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17
Chapter 17
* * *
모든 일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파레사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었다.
돌이킬 수 없기에 어려운 결심이었다. 하지만 정작 황태자와 함께하기로 결정하고 나자 막혀 있던 물길이 트인 것 같았다.
파레사가 결혼 전까지는 전속 시녀로서 일하기를 원했기에 일상이 그리 바뀌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듯은 했지만, 애초에 만나는 이들이라곤 황후 주변의 사람들밖에 없기에 체감이 크지 않았다.
황후는 약혼식 이후로 무척 바빠졌다.
“새로운 황태자비를 위해 궁을 정비해야만 한단다. 네가 살 곳이야.”
“그렇군요.”
지금도 황후궁에서 살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아예 궁하나를 통째로 내준단다. 물론 황태자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뭔가 할 일이 있을까요?”
황후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가만히 있어. 넌 딱히 취향도 없잖니? 내가 노라와 함께 완벽하게 재단장할 거란다. 새로 들어올 식구를 위해 황궁 내부를 단장하는 건 황후인 내 의무지. 기대해도 좋아.”
그렇게 말하는 황후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파레사는 슬쩍 의견을 내밀어 보았다.
“저는 동선이 편한 곳이 좋아요. 또 검을 수련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더 좋고요.”
“그래, 알아. 네가 실용성을 따진다는 거. 황태자궁을 많이 참고하며 단장하고 있지. 넌 신경 쓸 것 없다. 이미 작업이 진행 중이니.”
황후는 궁에 미리 가볼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엄포를 놨다. 깜짝 파티처럼 정비가 완료되면 보여줄 모양이다.
물론 전속 시녀인 파레사는 황후가 어떤 물건을 사들이고 뭘 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기에 내용을 아주 모르진 않았다.
‘이래서 결혼식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거로군.’
단순히 결혼식만을 준비하면 될 일이 아니다. 황태자비란 존재가 황궁에 들어온다는 것은 많은 변화를 수반했다.
“시중인들도 새로 배정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겠구나.”
황후는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모처럼 황후로서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그녀는 점점 일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간 그녀의 몫을 얼마간 떠맡고 있던 황태자의 짐도 한결 덜어졌다.
고단할 만도 한데 황후는 도리어 요새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파레사는 황제와의 관계가 회복된 것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았다.
‘잘된 일이지.’
황태자비가 되면 전속 시녀일 때와는 달리 황후와 조금 거리가 생길 것이다.
처소도 바뀌고, 하는 일도 바뀐다. 그들 사이에 예와 격식이 놓였다.
하지만 별걱정은 없을 것 같다. 황후는 제 스스로 바닥을 딛고 올라서고 있었다. 파레사의 사명도 다해가고 있다는 뜻이다.
파레사는 니시아나를 처치한 후로 제 사명이 약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나날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떠난다고 해도 자신을 크게 얽매지 않을 만큼.
그러니 파레사가 황태자를 받아들인 건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떠나지 않기로 할 만큼 그가 좋았기 때문이다.
벨로나 나이트의 의무는 흐려지고, 이제 오롯이 파레사 홀로 남았다. 이 마음과 함께.
그것은 스스로를 위한 사명이었다.
파레사는 그 사명을 따라 살기로 했다. 벨로나 나이트가 아닌 파레사로서.
* * *
순조롭던 흐름이 난데없이 가로막힌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파레사는 뒤나미스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장문의 편지는 감정을 드러내듯 격렬한 필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읽어보기도 전에 좋은 내용이 아닐 거라는 게 짐작이 갔다.
파레사는 차분히 편지를 읽어내렸다.
‘파레사, 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번 일이 얼마나 나와 네 아버지를 실망시켰는지 알고 있니? 뒤나미스를 떠났을 때만 해도 네게 말 못할 사연이 있겠거니 했단다. 언젠가 말해주리라 믿었지. 그런데 부모에게 말하지도 않고 결혼을 결정하다니!’
편지는 내내 부정적인 어조였다.
‘제국의 남자들은 뒤나미스의 남자들과 달리 성격이 드세고 가정적이지 못하여 벨로나 나이트의 반려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단다. 하물며 상대가 황태자라니. 그는 믿을 만한 남자인 거니? 혹여 순진한 네가 번듯한 외모에 혹한 것은 아니고?’
물음에 뒤이은 것은 제국의 천박한 문화에 대한 비난이었다.
제국의 남자들은 뒤로 정부를 두어도 비난받지 않는다고 한다.
신분 높은 남자라면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게 흠이 아니라니 그곳에 연고조차 없는 네가 혹시 황태자의 마음이 변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러다 황태자를 살해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넌 강하니 마음만 먹으면 암살에 성공하고도 남을 텐데,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
점점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이어지는 편지를 읽으며 파레사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잠겼다.
이 편지를 쓴 어머니는 아버지도 제국 출신의 귀족이라는 걸 잊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누가 시키는 대로 적었거나.
범인은 알 만했다.
파레사는 편지의 내용을 황후에게 조금 순화시켜 전달했다.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사실이 아니랄 수는 없지만 좀 극단적이구나.”
“왕태녀님의 소행이 분명해요.”
황태자에 대해서 결단코 좋은 말을 했을 리 없는 그녀다. 어머니가 이런 편지를 쓰도록 유도하고도 남았다.
황후는 이상한 곳에 감정이입을 했다.
“가출한 딸이 느닷없이 결혼한다고 통보를 보내오다니, 얼마나 놀랐을까. 내 딸이 그런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끔찍하구나.”
“가출이 아니라 독립이라니까요.”
“귀족 영애가 어찌 결혼하기도 전에 독립을 한다는 말이니!”
“전 뒤나미스 인이고 벨로나 나이트예요. 고리타분한 말씀 마세요.”
딱 잘라 말한 파레사는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결혼하려는 건 제국의 황태자라고요. 횡재했다고 기뻐하시는 게 보통 아닐까요?”
“그렇겠지. 네가 잘난 남자를 잡아 결혼하는 것을 일생의 자랑이자 목표로 삼는 평범한 제국의 귀족 영애라면 말이지.”
그 역습은 파레사의 입을 다물리는 효과가 있었다. 황후가 코웃음 쳤다.
“물론, 나는 황제 폐하와 결혼한다는 게 자랑스러웠단다. 황제 폐하는 기가 막히게 잘 생기셨고 나를 극진히 아끼셨고, 난 황후가 된다는 게 좋았거든. 그러니 그걸 자랑스러워한다고 해도 잘못된 건 아니란다. 남들은 눈꼴사나워하겠지만, 그들 질투심 따윈 알게 뭐니.”
“그럼요. 더불어 낳지도 않는데 기막히게 잘생긴 아들도 생기셨으니까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 녀석이 반반하게 생기기는 했지.”
황후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 완벽에 가까운 미모를 보고도 취향이 아니란 이유로 감흥이 없는 것도 대단한 까다로움이었다.
“요는, 다른 모든 그럴듯한 이유를 배제하고 본다면 네 부모는 네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의문인 거란다. 너는 일단 뒤나미스에서 자랐잖니.”
“그렇군요.”
파레사는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라시는데, 이미 약혼까지 했는데 무를 수는 없잖아요.”
“결혼은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모르는 거지만, 상대가 황태자잖니. 넌 황태자가 눈멀었을 때 이 기회를 움켜쥐어야 해! 네 부모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황후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두 개의 심장을 가질 만한 녀석이 아니야. 한눈을 팔 만큼 여자한테 관심이 있지도 않아. 제 심장을 힘껏 손에 쥐고 있다가, 오직 한 명, 그 차가운 심장을 뛰게 하는 한 명에게만 눈길을 허락하겠지. 그게 너고. 그런데 문제가 될 턱이 있겠니?”
황태자에게 그녀보다 더 객관적인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황후의 안목은 믿을 만했다.
“따뜻한 이유는 아니지만, 안심이 되긴 하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파레사는 간단하고 실용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했다.
“제 가족들을 초청하려고요. 직접 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시면 되겠죠. 어차피 결혼식에 참석하시려면 오셔야 하니까.”
“황태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그럴 리가 있겠어요?”
파레사는 단호했고, 황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를 보고도 부정적일 수 있는 이들은 극도로 희귀했고, 파레사는 제 부모님이 그럴 거라 믿지 않았다.
황후가 뭔가를 생각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워 올렸다.
“네 부모가 궁금하구나. 나와는 사돈이 되는 거겠지.”
“황후 폐하는 곧 제 시어머니가 되시는 거고요.”
그 순간 황후에게서 미소가 가셨다.
“시어머니라니, 세상에. 내가 고작 서른이 넘었을 뿐인데! 게다가 며느리가 너라니!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녀는 충격에 빠졌고, 파레사는 침묵으로 답했다.
이제 어떤 식으로 편지를 쓸지 고심해봐야 할 차례였다.
* * *
황태자는 곧 이 결혼에 부정적인 장인 장모를 뵙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별문제 아니군.”
파레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생 찬사와 칭송만을 받아온 남자답게, 황태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황후 표현대로라면 재수 없게도 황후조차 자신을 진정 싫어한다고 믿지는 않았었다.
황태자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여상하게 말했다.
“나를 보시면 해결될 거야.”
새삼 자신감을 보일 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장애물이 생긴 줄 알았는데, 넘어서는 방법 또한 간단했다. 여전히 별문제는 없었다.
“그보다 날 뭐라고 부를지 정했는지가 더 궁금한데.”
“앤이나 레아는 어때요? 어감이 예쁜데.”
그러나 황태자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파레사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해야만 했다.
그게 가장 큰, 해결되지 못한 과제였다.
* * *
파레사는 기나긴 설득의 편지를 썼다. 제가 생각해도 왕태녀를 만난 이후로도 처음 보낸 편지가 결혼 소식이라는 건 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답장은 여전히 경직된 투로 도착했다.
‘네 말대로 보지도 않고 그를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지. 제국을 방문하여 직접 만나보게 될 날을 고대하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결혼을 파투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필체였다.
파레사는 황후에게 부모님이 일주일 내로 방문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황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귀족 영애가 어찌 이리 예와 절차에 무심하단 말이냐. 장인 장모가 결혼식에서 사위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제 부모님도 저한테 무심하신데요.”
파레사는 제가 뒤나미스를 떠난 이후로 왕태녀에게 시달리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부모님이 저를 까맣게 잊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떠올린 적이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부모로서 존재감을 부각시켜 보려는 행각이리라.
‘바람을 피운다고 내가 그를 살해할 거라니.’
이혼을 하겠지만 죽이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황후가 슬며시 물었다.
“뒤나미스를 이렇게 오래 떠나 있었던 적은 너도 처음이지 않으냐?”
“그렇지요.”
“뒤나미스에 한번 가 보고 싶지 않으냐. 앞으로 제국에서 살아야 할 텐데. 황태자비가 되면 지금처럼 거동이 쉽지도 않을 테고…….”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더 큰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
“뒤나미스요? 가면 못 돌아오게 될지도 몰라요.”
왕태녀는 언제든 마음을 바꿔서 파레사를 감금시킬 수 있는 존재.
왕태녀와 벨로나 나이트들이 합세하여 그렇게 한다면 파레사로서는 저항할 방법이 없다.
황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히 전쟁 날 위험은 무릅쓰지 않는 게 좋겠다.”
그녀도 왕태녀가 파레사를 감금할 가능성과 그렇게 되면 황태자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파레사를 찾으려고 들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양국의 우호는커녕 전쟁의 위험성을 부르고 있었다.
황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요새 일이 많아져서 바쁘구나. 네가 황태자비가 되어야 내 짐을 좀 덜 수 있을 텐데.”
“지금도 많이 덜고 계신데요.”
황후궁의 긴밀한 사정이 담긴 서류를 쳐다보면서, 파레사는 자신이 새삼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서 더 비밀스러운 서류까지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권한에 벗어나는 일까지 이미 하고 있는 터.
황후가 코웃음 쳤다.
“내 덕에 황태자비로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지 않겠느냐. 다 해본 일이니 말이야.”
“네, 아주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네 황태자비로서의 삶에 자양분이 될 것이다. 특히나 네 패션부터!”
황후가 격한 동작으로 파레사에게 손가락질했다.
“그건…… 부인할 수 없겠군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그때 마침, 손님이 찾아들었다. 똑똑.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황후가 말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선 인물은 익숙한 이였다.
“부르심을 받고 찾아뵈었습니다. 파레사 님도 함께시군요.”
시어머니의 동생이 될 에드몬트.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파레사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신지요.”
어쩐 일로 그를 불렀을까. 아직 패터스 자작 부부와 하이디에 대한 처분을 내리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인가?
파레사는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곧 에드몬트가 낯선 복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낯설지만 친숙한 복장. 그건 황실 기사단의 예복이었다.
“황실 기사가 되셨군요?”
“예, 그랬지요.”
황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기사단장이 네가 황실 기사가 되었다고 하더구나. 왜 말을 하지 않았니.”
에드몬트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견습 기간을 끝내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대체 언제 시험을 본 거니?”
“제도에 오자마자 입단 테스트를 보았습니다. 인근 영지의 후작께서 추천서를 써주셨거든요.”
그리고 합격했다는 소리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면 웬만하면 합격이었다.
그 후로 서류적인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추천서를 받을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없다.
“제도에 오자마자라면?”
“파레사 님을 처음 뵌 날 말입니다. 그날 오전 입단 테스트를 보았거든요.”
이미 편지를 통해 그날 입단 테스트가 예정되어 있던 터.
일찍부터 시험을 마치고 제도를 구경하던 차에 파레사를 만난 것이다.
“부모님은 알고 계셨더냐?”
“아니요. 분명히 뭔가 하시려고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여관을 따로 잡고 시험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그래. 너를 알아본 부기사단장에게 들었다. 황후 폐하는 자신이 제도에 있는지도 모르시니, 그 사실은 개의치 않으셨으면 한다고 네가 말했다더구나.”
눈썰미 좋은 부기사단장은 근래 행사를 통해 황후를 자주 접했다.
그래서 에드몬트를 본 순간 바로 황후와 닮았다고 생각했고,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가 황후의 동생이란 것까지도 알아챘다.
그리고 바로 기사단장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내 동생이면 황실 기사든 관료든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건만.”
왜 자신의 후광을 빌리지 않았느냐는 말에 에드몬트는 약한 미소를 떠올렸다.
“저는 황실 기사로서 황후 폐하를 보필하고 싶었습니다. 일반 관료와 달리 황실 기사는 검으로서 황실을 수호하는 자리입니다. 실력이 되지 않는 자가 황실 기사가 되면 어떻게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네가 우수한 실력을 가진 덕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입단을 확정 지었다더구나. 내가 아직도 모를 줄은 몰랐다고 했어.”
에드몬트가 쑥스러운 기색을 떠올렸다.
“과찬이십니다. 파레사 님에 비하자면 보잘것없는 실력이지요.”
“그거야 쟤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사이니 당연한 일이고. 그보다…….”
부모와는 달리 바르고 착실한 동생에 대해서 칭찬을 해줄 만도 한데 황후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하는 짓이 답답하구나. 어차피 무도회에서 널 본 기사들을 통해 암암리에 알려지고 있었는데, 왜 나는 이제야 알아! 합격하자마자 재깍 말했어야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큰일이 터진 터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에드몬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황후가 뭔가를 깨달았다.
“가만, 황태자궁에서 견습 생활을 했다고 했으니, 그럼 황태자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냐?”
“예,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게 아니라 기사단장님 선에서 이미 보고가 들어갔더군요.”
황태자가 저보다 더 먼저 알았다는 사실에 또다시 역정을 내려던 황후의 입이 다물렸다.
황후의 동생씩이나 되는 자가 황실 기사가 되는데 황태자에게 보고가 들어가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정말이지, 황태자 그 음흉한 녀석이 그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단 말이야?”
기사단장이 새삼 그 사실을 알려준 것도 황태자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닐지 의심이 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황태자는 그간 쌓은 점수를 오늘부로 얼마간 깎아 먹었다.
에드몬트가 변호했다.
“저, 제가 직접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셔서 침묵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렇게 그간 침묵한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반지르르한 얼굴로 미소를 띠고 있으면 누군들 알겠어. 도통 티를 내지 않으니.”
황후는 갑자기 파레사를 돌아보았다.
“너도 조심하렴. 그 녀석이 얼마나 속이 캄캄한지 알잖니!”
“그럼요. 저도 당해본 적 있지요.”
왕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팔아치웠을 때를 떠올리며 파레사는 답했다.
그때는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그 같은 상황을 용인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황태자와 일개 시녀의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물질적인 깜짝 선물 외에는 뒤에서 홀로 무언가를 꾸며선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아내 된 도리로 앞으로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아직은 약혼녀지만요.”
뒤나미스 인다운 말이었다. 황후의 표정이 금세 떨떠름해졌다.
파레사가 에드몬트 쪽을 돌아보았다.
“결국 황실 기사이긴 했네요. 그날 황실 기사가 되었으니 모두가 당신을 모를 만해요.”
“예, 그리고 아직 견습 기간을 끝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는 슬며시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황후궁에 배정해달라고 기사단장님께 말씀드릴까 합니다. 황후 폐하께 제 거취에 대해서 누설했으니 그 정도는 요구해봐도 좋겠지요.”
“요령도 없는 녀석은 아니구나. 그래, 그래야지.”
파레사는 에드몬트의 희망찬 얼굴을 보며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누이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듯한 에드몬트는 곧 제 누이가 얼마나 성격 있고 까다로운지 알게 될 터였다.
그도 호위 기사 이상의 업무를 요구받을 테니까.
얼마 후 황후는 업무에 집중하겠다는 이유로 그들을 내보냈다.
“이만 나가보려무나.”
에드몬트와 방을 나온 파레사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있죠.”
“무엇이기에?”
파레사는 결심한 듯 술술 내뱉었다.
“봉급이요. 주기적으로 협상해야 해요. 알아서 올려주는 건 없으니까요. 황실 기사라고 해도 황후궁에서 근무하면 따로 수당이 나오니까요.”
박봉으로 동생을 부려먹고도 남을 황후였다. 부모의 죄를 제가 대신 속죄한다고 믿는 에드몬트라면 군말 없이 봉사하고도 남았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돈은 원래도 후하니 괜찮은데 휴가를 잘 안 주시거든요. 그것도 잘 챙기셔야 해요.”
파레사의 세속적인 말에 에드몬트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예.”
“그럼 이만.”
황후를 섬긴 선배로서 충고를 다한 파레사는 냉큼 돌아섰다. 그도 나중에는 파레사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되리라.
하루하루가 쉴 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여.
* * *
방에 홀로 남은 황후는 흐릿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파레사의 부모가 오기 전, 중대한 사건을 처리해야만 했다. 패터스 자작 부부에 관한 문제.
황후는 자신이 그들을 부모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데 스스로 놀랐다.
다음 순간 그녀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자신이 이미 황후로서 그들을 처결할 결심을 품었기 때문에.
그간 마음에 걸렸던 것은 에드몬트였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지만, 황후가 패터스 자작 부부에게 가혹한 처결을 내리면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부모를 고발한 건 그이니까.
합당한 처결이라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마음까지 그럴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상태로 에드몬트가 황궁에서 일하는 것도 구도가 어그러졌다.
동생까지 부모님을 나 몰라라 했다는 평가를 듣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적절한 수위로, 그러나 확실하게.”
황후는 그것을 긴 시간 고민해야 했다.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패터스 자작 부부는 벌을 받고 있으니, 그 또한 나름의 처결이었다.
그들에 대한 것에 비하자면 하이디에 대한 고민은 사소할 정도였다.
꽤나 오랜 세월을 멀어져 있었으니 그만큼이나 어린 시절의 결속도 희미해진 터.
하이디는 우정을 시험하지 말았어야 했다.
“골치 아프구나.”
하지만 황후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이 일을 빠르게 끝내야 앞으로 다가올 행사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눈이 차갑게 빛을 발했다. 말라 죽어 얼어버린 장미 같은 눈빛이었다.
* * *
황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갇혀있는 방에 들어섰다. 분리된 철창 너머로 그들의 초췌한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지난 몇 주 간 이 방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했다.
기본적인 침구와 생활이 가능한, 감옥치고는 넓은 곳이지만 그래도 감옥이었다.
귀족으로서 나름 호사를 누리던 눈높이에 맞을 리 없다.
그들은 황후를 보자마자 호소하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저희는 다 당신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어리석게도 꾐에 넘어가서!”
“그래야만 한다기에 그런 줄 알았지요. 저희는 하이디를 믿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잇따른 호소는 귀따갑게 머리를 울렸다.
그들의 한결 누그러진 태도는, 정말로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닌 정말로 버려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리라.
황후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어떤 인간은 짐승과 같다. 채찍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알아먹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도 있다.
황후는 그게 자신의 부모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론, 그게 그들뿐만은 아니겠지만.
황후는 이미 벌을 받은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들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갔다.
패터스 자작 부부도 그래야만 했다. 어리석게도 스스로 자신들의 자격을 내팽개쳤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었어요.”
황후가 냉담하게 그 말을 떨어뜨리자 어머니가 부르짖었다.
“에리카!”
“죄인의 몸으로 어찌 감히 황후의 이름을 부르지요?”
“어찌 부모를 이렇게 대한단 말입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두 분은 죄를 지어 이곳에 갇혀 계신 거예요. 제 비위를 거슬러서가 아니라요. 그 결정을 한 건 황태자죠. 저도 그 결정에 동의하고요.”
황후의 표정에 조소가 밀려 올라왔다.
“황후의 부모고 황제의 장인이라며 무엇을 해도 처벌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무엇을 해도 결국은 용인될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에 가담할 수 있을까.
황족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한낱 하급 귀족에 불과한 이들이 무슨 배짱으로.
“제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거라면, 책임지고 바로 잡아야겠지요.”
황후는 그들을 향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서명하세요.”
“이, 이게 뭡니까.”
“작위와 재산을 모두 에드몬트에게 양도한다는 증서예요.”
황후가 생각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가문의 가주가 아닌 귀족은 역할이 상당히 제한된다.
또한 에드몬트는 가주로서 가문의 구성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짐이 무거워지겠지만, 하는 수 없다.
패터스 자작 부부는 모든 권한과 재산을 잃고 아들에게 귀속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의 통제하에서.
하지만 패터스 자작은 아직 중년이었으므로, 작위를 물려주기에는 젊었다.
“그 애는 너무 어려요! 가문을 책임질…… 준비가 못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아버지께는 가문을 책임질 자격이 없는걸요.”
맑은 목소리는 또렷하면서도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사람은 환경이 변해야 변하는 법이지요. 은퇴하면 욕심도 고집도 좀 사라지실 거예요.”
황후는 환하게 웃었다.
“부디 영지로 돌아가셔서 앞으로는 자중하고 사세요. 앞으로 10년간 두 분은 제 허락 없이 영지를 벗어나지 못하실 테니까요.”
“황후 폐하!”
어머니가 외치자 황후는 그녀를 냉담하게 쳐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제 부모시고 제 아이들의 조부모시며 또한 제 동생의 부모시지요. 그래서.”
황후는 사납게 내뱉었다.
“두 분께 합당한 대우를 해드릴 수 없다는 게 안타깝군요.”
“에리카, 네가, 네가 정말 크게 변했어.”
아버지가 충격을 받은 듯이 숨을 들이켰다.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를 어머니가 재빨리 받아내었다.
그녀는 에리카를 향해 원망의 시선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순하고 갈등을 싫어하는 그녀는 늘 에리카가 져주기를 바랐으므로.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동조하면서 자신의 편의를 챙겨온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의 촌극이었다. 그 극 속에서 어김없이 황후는 악역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니시아나가 제대로 본 모양이야. 내게도 악녀의 자질이 있었어.’
변하기는 한 것 같다. 십여 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이토록 냉정하게 굴지는 못했을 테니까.
“다시 뵐 날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건강하시길.”
황후는 인사를 남기고 그대로 감옥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가 나가자 치료사가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며칠간 이곳에 더 머물 것이다. 그리고 곧장 영지로 돌려보내질 터였다.
밖에서는 파레사가 황후를 맞이했다.
“잘 끝나셨는지요?”
파레사의 물빛 눈동자는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 말을 다 했다. 하지만 조금은 마음이 쓰라리구나.”
“어째서요?”
너무 과한 처분을 내리셨다고 생각하나. 파레사는 고민했다. 하지만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들을 진작 단속했으면 상황이 달랐을까 싶더구나.”
“패터스 자작께서 단속한다고 말을 들어먹으실…… 아니, 들어먹을 분입니까.”
파레사는 말을 고쳤다.
“그건 아니겠지? 황후의 부모답게 교양 있고 겸손한 분들이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곧 들이닥치실 제 부모님도 그리…… 교양 있는 분들은 아니셔서요. 교양 대신 성격이 있으시지요. 어머니 쪽이 특히.”
뒤나미스 여성답게 자기주장 강하고 성격이 셌다. 아버지는 그에 반해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황후의 부모와는 정반대였다.
“그래도 자식을 잘 팔아치웠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니잖니. 네가 걱정되어 방문하신다는 게 아니냐.”
“……오시는 건 괜찮은 데 사고는 좀 안 치셨으면 좋겠네요.”
물론 황후와 달리 파레사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벨로나 나이트인 그녀는 뒤나미스에서 존경받는 위치였고, 부모라 할지라도 벨로나 나이트를 향해 예우를 갖춰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보다 파레사, 슬슬 시간이 되었지 않니?”
“아, 예.”
“어서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은 아니로구나. 신혼도 안 되었는데 벌써 10년 넘게 산 부부처럼 시들해.”
황후가 눈을 흘기자 파레사는 변명했다.
“아니, 기대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이 일이잖아요. 저는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고요.”
“황태자가 좋기는 한 거지? 그의 돈이 좋은 게 아니라?”
“둘 다 좋은데요. 아무튼 가보겠습니다.”
파레사는 꾸벅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황태자의 강력한 요청으로 파레사는 일주일에 사흘, 빠른 퇴근이 가능해졌다.
퇴근 후 그녀가 방문할 곳은 당연히 황태자궁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데이트가 예정된 날. 설렐 법도 한데 파레사가 태연하게만 보이니 황후로서도 의문스러운 것이다.
정략 결혼도 아니고 연애 결혼이지 않은가.
하지만 파레사는 원래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못 보는 성미였다.
업무가 완전히 끝나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황태자였다.
파레사는 늦지 않기 위해 발길을 서둘렀다. 날 듯이 빨랐다.
황태자궁에 도착하자마자 시녀장이 부리나케 그녀를 안내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어느 순간부터 파레사에 대한 태도가 엄청나게 공손해진 그녀였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황태자가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시계는 정확히 약속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서 와.”
응접실 안은 온통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꽃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찻잔 세트가 놓여 있었다.
황태자는 파레사에게 앉으라 권한 뒤 차를 따라주었다. 파레사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새로운 취미가 생기셨나 봐요.”
“고단한 이의 몸을 차로 달래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지.”
은은한 향취가 목구멍을 통해 스며들어 위장에서부터 몸을 녹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은 차네요. 황후 폐하께도 추천해드려야겠어요.”
파레사는 직업의식으로 대답했다. 그 순간 황태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녀는 감지하지 못했다.
파레사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에게 이야기했다. 황태자가 늘 그녀의 일과에 대해서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물론, 파레사의 일과는 그가 흥미를 느낄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게다가 말의 대부분은 ‘황후 폐하께서’라는 수식어로 시작되었다.
심지어 파레사는 이렇게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분명 마음이 많이 좋지 않으실 거예요. 즐겁게 해드릴 방법이 있을까요?”
“……나한테 그걸 꼭 물어봐야겠어?”
그 말에 섞인 불만을 파레사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요? 잘 생각해봐야겠네요. 아직 한 명이 더 남았으니까.”
하이디. 황후는 아직 그녀에 대한 처분을 결정짓지 않았다.
황후의 부모도 황족도 아닌 하이디는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후로서는 그 수위를 가늠해야 할 터.
황태자는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하지 못하는 기색이다.
파레사는 하던 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껏 그들은 만나면 늘 황후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말을 꺼냈다.
“하이디의 남편이 찾아왔더군.”
“아, 황태자 전하의 측근이었죠. 그가 뭐라던가요.”
“아내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음은 알고 있으나, 부디 벌을 나누어 받길 바란다고 하더군. 나는 그에게 이혼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편의적인 발상이로군요. 아이도 있는데 그게 쉽겠어요?”
“그는 유능하고 총명한 자야. 그 때문에 중히 쓰려고 했건만 아내가 걸림돌이잖은가.”
황태자는 그들의 가정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다. 사실 그게 그의 본모습이기도 했다.
파레사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이디는 운 좋게도 좋은 남편을 만났군요. 게다가 똑똑해요. 사실상 선처를 요구하는 거잖아요. 자신이 유용한 자라는 걸 아니까.”
“얼마나 대단한 마음인지 한 번 시험해봐야겠군. 새로운 혼처 자리를 그에게 제시하면 어떨까. 그게 하이디에게도 가장 큰 벌이 되지 않겠어. 어머님은 제 손으로 대단한 벌을 내리시진 못할 테니까.”
“그녀의 자리를 다른 여자로 대체하게 하는 거로군요. 하긴 남편이 없으면 그녀는 평범한 하급 귀족에 불과한걸요.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조금 수위가…….”
그렇게 했다간 복수로서의 목적은 달성하겠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황태자의 도덕성에 흠집이 날 수 있다.
“어차피 귀족은 자신의 가문과 영달을 위해서 움직이는 족속들. 그 점만 충족된다면 사소한 도덕쯤은 무시하는 자들이지.”
온화한 얼굴로 차갑기 짝이 없는 말을 꺼낸 황태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파레사를 돌아봤다.
“내게 실망하지는 않았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죄 없는 이와 죄 있는 이를 구분하려고 하고 계시지요. 그건 옳은 일이에요. 그리고 저는 적에게 동정심을 품지는 않는답니다.”
“우리는 생각이 잘 맞는 것 같아.”
“그런가요?”
“그러니 이 일은 그렇게 진행하는 것으로 두고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때.”
새로운 화제를 끌어들여 단번에 종결짓고 바로 하고 싶은 이야기로 넘어간다. 좋은 전략이었다.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황태자궁으로 적을 옮겨.”
이번 대화는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저는 결혼 전까지 황후 폐하의 곁을 지킬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네 머릿속은 온통 황후 폐하 생각뿐인 것 같군.”
“그야 제 일인걸요.”
“일 때문인 게 확실한가.”
“예? 그건 무슨 소리신가요.”
“마치, 네게 황후 폐하가 나보다 중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파레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망설임이 황태자의 표정을 변화시켰다.
가면처럼 두른 온화함이 가신 얼굴에 스산한 기운이 깔렸다.
“어머님을…….”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혹시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많은 이해관계가 있지. 나는 아직 황제가 아니고.”
만약 그가 황제고 이해관계가 없다면 어쩌기라도 할 거라는 소린가?
파레사가 경계하듯 그를 쳐다보자 황태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나는 충동을 제어할 줄 아니까.”
“하지만 여전히 화난 얼굴이신걸요.”
“……그럼 내가 억지로 웃어야겠어?”
“그건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제가 황후 폐하를 중하게 생각하는 건 맞지만, 그게 전하보다 더 그런 건 아니라는 거.”
모호한 양다리성 대답에 황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그는 왠지 차가운 투로 내뱉었다.
“오늘은 이만 가봐.”
“예…….”
왜 쓸데없는 소리를 꺼내서 다툼으로 끝을 맺는지, 황태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파레사였다.
‘생각이 잘 맞기는 무슨.’
엄청나게 안 맞는 게 틀림없다.
* * *
하이디의 남편은 황태자가 제시한 혼처 자리를 거절했다.
“아내의 허물을 감싸 안아야 하는 것이 남편의 의무건만, 물건을 대체하듯이 이혼하여 새로운 아내를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에게 내려지는 형벌에 따라, 백작과 백작 가문이 온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또한 감내하겠습니다.”
너무나 비장하고 강경하게 말하는 백작 앞에서 황태자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은 황후에게 전달되었다.
“이혼을 시키려고 했다니. 이 녀석은 가정을 우습게 보는구나.”
저도 이혼하려고 했으면서 황후는 그 사실이 불쾌한 듯했다.
“아직 어리셔서 그래요. 이해하세요.”
“넌 왜 네 약혼자를 그런 식으로 말하니. 싸웠니?”
파레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가 눈을 치켜떴다.
“결혼 준비는 내가 다 하는 데 너는 그저 황태자와 잘 지내기만 하면 될 것이지, 싸우긴 왜 싸워?”
“황태자 전하가 황후 폐하의 욕을 해서요.”
그 말에 황후는 즉각 분개했다.
“뭐라고? 이 자식이 뭐라고 해. 사실 제 눈에 내가 못생겼다던가 그런 이야기였더냐!”
그게 가장 큰 비난이라는 것처럼. 파레사는 거기다 대고 차마 진실을 실토할 수는 없었다.
“네, 비슷한 이야기였어요.”
어디가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잘 싸웠다! 가만두지 말았어야지! 뺨을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냐!”
“……그렇군요. 앞으로 고려해 볼게요.”
차를 두 잔이나 들이켠 다음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황후는 하이디의 처분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냐. 네 부모님이 오기 전에 정리해야 할 텐데.”
“굳이 어떻게 하실 것 없어요. 그대로 감옥에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넣어두고 잊고 계시면 되는데.”
“그 남편이 나한테도 찾아올 기세 같던데.”
“내치시면 되지요.”
파레사의 말은 싸늘하고 사정이 없었다. 황후가 탄식했다.
“네가 황후가 되면 황궁이 살얼음판 같겠구나. 다들 조금이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눈치만 보겠어. 황태자가 잘 균형을 맞춰야 할 텐데. 그 녀석이 그래도 온화하다고 하지.”
“뭔가 한참 잘못 알고 계시는데…….”
파레사는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닫았다. 괜히 들쑤셔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좀 더 온건한 해결책을 내어놓았다.
“하이디를 한 번 만나 보시죠. 그래야 결정하기 쉽지 않으시겠어요?”
황후에게 좀 더 괜찮은 처벌을 받아내는 것은 하이디의 몫이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구나.”
* * *
하이디는 황후의 부모보다 더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한결 허름한 방안에 갇혀서, 그간 햇빛도 보지 못했다. 창문은 굳게 봉쇄되어 있었다.
남편이 자주 면회를 오면서 식사를 챙겨줬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변변치 않았다. 기껏해야 빵과 수프뿐.
그녀는 황후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눈에 뭐가 씐 것 같았어요. 황후 폐하를 평생 잃는다고 생각하자…….”
“네가 나를 가진 것 같더냐. 그러니 잃는 거라 생각한 것이고?”
황후는 냉엄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네가 잃는 건 내가 아니라 내 곁에 있으면서 네가 얻게 될 특권 아니더냐.”
이미 하이디는 많은 것을 받았다. 하급 귀족 출신으로서 감히 바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나를 잃게 될 줄 알았다면 내게 그리 함부로 행동했겠니.”
파레사 앞에서 보였던 황후에게 잘못을 돌리고 탓하는 듯한 말과 행동.
하이디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도 황후가 자신을 내치지 않을 거라고.
마치 황후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신세라도 된 것처럼 여기면서. 황후는 단지 그녀를 감내하고 있었을 뿐인데.
파레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황후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파레사는 황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정한 규칙과 편견, 억압을 떠나 말해주었다.
황후는 더 이상 관대해질 필요도 없었고 무언가를 참아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하자 오히려 삶은 훨씬 더 나아졌다.
하이디가 흐느꼈다.
“제가 교만했어요. 하지만 제 진정을 알아주세요! 그 오랜 세월 황후 폐하를 섬기면서 제가 한 일을……. 함께 버텨냈던 시간들을.”
“네게 진정은 있었지. 그리고 나는 진정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버텨내던 시간의 마지막에서 하이디는 황후를 두고 적의 손길을 받아들여 도망쳤고 황후는 이해했다. 그녀가 자신을 탓하던 것까지도.
하지만 그 이해는 마음으로부터 하이디를 밀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굳어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속성의 것이었다.
돌아왔을 때의 하이디는 떠나기 이전의 그녀가 아니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본분에 맞게 행동했어야 했다. 황후의 친구인 척 주제넘게 굴 게 아니라.
“하이디, 황후는 나지 네가 아니고 네게 주어진 것들은 그저 그 부산물로서 얻은 것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들을 넌 그저 당연히 받아들일 뿐 고마움은 금세 잊고 말았지. 네가 본디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황후는 냉담하게 내뱉었다.
“앞으로는 네 삶을 살려무나. 나와는 상관없는 너만의 삶을. 운 좋게도 네게는 좋은 남편이 있으니.”
“황후 폐하!”
“또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황후는 등을 돌렸다. 섭섭함이나 배신감 때문에 내린 결단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자는 곁에 둘 수 없기에 내려진 선택이었다.
감정이 아니라면 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이디는 어떤 용도로도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친구이길 포기한 이상, 그녀를 내치는 것은 당연했다.
* * *
하이디는 제도에서 내쫓겼다. 2년간 황실 소속의 농장과 과수원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변변찮은 숙소에 거친 음식, 그리고 노동까지. 귀족 여성으로는 대단히 힘든 일이리라.
물론, 남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그나마 관대한 처분이었다. 그 남편도 만만치 않게 황태자에게 부려 먹힐 테니까.
과로사할지 모르니 미리 유서를 쓰라고 권했다고 들었다.
“노동을 하다 보면 제가 누린 것의 가치를 알게 되겠지.”
황후가 냉담하게 말했다. 종종 사람이 내려가 그녀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보고할 테니, 결코 편한 시간이 되지는 못할 터.
하지만 노동은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니 하이디에게도 좋은 일이리라.
가식과 권모술수로 가득한 제도의 사교계는 정신을 나쁘게 만드니까.
“그 후로 제도로 올라오면요?”
“수많은 귀부인 중 한 명이 되겠지.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란다.”
“하긴. 그 고생을 하고 나면 그녀도 황후 폐하를 친구로 여기지 않겠죠.”
“배신한 건 그녀지 내가 아니야. 용서하지 않았다고 나를 도리어 비난한다면 그 또한 뻔뻔스러운 일이겠지. 물론, 그런 뻔뻔한 자들이 한두 명은 아니다만.”
“이래저래 비난당할 거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겠지요.”
“맞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쫓아낸 황족들에게도 농사일을 시킬까 해.”
“다들 노인들이라 앓는 소리를 할 텐데요.”
“적당한 운동은 건강에 도움이 된단다. 뭐, 건강에 나쁘더라도 그들이 빨리 죽는다면 국고에도 도움이 될 테지.”
“정말 공감이 가네요.”
“평생 남을 흠집 잡으며 쓸모없이 살아왔을 노인들이니 농사라도 지어야 좀 쓸모 있게 될 게 아니냐.”
황후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지 황태자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직접 가져다주려무나. 그리고 황태자가 또 내 뒷말을 하거든 전에 말했듯 뺨을 한 대 쳐도 좋다. 네가 치면 처벌하지 않을 테니까.”
“얼굴은 좀. 대신 다른 데를 시도해볼게요.”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황후를 어떻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좀 심했다고 생각한 터였다.
이제 황태자를 가르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뒤나미스 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려 한 황태자가 감수해야 할 것이기도 했다.
* * *
“안드레.”
비로소 정한 호칭을 파레사가 꺼내자 황태자의 입가에 미소가 비쳐 났다.
“평범하지만 마음에 들어.”
“드레스로 할까 했는데,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아이들 이름은 내가 지어야겠어.”
“너무 멀리 가시는군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인데.”
“결혼 이전에 데이트도 제대로 못 했지.”
황태자가 파레사의 손을 잡아당겼다. 황태자가 앉아 있는 곳은 널찍한 소파.
파레사는 자연히 그의 곁에 앉게 되었다.
“이건 처음 보는 소파로군요.”
파레사는 제가 앉은 자리를 두리번거렸다. 황태자의 처소에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소파다.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지.”
“편지는 읽어보셔야지요.”
황태자는 못내 파레사가 넘긴 편지를 뜯어서 읽어내렸다.
“쫓겨나는 걸로 끝난 줄 알았을 텐데, 그들에게는 날벼락 같겠군.”
“그것도 벌이겠지요. 그들은 앞으로도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하게 될 거예요. 할당량을 정해주는 게 어때요. 일하는 보람이 있을 거예요.”
파레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벨로나 나이트에게 감히, 그런 추문을 붙이다니.
뒤나미스였다면 죽여도 시원치 않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니까 파레사도 양보하고 있는 거였다.
“네 눈 밖에 나면 힘들겠어.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손 떼고 물러나기까지 상대는 가열찬 보복을 당할 테니까.”
“제게 복수 당할까 봐 무서우신 게 아니라면 그걸 꺼리실 필요는 없지요.”
“무서운 게 아니라…… 자극적이군.”
황태자가 파레사의 미소 지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어루만졌다.
파레사가 차갑고 독하게 굴수록 그는 오히려 더욱 구미가 당기는 듯했다.
그는 애초에 유순하고 부드러운 여자에게 끌릴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단단하고 묵직한 것만이 던져졌을 때 그의 호수를 흔들 수 있다.
눈앞에서 깜빡이는 물빛 눈동자가 한달음에 가까워졌다. 누가 접근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둘 다 일지도.
그들은 부드럽게 키스했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숨을 나누는 것은 마치 서로의 영혼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황태자는 잠시 후 속삭였다.
“몰아치듯 일을 했더니 요새는 좀 한가해.”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요새 좀 초췌해진 것 같다고 파레사가 걱정했다.
황태자의 미모는 국정 따위에 훼손되어선 안 될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급하고 중대한 일이라도 그 때문에 국보를 망가뜨려선 안 될 것이다.
“제 초상화가 아니라 전하의 초상화를 팔아야 하는데…….”
그 중얼거림을 들은 황태자가 옅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랬다간 진위를 확인하러 황궁 근처에 다들 진을 치고 있을걸.”
“그러면 곤란하겠군요. 보안에 문제가 될 테니까.”
“내 초상화를 그리려다가 실패한 화가가 제 붓을 꺾었다는 소문을 알고 있어?”
“예, 들은 적 있어요. 전하의 미모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히 구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지요.”
“사실이야.”
“놀랄 것도 없는 일이네요.”
“그러니 내게 조금 더 가치를 둬. 누군가를 나와 나란히 세우지 말고.”
황후와 파레사 안에서 동급이라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파레사는 웃었다.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겠지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처럼, 가까이 있을수록 마음이 더 기우는 게 아니겠어요?”
“결혼 이후에는 어머님과 생활이 분리되도록 해야겠군. 빨리 유일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황태자는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입 맞추었다.
파레사는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일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같이 있는 몇 분만으로도 파레사를 점점 더 매혹시켰으니까.
“내일은 나들이를 갈까.”
“어디로요.”
“어디든.”
파레사는 그렇게 말해도 황태자가 데이트에 있어서 방만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계획적인 남자였으니까.
“기대해 볼게요.”
* * *
하지만 그들의 나들이는 결론적으로 말해 이뤄지지 않았다.
파레사의 부모님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시간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그들은 곧장 황후궁으로 안내되었고, 파레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파레사, 잘 지냈니?”
우아하고 강직한 어조. 오랜만에 만난 딸이라고 해서 와락 끌어안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꼿꼿하게 등을 세운 여인을 향해 파레사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어요, 어머니?”
파레사와 같은 물빛 눈동자. 하지만 그녀는 착해 보이는 파레사와 달리 고집스럽고 도도한 얼굴이었다.
완전히 색이 달랐지만, 동안인 것은 비슷했다. 그녀는 고작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으니까.
그녀는 왕태녀와 비슷하게 뒤나미스의 예복 차림이었다. 드레스가 아닌 바지를 입었다.
“파레사.”
뒤이어 나타난 아버지를 향해 파레사는 눈을 돌렸다.
“오셨군요, 아버지.”
“그래, 생각보다 일찍 당도했구나.”
갈색 눈동자는 걱정스러운 빛을 품고 있었다. 벌레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성격처럼 보였다.
파레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섞어놓은 것 같았다.
“네 옷이 대체 그게 뭐니.”
어머니가 못마땅한 듯 눈꼬리를 치켜들었다. 파레사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막 데이트를 나가려던 참이라, 시녀들의 성화에 아이보리 레이스가 달린 스카이블루 드레스를 입고 단장한 터였다.
파레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왜요, 예쁘니까 좋죠.”
“굴욕적이구나! 벨로나 나이트가 그렇게 공작새마냥 치장하다니! 제국에서는 벨로나 나이트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가?”
“이 드레스도 제가 걸고 있는 보석들도 다 비싼 거예요. 값으로는 예우를 다했죠.”
너무 제국에 익숙해졌나? 딸이 호사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나온 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도리어 분개했다.
“너를 인형 취급하고 있지 않으냐! 기사를 이렇게 대하는 게 어딨다고!”
“저는 전속 시녀인데요.”
“그래, 그 또한 할 말이 많구나. 아무리 사명이니 뭐니 해도 시녀 따위를!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파레사가 항변했다.
“나름 전문직이에요. 시녀를 비하하지 말아 주세요.”
자신도 전속 시녀가 되고 나서야 시녀가 맡은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파레사는 보통 시녀가 아닌 전속 시녀였고 황후가 그녀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까지 떠맡기기도 했다.
어쨌든 시녀란 건 당장 이곳을 박차고 나가도 어느 귀족가에건 취직할 수 있는, 경력이 쌓이는 전문직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왜요, 예쁘기만 한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싸늘한 눈총이 돌아오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황태자란 자는 네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긴 하는 거니? 네 모습을 보니 의구심이 드는구나. 그 불편한 모습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웃으며 애교떠는 것?”
“제가 내숭을 떨진 않았어요. 그리고 애교를 보인 적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애교라고 느끼셨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러니 제가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저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파레사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저는 이런 제 모습이 좋아요. 아, 물론 가끔이요. 늘 이러고 다니진 않는다고요.”
어머니가 이마를 짚었다.
“나는 너를 벨로나 나이트로 길러냈다. 너는 나의 자랑이었어! 그토록 중대한 일을 맡았던 네가……. 고작 누군가의 옆자리에 머무르다니.”
아무래도 어머니는 잘나고 잘살던 제가 남자를 잘 만나 신분 상승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을 비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널 뒷받침하는 남자를 만나기를 원했는데.”
“어머니, 그건 편견이세요.”
파레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도 충분히 저를 뒷받침할 수 있어요. 그는 근면하고 부유하거든요. 그 두 가지는 대부분을 가능한 일로 만들어주지요.”
물론 황태자가 자신을 뒷받침할 일이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황가의 권능으로 통제받는 제국은 대개 평화로웠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무력적인 사태에 황실까지 관여하는 일은 드물었다.
파레사가 검을 휘두를 일도 많지 않을 테고 잡일은 시중인들이 처리할 것이다.
“말은 잘하는구나. 검을 쓰는 대신 입을 쓰는 법을 배웠어.”
어머니는 눈을 흘겼지만, 파레사는 그녀의 입가에 비친 희미한 미소를 읽었다. 좋은 징조였다.
“자식의 성장을 보는 기분이 어때요?”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그를 한 번 보자꾸나.”
어머니는 여전히 엄숙한 말투였다. 하지만 파레사는 그녀의 기세가 확연히 누그러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부디 예를 갖추시기를. 사위 이전에 그는 제국의 황태자예요.”
“나 역시 내가 뒤나미스의 귀족이란 걸 잊지는 않았단다.”
그리고 황태자의 예언은 곧 이루어졌다.
그가 접견실에 등장한 순간, 빛이 이는 듯한 반짝임이 보였다.
파레사는 느리게 눈을 깜빡대며 그 빛 속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평소보다 힘을 줬군.’
마치 무도회에 나설 법한 예장이다. 아니, 기사단 행사인가.
가슴 부위에 꽃과 새 문양이 금 자수로 수놓인 예복은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웠다.
그 위에 무게감을 덧대어 주는 짙은 색의 어깨 장식과 망토가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지 않게 의상을 잡아주었다.
외모는 말할 것 없이 완벽했고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파레사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 한껏 멋을 낸 모습이다. 그의 성의는 파레사의 눈과 마음을 모두 흡족하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파레사의 부모를 완벽하게 현혹시켰다.
아버지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고 어머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고된 훈련으로 마음이 단단해진 벨로나 나이트도 아닌 그녀는 황태자를 보고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취향도 유전이다.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동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태자는 우아하게 인사를 건넨 뒤 바로 파레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끌어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파레사는 하마터면 ‘왜 이러세요!’하고 외칠 뻔했다. 그는 간지러운 짓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부모님 앞에서 단란한 모습을 보여야 안심하시지 않겠느냐고.
‘아아, 그렇지.’
파레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황태자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오셨어요, 안드레?”
“그래, 파레사. 부모님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너무도 근사하여 파레사는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어쩐지 영혼이 달아난 부모님들과 몇 마디 대화를 마치고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정이라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황실 가족과 석찬을 함께하시는 게 어떤지요.”
파레사가 먼저 냉큼 대답했다.
“물론이죠, 두 분 모두 좋아하실 거예요.”
“그, 그래요.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도 기쁨이겠네요.”
어머니가 헛기침했다.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비현실적인, 하늘에서 온 무언가가 눈앞에 떨어져 말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것은 미천한 인간과는 말을 섞지도 않을 천상의 존재로 느껴졌다.
황태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고 마음의 준비도 했건만 이 모습은 너무도 과했다.
“그럼.”
떠나기 전 그는 파레사에게 다정한 눈인사를 건넸다. 돌아서는 태마저도 완벽에 가까웠다.
파레사는 저 잘 꾸민 모습을 부모님이 방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조성해낸 황태자의 기민함에 새삼 놀랐다.
‘치장술이 황후 폐하 이상인 것 같아.’
이 평가를 황후가 듣는다면 굉장히 불쾌해하겠지만.
황태자가 장악한 공기가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네 남편 말이다.”
“아직 남편 아니에요.”
“그래, 약혼자.”
어머니는 엄숙한 표정으로 진심을 꺼내놓았다.
“네 복은 모조리 제국에 있었나 보구나. 저런 남자를 남편으로 두는 것은 모든 여자들의 기쁨이지.”
“……그만큼 잘생겼다는 뜻이죠?”
“그래. 네 아버지도 첫눈에 반할 만큼 잘생겼었지.”
과거형이었다.
“하지만 저 황태자는 그 흔히 쓰이는 표현조차도 어색할 만큼 대단하구나. 단순히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야. 태도, 자세, 목소리, 복장.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구나. 모두의 눈에 완벽한 존재로 보이겠어.”
“그럼요. 제 눈에도 그런걸요.”
“대체 어떻게 그를 사로잡은 거니?”
어머니의 눈길이 파레사를 아래위로 훑었다. 내 딸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의문과 의심.
벨로나 나이트는 부모조차도 우러러보는 존재, 그녀는 단 한 번도 파레사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파레사가 뒤나미스에서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건, 황태자의 등장 한 방에 흐려지고 만 것이다.
누구를 붙이든 과분하게 느껴질 만한 남자였다. 어떤 인간 여자도 그 곁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에.
파레사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내쉬며 말했다.
“강함으로요.”
“권위적이고 여자를 제 소유물로 알기로 유명한 제국의 남자가 강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냐?”
“나도 당신이 강해서 좋았는데요.”
“그렇지, 당신도 제국 남자였죠.”
대뜸 끼어든 남편에게 어머니가 눈길을 주었다.
갑자기 등장한 현실감 넘치는 뭔가를 바라보는 듯이. 아버지가 항변했다.
“그 눈길은 뭔가요.”
“아니요, 당신도 관리를 좀 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 꽤 번지르르하게 나이 먹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불만스레 얼굴을 더듬었다.
“그, 관리를 한다고…… 그렇게 되겠는지.”
“그건 그래요.”
한숨을 쉰 어머니가 파레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더구나. 널 보는 시선이 따뜻했어. 꾸밀 수 없는 눈빛이지.”
“그럼요. 사랑도 안 하는데 왜 저랑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황태자씩이나 되는데 그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뒤나미스의 여자와 맺어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제국 내에도 그와 맺어질 만한 귀족 영애들이 즐비하건만.
“뒤나미스의 군사력인 너를 탐내는 걸 수도 있지. 그가 욕심 많은 자라면 말이다. 그리고 황태자란 사랑이라는 말에 가까운 지위는 아니잖니.”
“황태자도 사랑을 할 수 있죠. 그리고 모든 걸 다 가졌기에 당연한 듯이 사랑도 가지려고 할 테고요.”
“그게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만큼 가치 있겠지요. 그의 인생에서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찾기 힘들 테니까.”
“네 말대로라면 그가 그리 조신한 편은 아닌 것 같구나. 하지만 마음에 든다.”
“저도요.”
파레사가 웃자 또 뭐가 못마땅한지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 죽는구나. 아까 그를 보면서 네 표정이 아주 헤벌쭉하던데.”
“헤벌쭉이라니요. 감탄하는 표정이라고 말씀해주시지요.”
“네가 왜 그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아. 너와 네 약혼자 사이에는 깊은 이해와 교감이 있어. 그건 단순히 타오르는 듯한 한때의 감정이 아니야.”
어머니는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모든 게 납득되는 그 얼굴을 보았다.
“자식을 낳으면 그를 닮아야 할 텐데.”
“……어머니가 할 소리세요?”
어머니라면 자신을 닮은 아이가 나오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저 미모의 반만이라도 구현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엄숙한 눈으로 파레사의 전신을 훑었다.
“내 핏줄에서 그런 아이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거다.”
“……노력해 보지요.”
그게 노력으로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태교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분명했다.
어떤 꽃이나 그림,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완벽한 존재가 곁에 있을 테니까. 그때면 늘 항상.
아득한 광경이 덮쳐왔다. 언젠가, 그리고 곧 다가올 광경.
파레사는 그 광경이 마치 예언 같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예언.
어쩐지 가슴이 벅차왔다.
막연한 계획만 있었지 한 번도 제대로 떠올려 본 적 없던 자신의 미래가 이곳에 있었다. 그 사실이 생생하게 실감 났다.
아버지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는 아름답고 완전한 이로 보여. 언제나 흔들림 없이 너를 뒷받침해줄 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네 안목을 의심한 적이 없어. 분명히 네가 선택한 이는 그럴 만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미소 짓는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곁에서 어머니가 불평했다.
“너무 평가가 이른 거 아닌가요. 우리는 아주 잠깐 그를 봤을 뿐이잖아요.”
“어머니는 황태자 전하와 눈도 맞추지 못하시던데요.”
“그야 잘생겼잖니.”
어머니가 헛기침했다. 그녀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우리는 아직 네가 섬기는 그분을 보지 못했구나. 이 궁의 주인 말이다.”
황후는 그녀답지 않게 가슴이 너무 떨리고 긴장된다며 도망치듯이 급히 황후궁을 떠난 터였다.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인사를 나누자면서.
그 때문에 파레사의 부모님은 황후궁에는 들어왔지만, 정작 황후를 보지는 못했다.
“석찬에서 보시게 될 거예요. 좋은 분이세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네 상관이 시어머니가 되는 거니 적응할 필요도 없겠어.”
“……그렇지요.”
황태자비가 되기로 하면서 황후를 처음 맞닥트리는 거였다면 확실히 힘들었을지도.
미리 다 겪어놔서 다행이었다. 그저 이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되니까.
자연스러우면서도 평온한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운명의 그 날까지.
* * *
석찬에서 황제 부부와 파레사의 부모는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로 인사를 나누었다.
갑작스럽게 조성된 자리지만 모두가 예의를 갖추며 담소를 나누었다.
파레사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꼈다. 황제 부부와 자신의 부모님이 함께 앉게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그려본 적 없었으니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렀다. 그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황태자였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모두가 그 분위기에서 어긋나게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황제는 건강 상태를 명목으로 금세 자리를 파했고, 차를 마시던 어느 순간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는 무척이나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정말로 놀랐습니다.”
“어머, 무슨 그런 말씀을.”
입을 가리며 웃는 황후는 장미 꽃봉오리 같았다.
황후는 전형적인 제국 귀족 여성 같은 차림새에 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미고 다니는 걸 즐겼다.
실용적인 뒤나미스의 기질에는 맞지 않는 타입인 데다가 신분 상승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는 아버지는 제쳐두고 어머니라면 황후를 좋아하지 않을 줄 알고 걱정했건만, 어머니는 왕태녀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줄곧 황후를 미소로 대했고 그 순수한 호의에 황후도 미소를 보였다.
석찬이 파할 무렵 황후는 그들에게 말했다.
“두 분을 위한 처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당분간 편히 머무시지요.”
파레사의 부모는 황궁 내에 마련된 귀빈의 숙소로 안내되었다. 그것이 예에 맞기도 했지만 황후도 불편했던 게 틀림없다.
그날 밤, 파레사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후 폐하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의외였다. 둘은 딱 봐도 반대 타입이지 않은가.
“응? 고양이 같지 않니. 요녀라 하더니만 고양이는 원래 그런 느낌을 주는 법이지.”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어쩜 그리 예쁘고 우아할까. 그런 딸이 있다면 삶이 좀 더 흥미진진했을 거야.”
어머니가 파레사를 아래위로 훑었다.
“너도 나쁘지는 않지만, 키우는 재미는 그리 없었거든. 단조로웠지.”
딸을 보는 듯한 관점인가. 그만큼 나이 차가 있기는 했다. 파레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리 오래 키우시지도 않았잖아요.”
“그랬지. 너는 일찍부터 벨로나 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수련했으니.”
“그러고 보니 다른 가족들은 안 오나요?”
파레사에게는 한 명의 언니와 두 남동생이 있었다. 4남매였다. 하지만 그들과는 그리 가깝지는 않은 사이였다.
벨로나 나이트가 되기 전부터 이후까지 파레사는 그리 집에 있질 않았으니까.
“그 애들은 각자 제 일을 해야지. 그렇게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단다. 결혼식 날에는 올 거야.”
“그렇군요.”
“네가 어릴 적에 남동생들을 좀 괴롭혔지. 황태자 전하도 너보다 어리다던데 혹시 그렇게 대하는 건 아니겠지?”
“제가 어떻게 그래요. 그 얼굴을. 그리고 제가 언제 괴롭혔어요?”
“막 네가 뒤통수를 때리고 심부름시키고 그랬다던데? 하기 싫으면 나를 꺾어보든지 라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두 녀석이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랬겠죠. 서열을 잡아줘야 안 기어올라요.”
일찍이 무력으로 집안부터 평정한 파레사였다. 어머니는 파레사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네가 제국의 황태자비라니.”
“아직 아니에요.”
“그래, 나도 아직은 지켜보는 입장이란다.”
“제국에서 귀빈 대접받고 지내시면 좋으시겠어요.”
정작 파레사는 전속 시녀로서 소처럼 일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웃었다.
“즐거운 휴가 기간이 되겠구나.”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파레사는 황후의 닦달 때문에 신부 수업이란 걸 받았는데 이전에 이미 특훈을 받은 사교춤을 제외하면 그리 곤란을 겪지 않았다.
재능 없는 건 여전했다.
파레사는 사교계에서 중요한 소양으로 여기는 춤, 그림, 자수 등등에 딱히 성취욕이 없었다.
그냥 그럭저럭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의욕 없는 태도에 황후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네 좋을 대로 하려무나. 뭐, 굳이 그런 걸 잘해야 할 필요는 없지.”
이전과는 한결 달라진 태도였다. 파레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리 관대하세요?”
“관대해도 불만이니?”
황후가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아니요, 단지 원래라면 잘 좀 배우라고 닦달하실 만해서요.”
황후는 해야 되는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는 황후가 되기 위해서 많은 수업을 받았단다. 그 모두를 잘 해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압박이 있었지. 그 때문에 밤을 새우면서 애를 썼어. 흠 잡히지 않기 위해서.”
“고생스러우셨겠어요.”
“그래, 게다가 무용한 일이었지. 나를 흠 잡으려는 이들은 어떻게든 흠을 잡더구나.”
그건 파레사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후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네게 별 쓸모없는 것들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을까. 잘하면 좋겠지만, 못할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돼. 꼭 뛰어날 필요는 없겠지.”
맞는 말이긴 한데 황후답지 않은 너그러움이었다.
“너는 너의 방식으로 자격을 증명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황태자가 너를 선택했지. 그런 네게 내가 꼭 엄격한 시어머니처럼 굴 필요는 없지 않겠니?”
엄격한 시어머니는 되면 안 되지만, 까다로운 상관은 된다는 건가. 파레사는 미심쩍은 기분에 잠겼다.
하지만 좋은 변화였다. 황후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얽매고 짓눌러왔던 것들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니까.
“나는 네가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단다. 물론, 네가 황후가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황후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늘이 사라진 얼굴은 환하고 아름다웠다. 파레사는 그것을 잠시 말없이 들여다봤다.
제가 돕고 그녀가 이룬 결과가 여기에 있었다. 가슴 속 깊이 퍼져나가는 울림이 파레사를 잠식했다.
그리고 이내 스르르 풀려가는 무언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의무와 권능의 제약이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위해서 제가 할 일은 없었다.
황후는 스스로 서 있었다. 한때 그녀를 감싸고 있던 진득한 어둠을 뿌리친 채로.
마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 감동 받았니?”
“아니에요. 그저 행복……하셨으면 해서요.”
간절히도 그것을 바랐던 순간이 있었다. 분노할 만큼. 그 분노는 파레사의 사명을 움직였고, 종내 그들은 여기에 이르렀다.
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파레사 혼자가 아니었다. 손을 내민 건 이쪽일지라도 그 손을 붙잡은 건 황후이니.
“난 지금 그럭저럭 행복하단다. 날 괴롭힌 여자도 죽었고 황족들도 귀족들도 죄 쫓아내고 벌주었으니 말이지. 정의가 구현된 느낌이랄까. 주기적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것도 재미구나.”
“무엇보다도 황제 폐하와도 화해하셨고 말이지요. 언제 이혼 얘기를 했었느냐는 것처럼요.”
황후가 눈을 흘겼다.
“날 감싸려다가 돌아가실 뻔도 했는데 그만하면 되었지. 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그럼 이혼이 쉽니.”
“아직 젊으시니 더 생길지도 몰라요.”
“실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하려무나. 내가 맡긴 서류는 들여다봤니?”
“……지금 볼게요.”
“빨리빨리 해!”
결국은 타박으로 끝났다.
* * *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파레사는 황태자의 호출을 받고 정원으로 향했다. 한낮의 정원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꽃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 그림 같은 모습으로 그가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로.
“어서 와.”
흰색 꽃잎이 살랑거리는 아래에 서 있는 그로부터 향기가 흘러드는 듯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과 그 아래 녹음 진 눈빛. 그늘 아래에서 그 빛은 오히려 짙어졌다.
그는 다가선 파레사 앞에서 천천히 몸을 숙였다. 무릎이 땅에 닿고 새하얀 손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나와 미래를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렇……죠.”
“그럼 내 손을.”
나직한 목소리. 파레사는 다음 순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청혼이었다.
멋쩍은 기분 속에서 파레사는 생각했다.
‘약혼도 했고 결혼식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하지만 황태자는 형식과 절차를 좋아하는 안 그런 듯 보수적인 성향의 남자였다.
적어도 멘트는 전형적이지 않았다. 파레사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네.”
그 손이 닿는 순간 설렜다. 거기에 담긴 온기가 심장에 스며드는 것처럼.
손가락에 무게가 실리고 황태자의 몸이 불쑥 일어섰다.
파레사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펴보았다. 낯설도록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빛을 머금고 있는 듯이 반짝였다.
파레사는 유심히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내 힘이 담겨 있지.”
반지 안에서 녹청의 빛이 일렁였다. 옅지만 포근한 빛이었다.
“저는 드릴 게 없는데 어떡하죠?”
“너를 내게 줬잖아.”
“그렇군요. 제국 최고의 기사를 손에 넣으셨어요.”
“내게 과분한 일이지.”
황태자가 손을 뻗어 파레사를 끌어당겼다. 파레사는 순식간에 그의 품 안에 놓였다. 눈앞에 반듯한 턱선이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파레사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읽을 수 없다고 여겼던 녹청빛 두 눈은 언젠가부터 뚜렷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다정한 애정. 그는 고요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린 언제까지나 함께할 거야.”
파레사는 물론이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가 먼저 입술을 겹쳐왔다.
따뜻한 숨결. 부드러운 입술. 영원이 거기에 있었다.
심장에서부터 샘솟듯이 흘러넘치는 뜨거운 물결이 파레사를 휩쌌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황태자가 열정을 추스르며 물러났을 때 그녀는 불쑥 내뱉었다.
“사랑해요.”
알리듯이 선명하고 확신이 응집된 말.
파레사는 눈을 찡그렸다. 제가 말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내뱉은 말이 그토록 완벽하게 들리다니.
이 상황, 이 감정, 모든 것이…….
그 말을 들은 황태자의 입가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나도, 사랑해.”
완벽한 순간이었다.
* * *
이례적인 결혼이었다. 황태자비가 뒤나미스 인이라는 사실부터가 그랬다.
게다가 뒤나미스의 권능을 가진 전설적인 기사라니. 입에 오르내릴 만도 했다.
연달아 터진 안 좋은 사건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불식시키듯 황태자의 결혼은 제국 전역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
각국에서 몰려온 귀빈들이 자리를 빛내는 가운데 결혼식이 치러졌다. 그중에는 물론, 뒤나미스의 왕태녀와 올로고스의 왕녀도 있었다.
“정말로 결혼을 하는군.”
못마땅하게 말하는 왕태녀에 이어 왕녀가 지나치게 호들갑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파레사, 정말로 결혼 축하해요!”
파레사는 그들을 향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두 분 모두,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레사는 두말할 것 없이 오늘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을 몰라봤을 정도다.
단정하게 틀어 올려진 머리 위에는 백금과 진주,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황태자비의 티아라가 올려져 있었다.
그 아래 물빛 눈동자가 맑게 갠 하늘처럼 반짝였다.
가슴부터 치맛자락에 이르기까지 온통 빛을 머금은 듯한 웨딩드레스는 화려하게 그녀를 장식하고 있었다.
노라와 그녀의 스승 베누스 자작부인이 공을 들인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었다.
그 둘은 파레사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한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제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뒤로 넓게 퍼져 나가는 드레스는 우아했지만 썩 실용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파레사는 황태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파레사.”
하얀 예복을 입고 왕관과 망토를 두른 그는 말할 수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늘 그랬으므로 감흥이 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황태자는 파레사를 본 순간 멈칫거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심호흡한 뒤 내뱉었다.
“아름다워.”
웨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는 건 그도 처음이다.
“진심이시라고 믿을게요. 사랑한다는 말보다 전하께 듣기 어려운 말이었어요.”
“내가 그렇게 표현에 박했나.”
“농담이에요. 그래도 모처럼 꾸민 보람이 있군요.”
“……갈까. 모두가 기다릴 테니까.”
황태자는 그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으로 손을 내밀었다.
파레사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마치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전령이 된 기분이었다.
무대처럼 조성된 웨딩로드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사람들로 가득 찬 그곳에 침묵이 내렸다.
그 경건하기까지 한 침묵 속에서 파레사는 조심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은 이내 연단 앞에 다다랐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주례를 맡은 황제였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흐뭇한 기색을 떠올리다 이내 표정을 고쳤다.
“지금 여기, 두 고귀한 남녀가 하나 되는 자리에 서 있소. 장차 제국을 다스릴 란티어스의 계승자이자 권능의 주인, 내 아들 안드레아스. 그리고 뒤나미스의 권능을 부여받은 벨로나 나이트이자 멘젤 자작가의 파레사. 이는 해신이 맺어준 인연이며 또한 제국과 뒤나미스의 우호를 의미하는 신성한 결혼이오.”
그렇게 시작된 황제의 연설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었음을 공표하오.”
짝짝짝. 갈채가 쏟아졌다. 파레사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어깨를 감싸안으며 떨어지는 부드럽고 정중한 입맞춤. 이어 황태자는 파레사에게 청혼했던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제야 파레사의 정신도 제자리를 찾았다.
“아…….”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낯설고도 벅찬 기분이었다.
“오늘부터 나의 아내로군요. 드디어, 비로소.”
깍듯해진 황태자의 말투에 파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말투가 바뀌셨군요.”
완벽한 입매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렸다.
“황태자비는 황태자에 준하는 지위. 이제까지는 비가 바라는 대로 전속 시녀로서 대우했을 뿐이지요.”
물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의 공대는 어쩐지…… 설렜다. 색다른 기분이다.
이것도 설마 계산인가. 하지만 황태자는 일일이 계산을 두지 않을 만큼 외견만으로도 매력이 넘쳤다.
그가 자신의 남편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이제는 아니라는 거군요. 마음에 듭니다. 황태자 전하는 저보다 어리시잖아요?”
“……그랬지요. 상기해 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파레사는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음껏 어리광부리셔도 돼요. 아내란 그런 존재니까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황태자가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굳이 어리광부리길 바란다면 남편 된 도리로 노력해 보지요.”
두 사람의 입가에 동시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황태자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곤 속삭였다.
“자, 이제 인사하러 가 볼까요.”
* * *
연회장에는 황제가 황태자의 두 이복동생과 함께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워 준비하느라 지친 황후는 그곳에 함께 서 있다가 황제의 배려 속에서 에드몬트와 함께 몸을 뺐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그들은 홀로 있던 왕태녀와 맞닥트렸다.
왕태녀의 시선이 황후의 옆자리에 머물렀다. 에드몬트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 화들짝 시선을 피했다.
“제 동생이랍니다. 그런데 이미 인사를 했던가요?”
“아, 음.”
에드몬트가 말을 버벅이는 동시에 왕태녀가 즉각 응답했다.
“예.”
황후의 눈썹이 치켜 들렸다.
“누구는 부정하고 누구는 긍정하니 수상한 일이로군요.”
“별일 아닙니다. 그는 제가 누군지 지금에서야 알았으니. 저도 그가 황후 폐하의 동생인 줄 지금 알았습니다.”
“그렇군요.”
둘이 우연히 마주쳤나 보다. 황후는 못내 수긍했다. 에드몬트는 왠지 말이 없었다.
다행히 그때 마침 황태자 부부가 등장했다.
왕태녀는 에드몬트를 향한 시선을 움직여 파레사에게로 던졌다. 파레사는 황태자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왕태녀의 미간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황후의 입꼬리가 슬며시 휘어졌다.
“이제는 왕태녀의 차례로군요. 어서 뒤나미스의 후계를 튼튼히 해야지요.”
결혼하란 잔소리가 듣기 싫은 것은 왕태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제 폐하를 닮아가시는군요?”
“보기 좋은 한 쌍이잖아요. 둘 다 행복해 보이고요. 온화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얼음 풀풀 날리는 황태자도 저런 봄바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 왕태녀도 짝을 찾으면 좀 덜 심각해지지 않겠어요?”
황제와 관계를 회복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황후다운 말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오지랖 넓게 물었다.
“왕태녀는 압박이 없나요? 아니면 눈이 까다로운가.”
“압박은 있지만 눈이 까다롭습니다.”
왕태녀의 단호한 말에 황후에게서 당혹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그녀는 부채를 살랑이며 대꾸했다.
“그, 그렇군요. 부디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랄게요. 그때가 되면 꼭 뒤나미스로 초대해줘요.”
황후는 이김에 뒤나미스에 한 번 가보고자 하는 욕심을 끼워 넣었다. 왕태녀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러지요.”
이어 그들은 나란히 새로이 탄생한 황태자 부부에게로 향했다. 황후가 새침한 표정으로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축하해요.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보게 되어서 기뻐요.”
“감사드립니다, 어머님.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황후는 유부남이 되어버린 황태자를 묘한 시선으로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낳지도 않은 아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 결혼까지 해서 아내를 맞이하다니.
옆에서 파레사가 입을 열었다.
“시어머니가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도 어머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황후의 표정이 실룩였다.
“나는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아. 깍듯이 나를 황후 폐하라고 부르렴.”
황태자가 슬며시 딴지를 걸었다.
“그녀는 이제 황태자비이니 저와 동등하게 예우를 갖춰주시지요.”
“아아, 그랬죠. 나는 그녀를 내 딸처럼 여길 생각이에요.”
파레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황후궁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탓하지 않으시겠군요.”
“지금 내 딸과 비슷한 수준으로 뛰놀겠다는 뜻인가요?”
잠깐 투닥거리며 대화를 나눈 황후는 이내 황태자와 함께 황제 쪽으로 움직였다.
“저는 잠시.”
따라가기 전 파레사는 왕태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태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잘 사시기를. 친구로서 하는 말입니다.”
파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의 공대보다 왕태녀의 공대가 더욱 놀라웠다.
“제가 황태자비가 되었다는 걸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네요.”
“내 눈으로 봤으니 어쩌겠습니까. 이제는 아랫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니.”
왕태녀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동등한 관계고 친구로서는 더욱 잘된 일이겠지요.”
파레사는 그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물론, 서로 볼 날은 많지 않겠지만요.”
그 말을 꺼낸 것은 파레사가 아니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금세 돌아온 황태자가 파레사를 감싸 안듯이 곁에 섰다.
왕태녀가 싸늘하게 지적했다.
“아내의 친구를 견제하는 것은 좋은 버릇이 못됩니다.”
“그 친구가 보통 친구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일찍이 검을 들고 달려든 전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잘 끝난 일을 꼬투리 잡는 건 속 좁은 짓입니다.”
“왕태녀 못지않게 내 속이 좁다는 것을 모르셨나 보군요.”
파레사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여전히 사이가 나쁘시군요. 제가 이해해드리도록 하지요.”
뒤이어 파레사의 가족들이 달려왔다.
파레사의 두 남동생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파레사를 보고 거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파레사 맞아?”
“다른 사람 같은데.”
파레사의 어머니가 핀잔을 줬다.
“예를 갖추렴. 이제 황태자비 전하시란다.”
파레사의 언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파레사를 한 번 안았다가 놓았다.
“결혼 축하드려요. 앞으로는 평온한 나날만이 있기를.”
“모두 감사해요.”
수없는 축복과 인사가 쏟아졌다. 그 모든 게 끝날 때쯤 하늘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파레사는 이 다음 순서가 뭔지 알았다. 그들은 함께 황태자 궁으로 향하고 거기서…….
“휴식이로군요. 그간 고단한 나날이었어요.”
파레사는 덤덤한 척 말했다. 황태자도 평온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밤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나는……. 비에게 증명해야 할 게 있어요.”
황태자는 은밀하게 눈짓했고 파레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뭘요?”
“잘 생각해봐요.”
눈웃음 짓는 얼굴이 묘했다. 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겠어요.”
“내 아내는 기억력이 나쁘군요. 괜찮아요. 내가 알려줄 테니까.”
파레사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황태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들 앞에는 밤이 펼쳐져 있었다.
단란하고 은밀한 밤. 그것은 영원토록 이어질 밤이기도 했다.
의무와 운명이 교차한 자리에 찾아든 결말이 별빛과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아침 햇빛 속에서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되리라.
그것이 마침내 두 사람이 맞이한 축복이었다.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외전
* * *
이른 아침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번개같이 눈이 떠졌다.
‘습관은 못 버리겠어.’
기사일 때도 전속 시녀일 때도 늘 이른 아침 눈을 뜨는 게 습관이다 보니 자연히 근면해졌다.
파레사는 상체를 일으키는 대신 이불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부터 하는 것도 습관이었지만, 이제는 고쳤다. 다른 사람의 잠을 깨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지.’
파레사는 누운 그대로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스름한 시야가 확 밝아지는 듯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숨이 멎는 듯한 이목구비가 그곳에 놓여 있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곱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가까이서 반짝였다. 아침 이슬이 맺힌 듯한 은빛.
그 너머로 어떤 색의 눈동자가 잠들어 있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파레사는 잠시 그 완벽에 가까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새벽 속에 잠겨 있는 조각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꿈을 꾸는 듯이 비현실적이다.
매일 아침, 파레사는 비슷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번에도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으음, 일어났어요?”
시선을 느낀 그가 눈을 떴다. 녹청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내듯 반짝였다. 파레사는 잠시 뒤 반성하듯 토로했다.
“안드레, 제가 또 당신을 깨웠군요.”
너무 집요하게 쳐다봤던 걸까.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막으려면 애초에 보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황태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예민한 건 비 탓이 아니지요.”
일찍부터 잠이 깼는데도 예민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파레사는 그래서 더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수면 부족에 시달리실지도 몰라요.”
황태자는 보통 이보다 두 시간쯤 더 잤다.
애초에 잠이 없는 파레사와는 달리 그는 늘 일정한 수면 시간을 늘 꽉 채우는 편이라고 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던데, 잠이 부족해서 그의 미모가 상하면 어쩌지?
파레사는 경각심을 느꼈다.
남편의 미모를 지켜주는 것은 아내의 중대한 의무였다.
만일 우려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간 파레사는 돌을 맞아도 마땅한 죄인이 될 터.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던 이들도 파레사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황태자는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우며 속삭였다.
“난 괜찮아요.”
“국정을 돌보셔야 하는데, 다시 누우시지요. 조금이라도 더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비키겠습니다.”
파레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파레사의 팔을 잡아당겼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답니다.”
파레사는 그대로 그의 품에 폭 파묻혔다. 포근한 온기와 함께 은은한 향취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파레사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잤어요. 비 덕분인 것 같군요.”
조곤조곤 울려 퍼지는 말소리가 신경을 빨아들였다.
파레사는 그를 쳐다보며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늘 흐트러짐 없이 완벽히 보였던 황태자도 자고 일어나선 어쩔 수 없나 보다.
은빛 머리카락이 불규칙하게 널브러져 침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붓기 하나 없이 반지르르했다.
파레사의 감탄을 읽어낸 황태자가 장난기 섞인 질문을 건넸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미인을 반려로 맞이한 기분이 어떤지.”
“매일 아침 황제가 된 기분이로군요.”
황위와도 바꾸지 않을 것 같다. 파레사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나도 매일 아침, 비슷한 기분을 느껴요.”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파레사는 막 일어난 제 얼굴이 그리 그럴듯할 거라 믿기지 않았다. 침이나 안 흘렸으면 다행이다. 물론, 황태자는 말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가 손을 들어 파레사의 뺨으로 가져갔다. 다정한 눈빛이었다.
“아주 많이, 가진 느낌이거든요.”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저릿했다.
“가슴 속이 빈 구석 하나 없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것 같죠.”
파레사는 잠시 후에야 대답을 토해냈다.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안쪽에서 부풀어 올라 이내 보드라운 깃털처럼 간지럽히는 이것을, 표현할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눈빛으로 서로에게서 그 단어를 읽었다.
“그럼 우리는 같군요.”
그림 같은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콧등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리고 이내 아래로 향해 머금어졌다.
파레사는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어루만지다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아침부터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부부다웠다.
* * *
파레사는 황태자와 함께 아침 식사를 들었다.
완벽하게 차려진 식사는 모양새도 그럴듯했지만 맛도 기가 막히게 입에 딱 맞았다. 아니, 모든 음식이 다 그랬다.
그것은 파레사가 황태자궁에서 생활하며 느낀 몇 가지 놀라운 점이었다.
황태자를 섬기는 이들에게선 미흡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지 이 숙련된 움직임.’
자신도 전속 시녀로서 꽤나 일을 잘 해왔다고 자부하건만 취향과 편의를 모두 고려하는 이들의 섬세함에서는 흠잡을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까다로운 황태자 아래에서 고련을 거친 것처럼. 그래, 그게 사실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그도 황후 폐하 못지않게 까다로운 성격이었어.’
다만 황후처럼 성을 내는 게 아니라 눈썹을 슥 치켜올린다거나 부드러운 어투로 지적한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는 이 완벽함 속에서도 사소한 거슬림을 발견했고, 발견한 즉시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차가 조금 뜨겁군.”
“시정하겠습니다!”
“저기, 책이 흐트러져 있어.”
“송구합니다.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창가에 빛이 조금 많이 비치는데.”
“바람에 커튼이 움직였나 봅니다. 바로 조정하겠습니다.”
저렇게 까다로운데 신망을 얻고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어쨌든 하나하나 지적하면서도 말투는 퍽 부드러웠다.
황태자는 그 부드러운 말투로 식사를 마친 뒤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오늘은 조금 바쁠 것 같군요. 종일 회의에 들어가서 비와는 밤에나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식사는 거르지 말고 챙겨 드세요.”
“회의에 참가하는 관료들이 쓰러질 수 있으니 그렇게 될 겁니다.”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는 얼굴에는 미소가 고여 있었다. 언제나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늘 그의 입가를 장식하고 있는 미소는 그저 장식된 조화였다. 하지만 파레사를 볼 때면 그 미소는 생기를 머금었다.
황태자는 어떤 면으로는 지나치게 정직했다. 가식에 능숙하지만 진심일 때는 확연히 다르다.
파레사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앎은 마음을 키웠다.
황태자는 파레사가 좋아하는 점들을 많이, 그리고 다양하게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외견에 있지만.
“그럼.”
그가 궁을 나서자 파레사는 곧장 자신의 궁으로 되돌아왔다.
결혼한 지 한 달이나 지났지만 익숙해지지 않은 새로운 처소.
파레사는 낯선 감각으로 제 궁을 거닐었다.
동선은 실용적이되 안쪽은 흰색 대리석과 우아한 문양의 하늘색 벽지를 섞어 다소 화려했다.
꽃덩굴 문양이 창틀이며 문틀 곳곳을 장식하여 녹아드는 파레사의 새 처소는 아름다웠다.
황후는 충실히 파레사의 의사를 반영했지만, 제 선호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꾸미든 예쁘면 됐지 뭐.’
그리고 파레사는 만족했다. 그녀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파레사는 시간을 가늠해보다 시녀에게 말했다.
“황후궁으로 향해야겠다.”
오전에 티타임을 함께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지금 가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이다.
파레사는 황후궁으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좋은 걸까.’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궁을 따로 쓴다. 하지만 파레사는 황태자궁에서 기거하는 날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비보다는 황태자가 일이 많으니까.
또 자신이 그의 잠을 깨우니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해주려는 배려였다.
요새 들어 무척 바쁜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서류를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그러니 파레사가 그의 궁을 찾는 것이 나았다. 황태자가 자기 전에 파레사를 무조건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었다.
‘부부가 매일 서로를 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 아닙니까.’
어디가 누구의 처소인지 이제 와서는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럴 거면 왜 궁은 따로 있는 거지?
파레사는 의문에 잠겼고 황후는 그 사태를 간단하게 평했다.
“내 신혼 시절을 보는 것 같구나. 피는 못 속이는 법이지.”
남들 앞에서는 공대를 써도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만큼은 말을 편히 하는 황후였다.
물론, 거기에 파레사의 의견은 들어 있지 않았지만.
파레사는 조용히 반문했다.
“그럼 이래도 되는 건가요?”
형식과 절차에 맞지 않는 기분이다. 그들은 황태자와 황태자비씩이나 되는 대단한 부부 아닌가. 황후가 콧방귀를 끼었다.
“안 될 건 뭐가 있겠니. 정략 결혼한 부부야 괜히 그리 격의 없이 굴었다간 그 형식적인 관계나마 깨질까 봐 서로 거리를 둔다지만 너희들은 그런 것도 아니잖니.”
“그런 이유였나요.”
“물론 말 많은 귀족들이야 떠들어댈 수 있겠지. 하지만 네게는 너만의 무기가 있잖니.”
“무기요?”
“거절할 수 없는 결투.”
황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서렸다.
“한둘쯤 목을 베면 아무도 너에 대해 지껄이지 못할 테지.”
“현명하신 말씀이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파레사에게도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목을 베기보다는 팔을 베는 게 낫겠어요. 너무 잔인하면 흠이 되잖아요.”
“그래, 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아무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단다. 신경에 거슬리는 족족 응징해주려무나.”
“물론이죠.”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대화는 그것으로 살벌하게 끝을 맺었다.
* * *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파레사가 막 방을 나설 무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아이가 방으로 들어섰다.
황후 소생의 남매였다. 모처럼 돌아와 있는 모양이다.
왠지 토라진 표정으로 인사만 하고 황후에게 다가가 안긴 황녀 릴리와는 달리, 황자의 목적은 황후가 아니었다.
“파레사!”
기다렸다는 듯이 부르는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거려서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황후가 차분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아드리안, 비전하라고 불러야지.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내 전속 시녀가 아니란다.”
황자는 바로 시키는 대로 호칭을 고쳐 우렁차게 외쳤다.
“비전하! 나 강해졌어요! 이제 나와 대련해 주는 건가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기대와 열정을 담고 있었다. 전설적인 뒤나미스의 기사, 벨로나 나이트 파레사에 대해 단단히 환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파레사는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아이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건 좀 곤란하군요. 제 대련 상대가 되기엔 아직 미흡하십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말하는 어조는 진실을 고지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진심이 아닌 적당히 상대하는 대련은 벨로나 나이트에게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귀찮았다.
“아직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황자에게 파레사는 고심 끝에 덕담하듯 말했다.
“열여덟 살쯤 되면 제 검을 조금은 버텨내실 수 있을 것 같군요. 앞으로 부단히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황후가 못마땅한 듯이 끼어들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리람. 왜 네 형수에게 대련 상대가 되어 달래. 꿈도 꾸지 말렴! 그리고 파레사, 우리 실력이 어때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 게 수련에 도움이 될 겁니다.”
파레사의 냉정한 대답에 황후의 눈썹이 치켜 들렸다. 하지만 이런 분야에 관해서는 왠지 파레사에게 따져 들 수 없었다.
황후는 얼른 바깥의 유모에게 아이들을 떠넘겼다.
“아이들을 데려가 보거라.”
“두고 봐요! 나 강해질 테니까.”
“바보야, 조용히 해.”
두 아이가 떠들면서 사라져 간 다음 잠깐 정적이 내리 앉았다. 파레사는 생각했다.
‘뭐 하고 있었지?’
그래, 가 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파레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황후가 선수를 쳤다.
“귀엽지 않니? 우리 아드리안과 릴리, 네 시동생들이기도 하고.”
“귀엽죠. 황후 폐하를 닮아 예쁘게들 생겼기도 하고요.”
황후는 슬쩍 기분 좋게 풀어지려던 입매를 다잡았다.
“너도 슬슬 후사를 생각해야지.”
“정말 시어머니다우신 말씀이군요.”
“나는 금방 생겼는데, 넌 왜 안 생기지? 혹시 황태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걱정하는 건지 황태자에게 흠을 잡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눈치였다.
갓 신혼인 남편의 성 기능에 문제가 있지 않냐는 의심을 받는 파레사는 불쾌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모두가 바로바로 애가 들어서는 체질이면 제국은 애들로 넘쳐날 겁니다.”
실은 황태자가 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모두가 빠르게 후사를 갖는 것을 바라니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파레사는 황태자가 오해를 사든 말든 충실히 그 말을 지키기로 한 터였다. 자신만 오해 안 받으면 된다.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가? 하긴 난 임신이 잘 되는 체질이라고 했어. 그래서 두 아이를 낳은 뒤로는 조심하고 있지. 애 낳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 세상에, 난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단다!”
“그렇군요.”
파레사는 한동안 황후의 무용담을 들어 줘야만 했다.
“혹시 너도 모르게 태기가 있을지 모르니 주기적으로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다.”
“예…….”
“뭐, 그 녀석이 반반하게 생겼으니 자식을 낳아도 반반하겠지.”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는 황후의 속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막 황후궁을 빠져나가려던 파레사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마리, 잘 지내고 있어?”
“예, 황태자비 전하.”
파레사를 대신해서 황후의 전속 시녀로서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마리였다.
피치 못하게 황후궁에 입성한 마리지만, 넘치도록 충분히 파레사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었다.
“사실 제가 모시고 싶은 분은 따로 있는데. 그분이 저를 언제 데려가 주실지.”
이 기회를 틈타 눈을 찡긋거리는 것이 퍽 그녀다웠다. 황후보다야 파레사가 섬기기 편한 상관이리라.
파레사의 입장에서도 마리는 퍽 쓸만한 인재였다.
“글쎄,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괜히 사람을 빼갔다가 황후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마리가 아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믿을게요. 제가 필요할 때까지 부단히 시녀로서의 소양을 기르고 있겠습니다.”
주먹을 쥐어 보이는 마리에게선 열의가 느껴졌다.
빤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파레사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떴다.
* * *
황후가 말한 자신만의 무기를 보일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다음날 잡무를 처리한 파레사는 오후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사단 쪽을 둘러보고 싶군.”
전속 시녀로서는 권한 밖의 일이었지만 황태자비가 된 지금, 가고 싶은 곳은 대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어젯밤 아드리안이 대련 이야기를 해서 좋은 생각이 났다.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여 붙여 주면 될 것 같았다.
‘시동생한테 이런 배려라니. 나도 제국 사람이 다 됐군.’
왠지 모를 뿌듯함과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제국 기사들의 전반적인 수준을 살펴야겠어.’
왠지 첩자 같은 발상을 떠올리며 파레사는 냉큼 기사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공교롭게도 불쾌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모르게 조용히 연무장에 들어서는데, 얕은 담 너머로 수군거리는 기사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뒤나미스 출신의 황태자비라니. 벨로나 나이트? 뒤나미스 출신의 여자를 맞으려니 띄워 주려고 붙인 말 아니냔 말이야. 도저히 기사로는 보이지 않던데.”
“맞아. 그런 여자가 무슨 대단한 기사란 말인가?”
“이래저래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드세고 사납기로 소문난 섬나라 여자가 황태자비라니, 말이 돼?”
“자고로 여자란 다소곳하고 얌전해야 하건만, 그녀가 물을 흐릴 거라고!”
“신성한 황실의 혈통이 이렇게 오염되다니!”
파레사는 연무장 안으로 곧장 들어섰다. 그들은 바로 파레사를 발견하곤 흠칫하며 예를 갖추었다.
“황실 기사단의 노고가 많다고 해서 들렀는데…….”
파레사는 일부러 말을 끌며 그들의 면면을 훑었다. 네 명. 귀하게 자란 귀족 영식들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제국에서 뒤나미스 출신의 황태자비를 맞이하는 데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걸 직접 귀로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들었으면 대처를 해야겠지.’
파레사는 삐딱하게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 성큼 다가섰다.
“나에게 불만이 있는 모양이로군요. 이해해요. 나에 관한 많은 것들은 직접 확인된 바 없는 소문에 불과하니까.”
파레사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물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번뜩였다.
“그래서 내가 증명해 주려고요.”
“예?”
증명이라고 하니 황태자와의 어떤 추억이 떠올랐지만, 파레사는 떠오른 즉시 지하에 파묻었다.
신성한 결투의 시간 앞에서 그런 걸 떠올릴 때가 아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검을 드세요. 당신들이 몰랐던 것, 내가 가르쳐 드리지.”
거절할 수 없는 결투의 권한이 최초로 행사되는 순간이었다.
* * *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파레사는 그날 밤, 어김없이 황태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어쩐지 모호한 표정이었다.
“오늘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투는 퍽 다정했다. 파레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별일 아니고 황실 기사 몇몇의 뼈를 좀 부러트렸을 뿐이다. 정당한 결투였기에 파레사는 당당했다.
“그런 것 같더군요. 훌륭히 처리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그 수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요.”
파레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너무 심했나요? 하긴 명색이 황태자비인데 기사들을 때려눕히는 모양새가 좋아 보이진 않겠죠.”
“아니요, 내 말은, 좀 관대하지 않았나 합니다.”
황태자의 입가에는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지 차갑게 느껴지는 건 단지 느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부는 닮는 모양인지, 파레사는 그와 비슷한 미소를 떠올렸다.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제가 관대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틀림없이 보여드리지요.”
“그거 잘됐군요. 그리고―”
황태자는 말꼬리를 느릿하게 끌었다.
“오늘 내 두 동생을 만났어요. 아드리안이 내게 비와의 대련을 청하더군. 당연히 거절했지만.”
이어 은근한 말투로 질문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더 많아지면 황궁이 번잡해지겠지요?”
“그렇겠죠.”
황태자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그는 모든 종류의 번잡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실은 제 동생들조차도 그랬다.
가끔 귀엽고 색다른 기분을 안겨 주기는 했지만, 그들이 늘 눈에 띄는 자리에 있다면 분명히 성가시게 느낄 것이다.
파레사는 고개를 가볍게 움직이며 격려 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잘 해내실 거예요.”
“무슨?”
“전에도 보니까 동생분들을 잘 돌보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이는 걱정 없겠어요.”
황태자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왜 그게 당연한 듯이 내 소임이 되는 거지요?”
“기사인 저보다는 고상하게 자란 안드레가 더 아이들을 조심히 아껴줄 수 있을 테니까요.”
“아주 합리적인 이유군요. 헌데 억울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파레사는 시원하게 웃었다.
“저런. 그럼 제가 조금 양보할까요?”
“어떻게 양보할 생각이죠?”
“함께 돌보는 걸로요. 제가 당신을 힘껏 도와드리지요.”
파레사는 뻔뻔할 만큼 태연스레 그를 응시했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황태자의 입가에 한숨이 고였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다시 미소로 바뀌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후에 확인해 보는 걸로 하죠.”
황태자의 손이 파레사의 어깨를 다정스레 감싸 안았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제 침소에 들 시간이다.
또 다른 하루.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하루.
오늘도 그런 하루였을 뿐이다.
파레사는 눈앞으로 다가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 입 맞추며 생각했다.
제국으로 자신을 이끈 사명이 예비한 게 이런 거라면…….
자신은 참 운이 좋았다고.
그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그 모두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