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93
293
사족2
외전
이매망량의 왕이 죽고, 이매망량의 숲은 평범한 숲이 되었다. 항시 숲을 감싸고 있던 안개도 사라졌고, 숲을 터전 삼아 살아가던 이매망량들도 흩어졌다.
이매망량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왕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정답이었다. 숨어 있던 밈의 신자들이 하나둘 보고되었다. 밈의 성모, 엘로렌이 현에게 성인의 지위를 줬을 때부터 밈은 세계에 퍼진 하나의 재앙이 되었고, 그게 나타나고 있었다.
밈의 등장에 세계는 흔들리고 휘청였다. 진짜 밈의 신자는 엘로렌이 만든 가짜들과는 능력 자체가 달랐다.
세뇌는 기본에 각종 정보를 왜곡하고, 주술과 마법 일부를 무력화했다.
자체적인 전투력은 형편없었지만 쓰기에 따라 도시,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들. 세계는 밈에 앓았다.
모든 밈의 신자를 통솔할 수 있는 통솔자, 현은 낡은 옥좌 앞에 앉아 있었다.
나무로 된 옥좌는 말라비틀어져 바람이 스칠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끝자락이 바스러졌다.
말라가던 나무에 변화가 생겼다. 살이 차올랐고, 잎이 돋았다. 자라난 나무가 옥좌 위로 싱그러움을 피웠다. 안개가 생겼다. 벌레나 먼지로 착각할 정도로 작던 구름이 나무가 자랄수록 커지고 진해져 숲 전체를 덮었다.
이매망량의 숲에 희미한 안개가 꼈다.
안개, 눈을 속이고 사람을 홀리니 그 안은 미지로 가득 차 있다. 미지와 공포와 막연한 것들의 상징.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대표하는 자의 상징.
이매망량의 왕의 상징이다.
옥좌의 팔걸이에서, 좌석에서 나무가 자라 뼈대가 되었고, 안개가 달라붙어 가죽이 되었다.
불길이 옥좌를 휘감았다. 거대한 새가 옥좌 위에 앉았다.
현의 권능은 저 새의 본질을 알아보았다. 스스로를 태우는 새. 그리하여 죽지 않고 영원불멸하는 새, 불사조.
이매망량의 왕은 불꽃 속에서 되살아났다.
“너는 누구지? 그리운 향취가 나는군.”
“그래야지.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내 힘이 담긴 물건이구나.”
현이 손가락에서 빼낸 반지를 보고 이매망량의 왕이 말했다. 현은 반지에 합쳐져 있던 다른 것들을 분리했다.
창, 검, 활 같은 보편적인 무기부터 사슬낫에서 밧줄까지. 모두 아홉 개의 무기가 튀어나왔다.
아홉 개의 고정된 무기에, 하나의 고정된 형태가 없는 무기.
그렇게 열 가지 무기를 일컬어 이매망량의 무기라 부른다.
“삼켜, 그편이 빠를 테니까. 막 태어나서 힘도 약하잖아?”
현이 반지를 앞으로 던졌다. 이매망량의 왕에게서 나온 불길이 열 가지 무기를 모두 삼켰다. 한 마리 불사조가 지그시 눈을 감고 무기에 담긴 역사를 음미했다.
그가, 또는 그녀가 눈을 떴다.
“반가우면서 반갑지 않아. 새로 태어나 새 기억을 쌓아가며 살아가는 것도 좋았을 것을.”
“이걸 보고도?”
현이 비장의 술을 꺼내 흔들었다. 이매망량의 왕이 불꽃이 한 차례 흔들렸다. 새로 태어났어도, 현의 농간에 의해 내용물은 아직 도깨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술에 환장하는 버릇도.
“역병의 성인이 담근 역병주. 역병이며 동시에 천고의 약인 천상의 술. 무슨 일을 시킬까 받아먹기 무서워져.”
그리 말하면서도 이매망량의 왕은 술을 부리로 들고 잘도 마셨다.
그 앞에서 현도 역병주 한 병을 깠다. 역병의 성인만이 담글 수 있다는 술은 세계에 열 병도 없는 귀품이다. 당연하다. 나쁜 재앙의 필두처럼 받들어지는 역병, 그 역병의 성인이 술을 담그는 게 웬 말이며, 그 술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일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휘헌조차도 역병주를 담그는 일은 못 했다.
한 병도 귀한 역병주가 두 병이나. 이매망량의 왕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를 보며 현이 운을 뗐다.
“세계가 망하게 생겼어.”
***
천마는 지루했다. 고로, 그녀는 재앙이 되었다. 그녀는 선포했다.
-한 달 후. 나는 재앙이 되겠다.
권능을 이용한 목소리는 근원 세계 전체에 퍼졌다.
천마의 뜻은 알기 쉬웠다. 그녀가 재앙이 되고자 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재앙이 되면 된다. 천마는 언제든 근처 모든 것을 휩쓸고 없애버리는 폭군이 될 수 있다.
그녀는 기다리는 것이다. 근원 세계의 전력이 모이기를.
현이 부활의 전조가 보이던 이매망량의 왕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다. 전력은 한 명이라도 많으면 좋으니까.
“마침 네 부활도 가까웠고.”
“언젠가 사고 칠 것 같았지.”
“천마에 대해선 기억나나?”
작게 몸을 줄인 이매망량의 왕은 현의 어깨에 앉아 연신 몸을 털어대고 있었다. 아즈란이 가지고 있던 이매망량의 무기들에 밈의 권능을 담아 이매망량의 왕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매망량의 무기는 이매망량의 왕이 자신의 존재감 확립을 위해 만든 것이고, 무기에는 왕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매망량에게 역사란 존재와 같으니, 밈으로 왕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다만, 그것도 완전하지는 않아 이매망량의 왕의 기억은 구멍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도 또렷이 기억하는 게 있었다.
“잊을 수가 없지.”
그 또한 마신과의 결전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이었으며, 천마가 마신을 두드려 패는 걸 눈으로 본 사람이었다.
이매망량의 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설명을 듣고도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 두 개 있었다.
본능과 역병. 본능은 때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지만, 역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타 역병과 달리 농가에서나 볼 법한 노인의 몸을 한 역병의 성인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고통의 냄새가 났다.
성문이 열리며 마침내 천마가 걸어 나왔다.
하늘을 메운 드래곤의 날갯짓이 멈췄다. 초월자들이 숨을 멈췄다. 천마… 천마신의 존재감이 세계를 압도했다.
“덤벼라.”
한 재앙과 세계의 싸움이 시작됐다.
***
드래곤들은 날개가 꺾이고 심장이 터졌다. 마법은 그 손아귀에 쥐어 뜯겼고, 무공은 몸에 닿지도 못했다. 주술은 천마가 만든 그녀의 이치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권능도 사정 다르지 않았다. 정신 계열 권능에 걸려줄 만큼 천마의 정신력은 약하지 않았고, 물질 계열 권능은 변환의 방패를 뚫을 수 없었다.
세계의 멸망이 코앞이다.
두 번의 대전에서도 살아남은 초월자들이 패배와 죽음을 직감했다.
진심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천마를 가로막은 건, 단 하나의 검이었다. 그 검은 천마의 모든 방어를 뚫고 그녀의 목에 닿았다.
검신의 검이 천마의 목에 반쯤 파고들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든 검을 천마의 목에 박아넣은 검신이 말했다.
“어떤 재앙이라도 이 궤적이 끝을 그리면 죽는다.”
마력을 베고 영혼을 벴다. 육신과 영혼의 연결이 끊어지고, 영혼마저 반 토막 나면 재앙의 화신이라도 죽는다.
천마는 검신의 검에 담긴 본질을 읽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를 가르는 검이 그녀를 가르려 하고 있었다.
알고 막으려 했다면 모르되, 모르고 이 지경이 되었으니 빠져나가기도 요원했다. 검신의 검술은 그녀가 인정한 검술이다. 목에 칼이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목에 칼이 박힌 상태로 빠져나가는 재주는 그녀에게도 없었다.
무슨 짓을 하든, 하나의 궤적이 끝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남길 말은 있나?”
“내가 8살 때, 부교주가 직접 나를 암살하러 왔다. 당시의 나는 무슨 수를 써도 부교주를 이길 수 없었지.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천마는 이 싸움에 많은 걸 걸었다. 이건 세계와 그녀의 싸움. 그녀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사용했다. 한 가닥 살길을 마련해 두는 건, 싸움의 기본이다.
“빌었다. 무릎 꿇고 이마가 찢어지도록 땅에 머리 박았다. 살려달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천마와 현이 싸움에 임하는 자세에는 닳은 구석이 있다. 둘 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치부라 할 만한 이야기를 이유 없이 지껄일 리가 없다.
검신이 멈췄던 검을 움직였다. 나아가던 검은, 천마의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가르기 직전 허공을 갈랐다. 천마가 사라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검은 균열이 나타났다.
시공간의 틈과는 달랐다. 보다 본질적인 무언가, 차원의 균열. 균열 안에서 천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신전, 힘을 갈구하는 자들의 성지를 만들 것이다. 나를 죽이고 싶으면, 그곳으로 와라.”
천마의 목소리가 그치고 균열이 닫혔다. 지켜보던 초월자들이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이 참상을 만들어놓고 도망가?”
에이네가 숨길 수 없는 허탈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이 비슷했다.
대륙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땅을 새로 만들어야 할 지경이고, 죽은 사람들은 시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저 구멍 안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겠지.
천마는 그녀의 선언대로 재앙이 되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위원회 전력의 3할 이상이 증발했으며, 위원회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예 다른 하늘로 도망갔다.
차원을 넘어 천마를 쫓아가는 건 어불성설이다.
천마는 패했고, 위원회도 패했다. 패배자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검신이 검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했다.
“차원은 아직 베지 못하는군.”
그 말을 들은 지구 출신들과 기타 몇몇 사람들은 생각했다. 어쩌면 천마보다 저놈이 더한 놈일지도 모른다고.
***
천마의 깽판은 근원 세계에 거대한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초월자가 죽으며 힘의 공백이 생겨났고, 드래곤이 죽으며 세계에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위험 지역이 생겨났다.
공백은 권력이고, 위기는 기회다. 마력의 화신이 쓰러지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던 위원회 권력에도 변화가 생겼다.
“성공한다고 쳐. 그래서 이걸 어떻게 관리할 생각이야?”
윌리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중앙 대륙의 지도를 보았다. 원래 여러 세력이 난립하고 있어야 할 세력도는 대륙의 반 이상이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리센이, 리센과 뤼필이 세울 새로운 나라의 영토였다.
“할 필요 없다.”
“살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싸워줄 테니까요.”
그들이 세울 나라의 주민은 마족과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이 주를 이룰 예정이다. 두 종족 모두 지난 사건들로 종족 전체의 이미지가 시궁창에 떨어졌기에 어딜 가든 대우가 좋지 않았다.
마족이 특히 그랬다. 그들의 역사는 길지 않았고, 숫자도 적었다. 최근 천마가 한 행동도 혐오를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계획은 다 짜두고 나한테는 통보만 하겠다? 그건 그렇다 치자.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았을 거니까. 그런데 당신은 왜 여기 있지?”
윌리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빙그레 웃고 있는 촌로가 있었다. 촌로의 모습을 한 역병의 성인이었다.
“역병은 고통을 바란다네. 그리고 최고의 고통은 최고의 행복에서 나오는 법이지.”
최상의 행복을 원한다.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 세 사람의 목적은 일치했다. 목적이 이뤄진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
“아… 결혼하고 싶다.”
에이네의 헛소리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현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저주에 걸릴 듯 살벌한 수아람의 시선.
“이 시국에 결혼 이야기가 나오냐?”
“야, 솔직히 그 반지 받고 얼마나 됐냐.”
“3년?”
“그래, 오늘로 3주년이다. 3주년! 그런데 이때까지 뭐 하나 한 일이 없다고! 문화에 따라 다르니 신혼여행은 백 보 양보한다 하자. 하다못해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 아냐!”
“이 개판에 부르면 잘도 와주겠다.”
천마가 근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소실되고 2년이 지났다. 뤼필과 리센이 중앙 대륙을 반 이상 차지한 국가를 건설했고, 국토 방어를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다.
역사에도 몇 없던 대국은 그 크기만큼이나 지켜야 할 곳도 많았다. 신생 국가는 내실도 부실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부족한 상황에서도 리센과 뤼필은 잘해주고 있었다.
리센과 뤼필의 국가는 중앙 대륙의 많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병력 상당수가 위원회에 흡수되면서, 위원회는 국제 연합에서 독립 기관에 가까워졌다. 위원회 최대 권력자 자리는 윌리엄이 차지했다.
리센이 위원회의 도움을 거부하지만 않았어도, 국가는 안정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리센 왈, 대국은 언제 엇나갈지 모르니 제어 장치가 필요하다던가.
내일을 모르는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권력의 타락을 걱정하는 게 리센답다면 리센다웠다.
다른 쪽도 정상은 아니었다. 본능의 성인 아즈란이 몬스터를 광기의 속박에서 풀어내며 지성을 가진 몬스터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의 균형을 지켜야 하는 위원회와 드래곤들은 대화가 통하는 몬스터의 처우에 고민하고 있다. 바벨이 있을 적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확했다. 시스템에 속하면 사람, 아니면 사람 아닌 무언가.
시스템이 사라진 지금 사람을 정의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고, 몬스터의 처우는 그 시발점이다. 절대 가볍게 취급할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한가하게 결혼식이나 올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나, 현이나.
“대화합을 빌미로 다 불러버리면 되지.”
“거기서 깽판 치는 것들은 전부 사형시키고? 결혼식이 피바다가 되겠어.”
“맞아요. 철없이 결혼 같은 걸 논할 때가 아니죠.”
수아람이 거들었다. 에이네가 그에 발끈했으나, 그 분노는 곧 현에 대한 분노로 옮겨갔다. 에이네는 옆에서 깐족대는 수아람보다 정론을 말하는 남편 놈이 더 꼴 보기 싫었다.
3년째 허공에 삽질 중인 남편에게.
비유가 아니라 현은 정말 3년째 허공을 파헤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아홉 번째를 찾기 위해.
마신의 화신은 자신의 역할, 자신 다음에 있을 재앙이 무엇인지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재앙에 대한 지식이 어딘가에 있다. 그게 현상 세계인지, 진리의 세계인지는 모른다.
현은 밈의 성인이었고, 그의 옆에는 과학의 성인이 있었다. 정보로는 세계 제일을 장담할 수 있는 콤비였다.
“이번엔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소리만 23번 들었다.”
에이네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은 기술의 결정체인 검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과학, 밈, 마법, 조율, 시간의 성인이 힘을 보탰고, 당대 최고의 주술사 두 명이 거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멍은 현실과 진리는 물론 차원마저 아우르는 탐색기였다.
밈처럼 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아홉 번째 재앙을 찾기 위한 도구.
“찾았다.”
오랜 시도 끝에, 현은 드디어 아홉 번째 재앙을 찾아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세계의 사이에 걸쳐 있는 재앙 덩어리를.
“뭐?!”
“정말요?”
중고 신혼(?)을 즐길 생각에 에이네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고, 구멍을 제어하던 수아람이 현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무슨 재앙인데?”
“미지.”
에이네의 물음에 현이 짧게 답했다.
“미지요?”
현이 난처한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바벨이 사라지니 이게 불편하다. 바벨이었다면 단어와 함께 단어가 담고 있는 복잡한 뜻도 함께 전해주었을 텐데… 바벨이 사라지고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사소한 불편들이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현은 부족한 어휘력을 총동원해 ‘미지’라는 재앙을 설명했다.
“주술적 미신과는 다른… 말 그대로 미지의 것에서 힘을 얻는 형태 없는 재앙이라고 할까.”
“외물이요?”
외물은 근원 세계에서도 비밀 많은 괴생명체다. 괴이하게 태어나고, 나타나는 것들을 모두 통틀어 외물이라 하니 생물이라 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외물. 외계의 물질이다.
“비슷하다면 비슷해. 그런데 이건 외물과 달리 간섭조차 불가능한 느낌이야.”
외물은 일단 물질이다. 퇴치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공간과 함께 봉인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현이 본 미지는 그것도 아니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알지만 모르는 것. 밈의 권능으로 살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마력까지 물리치고 나타난 마지막 보스가 그따위야? 하아… 그래서, 그놈은 언제 나타나?”
불평하면서도 에이네는 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3년이나 헛짓에 동참한 건 그녀도 최후의 재앙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1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네 개의 재앙이 나타났다. 짧게는 수백, 길게는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나타나던 다른 재앙들과 대비되는 모습. 마지막 재앙이 내일 나타나 행성의 반을 삼켜버린다 해도 에이네는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재앙이 나타나면, 쓰러뜨려야 한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야지.”
현은 사흘이 지난 후에야 미지에 대해 남에게 설명해줄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에이네와 수아람만이 아니라 로드와 이매망량의 왕, 검신, 세상 끝까지 숨으려 들던 아즈란까지 찾아내 끌고 왔다.
현이 이들만 부른 건 이유가 있었다.
“차원을 통과하는 문을 열어야겠어. 최대한 많이.”
“차원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근원 세계 전체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인 천마를 찾기 위해 로드는 부단히도 차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아직 미미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열어야지.”
현은 미지에 관해 설명했다. 세계에 있는 모든 미지는 재앙 ‘미지’의 힘이 된다. 형체가 없는 미지는 ‘미지’라는 하나의 믿음 그 자체로 세상에 강림한다.
“근원 세계, 나아가 모든 차원의 비밀을 밝히는 것. 그게 멸망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길이야.”
타고난 학구열을 가진 아즈란과 소문에서 태어나 소문을 정체성으로 가지는 이매먕랑의 왕은 미지를 밝히는 데 큰 힘이 된다. 로드야 두 분야 모두에서 말할 필요가 없고.
“내 역할은 뭐지? 난 학자가 아니다.”
듣고만 있던 검신이 말했다. 현이 검신에게 도발적으로 물었다.
얼핏 상관없어 보이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게 검신의 역할이다.
“차원, 가를 수 있지?”
“물론.”
차원의 미지를 밝혀낼 때까지 무수히 차원을 가르는 것. 나아가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 그게 검신의 일이다.
“시간도 불러야겠군.”
로드의 말에 아즈란이 반감을 드러냈다가, 시간의 성녀도 비슷한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끄덕였다. 시간의 성녀는 부르기 무섭게 달려왔다. 그녀의 옆에는 덤이 하나 붙어 있었다.
에이네가 감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모인 건 오랜만이네.”
“그렇군.”
이성철이 답했다. 그 또한 에이네와 비슷한 감상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회귀가 끝났고, 마력의 재앙까지 물리친 후, 필연인지 우연인지 그는 시간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반은 강제, 반은 자의로 시간의 성녀를 따라다니고 있다.
현과 에이네를 만나는 건 시간의 성녀를 따라다니게 된 이후 처음이었다.
“지구로 가는 법을 찾고 있었냐?”
“그저 따라다닐 뿐이다. 내 삶의 목적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막상 불사의 운명에서 벗어나니 할 게 없더군.”
“죽지 그래?”
이성철이 희미하게 웃었다. 에이네가 이성철과 함께하며 본 것 중 가장 인간적인 웃음이었다.
“그건 싫군.”
위원회 분열을 막느니, 세계의 참상을 막느니 천지 분간 못하고 까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초월한 자의 시선으로 뒤를 돌아본 이성철은 깨달았다.
처음에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다회차 회귀자라는 걸 안 이후부터, 그는 죽고 싶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은 죽음 후의 허무보다 끔찍했다.
영생의 운명에서 벗어난 그는 편한 마음으로, 목적 없는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었다.
이성철의 눈길이 잠시 시간의 성녀에게 머물렀다 떨어졌다. 이성철의 시선과 표정을 읽은 에이네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고, 그보다 한발 빠르게 이성철이 현에게 물었다.
“결혼 생활은 어떻지? 밤일이라거나 말이야.”
“마스터키의 진가를 알았지.”
에이네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에이네가 날뛰며 건물이 부서졌고, 그녀는 현이 나서고야 겨우 제압되었다.
마스터키에 행동을 정지당한 에이네가 현의 품에 쏙 들어갔다. 에이네가 이를 갈며 현을 노려봤다.
“죽여버리겠어.”
“오늘 밤에?”
투닥대는 저 내외가 작정하면 세계에 막을 사람이 없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에이네를 놀리면서도, 현의 머리 한편에는 재앙이 있었다.
‘바벨, 광기, 시간, 마법, 본능, 죽음, 투신, 역병, 밈, 조율, 과학, 마신, 마력. 그리고 미지.’
열다섯 개를 모두 찾았는데, 왜 자꾸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걸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은, ‘망각’한 기분이다.
“근원 세계가 근원 세계 했나…….”
“응? 뭐 있어?”
에이네가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긴 속눈썹. 과학이 만든 걸작이라고 자랑하던 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재앙의 성인들이 모여 세계의 미래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현이 바랐던 어떤 미래보다 더 긍정적인 그림이다.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 이렇게 일어났고, 이뤄졌다.
에이네가 발을 파닥였다.
팔에 힘을 주자 품에 안긴 온기가 가까워졌다. 에이네가 몸을 비비며 장난을 걸었다. 이제는 이런 동작 하나까지 모두 사랑스럽다.
지구에서 소환되며 사라진 추억 사이에 있었을 기억.
근원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던, 그래서 포기했던 가슴의 따스함.
다시는 손에 쥘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편안함.
‘은퇴랑은 거리가 멀지만…….’
이런 그림을 계속해서 볼 수 있다면, 은퇴는 미뤄둬도 좋을 것 같다.
“어?”
에이네가 현의 품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성인이 반응했다.
영혼에 반응한다는 건, 초월자의 기준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가지게 되는 대략적인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에이네가 멍하니, 실감이 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마력의 성인이라는데? 그리고 머리에서 그 재수 없는 놈이 쫑알대는데, 진짜 성인은 다 이래?”
현이 이마를 짚었고, 다른 사람들도 각기 반응을 보였다.
“난리났군.”
이성철이 그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요약했다.
근원 세계는 마지막까지 근원 세계였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