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1
11화
작업 중지 (2)
“현장에서 전치 50주짜리 안전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책임져야 할 대성중공업은 하청 사장과 이를 은폐했고요.”
“산업재해 은폐라. 그럼 검찰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근데 이렇게 덮은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대성에서 하청 사장한테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사정에 대해 모두 들은 관서장이 눈을 돌렸다.
“김 과장?”
“아, 예. 전치 50주짜리 사고는 확인했습니다만, 하청 사장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건 아직 추측입니다.”
산업과장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상 정도가 심하나 엄밀히 말해 사망 사고는 아닙니다. 작업 중지 명령을 함부로 낼 만한 사안이 아니죠.”
“다른 팀장들도 얘기해 봐. 어디까지 파악했어?”
“조사해 보니 근로자의 부주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보단 검찰에서 맡는 게…….”
“행정명령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일을 두고 신중하게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과장이 반대하는데, 팀장들이 찬성할 리 없다.
줄기차게 반대 의견이 이어졌고, 나름의 명분도 충분했다.
“서장님. 작업 중지 명령 함부로 내면 또 기업 죽이기란 말 나올 겁니다. 솔직히 명분도 부족합니다. 사망 사고 같은 민감한 문제도 없는데, 어떻게 행정명령을 내립니까?”
산업과장이 쐐기 박듯 말하자 준철이 나섰다.
“사망 사고는 ‘아직’ 안 일어났다 뿐이지, 사실상 일어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보세요, 법이라는 게 그리 감성적인 게 아닙니다. 아직 안 일어난 거면, 그냥 안 일어난 거예요,”
“전치 50주짜리면 대략 어떤 사고인지 짐작 못 하십니까? 진짜 누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준철은 관서장을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서장님. 그럼 저희가 TF(공동조사단)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TF요?”
“네. 하청사들에 의하면 아직도 안전 수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합니다. 대성에서 외주 비용을 늘 삭감해서요. 공정위와 노동부가 공동조사단 꾸려서 현장 점검하시지요. 만약 현장에서
안전 수칙이 모두 지켜지고 있다면 작업 중지 신청 철회하겠습니다.”
준철의 말에 산업과장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안전 수칙을 모두 지키며 작업하는 현장이 어디 있겠는가?
피해자가 전치 50주의 부상을 입었다면 그 열악한 노동환경은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TF 구성이라. 김 과장, 어떻게 생각해?”
“그,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솔직히 그 엄격한 잣대를 전부 적용하면 남아날 기업이 없을 겁니다.”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라, 다들 그 정도는 하니까 넘어가야 한다?”
관서장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산업과장은 아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그럼 뭐지?”
“……죄송합니다.”
“나는 지금 자네한테 책임을 묻는 게 아니야. 뭘 선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가를 묻는 거지.”
관서장은 그리 말하며 준철을 바라봤다.
“TF 구성은 찬성합니다. 한데 공정위는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서장님. 저희가 모은 증거들을 봐 주십쇼. 전 하청사를 돌며 안전 실태를 파악했고, 유사 사고 사례까지 찾았습니다.”
관서장은 준철이 내민 서류를 읽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습적으로 사고를 은폐한 정황이 보이는군요.”
“예. 하루라도 빨리 내려야 합니다.”
“그럼 작업 중지 명령 내려 드리지요.”
의외의 결정에 준철도 놀랐다.
이렇게나 빨리?
“대신에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쇼.”
“다른 하청사들의 정황은 다 익명으로 제보를 해 주었군요. 이거 기명으로 받아 주세요.”
“예?”
“상습적인 산재 은폐. 그럼 상습적이었다는 걸 입증해야죠. 의심되는 사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져와 주세요.”
“그건 어렵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다들 보복당할까 봐…….”
“법은 잠자는 권리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바꿀 용기조차 없다면 평생 그렇게 사는 수밖에요. 익명 제보만 가지고선 작업 중지 못 내립니다.”
관서장의 말엔 준철도 반박할 수 없었다.
작업 중지 명령.
공사가 하루 멈추면 기업들에겐 수억의 손해가 가고, 주가는 수십억씩 추락한다. 노동부가 확실한 증거를 요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정을 조금 봐줬으면 좋겠지만, 행정명령엔 절차적 하자가 있어선 안 된다.
준철은 오히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까진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
노동부의 기명 자료 요구에 공정위 팀은 다시 바빠졌다.
사실 이쯤은 준철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익명의 제보로 피해를 호소하는 건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다.
구체적인 날짜에 어떤 사고를 덮었는지 그 디테일한 진술이 나와야 한다. 이게 확보되면 재판으로 갔을 때도 공정위가 유리하다.
‘가장 넘기 힘든 산이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구체적인 사고 내역을 진술하면 어떤 하청인지 특정될 수 있다.
보복이 두려운 하청들은 입을 다물 것이고,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저자세로 나가면 안 돼. 깡으로 밀어붙일 필요도 있어.’
원청이든 하청이든 산재 사고를 신고하지 않은 건 범죄행위다.
수사 협조를 바라는 것보단, 차라리 이들을 공범으로 모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는 당장에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전생에서 얻은 지혜였다.
아무리 일감 가지고 협박해도 큰 처벌 받을 거 같으면 하청도 원청을 배신했다. 사실 이들이 배신해 버리면 답도 없었다.
‘당근과 채찍을 얼마나 잘 쓰느냔데…….’
그런 고민에 한창일 때, 김 반장이 들어왔다.
“팀장님. 하청사들 별관에 다 모였습니다.”
굳은 그의 얼굴은 별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말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곧 내려가죠.”
“근데 팀장님. 하청들이 진술해 줄까요? 안 그래도 다들 나서고 싶지 않아 하는 분위긴데…….”
“별관 분위기 찬물 끼얹은 것 같습니다. 다들 너무 조용해요.”
반원들의 우려에 아랑곳 않고 준철이 서류를 들었다.
“설득해 봅시다. 안되면 협박도 하고.”
***
영화관 규모의 별관엔 스무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정적을 깨고 준철이 밝게 인사를 건네 봤지만 이들은 아예 눈길조차 피했다.
더러 불만이 가득 담긴 한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사정은 다 아실 테니, 긴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반장님.”
“네. 먼저 현 수사 상황에 대한 팸플릿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팸플릿이 다 돈 것을 확인한 후 준철이 다시 말했다.
“현재 대성중공업의 산업재해 은폐가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
“고용노동부에서도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고요.”
“…….”
“해서 오늘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은폐해 왔는지, 사장님들의 진술을 듣고자…….”
“팀장님. 먼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저희가 왜 필요한 겁니까? 회사 이름 까고 대성중공업 고발하란 소립 아닙니까?”
이를 신호로 구석구석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거 못 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회사가 특정될 수 있는 진술은 못 합니다.”
“솔직히 이젠 그냥 좀 덮고 싶습니다.”
“우리 업장에서 일어난 사고도 아닌데 대체 언제까지…….”
불만이 이어지자 준철이 말을 끊었다.
“그리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팸플릿을 읽어 봐 주시길 바랍니다.”
사장들의 시선이 모두 서류로 향했고, 이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 아니…… 이건.”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렸을 겁니다. 자발적이었든 협박을 받았든 산재 사고 덮은 것에 대해 사장님들 책임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금 저희도 기소하겠단 말씀입니까?”
“일전에 약속드렸듯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대성중공업의 작태를 봐주세요. 현재 사고를 모두 풍산용접에 전가시키고 자기들은 몰랐다는 식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 문제가
아니지만 곧 여러분들 차례입니다.”
그리 말하자 달아올랐던 회의실이 다시 고요해졌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대성중공업은 자신들에게도 충분히 이런 짓을 하고 남을 놈들이다.
“참고로 저희는 이번 사태 끝나면, 대성중공업에 재발 방지 대책을 받아 낼 계획입니다. 이 일로 하청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 조항이 들어가겠죠.”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나중에 우리 일감을 끊으면 그만 아닙니까?”
“갑질하다 걸리면 벌점이 부과되는데, 이게 누적되면 공공기관 사업에 입찰 제한됩니다.”
공공기관은 대성 그룹의 최고 vip다.
“저흰 당연히 최고점 부과할 겁니다. 대성이 이 일을 보복하면 작업 중지가 아니라 상장폐지를 당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별관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었다.
이들은 늘 갑질을 당해 오던 사람들이었고, 이제 겨우 불공정한 관행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진술을 하면 바뀔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생기지만, 침묵하면 또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말 한 발자국 남았어요. 여러분들께 피해가 가지 않게끔 엄정 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준철이 다시 한번 설득하자 한 사내가 조심히 손을 들었다.
“저희 명진강판…… 운송 작업하다 직원이 전치 4주 진단 받았습니다. 한데 대성에 보고하니 덮으라고 했습니다. 이 모두 신석준 상무가 지시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진경사는 대성중공업 식당에서 밥 먹고 식중독에 걸렸었습니다. 당시 원청근로자 하청 근로자 모두 식중독에 시달렸는데, 원청 직원만 산재 처리시켰습니다.”
“저희 태경화학은 산재 신청해 달라고 얘기만 꺼냈었는데, 바로 다음 해에 일감을 줄였습니다!”
“저흰 신석준 상무랑 직접 나눈 대화 기록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터진 사고를 계속 저랑 직원 잘못으로 몰아갔어요.”
산재 처리 안 해 준 것도 억울한데, 기어코 그걸 하청 사장한테 전가시키다니.
대성중공업의 밑천을 본 이들은 미련 없이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중엔 너무 억울해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증거까지 등장했다.
이들의 진술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준철은 핸드폰 녹음기를 껐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저희가 드리는 종이에 구체적인 내용들을 모두 진술해 주십쇼. 증거 가지고 계신 분은 따로 제출해 주셔도 됩니다. 날짜, 사고 내용, 그리고
당시 담당자. 이 세 가지가 모두 정확히 적혀야 합니다.”
준철은 그리 말하며 김 반장을 따로 불러냈다.
“반장님. 저거 증거 전부 다 문서로 남겨서 빨리 노동부로 넘겨주세요.”
“예. 내일 당장에라도 넘길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그리고 과장님께 넘길 자료도 따로 정리해 주세요.”
“구속영장 들어가시게요?”
“예. 이 정도면 충분히 구속 수사 받아 낼 수 있습니다. 작업 중지 명령 떨어지자마자 바로 신석준 구속 절차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