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
공정거래위원회
글: 현우
– 하청 업체는 내게 고마운 로봇들이었다.
로봇을 쥐어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몸담았던 그룹에 토사구팽당하고
새로운 몸으로 눈을 뜨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의 눈물이 보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두 번째 삶
이번 생엔 그 죄를 참회할 수 있을까?
프롤로그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작품에서 묘사하는 인물과 지명, 단체, 그 밖의 일체의 명칭이나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이고,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노가다 인건비 올랐으면 외노자 써.
외노자로 안 되겠으면 불법체류자 써.
아니, 누가 그걸 직접 하래?
하청들한테 시키다 적발되면 손 털란 말이야.
갑질? 불법?
라떼는 원청 비리 적발되면 하청들이 순번 정해서 뒤집어써 줬다.
요즘 하청들은 왜 이렇게 절실함이 없어?!
1화
인간실격 (1)
중소기업 탈곡기.
한명 그룹 사람들은 김성균 본부장을 그렇게 불렀다.
하청 업체 특허를 빼내 오고, 단가 후려치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경쟁사가 중소기업이면 헐값 마케팅으로 상대를 말려 죽였고. 그 과정에서 생긴 적자는 시장을 독점했을 때 몇 배의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 냈다.
한명 그룹이 재계 서열 1위를 놓치지 않는 데엔 그의 혁혁한 공이 숨어 있던 셈이다.
***
“부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 가격은 무립니다. 공사비를 이렇게 내리면 하청들이 집단 반발을 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중소기업 탈곡기도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이 있었다.
“무리?”
“40억도 충분히 쥐어짠 단가입니다. 여기서 5억 더 깎는 건 하청들한테 죽으란 소립니다.”
김성균이 재차 말하자 회의실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임원들 모두 부회장님 견적서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금액인지 알고는 있다. 하지만 감히 차기 회장님에게 반기를 들 순 없는 법.
“다른 임원들은 어떻게 생각해? 내가 틀리고, 본부장이 맞아?”
부회장이 눈길을 돌리자 겁먹은 임원들이 황급히 눈을 돌렸다.
“후우……. 다들 나가 있어 봐.”
그렇게 임원들이 줄행랑치듯 나가자 부회장이 담배를 들었다.
“본부장. 늘 잘하다가 오늘은 왜 이래?”
“공사비는 지난번에도 대폭 깎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깎으면 정말 하청들 부도날 수도 있습니다.”
“하청이 부도가 난다라. 허허, 본부장. 자네는 소속이 어디야?”
“예?”
“한명물산 본부장이야. 아님 하청 업체 본부장이야? 은퇴하고 어디 자리 받아 놨어?”
모욕적인 언사에 김성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철저히 한명건설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도 하청들이 외노자만 부리고 있는데 만약 가격을 더 후려치면…….”
“그럼 더 저렴한 인부들 써.”
“부회장님. 하청들이 불법체류자 쓰다 걸리면 저희도 무사치 못합니다.”
그 말을 듣자 부회장이 탁자를 엎으며 일어났다.
“그럼 그때 가서 잡아떼면 될 거 아니야! 우리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거 한두 번 해 봐?”
“…….”
“아니 내가 지금 임원들한테 특허를 빼 오래? 아님 인력을 빼 오래? 그냥 찝찝한 일 하나만 시키자니까. 재수 없게 걸린 하청들한테 나중에 일감 더 챙겨 줘! 그럼 서로 좋잖아?”
부회장은 아무래도 뜻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날뛰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본부장,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도 섭섭해. 지금 내 상황 모르는 거 아니잖아? 나 경영 승계만 확실시되면, 그땐 나도 하청들 이렇게 안 후려쳐.”
김성균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 한명건설을 맡고 있는 장남 최영석 부회장.
제약을 맡고 있는 차남 최 이사와 피 튀기는 왕자의 난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이 전쟁엔 삼남 최 상무까지 가세했다.
경영 일선에서 후퇴한 최영호 회장은 아들들의 피 튀기는 싸움을 즐겼다. 세 놈 중 경영 실력이 가장 뛰어난 놈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라고 공공연하게 말해 왔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최선책은 회사 실적을 올려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것.
……이겠지만 그런 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안되면 하청을 쥐어짜서라도 영업이익(순이익)을 올려야 한다.
부회장은 임원이 되기 전부터 사내 방만 경영을 바로잡겠다 공언했고, 이 명분으로 지금까지 하청들을 쥐어짜 내 왔다.
그런 덕택에 그는 주주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돈 허튼 데 안 쓰는 살림꾼으로 확실한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나도 알아. 그간 나 대신 만날 하청들 쥐어짜 낸 게 얼마나 죄책감 들었어? 인간 탈곡기 돼 줘서 고맙다고. 근데 나 공짜로 이 말 하는 거 아니다.”
부회장은 김성균을 보더니 슬며시 서류를 꺼냈다.
“나 경영권 물려받으면 이 자리 자네한테 토스할 거야.”
“…….”
“그때 가서 계열사 몇 개 독립시켜 줄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부회장이 건넨 서류엔 한명건설의 작은 계열사들과 지분 구조가 적혀 있었다.
김성균의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부회장의 실적을 위해 하청들의 특허를 빼돌리고, 단가를 후려치고, 타 건설사들과 담합해 공사를 따낸 게 몇 번이던가?
하청 사장이 집 앞까지 찾아와서 같이 죽자고 한 적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지만, ‘마지막’이란 마법의 단어에선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흐흐. 거봐, 안 돼서 안 하는 거 아니잖아. 안 해서 안 하는 거지. 안 그래?”
부회장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김성균의 어깨를 토닥였다.
***
“아무튼 본사 방침입니다. 원자재 값이 많이 올랐고, 특허 시공 따오는 데도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35억. 이게 저희 한명건설이 생각하는 최대 예산입니다.”
부회장의 견적서는 곧 하청들에게 전달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다들 어두운 얼굴을 감추지 못한다.
작년에도 공사비를 삭감하더니, 이번에도 또 삭감이다.
정말 하청들더러 죽으라는 건가?
원·하청 간담회는 단순히 불편한 분위기가 아니라, 살기마저 느껴지는 전쟁터처럼 변해 버렸다.
김성균은 애써 그런 분위기를 모른 척했다.
불편한 침묵은 잠시뿐이다. 늘 그랬듯 저들은 이 견적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본부장님. 한 말씀만 드려도 됩니꺼?”
하지만 오늘은 그런 예상과 달리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을지물산의 심영수 사장으로, 하청 업체들의 반장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다.
김성균은 짐짓 긴장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말씀하세요.”
“여기 있는 하청사들 다 공삿밥 20년씩은 먹었십니더. 근데 이 공사 40억도 빠듯합니더.”
“무슨 말씀이시죠?”
“공사비 인상은 바라지도 않심더. 근데 저희 쥐어짜는 거 그만하면 안 되겠십니꺼?”
“맞습니다, 본부장님. 재고해 주십쇼!”
“저희도 딸린 식구가 몇인데요. 이러면 직원들 월급도 못 줍니다!”
“그러면 공사 기일에도 차질이 갈 겁니다!”
원청이 아무리 부당한 지시를 내려도, 하청이 집단행동을 하는 경우는 잘 없는데.
아무래도 하청들 간에 단합 대회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성균은 무리를 슬쩍 살피며 안경을 벗었다.
“외주 사업 거부하시는 겁니까?”
“거부가 아니라 합당한 가격 좀 달라 이 말입니더.”
“이 견적이 저희가 생각하는 합당한 가격입니다만?”
“이 가격이 합당하면 그간 저희가 한명건설 등 처먹었단 소립니꺼? 지난번 공사비 삭감 때 저희 부도 직전까지 갔심더. 지금도 직원 월급 주면 남는 돈 한 푼 없심니더!”
은근히 협박조로 말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청들도 그만큼이나 절박하단 뜻일 것이다.
김성균은 작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어차피 공사 끝나면 다들 예비비 가지고 있죠?”
“그건 나중에 하자 보수공사할 때 쓰일 돈입니다.”
“그럼 결론 났네요. 하자 보수공사 안 하게끔 처음부터 깔끔하게 시공해 주세요.”
“뭐, 뭐라꼬예?”
“오 부장, 그 서류 좀 줘 봐.”
더 이상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이젠 원청의 지위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오 부장이 서류를 건네자 그는 그걸 그대로 하청사 사장단들에게 전달했다.
“이번 공사를 35억에 해 주겠단 하청사 명단입니다.”
“이, 이게 무슨…….”
“30억도 있어요. 일감만 주면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군요.”
“…….”
“세상에 절실한 사람은 많습니다. 제가 꼭 이 말까지 해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제야 극성스럽던 하청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당장엔 적자를 보더라도 대기업과 거래를 뚫고 싶어 하는 하청사가 천지에 널렸다.
“……본부장님. 진짜로 부탁드리겠심더. 암만 그래도 이 돈으로 공사는 무립니더.”
심영수 사장은 급기야 무릎까지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심 사장님. 절실함은 그런 방법 말고 실력으로 보여 주세요. 한명건설에 일감 달라고 집까지 찾아와서 무릎 꿇는 사람 많습니다.”
이런 모습을 마주하는 김성균도 속이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더욱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부회장님이 결심을 굳혔다는 건 이미 확인하지 않았는가?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희가 강제로 공사를 진행하라고 하지 않아요. 35억에 못 하겠는 사장님들은 이제라도 발 빼 주십쇼.”
시끄러웠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이들은 이보다 더 가격을 후려쳐도 대기업과의 연을 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규모 50억도 안 되는 중소 건설사들이 아파트 분양을 따오겠는가, 정부 입찰 공사를 따오겠는가?
“돈 얘기 하다 보면 이런 얘기 정도는 오갈 수 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번은 용납 못 해요. 오늘 대화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김성균은 퉁명스레 말을 남기며 서둘러 불편한 자리를 떠났다.
***
“하청들이 언제 저렇게 말을 맞췄지?”
“아무래도 지난 공사 때부터 공사비를 너무 깎다 보니…….”
“우리 오 부장은 일 안 하나 봐.”
“예?”
“왜 하청사들 동향 파악 못 해? 내가 현장에서 이 꼴 봐야 돼?”
“죄, 죄송합니다. 불만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들고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오 부장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근데 본부장님. 진짜로 이 가격에 공사 진행시키실 겁니까?”
“왜?”
“사실 저도 납득이 안 가는 견적이라서요. 진짜 이 가격에 넘기면 하자 보수공사는 하청들 돈으로 해야 할 겁니다.”
김성균은 말없이 미간을 짚었다. 자사 그룹 부장도 허무맹랑하다 말하는 숫자다. 부회장의 견적서는 마른걸레를 쥐어짠 것이나 다름없다.
“……솔직히 전 진짜 이 가격으로 밀어붙일지 몰랐습니다. 본사에서 하청이랑 가격 협상하려고 좀 낮춰서 불렀다 생각했습니다.”
“오 부장. 자네는 소속이 어디야?”
“예?”
“한명물산 오 부장이야. 아님 하청 업체 오 부장이야? 은퇴하고 어디 자리 받아 놨어?”
그 말에 오 부장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런 말씀이 아니었는데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생각하지 마. 부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오더고, 수정될 일 없다. 하청들이 드러누우면 우리도 새 하청 구해야 하니까 모든 가능성 다 열어 놓으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김성균은 창밖을 내다봤다.
오늘따라 찝찝하다.
못 하겠으면 못 한다고 하면 되지. 무릎까지 꿇을 게 뭐람.
김성균의 머릿속엔 계속해서 심영수 사장의 침통한 얼굴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