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89
589화 함정이다
“전하, 어찌 이 꼴을 보시고도 실수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이곳은 신조가 아닌 완충지대인 만큼 신조의 관리인 추굉심의 실력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조의 영토 내에서라면 또 모를까, 영토를 벗어나면 청란의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추 대인, 이 아이는 제 수하이니 제가 직접 벌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보시다시피 제가 중상을 입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요양을 해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추 대인께서 계셔서 다행입니다. 며칠 동안 추 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더니 상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지 않습니까? 잠깐 동안은 제가 없어도 추 대인께서 충분히 그 임무를 다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폐하께는 제가 직접 상주문을 올리도록 하죠.”
이어서 가희는 청란을 큰소리로 꾸짖었다.
“진영 내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건 엄중한 군법 위반이다! 가서 곤장 스무 대를 쳐라!”
이어서 자란이 날아와 가희를 부축하며 자리를 떠났다.
추굉심은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제희가 먼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조차 못 했던 것이었다.
황명을 받고 군대를 통솔하러 온 사람이 이리도 쉽게 그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니.
물론, 추굉심에겐 북방 국경지대에 있는 군대를 직접 통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직접 통솔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어떠한 결정을 내리던 반드시 대제희를 통해 군대를 움직여야만 한다.
하지만 대제희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로 중상을 입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중상을 입은 사람을 막아설 수는 없는 법.
추굉심이 잠시 우물쭈물하는 사이 가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교위 이상의 장수들을 모두 집합시켜라. 지금 바로 지휘관 막사에서 회의를 할 것이다.”
* * *
자란은 가희를 데리고 군영을 빙 돌아 진양이 머물고 있는 취사군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로 들어온 가희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래도 되는 건가요? 너무 대놓고 농락하는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이 정도만 해도 소저께선 최선을 다하신 거니까요. 대제도 딱히 소저를 추궁하진 않을 겁니다. 결국 모든 책임은 추굉심이 지게 되겠죠. 이건 월권이나 다름없는 행위니까요. 그가 온 이후로 내리셨던 모든 명령들이 사실은 추굉심이 내린 명령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오히려 추굉심이 이런 식으로 나와줄수록 소저의 입장은 더욱 명확해지게 되는 셈이니, 상황은 점점 더 소저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거예요.”
진양은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 막사 쪽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추굉심 역시 애초부터 그런 뜻을 품고 있었잖아요. 뭐, 태자의 뜻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오고 난 뒤로 대영이 유리한 상황이 된 건 사실이잖아요. 한 번도 군대를 통솔한 경험이 없던 사람이 이런 걸 경험하다니. 아마 자신도 모르게 콧대가 높아져 있을 겁니다.
어쨌든, 소저가 올린 상주문은 지금쯤 이도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전부 다 추굉심이 뒤집어쓰게 될 겁니다. 애초에 소저가 무언가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마다 그가 전부 막아선 건 사실이잖아요. 조정에서도 반대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아예 발을 빼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보아하니 추굉심은 대연과 같은 선택을 하려는 것 같은데. 이러고도 무사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사신망사를 둘로 나누어 살펴보니 더욱 깊이 이해가 됐다.
이건 누군가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영제는 확실히 아니었다.
진양은 사신과 망사의 특징을 고려하여 죽은 강자들 중 두 공법을 익힌 흔적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좁혀나간 끝에 의심 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살자비를 숨기는 것부터 이런 곳에 나타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땅의 기운과 연결시키는 것까지.
충분한 실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비생비사의 상태에서 수많은 일을 해냈다는 건 분명 조력자가 있다는 뜻이다.
대연과 대영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 정세를 주무르는 일까지 능숙한 사람.
이렇게 되면 세 곳에 있는 사람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대연, 대영, 요국.
이 세 나라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 뒤에서 상황을 꾸며놓고 지켜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대영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양은 대영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잘 알고 있다.
사신법에 대해 더욱 많은 걸 깨닫고 나니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영제의 본체는 시간의 파도에 의해 휩쓸려가 버렸다.
현재 일념의 바다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상태다.
즉, 이 세상에 영체의 본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
사신법이 아무리 사악한 공법이라곤 하지만 수십, 아니, 수만 병을 희생시킨다고 하더라도 영제의 본체를 다시 되돌려놓을 순 없다.
이도에 있는 제군법상도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기다리다 보면 시간의 파도가 다시 진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일념의 바다가 다시 나타나면 영제의 본체도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이것이 가장 상책이자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런 일을 벌이면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긴다.
때문에, 영제가 이런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대영을 제외하게 된다면 대영에 있는 정상급 강자들도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과거 영제가 직접 천하를 호령하고 다녔을 때 더 이상 영제를 위협할 만한 강자는 없었다.
현재 대영 신조가 자리 잡고 있는 대황 땅에 살아있는 봉호도군은 한 사람도 없다.
적어도 진양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제가 대영과 남만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초조를 멸망시킨 뒤 일념의 바다로 들어간 건 어쩌면 당시 남만 땅에 아직 봉호도군이 한 사람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남만 땅의 터줏대감은 부도마교였다.
비록 부도마교와 함께 마도삼봉(魔道三峰)이라고 불리는 황천마종과 유명성종이 있긴 했으나 당시의 부도마교와는 감히 비교조차 안 될 수준이었다.
영제가 남만 땅에 눈독을 들이는 걸 가장 못마땅하게 여길 사람은 바로 부도마교의 사람들이다.
더 깊게 생각해 보자.
요국의 자소와 남만의 장해는 어째서 동귀어진을 택한 것일까?
이러한 선택은 누구에게 가장 큰 이득이 될까?
이런 사건에 영제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때론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도 있는 법.
더욱 세밀하게 파고들수록 진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음 같아선 다 포기하고 편하게 놀고먹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적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영은 이런 일을 벌일 리 없다.
영제가 대영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대연과 요국, 둘뿐이다.
현재 요국의 상황을 보아 이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살자비의 진상은 언젠간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밝혀지는 순간 대연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자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자들은 전부 대연 태자의 사람들이다.
그가 한 사람의 강자를 위해 이렇게 큰 희생을 감수할 리 없다.
모용가악이 그랬을 리는 더더욱 없다.
대연 태자보다 못한 실력인 그가 강자 하나 부활시키겠다고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고 나니 남은 건 요국 하나뿐이다.
현재 머릿속에 떠오른 강자들 중 사신법과 망사법을 익힌 것으로 추정되는 요국의 강자가 가장 많다.
세 나라 중 유일하게 요국만이 한 사람의 강자를 위해 이런 일을 벌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요국에 피해가 가는 것도 없고 대연과 대영을 끊임없이 싸우도록 만들 수 있기까지 하다.
요국은 약육강식의 생존법을 따르고 있다.
한 강자를 평가할 때 신분이나 권력, 핏줄 등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실력만 본다.
요국 내에서 이름 있는 집안의 직계 혈통을 이어받은 이들이 요절하는 비율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현저히 높다.
재능이 남보다 못해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모두들 약하면 당연히 죽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실력에서 밀린다면 할 말이 없는 법.
설령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디 고발할 곳도 없다.
애초에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는 곳이니 말이다.
이러한 점은 대영과는 정반대였다.
이번 일이 시작되었던 순간부터 생각해 본다면 요국의 일 처리 방식은 다소 의외였다.
요국이 아무 이유 없이 끼어들고 싶지 않기에, 그저 대영과 대연이 치고받는 걸 보고 싶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처리했다면 그건 또 말이 된다.
하지만 두 공법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닫고 나서 살펴보니 요국은 다소 다급하게 선을 그은 듯했다.
심지어 대연과 대영의 사람까지 불러다가 직접 확인을 시켜주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갔다.
이렇게 되면 요국일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건 함정이다.
진양은 이곳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가희를 떠밀고 싶지도 않았다.
가희의 대제희 봉호를 다시 회복시켜주고 군대를 이끌게 하는 것.
이건 다음 계획을 위한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이번 일에서 절대 가희의 과거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만들어선 안 된다.
절대로 누군가 가희가 이전과는 달리 별 볼 일 없어졌다는 둥의 말을 하도록 만들어선 안 된다.
이미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은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청란에게 맞아 죽을 뻔한 추굉심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런 의견들이 사실로 굳어지게 놔둬선 안 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영제가 가희가 또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안 된다.
그 중간지점을 잘 잡아야만 한다.
혹여나 가희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진 않았다.
피를 토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연기력이 뛰어났다.
만약 진양이었다면 먼저 피를 토한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청란을 두들겨 팼을 것이다.
추굉심의 체면도 살려주고, 추후에 이 일로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다음, 자연스럽게 이전에 입었던 상처가 다시 악화된 사실을 흘리며, 추굉심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요양을 하러 가라는 말을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말을 오해한 척하며 알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병권을 넘겨준다.
여기까지는 진양의 망상이고.
어쨌든 가희의 연기력은 뛰어났다.
다소 부족한 점이 있긴 하나 문제 될 건 없다.
적어도 영제에게 가희가 병권에 관심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영제는 망설임 없이 가희에게 모든 걸 맡길 것이다.
같은 일을 맡기더라도 가희는 스스로는 원하지 않지만 대제를 위해, 그리고 신조를 위해 책임을 지는 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