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74
1074화 아직 뒷일은 끝나지 않았다
백귀는 순백의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하게 검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바로 흑검이었다.
그는 흑검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분명 흑검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다가갈 때마다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진양은 아무 말 없이 백귀의 뒤를 따랐다.
조금씩 백귀와 흑검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이곳의 시간은 몇 년이나 흘러간 것처럼 느껴졌다.
백귀는 지칠 줄 모르며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마침내 흑검의 손잡이를 쥐게 되었다.
순간 무시무시한 힘이 흘러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백귀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다.
흑검은 또다시 육안으로는 볼 수 있으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허공 너머로 돌아가 버렸다.
진양은 조용히 두 동강이 난 백귀의 허상을 지켜보았다.
빛이 번쩍이는 듯싶더니 백귀의 허상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한 줄의 검흔이 남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흡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 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되돌아볼 수 없었던 것이군요. 이만 갑시다. 이곳에서 더 이상 볼일은 없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심문을 빠져나왔다.
백귀는 충분히 호기심을 채운 탓인지 진양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특히 심문 내부에 펼쳐진 순흑의 세계와 심문마저 새까맣다는 사실에 대해선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진양을 모든 상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유명성종과 우두머리 귀신의 치열한 전투 장면부터 시작하여 여러 귀신과 유명성종의 고수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까지.
그리고 구름 너머로 추락하는 비주의 모습도 보였다.
자연스럽게 대화도 이어졌다.
모든 것이 진양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하다 보니 상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우선 백귀의 본체는 이곳 비경 어딘가에 속박되어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어서 그가 과거 상고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한때 진양의 심문과 견줄 만한 심문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얘기도 듣게 되었다.
상고 말기 지부 내부에선 분열이 일어나며 최정상에 오른 고수들끼리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며 갈라섰다.
그리고 상고 천정에서도 이와 같은 분열이 일어났다.
이어서 전쟁이 일어났다.
백귀는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전쟁을 구경할 의도밖에 없었지만, 상고 지부의 한 고수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중상으로 인해 빈사 상태에 이르게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깨어났을 때 세계는 이미 변해 있었다.
백귀의 말은 다소 중구난방이었다.
순서가 있는 게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나 생각나는 대로 뱉었던 것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백귀의 허상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수십 년이 흐르는 바람에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아예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백귀는 허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신통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진양의 예상대로였다.
허상을 통해 나타난 것은 육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이성과 힘이었다.
게다가 제약 역시 진양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할 수 없는 만큼 자신도 상대를 공격할 수 없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니 진양은 자연스럽게 이성의 문제도 꺼내놓았다.
대화는 보름이나 이어졌다.
진양은 고개를 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백귀에게 포권을 취했다.
“구 형, 전 이만 볼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시간 내서 또 찾아뵈도록 하죠. 여기 몇 권의 여행기를 남겨놓고 가겠습니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 써놓은 거라 시간 떼우기로는 충분할 겁니다. 내용도 괜찮으니 한번 살펴보시죠.”
“감사합니다.”
백귀는 다소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진양은 심문이 열렸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몸이 그곳을 지나는 순간 마치 경계선을 지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어둠으로 가득한 심문의 세계로 돌아온 진양은 곧바로 순백색의 이성의 세계로 향했다.
진양은 뒤를 돌아보며 하얀 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얀 문은 점점 일그러지며 작은 구체의 형상으로 변했다.
구체의 가장자리는 새까만 색으로 가득했고, 중간에 둘러싸여 있는 건 세 번째 비경과 똑같이 생긴 세계였다.
그곳엔 진양이 남기고 간 책을 흥미롭다는 듯 읽고 있는 백귀가 있었다.
구체는 완전히 합쳐지며 작은 검은색 공이 되었다.
진양은 공을 쥔 채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공이 되어버린 하얀 문이 있던 곳 뒤로는 또 다른 하얀 문이 세워져 있었다.
진짜 하얀 문은 바로 이 문이었다.
진양의 육신은 그곳에 서 있었다.
들어 올렸던 팔도 이제 거의 다 내린 듯한 모습이었다.
한 걸음 나아가며 이성은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니 머릿속에 하나의 몽경이 떠올랐다.
이중몽경(雙重夢境).
하얀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시 문을 나서기까지 실제로 걸린 시간은 일 다경도 채 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올 때는 진짜 하얀 문 안쪽의 세계인 진양의 이성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성의 세계는 극한의 수준까지 가속되었다.
진양은 아낌없이 힘을 쏟아부으며 극한의 수준까지 속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바깥과는 다르다.
호기심을 모두 채운 백귀가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순수한 이성으로 만들어진 몽경 내부였다.
그곳은 진양이 직접 만들어낸 순흑의 세계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양이 만들어낸 가장 단순한 몽경 세계였던 것.
게다가 너무 단순했기 때문에 작은 틈조차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양이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삼은 건 우선 백귀에게 작은 인상을 하나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새까만 심문을 빠져나와 다시 세 번째 비경으로 돌아왔을 때 백귀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성으로 만들어진 몽경 세계에 발을 들였다.
자신의 이성으로 만들어진 몽경 세계였기 때문에 백귀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진양이 안에서 수십 년을 떠드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몽경 세계를 감싸고 있는 이성의 세계는 가속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성 세계에 둘러싸여 있는 모든 것들은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온 세계가 잘못되었다면 이는 곧 잘못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미 온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정상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치 예전의 일념의 바다와 같다.
일념의 바다 안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지만, 이 중 일념의 바다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일념의 바다라는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일념의 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성만 이곳에 온 백귀가 처음부터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면 그 이후로는 더더욱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진양은 함정을 파고 그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던 건 시간을 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로 백귀의 허상을 통해 나타난 이성이 온전한 이성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백귀는 상당히 기괴한 존재다.
때문에, 자신의 이성을 분열시키는 것조차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확실하게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진양은 결국 백귀의 이성이 온전한 이성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원하는 걸 알아낸 이상 더 이상 잡담을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시간을 끈다고 아무 말이나 해대는 통에 입에 쥐가 날 정도였다.
심문 밖으로 나온 진양은 허공에 떠 있는 하얀 초롱을 쳐다보았다.
그는 곧바로 한쪽으로 비켜서며 진판을 던져 자신을 보호했다.
이어서 소책자를 꺼내 백귀와 대화를 나눴던 내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적었다.
기록을 모두 마친 뒤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나무피리를 꺼내 자신과 몽경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어면안신곡을 연주하여 몽경 안에서 겪었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
이중몽경은 물방울 속에 있는 물방울과 같다.
바깥에 있는 검은 물방울이 파괴되고 나면 안쪽에 있는 세 번째 비경의 물방울도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된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며 진양은 몽경 안에서 겪었던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불편할 정도로 어색한 상실감은 금세 후련함으로 대체되었다.
애초에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며 심문을 두드릴 때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은원 관계가 되어버렸다.
흑검으로 그를 죽일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을 질질 끄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흑검으로는 그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이때 진양은 흑검으로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흑검이 약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흑검을 사용해 그를 제거하려던 계획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복잡하면서도 안정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진양은 소책자를 펼쳐 방금 기록한 것들을 살폈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첫째로 가장 중요한 건 백귀의 이성이 확실하게 소멸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진양은 자신이 적어놓은 대로 하얀 초롱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것을 만졌다.
만약 아무 반응이 없다면 주인이 있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백귀의 이성도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 세 번째 비경을 터뜨려버려야 한다.
다행히 능력은 반응했다.
습득 가능한 상태였다.
진양은 곧바로 능력을 사용했고 성공적으로 습득을 마쳤다.
이로써 백귀의 이성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무엇이든 항상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법.
특히 은원 관계에 있어선 더더욱 깔끔해야 하는 법이다.
괜히 아쉬움을 남겼다가 발생하는 손해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으니까.
진양은 계속해서 소책자를 넘겼다.
백귀의 본체가 속박되어있는 곳까지 가는 길과 주의사항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십삼 장에서 십칠 장을 참고하라는 글귀도 남겨져 있었다.
두터운 소책자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정보가 기록되어있었다.
이것은 몽경 속 세 번째 비경 안에서 수십 년에 걸쳐 얻은 진귀한 정보들이었다.
모든 내용을 전부 다 정리하기까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어느 장을 봐야 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뒷일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