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교수님의 갑질 (2)
한명석은 국내에서 ‘물박사’로 통하는 최고의 수질 연구자였다.
주로 농촌 지역의 원인 미상 오염수를 연구했는데.
부교수 때 화학 회사의 폐수 방류 사건을 밝혀내며 농림부의 표창까지 받았다.
이 일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청운대에서 다수의 산학협력팀을 이끌었고, 왕성한 연구 실적으로 업계에서 명망이 높았다.
하지만 명성과 평판이 늘 비례하진 않는 법.
그는 제자들의 논문 가로채기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연구비 횡령 문제로 징계위까지 회부된 적이 있었다.
물론 ‘물박사’라는 간판에 잔기스 슬쩍 난 정도로 모두 마무리되었지만.
“그러니까 제발 그만둬! 너희들이 아무리 뭉쳐 봤자 한 교수 못 이겨.”
청운대학교 환경공학부 연구실엔 아침부터 전쟁이 펼쳐졌다.
공정위에 고발을 주도한 석박사들이 대자보까지 붙이겠다 알려 왔기 때문이다.
수석연구원 이민석은 오늘 반드시 이 반란군을 진압해야만 했다.
“너희들 이거 뒷감당할 수 있어?”
“뒷감당? 그럼 한 교수는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내 논문 홀라당 가져갔대요?”
“성주야.”
“한탄강 수질 연구! 내가 석사 때부터 혼자 한 연구예요. 민석 선배가 더 잘 알잖아.”
“…….”
“나는 지도교수가 내 뒤통수 칠 줄 몰랐어요. 세상에 논문 첨삭 몇 번 해 줬다고 그걸 어떻게 홀라당 가져가!”
그들은 소위 말하는 ‘무명연구자’였다.
젊은 시절 연구했던 성과를 모두 지도교수에게 바치는 꿀벌들.
“민석 선배도 잘 생각해 봐요. 지금까지 한 교수한테 뺏긴 연구 실적 안 아까워요?”
“…….”
“선배야말로 우리 중에 제일 많이 뺏긴 사람인데 이럼 안 되죠.”
11년째 한 교수 밑에서 석박사를 밟고 있는 이민석이 잠시 주춤했다.
소리는 질렀지만 누구보다 이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민석이 주춤하자 4인방이 더욱 열을 올렸다.
“그렇다고 한 교수 언제 우리 인간대접 해 줬어요? 나 매일 3시만 되면 그 집 딸내미 어린이집으로 갔어요.”
“난 그 사람 미국에서 오면 만날 공항으로 마중 나갔어!”
“나는 새벽에 대리운전까지 불려 나가 봤습니다. 한 교수 우리 연구 카드로 룸살롱 다니는 건 알아요?”
모를 리가 없는 이민석이다.
한 교수를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서 모신 게 그 아닌가.
사모님이 쇼핑을 가면 가방모찌를 하러 다녔고, 그의 노모가 살아 있을 적엔 병 수발까지 다녔다.
하지만 이 모두 한 가지만 생각하면 못 견딜 게 없는 굴욕이었다.
국내 최고 수질 전문가에게 받은 박사 학위…….
그 한 줄의 이력이라면.
“겨우 그거 가지고 이 난리야? 너희들 대학원 올 때 이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왔어?”
“누가 그럴 각오로 대학원을 와. 공부하러 왔지!”
“그럼 공부 때려치우고 취직해 봐. 과연 사회가 너희들이 원하는 대우해 주나.”
“…….”
“대학원도 사회랑 마찬가지야. 저 사람을 교수라 생각하지 말고 부장님, 사장님이라 생각해 봐. 그래도 억울해?”
4인방은 반박하지 못했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 취직했는데 상사가 저런 사람이면…… 그래도 참지 않았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었다.
“거봐.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
“그리고 한 교수 고작 이걸로 안 무너진다.”
이민석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했다.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 좋든 싫든 논문 통과는 오로지 한 교수의 손에 달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 끝이 머지않았다.
“두 번째 징계위는 다를 겁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징계위 수십 번 열려도 그 사람 안 무너져.”
“흥. 그래? 그럼 더 잘됐네. 우리도 어차피 징계위 하나 마나인 거 알고 공정위에 신고까지 했는데.”
이민석은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뭐라고? 공정위?”
“한 교수 이 프로젝트 담합으로 따냈잖아. 다른 네 개 대학들 들러리 붙여서. 그거 이미 접수됐답니다.”
“이 자식이!”
“근데 그렇게 연구비 부풀린 게 이번 한 번이었나?”
“민석 선배. 우리 말릴 생각 마요. 횡령으로 안 무너지면, 다른 걸로 무너뜨릴 거야. 당한 거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싸울 수도 있어!”
사건이 이미 접수됐단 소식에 이민석의 얼굴은 체념으로 바뀌었다.
횡령과 담합은 다르다. 담합은 다른 대학들까지 다 철퇴라는 뜻인데, 그건 곧 이쪽 업계에서 퇴출을 뜻한다.
그리 생각하니 대자보를 말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정말로 공부를 때려치울 각오로 싸우는구나.
“됐다. 그만하자.”
그리 말하며 돌아설 때 불쑥 한 손이 팔목을 잡았다.
“민석 선배. 그러지 말고 우리랑 함께해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랑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나 한 교수한테 처음으로 논문 뺏겼을 때 위로해 준 거 선배밖에 없잖아.”
“나도 싫어요. 늘 우리 하소연 들어 준 거 선배밖에 없었는데.”
이해를 바라는 얼굴로 말해 왔지만 이민석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우린 모르는 사람이야. 서로 갈 길 가자.”
***
인생을 두 번 살아도 문과의 벽을 넘을 순 없는 모양이다.
청운대학교 연구팀이 제보한 연구 자료는 흡사 외계인들의 문자 같았다.
비점오염원, B.O.D, 슬러지, 메타시브…….
수질 업계에선 물을 세는 단위도 리터(L)가 아니라 BOD라고 한다. 이게 무슨 물의 면적당 오염 지수를 나타내는 척도라는데, 수차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장님, 속이 매스껍네요.”
점심이 되자 박 조사관이 그리 하소연했다.
제보 자료가 100장짜리 비문학 지문이었으니 그 표현도 과장이 아니었다.
“솔직히 우리 지식 수준으로는 이게 입찰 담합인지 판단 못 하겠는데요.”
“한 교수가 업계에서 독보적인 입지인 건 확실해요. 가격을 높여 부른 정황은 딱히 없어 보여요.”
김 반장은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럴 리 없어. 좀만 더 파고들어서 빈틈을 찾아보자.”
“아니 말이 안 되는…….”
“밥부터 먹자고.”
그렇게 반원들을 내쫓아 버리고 난 후.
김 반장이 슬며시 다가와 한 서류를 건넸다.
“팀장님. 한명석이란 놈 아주 웃기는 놈이던데요.”
“뭐 추가된 자료 있습니까?”
“몇 년 전에도 연구비 횡령하다 걸려서 징계위 열렸답니다. 물론 엄중인지 진중인지 하는 경고로 끝났다지만.”
김 반장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동료 교수로 이뤄진 징계위에서 ‘경고’가 나왔다는 건 실형선고나 다름없다.
그러면 좀 조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데, 놈은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것 같다.
“근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청운대학교에서 한명석은 거의 국보급 교수예요. 처벌을 할 리가 없죠.”
준철은 김 반장이 내민 서류를 읽고 덩달아 한숨이 나왔다.
[친환경 원자력 연구 관리 – 3억] [청계천 복원 연구 사업 – 5억] [3대 댐 수질 실태 연구 -8억]물과 관련된 정부 관련 수주를 모조리 다 따내고 있었으니.
“솔직히 요즘 교수들 몸값은 다 밖에서 돈 얼마 벌어 오느냐잖아요. 그냥 공공사업 사냥꾼입니다. 청운대가 이 사람 앞에선 벌벌 기겠어요.”
“이 사람 산학 협력 몇 개 맡고 있습니까?”
“총 네 개요.”
“네 개 다 실적이 좋습니까?”
“단기 프로젝트, 중장기 프로젝트.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두 맡고 있죠. 타 대학과 연계한 사업도 많아요.”
의심이 점점 확신이 되어 간다.
이렇게 발이 넓은 사람인데. 들러리 네 학교 찾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이러면 다른 가능성도 의심해 볼 수 있다. 타 대학의 입찰에서 들러리 서 준 적은 없는지.
“이게 그겁니까, 징계위원회?”
“네. 그건 이 양반이 해 먹어도 너무 해 먹었더라고요. 프로젝트가 5억짜리였는데, 2억을 해 먹었어요.”
준철은 물을 뿜을 뻔했다.
“5억짜리 프로젝트에서 2억 횡령이요? 이게 가능한 숫잡니까?”
“그러니까 애초부터 5억짜리 프로젝트가 아니었단 거죠.”
“……웃돈 넣어서 낙찰받았군요.”
“뿐이겠어요. 아주 독한 놈입디다. 인건비 들 일 있으면 전부 다 대학원생 갈아 넣어 버렸답니다. 아낀 돈은 당연히 지가 먹고.”
기함이 나온다.
김성균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더한 놈을 만나 보다니.
“이게 징계위에서 확인한 내용입니까?”
“네. 법카 내역에서 뭐 참치가 나오고, 한우가 나오고, 아가씨가 나오고…… 그냥 오만 곳에 다 긁었더랍니다.”
아직 정식 조사 전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이놈은 상습범이고, 이번에도 분명 구린 내역이 있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근데 그렇게나 걸렸는데 징계가 겨우 경고에 그쳤어요?”
“아시잖아요. 그 바닥 폐쇄적인 거. 그 정도도 횡령 안 하고 사는 교수는 드물죠.”
김 반장은 훌렁 일어났다.
“뭐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솔직히 저도 빈속에 이런 자료 보려니 멀미 나네요.”
“먼저 가세요.”
“엥? 팀장님은요.”
“전 보던 자료 마저 보고 먹을게요.”
“아이고…… 쉬엄쉬엄하세요. 이거 장기적으로 오래 볼 싸움 같습니다. 결국 체력 싸움인데.”
“넵. 흐흐.”
그렇게 김 반장이 나가고 난 후.
준철은 고심에 잠겼다.
‘이따위 징계위면 해 보나 마나네.’
사실 한명 그룹에도 상생사업부가 있었다.
대외적으로 하청 그룹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세운 부서였는데, 실은 정부 압박에 못 이겨 간판만 내건 부서였다.
이런 곳이 제대로 기능할 리 있겠나.
하청이 억울하다고 신고해도 형식적인 절차만 밟고 끝냈다. 회사를 위해 쥐어짜 내 준 임직원들을 어느 회사가 자체 징계를 한단 말인가.
‘별반 다르지 않겠지.’
대학교 내부 징계위면 감싸 주기가 더할 것이다.
모두 비슷한 수준의 갑질과 횡령은 다 하고 사니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입찰 담합으로 신고한 건가.’
왠지 대학원생들의 분노가 그렇게 향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소한 횡령이야 어차피 유야무야 넘어갈 터. 당국이 수사해도 대학에서 함부로 반발할 수 없는 예민한 문제를 폭로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이런 문제는 내부고발밖에 믿을 게 없는데, 대학원생들이 선뜻 나서 줄까?
지금 신고한 이 사람들은 악에 받쳐 신고를 했다 뿐이지, 치명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한 게 아니다. 그 정보를 알 정도의 대학원생이면 절대로 교수를 배신하기 어렵다.
교수의 최측근이 되어 있을 테니.
“후우…….”
그리 생각하며 서류를 넘길 때.
“으윽…… 윽!”
정체불명의 통증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