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옛다 800
“이런 미친놈을 봤나!”
급한 약속이 있었다던 사장은 사장실에 앉아 있었다.
응접실에서 고작 100m도 안 되는 거린데 여길 오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당신 뭐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르네가구 사장은 노기 어린 목소리로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준철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골프 연습하고 계셨어요?”
“뭐?”
“장갑 끼고 계신 거 보니 퍼팅 연습한 모양이군요.”
사무실엔 골프공이 굴러다녔고 놈은 장갑도 미처 벗지 못하고 뛰어나온 상태였다.
급한 약속이 아닐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장 사장. 이 미친놈은 뭐지?”
“공정거래위원회 이준철 팀장입니다.”
“뭐, 뭐?”
“다름 아니라 소액 심판 청구가 들어와서요.”
“뭐……라고요?”
소속을 밝히자 사장의 말투가 조금 공손해졌다.
“명신목재에 미수금 800 안 주셨죠.”
“아니 그건 회사 사정 때문에 좀 미룬 거 아니요.”
“미뤘다는 표현은 보통 합의가 됐을 때 쓰죠. 이 케이스에선 떼먹었다고 표현합니다.”
준철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이건 뭐 깊게 수사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다. 잔금 날짜가 명확하게 적혀 있는데, 돈을 안 주고 있었으니.
장 사장이 어찌나 들고 다녔는지 손때도 꾀죄죄하게 묻어 있었다.
이걸 보면 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기대였나 보다.
놈은 잔뜩 움츠러든 장 사장에게 눈을 돌렸다.
“그니까 장 사장이 우리 신고한 거야?”
“…….”
“장 사장, 우리 5년 동안 거래했다. 계약해 줘서 고맙다고 매 명절마다 선물 보내더니 고작 이거 한 번 때문에 뒤통수를 쳐?”
“하,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5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잔금 날짜 지킨 적 있습니까.”
“그럼 그때 말을 하든가. 왜 불만 쌓아 놓고 있다가 이제 와 터트리냔 말이야.”
“그, 그 얘긴 됐으니 이제라도 주십쇼.”
어쭈구리? 지렁이 새끼가 꿈틀거려?
놈은 장 사장을 한 번 쏘아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거 솔직히 돈 때문에 이런 거 아니잖아. 우리가 하청 업체 바꾸니까 이러는 거지. 자네들한테 더 이상 일감 안 준다고?”
“…….”
“이거 봐 맞네.”
“……하청 바꾼 거야 사장님 마음인데, 밀린 돈은 받아야겠습니다.”
“누가 안 주겠대? 좀만 미뤄 달라고.”
“얼마나 더요?”
“우리도 지금 상장 준비하느라 땜질할 돈 많아. 어음이랑 대출 다 정리되면 그 돈 안 달라 해도 줘.”
함께 듣던 준철은 열불이 터질 것 같았다.
미수금은 당연히 은행 대출보다 먼저 갚아야 한다. 그건 자기들 사정이지 이 계약과 전혀 무관한 얘기기 때문이다.
‘진짜 미친놈이구먼.’
한술 더 떠 상장 준비 하는 걸 자랑이라고 떠들고 있다.
‘왜 8개월이나 밀리고 있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상장 심사 앞두고 회계 자료 세탁에 들어간 거다.
은행에서 빌린 대출은 당연히 연장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든 회사 돈을 다 빚 갚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하청사가 눈에 들어올 리 있나.
피해자가 더 없으면 다행이다.
“나도 솔직히 미안해서 돈 갚을 때 이자 쳐 줄 생각이었어. 근데 내 뒤통수를 이렇게 쳐?”
“이자 필요 없습니다. 그냥 미수금 800만 주십쇼.”
“장 사장! 우리가 매년 2억짜리 주문 넣어 줬다. 어떤 기업이 다섯 명도 안 되는 목공소에 이런 계약을 줘?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공정도 개판이었어. 불량품이 그렇게나
많은데 돈 받을 때만 확실해?”
잠자코 있던 준철이 거들었다.
“사장님. 정산 날짜 다 다가와서 갑자기 불량 얘기하는 건 뭔 경우입니까.”
“댁은 좀 빠지세요. 이건 우리끼리 해결 보면 되잖아요.”
“대화 이렇게 해선 한도 끝도 없겠네요. 그냥 지금 상황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신목재에서 소액 심판 신청했고, 사안 보니 판결 곧 나올 겁니다.”
툭.
“근데 소액 심판까지 넘어가 버리면 흔적 다 남는 거 아시죠?”
“뭐요?”
“하청한테 미수금도 안 주는 기업이 배당금이라곤 주겠습니까? 이 정도 채무도 정리 못 하는데 주가 공시라곤 잘 띄우겠습니까?”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상장 심사할 때 제일 중요하게 보는 게 어음과 채무 기록이다.
“상장 심사 문턱도 못 넘고 바로 반려될 거예요.”
“나라곤 이 돈 안 주고 싶겠소! 정말 돈이 없다니까.”
뻔뻔한 모습에 치가 다 떨린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갚을 의지가 없는 거겠지.
“정 그러시면 여기 회계 자료 한번 가져와 보세요. 800이야 법인 차 한 대 팔면 금방 나오겠구먼.”
사장도 준철을 보며 치를 떨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놈이 진짜로 받아 낼 생각인가 보다.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미수금 해결 안 되면 바로 소액 심판 들어갈 거고, 상장 심사위에 해당 내용도 통보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부디 현명하게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
배은망덕한 놈.
-캉!
지금까지 먹여 살려 준 게 누군데.
-캉!
그깟 800만 원 때문에 공정위에 신고를 해?
-캉캉!
굴욕적인 회의가 끝나고 난 뒤.
최 사장은 두 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구잡이로 공을 때렸다.
상장 심사를 준비하며 채무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던 터였다. 상환 능력만 따지는 게 아니라 대출을 몇 번이나 연장했는지도 따져 대지 않나.
“육실헐 새끼들.”
하청 미수금을 가장 마지막까지 미룬 건 당연히 흔적이 남지 않는 돈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액 심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한참 골프채를 휘두르던 사장은 씩씩거리며 인터폰을 들었다.
“임원들 들어오라 그래.”
임원들이 허겁지겁 들어갔을 땐 골프 스크린이 이미 박살 난 상태였다.
“임 이사.”
“……예.”
“자넨 큰 그릇이 못 되는구먼. 상장하고 회사 커지면 앞으로 더 많은 하청을 부릴 텐데 고작 이 문제도 해결 못 해?”
“죄,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설득해 봤습니다만…….”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대외사업부 업무 모두 회계팀으로 토스해!”
이성을 잃은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회사는 지금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자금난이다. 어쩌면 임원들 월급으로 미수금 800을 마련할지 모른다.
다들 땅만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 전무. 우리 지금 사내 유보금 얼마야.”
“예. 13억이 있긴 합니다만…… 저희 어음과 대출 만기가 이번 달입니다.”
“돈 800 정도 뺄 수 있나.”
“빼기는커녕 어디서 더 빌려 와야 합니다. 저희가 갚을 돈이 14억입니다.”
상장을 위해 매장을 넓혔고, 대출 만기도 연장하지 않았다.
회사가 성장세라 장기적으로 봐도 무리는 아니지만 자꾸 똥파리가 돈 달라고 보챈다.
“그래도 미수금은 이번에 처리하는 게 낫겠습니다. 공정위 말대로 소액 심판 가면 흔적이 너무 크게 남습니다.”
이 기록 세탁하려고 대출도 연장 않고 갚았는데 갑자기 빨간 줄 그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럼 이 돈 어떻게 마련했으면 좋겠어?”
“처분할 자산은 좀 있습니다. 법인 차 한 대 팔면 800 정도야…….”
쾅!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장님의 호통이 들렸다.
“이거 봐 이거! 자네들은 경영자가 아니라 한 치 앞만 내다보는 장사치라니까. 그 차 팔면 우리 영업사원들은 지하철 타고 다녀?”
답답하고 한심한 임원들이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 씨에 손대지 않는 법이거늘.
“이 문제의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도 하청이 우릴 만만하게 본다는 거야. 상장해도 사람 안 바뀌면 별수 없겠어.”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라면 그걸 증명할 방법을 가져와. 명신한테 줄 미수금이랑 은행에 갚을 돈 1억. 이거 마련해 와.”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대출 연장하고 상장을 내년으로 미루는 수밖에.
하지만 입밖에도 꺼낼 수 없는 말이다.
임원들이 허겁지겁 물러나자 젊은 부사장만 자리에 남았다.
“아버지, 진정하십쇼. 그 돈 정도야 제가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네 눈엔 애비가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것 같으냐? 저 늙은이들은 월급 버러지야. 앞으로 더 많은 하청 부려야 할 텐데 저것들 데리고선 미래가 없어.”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근데 저희가 지금 무리한 부분도 있잖습니까.”
부사장은 눈치를 살피다 말을 꺼냈다.
“솔직히 지금 명신목재만 이러는 게 아닙니다. 하청사 다른 네 곳도 결제가 밀려 있어요.”
사실 그게 근원적인 이유였다.
잔금은 지금 한두 개가 밀려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그거다. 이런 문제는 분위기 타면 이상해져.”
“그럼 이번 기회에 그냥 확실하게 정리하시죠.”
“정리?”
“상장을 그냥 내년으로 미루세요.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괜히 탈만 더 크게 날 것 같습니다.
“그 얘긴 함부로 꺼내지 마라.”
“하지만…….”
“쉬운 길 택할 거면 나도 이 고생 안 했어. 그리고 늘 쉬운 길만 왔으면 회사 이렇게 크지도 못했어.”
단호한 반응에 부사장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코스닥 상장, 평생 아버지가 꿈꿔 왔던 목표 아닌가.
아버지는 단순히 상장된 기업만 원하는 게 아니다. 하청을 휘어잡는 철혈 원청. 자신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엔 긴 침묵이 흘렀고, 사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이윽고 긴 침묵이 끝났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부사장. 내일 은행에 좀 다녀와라.”
“……돈 찾아올까요?”
사장은 말이 없었다.
“아버지. 생각 잘하셨습니다. 그냥 제가 돈 입금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 돈 전부 다 찾아와. 800만 원 전부 동전으로.”
“……예?”
생각을 다 정리했는지 사장이 훌렁 일어나 버렸다.
“누가 그 800 그냥 준대? 10원짜리로 다 바꿔 와. 아니지. 종류가 더 많아야 세는 맛이 있겠구먼. 100원이랑 500원짜리도 적당하게 바꿔 와.”
“아버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왜? 그놈들도 내 회사 와서 망신 다 줬는데, 난 이러면 안 돼?”
“…….”
“똑똑히 보여 줘.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주변 은행 다 돌면서 동전으로 바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