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금리인하요구권 (1)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오 과장은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본래 명절 다음 날이 가장 일하기 싫은 법.
황금 같은 연휴를 마치고 일을 시작하려니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우리 팀장들은 나 골탕 먹이는 게 취미인가 봐. 좀 쉬엄쉬엄하지 뭐 첫날부터 이렇게 무더기로 결재를 올려.”
“오히려 더 생각해 줘서 지금 올린 거 아닐까요.”
“뭐?”
“명절 잘 보내시라고 일부러 전에 안 올린 거겠죠.”
그렇게 들으니 또 할 말은 없네.
오 과장은 송 팀장을 비스듬히 보더니 퉁명스레 덧붙였다.
“이 중에서도 제일 급한 모양이지? 나 출근하기도 전에 찾아온 걸 보면.”
“네, 과장님. 이거 한 번만 봐주십쇼.”
송 팀장이 내민 서류는 [금리인하권을 거부당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한 단체의 민원이었다.
“뭔데 이거?”
“회원 수 약 1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집단 민원을 신청했습니다. 사유는 보시는 대로 금리인하를 거부당했다는 내용입니다.”
금리인하권.
수입이 많아졌거나, 신용 등급이 올랐을 시 대출자가 은행에게 요구하는 권리다.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논란 끝에 시행되었다.
하지만 아직 정착 단계의 법이고, 무엇보다 은행들이 인하 기준을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아 뒷말이 많았다.
오 과장은 무심하게 서류를 넘겼다.
“문제 된 은행이 어딘데?”
“1금융권 전체입니다.”
“뭐? 전체?”
“예. 2금융권도 마찬가지고요. 저희 조사에 따르면 작년에 신청된 금리인하권은 3만여 건을 넘었습니다. 개중 인하로 이어진 사례는 채 30%도 되지 않습니다.”
“수용률 30%? 그럼 은행도 대강 성의는 보인 거 아닌가?”
“원래는 60%였습니다.”
은행도 처음엔 국회 눈치를 봤다.
모처럼 여야가 타협해 내놓은 법안이었으니까.
하지만 갈수록 신청자가 많아지고 매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 같자 내부 기준을 까다롭게 올렸다.
“인하를 거절한 사유는 뭔데?”
“없었습니다.”
“그냥 안 된다고 했다고?”
“네. 은행들이 내부규정을 들먹이며 모두 거절했는데…… 문제는 그 내부규정이 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부규정에 의한 탈락.
이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일단 거부하고 내부규정 들먹이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다.
“솔직히 은행 입장에서 금리 인하시켜 주고 싶겠습니까. 자기들 매출에 직격탄일 텐데. 이건 규정을 방패 삼아 인하권을 묵살한 만행입니다.”
이게 공정한 대출 계약이었으면 그 내부규정이 뭔지 양자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 은행들한테 공지 보내서 그 기준만 공개하라고 해 봐.”
“이 사람들도 그걸 요구하면서 은행과 싸우고 있었습니다만…… 1년째 감감무소식이랍니다.”
오 과장은 뒷목이 뻐근해졌다.
업무 첫날부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당연히 은행 입장에선 내부규정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할 거다. 그걸 공개하면 금리인하를 신청할 생각이 없던 차주(대출자)도 신청할 것이니.
하지만 은행들이 내부규정을 안 밝히는 건 사실 딱히 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다.
오 과장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송 팀장이 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1금융권은 양반입니다. 더 심각한 건 대부업들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1금융도 안 지키는 법을 대부업이라곤 지키겠습니까. 대부업은 대출 계약서 쓸 때 ‘금리인하권에 해당 없음’이란 조항까지 만들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건 위법 계약이다.
국가에서 보장하는 권리는 절대로 계약서에서 포기되지 않는다.
“가관이구먼. 근데 우리가 뭔 힘이 있다고 다 들쑤셔. 금감원에 넘기지 그래.”
“꼭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은행들이 내부규정만 발표하면 끝나니까요. 그리고 1금융권을 규제하면 2금융, 대부업도 바꿀 겁니다.”
“흠…….”
“솔직히 저희가 약식으로 조사했는데도 이 정도였습니다. 깊게 들어가면 훨씬 더 심각할 겁니다.”
끈질긴 설득에 오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명절 선물 한번 기가 막히게 받네.”
“……면목 없습니다.”
“어차피 이거 자네가 못 맡지?”
“네. 저희 대청건설 조사해야 해서. 어차피 이거 시장감시국에 넘겨야 할 겁니다.”
없는 일을 갑자기 만들었는데 덜컥 사건만 넘겨줄 수 있나.
종합국에서도 인력 하나 차출해서 넘겨줘야 받지.
오 과장은 복잡한 생각에 잠기다 이내 눈을 번뜩였다.
유능하면서도, 마침 지금은 놀고 있는 한 녀석이 떠올랐다.
***
준철은 오 과장의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얼마 만에 방문하는 과장실인가.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 좋았다. 노상 앉아서 민원이나 처리하고 있으니 좀이 다 쑤실 지경이었다.
‘공식적으로 근신 다 끝난 거지?’
기대에 찬 얼굴로 문을 열자 떨떠름한 얼굴이 준철을 반겼다.
“조용하게 근신하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사고 쳤어?”
“무슨 말씀이신지…….”
“소액 심판 청구했다가 막판에 철회했다면서. 그건 또 뭐야?”
“아, 별거 아니었습니다. 하청 업체가 미수금을 못 받았더군요. 겨우 800짜리 사건이었습니다.”
짤막한 보고가 끝나자 오 과장이 피식 웃었다.
저놈이 말을 쉽게 해서 그렇지 사실은 어려운 사건이다. 밀린 돈 받아 내는 것만큼 치사하고 더러운 게 없는 법이다.
“그래서 동전을 다 세 봤다고?”
“아니요. 100만 원 빈다고 꼬투리 잡으니까 입금해 주더군요. 그냥 아주 작은 사건이었습니다.”
이래서 이놈만 보면 웃음이 나온다.
상대의 교활함을 뛰어넘는 영악함 그리고 배짱. 녀석에게는 그게 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는 영역인데.
“잘 해결됐으면 됐고. 어때? 한동안 일 안 하니까 좀 살 것 같지?”
준철은 멋쩍게 웃었다.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습니다. 민원이 하도 다양해서 라디오 DJ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럼 조금 긴장할 만한 사건 맡아 볼까?”
드디어 근신이 풀리는구나!
준철의 눈빛이 반짝이자 오 과장이 서류를 내밀었다.
“단체 민원이 들어왔다. 뭐 금리인하권을 거부당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데.”
“네.”
“1금융권에서 금리인하 요구를 묵살했대. 내부규정 들먹이면서.”
다음 말을 기대했지만 오 과장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그게 끝입니까.”
“응.”
“뭐 내부규정이 뭐였는지 그런 설명도 없이요?”
“그래.”
“그럼 볼 것도 말 것도 없습니다. 금융권 잘못이네요. 은행이 그 내부규정이 뭐였는지 밝혀야 됩니다.”
너무 기가 차는 상황이라 그런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하지만 과장님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이 팀장 혹시 일본 속담에 그런 말 들어 봤나. 빨간불도 다 같이 건너면 안 무섭다.”
“무슨 말씀인지…….”
“지금 이 내부규정을 밝힌 은행사가 하나도 없거든. 1, 2, 3금융권 전부 다 통틀어서.”
“…….”
“원래 문제 있는 걸 바꾸는 것보다 당연한 걸 바꾸는 게 더 어려운 법이야. 은행들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안 지킨 거니까.”
그들의 억지를 꺾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귀찮다면 귀찮은 사건이야. 금소법에 이런 내부규정을 밝히란 조항이 없으니. 기업들은 보통 하라는 규정 없으면 절대 안 해.”
문제 된 은행은 지금 1금융권 전체다.
이놈들이 합심해서 안 하겠다고 드러누우면 사실 답도 없다.
“이거 관련 기관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해서 이 팀장이 시장감시국이랑 이걸 맡았으면 하는데.”
“과장님 그러지 말고 제가 먼저 한번 단독으로 맡아 보겠습니다.”
“뭐? 단독?”
“네. 어차피 말싸움 길어질 텐데 미리 힘 뺄 필요 없죠. 제가 선두에 서서 진 빼놓겠습니다.”
오 과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하려고 고생을 사서 해. 어차피 큰 싸움 될 거 그냥 다 같이 하는 게 낫지.”
“혹시 압니까. 좋게 말해서 잘 설득이 될지.”
“그게 되겠냐? 은행들 밥그릇 부수는 문젠데.”
“아니어도 수사 수위를 이렇게 올려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도 협상 카드가 많아야 대화하기 편하죠.”
한 번에 너무 많은 패를 까선 안 된다.
수사 수위를 슬슬 올리는 게 협상하기에도 편하다.
오 과장도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 발휘 좀 하고 싶다 이거냐? 하도 놀아서?”
“아, 아닙니다. 진짜로 그게 더 낫습니다.”
“그럼 한번 혼자서 해 봐. 대신 수사에 인력 필요하면 반드시 요청해. 어차피 놈들 말 안 들을 거야.”
***
과장실에서 나온 준철은 바로 서류 검토에 들어갔다.
[1금융권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 금리인하를 거부당한 사람들의 모임]첫 문장부터 무시무시하다.
고발장을 작성한 금사모 회원들은 약 50여 명이었다.
출신도 배경도 다른 이들의 공통점은 저신용자들이었다는 것. 불량자 수준은 아니었지만 각기 4-5등급의 저신용자들이었다.
‘이러면 금리가 좀 세지.’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시중금리보다 약 3% 높은 신용 대출을 받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저희 피해자들은 대한은행에서 약 3% 더 높은 대출을 받았습니다. 다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금리로 돈을 빌리게 되었죠.
하지만 당시 대출 약관에는 신용에 변동이 있거나 수입이 증대될 시 금리인하를 요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펄럭.
-하지만 대한은행은 갖은 이유를 대며 저희들의 금리인하 요구를 묵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타 은행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용 등급이 향상되었거나 수입이 늘었다는 것을 증명해도 이란 말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내부기준이 무엇인지요.
펄럭.
-저희 금사모 회원 중에 금리인하가 이뤄진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공정위 당국에서 이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은행에서 말하는 심사 기준이 무엇인지 밝혀 주십시오.
이들의 민원을 다 검토한 후에 준철은 다른 서류를 들었다.
송 팀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금리인하요구권 수용률은 첫해 60%에서 이젠 30%대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만 잘하는 척 시늉하다가 바로 내부기준을 까다롭게 올려 버린 것이다.
‘뭐야? 대부업체 피해자들도 있어?’
더 심각한 건 대부업체 피해자들이었다.
여긴 약관에 ‘금리인하요구권 해당 없음’이라는 조항까지 넣고 있었다.
‘1금융권도 안 지키는 법이니 대부업들은 더했겠지.’
이 썩은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사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건 수사기관이 합심해 봤자 소득 없이 끝날 것 같았다. 내부규정을 밝히라는 법이 없는데, 그걸 밝혀내야 하니 말이다.
‘차라리 권력자 한 명 섭외해서 도와달라 하는 게 낫지.’
이런 문제는 수천 명의 조사요원보다 국회의원 한 사람의 파워가 더 큰 법.
하지만 그걸 도와줄 의원은 없을 것이다.
“아악…… 아악!”
그리 생각하며 다시 서류를 들 때.
또다시 불명의 통증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