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미수금 800
“대리 과장들 모두 내 방으로.”
한명건설의 원조 탈곡기는 외주사업부 이민석 부장이었다.
하청 업체들의 저승사자였었지.
합법적인 갑질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가 이런 식으로 부르면 늘 긴장이 앞섰다.
“별건 아니고 결제 기일 때문에 말이야. 정 대리 우리 밀린 공사비 얼마지?”
“8천만 원요. 기일은 이달 말일까집니다.”
그는 돈 나갈 일이 생기면 늘 얼굴이 어두웠다.
“개별적인 돈 말고. 총 합쳐서 얼마야?”
“아, 예. 이달 말까지 하청 8곳에 밀린 잔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넉넉잡고 한 10억 정도.”
“10억이면 좀 많네? 그거 좀만 미루자.”
대리 시절엔 그게 참 경악스러웠다.
당연히 줘야 할 돈인데 미루자는 얘기가 어쩜 저리 쉽게 나오는지.
“왜 대답이 없어?”
“……부장님. 이거 이미 두 달씩 미룬 돈입니다. 이번에 또 미루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우리도 은행 이자 갚고 직원들 월급 주려면 빠듯해. 안 주겠단 것도 아니고 며칠 좀 미루자니까?”
“외람되지만 어차피 줄 돈이면 그냥 결제해 주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이제 곧 설날이라고 하청들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입사 동기였던 정 대리는 왜 그자가 하청 업체 탈곡기인지 모르는 놈이었다.
잔금 기일을 매번 미루는 것에도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아, 하청들이 설날이라고 기대를 많이 한다?”
“…….”
“이거 내가 아주 큰 실수했구먼. 명절에 기분도 내고 그래야 하는데, 하청사들 다 나 때문에 곡소리 날 뻔했어.”
“그게 아니라.”
“정 대리 그럼 네가 본을 보여 봐.”
“예?”
“명절이라고 회사에서 상여금 받은 거 있을 거 아니야. 그 돈 다 토해 내고 하청사들 잔금 치러. 아, 근데 그 돈 가지곤 턱도 없을 거야. 나 포함해서 대리 과장급들 상여금 다
토해 내라. 하청들한테 잔금 줘야 하니까 어디 조카한테 용돈 줄 생각 꿈도 꾸지 마!”
입사 초기 때부터 기대를 모았던 정 대리는 그날 처절하게 깨졌다.
자기 밥그릇 내놓으란 소리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잘 들어 대리 과장들! 네들 상여금 먼저 챙겨 주겠다고 회사는 늘 이 짓거리 하는 거야. 근데 어디 은혜도 모르고 하청사 편을 들어.”
그때부턴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이 부장의 말대로라면 우린 공범이었니까. 허튼소리 하면 배신자가 되는 거다.
“김성균 대리.”
“아, 예.”
“이거 네가 맡아. 정명수 대리는 마음이 여려서 이거 못 맡겠단다. 왜? 너도 못 하겠냐.”
“아, 아닙니다. 그럼 하청들 한 바퀴 돌면서 공사 트집 잡겠습니다. 불량 시공 지적하면 돈 얘기 더는 못 꺼낼 겁니다.”
나는 그런 쪽으로 타고난 인간이었다.
이민석 부장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러니까 내가 김성균 대리를 안 예뻐할 수가 없지.”
“…….”
“회사가 방향을 제시해 주면 그 방법만 가져오잖아. 주제넘게 헛소리도 안 하고.”
그는 정명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강탈하다시피 뺏어 나에게 주었다.
“두 달만 미루자. 그때 가선 꼭 잔금 치를 테니까 우리 사정 설명하고.”
“예.”
“그럼 믿고 맡긴다.”
그것 또한 거짓말이었다.
한 번 밀린 잔금은 두 달에서 여섯 달이 되었고, 여섯 달에서 1년이 되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잔금 기일을 지킨 적이 없었다.
-아, 글쎄 우리가 안 주는 게 아니라 조금만 미루자는 거 아니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당신들 이렇게 공사 개판으로 쳐 놓고 돈 얘기만 열심이지?
-일이나 제대로 끝내고 돈타령 해 대든가! 이거 하자보수 끝낼 때까진 잔금 얘기 꺼낼 생각도 마쇼.
나는 거기에 대한 수혜자이자 가해자였다.
인간성을 포기한 대가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이민석 부장은 나를 각별히 아꼈고 나는 그의 옆에서 가장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그는 늘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원청 먼저’
하청들에게 줄 돈은 자사 직원 인센티브 다 주고, 은행 이자도 다 갚고, 회식도 다 하고 남으면 그때 주는 돈이라고.
‘…….’
그렇게 망친 하청 업체들의 명절이 얼마나 될까?
***
“여깁니까?”
“아, 네.”
중소기업이라서 허름한 가구 가게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다.
구로구에 위치한 는 건물 한 층을 다 매장으로 쓰는 건실한 중소기업이었다. 건물 바깥엔 간판까지 있다.
‘구로단지에서 간판 달 수 있는 기업 몇 개 없는데.’
준철은 외관을 감상하며 눈을 돌렸다.
“원래 이렇게 큰 곳인가요?”
“이번에 넓혔습니다. 원래도 입소문 난 가구점이기도 했고요.”
“그럼 돈이 없지는 않아 보이는데.”
“네. 돈 없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최근엔 뭐 상장을 하네 마네 얘기까지 돌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묵직한 분노가 느껴졌다.
당사자는 직원들 월급 걱정하는데, 누구는 복에 겨운 소리 하고 있으니.
상장을 준비할 정도면 많이 컸다는 거다. 잔금을 못 줄 이유가 전혀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준철이 말했다.
“사장님. 제가 말씀드린 건 꼭 지키셔야 합니다.”
“아무렴요. 공정위 직원이라고 말 안 했습니다. 그냥 법대 다니는 조카라고 해 뒀습니다.”
“죄송해요. 저희가 끼어들기엔 너무 작은 사건이라서.”
“아닙니다.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해요.”
장 사장 얼굴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공정위에서 도와주겠다 하니 희망을 가지는 것 같았다.
부디 저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심란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자 한 여자가 나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예. 저 명신목재 장 사장입니다. 오늘 사장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계신가요.”
어려 보이는 여자 직원은 떨떠름하게 두 사람을 훑었다.
“아, 명신목재요…….”
“네.”
“안에 들어가 계세요. 김 대리님 불러 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오늘 사장님 만나 뵙기로 했는데요.”
“사장님은 지금 좀 바쁘세요. 금방 오실 거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은 시큰둥하게 말하곤 금방 사라져 버렸다.
초장부터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약속은 사장이랑 했는데, 갑자기 바쁘다고?
더욱 기분 나쁜 건 기다리는 내내 물 한 잔 내오지 않는다는 거다. 경쟁사에서 왔다 해도 이따위 대접은 안 할 텐데.
“이거 참 면목 없게 됐습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준철은 쩔쩔매는 장 사장에게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한참 만에 등장한 김 대리는 남은 인내심마저 끊어 버렸다.
“아이고. 그새를 못 참고 또 오셨습니까.”
“어, 김 대리. 오랜만이야.”
“날도 더운데 뭐 하러 오셨어요. 그냥 전화 주시지.”
김 대리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나이가 한참 많은 장 사장을 벌레 보듯 봤다.
“우리도 좀 급해서 그래. 벌써 8달째나 밀렸잖아.”
“아니 뭐 우리가 그 돈 떼먹습니까. 고작 800인데.”
“그래, 고작 800. 크지도 않으니까 이번엔 처리 좀 해 줘. 추석이 코앞인데 나 직원들 보기에 면이 안 서. 우리도 조카들 용돈은 좀 줘야 할 거 아닌가.”
장 사장은 시종일관 비굴했다.
젊은 놈 태도를 보아하니 늘 이런 관계였나 보다.
“사장님이야말로 이해 좀 해 주세요. 내년에 상장 앞뒀는데 우리가 얼마나 바쁘겠어요. 어음 처리하고 은행에 빚 갚는 데만 해도 죽겠습니다.”
“그래도 우리 돈은 줘야지.”
“하아…… 사장님. 그냥 설 지나고 오시면 안 될까요. 그럼 제가 책임지고 드릴 수 있는데.”
“그 소리 지난번에도 했잖아. 이번이 벌써 네 번째야.”
듣는 사람이 다 화가 났다.
은행 빚이나 어음은 안 갚으면 문제 생기니 그 돈부터 처리한 거다.
받을 돈 받는데도 이렇게 비굴해져야 하나.
장 사장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놈이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했다.
“오늘 너무 보채시네.”
“……부탁함세.”
“어휴- 그럼 좀만 기다려 보세요. 저희 과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젊은 놈은 그렇게 자리를 비웠고, 또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죄, 죄송합니다 팀장님. 시간도 없으실 텐데.”
“괜찮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얼굴 구경하기 힘든가요.”
“뭐…… 우리 같은 하청한텐 늘 이랬죠. 그래도 법대 다니는 조카 왔다니까 과장도 불러 주네요.”
장 사장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과장을 만나는 건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그 젊은 놈이 등장했다.
“아이고 사장님 아직 안 가셨네요.”
“응, 뭐야? 과장님은.”
“지금 사장님이랑 과장님들 다 회의 들어가셨어요. 상장 심사 때문에 긴급회의.”
“뭐?”
“이거 어쩌죠? 다음에 오셔야 할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다음에 와 주십쇼. 그땐 사장님도 꼭 스케줄 비워 놓겠다 합니다.”
툭-.
“거참 책임자 하나 만나는데 드럽게 복잡하구먼. 누가 보면 대통령 만나는 줄 알겠어.”
장 사장은 놀란 얼굴로 준철을 바라봤다.
젊은 대리 놈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뉘십니까? 댁은?”
“여, 여긴 내 법대 다니는 조카…….”
“공정거래위원회 이준철 팀장이요.”
준철이 명함을 내밀자 젊은 놈 얼굴이 창백해졌다.
공정위가 대충 무슨 일 하는 놈들인지는 안다. 갑질 잡는 놈들 아닌가.
“티, 팀장님. 왜 그러세요.”
“사장님. 이놈들은 젊잖게 나가 주면 사람 우습게 아는 놈들이네요. 8개월이 아니라 8년이 넘어도 돈 못 받겠습니다.”
말릴 새도 없이 준철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러곤 사자후를 던졌다.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 8개월째 미수금 처리 안 해 주는 사장이 어디 있어? 매장 넓힐 돈은 있고 하청한테 줄 돈은 없어?”
수십 명의 직원들은 메두사 대가리를 본 것처럼 얼어붙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잔말 말고 사장 나오라 그래! 아니면 상장 심사 때 한번 찾아가 줘? 르네가구는 하청사한테 미수금도 안 갚는다. 이런 놈들이 주주들 배당금을 챙기겠냐. 돈 떼먹을 놈들이다. 한번
그래 줄까?”
준철은 뱃속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려 악다구니를 질렀다.
밀린 돈 받을 땐 이 방법이 최고다.
건설사 하청들한테 많이 당해 봐서 제일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