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입금된 800
“형님, 우리 이번엔 추석 보너스 받을 수 있을까.”
“일하다 말고 왜.”
“일이 손에 잡혀야 하지. 남들은 명절에 상여금이다 뭐다 기분 내는데 우린 이게 뭐유.”
자재 창고에 있던 명신목재소 직원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풍성한 한가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고민 없이 조카들 용돈 한번 쥐여 주고 싶은데, 어째 그것도 요원할 것 같다.
“사장님이 만나 봤다잖아. 그것도 공정위 직원이랑 함께.”
“근데 왜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유.”
“거참 사람 성격 급해서.”
“고작 800 받는데 이렇게 시간 끌 거 있수? 애초에 줄 마음 있었으면 진즉 줬겠지.”
사내는 신경질을 부리며 목장갑을 벗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막말로 공정위가 이런 사건에 끼어들어서 뭐 해 줄 수 있다고.”
본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공정위가 도와준다는 말을 들었을 땐 기대에 잔뜩 부풀었는데, 아무래도 르네가구는 들어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건 성춘이 형님 말이 맞는 것 같수다.”
옆에서 작업하던 막내 직원도 거들었다.
“진짜 받을 요량이었으면 이래선 안 돼. 아, 그때 르네가구 쳐들어가서 깽판 치자니까 왜 그걸 못 해서.”
“가만 보면 우리 장 사장도 물러. 우리가 쌩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받을 돈 당연히 달라는 건데 마음고생까지 해야 돼?”
“야, 그래도 장 사장 성격 둥글어서 계약 따온 것도 많아.”
“실컷 계약 따오면 뭐 해. 밀린 돈도 못 받아서 이렇게 휘둘리기나 하는데.”
직원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무려 8개월이나 밀린 돈 아닌가.
두어 번 밀렸을 때 함께 쳐들어가자고 했는데 그걸 만류했던 건 장 사장이다.
“안 봐도 훤하지. 사람이 그렇게 무르니까 원청한테 또 당한 거야.”
“누가 아니래. 그놈 새끼들은 상장하네 마네 하는데 왜 우리한테 줄 돈만 없어.”
연장자처럼 보이는 사내가 이들을 다독였다.
“그래도 좀만 더 믿어 보자. 공정위가 도와준다잖아.”
“꼴을 보아하니 공정위 별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구먼.”
그리 툴툴거리고 있을 때 장 사장이 허겁지겁 튀어 나왔다.
평소와 달리 작업복이 아니라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얼굴도 무척 들떠 있었다.
“김 반장. 남은 작업 알아서 마무리하고 오늘 일찍 퇴근해.”
“아니, 어디 갑니까?”
“어. 르네가구에서 연락이 왔어. 오늘 돈 준대.”
“예? 진짜요?”
“응. 공정위한테 직접 연락 왔다니까. 나 다녀오지. 이번 추석엔 기분 좀 내 보자!”
***
“난 솔직히 이번에 장 사장한테 실망 많이 했어. 내 앞에서 알랑방귀 뀔 땐 언제고 안 볼 사이다 싶으니까 싹 뒤통수치잖아.”
“…….”
“근데 사람이 돈만 따라가면 큰 사업 못 한다. 기업 간에도 최소한의 의리는 지켜야지.”
르네가구 사장은 데드라인을 하루 남겨 놓고 공정위에 연락했다.
당연히 줄 돈 주는데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갖은 생색을 부렸다.
이러나저러나 아쉬운 쪽은 장 사장이었기에 그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 바닥 좁다. 장 사장은 나중에 나를 어떻게 만날 줄 알고…….”
“왜 이렇게 잡설이 깁니까. 오늘 돈 가져왔어요?”
놈은 장 사장을 떨떠름하게 훑었다.
“장 사장도 많이 변했구먼. 초심 잃으면 오래 못 갈 텐데.”
“최 사장님은 좀 변하세요. 하청들 이런 식으로 대하면 상장해도 얼마 못 갈 거요.”
오냐, 이젠 볼 장 다 봤다 이거지?
놈은 장 사장을 노려보며 전화를 들었다.
“어, 난데. 가져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너 명의 사내들이 등장했다.
그냥 등장했으면 이상할 게 없었다만 모두들 무거운 포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짤랑, 짤랑.
그리고 들리는 동전 소리.
“받아, 800.”
“……뭡니까 이게?”
“뭐겠어. 장 사장이 원하던 미수금이지.”
가관이었다.
쌀 포대 네 자루를 푸니 동전이 한 트럭이나 나오지 않겠나.
놈은 싸늘하게 굳은 준철을 보며 끌끌 웃었다.
“장 사장이 하도 보채서 우리 임직원들 돼지 저금통 싹 다 모았다. 800 맞지?”
“저기요 최 사장님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왜요 또 무슨 문제 있수?”
“누가 이 돈을 동전으로 달래요?”
“그럼 동전으로 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하도 보채니까 내가 임직원들 돼지 저금통까지 싹 다 긁어모았어. 그럼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최소한 고맙단 인사를 해야지 왜 또
시비야?”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임직원들 돼지 저금통을 털었다고? 누가 봐도 은행에서 바꿔 온 동전인데!
“그럼 기왕 좋은 마음으로 준 거 은행에서 환전까지 해 주시죠.”
“당신들이 일주일 안으로 돈 마련해 오라며.”
“하루 이틀 정도야 더 기다려 드릴 수 있습니다. 환전하고 계좌로 ‘입금’해 주세요.”
“미안하구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바빠.”
장 사장은 모멸감에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원청이 이런 심통을 부리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하청의 숙명이다.
미수금을 동전으로 지불하는 게 딱히 법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됐습니다 팀장님. 돼지 저금통 다 털었다는데 믿어 줘야죠.”
이윽고 입을 뗐을 땐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애 많이 썼수다. 이거 다 바꾸려면 고생깨나 했을 텐데.”
“신경 좀 썼네 그려.”
참자. 그래도 받을 돈은 받았다.
놈들 밑에서 받았던 치욕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자- 그럼 우리 거래는 끝이지?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그냥 변호사 불러. 사람 오며 가며 추하게 만들지 말고.”
놈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일어설 때 준철이 갑자기 손으로 제지했다.
“또 뭐요.”
“다 좋은데 이거 돈이 좀 비네요?”
“뭔 헛소리야. 이거 800 맞는데.”
“아니에요. 100만 원 비어요. 700이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못 믿겠으면 한번 세어 보시든가요.”
준철은 묵직한 포대 자루를 가리켰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돈이 안 맞는다고 말씀드린 건데.”
“아니 세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동전 박삽니다. 이 정도 액수는 눈대중으로 봐도 척 알아요.”
이 미친놈이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럼 다 세어 보고 나중에 연락해. 근데 만약 액수 가지고 장난질하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산할 때 확실히 하고 넘겨야지.”
“뭐?”
“나중에 가서 돈 빈다고 하면 또 우길 거잖아요. 그냥 돈 문제는 확실하게 처리합시다.”
준철은 장 사장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찡긋했다.
멀뚱멀뚱 쳐다보던 장 사장도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마, 말씀이 맞네요. 이거 세 주세요.”
“뭐?”
“가져왔을 때 한번 세 보셨을 거 아니요. 내 앞에서도 한번 세 봐.”
“그래서 만약 맞으면? 어떻게 책임질 거지?”
“그럼 제가 잘못 계산한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준철이 동전을 한 번 쓸었다.
“그게 꼭 누가 책임질 일입니까? 동전 몇십만 개를 세 보는 일인데, 당연히 착오가 있겠죠.”
“이, 이…….”
“뭐 동전 잘못 셌다고 처벌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르네가구 사장은 동전 무덤을 봤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양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다 센단 말인가.
“하아…….”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보여 줘야 하는데 꼴이 우습게 됐다.
하지만 도무지 저걸 다 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는 걸 인정해야 할 순간.
그는 길게 뜸을 들이며 고민하다 전화를 들었다.
“어, 난데. 800 입금해. 아니! 장 사장한테 입금하라고 그 돈!”
속에서 웃음이 났다.
결국 이럴 거면서 뭐 하려고 놀부 심보를 부렸담.
“장 사장. 운이 참 좋네. 근데 앞으로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
“르네와 이미 다 거래 끊어졌는데 우리가 또 볼일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지 마.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신 분이 참 친절하게 돈을 주시네요.”
르네가구 사장은 쌀포대 네 자루를 질질 끌고서 자리에서 나갔다.
살면서 느껴 본 가장 큰 치욕이었다.
***
“팀장님…… 감사합니다.”
놈이 나가고 난 후.
장 사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별말씀을요. 사장님께서 공정위 잘 찾아오신 거죠.”
“아니요. 저 동전 말입니다. 고약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하니 800만 원을 전부 동전으로 바꿔 올 줄 몰랐습니다.”
이하 동감이다.
진짜로 경악스러운 놈이다.
“만약 팀장님 아니었으면 난 저 동전 다 세고 있었겠죠. 덕분입니다.”
장 사장은 잊을 수 없었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놈의 얼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변하지 않았나.
그간 당했던 갑질들 한 번에 되갚아 줬다. 살면서 이렇게 통쾌한 적은 처음이다.
“개인적으로도 감사해요. 이번 추석에는 직원들 인센티브 꼭 챙겨 주고 싶었는데, 덕분에 조카들 용돈 한번 두둑이 줄 수 있겠습니다.”
“근데 얘기 들어 보니 르네가 꽤 큰 일감을 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그거 원재료비 빼고 공임비 빼면 회사에 얼마 남는 돈 2천도 안 돼요. 저 정도 원청은 금방 구해요.”
“그럼 고작 2천만 원에 저런 갑질을 해 온 겁니까.”
“네. 그러니까 속 터질 노릇이었죠.”
장 사장의 웃음을 보는 준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에 만연한 웃음.
이 사건에 모든 미련을 떨쳐 냈단 증거다.
“그럼 소액 심판은 없던 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자리를 파할 때 그가 손을 덥석 잡았다.
“자꾸 말해서 죄송한데, 진짜 복 받으실 거예요.”
“아, 하하…….”
“사실 저 이거 네 번이나 공정위에서 안 도와준 사건이었거든요. 팀장님같이 우리 소상공인 챙기는 분 만날 수 있어서 참 운이 좋았습니다.”
낯간지러웠다.
내가 소상공인들을 챙긴 적 있던가.
건설사 하청들한테 무수히 욕을 먹었던 나인데.
“이러다 얘기가 한도 끝도 없겠군요. 전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떠나가고 난 후.
준철은 싱숭생숭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과거의 죄는 하나 떨쳐 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