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8
Chapter 8
* * *
‘오랜만의 외출…… 아니구나.’
얼마 전에 베누스 의상실을 방문했었지. 아침 무렵 황궁에서 빠져나온 파레사는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를 가볼까.’
일단 여관을 잡고,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어 볼까.
휴일까지 해서 휴가는 이틀이다.
첫날은 좀 돌아다니고, 둘째 날은 책을 읽으며 쉰 뒤 느지막이 복귀하는 거다.
‘전에 묵었던 여관이 괜찮았던 것 같은데.’
황태자가 내주었던 황실 여관이 더 괜찮았지만, 거긴 척 봐도 비싸 보였다.
게다가 거기 가면 자신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내키지 않았다.
‘좋아, 전에 묵었던 여관으로 가자.’
그곳은 황궁에서 좀 떨어져 있었다. 도보로 3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마차를 잡아타려던 파레사는 멈칫했다.
마차를 잡아타도 행적이 남는다. 그리고 얼마 전 마차 납치를 당할 뻔했었다.
‘걸어가자.’
파레사는 튼튼한 두 다리로 걸음을 내디뎠다. 주변 풍경을 무심히 쓸어보면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기에 누구도 그녀가 전속 시녀라는 걸 알아볼 수 없었다.
‘황태자는…….’
그날 뒤로 황후궁으로 날아드는 초청장도 뚝 멎었다.
그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리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에게도 마음의 정리라는 게 필요한 걸까? 그 점은 의문이었지만…… 황태자도 사람이니까.
‘황후의 전속 시녀가 된 것도 모자라 황태자를 차기까지 하다니.’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파레사였다.
최종 종착지가 수렁이 아니기를 바랄 뿐.
당연히 황후는 의아해했다.
‘이 녀석, 왜 이리 소식이 없지? 불길하게. 원래라면 초청장이 올 만도 한데…….’
초청장이 오지 않으니 기쁜 게 아니라 불안했다.
왠지 파레사를 대신 보내는 것으로 때울 수 없는 짓을 벌일 것 같아서.
‘간택 무도회에서 저와 함께였으니, 이제 거리를 두시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파레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왠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나 할까? 황태자가 파레사에게 관심이 있는지 의심했다가도, 금세 의심을 지운 황후다.
괜히 소란만 발생할 뿐이다. 끝난 일을 들춰낼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너그러운 황태자라고 해도 일개 시녀에게 거절을 당했다는 데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니까.
‘설마 황후 폐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는 아닐 거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딱히 황태자에 대해 확신할 만한 무엇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상념이 흐르는 사이, 파레사는 어느덧 여관에 도착해 있었다.
방을 잡고 간단한 짐을 내려놓은 파레사는 바로 여관을 빠져나왔다.
놀러 돌아다니다 보면 기분도 한층 나아질 터.
그럴 계획이었는데…….
‘이 마차,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번화가로 향하려고 여관 앞에 있는 마차를 탄 파레사는, 얼마 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차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탓이다.
‘또 납치?’
이번에는 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데려가려는 건가. 대체 누가?
물론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었다.
파레사는 마차 안을 빠르게 훑어보며 쓸만한 무기가 있는지 파악했다.
딱히 쓸만한 물건은 없는 듯하다.
‘뭐, 맨손으로도 문제는 없지.’
짧은 시간 결론을 낸 파레사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마부석으로부터 질문이 날아왔다.
“파레사 멘젤,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시지요?”
움찔. 파레사는 들어 올리려던 손을 내렸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걸 굳이 이야기하는 건 안심하라는 의도다.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찾으시는 분이 있어서, 그리로 가는 겁니다. 이야기를 마치면 안전히 돌려보내 드릴 겁니다.”
“찾으시는 분?”
“곧 도착합니다.”
마부는 그것으로 더 이상 입 열지 않았다.
정중한 목소리와 발음. 귀족가의 마부란 건 틀림이 없다.
파레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무사히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어떻게 믿지?’
파레사는 마부를 공격하거나 마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지 못하는 장소.
자신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진 못하겠지만, 굳이 함정일지 모르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까.
‘하지만…… 이건 기회일지도.’
에레스 공작 부인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면 차라리 좋다.
황후의 전속 시녀를 살해하려고 하는 건, 황녀의 신분으로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중죄.
단숨에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었다. 모든 게 명쾌하게 결론지어진다.
‘그래, 그토록 날 만나고 싶다는데 못 만날 건 또 뭐가 있겠어?’
차라리 따라가서 확실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무도회니 뭐니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은 결국 황후의 일.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이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도착했습니다.”
어디 교외의 한적한 저택도 아니다, 떡하니 제도 내에 위치한 대저택.
그것도 마차가 달린 방향과 시간을 보건대, 황궁 쪽이었다. 황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대저택이라면…….
에레스 공작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예스럽고 웅장한 외관이 범상치 않았다.
황후의 전속 시녀를 납치하다시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오는 그 대담함에 파레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네가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냥 데려오면 그만이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오싹하면서도 음습한 방식으로 자신의 위력을 파레사에게 과시했다.
숨길 필요조차 없다는 것처럼.
저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파레사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녀의 위협이 자신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 * *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집사는 파레사를 어떤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파레사는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은은하게 빛이 비쳐드는 고풍스러운 방안에는 한 귀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에요.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양해 해주기를.”
고상한 말투로 울려 퍼지는 말소리였으나 양해를 입에 담는 표정은 상냥하지만은 않았다. 미소 짓는 얼굴도 어딘지 차가웠다.
“아닙니다, 에레스 공작 부인.”
파레사는 차분히 대답했다.
“이런 식이 아니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황후 폐하께 편지를 보내어 저를 부르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거절하면 그만이겠지요, 앉으세요.”
파레사는 에레스 공작 부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가운데 놓인 티테이블에는 이미 두 개의 찻잔과 찻주전자가 세팅되어 있었다.
찰랑거리는 붉은 찻물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한 모금도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당연하다.
“파레사 멘젤, 황후의 23번째 전속 시녀.”
가느다란 목소리가 무심히 그 사실을 읊조렸다.
그녀의 눈은 관찰하듯이 파레사의 안면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떨어진 질문에,
“황태자비를 꿈꾸나요?”
파레사는 바로 눈을 찡그렸다.
“전혀요.”
“입이 꼭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죠. 아무 마음이 없이, 간택 무도회란 자리에 따라왔을 것 같지는 않고.”
“제게 선택권이 없는 일이었어요.”
“황후의 전속 시녀인데…… 선택권이 없다니? 그 말은.”
에레스 공작 부인의 눈에서 기묘한 빛이 번뜩였다.
“황후가 밀어 넣은 자리라, 그런 뜻인가요?”
“그건…….”
“단단히 미쳤군.”
싸늘한 말투였다. 파레사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제 저택, 제 영역에서는 오만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에레스 공작 부인, 니시아나.
이것이 그녀의 본성에 가까우리라.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파레사는 차분히 설명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저를 빌려달라는 청을 받아들이신 것뿐이에요. 아시다시피 황태자 전하는 간택 무도회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지요.”
그리고 힘주어 덧붙였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황후 폐하뿐만 아니라 황태자 전하까지도 모독하신 거고요.”
양쪽 다 문제가 있지만, 전자를 신경 쓰지 않는 공작 부인도 후자는 염두에 둘 터였다.
하. 공작 부인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서 내가 황태자에게 미쳤다고 말했다고 고하기라도 하겠다는 뜻이려나?”
“못할 것도 없지요.”
고자질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아니, 황태자와 당분간 말 섞고 싶진 않지만…….
황태자와 에레스 공작 부인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건 황후에게도 유리한 일이니까.
‘어차피 공작 부인이야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붙이면 그만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래 봬도 정직함으로 제법 신망을 얻은 파레사다. 적어도 황후와 황태자만큼은 제 말을 믿게 할 수 있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배짱만은 마음에 드는군…… 아니, 배짱뿐만이 아니야.”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사뿐히 경멸을 뱉어댔다.
“기껏 밟아 놨더니 어느덧 잘도 활개를 치고 돌아다녀. 부셰니 뭐니 지방 것들을 긁어모아 무리를 만들지를 않나. 그걸 망쳐놨더니, 홀로 자선 파티에 나가질 않나. 제법 꿋꿋해졌어? 그런데 그녀가 영 딴판이 된 게 새로운 전속 시녀가 들어오고서부터란 말이지.”
황후에 대한 소리다. 파레사는 에레스 공작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황후 폐하께 도움이 되어드린 것뿐, 애초에 많은 분야에 소양과 조예를 갖추신 분이에요. 또한 대외행사에서 충분히 자신을 증명하고 계시지요. 그러니 출신만으로 황후 폐하를 폄훼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분명한 말투였다.
이런 곳까지 불려와 놓고는 위축되기는커녕 제 할 말 다 하는 파레사를 보면서 공작 부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 황후에게는 아까운 시녀로군.”
그녀의 몸이 앞으로 조금 기울여졌다.
그녀는 비밀을 고백하듯이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고는 상관없답니다. 나는 황후를 짓밟고 싶거든.”
악의.
그렇게 표현할 수 없는 사악한 무언가가 그 고상한 얼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제게 뭔가 있는 건가.
황후든, 황태자든, 에레스 공작 부인이든…… 파레사에게만큼은 완전히 가장을 벗어낸 맨얼굴을 보인다.
하지만 날것 그대로의 다른 두 사람은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 매혹적으로 마음을 끌었다.
그에 반해 이 여자는…….
너무도 역겹다.
공작 부인의 천사 같은 새하얀 얼굴은 그녀의 추악함을 대조적으로 부각했다.
베어버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불쾌감과 함께 치미는 혐오감에 파레사는 말을 골랐다.
잇새로 미세하게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후 폐하께서, 황후가 아니게 되시길 바라십니까?”
그걸 바라고 움직이는 걸까.
황후가 분수에 어긋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겨서, 끌어내릴 수 없다면 알아서 내려오게 하려고.
그러나 에레스 공작 부인은 웃었다.
그녀의 두 푸른 눈동자는 뻥 뚫린 구멍을 보는 양 새카맣게 보였다.
“내 의도는 알 것 없고, 여기에 부른 이유는.”
다시 가면을 뒤집어쓴 공작 부인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내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전속 시녀를 그만둬요.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지요.”
주저 없이 입술이 움직였다.
“거절…….”
“잘 생각해요. 그 거절이, 무엇을 초래할지를. 당신 앞에 있는 게 누군지. 나는 힘없는 황후가 아니야.”
은근하게 낮아진 목소리는 협박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래, 눈앞에 있는 것은 제도의 사교계를 장악한 권세 높은 황녀다.
하지만 파레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신이 나한테 위협을 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대로 지껄이는 당신을 내가 베고 싶거든. 꽤나 강렬한 충동이었다.
“어리석군요. 후회하게 될 거예요.”
파레사는 대꾸하지 않고 바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역시 쓸데없는 볼일이었다. 들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
파레사는 공작 부인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악인을 이해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이니.
파레사는 비위가 약한 편이었다. 면전에서 본 그 추악함과 타협할 일은 결코 없다.
방을 빠져나온 파레사는 복도를 걸어오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잡쳤어.”
기껏 잡은 휴가인데 이따위 일로 시간 낭비하다니. 어서 떠나야겠다.
입구 쪽으로 나가려던 발길이 뚝 멎었다.
넓은 정원 너머로 서 있는 대문을 쳐다보며 파레사는 생각했다.
‘……그래도 마차는 빌려야지.’
여기서 번화가까지 가려면 또 한참을 걸어야 할 거다.
파레사는 곧바로 제가 타고 온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부는 했던 말을 지켰다. 그는 그대로 파레사를 번화가까지 실어날라 주었다.
그날 하루, 파레사는 내내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즐겁게 놀았다.
여관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황후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낮에 황제와 함께 올로고스의 사신단과 오찬을 가졌을 텐데, 그 자리에는 요한나 왕녀도 있었을 터.
파레사로선 쓸데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다음 날, 느지막이 오후까지 여관에서 쉰 파레사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황궁으로 향했다.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파레사는 걸어서 이동했다.
아무리 위협이 되지 않는대도 자꾸만 벌어지는 납치사건이 달가울 리는 없다.
‘당분간 마차를 타기 싫어질 것 같아.’
역시 황궁에서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
결심한 파레사가 막 황궁 입구에 가까워질 때였다.
“거기!”
어디선가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파레사는 그게 저를 향한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달려와 제 앞에 떡하니 서기 전까지는.
그 여자는 기세 좋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열어젖혔다.
파레사는 흠칫 놀랐다. 상대는…….
‘왜 여기에 있지?’
올로고스의 왕녀, 요한나. 그녀가 제 앞에 서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당당한 자세로 팔짱을 낀 요한나가 파레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파레사, 기다렸어요. 휴가를 갔다고 들었는데, 이제야 돌아온 모양이군요.”
무도회에서 봤으니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놀란 와중에도 파레사는 머리를 굴려 연기해냈다.
“왕녀님?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신지. 저한테 용건이 있으신가요?”
차라리 질투심에 황태자와 춤을 춘 여자를 찾아온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마저 들 만큼 급박한 위기였다.
요한나는 끝끝내 파레사의 기대를 배신했다.
“그럼요, 용건이 있지요. 그 얼굴, 그 목소리!”
파레사를 향해 그녀의 검지가 찌를 듯이 겨누어졌다.
“역시 그렇군요, 벨로나 나이트 파레사.”
벼락을 맞은 듯했다.
움찔한 파레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정색하며 말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저는 일개 시녀인데.”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만.”
그녀를 지나친 순간, 요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확신이 깃든 말투. 그러나 파레사는 부인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절대적으로 잘못 봤다.
벨로나 나이트라니? 자신은 그저 황후의 전속 시녀일 뿐이다.
파레사는 그렇게 생각하면 마치 그게 현실이 되는 것처럼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 세뇌는 파레사에게 제법 그럴듯한 연기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파레사의 완벽한 연기는 그녀에게 먹히지 않았다.
뒤를 졸졸 따라오며 요한나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때 무도회에서 본 순간, 낯이 익었다 싶었는데……. 이름을 듣고 바로 알았어요. 그런데…… 왜 당신이 여기에 있지?”
“오해세요.”
“오해 아니라니까! 아, 뭐 비밀리에 파견된 건가. 내가 눈치 없이 알은척했나?”
요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레사는 그녀를 싹 무시하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다다다 달려온 요한나는 파레사의 옆에 섰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파레사의 걸음을 따라왔다.
천진한 느낌의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요한나가 의심쩍게 물었다.
“정말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오직 진실만이 뚝뚝 묻어나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요한나는 재차 물었다.
“맹세할 수 있어요?”
“그런 것에 맹세는 안 합니다.”
파레사는 그녀의 등 너머로 황궁 입구를 쳐다보았다.
거의 다 왔는데…….
이 여자는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지.
‘내가 휴가 간 것도 알고 있었지.’
오찬 자리에서 황후한테 들었나? 입이 싸시기도 하지.
여하간 여기서 떼어놓더라도, 그녀는 황궁 안쪽까지 따라올 수 있으니 의미가 없다.
요한나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난 맞는 거 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황후와 황태자한테 내가 아는 이 사실을 다 말하고 다녀도 상관없어요?”
어제는 에레스 공작 부인한테 협박을 듣고, 오늘은 올로고스 왕녀한테 협박을 듣고.
운수가 사나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굴할 인물은 아니다. 파레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왕녀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 그런 걸 함부로 말씀하시고 다니면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요.”
요한나의 의심을 이용한 대답이었다.
만약 파레사가 첩자라면, 요한나가 하는 짓은 뒤나미스에 불이익이 되니까.
요한나는 검지로 턱을 짚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그럼 뒤나미스의 왕태녀한테는 말해도 되나?”
그 말을 들은 순간, 파레사의 걸음이 뚝 멎었다.
요한나가 씩 웃었다.
“알았다, 도망쳤구나!”
파레사는 먹구름이 서린 눈빛으로 요한나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지?
그렇다면…….
잠시 후 그들은 나란히 입구를 지나쳐서 황궁으로 들어섰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숙소로 갑니다.”
일단 숙소 인근에서 이 왕녀를 떼어내고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골이 지끈지끈 아팠다.
조금 전, 결국 자신의 정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파레사였다.
‘네, 제가 그 파레사가 맞습니다.’
‘그 봐 맞잖아!’
‘……저 그런데, 제가 숙소로 돌아가 봐야 해서. 나중에 이야기하시면.’
‘함께 가지요. 가면서 이야기해요.’
그렇게 해서 동행하게 된 터였다.
왕녀씩이나 되어서 타국에서 혼자 돌아다녀도 되나 싶었지만, 올로고스의 왕족에게는 특유의 권능이 존재한다.
파레사가 알기로는 요한나도 스스로를 지킬 정도는 되었다.
만약 그녀에게 아무 힘이 없었더라면 죽여서 입을 막……. 지는 못했겠지. 그래도.
“재수 없게 하필 왕태녀의 친구를 만났냐는 얼굴이네요.”
뜨끔한 소리였다.
요한나가 활기차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하긴 그 애가 섬기기 좀 힘든 상관이기는 해요. 성격이 어지간해야지.”
“그래서 뒤나미스를 떠난 게 아닙니다.”
파레사는 단박에 부인했다.
“그래서가 아니면?”
“……여하간 저는 떠났고, 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걸로 보이네요. 황후의 전속 시녀라니, 참 놀랐어요. 그…… 모습도.”
그들은 무도회에서 만났다.
그때의 파레사는 황후의 손길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공되어 완전히 딴사람이었다.
파레사를 기사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을 요한나이니, 낯설 만도 했다.
“지금 복장도 낯설긴 하지만 그때는 진짜 이름까지 듣고도 설마 했다니까요.”
“그런가요.”
역시 이름이 문제였다. 이름이 좀 흔했으면 몰라봤을 텐데.
애초에 파레사 멘젤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으면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하여 황궁에 들어올 수 없었을 테니, 다른 이름을 쓰지 못한 터였다.
‘아니, 황궁에 들어온 것부터가 문제였지.’
자신을 알 만한 타국의 사람을 만나게 될 가장 가능성 높은 장소니까.
파레사는 한숨을 쉬는 대신, 요한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왕녀님, 저에 대해선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거절하면 재앙이 펼쳐지겠지.
파레사는 어떤 식으로 요한나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하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저 부탁하는 수밖에는.
“그 애한테도 말이지요? 그 애가 떠나는 걸 허락할 리 없으니, 말없이 떠나 왔다는 뜻인데……. 그 애가 엄청 찾아다닐 텐데요.”
파레사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빛 눈동자가 호소하듯 잔잔한 광채를 머금었다.
요한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말했다.
“뭐 그럼 비밀로 해줄게요.”
“감사합니다.”
“파레사는 벨로나 나이트예요. 사명에 따라 살지요. 아마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예.”
뒤나미스에 대해서 잘 아는 상대라 이야기가 쉬워서 다행이었다.
어지간한 이였다면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요한나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시녀 일은 좀 어때요? 당신이 섬기는 그 황후, 평판이 영 안 좋던데.”
“많은 오해를 사고 계시지요. 오해와 같은 분은 아닙니다.”
“그런 것 같았어요. 오찬 자리에서 봤는데, 엄청 예쁘시던데. 뭔가 머리카락도 꽃잎처럼 색도 예쁜 데다가 보들보들해 보이고, 사람이 아니라 장미 같달까. 그렇게 예쁜데, 실은 성격도 상냥할 테지.”
타국인인 요한나는 쉽게 편견을 넘어서서 금세 황후한테 호감을 품게 된 듯싶었다.
그래, 평판을 뒤엎을 만한 외모이기는 하지. 그런데 상냥하지는…….
‘파레사! 뭘 하고 있는 거냐?’하고 어디선가 황후의 고함이 들려오는 듯했다.
“친해지고 싶어요. 좋아, 여기에 있는 동안 황후궁에 방문해봐야겠다. 아는 척은 안 할게요. 그럼 됐죠?”
“뜻대로 하시길.”
파레사는 아까 품었던 의문을 꺼내었다.
“그런데…… 제가 휴가를 갔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오찬 자리에서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황제 폐하가 전속 시녀가 보이지 않는다고 물으시던데요? 황후 폐하가 휴가 갔다고 하시더군요. 내일 돌아올 거라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랬군. 황후의 입에서 유출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황제에게 답한 거니 어쩔 수 없다.
입이 싸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터.
‘아니, 근데 황제는 왜 나한테 관심을 갖는담.’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에레스 공작 부인에, 올로고스 왕녀에 그다음은 황제일까.
산 넘어 산이었다.
“하나 더, 언제까지 따라오실 건가요?”
“숙소 구경 좀 시켜줘요. 요새 제국 관광 중이거든요.”
사절단으로서 볼 일을 다 봤거나, 그냥 따라만 왔거나.
파레사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녀를 뿌리치진 못했다. 어차피 숙소엔 거의 다 왔다.
그때 요한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저기 무슨 일이 있나? 좀 시끄러운 것 같은데.”
번뇌에 사로잡혀 있던 파레사는 뒤늦게야 숙소 쪽에서 술렁거리는 공기를 느꼈다.
“잠깐 여기 계세요.”
그녀에게 말한 파레사는 바로 숙소 쪽으로 향했다.
여태까지 계속 사건이 있던 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예감은 현실이 되어 덮쳤다.
* * *
“파레사, 정말 당신 짓이 아닌가요?”
“그럼 대체 왜 이게 당신 방에서 나온 거죠?”
의심의 시선이 쏟아졌다. 파레사는 당혹스러움에 잠겼다.
‘도둑누명이라니.’
누군가 몰래 방에 들락거린 건, 고작 위협하려고 한 짓이 아니었던가.
뭔가 일이 터질 것 같기는 했었다. 그런데 이런 저열한 방식일 줄은 또 몰랐다.
돌아와 보니 방은 온통 쑥대밭이었고, 자신의 서랍에서 누군가 이 물건을 찾아냈다고 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황태자가 준 액세서리만큼 고가의 물건이다.
황실 시녀들은 가문의 부유함이 저마다 달랐다.
개중 부유한 황실 시녀 한 명이, 어제 휴가를 갔다가 오늘 돌아와 제 방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그리하여 숙소 내에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휴가 간 파레사의 서랍에서 바로 그 목걸이가 발견되었다.
그때 마침, 파레사가 숙소로 돌아온 터였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어제 새벽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침에 황궁을 떠난 파레사에게도 충분히 혐의가 돌아올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황실 시녀들의 숙소에는 마법 영상 기록장치가 달려 있지 않았다.
불순한 의도로 악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누명을 씌우기 적절한 장소를 잘도 골랐어.’
파레사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는 안 훔쳤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듣기로는 경제 사정이 좀 어렵다고 하던데…….”
의심의 눈초리가 꽂혔다.
파레사는 간단히 부인했다.
“요샌 안 어려워요.”
전속 시녀는 돈을 많이 버니까. 파레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제가 훔쳤다면 휴가를 갔을 때, 팔고 왔겠지요.”
시녀 한 명이 눈을 치켜떴다.
“고가의 다이아몬드는 매매 시에 보석상에서 판매자를 꼭 확인하니까. 잠잠해졌을 때, 팔려고 생각한 걸 수 있잖아요?”
“목걸이가 사라진 게 알려지면, 수색이 들어올 텐데요. 그럼 가져가서 어딘가 숨겨놓고라도 오지 않았을까요?”
그게 상식적이지 않으냐는 듯이 파레사는 지적했다.
제가 도둑이라면, 이렇게 어설플 수가 없었다.
“방만했던 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당신 방에서 목걸이가 나왔잖아요!”
그보다 더한 증거가 있냐는 듯이 시녀 한 명이 큰소리를 쳤다. 목청이 하나 더해졌다.
“어쩜 세상에! 어쩐지 다른 시녀들과 통 어울리려 들질 않더라니.”
‘그건 너희들이 나를 기피했기 때문이잖아’라고 지적하는 대신 파레사는 꼬집었다.
“어울리지도 않는데 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졌는지 어떻게 알고 제가 훔치는지요.”
“지나가다 들었나 보지요! 보니는 늘 목걸이 자랑을 했으니까!”
“맞아요. 제가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데! 제가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숙소에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고요!”
목걸이의 주인인 듯한 시녀, 보니가 목청을 높였다. 좀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수에게 홀로 공격받는 상황임에도 파레사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어쨌든 저는 얼마 전에 제 방문이 열려 있었다는 걸 시종장님께 말씀드렸어요. 제가 휴가 간 사이, 누군가 제 방에 목걸이를 넣어두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그때 말해두길 잘했다.
하지만 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시녀 한 명이 사납게 물었다.
“목걸이를 훔친 걸 들켜도 자기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고?”
“그때 마리도 있었는데.”
파레사는 마리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도 네게 들었을 뿐이잖아.”
그녀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그녀가 그랬거나, 그녀가 아는 누군가가 그랬거나.
하지만 추궁할 상황도, 마리의 양심을 믿어볼 상황도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던 베베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하나는 명확하군. 자네 방에서 목걸이가 나왔다는 것. 그리고…… 자네의 무죄를 증명할 만한 근거가 없군.”
그로서도 난감한 일이다.
그도 파레사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럴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이토록 증거가 명백한데 마냥 감쌀 수만은 없는 법.
‘적당히 보상을 하게 하고 시녀들을 달래서 넘어가던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적당히 넘겨야 했다.
안 그러면 파레사는 황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새로 전속 시녀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시종장이 가장 기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황후의 곁에 도둑 혐의가 있는 시녀를 둘 수는 없으니, 문제였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당당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도둑이라는 것이지?”
요한나 왕녀의 눈빛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뒤나미스 인은 아니지만, 그녀의 몸에는 뒤나미스의 피가 흐른다.
벨로나 나이트에 대해서 잘 아는 그녀로서는 파레사를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이 상황이, 어떤 타당성을 떠나서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녀의 남다른 차림새를 본 이들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녀를 본 적 있는 몇몇 이들은 놀란 기색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베베 시종장이 물었다.
“누구신지요.”
“나는 올로고스의 왕녀, 요한나입니다. 여기 있는 이 파레사와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강조했다.
“친구 사이지요!”
‘언제부터?’
파레사는 물론이고 모두의 얼굴에 비슷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떻게 알고?’
요한나는 급히 덧붙였다.
“최근에 연을 맺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급조된 우정이지만, 어쨌든 왕녀가 그렇다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갑자기 귀빈을 마주하게 된 모두가 떨떠름하게 예를 갖추었다.
“올로고스의 왕녀님을 뵙습니다.”
소문이 하나 더 덧붙여졌다.
황태자와 춤을 춘 출중한 무력의 시녀 파레사가 올로고스의 왕녀를 친구로 두었다고.
물론, 여기서 상황을 잘 수습하지 않으면 ‘도둑질해서 황궁에서 쫓겨난’이라는 수사가 더 붙을 것이다.
파레사가 지끈거리는 미간을 내리눌렀다.
‘기다리고 있으랬더니, 대체 왜 들어온 거야?’
하지만 이미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다.
“왕녀님, 나가 계시지요. 제 결백은 제가 밝히겠습니다.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그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버린 보니가 눈을 치켜떴다.
“결백은 무슨, 이미 방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나왔는데! 그럼 끝난 거 아닌가요?”
“나도 자네를 믿기는 하네만, 결과가 이런 것을 어쩌겠나. 보니 양이 목걸이를 찾았으니, 적절히 변상하고 끝내는 것으로…….”
“적절히 변상이라니요? 황궁에 도둑을 둘 순 없어요!”
누군가가 소리를 높였다. 다른 시녀들도 격앙된 표정으로 동의했다.
“그럼요, 황궁에 도둑을 둘 순 없어요! 이건 우리 황실 고용인들의 명예와도 직결된 문제예요!”
“어떻게 숙소에 물건을 두고 돌아다니겠어요? 내보내야 합니다!”
똘똘 뭉쳐 파레사를 쫓아내려고 하는 그들은 황후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교계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베베 시종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 자네는 왜 이리 신망이 없나.”
난감한 상황이면 탓하기 쉬운 쪽에 화살이 돌아온다.
베베 시종장의 말에 파레사는 냉담히 대답했다.
“제가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라서요.”
그 말에 시종장이 움찔거렸다. 파레사를 속여서 전속 시녀로 집어넣은 건 그였으니까.
파레사는 그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전속 시녀를 제외한 다른 시녀들은 다인실을 쓰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쳤다면, 그 룸메이트에게 가장 먼저 혐의점이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힘이 실린 목소리에 일순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녀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2인 1실인데 보니의 룸메이트가 누구지?”
시녀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인데요.”
“보니와 함께 휴가를 나갔나요?”
“아니요.”
보니가 나선 시각은 어제 아침 8시.
보니가 나서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룸메이트도 입궁한 터였다.
파레사가 출궁한 시각은 9시 좀 넘어서였다.
간격은 고작 몇십 분.
그리고 저녁 무렵에 퇴궁한 보니의 룸메이트는 숙소로 돌아왔다.
파레사가 물었다.
“방에 돌아왔는데,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보니는 원래 방을 어지르고 살아서…… 이상한 점이 있었대도 몰랐을 거예요.”
“그래요, 나는 방을 돼지우리처럼 해놓고 산다고요! 누가 들어왔대도 어떻게 알겠어요?”
당당할 일이 아닌데 보니는 당당하게 목청을 높였다.
룸메이트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사실인가 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사이, 방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파레사의 지적에 다른 시녀 한 명이 날카롭게 외쳤다.
“어쨌든 당신 방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나왔잖아요!”
“그럼 저는 그 돼지우리 같은 방안에서 고작 몇십 분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쳐서, 제 방에 숨겨두고 출궁을 했다는 거로군요.”
파레사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황궁 입구에는 제 출궁 시간이 기록되어 있을 테니 제가 보니의 방이 비워지고 얼마 뒤에 출궁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어쩌면 간격은 그보다 더 좁을지도 몰랐다.
9시 출근인 보니의 룸메이트는 8시 40분 전에는 방을 나섰을 것이다.
파레사가 그 즉시 목걸이를 훔쳐다놓고 출발했대도 숙소에서 황궁 입구까지는 도보로 15분가량이 걸린다.
파레사에게 주어진 건 고작 10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다.
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아무에게 들키지 않고 남의 방에 침입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쳐서, 다시 아무에게 들키지 않고 제 방에다가 넣어놓기에는.
누군가가 지적했다.
“어디에다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뒀는지 사전 조사를 해놨다면 물건만 가져오면 되니까 상관없었겠죠.”
“전 야근이 잦아서, 2인 1실이 비어 있는 시간에는 거의 입궁해 있었을 텐데요.”
“그러면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내 목걸이, 당신이 훔쳤잖아요!”
보니가 째지는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범인을 파레사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 내버리고 싶은 것처럼.
그때 왕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아, 골치 아프게 굴 것 없이 간단하게 가지요. 내가 변상하겠다고요. 그거 얼마 안 할 것 같은데.”
부국 올로고스의 왕녀에게 그깟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
시녀 한 명이 새초롬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녀님께서 왜 파레사가 도둑질한 물건을 변상하신다는 거지요?”
“아니, 파레사가 무슨 도둑질을 해요. 답답하네 진짜!”
뒤나미스에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온 벨로나 나이트가 한낱 시녀의 물건을 훔치다니!
왕녀 입장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베베 시종장이 지적했다.
“도둑질한 게 아니라면, 왜 변상을 하신다는 겁니까?”
“그러네요.”
요한나가 뒷걸음질 쳤다. 왠지 어벙한 데가 있는 그녀였다.
‘그래도 쓸모가 있지.’
요한나의 등장이 난데없기는 했지만, 파레사에게 하나의 영감을 가져다줬다.
“올로고스의 왕녀님은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게 제 결백을 입증해줄 수 있을 겁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누가 제지하기도 전에 요한나가 척 손을 치켜들었다.
“물론이죠!”
“권능이라니요.”
“대체 무슨 말인지…….”
이 자리에 모인 시중인들 모두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상식입니다. 제국의 황족에게 권능이 있듯이 올로고스의 왕족에게도 권능이 있지요.”
제국의 권능은 황제와 그 후계자에게 주로 집중된 데 반해, 올로고스의 권능은 좀 더 많은 수의 왕족에게 주어진 힘이었다.
상식이라고 하니까, 모르는 제가 바보가 된 것 같아서 죄 입을 다물었다.
파레사가 설명을 이어갔다.
“올로고스의 왕녀님은 정령을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정령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밝혀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진범이 누구인지까지도요.”
파레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러자 보니의 룸메이트가 움찔거렸다. 이름이 페이였던가?
‘너구나.’
파레사는 바로 확신했다.
요한나가 물러섰던 거리만큼 걸어 나오며 허리에 당당히 손을 얹었다.
“그럼요, 누군지 알 수 있지요. 제 정령은 진실과 거짓을 감지할 수 있거든요.”
‘정말 가능하다는 말이야?’
실은 파레사도 가능할 줄은 몰랐다. 요한나에게 권능이 있다는 것만 알지 사용하는 건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서로를 쳐다본 시녀들은 아옹다옹하며 말했다.
“하지만 귀빈의 힘을 고작 시녀의 결백을 밝히는 데 쓸 수는 없어요!”
“이건 내정간섭이에요!”
하지만 요한나는 손을 척! 하고 제 윗가슴에 얹었다.
“무고한 한 명이 범인으로 몰리는 이 부당한 상황에서, 저는 제 능력을 펼칠 의향이 있어요. 올로고스는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나라니까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왕태녀님과 친구지?
파레사는 의혹을 품었다. 성격이 너무도 다른데.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요한나는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빛이 일더니, 어떤 형체가 살포시 떠올랐다. 사랑스러운 금빛의 새였다.
거기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힘.
모두가 일순 시선을 빼앗겼다. 요한나는 정령을 향해 속삭였다.
“정령아, 내게 진실을 말해주렴. 누가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쳤니?”
정령은 그대로 포르르 보니 쪽으로 날아갔다.
설마 당사자가 파레사를 모함하려고 꾸민 일인가?
모두의 눈에 의심이 서린 찰나, 정령은 그 옆에 서 있는 보니의 룸메이트, 페이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창백하게 질린 페이가 소스라치며 부인했다.
“아, 아니야!”
“정령은 거짓말하지 않아요! 당신이 틀림없어!”
새가 돌아와 요한나의 어깨 위에 앉았다.
요한나의 검지 끝이 강렬하게 그녀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당당하면서도 왕녀다운 위엄이 넘쳤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수 없었다.
베베 시종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왕녀께서 거짓말을 하실 리 없다. 페이, 자네가 그런 건가?”
시녀들이 한 명씩 동조하기 시작했다.
“하긴 보니의 룸메이트인 페이라면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요.”
“그러게. 페이면 물건을 훔쳐다가 파레사의 방에 넣어놓을 수 있지요.”
“페이도 좀 가난하지 않나요?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페, 페이, 네가 어떻게…….”
보니가 배신감 섞인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페이가 결국 외쳤다.
“실은, 보니가 너무 미워서 그랬어요!”
그녀는 포기한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페이의 사연은 이랬다.
“어젯밤에 퇴궁하고 돌아오니 냄새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쓰레기를 안 버리고 나가서 구더기가 끓고 있었어요.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제가 치웠단 말이에요! 늘 그랬어요. 냄새나고, 더럽고, 잔소리해도 잘 치우지 않고, 늘 청소는 제 몫이고……. 정말 괴로웠다고요!”
말을 하면서 점점 감정이 올라오는지, 페이의 고백은 점점 더 격렬한 외침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구더기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베베 시종장이 중얼거렸다.
“같이 방을 써봐야 알아요! 정말, 보니는 돼지우리처럼 방을 쓴다고요!”
격앙된 어조로 외친 페이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던 보니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제 입으로 먼저 돼지우리니 뭐니 했던 건 싹 잊어버린 눈치였다.
베베 시종장이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파레사의 방에 그걸 가져다 놓았지?”
페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목걸이를 가지고 지나다 보니 파레사의 방문이…… 열려 있기에.”
파레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렇다는 것은, 누가 제 방에 또 드나들었다는 뜻이다.
“파레사를 노리고 한 짓은 아니라는 뜻이냐?”
“아, 아니에요. 저는 그냥 충동적으로…… 그랬을 뿐이에요.”
많은 것이 얼버무려진 목소리였다.
황후의 전속 시녀를 노렸다고 하면 더더욱 큰일이 되니까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기는 했다.
베베 시종장이 엄격한 얼굴로 결론지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니 조사해봐야겠군. 어쨌든 자네는 물건을 훔쳤고, 그걸 파레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네. 궁 밖으로 쫓겨나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걸세.”
페이가 울먹이며 부르짖었다.
“시, 시종장님!”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곧 시종장이 부른 병사 몇 명이 나타나 페이를 끌고 나갔다.
끌려가면서 페이는 파레사 쪽을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사과하지 않은 건 물론이다.
애초에, 받아줄 생각이 없기도 하고.
그녀의 동기가 어쨌건,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은 틀림없으리라.
파레사는 자신이 에레스 공작 부인의 부름을 거절한 직후 벌어진 이 사건이 결코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설픈 누명이기는 했지만.’
여기에 자신의 편은 없으니, 그 누명은 충분히 파레사를 옭아맬 수 있었다.
실제로도 모두가 합심하여 제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던가.
때맞춰 나타난 왕녀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빠져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문제는, 이보다 더 철저한 누명이 파레사를 옭아맬 수 있다는 것.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겠어.’
파레사는 냉담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녀들은 하나씩 딴청을 피우며 발을 빼려 했다.
“그러면…… 일단락된 거겠지요?”
“저는 이만 가보아야겠어요.”
“참, 이런 일도 있네.”
파레사는 그들을 향해 분명히 말했다.
“이건 모함이고, 저는 이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파레사의 싸늘한 시선이 여기 모인 모두를 한데 담았다.
벨로나 나이트의 압박감을 고스란히 내보이면서.
편치 않은 심기 탓에 도저히 조절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움찔거리면서 눈치를 봤다. 베베 시종장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나, 나는 자네를 믿었네.”
“나도요!”
눈치 없이 요한나가 또 끼어들었다. 파레사는 차분히 말했다.
“왕녀님은 이만 가보시지요. 내일 입궁하려면 저도 쉬어야 합니다.”
“와후, 무섭네. 알았어요.”
요한나는 총총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모두가 서둘러 자리를 떠나간 뒤에야 파레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산 넘어 산이었다.
* * *
“이야기는 들었다.”
집무실에서 마주한 황후는 그녀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베베 시종장으로부터 간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교 행사에 관심이 없는 듯하길래 문제없을 줄 알았더니…… 이런 식으로 네게 손길이 뻗칠지는 몰랐구나.”
어딘지 우울한 기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 파레사가 위기를 맞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리라.
“내가 생각을 해보았다.”
‘설마 전속 시녀를 그만두라고 하려고? 이건 내 예상이 아닌데.’
봉급을 올려달라고 말해 보려고 했던 파레사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황후가 꺼낸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황후궁으로 이사하려무나. 본디 전속 시녀는 황후궁에 처소가 있지. 네가 퇴궁하는 것을 선호하여 쓴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잠자리가 여럿이면 번잡하니까요.”
그리고 황후궁에 머물렀다간 황후가 시시때때로 불러낼지 모르니, 거리를 둬야 했다.
파레사가 열의 없는 전속 시녀였을 때부터 굳어진 습관이었다.
“방에 어떤 좀도둑 같은 것들이 드나든다지? 그러니 황후궁에서 아예 머무르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면 너도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게다.”
“마음이…… 편할까요.”
파레사는 물끄러미 황후를 쳐다보았다.
먹고 자는 건 숙소보다도 나을 터였다. 다른 건 다 좋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제 명확한 입궁, 퇴궁 시간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노예처럼 일만 할 게 아니라면 직장과 집은 분리하는 게 좋은 법이니까.
“내가 시녀가 너밖에 없는 줄 아느냐? 전속 시녀의 공식 임무는 이제까지처럼 하면 충분하단다.”
황후가 신경질적으로 내쏘았다.
하긴 오랫동안 그녀의 수발을 들어온 하급 시녀들이 잡일은 거의 다 하는 터였다.
파레사는 한 가지 사실을 꼭 확인해야만 했다.
“황제 폐하가 방문하시더라도, 처소에 들어가 있어도 된다는 거지요?”
“안 그러면. 침실이라도 지키게?”
황후의 눈빛에 짓궂은 기가 비쳤다. 유부녀다운 농담이었다.
파레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절대.”
“뭐,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다만 봉급은 1할 올려주마.”
이게 네가 바라는 거겠지? 황후의 눈빛이 의도하는 게 보였다.
파레사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쨌든 황후궁이 자신이 머무르기에 황궁 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건 분명하니까.
게다가 드디어 목적을 달성했다. 봉급 인상!
‘봉급도 올려주네. 그렇게 올리기 싫어하더니.’
역시 드레스를 안 사서 예산을 아낀 게 황후의 인색함이 풀리는 데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터.
에레스 공작 부인의 뒷수작은 파레사에게 하나쯤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휴가는 어땠니?”
황후의 질문이 날아왔다.
그제야 파레사는 황후에게 말해야 할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에레스 공작 부인이 저를 공작저로 데려가시더라고요. 거절의 여지가 없었어요.”
거절의 여지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것뿐이었다. 바로 황후의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그 년이 왜 너를 불러내!”
“경고하시던데요, 전속 시녀를 그만두라고요.”
“뭐라고? 내가 니시아나, 이년을!”
황후의 격렬한 반응에 파레사는 차분히 달랬다.
“어차피 저는 시녀에 불과한 걸요. 에레스 공작 부인이야 그런 말은 한 적 없다고 부인하면 그만이겠지요.”
“이제 보니 이 년이 네가 거절하였다고 누명을 씌운 게로구나! 내 그 시녀를 단단히 심문하여 배후를 알아내라고 일러야겠다!”
역시 황후는 멍청하지 않다.
바로 인과 관계를 연결 짓는 걸 보면.
책상을 탕 치며 외친 황후가 바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황태자에게 바로 편지를 써야겠다.”
파레사는 놀랐다.
황후가 자청해서 황태자에게 편지를 쓴다고 한 적은 처음 아닌가.
정말로 이번 일에 마음이 크게 쓰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황태자는…….’
당분간 그에게 제 이름이 언급되는 게 싫었다.
실연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를 인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 이름을 듣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파레사는 황태자가 가진 감정이 그리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주 보니 정이 든 거겠지.’
거절했는데 매달릴 만큼 제가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단지 황태자도 거절을 수용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전에는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도 당분간은 황후를 찾지 않을 터.
파레사는 결국 황후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조차 새삼스럽게 느껴졌으니까.
빠르게 편지를 써 내리며 황후가 물었다.
“그런데 올로고스 왕녀는 널 왜 도와줘? 그녀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니. 친구라던데.”
베베 시종장이 거기까지 설명해둔 모양이다. 파레사는 말을 골랐다.
“그게…….”
뒤나미스에서 왕녀와 연이 닿았고, 여기서 또 마주하게 되니 반가움을 느껴서 그리되었다고 파레사는 간략히 설명했다.
황태자에게 쓴 편지를 봉투에 넣은 황후가 다른 편지를 파레사에게 내밀었다.
“그래? 마침 그 왕녀가 내일 황후궁에 방문하고 싶다더구나. 베베 시종장이 편지를 가져왔어.”
파레사는 편지봉투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쩐지.
혹시 숙소 앞에 진 치고 있을까 봐 입궁할 때 긴장했건만, 왕녀는 나타나지 않은 터였다.
생각해보면 굳이 왕녀가 그런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냥 황후궁에 방문하면 되니까.
황궁 입구에서 기다린 것은, 아마도 자신에게 은밀히 접촉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파레사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잘…… 된 거 아닌가요. 귀빈이신 왕녀님이 황후궁에 방문한다면, 폐하의 입지에 도움이 될 테지요.”
한 번은 방문을 허용해야 할 터였다.
자신이 마주하기 싫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렇기는 하지. 뭐, 오찬 자리도 나쁘지는 않았고.”
“왕녀님은 황후 폐하가 예쁘시다던데요.”
“그래?”
단순하게도 황후는 금방 반색했다. 그녀는 곧 편지를 하나 더 작성했다. 허락의 편지였다.
“뭐, 한 번쯤은 티타임을 가져도 좋겠지.”
그리고 두 번째 편지가 완성될 무렵, 파레사를 향해 말했다.
“그럼 너는 조금 일찍 퇴궁시켜 줄 테니, 오늘 숙소로 가서 짐을 싸 가지고 오너라. 짐이 많다면 하급 시녀들을 붙여주마.”
“괜찮아요,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짐도 얼마 되지 않는 데다가, 입궁할 때 가지고 온 마법 가방에 다 담아서 오면 될 테지.
한 차례 사건을 치른 그 날은 유독 평화롭게 흘러갔다.
* * *
그날 오후, 숙소로 돌아간 파레사는 금세 짐을 쌌다.
황후궁에서 제 처소를 봐놓고 온 터였다. 이대로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안을 정돈하고 청소해둔 파레사는 짐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슬슬 다른 시녀들의 퇴궁 시간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서는 그때, 누군가가 파레사에게 말을 걸었다.
“파레사.”
불행의 비둘기, 아니 마리였다.
“마리?”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파레사에게 바짝 다가선 그녀가 귓속말로 내뱉었다.
“러셀 백작 부인이야.”
“뭐?”
“페이를 사주한 사람. 그녀는 내 후견인이기도 하지.”
이건 양심 고백 같은 건가.
“그런데 왜, 네게 사주하지 않고.”
숨을 흡 들이킨 마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파레사, 분명히 말할게. 난 널 배신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으니까.”
우리가 배신이라는 말을 꺼낼 만한 사이였던가. 하지만 마리는 자못 비장했다.
“내가 가만있었던 건, 나도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친 게 누군지 몰라서 반응을 살피고 있었던 거야. 러셀 백작 부인은 내게 새로 사람을 구했다고, 넌 이제 필요 없다고만 했거든.”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야?”
“네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어. 그런데…… 네 말이 맞았어. 나는 황후 폐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황후는 나쁜 여자니까, 이래도 돼!’라고 날 정당화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마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 후견인은 성질이 여간하지 않거든. 매번 날 불러다 놓고 뺨을 갈긴단 말이야. 저번에 뺨을 맞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난 대체 뭘 위해서 이 짓을 하고 있나, 이게 네게 큰소리를 칠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갖은 멸시를 받으면서 하는 게 뒷소문이나 퍼뜨리는 사주인 짓이라니.
거기다가 파레사에게 도둑누명을 씌우라는 명령까지 듣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이었기에 실리를 따랐지만, 귀족으로서 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마리에게도 선은 있었던 것이다.
“네 말대로 난 선택했어. 그만두기로. 그래서…… 이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옳은 선택에는 때때로 대가가 따른다. 마리가 감수해야 할 대가는 이것이었다.
“난 근무처를 옮겨서 동쪽 구역의 빈 궁전을 관리하게 되었어.”
코빼기도 보기 힘든 한직이다.
쫓겨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하지만 이는 마리를 길들이려는 수작일 수 있었다.
한직으로 보내서 황궁 구석에 처박아놓고, 후회하며 제 발로 다시 걸어들어오게 하려는 수작.
“아무튼, 사주한 사람은…… 알려줘서 고마워.”
에레스 공작 부인에게 누가 충성하고 있는지 안 것도 소득이다.
러셀 백작 부인을 위시하여 그녀 주변의 귀부인들. 그 모두를 경계하면 되리라.
마리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앞으로 조심해.”
“그래, 너도. 잘 지내.”
파레사는 잠시 그녀를 일별한 채 돌아섰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은. 도리어 당분간은 파레사와 멀리하는 게 그녀에게도 나을 것이다.
* * *
황후궁으로 돌아온 파레사는 자신에게 배당된 전속 시녀의 처소를 둘러 보았다.
이전에 묵었던 숙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널찍하고 화려한 방이었다.
이전보다 샹들리에도 규모가 커졌고, 옷장이며 책상이며 가구 하나하나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고급 목재다.
침대 위에는 장미꽃 무늬의 짙은 비단 이불이 덮여 있었다.
황후의 방만은 못하지만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귀빈이 머무는 처소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자신 이전에 이 방을 썼던 전속 시녀의 흔적은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었다.
‘방은 참 좋군.’
너무 좋아서, 제 짐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대충 우겨 담았던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 파레사는 어느 순간,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녀의 손끝은 작은 상자 위에 머물러 있었다.
‘황태자가 선물해 준 액세서리.’
사심이 있어 선물한 것일 터. 찼으니 돌려줘야 하나?
아니, 황태자가 그런 좀생이는 아니다.
그에겐 미미한 돈일 텐데. 어차피 포상 대신이라는 핑계도 대지 않았나.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착용하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이 기회에 팔아버려?’
파레사는 갈등 끝에 상자를 고이 보관해두었다. 아직은 결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파레사 님! 환영해요!”
황후궁에 이미 머무르고 있던 노라가 두 팔 벌려 파레사를 반겼다.
소심한 성격으로 보였던 그녀는 놀랍도록 빠르게 황후궁에 적응하고 있었다.
제국 최대로 추측되는 호화 드레스룸에 들락거리는 데다가, 최고의 뮤즈에게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니 만족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거기다가 황궁이니만큼 이곳에서는 의식주 모두가 상질이었다.
“이사 기념으로 파티예요! 파티! 어서 가요!”
노라가 파레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파레사는 순순히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갔다.
이윽고 들어선 방 안에는 하급 시녀 안나를 비롯하여 몇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몇몇 중 하나는 역시.
파레사가 탄식했다.
“야근은 없다면서…….”
황후가 이 자리에 있다면 야근이잖아.
“야근이 아니라 파티란다. 차려져 있는 걸 먹기만 하면 되니까 불만 갖지 말렴.”
황후가 눈을 찡긋했다.
“내 특별히 100년 된 진귀한 와인을 가져왔단다.”
간단한 식전주 외에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황후였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금박 치장이 된 100년 된 와인 외에도 여러 종류의 술이 안주와 함께 가득 차려져 있었다.
저녁도 채 먹지 못하고 이사하느라 마침 허기가 졌던 차였다.
“어쩐 일로 술을 이렇게나.”
환영은 명목이고, 술판이 목적인 듯했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구나. 어서 앉으렴.”
파레사는 황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황후가 직접 와인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주었다.
아니, 이 여자 왜 이래. 파레사는 낯선 눈으로 황후를 쳐다봤다.
“내 궁으로 온 것을 환영한다. 쭉 들이키렴! 한 번에 다 마셔야 액운이 사라진다!”
뒤늦은 인사말에 파레사는 마지 못해 술잔을 집어 올렸다.
‘이런 건 맥주로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별말 없이 단번에 들이마셨다.
“……맛이 좋군요.”
고급 와인이라 입안에서 감도는 풍미가 남달랐다.
파레사의 시원함에 황후는 흡족해 했다.
“호쾌해서 좋구나! 이번엔 네가 한 번 따라보아라.”
파레사는 황후의 잔을 채워주었다. 어린 노라를 빼놓고, 하급 시녀들도 곧 한 명씩 잔을 받았다.
그날 황후궁에서는 밤늦게까지 때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 * *
“으으으, 머리가 아프구나.”
황후는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리며 꿀물을 연달아 두 잔 비워냈다.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마신 그녀는 어젯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순간 잠들어 버린 터였다.
침대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에게 파레사가 차를 내왔다.
“숙취에 효과가 있다는 허브티예요.”
차를 들이마신 황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멀뚱히 서 있는 파레사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리 멀쩡한 거냐?”
이미 와인 3병을 홀로 비우고도 말짱한 파레사에게는 경이적인 것을 보는 듯한 눈초리가 따라온 터였다.
파레사는 눈썹을 들어 보였다.
“술에 강한가 봐요. 그간 별로 마신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참 강철같단 말이야. 네가 약한 게 있기나 할까?”
“글쎄요.”
내가 뭐에 약하지? 파레사는 궁리해 보았다.
하지만 어둠이든 귀신이든 살인마든 높은 곳이든, 두려워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 하나 있었다.
“벌레? 벌레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벌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는 것. 파레사에게는 이미 노숙을 할 뻔한 역사가 있었다.
파레사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상태가 안 좋으시면 약속은 취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차를 마시니 괜찮아지는 것 같구나. 그리고 약속을 취소하면 핑계는 뭐라고 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병이 났다고? 그럼 왕녀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겠니?”
“술고래 황후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 대체 그게 뭐란 말이니! 나는 오늘 꼭 왕녀를 만나야겠다.”
황후는 다부지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채비를 도우렴.”
슬슬 옷을 갈아입고 채비를 하여야 할 터였다. 파레사는 순순히 응답했다.
“뜻대로 하시기를.”
황후도 별 기력은 없는지, 오늘은 그리 꾸미는 데 공을 들이지 않았다.
편안한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혈색 없는 입술만 장밋빛으로 물들인 터였다.
“어서 오세요, 왕녀.”
정확한 시간에 방문한 요한나 왕녀는 황후를 보자마자 감탄하며 내뱉었다.
“어머, 황후 폐하는 안 꾸며도 아름다우시네요. 이 티룸도 너무 근사해요. 오늘은 정말 행복한 날이에요. 모든 게 아름다우니까요.”
틀림없다. 이건 황후에 대해서 연구해온 거야.
황후를 기쁘게 하는 멘트라거나.
파레사는 의심의 눈초리로 요한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파레사 쪽으로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고 황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황후는 어느샌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슬쩍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다.
황후가 생판 남인 누군가를 대하는 데 그리 호의적인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요한나 왕녀. 내 전속 시녀를 곤란에서 구해주었다고 들었어요. 고맙군요.”
“아니에요, 누명을 쓴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요한나와 황후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파레사는 능숙하게 그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요한나는 신기한 눈초리로 차를 따르는 파레사를 관찰했다.
그 눈빛이 너무도 노골적이라, 황후도 자연히 파레사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파레사와는 뒤나미스에서 알던 사이라고 들었어요.”
파레사는 슬며시 왕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예, 그렇지요. 몇 번 보았을 뿐이지만요.”
다행히 왕녀는 말귀를 잘도 알아들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다시 보니 너어어무 반가운 거 있죠? 그래서 친구 하자고 해버렸어요!”
황후는 떨떠름한 기색을 떠올렸다. 하지만 궁금증이 솟은 그녀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뒤나미스에서의 파레사는 어땠나요?”
그 질문에 스치듯이 왕녀와 파레사의 시선이 부딪혔다.
왕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
“강하고 훌륭한 기사였죠. 여기서는 시녀 일을 하고 있어서 의외다 못해 놀랄 정도로요.”
그래, 추락이다시피 한 신분 변동이 있었지.
황후는 미심쩍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요? 하긴…… 기사 일과 시녀 일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그거 나 까는 말인가.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래 봬도 대체 불가능한 전속 시녀이거늘.
“그렇게 기사 일을 잘하고 있는데, 대체 왜…….”
황후는 말을 삼켰다.
대체 뒤나미스에서는 왜 능력 있는 기사를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오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 나라 왕인지 왕태녀인지는 다 뭘 한 거지?
저를 지키지 못하는 제 남편을 탓하지 않으면서도 타국에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황후였다.
왕녀는 난감한 질문을 자연스레 파레사에게로 돌렸다.
“응? 파레사요? 파레사, 왜 뒤나미스를 떠난 거죠?”
“적성에 안 맞아서요.”
간단한 답변에 더 이상 파레사에게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열심히들 내 사생활은 지켜주는군.’
참 다행이었다.
“그보다 이곳 황궁은 너무 좋네요. 곧 돌아가야 할 텐데, 아쉬워서 어쩌나요.”
요한나 왕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이 차, 이름이 뭔가요? 티룸이 아름다워서 그런지, 차의 풍미도 더욱 살아나는 것 같네요.”
“이 차는…….”
대화는 잠시 궤도를 틀었다.
파레사가 보기에 황후와 왕녀는 부셰 백작 부인처럼 잘 맞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천진한 듯 생글생글 웃고 있는 왕녀가 대화를 제 주도로 이끌어갔기에 아귀가 잘 맞았다.
요한나는 딱히 박대받는 처지가 아닌 데다가 왕녀로 태어났음에도 황후한테 잘도 맞추었다.
티타임은 그럭저럭 잘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슬슬 자리를 파할 무렵, 요한나가 슬그머니 황후에게 물었다.
“저, 황후 폐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황후는 너그러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요, 왕녀?”
“파레사를 하루만 빌려주세요!”
그 순간, 화기애애하게 끝나려 했던 분위기는 단박에 얼어붙었다.
못마땅한 듯 황후가 눈썹을 찌푸렸다.
“파레사를 빌려 달라니요? 그녀는 제 전속 시녀입니다.”
“단 하루만요. 그녀가 제게 황궁을 안내해주었으면 해서요. 오랜만에 회포도 풀 겸.”
왕녀가 파레사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황후는 냉담히 대꾸했다.
“파레사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황궁 지리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때 파레사가 끼어들었다.
“왕녀님 뜻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를 도와주신 것도 있으니, 신세를 갚고 싶어서요.”
대화를 한 번 더 하기도 해야겠고.
한 번쯤 더 대화, 아니 입 단속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터였다.
결국 황후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뭐, 그럼 그러도록 해요. 하루면 되겠지요?”
“물론이죠, 황후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역시나 아름다우신 만큼 마음이 넉넉하시군요.”
이번만큼은 황후도 그녀의 칭찬에 마냥 기분 좋아하지 않았다.
“왕녀는 찬사에 능하군요.”
“그러면 내일 아침, 9시에 올게요!”
목적을 달성한 왕녀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왕녀가 사라지고 난 뒤, 황후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분통을 터뜨렸다.
“내 전속 시녀를 대체 왜 여기저기에서 빌려 가려는 게야? 황태자 녀석이 잠잠하다 싶었더니, 이번에는 왕녀야?”
“……그러게요.”
“너는 참 좋겠구나, 이 사람 저 사람 죄 찾아대니. 내 전속 시녀가 아니게 되더라도 갈 곳이 많겠어!”
날카로운 시선에 파레사의 안면에 박혔다. 파레사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가 어딜 가요. 자르시려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누가 자른대? 저 왕녀가 봉급을 더 쳐준다면 얼른 가버릴 게 아니냐!”
큰일 날 소리를 한다.
요한나 왕녀는 뒤나미스의 왕태녀와 돈독한 사이. 올로고스의 왕실은 뒤나미스의 왕실과 가깝다.
그녀를 따라간다면 자신의 행적이 왕태녀에게 알려지는 건 그저 시간문제였다.
“……제가 그리 의리 없어 보이는지요. 그리고 봉급도 통 크게 1할이나 올려주셨잖아요. 저는 그걸로 괜찮아요.”
당분간은 만족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협상을 통한 인상을 노려볼 테지만.
‘황후가 올려준 거지 시종장이 올려준 건 아니잖아.’
기간은 입궁 이후 6개월을 딱 채운 시점이 좋겠다. 파레사는 다짐했다.
왠지 자꾸 봉급 인상에 집착하게 된다.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은, 내가 만약 봉급을 안 올려줬다면 유혹에 넘어갔을 거란 뜻이냐?”
무슨 유혹이야.
이 제국에서야 황태자니 에레스 공작 부인이니 저를 포섭하려는 이들로 가득이었지만, 왕녀는 다르지.
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애초에 왕녀께는 절 포섭하실 생각도 없는 걸요.”
제가 괜히 포섭당한 걸 꼬박꼬박 고한 탓에 자기 사람을 뺏길까 봐 경각심이 든 걸까.
황후는 유독 예민했다.
그녀는 콧방귀를 끼며 손을 내저었다.
“친구니 뭐니 하는 왕녀랑 내일 시시덕거리면서 잘 놀다 오려무나!”
친구는 무슨 친구람.
“그럴게요.”
“뭐라고?”
대답이 뭔가 잘못된 건지 황후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즐겁게 지내다 와야지요. 귀빈이신데, 제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가실 수 있도록요.”
“말은 참 잘도 한다!”
황후는 팩 등을 돌렸다.
그날 하루 황후에게선 어쩐지 한기가 풀풀 흘렀다.
봉급도 올려줬는데 휴가도 안 쓰고 놀러 간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파레사의 입장에서는 모를 일이었다.
* * *
아침부터 왕녀의 마차가 황후궁을 방문했다.
시녀를 왕녀가 데리러 오다니. 낯선 광경이다.
마차에 올라타자, 왕녀가 활력 넘치게 손을 흔들었다.
“파레사, 어서 와요! 어디부터 갈까요?”
마차 안에는 오직 왕녀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당신과 나만 있으면 충분하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일부러 혼자 왔어요.”
“……그건 그렇죠.”
이 왕녀, 아무리 고유 권능이 있다지만 너무 자유로운 거 아닌가.
남의 나라에서 홀로 잘도 활개 치고 돌아다닌다.
기사는커녕 시중인 한 명도 달고 다니지 않고.
‘그것도 나와 함께.’
벨로나 나이트 파레사쯤 되는 실력이면, 고유 권능 가졌대도 기습으로 왕녀를 살해할 수 있다.
그러겠다는 뜻은 아니고, 가능은 하다는 뜻이다.
왕녀는 너무도 방만하게 위험을 간과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다면 당신이 지켜줄 거잖아요.”
……그래, 나는 한편인 거로군. 파레사에게 믿음을 주는 모습은, 뒤나미스의 핏줄다웠다.
요한나 왕녀가 기쁜 얼굴로 재잘거렸다.
“어디로 갈까 했는데, 일단 마차를 타고 황궁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창밖으로 황궁을 쭉 구경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거지.”
마부는 황궁에서 붙여준 사람이었다.
출입 금지 구역을 피해서, 귀빈에게 허락된 공간으로 알아서 마차를 몰아갈 것이다.
파레사는 뜸을 들이다 이내 왕녀를 쳐다보았다.
“미처 말씀 못 드렸는데,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파레사의 인사에, 왕녀에게서 뜬금없는 고백이 날아들었다.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파레사는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럴 것 같더군요.”
난데없이 등장한 정령을 보고, 모두가 깜빡 속아버리고 만 것이지만, 미심쩍었다.
정령의 힘은 물리력으로 행사된다.
자아가 있다고 한들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령한테 범인을 찾아내는 능력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생각해 보니 그랬다.
‘하지만 너무도 정확하게 범인을 지적했어.’
파레사가 넌지시 물었다.
“그녀가 범인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왕녀가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표정을 보고 있었지. 파레사도 같은 것을 봤지 않나요?”
제국에서 정령을 다스리는 권능은 낯선 힘이다.
그리고 제국 사람들에게 권능이 주는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권능과 정령의 힘을 언급하면서, 범인인 페이는 눈에 띄게 동요를 보인 터였다.
그녀는 정령이 자신을 지목하자마자 술술 실토해버렸다. 동기와 배경은 아직 조사 중이지만.
“그러다가 틀리시기라도 하면.”
엄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왕녀는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외쳤다.
“안 틀렸으니까 괜찮아요!”
뭐, 틀렸어도 귀빈이니 어떻게든 상황이 수습되었겠지.
“아무튼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왜 황후의 전속 시녀씩이나 되는 파레사에게 그런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거지? 이곳 사정도 어지간히 막장인가 봐요.”
뒤나미스건 올로고스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일이다.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파레사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좀 막장이긴 하죠.”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파레사는 짧게 황후의 사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왕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황제의 여동생이 그렇게 나오면 황후 폐하도 힘드신 게 당연하죠. 성격이 못됐네.”
“그럼요, 만나 보셨잖아요? 에레스 공작 부인.”
간택 무도회에서 만나기 전에도 이미 친분을 다져둔 걸로 보였다.
눈을 잠시 깜빡이던 왕녀는 곧 경악을 발했다.
“응? 황녀가 그 여자였어요? 세상에! 그렇게 상냥한 얼굴을 하고선!”
“황족다운 분이시라서요. 속내를 잘 감추시죠. 제게 유리한 대로 말씀도 잘 하시고요.”
“그게 황족다운 거면, 나는 왕녀가 아니에요.”
……당신이 왕녀답지 않잖아?
다행히 왕녀는 다른 곳으로 초점을 돌리느라 파레사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보다 참 황제도 무능하네. 어쩜 자기 아내도 지켜주지 못하나요. 허우대는 멀쩡해 보였는데.”
요한나가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 파레사는 괜스레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내심 동조하고 있더라도, 자신은 황궁의 시중인이다. 직업의식이라는 게 있었다.
“저에 대해서도요. 비밀 지켜주시기를.”
파레사의 당부에, 왕녀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보다 우리, 어디로 가죠?”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새에 마차는 황궁 내부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황궁을 안내한다는 명목으로 온 거였지?
파레사는 황실의 시중인으로서 귀빈에게 근사한 장소를 소개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글쎄요…….”
“어디 갈 곳 없나? 파레사는 정말 황후궁에만 있었던 모양이네요.”
“갈 곳…… 미술관은 어떨까요?”
일전에 한 번 방문했었지. 그래, 황태자와 함께.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파레사는 제가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전에 왕녀가 발 빠르게 승낙했다.
“미술관? 좋지요. 황궁 미술관은 정말 멋진 그림들로 가득할 것 같군요!”
그렇긴 하지. 귀빈에게 보여주기에 손색없는 공간이다.
잠깐 고민하던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로 가지요. 새로운 전시를 시작해서 볼만 할 거예요.”
지금은 왕녀를 접대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니, 개인적인 사연은 잠시 접어두자.
파레사는 마부석과 이어진 창문을 열고 지시했다.
“황궁 미술관으로 가 주세요.”
* * *
황궁 미술관은 한산했다.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은 몇 안 되었다.
파레사는 미술관 안쪽을 둘러 보았다.
이전보다 전시 규모가 훨씬 확장된 듯싶었다. 못 본 그림들이 눈에 띈다.
‘뭔가 느낌이 샤방샤방한데?’
이전에도 봄날 풍경이 대부분이었기에 화사한 그림들로 가득 차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파레사는 왠지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왕녀도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 눈치였다.
“누구 취향이에요? 황실 화가들이 그린 걸 텐데, 주제 선정은 대체 누가 한 걸까.”
“……그러게요.”
“혹시 황후 폐하?”
“아니에요. 제가 알기로는, 황태자 전하가.”
“아하, 그래서 여기 날 데려왔군요.”
무슨 오해를 하는 거지?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닙니다, 저번에 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군요. 새로운 그림들이 늘었어요.”
하필이면 이런 콘셉트라니.
전시는 황궁을 배경으로 하되 어딘지 추상화적으로 표현된, 몽환적이고 동화스러운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핑크색에 노랑이나 연두가 섞인 화사한 색채가 봄꽃을 연상케 했다.
묘한 표정으로 그림을 쭉 돌아보던 왕녀는 한 그림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그림 제목이 인상적이네요. 첫사랑.”
……아니겠지.
파레사는 제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과연 파레사가 추천할 만한 전시였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사명이라니, 낭만적이네.”
하지만 사명까지 언급되자, 파레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가 말입니까.”
이쪽을 쳐다보는 왕녀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파레사, 난 이해해요. 정말로 말이지.”
“그러니까 뭘 이해하시는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왠지 모르게 소름이 일어섰다.
“그거잖아요! 사랑. 천하의 벨로나 나이트도 사랑이라는 위대한 사명 앞에서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파레사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내 사명이 사랑하는 사람 곁을 지키는, 그런 거라는 거야?
대충 그런 착각인 것 같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다.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왕녀님.”
누가 들을까 봐 두려운 나머지 파레사는 기민하게 주변의 기척을 확인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레사는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거의 밀다시피 데려갔다.
벽에 등을 대고 선 왕녀는 어쩐지 뾰로통해진 기색이었다.
“언제까지 왕녀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요.”
언제? 자신은 동의한 적이 없건만.
하지만 요한나는 한술 더 떠 주장했다.
“요한나라고 불러요. 존칭도 빼고 그냥 요한나.”
“저는 시녀이고 규정상 귀빈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시지요.”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
요한나가 칫,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빛내며 말한다.
“황태자는 파레사의 정체를 알고 있나요?”
“아니요, 모릅니다. 앞으로도 모르셨으면 좋겠고요.”
앞으로는 아예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왜 자꾸 황태자와 엮어서 착각하는 거야.’
그놈의 간택 무도회 때문인가.
제국에서의 첫 대면이 거기였으니 왕녀가 착각할 만하다.
파레사는 그녀의 착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요한나가 양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감격한 눈으로 소리쳤다.
“세상에, 홀로 이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다니! 황태자가 이런 파레사의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녀는 정말로 감격하는 듯했지만, 파레사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무슨 마음을 알아준다는 겁니까. 그거 절대 착각이에요.”
그 순간, 한 음성이 낭랑하게 귀에 박혔다.
“무슨 마음을 말이지요?”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목소리는……. 파레사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황태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장내가 밝아지는 듯한 빛무리를 휘감은 그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감동적일 만치.
이 미술관 안의 그 어떤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명화.
시선이 마주쳤다.
읽을 수 없는 그 두 눈은 신비롭고 고요한 녹청색이었다.
꿰뚫는 듯한 감각으로 피부가 저릿했다.
그토록 어색하고 긴장된 순간이 더 없었다.
황후 앞에서 보였던 눈치는 어디로 갔는지, 요한나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딱 때맞춰 나타나시네.”
“요한나 왕녀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딘지 압박적이었다.
요한나는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빠르게 그들 앞에 다다랐다.
새로운 조명이 켜진 듯이 그저 밝았다.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은 곧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차림새는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단정했다.
근래 보았던 중에 가장 간소한 예복 차림이었다.
옷 태가 미세하게 헐거운 것이 눈에 잡혔다.
‘조금 야위었나.’
파레사는 황태자의 모습을 세세히 살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의 물음이 나직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파레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등장한 이후로 그의 시선은 줄곧 파레사에게 박혀 있었다는 것을.
마치 파레사가 그랬던 것처럼.
파레사는 그 일치점을 황태자가 모르기를 바랐다.
요한나가 볼멘소리를 냈다.
“저는 아는 척도 안 하시네요. 물론, 그러실 수 있죠.”
“왕녀님, 실례했습니다.”
황태자의 인사가 너무도 정중하고 반듯하여, 요한나의 표정은 저절로 스르륵 풀렸다.
“여전히 근사하시네요.”
그녀는 황홀한 듯이 황태자의 완벽한 안면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황태자 전하라면 그럴 만도 해요. 아무렴요. 저는 이해해요.”
파레사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제게 무도회 당시, 입고 있던 드레스를 어디서 구입했느냐고 묻고 계시더군요.”
급조한 핑계이기는 하나, 한 음절 한 음절 힘이 실린 어투였다.
황태자 앞에서 모든 진실을 고해버릴 것 같은 요한나에게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황한 요한나가 말을 받았다.
“그, 그래요! 그때 입은 드레스가 좀 아름답기에, 의상실 좀 물어보았어요!”
“그것과 파레사의 마음은 무슨 상관입니까.”
역시 황태자는 어설픈 얼버무림에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 평소라면 너그러이 넘길 만도 한데 어쩐지 날 서 있었다.
요한나가 중얼거렸다.
“어머, 왠지 스윗하게 들리는데…….”
이 왕녀, 일부러 이러는 건가. 참 눈치가 있다가 없다가 한다.
왕녀는 황태자와 파레사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과 파레사한테 맞춰줘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 듯했다.
정리는 자신이 해줘야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레사가 딱 부러지게 잘랐다. 그리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저 이상한 짐작을 하시던 참이었어요.”
“이상한 짐작……?”
여운이 깃든 물음.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시선이 파레사에게서 왕녀에게로 옮겨졌다.
그의 시선에서 뭘 느꼈는지 왕녀가 멈칫 물러섰다.
“저, 저는 이만 가볼까 해요.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어딜 혼자 가려고. 파레사는 빠르게 내뱉었다.
“제 임무는 오늘 왕녀님을 안내하는 것인데요?”
“으음, 안내는 이제 된 것 같아요! 이만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 피곤한걸요!”
이제 막 점심시간이 되려던 참인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종종 걸음을 치며 이쪽으로 눈짓하는 걸 보아하니, 제가 무슨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파레사는 꽤 간절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니, 이렇게 황태자와 날 둘이서 남겨 둬?
미술관에서 황후궁은 꽤 거리가 있다. 왕녀가 마차를 타고 가버리면 끝이었다.
결단은 빠르게 내려졌다.
“그렇다면 저도 황후궁으로 복귀해야겠지요. 실례하겠습…….”
그러나 서둘러 왕녀를 뒤따르려던 파레사를 향해,
“마치,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황태자의 물음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내 착각인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실린 목소리.
파레사는 서서히 그쪽을 돌아보았다.
짙어진 녹청색 눈동자는 평소와는 달리, 어떤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어쩐지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안녕히 계세요오오오오!”
어느덧 멀어진 왕녀의 발랄한 외침이 저편에서 들려왔다. 놓쳤다.
‘망했구나.’
파레사는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진땀 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죄인처럼 굴어야 하지?’
황태자를 거절한 것도 잘못이라면, 받아들이는 것도 잘못이 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자신은 차선을 택했을 뿐이다.
마음을 가다듬은 파레사가 입을 열었다.
“저 황태자 전하, 저는 결코 전하를 피하려던 것이 아니라.”
파레사는 말을 고쳤다.
“아니, 피하려던 것이 맞지요. 간택 무도회의 건도 있으니 전하와 거리를 두는 게 맞습니다.”
말은 맞는 말인데, 기묘하게 수그러드는 마음은 왜일까.
너무 시녀생활에 익숙해진 걸까.
“말이 오가는군. 어지간히 당황했나 봐.”
파레사의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황태자는 등을 돌렸다. 망토 자락이 우아하게 펄럭였다.
“따라와.”
앞서 걷는 등은 곧고 당당했다. 파레사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미술관에 들어서다가 그들을 본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문이 돌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미 난 갖은 소문의 주인공이지.’
새삼스러운 유명세는 아니다.
미술관 앞에는 낯익은 마차가 서 있었다.
전에 이 마차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파레사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아주 강렬히도.
파레사는 뒷걸음치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합니다.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어느새 먼저 마차에 오른 황태자가 고갯짓했다.
“타.”
듣지 않는 단호함이었다. 갈등했지만, 버텨봐야 소용은 없었다.
파레사는 황후와 황태자 사이의 연결 다리였다.
그걸 생각해서라도 다소의 불편함과 어색함은 견뎌내야만 했다.
결국 파레사는 마차에 올랐다.
파레사가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마차는 조용히 출발했다.
아마도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황태자는 파레사 맞은편에 앉은 채,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기껏 태워놓고는 방치하는 듯한 태도다. 아니,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위험해.’
좁고 밀폐된 공간. 훅 끼쳐오는 그의 존재감이 오감을 자극했다.
유려한 선을 그리는 카메오처럼 아름다운 그 옆얼굴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내리깔린 눈매 사이로 빛나는 청명한 눈동자. 높고 곧은 콧대도, 살짝 벌어져 있는 복숭앗빛 입술도, 옆얼굴을 장식하며 가볍게 흔들리는 은빛 머리카락도.
그 모든 것이 아주 느린 흐름을 세세하게 꿰뚫어보는 것처럼, 빨려드는 듯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의식이 끊긴 듯이 몰두되는 찰나, 황태자로부터 나직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요새 잠을 잘 못 잤어.”
나는 잘 잔 것 같은데. 파레사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예, 그러시군요.”
“입맛도 없더군.”
그래서 해쓱해진 거로구나.
황태자에게 입맛이 사라진 원인은 뻔했기에 어색한 대답이 나왔다.
“그러셨군요.”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재워주고 먹여줄 수도 없는 것을.
자기가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지만, 파레사는 부당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황태자 앞에선 모든 게 제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때 어떻게 거절했지?’
신기할 지경이다. 며칠 못 본 새에 살짝 낯설어진 황태자는 낯설어진 만큼이나 더욱 눈이 부셨다.
“내겐 태어나서 처음이야.”
황태자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몄다.
그것만으로도 수표면이 반짝이듯 잔잔한 빛이 공기 중에서 반짝였다.
“……평소에 그리 근심 없는 삶을 살아오셨나 보군요.”
“뭐든 내겐 어려울 거 없었으니까.”
재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파레사도 따지고 보자면, 최근까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터.
딱히 큰 어려움도, 굴곡도 없는 삶.
단지 벨로나 나이트가 되려면 혹독한 수련을 해야만 하기에, 험난함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려워.”
황태자는 턱을 어루만지며 파레사를 쳐다보았다. 뜻 모를 기색이 깃든 눈빛으로.
“그때 내가 한 질문에, 답을 주겠어?”
파레사는 잠깐 멈칫거렸다.
‘그래서…… 네 마음은 어디에 있지.’
그날 밤 그는 물었고,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파레사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제 감정이 어떻든 자신은 항상 사명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단 한 번도 거기서 눈을 떼본 적이 없기에.
파레사의 표정을 관찰하던 황태자는 예리하게 어떤 사실을 읽어냈다.
“기억하는가 보군.”
너도 신경 쓰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듯한 지적. 파레사는 차분하게 부인했다.
“고작 며칠입니다. 잊을 리 없지요.”
“이번에도 답은?”
“제 마음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파레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파레사를 들여다봤다.
해부해 그 속내를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집요하면서도, 어딘지 다정한 시선.
마치 어떤 경우에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것처럼.
농밀하면서도 곧은 애정.
‘아니, 제멋대로의 해석이야.’
하지만 그는 늘 그렇게 파레사를 바라보았다.
아슬아슬한 간격과 모호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가 그날에야 격돌하듯 진심을 드러냈던 건 그에게 익숙한, 은근한 표현 방식과 진지하지 않은 마음 탓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마음을 꺼내 보이는 게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가 황태자일지라도.
그러나 그 마음을 밀어낸 것은 파레사다.
‘후회하지는…… 않는데.’
그를 마주 대하니 속이 술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윽고 마차는 황태자궁 입구에서 멈춰섰다. 황태자는 이번에도 먼저 내려서며 말했다.
“점심시간이로군. 식사하고 가도록.”
그리고 어쩐지 선을 긋는 듯한 태도로 앞장선다.
늘 그랬기에, 그가 손을 내밀어 잡아줄 줄 알았던 파레사는 머쓱해져서 따라 내렸다.
“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파레사는 생각했다.
제게도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그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를 볼 때면,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을 제 안에서 느낀다는 것을.
……아마 평생, 말할 수 없겠지만.
얼떨결에 따라와 하게 된 식사는 대화 없이 조용하게 이어졌다.
널찍한 테이블에서 황태자의 맞은편에 앉아 어색해했던 것도 잠시. 파레사는 금세 식사를 즐기게 되었다.
‘맛있잖아.’
황태자가 드는 식사다. 당연히 호사스럽게 나왔다.
풍성한 음식으로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게 아니라, 코스 요리였다.
최상의 상태로 조리된 음식이 하나하나 조금씩 접시에 담겨 놓였다.
‘황후궁보다 요리사 솜씨가 좋은 것 같아.’
파레사는 얇게 썬 수육 샐러드를 맛보면서 생각했다.
그게 아닌가? 황후궁의 음식은 황후가 워낙 미용과 건강에 신경 쓰는 탓에, 간이 약하고 담백한 터였다.
그래도 요리사의 솜씨가 워낙 좋아, 맛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요리는 그보다 더 소스 맛이 강했다.
이쪽이 더 제 취향이다.
파레사는 문득 한 가지 모순점을 깨달았다.
‘황후 폐하, 음식은 신경 쓰시면서 디저트를 그렇게 달달한 걸 드시면 소용없잖아?’
게다가 황후는 중간중간 파레사가 가져다준 디저트를 또 따로 먹었다.
접시가 빌 새도 없이 파레사가 부지런히 디저트를 채워 넣는 탓이다.
살이 쪘을 때는 제가 내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요샌 또다시 잘만 먹는다.
‘……좀 줄여야겠군.’
전속 시녀다운 상념의 흐름이었다.
반면 황태자는 디저트는 잘 먹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식사를 마칠 무렵, 나온 것은 상큼한 자몽 샤베트였다. 황후궁이었다면, 최소한 푸딩은 나왔을 거다.
‘하지만 맛있구나.’
우아한 동작으로 식사를 마친 황태자가 물었다.
“식사는 어땠지?”
파레사는 흔쾌히 대답했다.
“아주 훌륭했어요. 이런 식사를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황태자를 만나 했던 말 중에 가장 진심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황태자가 슬며시 웃었다.
“잘 되었군.”
또 뭔가가 심장을 쿡쿡 찌른다. 파레사는 가책을 느꼈다.
성격이 괜히 온화하고 너그럽다고 소문난 게 아닌 모양이다.
황태자는 파레사가 잘 먹는다는 사실에 순수히 흐뭇해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를 걷어찬 데다가 기피하기까지 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호구 같…… 아니, 속이 좋다니.’
황태자라 원래 가진 게 많아서 인심이 후한 건가. 아니면 여자한테 헌신적인 성격인가.
둘 다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파레사는 더 이상 그에게 뭔가를 받아선 안 되겠다고 느꼈다.
‘나쁜 여자가 된 기분이야.’
그가 준 액세서리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했던 터.
돌려주겠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도 없었다. 정색하며 싫어할 것을 알기에.
‘그럼 이제 돌아간다고 말할까.’
파레사는 잠깐 눈치를 봤다. 하지만 파레사가 입을 열기 전에,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자리를 옮겨 차를 들지.”
정해진 것처럼 압박해오는 눈빛에, 파레사는 거절할 수 없었다.
“예…….”
이제는 어색함도 익숙해졌다. 파레사는 편안함마저 느끼며 차를 들었다.
‘차의 풍미도 좋고…….’
풍광도 좋았다. 황후궁처럼 티룸이 아니라, 그들은 차양을 드리운 높은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황태자궁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물이 맑은 연못에 분수가 솟구치는 녹음 우거진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것은 색다른 운치가 있었다.
완벽한 식사에 티타임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벌을 받을 것처럼 이곳에 왔는데, 반대로 상을 받게 된 느낌이었다. 얼떨떨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때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에서 급박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황태자 전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든 이는 근위 기사 클로드 로렌이었다.
파레사를 보고 흠칫한 그는 곧바로 황태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가 죽었습니다.”
그 말은 파레사의 뛰어난 청각에 또렷하게 사로잡혔다.
그녀가 누구지? 설마…….
파레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태자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는 파레사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일이 생겨서, 이만 자리를 파해야겠군.”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색이 읽혔다. 파레사는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황후궁으로 돌아오며 파레사는 기이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황태자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파레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페이가 살해당한 걸까?’
제게 도둑누명을 씌운 시녀, 페이. 황궁의 어딘가에 갇혀서 조사받고 있을 터였다.
귀족이니 좀도둑질 정도에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을 터.
심문 장소는 그리 경비가 철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황제를 위시하여 황족이 기거하는 황궁이다.
경비가 삼엄해야 하는 게 당연하건만.
궁내가 떠들썩해질 만한 일이기도 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이 그토록 과감하게 움직였다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먹구름이 드리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전에도 전망은 흐릿했으나, 이것은…….
한차례 비가 쏟아질 듯한 예감이다.
* * *
다음날, 황후궁으로 근위 기사들을 비롯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전속 시녀 파레사 멘젤! 우리와 함께 가줘야겠습니다.”
파레사의 무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긴장감 서린 눈빛이었다.
손이 검에 가 있다.
티룸을 단장하던 파레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그들을 신중한 눈으로 살폈다.
‘어제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다급히 방에서 달려 나온 황후가 눈을 크게 떴다. 근위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부기사단장,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위험한 자일지도 모르니 물러나 계십시오.”
평범한 근위 기사도 아니고 부기사단장씩이나 행차했단 말이야?
예감이 좋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거론되자 움찔한 황후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태 맨날 보던 얼굴인데 왜 새삼 위험해진단 말이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그것은 황제 폐하의 앞에서 밝혀질 일입니다.”
이건 황제 앞에다 놓고 심문하겠다는 뜻인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어리둥절해 하던 파레사는 이내 납득했다.
찔리는 게 많기는 했다. 어째서, 어떻게, 누가 끄집어냈느냐가 문제겠지만.
뭔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문 황후가 기사들을 헤치고 걸어와 섰다.
“내 전속 시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나를 함부로 하는 것과 같소.”
부기사단장이 난감한 듯 대답했다.
“황후 폐하, 저희는 명령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포박은 안 되오. 그대로 데려가시오.”
수갑을 꺼내들고 있던 병사들이 움찔하며 거두었다.
“그리고 무슨 오해가 있는 듯하니. 나도 함께 가겠소.”
당당하게 선포하며 부기사단장을 직시하는 황후의 말린 장밋빛 눈동자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야말로 황후다웠다.
파레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었다. 황후가 이렇게 나서줄 줄은 몰랐건만.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하나만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가시지요.”
파레사는 순순히 기사들을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마차 주변을 포위하듯 에워싼 후, 부기사단장이 매서운 눈으로 선포했다.
“가자.”
다그닥거리며 달리기 시작한 마차 안에서 파레사는 제가 앞으로 맞이할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했다.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 * *
“파레사 멘젤.”
가느다란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예.”
짤막하게 응답하며 파레사는 슬쩍 주변을 훑어보았다.
낯선 상황이었다.
근위 기사 세 명이 뒤와 옆에 서서 저를 둘러싸고 있었고, 정면에는 황제와 에레스 공작 부인, 그리고 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황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기피하는 에레스 공작 부인과 마주하게 된 그녀는 안색이 좋지 못했다.
입을 연 것은 에레스 공작 부인이었다.
“제가 우연찮게 저 아이의 서류를 살펴보니, 미심쩍은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출신지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니, 저택은 텅 비어 있었고, 멘젤 가문의 사람들은 이주한 지 오래되었다지요?”
에레스 공작 부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뒤나미스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요.”
포박만 당하지 않았을 뿐 죄인으로 몰려 심문당하는 신세.
웬만한 시녀라면 벌벌 떨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파레사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큰 문제가 되지요.”
황제의 시선이 황후에게로 돌아갔다.
“황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소?”
잠깐 공황 상태에 빠져있던 황후는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로 둔 것이오.”
황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게는, 이미 솔직하게 다 말하였기에 문제가 없을 줄로 알았습니다만……. 누구를 전속 시녀로 두느냐는 제 소관 아닌지요?”
그녀는 애써 턱을 치켜들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자격 조건이란 게 있지요. 황후의 전속 시녀씩이나 되는 자리에, 제국인을 가장한 뒤나미스 인이라니요.”
모르는 사실을 일러주듯이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공교로우나, 황후 폐하. 이는 법도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타국인이 황실의 시중인으로 들어오는 것도 문제인데, 황후의 전속 시녀는 더더욱 안될 일이지요.”
공작 부인은 황후 쪽을 슬며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신분 검증 절차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건만, 서류상으로 문제가 없다 하여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요.”
창백하게 질린 황후의 입이 다물렸다.
공작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제국 귀족 명부에 그녀의 가문이 올라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는 뒤나미스 인이잖아요?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들어왔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심지어 이번에 벌어진 사건도 너무나 공교롭고요.”
에레스 공작 부인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입에 담기도 참담한 일이라는 것처럼.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던 시녀가 황궁 내에서 살해당했어요. 그녀를 납치하려고 했던 사내들처럼 말이지요.”
그 순간, 황후가 흠칫하며 에레스 공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이 흉악한 사건들이 그저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어요. 저 시녀를 심문하여 배후가 누군지 색출해내야 합니다! 이는 황실의 안전이 달린 일이니.”
말을 마친 에레스 공작 부인은 황제에게 단호한 시선을 주었다.
그 뻔뻔스러운 작태에 파레사는 표정이 굳었다.
‘그거 당신이 한 짓이잖아?’
마차 납치범들까지 죽었을지는 몰랐건만. 생각보다 술수가 과감하며 가차 없다.
‘이제까지는 봐주었을 뿐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버리다니.
하여간 교묘한 말재간이었다.
파레사에게 누명을 씌운 시녀는 죽여버리고, 평민이라 처리하기 쉬운 마차 납치범들도 죽여버린다.
그리고 제게 돌아올지 모르는 혐의는 도리어 파레사에게 돌린다.
숨기고 있던 신분과 엮어서.
에레스 공작 부인은 진작 파레사의 모호한 신분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저번에 만났을 때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그녀는 적절하게 그 사실을 꺼내어 오늘, 활시위를 겨누었다.
그 날카로운 활촉이 파레사를 꿰뚫을 거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파레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억측일 뿐이로군요.”
제게 겨누어진 화살 앞에서도 파레사는 당당했다.
그 당당한 태도는 파레사의 투명한 물빛 눈동자와 어우러져 그녀에게 진실성을 부여했다.
파레사는 도저히 악역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레스 공작 부인은 바로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부인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황제 폐하, 결단을 내려주시기를.”
턱을 쓰다듬은 황제가 파레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누군가에게 휘둘릴 만큼 녹록한 황제는 아니다.
냉엄한 태도로 황제가 물었다.
“무엇이 억측이라는 것이지?”
파레사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내가 말하면, 베베 시종장이 문책을 당할 텐데.
하지만 최근에 누명을 쓴 자신을 대하던 그의 태도가 떠오르자, 그런 사소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파레사는 입을 열었다.
“저는 직업소개소에서 황실 시녀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여 공정한 서류와 면접 과정을 거쳐 선발되었습니다. 제 조건은 당시 모집 공고에 기재된 조건에 부합했습니다.”
그래,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려서 들어온 듯이 말하는데 전혀 그런 건 없었다.
그때는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거의 사기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서류에 거짓을 기재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뒤나미스에서 살다가 왔지만, 제 출신지는 제국이니까요.”
파레사의 말이 막힘 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는 입궁하고 나서야 제가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제게 노림수가 있었다는 의심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니, 노릴 만한 것을 공고에 적어놓은 것은 그쪽이지 않나.
고소득에 숙식제공 등등. 지원하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었다.
보기 좋게 덫에 걸려버린 기분이었다.
파레사는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만약 제가 의심되신다면, 저를 뽑은 베베 시종장부터 심문하시는 게 옳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었다.
파레사는 수작을 부리지 않았지만, 시종장은 그녀를 기만하며 꼼수를 썼으니까.
베베 시종장은 황실을 위해서 오랜 세월 헌신해온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다.
신용이 있을 터. 그를 문책한대 봐야 근무 태만 정도가 걸릴 것이다.
황제에게서 묵직한 물음이 떨어졌다.
“네게 누명을 씌운 시녀가 살해당했고, 너를 납치하려던 자들 역시도 살해당했다. 이를 단순히 우연이라고 설명할 텐가.”
파레사는 단호하게 응답했다.
“그건 그들의 입을 막고, 제게 또다른 누명을 씌우려는 누군가의 술수 아닐지요. 모처럼 황후께서 들이신 전속 시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호흡을 들이켠 파레사는 또렷하게 선언했다.
“저를 끌어내려, 황후 폐하께 타격을 주기 위해서요.”
파레사의 시선이 에레스 공작 부인을 또렷하게 찔러 들었다.
눈빛으로 지목하는 듯한 태도였다.
공작 부인의 한쪽 입매가 비틀어졌다.
“그것은 조사하여 밝힐 일이겠지요. 하지만 황제 폐하, 저 시녀를 더 이상 황궁에서 일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의 목적은 황후의 전속 시녀를 내쫓는 것.
파레사가 무죄이건 유죄이건 간에 상관없이, 무조건 자격을 문제 삼아 궁에서 내보낸다.
그러면 황후도 자연히 이전처럼, 죽은 듯이 살게 되리라.
적어도 명분은 타당했다.
황제가 고심하듯 미간을 모았다.
그때 황제의 팔에 황후의 손이 올라앉았다.
그녀는 호소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는 계속 저 아이를 봐왔어요. 파레사는 전속 시녀로서 열심히 일해주었어요. 그래서 그녀의 출신을 문제 삼지 않았답니다. 수상한 아이가 아니에요.”
황제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뒤나미스에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도 제대로 검증이 되지 않았소. 저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대로 황후의 곁에 둘 수는 없소.”
파레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황후에게 어떤 위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정작 황후를 위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파레사는 언젠가는 제가 떠나야 할 순간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이 저기서 꼿꼿이 턱을 들고 있는 한은,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니.
황후가 도리질 치며 외쳤다.
“저는 다른 전속 시녀를 둘 생각이 없어요!”
“황후…….”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린 황제가 말했다.
“이때까지 전속 시녀를 22번이나 바꾸었다고 하더군. 황후의 마음에 차는 이가 정 없다면, 새로운 전속 시녀는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오.”
“황제 폐하…….”
황후의 두 눈에 절망이 어렸다.
또다. 황제는 오늘도 여전히, 이전처럼 포기를 말하고 있었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신경 쓸 것 없다.
오늘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황후에게 전속 시녀를 포기하라고, 더 이상 전속 시녀를 들이지 않아도 좋다고.
그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니까.
그때 뒤쪽으로부터 소음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득 뒤를 돌아본 파레사는 흠칫 놀랐다.
‘황태자, 그리고 요한나 왕녀?’
전자는 이 자리에 있을 법했지만, 후자는 의외였다.
두 사람은 파레사의 양옆에 나란히 섰다.
황제의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는 여기에 어쩐 일이지? 올로고스 왕녀는, 무슨 용무로 오셨소.”
황태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안심하란 듯이 눈짓하곤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전속 시녀 파레사의 신분을 보증해줄 인물과 함께 왔습니다.”
과연, 황궁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다 알고 있는 그다웠다.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발 빠르게 왕녀를 데려온 것이다.
왕녀는 파레사에게 슬며시 눈을 깜빡여 보이곤, 바로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누가 발언권을 주기도 전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파레사의 신분은 제가 보증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굉장한 불의의 현장을 목격하는 양 그녀의 두 뺨은 한껏 달아오른 채였다.
란티어스 제국 황실에서 일하는 뒤나미스 인을 올로고스 왕녀가 보증해주고 있다니.
퍽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황제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아시오?”
“저는 뒤나미스에서 그녀를 만났어요. 그녀는 정직하고 훌륭한 기사였지요. 여기서 만난 그녀는 그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어요. 저 눈을 보세요!”
모두가 파레사의 눈을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파레사는 눈을 깜빡였다.
오직 진실만이 담겨 있는 듯한, 물빛 눈동자였다.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위장하여 황궁에 들어온 이가 어떻게 저런 맑은 눈을 보일 수 있겠어요?”
연극조로 펼쳐지는 왕녀의 말은 왠지 모를 설득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넘어가지 않은 에레스 공작 부인이 놀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기사 지망생이라고 알려져 있더니, 기사였다고요? 거짓이었군요, 세상에.”
왕녀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그건 기사였는데 시녀로 전향했다고 하면, 다들 수상하게 여길 테니까요! 저 근위 기사분들이 타국에 간다고 해서 시종으로 취직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요?”
근위 기사들은 떨떠름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말이 맞았다.
황후가 말을 보태었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기사였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듣는군.”
황태자가 섭섭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옆에 있는 파레사에겐 들리고, 황제에겐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황태자에게 제가 기사지망생이라고 한 적 있는 파레사로서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는 파레사의 손을 기사의 손이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공공연하게 밝혀질 줄은 몰랐는데.’
설마 벨로나 나이트 이야기까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 나오면 안 되는데.
난감하고 곤란하고, 아무튼 불편한 상황이었다.
황후가 황제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두 눈은 강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황후는 제가 더 잘 안다는 듯이 열변을 토했다.
“제 전속 시녀는 뒤나미스에서 어떤 세력가의 끈질긴 구애를 피해서 힘겹게 도망쳐서 제국에서 정착한 아이랍니다. 듣기로는 그자는 어마어마한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 그녀 하나쯤 감옥에 가두는 건 일도 아니라더군요!”
위축된 기미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후는 저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의심만으로 궁에서 내쫓다니요? 황제 폐하께서 그리 가혹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요한나 왕녀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파레사에게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파레사의 어딘지 어색한 표정을 보고 알아챘다. 설마 그게 남자가 아니라…….
“와하핫!”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왕녀는 제게 시선이 집중되자 와락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흐흑, 그렇게 참담한 일이! 저도 그것까진 몰랐는데…….”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조울증적인 급변을 의식하지 않았다. 황제가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래, 적어도…… 신망은 있는 모양이로군. 황후에 황태자, 왕녀까지도 이리 변호하는 것을 보면.”
그러나 니시아나는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황제 폐하, 속이고자 하면 모두를 속일 수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녀가 수상한걸요. 어찌 시중인이 이리 꽁꽁 자신에 대해서 숨기고 황궁에 들어와 있는지요. 이는 기만입니다.”
기만이라는 단어에 파레사는 움찔거렸다.
그래,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이 까발려진 지금, 그들이 여전히 제게 호의를 보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감동적이야.’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
황제가 니시아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니시아나, 또한 네 우려는 잘 알겠다만 황후와 황태자는 그녀를 믿고 있구나.”
비록 사정이 있어 숨기거나 거짓말을 할 수는 있어도, 정직한 성품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니.
본질이라는 것은 곁에 있다 보면 자연히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간 발칙하다 싶은 파레사의 솔직함을 대면하면서 황후와 황태자에게는 자연히 믿음이 자라났다.
정직하지 못하거나 목적이 있는 자라면, 도리어 살살 비위를 맞추고 입안의 혀처럼 굴었을 테니까.
황태자가 쐐기를 박았다.
“고모님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여 어떻게든 궁 밖으로 내보내고 싶으신 거겠지요.”
“그건 어째서냐.”
황태자는 그녀와 황후 사이를 언급하는 대신, 다르게 말했다.
“제가 그녀와 함께, 고모님이 주최하신 간택 무도회에 나타났으니까요.”
“……간택 무도회에 황태자가 파트너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언뜻 들었다. 내 요새 회의에 바빠 귀담아듣지 않았다만. 그게 저 아이였더냐.”
“예. 제 뜻에 따라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니, 그녀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황태자의 입가에 태연한 미소가 올라앉았다.
황제는 파레사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결론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녀의 전속 시녀 자리는 일단 박탈하지 않겠다, 황태자.”
“예, 폐하.”
“황궁 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서 철저히 수사토록 하라. 이는 황실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니. 그리고 저 아이는……”
황태자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녀도 수사는 받아야겠지요.”
어쨌거나 파레사에게는 페이를 살해할 동기가 있다.
파레사는 페이가 어디에서 심문을 받았는지조차 몰랐으니 혐의는 금세 풀리겠지만.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에게 맡기마.”
“그럼 즉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따라오도록.”
파레사는 그대로 황태자를 따라 움직였다. 숨돌릴 새도 없이,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함께 방을 나선 황태자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설마 해서 말하는 건데, 혹시 네가…….”
“……절대 아닙니다.”
누굴 살인범으로 생각하는 거야?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태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거 다행이로군.”
이상하지……, 이 감각.
마치 쿵, 하고 심장에 둔중한 뭔가가 떨어진 듯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눈부신 얼굴이, 거기에 맺힌 미소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파레사는 이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그보다 할 말이 있어.”
돌연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꼭 해야 하는 말이야.”
뭘까. 파레사는 잠자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막 입술을 움직이던 그때, 커다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파레사! 정말 다행이에요!”
뒤늦게 쫓아 나온 요한나 왕녀였다. 얼른 달려온 그녀가 파레사의 손을 콱 부둥켜 잡았다.
파레사는 정중히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왕녀님, 변호에 감사드립니다.”
왜 이리 자신에게 호의적인지 모를 인물이었다. 뒤나미스에서도 그리 접점은 없었건만.
하지만 파레사는 벨로나 나이트.
뒤나미스에서 벨로나 나이트가 차지하는 위상을 볼 때 그녀가 남다른 호의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자꾸 이상한 상상만 안 해주면 고맙겠는데…….’
왕녀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 황후께서 하신 말씀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는 위로 솟구치고 있다. 왕녀는 황태자를 의식하여 입을 감싸 쥐었다.
“아아, 막 웃음이 나오려고 하네요! 너무 안도가 되어서.”
실룩거리는 기색을 봐선 대놓고 웃음을 터트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황태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왕녀께서는 파레사와 잘 아시는 사이신가 보군요.”
어쩐지 냉랭한 목소리였다. 추측을 가감 없이 입 밖으로 내놓는 성격의 왕녀는 즉각 반응했다.
“어머, 질투하시나 보네요!”
“무슨.”
어쩐지 눈썹을 치켜든 황태자가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파레사가 기사였던 것을 저만 몰랐다고 섭섭해한 그다.
멀뚱히 서 있던 파레사는 설마 질투겠냐고, 왕녀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지만.
왕녀의 초점은 바로 그에게로 옮겨졌다.
“어후,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찌 이리 훤칠하신지! 나라를 흔들 미모를 가지고 황태자이시기까지 하다니. 솔직히 찾아오셨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요.”
너무 여과 없이 뱉어내는 거 아니야?
그녀는 황홀한 듯이 황태자를 쳐다보다가, 이내 파레사의 시선을 인식하고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나는 임자 있는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요. 내가 이래 봬도 의리가 있는 편이라. 솔직히 간택 무도회 때까지만 해도 사심이 없지는 않았는데.”
왕녀는 파레사에게 부담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어쩌겠어요? 알아 버리고 말았는데.”
당신의 사명이 사랑이라는 걸!
안 들어도 알 것 같은 숨겨진 뒷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 한마디 내놓는 것마다 어쩜 이리 입을 틀어막고 싶어지지.
파레사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우리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황태자가 왕녀의 잡담을 적절히 끊어주었다. 왕녀는 순순히 물러나며 손을 흔들었다.
“파레사, 그럼 조사 잘 마쳐요! 다음에 또 봐요!”
올로고스로 대체 언제 돌아가지?
도움 받았음에도 빨리 그녀가 떠나줬으면 싶은 파레사였다.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일었다.
“왕녀님은 어떻게 알고 데려오시게 된 거예요?”
누명을 썼을 때 왕녀가 친구라면서 자신을 공공연히 편들기는 했지만, 황궁에서 만났다고 둘러댄 터였다.
그들이 뒤나미스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는 것은 황후에게만 말했다.
파레사의 과거를 알아야 보증을 해줄 수 있으니, 황태자가 왕녀를 데려온 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황태자의 대답은 여상하게 흘렀다.
“그녀는 무도회 날 이전에 황궁에서 너와 접촉한 적이 없었어. 그래서, 이전에 알던 사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적극적으로 너를 도운 전적이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 여겼지.”
“그러셨군요.”
논리적인 추론이었다.
역시 황태자,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파레사는 문득 낯선 감각을 느꼈다.
‘황궁에서 너와 접촉한 적이 없다……라니.’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왕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일까.
전자이기를 바라지만 후자라면…….
‘좀 스산한데.’
파레사는 앞서 걷기 시작한 황태자의 매끈하고 모양 좋은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황태자는 뒷모습조차도 앞모습을 연상케 할 만큼 근사했다.
단정한 등은 곧고 날렵했고, 두 다리가 아래로 길게 뻗어 있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등 뒤로 살랑거렸다.
고양이라도 된 양 어쩐지 그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신 차리자.’
파레사는 얼른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 * *
“그럼 심문을 시작해 볼까.”
제 앞에서 턱을 괴며 펜을 굴리는 황태자의 얼굴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도.
그는 어쩐지 즐거운 듯이 보였다.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그를 향해 파레사는 물어야만 했다.
“어째서 심문하는 사람이 황태자 전하밖에 없는 거죠?”
제가 범인일 거라는 지목이 생트집이라지만, 너무 날로 조사하는 건 아닌가.
“다른 건 이미 클로드가 조사해왔으니까.”
황태자는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황실 시녀 페이가 살해당한 날, 너는 줄곧 황후궁에 있었다. 그러니 네 소행은 아니란 거고, 네 재산을 조사해봤을 때 큰돈이 빠져나간 흔적도 없었지. 네가 직접 사주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네게 혐의를 돌릴 근거가 없어.”
“제 재산을 조사해보셨어요?”
파레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거 너무 사생활 침해 아닌가? 안 그래도 초라한 액수만 들어 있을 텐데.
황태자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봉급이 들어가는 계좌를 살핀 게 고작이었지만. 금액이…… 얼마 안 되더군.”
황태자의 얼굴에 동정하는 듯한 기색 떠올랐다.
파레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정도면 많이 모은 겁니다. 전속 시녀는 꽤 높은 연봉을 받고 있다고요.”
물론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들어 있는 돈은 별로 없다. 그래도 차곡차곡 쌓는데 보람을 느끼고 있었건만.
파레사의 궁핍이 안타깝다는 듯, 황태자가 제안했다.
“어머님이 인색하신가 봐. 황태자 궁으로 옮겨오는 것이 어때.”
“……그건 거절했을 텐데요. 심문을 마저 하시지요.”
슬쩍 입가가 깊어진 황태자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멘젤 자작가에 대해서 말해 보도록. 어떻게 뒤나미스로 이주하게 된 거지?”
“아버지는 멘젤 자작가의 차남이셨어요. 뒤나미스 인인 어머니를 만나 이민을 가셨는데, 후에 가문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형이 돌아가셨단 소식이 전해졌어요.”
기억을 더듬으며 파레사는 말을 이었다.
“그 후로 서류상으로 멘젤 자작의 작위를 계승 받긴 했으나 그대로 뒤나미스에서 사셨죠. 친척도 없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주했다고만 알려져 있었을 거예요.”
멘젤 저택은 그대로였지만, 최소한의 관리만 맡겨두었을 뿐 손대고 있지 않았다.
말을 마치고 나자 파레사는 뒤늦게야 뒤나미스의 부모님에게 가닥이 닿았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물론 떠난다고 편지는 남기고 나오긴 했다.
금슬이 너무도 좋은 부모님은 성인이 된 파레사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벨로나 나이트가 되겠답시고 집을 떠난 덕에 진작부터 독립해 있기도 한 터였다.
벨로나 나이트 후보자들은 따로 교육을 받으니까.
벨로나 나이트가 된 파레사는 가문의 소속을 벗어나 온전히 뒤나미스 왕실에 몸을 담았다.
그걸 뿌리치고 나온 이상, 소속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나미스에서 네가 속한 가문은?”
“로고스, 였어요.”
제국으로 따지자면 백작에 준하는 가문으로, 그리 대단한 세를 자랑하지는 않았다.
뒤나미스에서 지배계층은 딱히 작위가 없이, 왕족과 귀족으로만 나누어졌다.
세를 결정짓는 것은 그들의 가문의 몫이다.
황태자도 그 사실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파레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과는 연을 끊었어요.”
그래, 이렇게 말해두는 게 편할 터였다.
왕태녀가 압박해올까 봐, 어디로 가고 뭘 할 건지는 일절 말해주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는 건 물론이다.
벨로나 나이트가 죽는다면 그 사실을 뒤나미스에서는 자연히 알게 되니까, 달리 걱정하진 않을 터였다.
황태자가 턱을 두드리며 느릿하게 물었다.
“이유는?”
“저를 압박하는 세력가에게 굴해서 저를 넘기려고 하셨거든요.”
말을 지어내면서 파레사는 내심 가책을 느꼈다. 불효녀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제가 만약 부모님에게 행선지를 알려드렸다면, 왕태녀의 압박에 부모님이 저를 넘겼을 게 분명하니 사실이기도 했다.
서걱거리며 소리와 함께 서류에 심문 내용을 기입하던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자의 이름은……?”
잇새로 흐른 음성이 싸늘했다. 얼어붙은 눈빛이었다. 마치 그자를 죽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그게, 말씀드리기가 조금.”
그게 남자가 아니라 왕태녀라고 어떻게 말하겠어.
“만약……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파레사는 근심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가만히 파레사를 쳐다보던 황태자는 이내 수긍했다.
“좋아, 그러면 뒷부분은 아예 기재하지 않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다른 사실은 왕녀가 말한 그대로인가?”
“예.”
왕녀가 알아서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줘서 편했다.
황태자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이것으로 심문을 마무리하지.”
황태자는 작성을 마친 서류를 갈무리했다. 어딜 봐도 대충 처리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정리할 테니, 황후궁으로 돌아가 봐. 어머님이 기다리실 테니까.”
그래, 황후가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고 있을 터. 그도 감안하여 서둘러 끝맺음하려는 것이리라.
파레사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뭔가 잊은 듯한데……. 뭐더라? 하는 미묘한 거슬림을 안고서.
“파레사.”
막 심문실 나서려던 파레사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음영이 드리운 녹청의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늘이 서렸음에도 스스로 빛나는 듯이 선명한 눈동자였다.
그 아름다운 두 눈을 빛나게 하는 것은 어떤 강렬한 진심.
“난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어.”
그게 그가 하려던 말이었다.
파레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 황후궁으로 돌아오면서 파레사는 낯선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제까지 파레사의 세계는 간결했다.
벨로나 나이트로서 예정된 삶.
그 삶 속에서 파레사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사명뿐이었다.
뒤나미스를 떠나오고 나서도 그것은 변치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파레사는 균열을 느꼈다. 제 안에서 흔들려 유리창에 잔금이 가듯 생겨난 균열.
그 균열은 시간이 지나면 메꿔질 만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통째로 부수거나 다른 형태로 변하게 할 만한 것일까.
파레사는 가만히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벨로나 나이트의 손.
평생을 갈고 닦아온 검이 그 안에 있었다.
뒤나미스의 권능은 한 번 경지에 도달하면, 결코 그 경지에서 내려서지 않게 해주는 것.
파레사는 제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선연히 느끼며, 동시에 권능이 부여한 사명 역시도 뚜렷하게 느껴왔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때때로 어떤 눈부신 빛이 그 사명을 가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을 다잡아야 해.’
황태자의 마음은 그의 것이고, 파레사의 마음은 파레사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어떻든, 제가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 * *
“조사는 잘 마치고 왔느냐.”
그 말을 하는 황후의 안색은 어두웠다. 파레사는 잠자코 대답했다.
“예, 황후 폐하께서는…….”
생각해보면 그녀는 에레스 공작 부인과 함께 남겨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놓인 것만으로, 안색이 좋지 않았지. 또 그 여자가 뭐라고 한 걸까.
파레사의 의혹을 부인하듯 황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별일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어라 하십니까.”
황후는 쓸쓸한 얼굴로 한숨처럼 말했다.
“그저…… 니시아나가 과민한 것 같으니 신경 쓰지 말라더구나.”
“황제 폐하께서는 니시아나가 시녀를 죽였을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황후의 어조가 금세 사나워졌다.
“황제 폐하는, 제 여동생, 그 년이 어떤 년인지 몰라.”
심정에 변화가 인 걸까.
황후가 황제 폐하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면서 동시에 비속어를 입에 담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제라는 존재는 늘 그녀를 부드럽게 만들었기에.
“나도 놀랐다. 니시아나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
그건 이제까지는 그리 극단적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파레사가 볼 때 에레스 공작 부인은 언제든 선을 넘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묘한 수작과 언변으로 황후를 내모는 일쯤은 간단했겠지.
“그만큼 황후 폐하의 달라진 행보에 위협을 느낀 것이겠지요. 잘하고 계십니다.”
“아니.”
그녀의 눈이 파레사를 응시했다.
말린 장밋빛 눈동자는 여전히 요요하게 아름다우나 어딘지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의미인가…… 싶구나.”
“무슨 의미라니요.”
지나치게 힘없이 들려, 파레사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나는 너조차 잃을 뻔했어. 무력하게. 황태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고개를 내린 그녀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지켜 주겠다 했었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이만큼 과감한 모략이 꾸며질 줄은 아무도 몰랐지 않은지요.”
“타국의 그 세력가에게서 널 지켜 주겠다 호언장담했었는데, 이 황궁 내에서조차 지켜 주지 못하다니……. 내가 한심하구나.”
황후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잔뜩 의기소침한 그녀를 파레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주어 강조했다.
“말씀드렸지 않나요. 저는 강하다고.”
“그렇더구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찌 그리 침착하던지……. 너는 강하다. 하지만 네가 강한 것과 내가 무력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럼 강해지시지요. 이런 것에 흔들리셔선 안 됩니다.”
에레스 공작 부인은 엄청나게 모질고 냉혹한 성격 같으니, 물러서기만 해서는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황후는 물었다.
“무엇을 위해서……?”
황후의 두 눈이 떨렸다. 어떤 격앙이 그녀 안에서 끓어올랐다.
“내 남편조차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데. 니시아나 그년이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황후는 재차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느냐?”
“뭐라고 하셨기에.”
황후는 뭔가를 누르듯, 눈을 감았다 떴다. 아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 *
그것은 파레사와 황태자에 이어 왕녀가 물러간 직후, 벌어진 대화였다.
“폐하의 결정에 이견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자격 없는 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마음에 걸리더군요. 전속 시녀란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자리인데…….”
부드러운 흘러드는 말씨였으나, 그 말이 의미하는 대상은 파레사가 아니었다.
황후는 단박에 자신을 향한 가시를 깨닫고 얼어붙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니시아나, 오늘 네 태도는 조금 과하게 여겨졌다. 어쨌든 전속 시녀를 정하는 것은 황후의 소관이건만. 증거도 없이 몰아세우지 않았느냐.”
“송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황실의 안전을 우려하는 마음인걸요. 황후 폐하께도…… 사과드립니다.”
니시아나의 두 눈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물러설 때를 냉정하게 판별할 줄 알았다.
시도는 실패했으나 문제는 없다. 기회는 또다시 만들면 되니까.
오히려 황후의 약점이 저 전속 시녀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황후가 흠칫 몸을 떠는 사이,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안다. 노파심에 그러한 것이겠지. 황후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니사아나는 본디 걱정이 많다오. 오늘은 좀 지나쳤다만.”
“다시 한번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하라.”
그녀가 떠나간 뒤, 황후는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폐하, 제 전속 시녀는…… 누명을 쓰고 쫓겨날 뻔했습니다.”
“한낱 시녀일 뿐이오. 실제로 그녀의 신분이 수상한 것도 사실이지 않소. 기사 출신의 시녀라니……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나 역시, 보고를 들은 순간 꺼림칙하게 느껴졌다오. 그런 여자를 황후의 곁에 두는 게, 걱정스럽더군.”
니시아나라면 수상한 점을 강조하여 이 심문의 자리를 끌어낼 만했다.
황제의 말에는 그득히 애정이 담겨 있었으나, 어딘지 참을 수 없어져 황후는 숨죽여 내뱉었다.
“모르시겠어요……? 니시아나는 저를 싫어해요.”
단 한 번도 황제에게 꺼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여동생. 황녀와 사이가 나쁘다면 황제가 어찌 생각할까.
황실의 식구를 포용하는 것조차 못하는 황후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 사이좋게 지내야 해. 사이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해. 갈등이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늘 괜찮은 것처럼.
황후는 닳아 문드러지도록 속내를 감추며, 늘 황제 앞에서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 나는 황제의 아내니까. 이 정도는 견뎌내야 하니까.
하지만 그 10년 간 황제는 어떠했던가.
기나긴 세월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와 그녀를 휩쓸었다.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쓰라린 통증이 남았다.
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어쩐지 참을 수 없이 괴로워져, 황후는 눈을 찡그렸다.
황제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랬다.
“황후를 그리 내켜하지 않을지 모르지. 둘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소. 하지만 부딪히지 않으면 될 일이오. 니시아나는 내가 따로 불러 경고해두지.”
“폐하…….”
“지나치긴 하나 품을 만한 의심이었소. 그런 것으로 니시아나를 그 이상 책할 순 없소. 제도를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황녀 아니오.”
너희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하여 니시아나를 제도에서 떠나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니 너도 이 정도는 너그러이 이해하거라.
그런 뜻이었다. 피해자인 황후에겐 가혹한 말이기도 했다.
황후는 차가운 벽을 느꼈다. 그러나 제 손을 잡아 오는 그 손만은 따뜻하여,
“마음 푸시구려. 원한다면 더 이상 그녀와 마주칠 일 없게 하겠소.”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꺼낼 수 없었다.
그 따뜻한 무심함은 도리어 얼음보다도 찼다.
* * *
황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오늘도 그랬지. 폐하는, 언제나 한결같이. 마치 사소한 일인 것처럼.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고.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부딪히지 않으면 된다. 마치 나를 위해서인 양.”
노래하듯 읊조리는 목소리는 점점 더 떨림을 머금었다.
“결국 포기만을 말씀하셨지.”
황후의 입에서 결국, 흐느낌 섞인 원망이 튀어나왔다.
“내가 물만 주면 살아가는 꽃이더냐!”
파레사는 진작 깨닫고 있던 사실을 되새겼다.
황제 역시도 공범이었다. 그는 정무에 몰두할 여력은 있어도 어린 아내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함은 없는 남자였다.
하급 귀족의 여식에게 금은보화를 안겨 주며 일평생 풍족하게 해 주니 그걸로 행복할 거라고 믿는 건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황후의 눈높이에서 그녀를 바라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녀의 고민이든 번뇌든, 심지어 상처 입든 간에 하찮고 감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겠지.
황제는 단 한 번도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내몰리거나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을 터.
모두가 그의 앞에서 호의를 표하면 고개를 조아리는데, 모두가 처음부터 적의를 품고 대하는 황후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황제니까. 그래, 황제는 그럴 수 있었다. 황제는 무치니까.
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으로선 그래선 안 됐다.
둔감하고 무심하며 무정한 것은 자랑거리가 못 된다. 이혼 사유는 될지 몰라도.
파레사가 일전에 말한 적 있듯이, 황제는 남편으로서 태만하며 한심하고도 형편없었다.
어쩐지 화가 솟구친 파레사는 황후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권했다.
“바람이라도 피우시는 게 어떨까요?”
그것이 남편에게는 최대의 복수일 테니까.
“바람 사유는 남편의 성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란 것으로 하고요.”
진담인 듯 농담인 듯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제가 찾아봤는데 제국법에 따르면, 남편의 성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바람이 나면 쌍방과실로 보더군요.”
제국은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국가다. 그래서 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남자에게 혹독하기도 했다.
어떤 이유건 아내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남편에게는 그 자체로 엄청난 과실이 있다고 본 것이다.
“내 바람 상대의 목이 날아가기를 바라느냐.”
황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역시…… 무리가 있겠죠?”
그 누구든 목이 날아갈 걸 각오하고 황후와 바람을 피울까.
아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황후는 나라를 휘청거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니까.
그토록 아름다우니 요녀라는 소문도 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파레사는 좀 더 현실성 있는 선택지를 꺼내 들었다.
“황후 폐하는 돈을 많이 쓰시니 옆 나라 왕한테 새로 시집을 가신다든가.”
미혼이나 이혼이나 사별한 왕이 누가 있더라? 다른 제국은 너무도 멀고…….
파레사가 곰곰이 떠올려보는 사이, 황후가 혀를 차며 내뱉었다.
“내 아이들은 어쩌란 말이냐. 아이들을 놔두고 다른 나라로 가버리란 뜻이냐?”
파레사의 흰소리에 황후는 차츰 진정된 기색이었다.
파레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렇네요. 안타깝군요.”
진심으로 그랬다.
“그러면 하는 수 없겠네요.”
선택지는 하나 더 있었다.
“이혼.”
어차피 황후는 아이들을 자주 보지도 않는다. 지금도 아카데미에 보내놓고 방학 때만 보는 터였다.
황후가 제대로 황실의 후사를 길러내지 못할 거란 황실 어른들의 압박도 있었던 탓으로 추측되었다.
이혼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자주 보면 더 자주 봤지, 덜 보지는 않을 테지.
황후는 이전처럼 이혼이란 소리에 눈을 치켜뜨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내리고,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이대로 사느니, 어쩌면 그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말라죽는 것보다는 이혼하는 게 낫지 않겠니……?”
하지만 그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급 귀족이라지만 귀족 영애로서 자라나 황제와 결혼한 그녀였다. 보수적인 그녀로서는 이혼이라는 단어가 편치도 가깝지도 않았다.
게다가 황제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고, 황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원망스럽다고 해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며 애정이 식었다고 해도 끝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부부 관계란 본디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확했다.
사랑이 불행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 누군가가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황후일지라도.
“……모르겠다. 나는.”
“그리 깊게 생각하진 마세요. 지금은 거기까지 고려하실 때가 아니에요. 아직은 상황을 변화시킬 여지가 있어요.”
“그래, 그렇겠지?”
황후는 가만히 되물었다.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파레사가 보기에 황제는 퍽 가망이 없어 보였다. 자기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알려준다고 해도 납득할 것 같지 않다.
이제 와서 바뀔 거였다면 진작 바뀔 수 있었다. 황제씩이나 되시는 인물이니 머리가 굳을 만도 하지.
그래도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최후의 방법 하나를 등 뒤에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테니까.
“이만 쉬시는 게 좋겠네요.”
파레사는 황후에게 인사하곤 방을 빠져나왔다.
실은 퇴궁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