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783
783화 충분히 알아듣다
진양은 높은 곳에 올라 경매장 입구를 주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을 끄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장청상회에서 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수준의 공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외모를 감춘 상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강제로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경매장 내에서 남을 간파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공법으로 위장한 한 여인이 동행했다.
진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걷는 모습부터 느껴지는 기운까지.
상당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황영. 직접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군. 지난번에 대연에 나타났던 것도 저 사람이겠지.’
뒤이어 익숙한 얼굴이 더 나타났다.
대영 정천사의 일품 외후인 서정강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도 바꾸지 않고 나타났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서정강은 오전 내내 조용히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되었고, 오후 경매 준비가 한창이던 순간.
기회를 노리던 그는 조용히 온우백을 찾아갔다.
“당신네 선장을 만나고 싶소.”
온우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곧장 거절을 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정강은 곧장 손바닥을 펴 보이며 한 장의 봉인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대제희 전하의 명을 받고 편지를 전하러 온 것뿐이니까.”
편지에 진양의 이름이 적힌 것으로 보아 진양에게 보내는 편지인 건 확실했다.
다만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대제희까지 거론하며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터.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진양은 서정강으로부터 편지를 전달받았다.
편지에 가희의 징표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가짜 편지는 아닌 듯했다.
뿐만 아니라 필적, 그리고 서려 있는 기운까지 전부 가희의 것이 확실했다.
대단한 내용이 적힌 건 아니었다.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몸조심하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크게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진양은 그녀가 무슨 의미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이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그리고 세간에 나타난 수많은 상자가 모두 진양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조의 사람들까지 진양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영 사람들에게까지 밉보이게 된다면 진양은 온 세상을 적으로 두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상황은 피해야만 한다.
진양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했다.
서정강, 그는 분명 살신전의 일 때문에 찾아온 게 분명했다.
“데리고 들어와.”
잠시 뒤.
온우백이 서정강을 데려왔다.
“아우님, 잘 지내셨습니까!”
술잔을 주고받은 사이라 그런 걸까.
그는 꽤 친한 척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이 정도도 못 받아줄 진양은 아니다.
“물론입니다. 형님, 무슨 일로 이 먼 길을 다 찾아오신 겁니까? 혹시 공적인 일 때문입니까? 아니면…….”
“뭐, 둘 다라고 할 수 있죠. 허나 국가의 녹을 먹는 자로서 당연히 공적인 일이 우선이긴 하겠지만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목소리도 한층 더 진지하게 바뀌었다.
“서 대인,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오늘은 조금 바쁜데 말입니다.”
“…….”
서정강은 황당하다는 듯 진양을 쳐다보았다.
뭐가 이리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뀐단 말인가!
그는 최대한 표정을 숨기며 자연스럽게 웃으려 노력했다.
“하하! 오해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농을 한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진지한 겁니까? 게다가 위 대인께서 정천사의 중요한 임무를 제게 맡기실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전 그저 구경이나 하려고 온 겁니다. 오는 김에 마침 대제희 전하께서 편지를 전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고요.”
“아, 농담이셨군요. 어쩐지.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사보다 공을 더 중요시 여기시는 건가 했습니다. 하하하!”
비록 웃고 있긴 했으나 진양은 단호했다.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술친구로서 서정강은 가벼운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지만, 정천사 서정강과는 일말의 관계조차 맺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서정강 역시 진양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정천사 일품 외후의 신분으로 진양을 찾아왔다면 홀대를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지금 신분으로 진양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 일단 술잔부터 기울이시지요.”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서정강이 가져온 술을 마셨다.
그렇게 몇 잔 정도 술이 들어가고 난 뒤.
서정강이 입을 열었다.
“아우님, 아무리 생각에도 이번 일에 개입한 건 별로 현명하지 못한 판단 같습니다. 위 대인께서도 다소 경솔했다고 하실 정도니까요.”
“전 경매를 주최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 물건을 위탁한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거절을 했다간 제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말을 마친 진양은 술잔을 비웠다.
‘뭐? 위흥조가 그런 말을 했다고?’
놈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진양은 해냈다.
비록 아직 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살신전은 진양의 수중에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판을 휘젓고 다닌다고 생각하다니!
‘무능한 정천사 놈들! 전조의 주요 인물은 그림자조차 찾아내지도 못하고서.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해? 위흥조. 또 매를 맞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순간 진양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진양의 시선이 우거지상이 된 서정강에게 향했다.
“그건 그렇고 곧 순방이 시작될 텐데. 폐하 대신 갈 사람은 정해진 겁니까? 어디로 갈지는요?”
“누가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큰 예외가 없다면 조왕 전하, 주왕 전하, 그리고 대제희 전하 중 한 분으로 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어디로 갈지는…….”
그는 망설이듯 말꼬리를 흐렸다.
진양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현재 세간에 떠돌고 있는 상자는 최소 일흔에서 여든 개 정도는 될 겁니다. 허나 유실된 살신전은 겨우 오십 개가 전부죠. 즉, 대부분 빈 상자가 돌고 있다는 얘깁니다.
만약 이 일을 대영에서 꾸민 거라면 전조 사람들도 크게 반응하진 않을 겁니다. 설령 누군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저 살펴보러 온 게 전부일 겁니다.”
이어서 진양의 시선이 서정강에게 향했다.
서정강은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으나, 종국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정천사 일품 외후조차 모르는 일이니 대영과는 절대 관계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대영에서 무슨 일을 벌인다면 반드시 정천사를 거쳐 가기 때문이다.
진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세력은 전조밖에 없겠군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아마도 혼란을 일으키고 그사이에 한몫 챙기려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진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서정강을 주시했다.
순간 서정강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하며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전조 녀석들이 살신전을 훔쳐 간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사실 살신전은 녀석들의 수중에 들려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더 큰 몫을 챙기기 위해 미끼를 던졌단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모든 상황이 마치 한 조각이었던 것처럼 맞아떨어졌다.
만약 살신전이 전조 세력의 손에 있었다면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살신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게 분명했다.
수많은 상자를 만들어 뿌린 건 진짜 상자를 숨기기 위함이 분명했다.
상자 하나를 손에 넣는 것과 여러 개의 상자 중 하나만 손에 넣는 건 난이도부터 다르다.
게다가 후자의 경우 조용히 움직인다면 탄로 날 위험도 크게 줄어든다.
“형님, 저는 그저 경매를 주관하는 사람일 뿐 그 외의 것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상자 안에 살신전이 있든 없든 그건 제 알 바가 아닙니다. 누구든 살신전을 손에 넣게 된다면 그 역시 운이나 실력 아니겠습니까?”
진양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면 서정강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살신전을 손에 넣지 못했다면 전조 세력의 사람들은 분명 경매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찾아내고 그들이 노리는 상자만 노리면 진짜 살신전이 든 상자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가 전조 세력인지, 상자에 정말로 살신전이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건 순전히 정천사의 몫이다.
서정강은 포권을 취했다.
“역시! 대제희 전하와 깊은 연을 맺고 있는 아우님이 대제희 전하의 명성에 먹칠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요. 잠깐이나마 의심했던 점은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보니 저희를 위해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그러셨던 거군요. 아우님, 이거 정말 고맙…….”
“어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말했다시피 전 그냥 물건만 받아서 경매에 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게 전부일 뿐입니다. 그냥 이참에 용돈이나 벌려도 경매를 연 것뿐이라고요. 형님, 술판은 이만 여기까지 하도록 하시죠.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좋은 술을 가져와 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술은 없지만, 대신 좋은 술을 파는 곳을 표기해둔 지도는 있습니다. 나중에 가져오도록 하죠.”
서정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말한 지도란, 정말로 좋은 술을 파는 곳을 표기해둔 지도가 아니라 순방 노선이 그려진 지도일 것이다.
순방길에 나서면 언제 어디서 어떠한 위험과 만나게 될지 모른다.
때문에, 모든 노선과 일정은 계획되기 마련.
그리고 이는 전부 외부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기밀로서 다뤄진다.
아직 대제를 대신하여 나설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후보자들조차 일정과 노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물론 대제를 대신할 사람으로 가희가 뽑히게 될 것이다.
이 점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래도 미리 노선과 일정을 파악해야만 했다.
상황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준비하면 너무 늦는다.
반드시 사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만 한다.
서정강을 보내고 나니 경매는 이제 막 시작을 한 듯했다.
온우백의 진행 하에 상자는 벌써 두 개나 낙찰되어 주인을 찾아갔다.
사실 모조품 화살 열 개가 들어있는 상자 하나를 빼면 전부 다 빈 상자다.
때문에, 이 외의 경매는 크게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진양이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조용히 인파 사이로 숨어들었을 때.
마침내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진품 금속 상자를 똑같이 모방하여 만든 상자였다.
진열대에 놓인 상자에서 살자비의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긴 했지만, 이미 낙찰된 상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살기였다.
그러나 지금껏 무덤덤하게 경매를 지켜보던 황영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며 상자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