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교수님의 갑질 (3)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선 이름만 빌려주십쇼.”
지독한 통증이 끝나자 한 고급 일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단정한 남자와 아인슈타인처럼 폭탄 머리를 한 남자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교수와 사업가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교수님. 혹시 저희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조건이야 맘에 들지. 근데 석연치가 않아서.”
“어떤 부분이 걸리시는지…….”
“내가 이런 프로젝트 한두 번 맡아 봤겠어? [농촌 지역 오염원 연구], 이거 넉넉잡아도 8억이면 충분한 연구야. 근데 10억에 낙찰받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 드는군.”
장 대표는 흐흐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수님이라면 안 될 거 없지요.”
“뭐?”
“수질 업계 최고 권위자 한명석 교수님 아니십니까. 교수님 주도하에 청운대학교가 다수의 수질 관련 연구를 따낸 것으로 압니다. 웃돈 2억은 그 이름값이라 생각하시지요.”
장 대표의 노골적인 아첨에 한 교수의 경계심이 슬슬 무너졌다.
터무니없는 소리들이었다면 당장 엉덩이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 최고 수질 전문가, 다수의 산학 협력 운용 등은 업계에서도 이미 인정하는 타이틀이요, 한 교수가 가장 자부심 가지는 타이틀이기도 했다.
“이름값으로 2억이라…… 기분은 좋지만 장 대표가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 만약 들키면 대가가 혹독할 텐데.”
“아이고- 교수님. 세간 사람들은 이게 8억짜리 연구인지 10억짜리 연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교수님이 너무 자신에게 엄격하신 거죠.”
“사람하고는 참.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어떻게 들키겠습니까. 연구비가 다른 사업처럼 시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우리가 다른 연구소랑 일감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한 교수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보통 입찰 담합은 시세를 너무 크게 역행하거나, 낙찰사가 일감을 나눠 줄 때 들킨다. 하지만 연구비는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경쟁자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연구는 부르는 게 값입니다.”
장 대표는 강조하듯 말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농촌지역 오염원 연구, 공개 입찰 – 환경부]한 교수는 실시간으로 침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손만 뻗으면 주워 갈 수 있는 노다지가 바로 앞에 있다. 하지만 바로 손을 뻗자니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하겠다는 건 아닌데 장 대표의 구체적인 생각 좀 들어 보고 싶군.”
“말씀하십쇼.”
“정부 주관 사업은 단독 입찰을 엄격하게 금해. 우리가 혼자 입찰하면 당연히 무산될 텐데.”
“그래서 서울 주요 대학들에게 들러리를 부탁할 겁니다. 연구비로 한 11, 12억 정도 부르는 거죠. 가장 낮은 가격 쓴 저희가 낙찰받도록.”
“광 팔고 죽어라? 과연 그게 될까.”
“대신 저희도 광값을 후하게 쳐 드려야죠. 사실 이 연구비는 그다지 부풀린 예산도 아닙니다. 타 대학에게 떡값도 돌려야 되는데, 빠듯하다면 빠듯하죠.”
장 대표를 보는 한 교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짧은 대화였지만 수완 좋은 놈이란 건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한다면……?”
“저희랑 정식으로 산학 협력 맺어 주십쇼. 나머지 일은 제가 다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난 사실 돈보단 연구에 전념하고 싶네만.”
“물론이지요. 저희 산학단 연구비 카드는 모두 교수님께 일임하겠습니다.”
퍽 나쁘지 않은 조건에 한 교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구비 카드를 일임하겠다는 건 어디에 쓰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다만 교수님 한 가지만 고려해 주십쇼.”
“뭐지?”
“어떤 용도로 쓰시건 상관없는데, 저희도 증빙은 남아야 합니다. 가능한 한 경비 처리되는 내역으로…….”
“그건 걱정하지 마. 안 쓴 용역 업체 쓴 것처럼 포장하고, 100만 원짜리 연구 소품을 200만 원으로 꾸미는 건 우리 쪽에도 잘하는 애가 있으니까.”
장 대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회계 자료를 조작해 줄 연구원이 있다는 건 때가 묻어도 한참이나 묻은 교수라는 뜻이다. 그런 놈이 지금까지 근엄한 척하고 있었다니.
“아, 이미 전문 연구원이 있나 보군요. 혹시 데리고 있는 석박사입니까.”
“응. 내 밑에서 10년 동안 공부한 놈이야.”
“그…… 요즘엔 그런 친구가 말썽을 일으킨 사례도 있어서.”
“걱정하지 마시게. 내 밑에서 오매불망 박사 학위만 바라는 놈이야. 허튼 생각 못 할 놈이지.”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장 대표도 우려를 말끔히 지웠다.
교수는 대학원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십 년 연구해도 지도 교수가 논문 통과 안 시키면 모든 공부가 물거품이 된다.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 걸 보니, 목줄 단단히 채운 대학원생인 듯싶다.
“실례했습니다. 이거 제가 또 괜한 오지랖을 부렸군요.”
“아니야. 난 사실 그런 부분이 더 마음에 드네. 뭐든 다 사소한 곳에서 실수가 나오는 법인데 장 대표는 수완도 좋고, 꼼꼼한 구석도 있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하하.”
“이게 그 내가 말한 조교 명함이야. 앞으로 연락할 일 있음 이쪽을 통해서 하자고.”
“아, 네.”
이로써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던 산학협력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근데 장 대표, 하나만 물음세.”
“네.”
“우릴 돕는다는 들러리 대학교들 말이야. 엄밀히 말해 이건 법에 저촉될 수도 있는 문젠데. 과연 우릴 도울까?”
“그 부분이 바로 사업가의 역량 아니겠습니까. 하하. 걱정 마십쇼. 그냥 대학도 아니고 서울 주요 대학들을 섭외해 이번 사업 문제없이 진행하겠습니다.”
장 대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명함을 건넸다.
[청운산학협력단 – 한명석 소장]자신감 하나는 넘치는 놈이다. 확답도 듣기 전에 이미 자신의 명함까지 파 오지 않았나.
“흐허허. 자넨 일처리가 빠르구먼.”
“네. 그리고 설사 이게 위법적인 일이라 해도 당국은 절대 이거 못 찾아냅니다. 말씀드렸듯 연구비에 시세가 있습니까, 아님 저희가 일감을 나눕니까.”
“그건 그렇지.”
“내부에서 배신만 안 나오면 당국에서 수사해도 결국 증거 못 잡을 겁니다.”
내막은 알아도 증거는 잡을 수 없다.
한 교수는 명함을 받으며 말끔히 우려를 지웠다. 이 정도 수완이라면 작은 일로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것 같았다.
***
-교수님 이민석입니다.
“응, 들어와.”
아침 일찍 방문한 이민석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논문 첨삭 부탁할 때 수없이 와서 기다린 교수실이다. 하지만 한 교수는 단 한 번도 자리를 지킨 적 없었고, 단 한 번도 먼저 기다려 준 적 없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손수 차까지 내오며 자신을 환영해 주었다.
그만큼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하단 뜻이리라.
“말씀하신 연구비 회계 내역입니다. 수정-누락 자료들은 전부 제 실수로 처리해 정정했습니다.”
한 교수는 깨끗하게 세탁된 회계 내역을 들었다.
유흥업소에서 긁은 카드가 접대비로 바뀌었고, 몇몇 비는 돈은 외부 용역 업체를 고용한 것으로 경비 처리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이 과정에서 생긴 실수를 이민석이 다 끌어안아 줬다는 것이다.
“내가 이래서 민석이를 아낄 수밖에 없지. 사람이 의리를 알거든. 걱정 마. 이게 뭐 큰일도 아니고 문제 될 일은 없을 거야.”
어깨를 토닥였지만 이민석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얼굴이 왜 그래. 혹시 나한테 따로 할 얘기라도 있나.”
“……교수님. 그러지 말고 애들 논문 몇 개는 돌려주시는 게 어떨까요.”
“뭐?”
“다행히도 그때 대자보 게시는 막았습니다만 이놈들은 곧 강행할 겁니다.”
“잘나가다 왜 그래? 연구비 카드로 이 정도도 안 쓰는 교수 없어.”
“애들도 교수님의 횡령을 고발하려고 저러는 게 아닐 겁니다. 연구 실적 빼앗기니 이런 거라도 거는 겁…….”
쾅-!
인자하게 웃던 그가 단숨에 책상을 내리쳤다.
“민석아. 내가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 새끼는 못 믿는다. 사람은 다 지가 해 준 것만 기억해, 받은 건 기억 못 하고.”
“…….”
“너희들 대학원 다니면서 한 번이라도 등록금 걱정해 본 적 있어?”
“……아니요.”
“그게 다 내가 바깥에서 기업 장학금 끌어오고, 국장 받아 와서 그런 거야. 생색 한 번 안 내니까 그게 당연한 것 같지.”
이민석의 고개가 자연히 밑으로 내려갔다.
업계 최고의 수질 전문가인 그는 장학금 자판기라 불릴 만큼 외부에서 돈을 많이 받아 오는 교수였다.
“당장에 연구 실적만 해도 그래. 내가 없는 시간 쪼개서 첨삭해 주고, 연구 방향 지시해 줬는데. 1저자 뺏긴 게 그리 억울한가.”
“…….”
“그런 썩어 빠진 마인드로 어떻게 사회에서 버티려 그래? 기업은 더해 인마! 말단일 땐 일 잘해도 전부 팀장한테 공이 돌아가는 거야. 최소한의 수업료다 생각해야지.”
이민석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기엔 한 교수의 첨삭은 너무 비싼 수업료였다.
첨삭 한 번에 1저자가 2저자로 강등되고, 때론 아예 다 빼앗기기도 했으니. 때론 번역 하나 해 줬다고 아예 저자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걸 가장 많이 당한 건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교수님 이거 공정위에 신고까지 들어갔답니다. 지금이라도 사태 수습하려면 놈들이 원하는 거 들어줘야 합니다.”
이민석은 이를 악물고 한 교수에게 조언했다.
한 교수가 이 상태에서 주저앉으면 그의 밑에서 가장 오랜 연구한 그에게도 피해가 미쳤다.
타 대학들이 전부 들러리를 서줘서 부풀린 연구비 아닌가.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걱정 마라. 그건 공정위가 아니라 하나님도 몰라.”
“……예?”
“연구비에 무슨 시세가 있어, 아님 우리가 일감을 나눴어? 이런 연구비는 당국에서 절대 증거 못 찾아. 내부에서 누가 고발하지만 않으면.”
이민석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교수님 저는…….”
“오해하지 마. 민석이 너 겨냥해서 한 말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안전하단 뜻이지.”
한 교수는 이민석의 반응을 살피며 슬쩍 서류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민석이 너 이번 연구 좋더라.”
“……예?”
“금강 수질 연구 말이야. 이거 꽤 오랫동안 연구했지?”
“……예.”
“생각해 보니 내가 그간 바쁘다고 널 너무 못 챙겼다. 내 밑에서 공부도 오래 했는데.”
“…….”
“민석아 너 이번에 졸업하자. 너 이제 박사 받을 때 됐다.”
이민석의 눈동자가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박사.
그가 10년 동안 꿈꿔 왔던 단어 아닌가. 학부 시절 때부터 생각하면 벌써 15년이나 걸렸다.
“이번엔 박사 받자. 이거 너 단독으로 논문 발표해.”
이건 곧 자신의 졸업, 그리고 한 교수 밑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서 왜 그가 이런 말을 꺼내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민석아 이번 일만 잘 넘어가자.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교수는 축 늘어진 이민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민석 귓속에는 한 단어만 맴돌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