더. 라는 뜻입니다.”
“알아요. 황태자 전하를 보고도 제게 그런 찬사가 건네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어요.”
에드몬트는 그렇지 않다, 너무 겸손하시다고 말하는 대신 솔직하게 토로했다.
“사실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서시는데, 같은 남자임에도 눈이 머는 줄 알았습니다. 무도회장에 태양이 뜬 것 같더군요.”
“이해해요. 저도 무도회장에 어떻게 들어섰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뭔지 파레사는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꿈꾸던 순간이 찾아와서가 아니라,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비현실적인 남자가 곁에 있어서.
“에드몬트! 파레사! 무얼 그리 소곤대고 있는 거니.”
어느새 귀부인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타난 황후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드몬트가 다급히 인사했다.
“아, 황후 폐하.”
“제법 멀쑥한 차림을 하고 왔구나.”
황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에드몬트의 차림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녀는 사교계에 얼굴을 알려야 하니 잘 챙겨입고 다니라며 동생을 닦달한 터였다.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오늘의 에드몬트는 그녀의 까다로운 안목에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황태자가 결혼하면 그다음은 네 차례란다. 오늘 같은 무도회가 기회이니, 참한 영애를 찾아보려무나.”
“……예.”
에드몬트는 내키지 않는 기색을 드러냈다.
닦달하기 좋아하는 황후이니, 곧 그녀의 표적은 파레사에서 에드몬트로 넘어갈 것이다.
당장 누군가를 들이밀지 않는 게 어디냐마는, 황후로서도 딱히 그에게 밀어줄 적당한 영애가 없었다.
황후와 사이 나쁜 귀족이 사이 좋은 귀족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외숙부께서 오셨군요. 제 약혼녀와 인사는 잘 나누셨는지.”
약혼녀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는 게, 어딘지 에드몬트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드몬트는 황태자를 제한다면 이 무도회에서 단연 눈에 띌 만큼 잘생긴 영식이었다.
황후는 조금 찔렸다. 황태자가 자신이 동생을 파레사에게 소개하려고 한 걸 알 리 없을 텐데도.
에드몬트는 조금 수줍어하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약혼 정말 축하드립니다. 너무도 근사한 한 쌍이시라 보는 동안 즐겁더군요.”
왠지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에드몬트를 보며 황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너 설마.”
“예?”
“아니다. 그래, 너는 나와 따로 움직이자꾸나.”
황후는 자연스레 에드몬트를 이끌어갔다.
황태자와 파레사가 다시 함께 자리한 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파레사를 향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함께 하지.”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춤이었다. 그리고 이 무도회의 주인공은 그들이었다.
파레사는 기꺼이 그 손을 맞잡았다. 속으로는 한숨을 삼키면서.
이제는 좀 적응이 되었다.
악몽 같았던 사교계 데뷔 때도 오늘의 약혼식에도 늘 파트너는 그였다. 마치 원을 돌아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 * *
약혼 무도회가 끝나자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황태자궁으로 향한 그들은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이제 밤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어도 뭐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사람은 있었다. 황후.
하지만 그녀도 오늘만큼은 파레사의 늦은 귀가를 허락한 터였다.
파레사와 황태자는 찻잔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보통은 마주 앉지만,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파레사에게 음흉한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머리카락이 유달리 반짝거리더군요.”
파레사는 황태자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의 피부가 아기 것 같았다면, 머리카락은 정말이지 비단결 같았다.
반짝거리는 은빛 비단. 손안에서 샤르륵 흘러가는 곱고 부드러운 느낌에 전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시각에 이어 촉각까지 완벽하시군요.”
어떻게 이런 생물이 인간의 배 속에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정말 인간이 아닌 건 아니겠지.
분명히 오늘을 위해 공들여 관리했을 머리카락을 죄 흩어놓으며 파레사는 미묘한 포만감에 잠겼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었다. 모두가 황태자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그걸 허락받은 건 오로지 파레사뿐이다.
이런 특권이 다 있다니!
차를 한 모금 들이마신 황태자는 쓴 것이라도 삼킨 양 눈살을 찌푸렸다.
“자꾸 고양이 털 쓰다듬듯이 날 만지는데.”
“황태자 전하는 고양이과는 아니에요. 전혀 앙칼진 구석이 없는걸요.”
고양이는 마음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발톱을 들이미는 데 반해, 그는 늘 자신이 파레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안전한 인물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했다.
아마 그것은 반신으로 추앙받아온 황태자다운 태도이리라.
“내게도 송곳니가 있어. 아직 드러낼 상황은 아니라서 말이지.”
황태자는 그 말을 하며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파레사는 여전히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