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rcist and a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9
19
#영혼흡수 (5)
태수는 반대편에서 감독과 작가 일행을 유심히 지켜봤다.
뭔가 안 풀리는 일이 있는지 감독과 작가 사이에 작은 논쟁이 오갔다.
그 사이에 있는 관계자 두 명이 두 사람을 말리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뭔가 모르지만 나름 심각한 논의를 마친 일행이 커피숍을 나갔다.
태수는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로 얼른 옮겨 앉았다. 혹시라도 송현주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있는지 영능력으로 알아볼 작정이었다.
태수가 감독과 작가가 마주 앉아 있던 자리에 손바닥을 펼치고는 주문을 읊었다.
‘사이코메트리.’
화르르르륵.
공기가 흔들리며 방금 전 정해일 감독과 양혜진 작가가 나눴던 대화와 장면들이 허공에 재생되어 나타났다.
-양 작가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무리 봐도 지희하고 희철이 캐릭터가 재미가 없어요. 어차피 서븐데 캐릭터적으로 재미가 없는 커플을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지금은 그렇지만 극이 전개되면 둘 사이에 케미가 일어날 거예요.
-글쎄요, 오전에 애들 연기하는 거 보셨죠? 이 캐릭터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 얘네들은 빼고 가죠.
양혜진 작가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곤란해요. 지희가 없으면 영선이가 힘들 때 찾아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어져요. 지희한테 하소연하는 과정에서 선영이의 속마음을 드러내야만 하는데, 지희가 없으면 어떡해요?
-물론 그런 의도는 알겠는데 너무 재미가 없으니까.
정해일 감독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북북 긁다가 말했다.
-진짜 미치겠네. 왜 둘 사이에 케미가 안 생기지? 지희 캐릭터를 더 표독스럽게 만들어야 하나?
이번에도 양혜진 작가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걔들 분량이 더 늘어나게 돼요.
양혜진 작가의 말에 태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자신이 어제 송현주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드라마 작가가 한 것이다.
정해일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이씨, 어떡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양혜진 작가가 말했다.
-감독님, 이렇게 하죠. 일단 3화까지 대본이 나와 있으니까 그때까지 끌고 가 보고 계속 밋밋하면 다른 방법을 찾는 걸로.
-알겠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하죠.
양혜진 작가가 말했다.
-그나저나 난감하네요. 오전에 마음에 드는 연기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생각보다 지희 캐릭터가 어려워서 그래요. 작가님은 쉽게 쓰지만 그걸 구현하는 저희의 어려움도 좀 헤아려 주십시오.
정해일 감독의 말에 양혜진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초반만 잘 넘기면 괜찮을 거예요.
태수가 감았던 눈을 떴다.
짜릿한 희열이 전신을 휘감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문제점을 감독과 작가도 똑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지금까지 소설만 쓴 자신이 어떻게 그런 분석을 할 수가 있었는지 신기했다.
아마도 감독과 작가는 오랫동안 스토리에 빠져 있다 보니 다른 시각으로 캐릭터를 바라볼 생각 자체를 못 한 것이다.
태수는 즉시 대기실로 달려 올라갔다.
그사이에 송현주가 오디션을 보러 들어가지 않았을까 조바심이 일었다.
다행히 대기실에서 대본을 보고 있는 송현주가 보였다.
“미안해요. 커피가 좀 식었네요.”
히죽 웃는 태수를 수상쩍게 바라보며 송현주가 물었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태수가 다른 지원자들이 듣지 못하도록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제가 말한 그 캐릭터로 연기하세요. 감독하고 작가가 얘기 나누는 걸 들었는데, 제가 어제 얘기한 것과 거의 비슷했어요.”
사실 감독과 작가의 얘기를 들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건 진실이었다.
송현주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지금까지 대본이 3화까지 나왔는데, 지희하고 현철이 캐릭터가 서로 어울리지를 못해서 이후엔 두 사람을 극에서 아예 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아, 그럼 어떡해요?”
송현주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태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껏 오디션에 붙어도 2주 후에는 하차해야 한다는 소리다.
물론 방법은 있다. 송현주가 오디션장에 들어가서 지희의 캐릭터가 재미있다는 걸 보여 주면 된다. 희철 캐릭터하고의 케미 가능성도 보여 주고.
“오디션장에 들어가면 희철이 대사는 누가 해요?”
“음, 아마 제작부 스태프나 조감독님이 할 거예요.”
“혹시 그 상대역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놀라서 한껏 커진 송현주의 동공이 더욱 커졌다.
“네? 왜요?”
“지금 대본에서 지희 캐릭터를 살리려면 상대역인 희철의 캐릭터도 그것에 맞게 반응을 해 줘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지희 캐릭터가 생뚱맞아 보일 수 있거든요.”
가만 생각해 보니 태수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도였다. 오디션을 보는 사람도 아닌데 함께 들어가서 상대역을 해 주는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자칫하면 공정성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고.
대본 속 캐릭터를 멋대로 재해석해서 연기하는 것만도 위험부담이 큰데 자칫하면 작가나 감독한테 안 좋은 이미지로 찍힐 수도 있는 상황.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송현주가 결심한 듯 말했다.
“알았어요, 얘기해 볼게요.”
송현주가 앞에서 진행을 맡고 있는 스태프에게 다가가 얘기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인 스태프가 오디션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스태프가 나올 때까지 둘은 초조하게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이러다가 오디션도 보지 못하고 끝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잠시 후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스태프가 나오더니 송현주를 향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했다.
송현주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태수를 돌아봤다.
“해도 된대요. 괜찮겠죠?”
송현주의 절박한 눈빛을 대하자 비로소 긴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소설도 아니고 시나리오나 대본 쪽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연기까지 해야 한다니.’
송현주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일이다. 감독과 작가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고.
하지만 그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한 번도 연기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걸 잘할 수 있을까? 미친, 내가 송현주와 오디션을 함께 보다니.’
물론 오디션 통과를 목적으로 하는 송현주하고는 입장이 다르지만 유명 감독과 작가가 보는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자신이 희철의 캐릭터를 얼마나 맛깔스럽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지희의 캐릭터도 영향을 받을 테니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태수가 다급하게 물었다.
“대본 어디 있어요?”
“왜요?”
“대사 외워야죠. 하나도 못 외웠는데.”
오히려 송현주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태수 씨는 그냥 대본 보면서 하면 돼요.”
하긴 어차피 자신은 오디션을 정식으로 보는 것도 아니니 희철의 캐릭터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송현주를 받쳐 주면 그만이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일단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감독과 작가는 물론 여러 스태프와 관계자들 앞에서 어설픈 연기를 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머리가 하얘졌다.
심지어는 희철의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할지도 신경이 쓰이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게 연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들이 하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동작 하나, 표정 하나도 모두 의도된 것이니까.
“송현주 씨!”
스태프의 부름에 송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태수 씨.”
태수도 엉거주춤 일어나서 송현주의 뒤를 따라 오디션장으로 들어갔다.
태수까지 함께 오디션장으로 들어가자 다른 참가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특히 강미현은 두 사람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오디션장 안쪽은 확실히 바깥하고 공기가 전혀 달랐다.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표정의 감독과 작가 그리고 모든 관계자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비로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태수는 배우의 입장을 난생처음으로 경험했다.
‘후우, 오디션을 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난 연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기가 어렵네.’
작가가 송현주의 프로필을 보고 있었고 그 앞에 긴 테이블 위에는 다른 지원자들 프로필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다행히 송현주는 그렇게 많이 긴장한 눈치는 아니었다.
감독과 작가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태수와 송현주를 응시했다. 두 사람이 들어와서 살짝 의아해하는 표정들.
“후우.”
태수가 심호흡을 하자 정해일 감독이 물었다.
“오디션은 송현주 씨만 보는 거죠?”
송현주가 얼른 대답했다.
“네, 여기 이분은 희철 대사를 대신해 주려고 따라 들어온 거고요.”
이번엔 양혜진 작가가 까칠한 느낌으로 물었다.
“소속사분인가?”
송현주가 얼른 대답했다.
“아뇨, 그냥 아는 분이세요.”
“상대역 대사는 여기 스태프가 쳐 주는데 굳이 조력자가 필요한가요? 다른 지원자 입장에서 보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스태프들한테 미리 얘기해서 양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
연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작가가 문제제기를 하자 송현주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송현주는 작가의 물음에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표정이 굳어졌다. 괜히 저러다가 멘탈이 무너지면 연기까지 망칠 수가 있다.
“왜 대답을 못 해요?”
작가가 재차 날선 질문을 던지자 보다 못한 태수가 나섰다.
“전 배우도 아니고 연기를 해 본 적도 없습니다. 단지 둘이 대본 연습을 해 보니 지희의 캐릭터가 살아나려면 희철의 캐릭터도 그것에 맞게 보조를 맞춰야만 둘의 케미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희와 희철 캐릭터를 대본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희철 역할을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배우였다면 절대로 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무명 배우가 미니시리즈 메인 작가한테 대본과 다른 캐릭터를 들먹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칫 작가의 대본에 대한 불신으로 비칠 수도 있고.
하지만 태수는 양혜진 작가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배우가 아닌 같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와 감독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고.
송현주는 예기치 못한 태수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아, 망했다. 다 끝났다.
그런 송현주의 표정을 보자 태수도 덜컥 겁이 났다.
‘이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너무 나간 건가?’
반면 양혜진 작가는 캐릭터의 재해석이라는 소리에 뿔테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고는 물었다.
“그럼 지희 캐릭터가 변하면 희철의 캐릭터도 같이 변해야 한다는 소리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몇몇 관계자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오디션 지원자가 자신의 역할은 물론 상대 역할의 캐릭터마저 바꾸겠다는 소리니까.
“만약 지희 역으로 송현주 씨를 뽑으면 그 캐릭터에 맞게 희철의 캐릭터도 바꿔야 하는 거네요?”
태수도, 송현주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싸늘한 오디션장에 북극한파와 같은 찬 공기가 몰려들었다.
반면 양혜진 작가는 당돌하다는 생각과 함께 호기심도 발동했다.
지금까지는 다들 지희 따로, 희철 따로 오디션을 봤다. 근데 오디션이 진행될수록 두 캐릭터가 어울리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고, 그래서 지금 골치가 아픈 것이다.
거기에 정해일 감독까지 계속 불평을 드러내며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어떤 식으로든 캐릭터를 정리해야만 하는데 당장은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그렇다고 지희와 희철 부부를 뺄 수도 없다. 지희가 없으면 주인공인 영선의 인물관계가 너무 단순해지고 캐릭터가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곁에 지희 같은 친구가 있어야만 재벌가 약혼자인 한경에 대해 영선의 불만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가 있다.
작가 입장에서도 그편이 이야기를 전개하기 편하고 영선의 캐릭터도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지희의 캐릭터는 물론이고 희철의 캐릭터까지 바꿔 보겠다는 것이다.
양혜진은 자신의 대본에 토씨 하나 틀린 걸 가지고 감독과 싸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작가다. 평소 같으면 코웃음을 치면서 바로 내보냈을 것이다. 아니, 이 오디션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겠지.
하지만 이번엔 묘한 호기심이 들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풀지 못한 숙제를 오디션 지원자인 신인 연기자가 풀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럼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