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76
1076화 도저히 못 먹겠어?
진양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토록 강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고수, 거대한 대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고수.
아무리 날고 기는 자들이 넘쳐나는 상고 시대라 하더라도 이러한 특징을 가진 고수가 둘이나 될 리는 없다.
분명 검둥이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그 고수가 분명했다.
다만 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새겨져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소책자에 그 어디에도 이와 관련된 정보는 적혀있지 않았다.
백귀 역시 석문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다.
다만 예전에 싸움 구경을 하다 어느 무시무시한 고수의 손에 죽을 뻔했던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때 말했던 고수는 아마도 석문에 새겨진 고수가 분명했다.
석문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밀치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거대한 궁전 내부.
깡마른 백귀의 본체가 멍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있었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과 기운은 느껴졌지만, 이성의 파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건 껍데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껍데기 안에서 새로운 이성이 탄생할 수도 있고, 새롭게 탄생한 이성에게 껍데기에 남아있는 기억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진양이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동술을 펼치고 최대한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석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궁전 자체가 가진 방어 능력이나 봉인의 힘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진양조차도 손쉽게 풀어버릴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백귀의 이성, 그리고 그가 가졌던 힘과 보물을 고려해 본다면 이런 곳에 갇힐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이상하군.’
진양은 주위에 이상이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뒤에야 묵양을 이끌고 왕좌로 다가갔다.
백귀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양과 묵양이 다가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백귀의 본체 손을 가져다 대니 능력이 반응했다.
진양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능력을 발동시켰다.
거둬들인 진양의 손에는 세 개의 광구가 들려있었다.
짙은 보라색 광구 두 개, 그리고 짙은 파란색 광구 하나였다.
우선 보라색 광구부터 살폈다.
첫 번째 광구에선 다소 생각지 못한 물건이 튀어나왔다.
의 잔본이었다.
‘또 잔본이 나왔군.’
진양이 가지고 있는 잔본과 얼마나 일치할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우선 나중에 살펴보고 계속해서 광구를 살펴보기로 했다.
두 번째 광구에선 제천투영(諸天投影)이라는 신통력이 나왔다.
아마 백귀가 허상을 만들어낼 때 사용했던 신통력인 듯했다.
누군가를 엿볼 때 사용한다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신통력을 통해 만들어낸 허상에겐 피해를 줄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질을 간파당한다면 백귀처럼 처참한 꼴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일단은 가지고 있기만 하고 가능하면 익히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이어서 파란색 광구를 살폈다.
참신법(斬身法)이라는 공법이 나왔다.
자신의 기억을 잘라낼 때 쓰는 공법이었다.
기억을 잘라내는 건 가능하지만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한 어면안신곡의 하위 호환 공법이었다.
공법을 살펴보다 보니 문득 해요선자가 떠올랐다.
과거 해요선자가 사용했던 공법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삼신술에 대해서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양은 소책자를 펼쳐 삼신도군에 대해 기록해 두었던 곳을 읽었다.
백귀도 성불시켰고 바깥에선 계속해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여유롭게 소책자를 살펴볼 시간 정도는 충분했다.
대략 살펴보니 백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상당히 불쌍한 녀석이었다.
* * *
백귀는 싸움 구경 한번 해 보려다가 목이 날아갈 뻔했다.
상처가 꽤 깊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깊은 잠을 통해 상처가 악화되는 걸 막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의 힘을 통해 회복시키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상고 지부가 무너지며 상고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명성종의 조사가 나타나 흑림해 어딘가에 있던 작은 상고 지부 조각을 파헤쳤다.
잠들어있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유명 조사는 중상을 입고 깊은 잠에 빠져있던 백귀를 귀번(鬼幡) 안에 연화시켜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백귀는 귀번 안에 있으니 회복이 조금 더 빨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일단은 유명 조사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유명성종이 세워졌다.
그리고 진파도기인 유명귀번(幽冥鬼幡)도 모습을 드러냈다.
귀번 안에 있는 수억에 달하는 귀신을 이끌고 있는 게 바로 백귀였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삼신도군에 의해 유명귀번은 파괴되었다.
유명귀번이 파괴되며 백귀는 더 이상 유명성종에 협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는 한동안 삼신도군을 따라다니며 참신법을 배웠다.
무엇을 베었는지는 백귀 자신도 전혀 몰랐다.
* * *
진양은 정리된 내용과 추측을 토대로 백귀가 겪었던 일을 정리해냈다.
여기까지 살펴보고 나니 문득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가 떠올랐다.
백귀는 분명 석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양은 석문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석문 외에 백귀를 봉인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힘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대지에도 봉인이 걸려있긴 했지만, 진양조차 가볍게 무시할 수준에 불과했다.
과연 무슨 수단으로 백귀를 이곳에 붙잡아둔 걸까?
백귀가 말했던 봉인이나 속박 수단은 아무리 살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성불이 끝나고 껍데기만 남은 백귀의 육신을 옆으로 치워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참신법을 떠올리니 문득 새로운 추측이 하나 생각났다.
어쩌면 석문에 새겨진 장면은 백귀가 죽을 뻔했던 순간 보았던 장면일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백귀에겐 상당히 두려운 장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던 이 장면을 잘라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가 잘라낸 기억을 취하여 석문에 봉인해둔 것.
즉, 백귀를 속박하고 있던 건 별도의 봉인 수단이 아니다.
석문에 새겨진 백귀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직시할 수도 없었던 바로 그 기억이었던 것이었다.
진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의 심문조차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만큼 대담한 녀석이 겨우 이런 것 하나 때문에 이곳에 갇히다니.
그가 가지고 있던 기억은 타인의 손을 거쳐 그를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자물쇠가 되어버렸다.
상당히 역설적이었다.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삼신도군이 가장 유력하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남의 심문조차 아무렇지 않게 열어젖히는 미치광이를 가만히 놔둘 리는 없다.
진양 같아도 한시라도 빨리 이 후환을 제거했을 것이다.
진양은 지면에 누워있는 백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분명 귀신이었지만 성불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남겼다.
평상시처럼 관에 수습해 주자니 관이 아까웠고, 그렇다고 음패수에게 먹이로 던져주자니 양심에 찔렸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진양은 못마땅하다는 듯 백귀의 시신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귀신 주제에 죽어서도 시신까지 남기다니. 하여간 밉상이라니깐.’
한참의 생각 끝에 관도 낭비하지 않고 음패수에게 먹일 수도 있는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그렇지! 어차피 녀석은 인간이 아니잖아. 그럼 인간처럼 토장(土葬)을 할 필요가 없잖아!”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과거 진양은 바다에 있을 때는 바다의 풍습을 따라 해장을 했었고, 외층 공간에 있을 때는 그곳의 풍습에 따라 화장이나 허공장을 했었다.
현재 눈앞에 있는 백귀는 상고 지부 시대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맞게 상고 지부의 풍습대로 장례를 치러주는 게 맞다.
애초부터 인간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진양은 수의를 꺼내 백귀에게 입혀주고 그의 시신을 관에 수습해 주었다.
그리고 팔목에 휘감겨있던 음패수를 관 안에 함께 집어넣었다.
상고 지부의 풍습을 따르기로 한 이상 상고 지부의 것을 쓰는 게 가장 좋다.
현재 진양이 가진 것들은 전부 방어용이거나 누군가를 구할 때 쓰는 것이기 때문에 꺼내도 쓸 수가 없다.
하장(河葬)도 가능했지만 아쉽게도 이곳엔 황천이 없다.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떠오른 좋은 생각.
바로 음패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분명 예전에 어딘가에서 상고 지부에 음패장(陰悖葬)이라는 장례법이 있던 걸 본 적이 있다.
‘자꾸 까먹어서 큰일이군. 시간 나면 나중에 알고 있는 장례법을 정리한 책이라도 한 권 만들어야겠어.’
한편, 음패수는 백귀의 가슴에 똬리를 튼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진양과 백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녀석, 뭐 하고 있는 거야?’
진양이 물었다.
“왜 그래? 도저히 못 먹겠어?”
음패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설마 못 먹는 거야?”
음패수는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양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며 관뚜껑을 꺼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나중에 황천에 가게 되면 하장을 치러주는 수밖에.”
이어서 텁- 하고 관뚜껑을 덮었다.
관 속에 갇히게 된 음패수는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결국 두 녀석의 시선은 백귀에게 향했다.
음패수가 백귀를 먹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녀석이 평범한 귀신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일생일대의 기연을 날려버리자니 아쉬웠던 것이었다.
진양은 음패수를 관에 넣어둔 채 일단 한 쪽에 놓아두었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순전히 음패수의 몫이다.
다시 황천 근처에 갈 때까지 음패수가 녀석을 먹어 치우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하장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손을 탁탁 털며 한숨을 푹 쉬었다.
백귀를 처리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진양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게 숨기는 일만 남았다.
우선 궁전을 둘러보았다.
겉보기엔 평범하게 생겼지만, 봉인으로 쓰기엔 상당히 적합했다.
마땅히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하나를 꼽자면 대검을 든 고수의 뒷모습이 새겨진 석문이 유일했다.
비록 뒷모습이긴 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귀한 보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단 챙겨두면 쓸모가 있을 듯했다.
필요에 따라 특수한 법보로도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문득 부서진 검은 솥이 떠올랐다.
검은 솥에 남아있던 건 허상의 힘이 아닌 진정한 힘이었던 만큼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