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금리인하요구권 (2)
“또 그놈들인가?”
“예. 금사모에서 다시 금리인하를 요구했습니다. 이번엔 본점에 찾아와서 지점장과 만나자 했다고…….”
시야가 희뿌옇게 변하자 원탁회의장이 보였다.
국내 은행업계 1위인 대한은행의 회의실이었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법정이자라도 어긴 줄 알겠네.”
대한은행 최지호 사장은 혀를 찼다.
“내가 이래서 사람을 싫어해. 돈 빌려 갈 땐 고개를 땅끝까지 처박더니 이젠 뭐 당연하다는 듯 인하해 달라잖아.”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
“늘 하던 대로 해. 내부규정.”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었다.
“그게 저…… 이번엔 다릅니다. 심사에서 탈락한 신청자들이 내부규정을 공개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뭐?”
“이미 관련 기관에 진정서를 다 보낸 모양이더군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습니다.”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하네. 내부규정을 왜 공개해. 은행법에 그러라는 규정 있어? 우리 영업 기밀이야!”
최 사장의 목소리가 바로 격앙되었다.
그만큼이나 예민한 자료다.
내부규정을 공개하면 (금리인하)수용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신청할 생각이 없던 대출자들도 금리인하를 요구해 올 것이다.
“그럼 사장님. 그냥 수용률을 높이시지요. 원래 저희도 신청 건수의 60%는 다 승인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반으로 깎아 버렸으니 당연히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다로운 기준 덕에 지금의 영업이익을 유지하는 거야.”
“압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명분이 없습니다. 반발자들 모두 신용 등급이 향상됐고, 가계 수입이 증가한 사람들입니다.”
부사장이 읍소하듯 말하자 본부장이 뚱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부사장님. 명분은 저희가 아니라 저쪽에 없는 거죠.”
“뭐?”
“사장님 말씀대로 은행법에 그러라는 규정 있습니까?”
“금융당국이 바보야? 우리가 내부규정 핑계 대며 승인 거부하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야. 이게 언제까지 먹힐 것 같아?”
“관련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먹힐 겁니다. 아마.”
최 사장은 본부장을 기특하게 바라보더니 슬쩍 힘을 실어 줬다.
“우리 본부장은 생각이 다른가 봐?”
“예, 사장님. 지금이야말로 합법적인 억지가 필요합니다.”
“합법적인 억지?”
“우리 내부규정 보고 싶으면 관련법 만들라고 하십쇼. 그 전까진 우리 식대로 처리해도 되는 겁니다.”
“결국 국회의원 데려와라 이 소린데, 그럴 일은 없겠군.”
“네. 그리고 우리만 이렇게 영업하는 거 아니잖습니까. 다른 시중은행도 금리인하 요구는 다 묵살합니다.”
“그건 그렇지.”
“오히려 30%도 과한 감이 있습니다. 금리법 제정됐을 때 국회 눈치 본다고 너무 고분고분했어요. 이것도 한 반절은 더 낮춰야 합니다.”
선을 넘는 발언에 부사장이 발끈했다.
“본부장. 그러다 관련기관이 조사하기 시작하면?”
“누구보다 법의 한계를 잘 아는 게 그들입니다. 우리한테 무리한 요구를 할까요?”
“그렇게 낙관적으로 볼 순 없어.”
“오히려 비관적으로 보는 게 이상하죠. 아닌 말로 위법 요소가 없는데 그들이 징계를 내릴 겁니까, 뭐 할 겁니까.”
최 사장은 두 사람의 언쟁이 즐거웠다.
국회에서 금리인하권이 통과됐지만, 어떤 사람이 대상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기업들의 재량……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는 곧 법의 사각지대를 뜻하며,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해 먹어야 한다.
“……듣고 보니 저도 본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들어주다간 한도 끝도 없어요.”
“그냥 모른 척 뭉개는 게 좋겠습니다.”
논쟁이 계속될수록 회의실 분위기도 기울었다.
영업이익과 직결된 문제니만큼 부사장 의견에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최 사장이 원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다들 나가 봐. 부사장은 잠깐 좀 남고.”
모두들 눈치를 보며 일어날 때 부사장은 발이 묶였다.
“부사장. 무슨 걱정하는지는 알아. 당국에서 갑자기 수사해서 일 잘못될까 봐 그러지?”
“…….”
“나도 우려하는 바야. 당국에서 갑자기 내부규정 밝히라 하면 난감하겠지. 근데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질까?”
현실성 없다.
공정위, 금감원, 금융위. 지금까지 그 어떠한 곳도 이 문제에 나서지 않아 왔으니.
“설사 당국에서 수사한다 쳐. 근데 그놈들이 뭘 가지고 꼬투리 잡을 거야? 막말로 법이 있어 규정이 있어? 아니면 국회의원이라도 데려와서 규정 만들어 낼 거야?”
부사장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은 없었기에.
“……그냥 작은 리스크라도 줄이고 싶었습니다. 혹시나 어찌 될지 모르니.”
“자네 신중함이야 내 익히 알지. 근데 사람이 너무 그러면 큰일 못 하는 법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정 그렇게 찝찝하면 우는 놈 떡 하나 더 주든가. 금사모인지 뭐시긴지 하는 놈들 추려서 금리인하 시켜 줘. 그럼 다시 조용해질 거야.”
***
“팀장님. 곧 3시입니다.”
“…….”
“저…… 팀장님?”
김 반장의 부름에 준철이 화들짝 놀랐다.
“예?”
“곧 3시입니다. 금사모 회원들과의 면담요.”
“아, 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답답한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모양이다. 하긴 정체불명의 대화 이후 며칠간 밤잠도 못 이뤘으니.
“죄송해요. 잠시 딴생각 좀 했네요.”
“애인 걱정은 아니실 테고. 이번 사건 때문에 그러시죠?”
두말해 뭣하겠나.
준철이 어정쩡하게 웃자 김 반장이 깊은 한숨을 대신 내쉬었다.
“사실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번 건 너무 막막하네요. 아무리 이 잡듯 뒤져도 은행들의 위법 정황은 하나도 안 나와요.”
“……그렇죠.”
“법에 금리인하권을 못 박아 놓으면 뭐 합니까. 어떤 게 인하 대상인지 규정이 없는데. 이건 자동차만 만들어 놓고 바퀴는 안 만든 거예요.”
하나의 규칙을 만들려면.
그 규칙을 보완할 부칙도 만들어야 하고.
어떤 게 대상인지 판단하는 조례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 전부 은행에게 위임한 꼴.
“은행 입장에서도 이 법은 지키는 게 바봅니다. 지들한텐 매출이 달려 있는 문젠데 금리인하 내부기준을 발표하겠어요?”
“…….”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희도 타 기관에 넘기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공정위 갔다가, 금감원 갔다가 하다 보면 결국 이 문제 해결해야 되는 놈들한테 갈 겁니다.”
이 문제가 다시 국회로 가려면 또 얼마나의 시간이 걸릴까.
금사모 회원들이 빚 갚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를 일이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해 볼 수 있을 때까진 해 봐야죠.”
“에휴- 안타까워서 주책 좀 부렸습니다. 제 얘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준철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담실 어디죠?”
***
차라리 정체불명의 대화를 안 듣는 게 나았을 뻔했다.
내막을 알아도 대책을 세울 수 없다니…….
시장 점유율 1위인 대한은행은 금리심사를 그냥 거부하라 지시했고, 문제 생기면 내부규정 핑계를 대라 일렀다. 다른 은행들 사정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숱하게 고민하며 이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김 반장 설명대로 바퀴 없는 자동차를 굴릴 순 없는 법이다.
“…….”
준철은 무거운 걸음으로 면담실에 도착했다.
안 될 걸 빤히 다 아는데 하소연만 들어 주는 것도 못 할 짓이다. 겪어 본 면담 중 가장 괴로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사모 회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준철을 반겼다.
“저…… 앞서 말씀드리자면 이게 아직 조사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법리를 따져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만 판단…….”
“알다마다요. 들으시면 선생님도 분명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실 겁니다.”
준철은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먼저 1금융권 차주분들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네, 말씀하십쇼.”
“은행에서 뚜렷한 사유 없이 인하 심사를 거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여섯 사람들이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은행들이 아무 사유 없이 우리 금리인하 요구를 묵살했어요.”
그들이 건넨 서류는 신용 등급 변동 내역과 가계 수입 증대 자료였다.
“3년 전에 희망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제 신용 등급이 5등급이었습니다. 저신용자였지만 주택담보대출이라서 겨우 대출 나왔어요.”
“네.”
“그리고 어제 금융기관에 신청한 내역. 2등급입니다. 그간 상환금 한 번도 연체된 적 없고 신용 등급도 향상됐어요. 근데 심사대상자가 아니랍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있는 커플이 달려들었다.
“저희는 원래부터 2등급이었는데 남편이 외벌이라서 수입이 많이 모자랐거든요.”
“네.”
“그 뒤 저도 직장 잡고 가계 수입이 두 배 가까이 늘었는데 저희도 심사 대상자가 아니랍니다.”
여자가 내민 서류는 국세청에서 발급한 소득 증명 자료였다.
“이거 완전 엉터리예요! 직장 생활 1년 차 때 신청을 한 번 했는데 그때는 건보료가 안 올랐다, 그래서 수입 반영이 안 된다 이랬거든요.”
“…….”
“근데 나중에 낼 돈 다 내고 재심사 청구하니, 애초부터 심사 대상이 아니었대요.”
처음 만나는 수사당국이라 그럴까, 아님 쌓아 둔 얘기가 많았던 걸까.
그들의 불만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부터 금리인하 기준이 뭔지, 설명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얘기는 해 보셨습니까?”
“하다마다요. 혼자서는 안 되니 회원들하고 같이 본사까지 찾아갔습니다.”
“근데 그냥 막무가내로 안 된대요! 은행들 영업 기밀이라고 절대로 외부에 공개 못 한대요.”
“선생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대출 계약 쓸 때 분명 서로 금리인하요구권 있다 하고 서명했는데, 왜 그 기준은 자기들만 알고 있냐고요.”
“이건 위법 아닙니까!”
준철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침만 꿀꺽 삼켰다.
그게 딱히 위법은 아닙니다……라고 말할 용기는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금리인하 기준 외부에 공개하고 저희도 정당한 심사 받게 해 주십쇼!”
“이 엉터리 기준 바꿔야 돼요.”
이들의 성화가 계속될 때, 한 사람이 슬쩍 다가와 준철의 손목을 잡았다.
“……저희도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부딪힌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2, 3금융권 이용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