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아는…… 얼굴 (1)
탱탱한 면발에 칼칼한 국물.
각종 해산물로 24시간 우려낸 육수라는데 결코 과장이 아닌 것 같다. 한겨울의 추위도 국수 한 그릇에 물리칠 수 있다니.
“후- 후-.”
적당히 쉰 김치는 또 어떤가.
전라도 특유의 젓갈 향이 듬뿍 배어 있고, 기호에 따라 간도 맞춰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천연 조미료의 정석이었다.
그때는 왜 이런 맛도 몰랐었는지.
‘……맛있네.’
다시 찾은 정주의 [복순 할미 국수]는 옛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울어진 간판은 할머니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힌 패션 간판으로 바뀌었고, 허름한 1층 식당은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는 국수 타워가 되어 있었다.
가게 앞에 붙여 놨던 ‘현금결제’ 부탁도 ‘카드 환영’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하긴 사업이 이쯤 커지면 국세청이 슬슬 무서워질 만하지.
가게에서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서평댁! 밴댕이젓 이래 묻히면 김치에 간이 밴다냐? 봐라, 김치에 양념이랑 배추랑 따로 논당께.”
…….
“아, 우리 집 김치는 고춧가루 사용 안 한다니께. 고추를 물에 뿔리고 갈어 브러. 여기다 젓국만 첨가해서 맛 내는 게 핵심이다, 핵심!”
그중에는 절대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10년 만에 만난 할머니는 여전히 여장부다운 기세로 목소리를 과시했다.
주걱 하나 들고 다니며 잔소리를 해 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중대장 포스다.
“할미요! 거 잔소리 좀 그만하슈. 이나저나 별 맛의 차이도 없당께.”
“이것은 어디 혓바닥에 된장 발랐남. 음식 장사 하는 놈이 이걸 왜 몰러!”
“서평댁아. 그냥 암소리 말고 젓갈 더 넣어라이. 그라다 이 양반 또 김치 다 배려 뿌고 온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준철이었다.
원산지도 안 속이고, 반찬 재탕도 안 한다며 신고해 보라는 할머니 아니었나. 김치 맛이 마음에 안 들면 아예 다 버려 버리는 모양이다.
음식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이게 뭐 국시집이여 김치집이제. 하루 죙일 김장만 하네.”
“군소리 말어라. 국수는 김치 맛이 반이여.”
“사장님. 그라지 말고 차라리 김치집을 하소. 이렇게 정성 들여 담가 왜 국숫집을 연담. 요즘엔 뭐 종가집이다 뭐다 김치 장사 많더만.”
“그려 할매. 어차피 국수는 다 대리점 사장들이 팔아 주겠다 이참에 딴 사업 하나 하소.”
복순 할미는 고무장갑을 끼더니 눈을 흘겼다.
“사업은 닌장. 내일 당장 객사해도 서러울 게 없는 나이여.”
“그런 양반이 왜 학생들한테는 반값에 국수 판대. 그놈들이 돈 벌어서 우리 국수 팔아 줄 때까지 살 작정 아니었수?”
“그건 또 서평대 말이 맞제. 거기서 난 적자 메우려면 우리도 사업 하나 더 해야 혀.”
“정 힘드시믄 나한테 가게 하나 내주소. 내가 잘 키워 볼게.”
김장의 묘미는 역시 수다다.
김치 사업으로 시작한 얘기는 곧 아침 드라마에서 바람난 주인공 얘기로, 자식들 등록금 얘기로 옮겨붙었다.
가게가 문 닫을 시간에 도착했기에 그들의 대화는 여과 없이 다 잘 들렸다.
“계산 좀 부탁드립니다.”
준철은 떨리는 마음으로 계산대에 갔다.
자신을 알아볼 리 만무하다만. 과거의 아는 얼굴을 만난다는 게 이토록 긴장될 수 없었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계산대에 섰을 때 서평댁이라 불리던 중년 아줌마가 나왔다.
“우리 집 맛있제.”
“……예?”
“오늘 마지막 손님이라 3인분 담아 줬는디 다 비워서 말이우.”
“아, 예. 맛있습니다.”
“서울에서 왔는가? 이렇게 때깔 좋고 양복 입은 사람은 처음인디.”
준철은 쓱 웃었다.
젊은 사람만 보면 궁금증이 폭발하는 여느 아줌마의 모습이다.
“네. 서울에서 왔습니다.”
“역시나 내가 사람 때깔은 잘 봐. 서울에도 우리 가게 많아요. 많이 팔아 주시구려.”
“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근데 혹시 사장님 좀 뵐 수 있을까요?”
“엥? 사장님 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김장하던 사람들의 이목은 금방 집중됐다. 복순 할미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무심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 퇴근 안 할겨? 싸게 싸게 마무리하고들 가.”
노인은 고무장갑을 벗으며 준철에게 왔다.
“첨 보는 얼굴인디 왜 늙은이를 찾수?”
“다름 아니라 제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나왔는데요.”
“그려. 어디 공장에서 나왔는디.”
“공장이 아니라 공정거래위원회라는 곳인데…… 그냥 공무원입니다.”
터럭.
복순 할머니는 들고 있던 고무장갑을 놓쳐 버렸다.
“고, 공무원. 혹시 단속하러 나왔다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공무원이 아니라 다른 일 하는 공무원이에요.”
“에그머니나. 다행이구먼. 공무원 하니까 웬 쌍놈 하나가 생각이 나서.”
복순 할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무장갑을 주웠다.
준철이 대략 공정위가 어떤 곳인지 설명했지만, 관심이 전혀 없는 눈치였다.
“뭔 말인진 몰라도 좋은 일 하는 선생 같구먼. 근디 뭐 한다고 늙은이를 찾수?”
“사장님. 혹시 착한프랜차이즈 선정 사업이라고 아시나요?”
“그 뭐냐 상생인지 뭐시기 하는지 주는 상?”
“아, 아시는군요.”
“닌장할 그거는 내가 하도 들어가 귀에 인이 박힐 지경이야.”
“……예?”
“대리점 사장들이 노상 나한테 설명해 싸지 않소. 근디 뭔 서류를 무진장 제출해야 하더만. 난 관심 없수. 그러다 내 명에 못 죽어.”
복순 할머니는 정말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관심 없는 얘기가 나오자 고무장갑을 끼고 도로 돌아가 버렸다.
“한디 그건 와?”
“저희가 할머니 국숫집을 추천드릴까 하는데요. 관련 자료가 좀 미비합니다.”
“또 어려운 얘기 시작됐고만.”
“그렇게 어려울 건 없습니다. 저희한테 영업 자료 몇 개만 넘겨주시면 알아서 해 드리겠습니다.”
“이 나이 먹고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상은 더 좋은 사람한테 주소.”
무심한 반응에 옆에 있던 주방 아주머니가 거들었다.
“사장님. 그라지 말고 공무원이 와서 해 달라면 해 주소. 어차피 그 자료 다 장남이 관리하는 거.”
“솥에 가서 불이나 끄고 와. 왜 또 쓸데없는 참견이여.”
“보는 사람 답답해서 그라요.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라는디 왜 꼭 고집이람.”
“사람이 헛물켜다 실망하는 것만큼 우스운 게 읍다. 보니까 전국에 수천 개씩 되는 편의점 같은데 주더만. 나는 분수에 벗어나는 짓 안 혀.”
그러자 옆에 있던 정읍댁이 거들었다.
“그라믄 와 가맹점을 내줬수. 분수 따질 거면 정주에서나 장사하지.”
“내가 하자 했나. 놈들이 노상 찾아와서 가게 좀 차리게 해 달라 하니 내줬지.”
“노상 대리점들한테 연락해서 매출 걱정해 주는 양반이.”
“씰 없는 소리 마라! 기냥 내 음식 팔아 주는 게 기특해서 몇 번 연락한 겨.”
복순 할머니는 준철에게 눈을 흘겼다.
“귀찮응게 그냥 가소. 국시값은 안 받겠구려.”
“사장님. 이게 그 기특한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데요.”
“뭐?”
“어려운 설명 싫어하시니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이 사업에 선정되면 정부에서 은행 이자를 깎아 줍니다.”
할머니가 눈만 꿈뻑거리자 서평댁이 거들었다.
“그게 뭔 소리다요?”
“소상공인 공단에서 지원하는 대출이 있거든요. 아마 중소프랜차이즈라 다 해당되실 거예요. 이 사업에 선정되면 이 이율을 거의 1%까지 깎아 드립니다.”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시골 사람이라도 1%가 얼마나 무서운 돈인지는 안다.
“가만. 이번에 새로 계약한 정 사장, 가게 연다고 3억 대출 하지 않았남?”
“동대문 최 사장도 가게 보증금 올라서 급하게 대출 찾더만.”
서평댁이 조심히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말만 들어선 뭐 다 준다는 거 가튼디, 그걸 왜 우리한테 준다요.”
“상생 경영의 모범을 보여 주셨더군요.”
“우리가?”
“네. 국숫집 홍보 비용도 대리점에 안 떠넘기고, 핵심 자제도 매우 저렴한 값에 공급하셨잖아요.”
“고거슨 당연한 건데 뭘…….”
“그리고 복순 할미 국수는 배달비도 안 받으시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더군요. 천 원 배달은 참 획기적이었습니다.”
복순 할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고거슨 내가 잘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여. 국수가 4천 원인데 배달이 5천 원인 게 말이 되남.”
“그건 그렇습니다만…….”
“배달이라도 잘하믄 몰라. 맨날 국수 뿌러 터졌다고 전화나 오고. 그래서 내가 경로당에서 노는 노인들 데려다 2천 원 주고 배달시킨겨.”
“그중에 또 1천 원은 본사에서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이런 기업 정말 없습니다.”
“참말로 끈질긴 놈이구만잉…….”
“참고로 여기서 모범 사례로 선정되면 저희가 전국구로 홍보도 해 드려요. 상생 우수 마크도 드리고.”
“……뭐?”
“큰돈 들이지 않고 브랜드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당연히 대리점 사장님들에게도 혜택이 가겠죠.”
광고 얘기가 나오자 복순 할머니도 잠시 주춤했다.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며 복순 할머니도 광고비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TV 광고는 아예 엄두가 나지 않았고. 만만한 버스, 지하철 광고도 국수 수천 그릇 가격이었다.
하지만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입소문의 한계는 이미 깨닫고 있었으니.
그래서 준철의 제안에 조금의 호기심이 들었다.
인지도를 대폭 올릴 수 있는 기업 홍보라니.
“……그래서 그거 될라믄 뭐 하면 된다요.”
“별거 없습니다.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 자료만 있으면 돼요.”
복순 할미는 더 이상 눈을 흘기지 않았다.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건 허락한다는 의미일까.
노인이 주춤거리자 서평댁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선생님. 그라믄 우리 할미 장남한테 가이소.”
“장남요?”
“응. 돈이랑 대리점 관리는 다 그쪽에서 하니께 이 할미랑 더 얘기할 것도 없수.”
그러거나 말거나 복순 할미는 김장에 한창이었다.
분명 다 듣고 있을 텐데 무슨 반응인지 모르겠다.
“그럼 사장님. 대리 제출로 저희가 가져가도 될까요?”
대답이 없었다.
“저 사장님…….”
“아, 싸게 가져가시오. 뭔 말인지 하나두 못 알아먹겄네.”
“아, 예.”
“근디 매장 천 개 있는 착한 놈이랑, 딸랑 10개 있는 착한 놈 중에 누구 줄지 빤한 거 아니여? 괜히 헛물켜는 거 아닌가 몰라.”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흐흐. 저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모범 사례까지 바라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착한프랜차이즈로선 이만큼 적격인 기업도 없다.
과거의 인연과는 별개로, 애초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