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작업 중지 (1)
“숭어가 뛰면 그다음엔 망둥이 뛸 겁니다. 이제 와 치료비를 지원하면 이미 다 끝난 일들도 다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김 부장의 보고에 신석준은 놓치고 있던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덮어 왔던 수많은 산업재해.
만약 이 한 번을 인정하면 다른 하청사들이 일제히 달려들 거다.
“그럼 어떡해? 작업 중지 명령 내려지면 끝이야. 행정처벌은 재판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차라리 장 사장한테 뒤집어씌우시죠.”
“덮어씌워?”
“예. 풍산용접이 우리 몰래 사건을 덮었다. 뒤늦게 사태 파악 후 우린 도의적인 차원에서 치료비를 지원했다. 이럼 직접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가 핫바지도 아니고 그게 통하겠어?”
“안 통해도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우겨야 합니다.”
신석준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김 부장이 힘주어 말했다.
“상무님. 만약 이걸 다 산재로 인정하면 저희 앞으로 대형 수주는 물 건너갑니다.”
“…….”
“어떤 바이어가 저희한테 오더를 넣겠습니까? 정부 입찰 사업은 물론, 대성 그룹 전 계열사에 그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겁니다.”
산업재해 기록은 기업에게 전과 기록이나 다름없다.
안전 관리가 부실한 기업에게 수백억짜리 선박 계약을 맡길 바이어는 없다.
비단 여기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대성 그룹은 중공업뿐 아니라 건설, 철도 등 수많은 국책 사업을 맡아 오고 있었다.
한 번의 잘못을 인정하면 사업 전반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신 상무는 긴 고민에 잠기다 한참 만에 입을 뗐다.
“김 부장. 그럼 장 사장 설득할 수 있겠어?”
“그 양반은 자나 깨나 일감 걱정뿐입니다. 내년부터 용접 물량 늘려 주겠다 하면 더 큰 죄도 뒤집어써 줄 겁니다.”
“좋아. 근데 지금 다른 하청사들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데, 나머지 놈들은?”
“공정위가 헛바람 집어넣은 거 빼야죠. 대성중공업은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이걸 확실히 보여 주면 다시 꽁무니 감출 겁니다.”
김 부장의 강한 확신에 신 상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내가 또 괜한 걱정을 했구먼. 그냥 늘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데.”
“예.”
“그럼 장 사장 만나서 얘기하는 건 김 부장이 해 봐. 용접 일감 늘려 주는 건 내가 200%까지 지원해 줄게.”
“감사합니다. 꼭 좋은 대답 가지고 오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다 풍산용접에서 덮었다는 겁니까?”
“덮었다는 게 아니라, 보고를 안 했다는 거죠. 이게 저희 답변서입니다.”
며칠 뒤 공정위로 출두한 김 부장은 준철에게 요상한 답변서를 내밀었다.
-당사에선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진상을 파악해 보니, 풍산용접 측에서 누가 될까 봐 덮었다고 했다.
-이 일과 직접적 관련은 없으나, 도의적인 차원에서 하청 근로자에게 치료비를 지원했다.
책 한 권 분량의 답변서는 이 세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섬뜩해지는 대목도 있었다. 답변서 뒤쪽엔 장 사장이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거기에 증거까지 제출했다.
‘하…….’
엄한 놈이 등장해 자폭 스위치를 눌러 버리다니.
이건 누가 들어도 위증이지만 법과 절차는 상식대로 돌아가는 바퀴가 아니다. 이러면 대성중공업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기 어렵다.
준철의 눈빛이 굳어질수록 김 부장의 얼굴엔 미소가 채워졌다.
“대단하시네요. 하청 근로자 사고를 은폐한 것도 모자라, 이젠 그 사장까지 방패막이로 이용하다니.”
“믿건 안 믿건 이게 저희 진상단이 파악한 내용입니다. 원하시면 당사자에게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뒤에서 일감 끊겠다고 협박하실 텐데, 그분이 제대로 된 진술을 해 주겠습니까?”
“뭐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으시든가요. 하지만 수사 당국도 법과 절차는 지켜 주시지요.”
준철은 답변서를 덮어 두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좋습니다. 근데 사고를 당한 제보자는 그렇게 말 안 하던데요.”
“무슨 말씀인지?”
“원청 담당자가 직접 합의를 종용했고, 구체적인 치료 지원비까지 제시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정확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그 제보자란 분도 안전사고의 책임이 있었고, 이 문제로 하청 사장과 그분의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과정에서 양자가 합의하라 말했던
거고요. 싸움을 말리는 게 합의를 종용한 겁니까?”
“근데 대성에서 돈은 왜 주신 겁니까? 합의만 하게끔 도우면 되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디까지나 도.의.적.인 책임이었다고.”
“도.의.적.인 책임이 아니라 엄연히 법.률.적.인 책임이 있는 겁니다. 늦게라도 알았으면 나중에 산재 처리했어야죠.”
거기까진 답변을 준비 안 했던 건지 그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이에 아랑곳 않고 준철은 김 반장에게 답변서를 넘겼다.
“반장님. 기소장 하나 더 써야겠습니다. 위증 교사 혐의.”
“예?”
“악질이네요. 하청사 집합시켜서 죄 대신 뒤집어쓰라잖아요. 밥줄 가지고 협박하는데 누가 버티겠습니까?”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사람이!”
정곡을 찔리자 그가 발끈했다.
하나 준철은 들어 줄 필요도 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왜 그러는지 우리가 모른다 생각해요? 이거 하나 인정하면 지금까지 덮었던 산재 다 인정해 줘야 하니까 쇼하는 거 아니에요.”
“뭐? 쇼?”
“풍산용접 이전에 일청용접. 산업재해 신고하자마자 다음 년에 거래 끊겼어요. 그 밖에도 전치 5주, 7주짜리 경미한(?) 사고는 죄다 하청사들이 자비로 보상했어요. 법원 가서 증거
싸움하면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구먼. 그럼 법대로 갑시다.”
그는 답변서를 도로 가져가며 준철을 쏘아봤다.
“참고로 계속 직권남용하면 우리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작업 중지 명령? 만약 우리 업장에 털끝 하나라도 손해 끼치면 그 이자까지 쳐서 받아 낼 거요.”
그렇게 그가 나가자 반원들이 쑤군거렸다.
“내 참. 애도 안 믿을 거짓말을 어쩜 저리 당당하게 하지?”
“대체 그간 얼마나 많이 덮었으면.”
“……근데 팀장님. 진짜 어떡합니까? 여기서 하청 사장이 등장하면 진짜 재판까지 갔을 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반원들의 우려에 준철도 미간을 짚었다.
전생에선 늘 이 답답한 법과 절차에 숨어 살았는데, 당해 보니 숨통이 터질 것 같다.
“별수 없죠. 재판 가기 전에 백기 투항 받아 내야지. 반장님, 지금 노동부로 가겠습니다.”
“팀장님…… 이거 진짜 작업 중지 명령까지 받아 낼 건 아니죠?”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기서 저렇게 나오는데 섣불리 하기 좀 그렇고…… 또 작업 중지 명령이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잖아요.”
“맞아요. 인명 사고 터져도 될까 말깐데 괜히 했다가 일만 키우지 싶습니다.”
그놈의 허세가 반은 먹혔다.
직권남용, 법과 절차를 들먹이니 아무래도 다들 위축된 모양이다.
그런 우려들을 뒤로하고 준철은 달력을 보다 씩 웃었다.
“충분히 받아 낼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는 제가 전문가니 믿어 주세요.”
***
단숨에 고용노동부로 달려간 준철은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대성중공업이 하청 사장을 방패 삼으려 한단 사실까지 모조리.
이 모두 신문 헤드라인으로 다뤄도 충분할 문제였지만 산업안전과장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사정을 모른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근로자가 전치 50주의 진단을 받았다 이거 아닙니까?”
“사고도 모자라 그걸 은폐하려 했습니다. 지금은 하청 사장을 방패 삼아 뒤로 숨고 있고요.”
부연 설명까지 했지만 산업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업 중지 명령을 함부로 낼 수 없습니다. 이건 기업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행정처벌이에요.”
“사형선고 받아야 할 사람이 계속 살아 있으니까 엄한 사람들만 다치지 않습니까?”
“…….”
“뒤로는 계속해서 하청들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거 뿌리 뽑지 못하면 누가 죽을 때까지 안 끝날 겁니다.”
“하면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선에서 끝내시지요?”
“그 대책의 진정성을 어떻게 믿습니까?”
재발 방지 대책은 반성문이 아니다.
이 대책을 통해 현장 전반을 돌아봐야 하고, 안전 실태를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수사가 또 여기서 불발되면, 대성중공업의 재발 방지책은 반성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데, 진정성이 있겠는가?
산업안전과장이 주춤하자 준철이 힘주어 말했다.
“저희가 이 조사를 통해 전 하청사를 돌아다녔습니다. 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원청에서 계속 외주 비용을 삭감했고, 지금도 현장에선 안전 수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
“아직 현장에 위험한 요소가 많다는 겁니다. 나중에 정말 인명 사고 터지면 그거야말로 인재(人災) 사고 아닙니까?”
그리 말하며 준철은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
“그리고 저희가 지금 다루는 자료. 곧 국회로 보낼 생각입니다.”
“예?”
“이제 곧 국정감사 기간 아닙니까? 여의도로 보내면 이 문제 곧 공론화될 겁니다.”
“아니 지금 저희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 아니라 관련법 개정이 필요하니 국회에 부탁하겠단 말씀입니다.”
그렇게 둘러댔지만, 그가 알아들은 대로 협박이 맞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작업 중지 명령 내려라. 안 그럼 언론에서 조리돌림당할 거다. 지금 이 소리 하고 있는 거 아니요!”
“그 뜻이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뭐가 아니요!”
국정감사는 청문회스타 지망생들이 벼르고 있는 계절이다.
숨 쉬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9월에 갑자기 불을 지르겠다 나오다니.
게다가 하청 근로자 문제는 그간 위험의 외주화로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슈다. 근데 산재 은폐까지 의심되는데 노동부가 가만히 있었다?
산업과장 머릿속엔 벌써 장·차관이 단두대로 끌려가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우리도 전후 사정 파악하고, 사안의 심각성까지 다 고려해야 합니다! 근데 다짜고짜 이렇게 협박하면 어떡하라고요.”
“무슨 일들이야?”
산업과장이 목소리를 높일 때, 한 연로한 남자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서, 서장님.”
“뭐 그리 살벌한 얘기들을 해. 국감이 어쨌고, 작업 중지가 어쨌고.”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자꾸 무리한 부탁을 해서…….”
준철은 한눈에 그 남성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방(서울)노동관서장.
바로 작업 중지 명령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다.
“차영기 서장이요. 들어 보니 내 결재가 필요한 것 같은데, 뭔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