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근신…… (2)
직감이 좋은 사람이라 금방 눈치챌 줄 알았는데 이런 면에선 영 꽝이다.
여자가 밥 한 끼 사겠다는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뭐가 그렇게 급해요. 일단 식사부터 해요.”
신소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호감 표시를 했다 생각했는데…… 혹시 상대방은 아닌가?
“사실 스타트업 대표님들이 팀장님께 꼭 고맙다고 전해 달라서요.”
“스타트업이면…… 그때 면담조사요?”
“네. 이 팀장님이 발 벗고 나서 줬잖아요. 자기 일도 아니었는데.”
“저도 TF팀 일원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누가 단독보고서를 올려 줬겠어요. 많이들 고마워하더라고요.”
준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독보적으로 미친 짓이었지. 보고 체계를 무시하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국회에 전달하지 않았나.
덕분에 이런 근신 처분까지 받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거 통과시킨 것도 이 팀장님이잖아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에이- 나도 무용담 다 들었어요. 칸 위원장 앞에서 아주 일장연설을 쏟으셨다면서요?”
“…….”
“제가 스타트업 대표들한테 그 얘기도 전달했거든요? 아주 손뼉을 치면서 너무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준철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감사하네요.”
“네. 자부심 가져도 돼요!”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그게 다인가요?”
“이 팀장님은 너무 이런 면에서 깐깐하다. 나도 고마워요. 구현수 그 재수탱이한테 구출해 줘서. 그냥 이러저러해서 식사 한 끼 사고 싶었는데 많이 불편하세요?”
준철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전 또 무슨 사건이 있나 싶어서요.”
“사건?”
“보통 식사 자리 나가면 다 일을 부탁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YK암보험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다행히 신소희 팀장은 박다영과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보인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단독보고서는 신 팀장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했죠.”
“내가 뭘 했다고요.”
“면담에 안 데려갔으면 저도 이 보고서 못 올렸을 겁니다.”
신소희는 피식 웃음이 났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면담 안 데려갔어도 어떻게든 보고서를 올렸을 사람 같은데.
“듣고 보니 내 지분도 조금 있네요.”
“물론이죠.”
“그럼 제가 정식으로 밥 한 끼 얻어먹을 자격이 있는 건가요?”
“아, 네. 이거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에이- 내가 사기로 한 밥은 내가 사야죠. 이 팀장님은 나중에 사요. 근데 보는 눈도 많고 하니까 우리 다음엔 점심 말고 저녁 어때요?”
“아…… 네.”
“그리고 일하다가 만나면 괜히 소문만 나지 않겠어요? 주중에 말고 주말에 좀 편하게 만나요.”
넙죽넙죽 대답했지만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로 주말 저녁에 약속을 잡자는 뜻인데…… 이게 뒤풀이가 맞나?
“……그렇네요. 편하게 시간 내 주세요.”
“오케이-!”
그녀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핸드폰을 들어 스케줄을 확인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담.
구현수가 질척거릴 때 질색팔색하던 사람 맞나?
‘하긴 그놈이 진짜 재수 없긴 했으니까.’
아무래도 그녀는 무척이나 고마운 모양이었다.
***
식사가 끝나고 난 후.
준철은 주변을 한참이나 서성였다.
공무원 사회는 여의도보다 좁다. 밥 한 끼 먹은 사실이 혼사가 오갔네 하는 둥 퍼져 나간다. 행시 사무관들은 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니까.
‘편하긴 하네.’
문득 이 무료한 일상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밥 먹고 산책이 웬 말인가. 점심에 김밥이나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워싱턴에선 입맛에 맞지도 않는 샌드위치만 먹었다.
출국 전날까지 스케줄을 못 잡아 그것도 무슨 돌덩이를 씹는 것 같았지.
“아메리카노 7잔이랑 여기 있는 도넛 다 담아 주세요.”
한국에서 먹는 도넛 맛은 좀 다르려나?
준철은 복귀하기 전에 간식거리를 샀다.
분명 또 누구랑 점심 먹었냐고 추궁할 게 뻔한데, 좋은 입막음이 되어 주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시면 어떡해요?”
“사정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부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돌아가 주세요.”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제 얘기라도 한번…….”
“글쎄 안 된다니까요. 민원 접수는 국민신문고와 공정위 홈페이지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덜컥 찾아오시면 저희한텐 업무 청탁입니다.”
김 반장이 한 사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어, 팀장님.”
준철이 등장하자 김 반장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민원을 넣으신 분인데, 이렇게 찾아오셨네요.”
준철은 눈을 돌려 상대를 봤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지 몸이 약간 기울어 있었고, 옷에선 텁텁한 목재 향이 나는 사람이었다.
“저, 저희가 이 민원을 하, 한두 번 넣은 게 아닙니다. 그, 근데 답변을 못 받아서…….”
사내는 말까지 더듬으면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참 난감한 일이다.
아무리 동정심이 들어도 이건 절차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리고 지금은 그 절차를 안 지켜 근신 중에 있는데.
“무슨 일이신데요.”
“팀장님! 지금 저희 상황이…….”
“일단 사정은 들어 보겠습니다.”
김 반장이 눈치코치를 보냈지만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대신 안 될 사건이면 저희가 안 되는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더 이상 이러시면 안 돼요.”
“예,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미수금이요. 우, 우리 원청이 자꾸 잔금을 지급 안 합니다.”
사내의 말에 박 조사관이 한 자료를 건네며 귓속말을 했다.
-저희 쪽에 네 번이나 접수를 하셨더라고요. 미수금 800.
“버, 벌써 8개월째 밀렸습니다. 근데 그쪽에서 돈을 자꾸 안 줘요.”
-사정 보니 그 원청이란 곳도 중소기업인 것 같아요. 주식시장에 상장도 안 된.
미수금 800과 중소기업.
왜 민원 접수가 네 번이나 이뤄지지 않았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된다. 작아도 너무나 작은 사건 아닌가.
김 반장은 이 모습을 떨떠름하게 보며 덧붙였다.
“사장님. 엄밀히 말해 그 미수금은 공정위가 아니라 경찰에 신고하셔야 해요.”
“그러면 미, 민사소송 가라 하던데요.”
“네. 민사로 해결하셔야죠.”
“그, 근데 공정위에 신고하면 소액심판이란 제도가 있다고…….”
“소액심판도 최소 1천만 원대입니다. 그리고 소액심판은 권고 개념이라 강제력도 없어요. 사장님이 원하시는 결과는 재판 가야 받을 수 있어요.”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재판이란 말이 막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800만 원 받자고 몇백만 원의 변호사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저랑 따로 보시죠. 자세한 사정 좀 들어 보겠습니다.”
“아니 팀장님!”
준철은 김 반장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사내를 안내했다.
“어쩌려고 그러세요! 고작 800짜린데.”
“어차피 딱히 할 일 없잖아요. 소액심판이 저희 일이기도 하고.”
“저건 딱 봐도 원청이 괜히 심통 부리는 겁니다. 저희가 해결 못 해 줘요.”
“들어나 보겠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때론 수십 개의 독촉장보다 공정위의 명함 한 장이 더 큰 효과를 주는 법이니까.
준철이 서둘러 사라지자 김 반장이 크게 한숨을 지었다.
***
“죄, 죄송합니다. 무턱대고 찾아와서.”
“아닙니다. 저희도 마침 일이 없어서.”
은은한 커피 향이 사무실을 감돌았다.
남자는 눈치를 보다 명함을 내밀었다.
“사실 저는 뭐…… 사장이랄 것도 없고. 직원 세 명 있는 목재 공장에서 일합니다.”
가구를 만드는 공장으로 직원은 사장을 포함해 네 명인 곳이었다.
“뭐 가구를 단독으로 만드는 건 아니고. 주문 들어오면 재료 다듬어서 원청에 납품하죠.”
그 납품처는 로 이 또한 들어 본 적 없는 중소 가구점이었다.
“여기가 미수금을 안 줬다는 건가요.”
“네…… 벌써 여덟 달째입니다.”
“왜 안 주는 거죠?”
“그 속을 저도 모르겠습니다. 장사가 안돼 폐업한 것도 아니고 판매장도 넓혔던데 우리한텐 계속 돈 없다 이럽니다.”
잔금 기일은 정확히 8달 전이었다.
준철은 장 사장이 내민 계약서를 훑고, 또 훑고, 또 또 훑었다.
상대방을 악덕 업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중소기업인 만큼 상대도 자금 사정이 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계약서를 뚫어져라 검토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랑 거래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5년요.”
“다른 때엔 어땠습니까.”
“말도 마십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제 기일을 지킨 적이 없었습니다. 기본이 3개월이고 늦으면 5개월까지도 미뤄 왔습니다.”
진짜로 악덕 업체란 말인가.
“최근에 판매장을 넓혔다고요.”
“예. 인터넷 판매까지 시작해서 호응이 꽤 좋았는데 우리만 보면 돈 없다 소리 합니다.”
어쩌면 그게 이유일지도 모른다.
자기들 사업체 넓히느라 하청업체 잔금을 미룬 것.
“그래도 내용증명까지 보내신 것 같은데, 그쪽에선 뭐라 했습니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우리가 납품하는 목재에 불량이 많았네 뭐하네 하면서 계속 꼬투리 잡아 댑니다. 아주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사내는 분통을 터트렸다.
아주 전형적인 방법이다.
괜히 불량품 얘기 꺼내면서 결제 기일을 미루는 것. 본래 하청업체에 줄 돈은 자사 직원들 인센티브까지 다 돌리고 남는 돈으로 주는 것이다.
전생의 김성균에겐 그게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저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800만 주면 됩니다. 나도 직원이 있고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있지 않겠습니까. 제발 이번 추석 전까지만. 그때까지만 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검토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더 할 말이 많았지만 그쯤 했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배려인지 알았다.
그렇게 사내가 돌아가고 난 뒤 준철은 고심에 잠겼다.
본래 기업 간의 거래엔 공정위가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된다. 분명 저자가 꺼내지 않은 뒷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료 검토하길 1시간.
“…….”
없었다.
는 늘 납품 날짜를 제대로 지켰고, 불량률도 극히 적었다. 정말이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 결론 내리고 서류를 덮을 때.
문득 또 옛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