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3
Chapter 3
* * *
황태자와 만나는 일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겠다.
황후뿐만이 아니라 파레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하루만으로도, 황태자가 꺼림칙한 인간이라는 데 동의하게 된 그녀였다.
‘예쁘지만 바퀴벌레였어.’
하지만 황후조차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데, 전속 시녀의 뜻대로 될 리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또다시 황후의 비명을 들은 파레사는 귀를 틀어막을 뻔했다.
“아아악!”
‘나날이 목청이 좋아지시는걸.’
득음이라도 하신 걸까.
진지하게, 황후의 성대에서 가수로서의 재능이 느껴졌다.
황후는 바르르 떨면서, 제 손에 들린 편지를 쫙쫙 찢었다. 두툼한 고급 종이는 찢기는 소리도 찰졌다.
“그 녀석이, 그 녀석이 또……!”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심드렁하게 생각하면서 파레사는 그녀를 만류했다.
“그만두세요. 그랬다간 내용을 읽을 수 없게 되는 걸요.”
“내가 알게 뭐니? 이런 편지, 안 받았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랬다간 직접 오실지도 몰라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는 걸, 황후도 알 텐데.
그 말에, 황후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파레사는 황후가 네 차례 찢어놓은 편지를 일단 수습했다.
혹시나 황후가 까먹어서 황태자궁에 편지 내용이 뭐였냐고 묻는 건 피하고 싶기에.
파레사가 차분하게 물었다.
“또 어쩐 일로 그러시는 건가요?”
“나한테 무도회에 함께 가자는구나.”
어제 말해놓고, 오늘 편지를 보내다니. 행동력 좋기도 하지.
그 신속함에 감탄스럽다기보다는 질리는 기분이었다. 파레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듯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선물하신 목걸이를 선보일 좋은 기회네요. 모두가 황후 폐하를 보며 감탄할 거예요.”
“감탄은 무슨.”
그리 중얼대면서도, 황후는 조금 기분이 풀린 눈치였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파레사의 얼굴에 박혔다.
“가만, 그러고 보니 너도 사교계 데뷔를 해야 했지?”
난데없이 옆구리를 찔린 양, 파레사의 몸이 움찔거렸다.
황후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번져갔다.
“마침 잘 되었구나.”
대체 뭐가?
파레사는 갑자기 황후가 찢다 만 편지를, 불태우고 싶어졌다. 아직 함정이 남아 있었을 줄이야.
“그 편지, 아예 온 적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하시는 게 어떨까요?”
“되었다. 무도회가 언제였지?”
황후는 다급히 제가 찢어놓은 편지지를 꿰어맞췄다.
파레사는 괜히 만류했나 후회했다.
‘아예 불사르라고 부추길 것을.’
황태자의 편지는 그런 취급을 당해도 쌌다. 자신에게 이런 곤란을 안겨준 걸 보면.
상관인 황후를 탓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황태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파레사였다.
황후가 꼼꼼하게 편지지의 글씨를 읽어내렸다.
“일주일 후로구나. 황실에서 주최하는 봄 무도회가 열리지.”
황후는 마치, 딴 사람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이상한 일이다. 자고로 황실의 무도회는 황후의 소관이 아니던가.
파레사의 의문을 알아챘는지, 황후가 선선히 답했다.
“방계의 황족이자 황실의 원로인 아무르 공작 부인이 궁 내외 행사를 주관하고 있단다. 나는 무도회를 즐기지 않으니, 신경 쓸 것 없다더구나.”
‘신경 쓸 게 없다니.’
이는 마치 자신의 권한이라고 차단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황실에는 엄연히 위계질서가 있건만.
황후의 뜻으로 정당히 양도받은 것이 아닌 한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파레사는 의혹을 품었다.
하지만 황후는 그리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문득 아련해졌다.
“내 첫 사교계 데뷔 무도회. 그곳에서 내 운명이 바뀌었지. 하지만 그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는 무도회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단다.”
황후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파레사의 동정도 위로도 바라지 않았다.
금세 도도하게 눈을 치뜬 그녀는 선심 쓰듯이 말했다.
“네, 춤도 배웠겠다, 이제는 더는 핑계 댈 것도 없을 것이야. 내 전속 시녀이니, 네 사교계 데뷔는 그럴듯하게 치러주마.”
“저, 핑계가 아니라…….”
파레사는 조금, 정직해지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실은 제가 저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어떤 분을 피해서 도망온 처지거든요.”
“아니, 그런 불한당 같은 자가 있다니! 너희 가문은 대체 뭘 했는데!”
황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죄책감이 꾹꾹 양심을 찔렀다. 하지만 파레사의 양심은 굳건했다.
“그게…… 그 사람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라서요.”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파레사는 침울한 척 고개를 떨구었다.
황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체 어떤 자이길래?”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마어마한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저 하나쯤 감옥에 가두는 게 일도 아닐 정도로.”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파레사는 결코 너그럽지 않은 ‘그분’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회개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 때문에 제가 뒤나미스를 떠나, 해외로 도피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상황은 엇비슷했지만, 실제와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파레사가 뒤나미스를 떠난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니까.
“네 가족은, 괜찮은 거니?”
황후가 파레사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리 험한 일을 다 겪었냐는 눈빛이었다.
적갈색 눈동자에 걱정과 충격이 고스란히 비쳤다.
‘……아프군.’
잘 가꾸어진 황후의 손톱은 제법 길었다.
그리고 파레사의 팔뚝에 박혀 있었다.
파레사는 조심스레 그녀를 떼어내며 말했다.
“……가족들은 안전한 곳에 있어서, 그들과는 무관해요. 오로지 제 문제죠.”
달래듯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얼굴이 알려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계속 무도회에 참석하라 밀어붙이지 않겠지.
계산을 마친 파레사는 슬쩍 황후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황후는 그 설마를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엄숙한 눈빛으로 선포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너는 황후의 전속 시녀다. 그자가 누군들 감히 제국 황실에 속한 사람을 건드릴 수 있겠니!”
황후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위로 올라간 그녀의 눈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악덕 상인이라도 환불을 받아낼 것 같은 의지와 매서움이 엿보였다.
고작 고양이라도 성나면 팔뚝에 선혈이 비치게 긁어줄 수는 있다.
특히 그녀는 황후씩이나 되는 고양이였다.
“그런 악랄한 자 때문에, 네가 숨어 살아서야 되겠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로구나!”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단호한 투로 말했다.
“너는 내 전속 시녀이고, 큰 힘은 없지만 나는 제국의 황후란다. 내게 속한 사람이 그런 부당한 경우를 당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지!”
아니, 안 지켜주셔도 된다니까요. 그놈의 무도회만, 좀.
황후는 파레사를 도와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것 같았다. 뭔가 막막했다.
파레사가 생각한 구도가 완벽하게 어그러진 반응이었다.
파레사는 조심스레 피력해 보았다.
“그러니, 사교계 데뷔는 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요.”
그러나 황후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홀로 무언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렴. 귀족 영애라면 무도회에서 정식으로 사교계 데뷔는 해야지. 더 이상 그런 자는 신경 쓸 것 없다. 내가 있으니.”
파레사는 다른 의미로도 정직해지기로 했다.
“……저, 사실. 무도회에 나가고 싶지 않은.”
“물론, 사교계 데뷔란 게 누군가에게는 거창하고 피하고 싶은 일인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네가 귀족 영애이고, 제국에 발 들인 이상은 해야만 하는 일이란다. 마음 굳게 먹으렴!”
단칼에 자른 황후는 파레사에게서 휙 돌아섰다.
“어떤 드레스를 입으면 좋을까? 그렇지, 드레스룸을 살펴봐야겠어.”
‘……들을 생각이 없으시군.’
그녀의 등을 향해 저절로 뻗던 손이 망연히 허공을 맴돌았다. 파레사는 그 손을 거두어 이마를 짚었다.
없던 두통이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황후는, ‘귀족 영애라면 무도회에 참석하여 사교계에 데뷔해야 한다’는 그것을 절대적인 명제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사교계 데뷔를 못 한다는 것을,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수준의 심각한 박탈처럼 여기고 있었다. 고루하면서도 확고한 가치관이었다.
‘하긴 여기는 제국이고 그녀는 황후지.’
제국과 뒤나미스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황후가 개방적인 성격이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제국의 귀족 영애들에게는 사교계 데뷔가 중요한 삶의 절차였다.
황후는 파레사가 온전히 그 절차를 지킬 수 있도록 챙겨주려는 것이다. 대단한 호의였다.
만난 지 2주하고도 좀 더 된 파레사에게는 과분할 만큼.
저 황후가 평생 그 같은 호의를 누구한테 보여본 적이 있을까.
감동적이라면 감동적인 상황인데, 뭔가가 찜찜했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고?”
파레사는 생판 처음 듣는 평가에 손을 내려 제 얼굴을 더듬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긴 보니, 저도 제가 못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제가 꽤 호감형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이렇게 작용할 줄이야.
뒤나미스에서 그녀는 얼굴보다는 다른 것으로 주목받았다.
쓸모? 아니다.
파레사는 유용성 따위로 말해질 수 없는 명예로우면서도 특별한 존재.
큰 유명세를 떨치지는 않았으나, 조용히 신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존중과 경외를 받았다.
그런 그녀가 파레사 멘젤이라는 이름의 어리숙한 귀족 영애로 무도회에 데뷔하다니. 취향도 정서도 아니지만, 이는 기만이었다.
현재 상황이 정직하지 못할지라도, 파레사는 정직한 삶을 추구해왔다. 감추는 것과 기만은 거리가 있다.
가명을 쓸 걸 그랬나? 신분 위조까지 완벽하게 준비했어야 했는데.
파레사는 후회했다. 점점 더 사태가 커지고 있는 기분이다.
“……모르겠다.”
일단은 여기서 떨치고 나갈 수는 없으니까.
뒤나미스는 제국과 그리 가까운 나라가 아니다.
바다 건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라면 소식이 닿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한숨을 내쉰 파레사는 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되건 황후를 보좌하는 게 그녀가 할 일이니.
* * *
“왼쪽으로 몸을 돌려 보렴.”
파레사는 황후가 가끔 지어 보이던 그 표정을, 배운 듯이 선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몸을 슬쩍 움직였다.
“다시 오른쪽! 아니, 한 바퀴 빙 돌아봐. 그렇지!”
공중제비를 돌아드릴까요? 묻고 싶었으나, 말을 삼키며 파레사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황후는 꼼꼼히 파레사의 전신을 뜯어보았다.
“흐응, 너는 역시, 원색보다는 옅은 색이 더 잘 받는 듯하구나. 그중에서 한 번 골라봐야겠다.”
원색을 선호하는 황후의 취향 탓에, 그녀의 드레스룸에는, 원색의 드레스가 대부분이었다.
화려한 미모의 그녀가 아니면 소화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드레스도 좀 있었다.
인형 놀이하는 기분을 느끼는지, 처음에 황후는 그런 옷들을 파레사에게 몇 벌 입혀 보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서, 벗으렴. 도저히 그건 안 되겠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황후가 손을 내저었다.
안나가 옆에서 웃음을 참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저, 파레사 님은 조금 더 청순한 쪽이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불타는 듯한 정열의 빨강 드레스라니. 맙소사다. 파레사는 거울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짙은 보랏빛이나 가슴이 파인 검은 드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관능적인 쪽은 영 아니로구나.”
“……척 봐도 관능이 없어 보이지 않은가요.”
“그렇다만, 막상 입어보면 다를 수도 있잖니.”
황후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말린 장밋빛 눈동자에 짓궂은 기운이 번졌다.
즐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파레사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불만을 느꼈다.
“저는 그냥, 아무거나 입어도 무방합니다.”
황후가 팔짱을 꼈다.
“아무거나 라니! 제 사교계 데뷔에 어쩜 그리 무성의하담.”
“제가 다할 성의까지 황후 폐하가 다 보여주시니까요. 그리고 저는.”
파레사는 자신이 의견을 내는 쪽이, 좀 더 빠르게 이 고난스러운 과정을 마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푸른색이 잘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푸른 계열의 드레스 중에서 하나 고르는 게 어떨까요.”
파레사의 물빛 눈동자에는 역시 푸른색이 잘 받았다. 황후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 그 말을 한 게, 그놈이니?”
그 불한당! 황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파레사는 바로 부인했다.
“아니요, 그놈은 아니고요.”
일단 놈도 아니지만. 황후는 코웃음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말을 한 게 남자라면 말이다. 남자들이 이러느니 저러느니 하는 건 들을 소리가 못 된단다. 그들은 그저 레이스 잔뜩 달린 하얗고 청순한 드레스만 입으면 어여쁘다 하는 것을. 패션의 세계는 그보다 다양한데 말이지.”
안나가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맞아요, 황후 폐하처럼 타고난 미모를 지니신 분은 이것저것 실험 정신을 보여도 무방하지요. 모두 다 소화해내시니까요!”
파레사는 영혼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제 것은 적당히 고르고, 황후 폐하의 무도회 의상에 집중하는 것으로……”
“사교계 데뷔잖니!”
일순,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럼요, 사교계 데뷔를 그렇게 허투루 치를 수는 없지요. 일생에 한 번뿐인 행사이니, 철저히 준비해야 해요!”
황후와 안나, 두 사람의 이중창이 소리 높여 울려 퍼졌다.
이런 면에서는 죽이 참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안나, 내가 가진 푸른 계열의 드레스를 싹 가지고 와보렴. 오늘, 내친김에 다 한 번씩 입혀 보고 그중 하나를 골라야겠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파레사와 안나의 대답이, 온도 차를 두며 갈렸다.
드레스룸 쪽으로 총총거리며 사라지는 안나를 파레사는 포기한 채 쳐다봤다.
이대로면, 오늘도 야근을 하게 될 것 같다.
‘드레스를 고르느라 야근을 하고 수당을 받는다면 그건 이득인가.’
파레사는 빠르게 마음을 추슬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이럴 때 돈은 위안이 되었다.
돈도 벌고 사교계 데뷔도 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좋은 직장…….
어쩐지 부질없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듯한 말이었다.
“이게 제일 낫겠어.”
황후가 말하자, 안나가 호응했다.
“여기서 조금만 손을 보면 될 것 같아요.”
퇴근 시간으로부터 3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두 명 모두 지치지도 않은지 아직도 열정이 넘쳤다.
시키는 대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한 파레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결국 선택된 것은 파레사의 눈빛과 유사한, 푸른색의 드레스였다.
의사를 반영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건 내가 막 황후가 되었을 때 입은 드레스란다. 몇 번 안 입은 데다가 보존이 잘 되어 새것 같지.”
황후는 아련한 눈빛으로 파레사가 입은 드레스를 아래위로 훑었다.
어깨를 감싸는 소매가 얇은 레이스로 겹겹이 이루어져 팔랑거렸다.
치맛단 역시도 하늘거리는 재질이었다. 아래쪽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태가 요새 유행과 부합했다.
황후가 가진 드레스 중에 특별나게 아름답다거나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파레사에게는 잘 어울렸다.
‘그거면 됐지.’
이제 끝났다. 파레사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끝났다는 점이 특히나 보람찼다. 하지만 황후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드레스가 화려해졌지. 뭔가 좀 더 가미해야겠다. 치맛단의 유치한 꽃장식은 떼어내고!”
“저, 가봐도 될까요.”
파레사는 퇴근의 의지를 드러냈다.
무도회에 참석한 그 날 빼고, 이렇게 오래 야근해본 적이 있던가.
퇴궁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파레사는 수없이 드레스를 입고 벗었다.
빨리 끝내려고 신속하게 움직였을 뿐인데, 황후와 안나의 성화 속에 더욱 많은 드레스를 갈아입게 되었다.
마침 잘 되었다는 것처럼. 시간을 앞당기는 데 실패한 파레사는, 지쳐 있었다.
흡사 극한의 검술 훈련을 몇 시간 동안 실시한 것 같은 피로감이었다. 아마도 정신적인 피로이리라.
“그래, 되었다. 이만 옷을 갈아입으렴.”
시녀복으로 갈아입은 파레사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듯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안나에게 드레스를 벗어 건넸다.
“완전히 새것처럼 다른 드레스가 될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안나는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며 웃었다.
파레사는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아군인 줄 알았던 그녀가 실은 적군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배신감일까? 안나가 눈치 빠르게 파레사가 원하는 말을 꺼내주었다.
“남은 것은 저희들이 정리할 테니, 들어가 보셔요.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내가 했지. 드레스 수선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황후는 또 뭔가 계획이 있는 듯 초조하게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파레사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도피하듯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날 듯한 걸음걸이였다. 그녀는 또다시 봉급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설마 무도회 날까지 그놈의 사교계 데뷔 때문에 시달리진 않겠지.’
그러나 설마는 늘 현실이 되곤 한다.
파레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다음날, 황후의 드레스 선별은 빠르게 끝났다.
이미 다른 데 신경을 빼앗긴 황후는, 정작 제 드레스는 까다롭지 않게 골랐다.
물론, 완벽하게.
봄 무도회였다. 봄이란 색색의 꽃이 피어나는 화려한 철이니, 눈에 띄게 꾸며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황후는 사교계 데뷔를 이끄는 귀부인에 걸맞도록 과한 꾸밈은 삼갔다.
그녀는 산뜻하면서도 우아한 연녹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은 장식처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기로 했다.
평소의 압도적인 감각보다는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에 중점을 둔 선택이었다.
거기에 황제가 선물한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 것이다. 핑크 그린의 조합은 독특하면서도 아름답다.
새로이 구매한 드레스를 그대로 몸 선에 맞게 피팅해서 입을 것이라, 별다른 수선이 필요치 않았다.
간단히 결정지은 황후는 파레사의 드레스 수선에 신경을 기울였다.
“사교계 데뷔에 황후 폐하의 젊을 적 드레스를 입다니. 정말, 이보다 더한 영광이 있을까요?”
황후의 부름을 받고 입궁한 디자이너 베누스 자작부인이 알아서 찬사부터 쏟아냈다.
이미 익히 황후를 상대해본 그녀였다. 하급귀족인 그녀에게는 황후의 평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 드레스를 완벽하게 소화해주는 데다가, 자주 사주기까지 하는 최상의 고객이다. 그녀에게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 뚝뚝 묻어나왔다.
“이 드레스를 유행에 맞게 수선했으면 하는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조금은 특별한 강조점을 두어도 좋지 않을까요?”
안나까지 더해서 세 사람은 드레스를 입은 파레사를 인형처럼 세워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사자만 빼놓은 채, 열정 넘치는 화합의 순간이었다.
부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베누스 자작부인은 능숙한 바느질로 황후와 안나의 의견을 그대로 드레스에 반영했다.
자잘한 진주와 크리스털이 듬성듬성 박힌 레이스를 짙은 보랏빛부터 연한 보랏빛까지 치맛단에 겹겹이 쌓아 부족한 화려함을 채웠다.
그러자 위에는 옅은 푸른색이면서 아래는 보랏빛으로 번져 나가는,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색감의 드레스가 완성되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각기 다른 색이 분절된 채 드레스 위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닌, 자연스레 번져 나가는 듯한 변화가 특별하고도 아름다웠다.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달라진 태였으나,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도 더 파레사에게 잘 어울렸다.
황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드레스를 소화해내는 손님은 황후 폐하 이후로 정말 오랜만입니다!”
베누스 자작부인도 제 솜씨에 심취한 듯, 짝짝 박수를 쳤다.
황후는 자신의 만족감을 돈으로 표현했다.
“자작부인, 수고하였소. 내 특별히 사례하지.”
“아아, 너그러우신 황후 폐하. 부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다시 불러주시기를. 기쁨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싱글벙글해서 돌아가는 베누스 자작부인은 승자였다. 그리고 드레스를 맞춘 파레사는 패자.
“너는 잔잔하니, 이런 분위기와 잘 맞는구나.”
“완벽해요! 이제는 액세서리만 있으면 되겠어요.”
안나가 탄성을 내며 박수를 쳤다. 파레사의 사교계 데뷔인데,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부당한 현실이다.
“저는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가 없는 걸요.”
파레사는 떳떳하게 자신의 궁핍함을 실토했다.
액세서리 하나 없는 귀족 영애라니!
황후는 더 이상 파레사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정할 거면 차라리 돈으로 주는 여자니까.
“그럴 줄 알고 다 생각해뒀다. 따라오렴.”
앞장서는 황후는 누구도 막아설 수 없을 것처럼 의욕이 넘쳤다.
“네가 쓸 만한 걸로 골라보았단다.”
부지런하시기도 하지.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해뒀담.
파레사는 탁자 위에 펼쳐진 목걸이와 귀걸이들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반짝거리고, 반짝거렸다.
다행인 점은 대개 알이 작고 간소한 스타일이라는 거다.
살짝 빛가루를 흩뿌려주는 정도의 구색이었다.
“드레스야 내가 선물로 줬다고 할 수 있지만, 액세서리까지 빌려다 데뷔하면 네가 책잡힐 게 아니겠니. 이 정도야 네가 걸친다고 해도 내 것이라는 걸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겠지.”
경매에 나올 만한 보석을 빌려주는 거도 부담스럽다. 황후도 그럴 생각까진 없을 터였다.
“저한테 빌려주셨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대체 내 몇 달 치 봉급으로 갚을 수 있지? 파레사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황후가 코웃음 쳤다.
“얘는, 무슨 황궁에 도둑이 넘치는 줄 아니? 일부러 빼낸 것도 아닌데, 목에 걸고 귀에 건 걸 왜 잃어버리니? 설령 그렇대도 다 찾는 방법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황후는 당당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내 드레스룸에 보석이 그득하다만, 내가 황후가 된 이래로 한 번도 그것들이 도난당한 적이 없단다.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
“……그렇군요.”
까다로운 성미만큼이나, 자기 것에 애착이 강한 황후였다.
까다롭게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그 하나. 황후는 그것을 아꼈다.
‘그게 설마.’
나는 아니겠지.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자신을 인형으로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운 황후였다.
사람한테는 안 그래도 인형이라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건, 황후는 개의치 않고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선정했다.
작은 다이아몬드 아래에 새끼손톱 크기의 진주가 달린 귀걸이와 그보다 큰 진주가 알알이 꿰어진 진주목걸이였다.
“이 정도면 튀지 않게 잘 어울리겠구나.”
파레사는 드레스를 입고 액세서리까지 착용한 채로 거울을 쳐다봤다.
물빛 눈동자를 가진 우아한 귀족 영애가 거기에 서 있었다.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놀라울 만큼 낯설었다.
“머리나 화장은 당일날 공들여 손보면 되겠지. 드레스는 이대로 피팅까지 완벽하니, 식이를 조절하렴. 명심해! 인생에 한 번뿐인 사교계 데뷔다.”
“……예.”
이제는 진짜 끝이겠지?
“그리고 안나가 줄 게 있다더구나.”
안나가 파레사의 손에 두툼한 봉지를 쥐여줬다.
“팩이에요. 무도회 전까지는 자기 전에 꼬박꼬박 붙이세요.”
파레사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모시는 분을 기쁘게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이 놀라운 직업 정신!
단언컨대 파레사 인생에서 이토록 몸단장에 시간을 많이 들여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 마지막 날이 남았지만.
“꼭 챙겨 붙이셔야 해요오오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안나의 말을 뒤로하고 파레사는 퇴근길을 서둘렀다.
오늘은 야근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는 게 희망적이었다.
* * *
운명의 그 날은 쏜살같이 찾아왔다. 그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기억에서 소거되었다.
봄 무도회 당일이 되었을 때, 파레사는 비로소 그날이 왔다는 걸 실감했다.
‘드디어 내 사교계 데뷔 날이구나.’
마치 출전 명령을 받고 전쟁에 나서는 기분이었다.
비장하고도 단단한 각오가 가슴에 새겨졌다.
무료한 듯 보였던 황후는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아니, 잠시 봄을 타느라 가라앉아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반면 파레사는 활기를 잃었다.
원래 차분한 분위기라, 그리 티 나지는 않았지만.
‘딱 한 시간만 있다가 나오는 거야.’
갑작스레 복통이 일었다는 핑계를 댈 것이다. 파레사는 철저하게 준비해뒀다.
무도회 전에 내빼면, 비슷한 과정을 다음 무도회까지 또 겪게 될 테니까.
의지를 다진 파레사처럼, 황후도 의지를 다진 것 같았다.
“내 오늘은 그 녀석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야.”
그건 파레사의 계획보다도 더 현실성 없게 들렸다.
어쨌든 황후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가슴께에서 황제가 선사한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화려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색이 있는 다이아몬드는 진귀하다. 이렇게 색이 뚜렷하고 큼직한 핑크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이게 편안한 듯 꾸민 차림이라는 걸까.’
파레사를 소개하는 배역으로 물러나 앉았지만, 그래도 목걸이 자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황후였다.
자신도 완벽하게 꾸미고, 파레사까지 완벽하게 꾸며지도록 감독한 그녀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지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건, 데리러 오겠다는 뜻이다.
그 황태자가, 이 황후궁에 또다시.
파레사도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랬다.
황후와 달리, 하급 시녀들은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들떴다.
황후의 좁혀지는 미간 앞에서 올라가는 입매를 감추느라 안간힘을 써야 할 정도로.
다각다각. 드디어, 바깥에서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바로 입구에서 멈춰섰다.
그로부터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헐레벌떡 하급 시녀 한 명이 뛰어 올라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예쁜 바퀴벌레의 등장이었다.
“그렇게 우렁차게 알리지 않아도, 내 귀는 멀쩡하단다.”
핀잔을 던진 황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아, 정말 싫구나.
파레사는 황후의 표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기색을 읽어냈다. 황후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가자꾸나. 내 오늘의 무도회 참석은 오직 너를 위해서다.”
파레사에게 보란 듯이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파레사의 사교계 데뷔에 몰두한 이유는, 실은 황태자와 무도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걸 잊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도피로써 정신 건강을 지킨 거지.’
탈모를 방지하기 좋은 방법이다.
황후의 풍성한 머릿결은 오늘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빛이 1층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 눈부신 빛은 뭐지?’
저녁이었다. 갑자기 태양이 뜬 걸까.
기적? 아니면 유독 환한 보름달?
파레사는 동공을 쪼는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황후를 따라 내려온 하급 시녀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 걸 보면, 제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단지, 황후만은 가호를 받은 듯이 이상 현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왔군요.”
드디어 왔구나, 망할 녀석.
황후의 말이 고막에서부터 저절로 해석되어 들렸다.
시야는 금세 돌아왔다. 거기에는 예쁜 바퀴벌레…… 아니, 황태자가 서 있었다.
바퀴벌레라는 단어조차도 그에 붙으면 아름다운, 품위 있는, 예술적인…… 과 같은 의미로 느껴지게 하는, 언어를 초월한 모습으로.
오늘 그는 금빛 문양이 자수로 놓인 새하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선명한 은발과 깨끗한 피부를 배경으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도드라지게 돋보였다.
흠 없는 이목구비는 오늘도 완벽했다.
너무도 순결한 모습이라, 안구가 정화되는 듯 화한 자극이 일었다.
세상의 더럽고 악한 것들은, 감히 그의 앞에 나설 수 없으리라.
‘언제쯤 적응이 될까?’
그러려면 황태자를 자주 봐야만 한다.
그건 한사코 사양이었다.
황태자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새겨졌다.
“어머님.”
파레사는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찰나지만, 황후의 뒤를 따르는 파레사에게 옮겨졌기에.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황후에게로 눈길을 고정했다. 낭랑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와 박혔다.
“오늘, 아름다우시군요.”
“나는 늘 아름답답니다.”
황후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늘 정확한 표현을 좋아하는 황후에게, 황태자의 말은 늘 모호했다.
그래서 비꼬거나 낮추어보는 듯이 들렸다.
“비슷한 말을 저도 늘 듣습니다.”
황후의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다.
“뭐라고요?”
읏음기를 보건대 농담이다.
하지만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한 말인가?
하나도 재미없다 못해 화가 뻗쳤다.
황태자의 안면을 빤히 쳐다본 황후는 입술을 바득 깨물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인정하기 싫은 기색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파레사가 슬쩍 말을 받았다.
“황태자 전하도 아름다우시지요.”
나름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시도였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살얼음 같은 분위기에 있긴 싫었기에.
“어디서 허락 없이 황족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이냐!”
바로 황후의 면박이 날아들었다. 원래 높으신 분들 앞에서도 할 말 잘도 했던 파레사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황족이 말을 걸기 전에, 나서는 것은 예법이 아니다.
황태자의 시선이 그제야 파레사에게 온전히 머물렀다.
“전속 시녀에게 안목이 있군.”
그렇게 슬쩍, 파레사를 대화의 대상으로 끼워주는 것이다.
황태자의 주목은 달갑지 않았다.
단숨에 심장까지 파고들어 속내를 꿰뚫는 듯한 예리한 눈빛.
아무리 아름다운 눈이라도, 그런 시선을 어찌 좋아할까.
‘나한테서는 신경 쓰지 말아 주셨으면. 황후 폐하와 대화를 나누라지.’
별로 끼고 싶었지 않았던 파레사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체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머님,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황태자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파레사는 살짝 갈팡질팡했다.
저 마차는 황태자의 마찬데, 자신이 먼저 타서 황후와 황태자를 태워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매뉴얼에 없는 내용이야.’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황후는 순순히 마차에 올랐다.
기피하듯 황태자의 손에 살포시 검지와 중지만을 얹고서.
이제 파레사와 황태자만이 남았다.
황후야 그렇다 치고, 황태자는…… 자신이 먼저 마차에 타서 잡아줘야 하는 걸까.
황태자에게 지적받은 적이 있어, 갈등하던 파레사가 정직하게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
황태자가 선량하기로 소문이 났다니, 이 정도는 봐주겠지.
파레사는 소문을 믿어보기로 했다.
“무엇을?”
“제가 먼저 타서 손을 잡아 드릴까요?”
근엄한 얼굴로 서 있던 황태자의 근위 기사가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아닌가?
반응을 보니 이게 아닌가 싶었다.
‘아, 그럼 같이 타는 게 아닌가 보구나.’
깨달은 파레사가 개의치 않고 물었다.
“저는 마부석에 타야 하나요?”
근위 기사의 허리가 격하게 굽어졌다. 그의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굉장히 우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우아하고도 차분한 태도를 지켰다.
그의 눈빛에 흥미가 감돌았다. 입가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전속 시녀는 스스로 배울 마음이 없는 것 같군. 내게 묻는 걸 보면.”
하긴, 이미 황태자의 방문은 예정되어 있었다. 미리부터 생각해뒀어야 하는 게 자신의 일이건만.
“시정하겠습니다.”
파레사는 깔끔하게 시인하고 답을 요구하듯 황태자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은 무례이기에.
그때 마차 안으로부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파레사, 왜 안 타니? 지체하면 안 된다면서!”
황후의 급한 성질머리가 도움이 된 건 처음이었다. 파레사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서둘러 타시라네요. 마부석에 타면 드레스가 상하니까 안에 타겠습니다.”
수선은 했지만, 소유권은 황후에게 있었다.
파레사는 가만히 선 황태자를 보지도 않고 먼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뒤에서 어쩐지 통곡을 참는 듯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리라.
황태자는 잠시 후에야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고도 파레사의 대각선 앞자리, 황후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좀 당황한 느낌이었지만, 착각일 것이다.
파레사는 폐쇄된 공간에서 지나치게 자극적일 그의 얼굴을 인지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자고로 눈을 현혹하는 것은 멀리해야 하는 법이다.
‘이제 더는 마법에 당하지 않겠어.’
단단히 결심하면서.
황후가 손을 뻗어, 파레사의 옆머리를 정돈해주었다.
“머리가 비뚤어졌잖니. 조심조심 다니라니까!”
황후는 제 작품이 훼손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주의하고는 있습니다.”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걸음을 내디디란 말이다. 그래야 옷도 머리도 상하지 않아.”
“예.”
파레사는 무심히 대꾸했다. 사람이 어떻게 깃털이 되느냔 말이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전속 시녀와 사이가 좋으시군요.”
왜 말을 거냐는 듯이, 황후의 눈매에 못마땅한 기색이 배였다.
“예, 모르는 게 많은 아이라 신경 쓰고 있지요. 오늘 사교계 데뷔를 할 것이니, 내 이 아이에게 집중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귀찮게 굴지 말라는 소리였다. 황후가 꾸준히 적개심 보임에도 황태자는 태연하게 흘려냈다.
“조금 늦은 편이로군요.”
제도에서는 보통 15세 내지는 16세 때 사교계 데뷔를 한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파레사는 적어도, 20대로 보였다. 황후가 퍼뜩 물었다.
“너, 몇 살이었지?”
서류로 파레사의 나이를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 터다.
파레사가 순순히 응답했다.
“스물넷입니다.”
“뭐?”
황후의 안면 가득 충격이 피어올랐다.
파레사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이 그보다 삭아 보이거나, 어려 보이나?
황태자 역시도 움찔하는 걸 보니,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잘못되기는 했다. 파레사가 예상치 못한 부분이.
“뭐? 자그마치 스물네 살이 되도록 사교계 데뷔를 못 했어? 아무리 뒤나미스에 살았다지만, 세상에!”
제국의 귀족들은 타국에 살다가도 자녀가 사교계 데뷔할 때쯤 되면 돌아와 무도회에 참석한다.
그만큼 중요한 행사였다. 반면 뒤나미스에서는 성년식이 있을 뿐, 무도회는 있어도 데뷔라는 개념은 강하지 않다.
황태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나미스?”
의심스러운 기색이 말꼬리에 묻어났다.
“뒤나미스에서 살다 왔다는군요.”
파레사는 무엄하게도 황후의 입을 쿠션으로 틀어막을 뻔했다.
감이 좋은 황태자에게만큼은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건만.
“아, 뭐 흠. 거기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떠나오기는 했지만, 신분이야 검증되었답니다. 베베 시종장이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요.”
황후가 큼큼거리며 수습했다. 역시라고 생각했을 황태자는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른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3년 전인가, 뒤나미스의 왕태녀를 만난 적이 있었지요.”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뱉었으리라. 저도 모르게 시선이 이끌렸다.
이제껏 줄곧, 피하고 있었던 황태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숨통을 틀어막을 듯한 강렬한 미가 시각을 덮쳐왔다.
헉. 가까스로 이성을 지킨 파레사는 부러 태연한 척했다.
“아름답고 강인한 분이시지요. 뒤나미스의 자랑이시랍니다.”
왕태녀야 뒤나미스에서는 워낙 유명하니까.
자신이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황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녀가 아니라 왕태녀? 후계자란 뜻인가? 하긴 뒤나미스는 종종 여자가 왕이 된다고 들었다.”
……생각보다 제국인들이 뒤나미스에 대해서 많이 아는군.
파레사는 황후가 똑똑해서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자연스레 배제했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정략결혼을 주선해 볼까요?”
진지한 목소리였다. 파레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황후를 쳐다봤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할 뻔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녀나 저나 후계자의 입장이라.”
황태자는 능숙하게 받아넘겼지만, 까딱 잘못하면 오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황태자를 뒤나미스로 치워버리고 싶다고.
그 말 자체는, 황후의 진심이겠지만 그녀에겐 두 아이가 있었다. 엄연한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태자의 동생들.
그들로 하여금 황위를 노린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다행히 황태자는, 그녀의 진심을 곡해하지 않았다.
곡해하지 않은 의미로도 충분히 기분 상할 만하건만, 그는 도리어 웃었다.
또다시 이상 현상을 초래하면서. 잔잔하게 빛이 일렁이는 환각이 비쳤다.
“그리 제 결혼을 걱정해주시니, 앞으로도 힘껏 도와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갚아주는 건가? 실시간으로 얼어붙는 황후의 표정을 보며, 파레사는 의혹을 품었다.
어찌 되었든 대화가 이뤄지는 동안, 부지런히 달린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봄 무도회가 열리는 황궁 외곽 건물의 홀 입구였다.
“저, 우리는 잠시 파우더룸에 들러서 매무새를 다듬어야겠어요.”
“그러시기를. 기다리지요.”
황태자를 따돌린 황후는 파레사를 이끌고 파우더룸에 들어섰다.
황후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이미 전달되었기에, 오직 그녀만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황후는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점검하고 파레사의 흩어진 머리카락까지 잡아주었다.
‘원래 이거 시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전문가는 황후다. 파레사는 왠지 모르게 수발을 받았다. 황후는 파레사를 거울 앞에 서게 했다.
“자 보거라, 네 모습이 어떤지.”
예의 그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을 마친 파레사의 모습은…….
“……둔갑한 것 같군요.”
윤이 나게 관리한 밤갈색 머리카락을 위에만 땋아, 은가루를 뿌린 하얀 꽃장식을 달았다.
그 아래 맑게 빛나는 물빛 눈동자.
무도회의 조명까지 고려하여 섬세하게 수선된 드레스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누구나 한 번쯤, 시선을 빼앗길 만한 모습이리라.
“둔갑이라니, 무슨 표현이 그래?”
눈을 흘긴 황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데뷔할 준비가 된 것 같구나. 그 녀석은 뭐, 알아서 잘 있다 가겠지. 어느 영애 하나 골라잡고 빨리 결혼해 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만.”
황후가 본심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돌연 다른 데 가닥이 닿은 그녀가 말했다.
“왠지 여자에 관심이 없더라니, 뒤나미스의 왕태녀란 말이지?”
“그런가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황태자는 다른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가 꺼내려는 말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왠지, 곤란해질 것 같은 예감.
황후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비장하게 내뱉었다.
“이제 나가자꾸나.”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이게 결투라면, 차라리 나았으리라. 승리할 자신이 있으니.
‘딱 한 시간.’
황후의 면만은 살려주고 나올 것이다. 그것이 봉급을 받는 전속 시녀의 의무이기에.
파레사는 결심했다.
* * *
“가시지요.”
황태자가 손을 내밀자,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만류했다.
“사교계 데뷔를 하는 아이가 있는데, 내가 주목을 받으며 들어설 수는 없지요.”
그 순간, 전율이 일었다.
황후는 번뜩이는 영감에 사로잡혔다. 신박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도 좋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그런 생각. 물론, 전적으로 그녀의 관점에서.
“그러니, 황태자가 내 전속 시녀를 에스코트 해 줬으면 좋겠군요.”
……예?
파레사는 귀를 의심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지나치게 질색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파레사는 소리를 죽였다.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는다고?
호사스럽다 못해 상황에 짓눌리는 듯했다. 조용히 데뷔인지 뭔지만 하고 빠져나가려던 계획은 이로써 허사가 되리라.
“사교계 데뷔잖니.”
황후는 그 말이 마법의 문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어르는 듯한 말투였다. 말린 장밋빛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황태자의 손을 잡고 등장한다면, 최상의 사교계 데뷔가 되겠지. 제도의 모든 귀족 영애가 꿈꾸는 순간이란다.”
저는 안 꿈꾼다니까요!
놓아 버리고 내지르면 수습이야 어떻든 마음은 편할 테지만, 파레사는 너무도 정신줄을 잘 챙기고 있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황태자는 능숙하게 상황을 이끌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님은 홀로 들어서시게 되니까…….”
그의 시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아까 경련하며 허리를 굽혔던 근위 기사가 거기 서 있었다.
“그렇지. 네가 어머님의 손을 잡아 드려야겠구나.”
다행히 약식 갑주라서, 무도회에 참석하기에 이상하진 않았다.
황가의 권능이란 무력으로써도 위력을 발휘하기에, 근위 기사란 형식일 뿐이다.
“예, 전하.”
졸지에 황후를 에스코트하게 된 근위 기사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황후는 새침하게 그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누군들 황태자보단 달가울 터.
“우리가 먼저 들어서도록 하지.”
황후는 냉큼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잡힐까 두려운 것처럼, 재빠르게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파레사는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둘이었다. 왜 둘이어야 하는지 모를 사람과.
황태자.
예쁜 바퀴벌레.
비록 황태자의 의향이 아니었지만, 그를 만나면 원치 않는 일의 연속이다.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발산하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큰 키로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빛은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가지.”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제 앞에 어른어른 떠다녔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주목을 피하고 싶었건만, 거꾸로 온 무도회 귀족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화려하게 사교계 데뷔를 하게 생겼다.
아마 거기엔, 뒤나미스에서 온 사람도 있지 않을까.
제 얼굴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예.”
파레사는 정신을 추스르고 결심한 듯 사뿐히 그의 손을 잡았다. 걸음을 옮기는데, 황태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리 내키지 않아 보인다면, 내 착각일까.”
아, 맞다. 이분 황태자였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절세미인.
권능이 실린 목소리는 실로 압박적이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너무 황송해서요. 그리고…….”
파레사는 그 사이, 머리를 굴려 그를 떨쳐낼 사전 작업을 해두기로 했다.
“황태자 전하와 비교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사교계 데뷔라 열심히 꾸몄는데, 전하보다 못나 보일 게 분명하니까요.”
“오늘은, 몰라볼 만큼 아름다우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예.”
칭찬은 칭찬이긴 한데. 파레사는 이상한 기분 속에서 깨달았다.
황태자가 괜히 모호한 표현을 썼던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 정확하게 ‘오늘은’이라고 지칭하는 걸 보면,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황후가 알았다면 길길이 날뛰었으리라.
‘너무도 정직하군.’
가면을 쓴 듯한 얼굴과는 반대로, 자기표현은 확실히 하는 황태자였다. 기분이 묘해졌다.
“거울은 얼마나 자주 보시나요?”
그도 다른 이들처럼 홀린 듯이 제 얼굴을 들여다보려나. 불쑥 내뱉은 파레사는, 아차 싶었다.
정신에 타격이 오긴 온 모양이다.
너무 편하게 말을 걸어 버렸다. 안 편하다 못해 멀어져야 할 사람에게.
하지만 황후와는 반대로 관대하기로 소문난 황태자는 웃었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마저 감미로웠다.
소리가 닿는 쪽 귀가 녹아드는 듯하다.
“남들과 다르지 않아. 매일 아침.”
그가 대답할 때쯤, 그들은 홀 입구에 서 있었다.
문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베베 시종장이었다.
그는 파레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알던 그녀가 아니리라. 하지만 시종장은 능숙하게 경악을 감추고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응? 못 알아본 건가.
아니, 그렇다면 이름을 물었을 텐데.
시종장은 경악한 나머지 해야 할 순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있기 힘든 실수였다.
파레사의 입장에서는 온 무도회장에 제 이름이 울려 퍼지는 걸 막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레사는 머리를 비우고 성큼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옆자리의 황태자가 모든 시선을 쓸어 담아주기를 바라면서.
화려한 조명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웅성이는 소리가 둔중하게 피부를 눌렀다. 그리고 따가운 시선들.
황가의 일원들이 항상 한 몸에 받던 그것이, 이제는 파레사에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주로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을 실은 채로.
“처음 보는 영애로군. 어느 가문의 누구지?”
“누구기에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 전하는, 무도회에는 잘 참석하시지 않는데. 그것도 파트너와 함께?”
“황족을 제외하면…… 그러신 적이 없지 않나. 놀라운 일이야.”
파레사는 출중한 청각으로 오가는 말들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랬구나. 역시 엄청나게 특별한 일이었던 거다.
진작 계획하고 있었던 걸까?
황태자가 싫다고 자신에게 떠넘길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사교계 데뷔를 명목 삼아!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먼저 들어선 황후를 발견한 황태자가 그녀를 인도했다.
“저기 계시군.”
에스코트를 마친 근위 기사에게서 떨어져 선 황후는 무도회장 한쪽에서, 제게 인사해오는 귀부인들에게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그 귀부인들은 차림이나 태에서부터 세가 높지 않은 이들인 게 티가 났다.
파레사는 시선을 옮겼다.
그녀와 완전히 반대되는 쪽에 삼삼오오 자리하여 담소를 나누는 귀부인이며 귀족 영애들.
무도회의 목적인 사교의 장을 이룩하고 있는 그녀들이야말로, 제도 사교계의 실세들이리라.
척 보기에도,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은지 인사조차 건네러 오질 않는다.
그들의 심경이 어떻건, 감히 제국의 황후에게 이런 무례라니. 황후는 자신이 섬기는 이가 아닌가.
이는 자신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감히.’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레사?”
이런. 파레사는 그제야 제가 황태자의 손을 힘주어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힘이 좀 센 편인가.”
황태자는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어루만졌다.
하마터면 황태자의 육체에 상해를 입힐 뻔한 파레사는 당황하여 다급히 물었다.
“저,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상하지는 않았겠지요?”
늘 자신의 무력을 신경 써 제어해야 하는데, 큰 실책이다.
“……그런 상황이 익숙한가?”
의심의 눈초리가 와 닿았다. 파레사는 재빨리 부인했다.
“아니요, 혹시 멍이 들었다면…….”
그녀의 눈빛에 고민이라는 두 글씨가 떠올랐다. 돈으로 보상해야 하나.
얼마나? 상대는 황태자인데. 받아둔 봉급이 있긴 하지만, 아까웠다. 몹시도.
“저, 제가 드레스도 액세서리도 없어서, 다 황후 폐하께서 빌려주셨는데.”
결국 파레사는 궁색한 티를 냈다.
“……보상은 필요 없다. 조금 욱신거렸을 뿐이니.”
다행히 황태자는 그녀의 가난을 안쓰럽게 생각했는지, 무탈하게 넘어가 주었다.
기묘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은 덤이었다.
‘그래, 황태자도 드레스도 빌릴 만큼 가난한 귀족 영애는 처음 보았겠지.’
파레사도 제가 그 신세가 될 줄은 몰랐던 터였다.
인생은 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여하튼 그들은 황후 앞에 무사히 다다랐다. 그들이 다가서자, 황후 주변에 몰려 있던 귀부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은근한 권능을 발산하며 접근하는 황태자의 존재 때문에.
“파리 쫓는데 제격이지.”
그가 그리 신랄하게 말하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놀란 눈을 보인 것도 잠시, 파레사는 재빨리 손을 놓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한시도 더 붙어 있고 싶지 않은 심리를 마치 황후처럼 표출하면서.
“황후 폐하, 그간 무도회는 즐기셨는지요.”
제가 듣기에도 비딱한 목소리였다. 움찔한 황후가, 도리어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황태자의 손을 잡고 사교계에 데뷔하다니, 이 얼마나 영광이니. 어서 감사를 표하렴.”
“아주 감사합니다.”
파레사는 냉큼 인사했다. 정반대의 의도가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인사를 시키려고 했는데, 저들이 가버렸구나.”
황후는 황태자에게 너도 가란 듯이 눈총을 주었다.
황태자는 부러 그린 듯이, 아찔하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번거로우신 것 같아서. 아마 곧, 다시 인사하러 올 겁니다.”
황태자의 눈길이 움직였다.
파레사가 아까 불쾌하게 바라본 그쪽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웅성이는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대화를 중단한 귀부인들은 고민되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비천한 출신의 황후는 무시할 수 있어도, 적통의 황태자를 무시할 수는 없다.
어찌 감히, 장차 제국을 다스릴 황태자를 상대로 견제 따위를 하려 들까.
사교계의 귀족들은 수그릴 대상만은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들은 시간을 끌지 않고 고개를 조아리며 들어왔다.
꽃잎처럼 넓게 퍼진 드레스를 끌고, 그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경망되게 빠르지는 않으나, 충분히 서두르면서.
“황태자 전하, 무도회에서 뵈온 것은 오랜만입니다.”
다소곳한 목소리가 황태자를 향해 흘러들었다. 일제히 예를 갖춰오는 귀부인들은 일사불란한 하나의 군대 같았다.
황태자를 향한 시선엔 흠모와 경탄만이 가득했다.
그때, 황태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권능이 실린 목소리가 홀을 지배하듯 힘 있게 뻗어 나갔다.
“나보다 먼저, 인사해야 할 사람이 있을 텐데.”
굳이 지목할 것 없이, 그 사람은 바로 황후였다.
“아아, 황후 폐하께서.”
“……계셨지요.”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네요.”
“황태자 전하께선 어쩜 이리도 사려 깊으신지.”
웃음으로 무마하며 그들을 서로를 쳐다보았다. 황태자와 황후는 형식적인 모자 관계로 알려져 있다.
비록 황후의 출신이 한미하더라도, 황제의 아내이니 관대한 성품의 황태자가 그녀를 대우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애초에 섞일 수 없는 관계.
무도회에도 드물게 나타나는 황태자였다.
황후와 함께 등장한 적은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는 처음이다.
혹여 불쾌감의 표현은 아닐까 눈치를 봤지만,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귀부인들은 재빨리 인사의 대상을 바꾸었다.
입가에 우아한 미소를 단 채로 태연하게. 황후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나긋나긋한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에 뵈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이쪽에 시선을 주지 않으시기에, 조용히 머물다 가시기를 원하시는가 하여.”
“잠시 존안만 비치다 가시는 줄 알았지요.”
“저희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제법 깍듯했으나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내용이 의미심장했다.
자신들은 황후의 심기를 살폈을 뿐이고, 결국 자신들에게 먼저 아는 척하지 않은 황후가 문제란 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황후의 가슴께에 머무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경탄할 만큼 호화로운 목걸이였다.
“방해랄 것은 없소.”
냉랭히 대꾸한 황후는 주저 없이 정곡을 찔렀다.
“남은 인사는 황태자에게 하길 바라오. 그걸 바라고 온 게 아닌지.”
파레사는 문득 황후의 눈을 쳐다보았다. 말린 장밋빛 눈동자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마치 그 안에 폭풍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옆에 있는 이를 소개해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태자는 황후가 잊은 용건을 챙겨주었다.
반듯한 얼굴은 가면을 쓴 듯이 완벽해서,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황후는 못내 움직였다. 황태자가 준비한 무대 위에서 노니는 기분이 달가울 리 없지만, 해야 하기에.
이제껏 해야 하기에,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만큼은 온전히 그녀의 의지였다. 황후가 파레사를 향해 손을 펼쳤다.
“파레사 멘젤. 내 전속 시녀로, 조금 늦은 나이에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었소.”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 속에서, 파레사는 앞으로 나아가 인사했다.
“파레사 멘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황태자를 따라 하듯 미소를 베어 문 채였다.
이제는 제가 처한 상황에 적응이 되었는지, 아무 느낌도 없었다.
면접을 본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미 거울을 보고 수도 없이 연습했으니까.
귀부인들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심, 황태자와 함께 등장한 파레사의 정체가 궁금했던 터였다.
그런데 황후의 전속 시녀라니?
소문이 빠른 귀부인들은 이미 파레사의 존재를 알았다.
수도 없이 전속 시녀를 갈아치운 황후가, 드디어 잠잠해졌다고 소문이 퍼진 터.
방치해 놨던 악의적인 소문도 단속한다는 둥, 이전과는 행보가 달라졌다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황후가 변화를 보이는 원인이 새 전속 시녀라는 추측이 무성한 때에, 떡하니 무도회에 등장한 이 영애가 그녀라니.
얕보는 것과 별개로, 그들도 황후가 까다롭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서 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았지?’
대단한 여우이거나,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점이 있거나.
어쨌든, 그 특별한 점은 눈으로 보기에 뚜렷했다.
“아름다운 영애로군요. 특히 눈동자 색이 독특하고 맑아요.”
“황태자 전하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데, 어찌나 눈에 띄던지.”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답니다.”
내가 들어올 때, 다들 황태자한테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예 묻히지는 않았나 보다. 기껏 영혼까지 뽑아내며 꾸몄는데 다행이었다.
파레사가 냉큼 인사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서두를 곱게 시작했으니, 이제는 좀 더 파고 들어볼까.
노련한 귀부인들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헌데 멘젤이라는 가문은…… 처음 들어보는군.”
“제도의 귀족은 아닌가?”
“시골에서 왔습니다. 아마, 말해도 모르실 거예요.”
“그렇군요.”
귀부인들이 서로에게 은근한 눈짓을 건넸다. 제도 사교계의 장벽은 견고하다.
지방에서 온 하급귀족 따위와는 말도 제대로 섞어주지 않는 게 그들이었다.
밑바닥에 자리한 이들이 그들에게 달라붙어 조금이라도 주류에 끼이려고 발버둥 치는 모양새를 지켜보는 건,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단숨에 머리 위에 올라앉은 황후야 완전히 규칙을 깨는 경우였지만.
그렇다면 이 영애는 뭔가? 황후의 전속 시녀. 그 사실은 별 게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의 손을 잡고 들어왔는데?
“시골에서 온 것치고는, 세련된 꾸밈새야.”
귀부인 하나가 칭찬했다. 일단은 우호적으로.
그러나 칭찬도 그럴 만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은 진심.
파레사만 소개해놓고 도도하게 모른 척하고 있던 황후의 고개가 슬쩍 움직였다.
내 솜씨란다! 내가 이 아이를 꾸몄다고!
그리 외치고 싶은 속내를 누르며, 황후는 고개를 되돌렸다.
제가 그리 말하면 그때부터 괜스레 깎아 내려질 게 뻔했기에.
또한, 파레사가 온전히 주목을 독차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려고 했는데, 황태자가 또 끼어들었다.
“황후께서 신경을 써 주신 걸로 압니다. 내 눈에도 무척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이는군요.”
다들 흠칫하며 황태자를 주목했다. 황후조차도.
판단할 수 없었던 그의 속내가 그 말로서 좀 더 분명해졌다.
그는 귀부인들에게 황후를 황후로서 대우해줄 것을 은근한 방식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저 무도회에 함께 참석했기 때문에, 사려 깊은 그답게 특별히 배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그러하길 바라는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아아, 그렇군요.”
“역시, 안목이 있으셔요. 저 드레스를 보고 무척 놀랐답니다.”
“어찌 저런 색감을 생각해내시는지. 머리 위의 꽃장식 또한 독특하고 아름답군요.”
“아마도 베누스 자작부인의 솜씨겠지요? 저도 황후 폐하의 드레스를 보고 누군지 궁금해 했었는데…….”
말실수 한 젊은 귀부인이 입을 스윽 다물었다.
슬며시 밀려드는 눈총이 따가웠다. 황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부셰 백작 부인의 드레스도, 베누스 자작부인의 솜씨인 것 같군.”
파레사는 지목된 귀부인의 드레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지?’
나름 패션을 공부했음에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황후가 그렇다면 그럴 터.
“얼마 전, 그녀에게서 드레스를 몇 벌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부셰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후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일전에 인사한 적이 있지 않았나.”
백작 부인의 뺨이 달아올랐다.
아무리 무시당하는 황후라지만, 부셰 백작 부인의 입장에서는 구름 위에 있는 존재.
이 부인은 최근에 제도로 상경한 변경백의 아내였다.
멋모르는 때에 사교계에 데뷔하여 마침 드물게 무도회에 참석한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 그녀를, 다른 귀부인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녀의 남편은 능력이 뛰어나 황제가 중히 여기는 자. 기본적인 자격은 있었다.
사교계의 주류를 차지하는 귀부인들은, 누군가 황후와 가까워질 기미만 보이면 예외 없이 쓸어가 저희들 속에 끼워 넣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셰 백작 부인은, 자연히 까다로운 귀부인들의 호의 속에 그들의 무리로 편입되었다.
제도 사교계의 흐름은 정치적이면서도, 배타적이었다.
그것은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문화이며 역사였다.
그렇기에, 어렸던 황후는 그들을 다스리지 못했고 고착된 채 현재의 상황에 이르렀다.
이어져 내려온 흐름을 바꾸려면 시발점이 있어야 한다. 파레사의 등장이 그 시발점이 될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귀부인들은 서둘러 그들의 대화를 무마시키려 했다.
“황후께서는 아무래도, 무도회를 즐기지 않으시니.”
“기억하실 만도 하지요. 아무렴요.”
“물론, 기억력도 뛰어나시지만요.”
그러니 특별한 것은 아니며, 네가 친해야 할 사람은 무도회에 자주 참석하는 우리다.
부셰 백작 부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순간, 황후가 코웃음 치며 내뱉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말하는군.”
어디다 대고 아는 척이야?
파레사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일순, 공기가 몹시도 팽팽해졌다.
때맞춰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제가 만들어 놓은 상황을 관조하듯 지켜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다들, 무도회를 즐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 그럼요. 더 이상 방해치 않겠습니다.”
“부디, 두 분 모두 무도회를 즐기시기를.”
“제 파트너가 저기 있네요.”
“저도요.”
“레이디 파레사,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자리를 비켰다. 아무리 황태자가 있다고 한들, 황후가 함께다.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분위기는 참기 힘들었다.
“흥, 모기떼 같은 것들.”
음악을 뚫고 선명하게 황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황후의 눈빛에 환멸이 어렸다.
‘모자는 맞는 것 같군.’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귀부인들은 황후 가슴께의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았으면서도 끝끝내 칭찬 한마디 건네지 않고 떠나갔다.
물론, 그녀의 곁에는 보석보다 빛나는 황태자가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사실이 황후의 기분을 더 저조하게 했다.
“어머님, 우선 한 곡 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단 춤을 추면 할 건 다 한 게 되니까, 떠나도 좋다.
무도회장을 벗어나고픈 황후의 심정을 헤아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불쾌한 상황을 초래한 게 누구던가. 황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글쎄요,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군요.”
“참석한 이상 황족이 무도회의 첫 춤을 시작하는 것이 예에 맞습니다.”
모두가 그들을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는 압박적인 상황에 굴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렇다면 황태자가 춤을 추면 되겠군요. 마침, 에스코트하고 온 사람도 있으니.”
“예?”
파레사가 반문했다. 아직 끝이 아니었던가. 벼락 맞은 나무 위에 또 벼락이 떨어지는 꼴이었다.
그렇게나 재수 없는 상황이라니!
“황후께서 함께하시는 게 맞습니다. 이미 제게 너무나 큰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빠르게 쏟아낸 파레사는 몇 걸음 물러섰다.
“과분하다 못해 압사할 지경입니다.”
너무 거칠게 들리지 않도록, 그러나 자신의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도록.
파레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황후에게 그만큼 강렬한 눈빛을 보여본 적 없는 그녀였다.
하지만 황후는 움찔하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괜찮다. 압사라니, 표현이 과하구나. 너는 젊으니 과분한 기회라도 움켜쥐려는 패기가 있어야 하거늘!”
파레사는 단호했다.
“저는 패기가 뭔지 모릅니다.”
“촌것이 황태자와 춤출 기회가 왔으면 감사히 낚아채야 하는 게 아니냐!”
황후의 언성이 버럭 높아졌다. 음악 속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 무도회의 모두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하는 황태자를, 앞다투어 거절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적나라한 단어까지 동원해서.
낯설고도 모욕적인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당사자는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워낙 속내를 잘 감추기도 하지만, 황태자의 표정은 차분했고 입매엔 약간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선택권은 제게 있는지요.”
“선택권이 어디 있어! 황태자는 어서, 저 아이의 손을 잡도록 해요.”
가까스로 화를 누른 황후가 지시하듯 턱짓했다. 그녀가 황태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황태자와 춤을 추고 싶지 않았다.
이미 기분도 저조한데, 거기까진 했다간 지나친 화로 무도회장 복판에서 졸도할지 모른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황태자는 놀랍도록 순순히 따랐다.
“가시지요, 레이디 파레사.”
이건 놀리는 건가. 파레사는 또다시 제 앞으로 들이 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찌푸려지는 표정을 수습했다.
황후와 달리, 그녀는 인내심이 강했다. 자기소개서에 쓴 그대로.
상관인 황후가 시키는데, 도리가 있을까.
그래도 춤까지는 설마 했건만. 파레사는 포기한 심정으로 그 손을 잡았다.
“영광입니다.”
왠지, 오늘부터 영광이란 단어를 싫어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딱 한 곡만 추자.
파레사의 결심은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
황태자라고 해서 자신과 계속 춤추고 싶을 리 없을 테니 수월하리라.
더 이상 그와 엮였다간 이상한 소문까지 번질 수 있으니까.
황태자와 스캔들…….
파레사는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무도회장을 탈주하고 싶은 충동이 폭발할지도 몰랐기에.
황태자는 능숙하고도 우아하게 그녀를 이끌어갔다.
무도회장 정중앙에서 시선을 받으며 선 파레사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 황태자 전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황태자는 난데없는 상황에도 태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황태자다웠다.
“제가 춤에 미숙하여 혹시 발을 밟을지도 모릅니다.”
황태자의 대답은, 괜찮다거나, 그러면 안 된다는 말 모두 아니었다.
“잘 피해 보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눈에 박히는 미소를 피해 파레사는 시선을 대각선 아래로 낮췄다.
맞은편 위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전하다.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압도적인 미가 마치 태양처럼 자리하고 있으니까.
태양이 눈을 멀게 하듯, 그의 시각적 위험성은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방식의 공격이다.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이 전주가 끝나면 바로 본 곡이 시작된다.
파레사로서는 생판 처음 무도회에서 추는 춤이었다.
‘그 상대가 란티어스 제국의 황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게 꿈이라면 악몽이리라.
그때 불쑥,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나도 말해둘 게 있는데.”
올려다보려던 파레사는 부리나케 눈을 내리깔았다. 위험할 뻔했다.
“기절하지 마.”
“예?”
내가 아무리 긴장했다고 해도 설마 기절까지 할까. 그렇게 연약한 체질이 아닌…… 가만.
‘그런 뜻이 아닌가?’
황태자의 목소리가 곤혹스러운 듯이 흘러들었다.
“실은 어린 시절에, 몇 번 귀족 영애와 춤을 추었는데 그때마다 상대가 기절을 해서.”
아아……, 그런 뜻이구나.
뭔가, 할 말이 사라지면서도 납득이 되는 묘한 기분이었다.
“서로 노력해보죠.”
그는 열심히 피하고, 자신은 발을 밟지 않으며 기절하지 않도록 노력…….
뭔가 이상한데.
황태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곡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황태자의 발등을 짓밟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파레사는 숙지한 동작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내며 실현했다.
다행히 몸으로 하는 거라선지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다. 그건 황태자 덕도 컸다.
그는 아주 유연하게 파레사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의 동작에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하게 보이리라.
의외라는 말투로 질문이 떨어졌다.
“생각보단 잘 따라오는데. 날 겁주려고 했나?”
“제가 이 정도로 잘해낼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 말에 왠지 황태자의 입이 닫혔다. 그의 당혹스러운 침묵에 파레사는 만족했다.
괜히 말을 섞었다간, 정신만 흐려진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피부를 뚫고 파고드는 듯한 자극성이 있었다.
얼마간 빠른 리듬을 탔던 곡이 느려지고 있었다. 곧 끝나리라.
황태자는 문득 파레사의 얼굴에 서린 근심을 발견했다.
“왜 그리 표정이 어둡지?”
파레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황태자 전하와 춤을 췄다고 암살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요.”
황태자를 선망하는 이들이 많다지? 누군가는 격분하여 일을 칠지도 모른다.
이쪽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시도에 그치겠지만.
“……황실의 사람을 암살하는 것은 반역죄이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모함을 당할 수도 있고?”
“소설을 즐겨보나 보군.”
“현실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파레사는 뒷말을 삼켰다. 황후조차도 그래서 피해갈 수 없었지.
그녀를 둘러싼 더러운 소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어떤 모함에 당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의 인간은 소설보다 더럽고 음습하니까.
“황가의 일원이라면 구설에 휩싸이는 것은 예사지.”
차분하나, 속내가 읽히지 않는 목소리다.
부러 감정을 소거한 것처럼. 그는 때때로 그런 목소리를 냈다. 그의 가면 같은 표정과 마찬가지로.
무릇 군주라면 머리는 얼음처럼 차되 늘 호수처럼 잔잔해야 하는 법. 감정에 지배받아서도 휘둘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감정은 거기에 있었다. 그 호수의 밑바닥에.
파레사는 불현듯 황태자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는 단순히 황제의 명 때문에, 혹은 의무 때문에 황후를 도우려 하는 걸까.
“날 때부터 황가의 일원이라면 자연히 경외가 따르지요. 구설은 그렇지 못한, 만만한 이에게 따른답니다. 악의란 원래, 낮은 곳을 향하기 마련이니까요.”
황후를 황후의 자리에 올린 것은 황제인데, 온전히 그 악의를 받아내고 있는 것도 황후이듯이.
물빛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맑지만, 강인한 빛이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황태자가 고저 없는 말투로 물었다.
마치 파레사의 의견에 따르기라도 할 것처럼.
파레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강렬한 어떤 상념이 황태자와 가까이에서 시선을 마주하고도 흔들리지 않게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푸른색과 녹색이 한데로 녹아든 그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눈.
그에겐 악의를 불식시킬 수 있는 힘이 있고, 반대로 악의의 주인이 될 힘도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나 박대하는 데도 적으로 돌아서지 않으니 다행이지.’
그는 이복 아들로서 제 역할에 사감 없이 충실했다.
하지만 황후는 그렇지 못했다. 황태자를 볼 때마다 사감이 그득했으며 반드시 티를 냈다.
현명하다 할 처신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황후였다.
파레사는 있는 그대로 그녀의 감정을 존중했다. 바퀴벌레와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황후는 꽤나 이성적이었다.
‘이 황태자는 호의로도 황후의 운명을 흔들 수 있는 존재지.’
그런 존재는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되었다. 특히나 황태자의 도움은, 그를 지극히 싫어하는 황후가 원치 않는 것이기에.
전속 시녀는 어디까지나 황후의 뜻을 받들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 이래저래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됐다.
과거를 숨긴 자신이 황가의 일에 관여하는 것도 바른 일은 아니다.
판단을 마친 파레사는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는 스스로 배우실 마음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런 것을 시녀에게 물으시다니.”
그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바라보자니, 왠지 모를 통쾌함이 찾아들었다.
그간 맺힌 게 있었나?
파레사는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었다.
“아드님이시니, 직접 판단하셔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깔끔하게 매듭지은 파레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곡이 끝났군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놓고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결심한 대로 한 곡이 끝났다. 이제는 퇴장할 시간.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전처럼 차분하다기보다는 어쩐지, 집요하리만치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설마 한 방 먹었다고 나한테 원한을 품은 건 아니겠지?
성품이 좋기로 소문난 황태자이니 그런 건 아닐 테지. 갑자기 후회가 찾아들었으나, 파레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좀 별나긴 해도 황태자에겐 그저 황후의 전속 시녀에 불과할 뿐이다.
대단한 인상을 남기진 않았을 터.
“빨리 나가자꾸나.”
파레사가 오자마자 황후의 재촉이 떨어졌다. 황태자가 오기 전에 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자는 뜻이다.
일단 함께 입장했는데, 그래도 되나?
고민은 잠시, 파레사는 황후의 뜻에 편승하기로 했다. 전속 시녀라는 건 이럴 때 편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화려하지만 다사다난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