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58
558화 한 번의 방심으로……
은은한 안개 너머로 가희, 자란, 그리고 청란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 아까 그 세계에선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에요.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야만 하거든요. 그 전에 일단 일념의 바다와 관련된, 아까 있었던 그 세계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도록 할게요.”
이어서 진양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털어놓았다.
일념의 바다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까지.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설명이 끝난 뒤.
진양이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제서야 설명해 준 건지 이제 알겠죠? 다들 영제랑 너무 가까이 있어서 혹여나 들킬 염려가 있었어 그랬던 겁니다. 물론 영제의 본체는 여전히 일념의 바다에 갇혀있긴 하지만, 제군법상은 아직 바깥에 있잖아요. 그래서 세 분의 모든 기억을 지우려는 겁니다. 혹여나 이 기억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도 지울 거고요.
남가일몽에게 많은 걸 배우면서 잘라낸 기억의 일부를 꿈속에 남겨두는 법도 배우긴 했지만 아직은 수준이 부족해서요. 지금 상태로는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만 남기는 게 전부고, 여러분 모두의 기억까지 남기는 건 무리네요. 그러니까 이해해 주세요.”
청란과 자란은 조용히 가희를 바라보았다.
가희의 얼굴엔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가 가볍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됐네요. 사실 우리는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여러분들을 끝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남가일몽이 저를 선택한 겁니다. 그래야만 영제를 안에 완전히 가둘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저 혼자 도망쳤다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영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을 거고, 저 역시 설령 밖으로 도망쳐나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죽게 됐을 겁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들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약점이 노출됐고, 영제가 따라오게 되긴 했지만요.
뭐, 과정은 험난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쁠 건 없잖아요. 결론적으로 일이 다 잘 풀렸으니까요. 일단 감사 인사는 됐고요. 그런데 표정을 보아하니 왜 이태현은 두고 왔는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네요.”
“아니에요. 아마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겠죠. 당신에겐 이게 가장 안전하면서도 최선의 방법이란 것도 알고요. 이미 우리 세 사람을 구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한데. 어떻게 여기서 더 바라겠어요?”
가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이 대인이 저를 지극히 챙겨주시긴 했지만, 그건 제가 개인적으로 진 빚이잖아요. 진양 당신과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진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지막 순간에 이태현을 데리고 나올지 고민했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굳이 자신과 일말의 상관도 없는 사람까지 목숨을 걸어가며 구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태현은 신조를 위해서라면 몸이 부서질 때까지 움직일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영제를 배신하고 신조를 등진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설령 여기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하더라도 언젠간 진양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기 마련.
이태현에게 그것은 아마도 신조일 것이었다.
그리고 진양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그를 버리고 나온 것이었다.
한편, 가희는 매우 평온한 얼굴이었다.
혼자 갇혀버린 영제 걱정 따위는 조금도 되지 않는 듯 말이다.
아무래도 이미 오래전에 영제에 대한 감정은 모두 사라진 듯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기억은 그냥 놔둘 거고요. 일념의 바다에 대한 기억만 지울 거니까요. 아마 중부 지역 어딘가에서 회복했던 것만 기억날 겁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진양은 어면안신곡을 연주하며 세 사람이 가진 일념의 바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어서 깊게 잠이 든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양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릿속에도 남은 기억을 모두 잘라냈다.
그리고 그것을 몽경으로 만들었다.
순수한 지식 외에 것들은 과감히 남기지 않고 잘라냈다.
모든 작업을 마친 진양은 이어서 책자를 꺼내 기억을 잃은 자신이 꼭 챙겨야 할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일념의 바다에서 얻은 것들 중, 습득이 가능한 것들은 전부 남겨두었고 습득이 불가능한 건 미련 없이 꿈속에 내려놓았다.
이것들은 꿈 공간이 무너질 때 함께 소멸될 것이었다.
이어서 따로 준비해둔 주머니를 꺼내 남겨둔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안에 보관했다.
* * *
일념의 바다에 관한 모든 흔적을 지운 진양은 그제서야 세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묵양이 만들어낸 나무배를 타고 곧장 자신이 처음 이곳으로 들어왔던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진양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보름달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하여 다시 꿈 공간을 만들어 세 사람을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묵양까지 다시 회수한 진양은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동그랗던 보름달은 어느새 상현달이 되어있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침내 괴기한 세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안심이 되자 두고 온 구름이 생각났다.
‘승차감 하나는 끝내줬는데. 아쉽군…….’
배는 여전히 고요하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진양은 갑판 위로 세 사람을 꺼내주었다.
세 사람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본래 입었던 상처도 있고, 거기에 강제로 한 토막이나 되는 기억을 지웠으니 당연히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묵양과 함께 선수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태양이 떠오르며 강렬한 햇빛이 대지를 비추기 시작했고, 음산한 기운이 가득하던 자기(紫氣)가 몰려오며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시간의 파도가 요동치기 시작한 모양이군.”
묵양은 멍하게 먼 하늘을 바라보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양, 고맙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진양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 들며 말했다.
“뭐, 너와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는 이미 잊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이 하게 됐으니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줘야겠지? 이전에 있던 세계에서 벗어난 만큼 새롭게 시작하는 게 맞을 테니까. 그리고 웬만하면 그런 모습 말고 혈육 인형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묵양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음…….”
잠시 고민하던 진양이 대답했다.
“기계와 인형술에 능통하니까 묵격(墨格)이라고 하는 건 어떨까? 그래도 원래 가지고 있던 격이라는 이름은 남겨줬어.”
“아니. 그건 이름이 너무 구린 것 같은데. 묵유덕이라고 불리고 싶어.”
“뭐?”
진양은 황당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자를 유덕으로 하는 거지. 왠지 모르게 너와 같은 이름을 쓰면 어떤 일이든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
뭐, 크게 나쁠 것도 없었고 어감도 썩 괜찮았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이 떠오르며 자욱하게 깔렸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사방을 비추며 고요하던 숲을 깨웠고, 숲의 정적이 깨지며 사방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느새 가희도 잠에서 깨어났다.
가희는 진양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짓누르고 있었다.
현재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이태현과 함께 이곳으로 와서 요상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전부일 것이다.
“진양?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청란 소저가 소저를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왔어요. 제겐 비난령이 있으니까요.”
진양이 비난령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어서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청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전하?”
가희를 찾았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다들 여기서 어떤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중독돼서 쓰러져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을 구해서 해독시켜 준 겁니다. 머리가 조금 아픈 건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아마 잘 쉬면 금방 나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덧 잠에서 깨어난 자란도 다가와 물었다.
“혹시 이 대인은 못 보셨습니까?”
“못 봤어요. 제가 소저를 발견했을 땐 혼자였거든요. 뭐, 그런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일단 이도 쪽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건 아셔야 할 것 같네요. 전조의 잔챙이들이 슬슬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거든요. 얼마 전에도 전조와 엮여있던 자들이 영제에게 목이 날아가는 일이 있었죠.
어쨌든 일단은 회복에만 신경 쓰도록 하세요.”
대충 세 사람을 안심시킨 진양은 본격적으로 회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양의 얼굴은 다소 창백했다.
누가 봐도 세 사람 중에 진양의 상처가 가장 깊어 보였다.
“너희들도 이만 회복에 전념하거라.”
이어서 가희는 진양 옆에 앉아있는 묵양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묵양이라고 제 친구예요. 제가 도와달라고 같이 데려왔어요. 혼자 오기엔 위험할 것 같아서요.”
가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론 진양이 대충 둘러댄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하루가 지났다.
배는 여전히 고요하게 하늘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이상한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
진양은 그제서야 책자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을 쫓아오지 않았으며, 제군법상 또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즉, 영제가 바깥으로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설령 제군법상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영제의 본체는 일념의 바닷속에 갇혀버린걸.
* * *
일념의 바닷속 세계.
영제는 멍하게 허공에 둥둥 뜬 채 사방을 가득 채운 빛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빛에 의해 녹아내리듯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의 방심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줄이야…….”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영제라고 해도 몰려오는 시간의 파도는 거스를 순 없다.
그저 조용히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덮치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팟-!
밝은 빛이 영제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영제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