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내부자 (1)
정체불명의 대화는 늘 사건의 실마리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번엔 차라리 안 본 게 나았지 싶다.
눈에 불을 켜고 뒤져 봐도 증거를 못 찾아냈으니.
“…….”
보통 담합은 입찰가를 공유하거나, 일감을 나눈 흔적이 잡힐 때 조사가 확대된다.
하지만 이번 입찰 담합은 일회성에 그쳤고 대학들끼리 일감을 나눈 흔적도 없었다.
더욱 절망적인 건 연구비엔 시세도 없다는 거다.
“이건 무리지 않을까요?”
“다른 대학들이 들러리를 서 줬다면 연구 일감 같은 걸 나눠 가진 흔적이 나와야 하는데…… 없습니다.”
“그건 떡값으로 돌린 걸 수도 있어.”
“그럼 한 교수가 연구비 써 낼 때 당연히 떡값까지 포함시켰겠죠. 근데 우리로선 알 방법이 없습니다.”
한 교수가 따낸 [농촌 지역 오염원 연구].
최종 낙찰가가 10억이다. 근데 이게 적정 연구비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대학들이 연구비 부풀려서 따낸 프로젝트가 이 한두 건이겠어요.”
“맞아요. 정부 입찰 사업이면 다 부풀려 받지.”
“대학들이 담합으로 처벌받은 사례도 없습니다.”
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기울자 김 반장이 조심을 운을 뗐다.
이건 안 되는 수사다.
“팀장님, 내일 제보자들 만나기로 한 건 취소하시죠.”
“지금 믿을 건 내부자 증언밖에 없어서…….”
“솔직히 그 사람들은 내부자로 볼 수 없습니다.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사실 한 교수 싫어서 신고한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진술은 악의적으로 부풀렸을 가능성도 배제 못 해요.”
준철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대화가 없었더라면 준철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그냥 덮기 찝찝하면, 청운대 윤리위원회에 이 자료 통보하고 끝내시죠.”
“그래봤자 엄중경고로 끝날 텐데요.”
“그걸로 족해야죠. 한 교수도 망신 한번 크게 사는 건데 느끼는 바가 있을 겁니다.”
엄중경고, 실질적인 처벌 없는 명예형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처벌을 욕심내다간 되레 공정위가 망신을 살 수도 있다.
“팀장님. 이건 반장님 말이 맞습니다. 이거 가지고 조사 확대시켜 봐야 우리만 피곤해져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폭로한 내용도 법정에선 효력 없을 겁니다.”
준철은 턱을 쓰다듬으며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만약 내부자 증언 나오면요?”
“네?”
“증거는 없지만 핵심 내부자가 증언해 준다면 법적 효력은 있지 않습니까?”
“대학원생들은 다 지도교수한테 목줄 잡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지도교수를 배신하겠어요?”
“저희한테 제보해 준 사람들도 다 그런 사람들인데, 신고해 줬잖아요.”
“설마 이거 하시려고요?”
준철은 씁쓸하게 서류를 덮었다.
“제보자들 만나는 보겠습니다. 분명 그 사람들도 우리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테니.”
“그러다 아무 소득도 없으면요.”
“그러면 저도 청운대 윤리위에 넘기고 손 떼겠습니다.”
차라리 정체불명의 대화를 모르는 게 나았을 뻔했다. 그러면 반원들 말대로 그냥 넘어갔을 텐데. 하지만 그냥 덮기엔 대화가 너무 적나라하지 않았나.
대학원생들이 참다못해 지도교수를 고발할 정도면, 뒤에 있는 비리는 더 많다는 것이다.
“하아…….”
준철이 자리를 뜨자 반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쉬었다.
내부고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조사, 이런 건 한 번도 성공한 전례가 없는데…….
그래도 젊은 팀장의 고집은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명문 사학이자 벚꽃 캠퍼스로 유명한 청운대학교는 낭만과 활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3월 초순이라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캠퍼스엔 이미 아늑한 꽃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꽃들이 전공 서적을 들고 걸어 다니고 있었으니.
“팀장님. 한명석 교수 비리 꼭 밝혀 주십쇼.”
그래서 더 짠하게 느껴졌다.
제보자 4인방은 아직 앳된 얼굴도 벗어나지 못한 청춘들이었다.
이들은 연구실을 점거하며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세상을 알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한 교수가 연구비 부풀려서 따낸 프로젝트들이에요.”
“연구비 카드도 다 개인 용도로 썼습니다.”
준철은 이들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주신 자료는 다 검토했습니다만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더군요.”
“네. 말씀하세요.”
“그럼 이 입찰에 참여한 네 개 대학 모두 들러리였다는 겁니까?”
“네.”
“혹시 거기에 대한 증거 자료가 있습니까?”
선두에 있던 사내가 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애초부터 10억짜리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이게 저희들 연구비 회계 내역인데요. 보시는 대로 대부분 술집, 밥값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진 저희도 파악했습니다. 근데 이게 크게 위법적인 일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기업이든 공무원이든 남는 예산 있으면 다 돈 쓸 곳 찾아내서 경비 처리합니다. 한 교수는 좀 심한 정도였지, 남들이 안 하는 일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이 사뭇 굳었다.
“그럼 이거는요. 한 교수가 허위 경비 처리한 내역입니다.”
“이게 뭐죠?”
“저희가 이번 연구에서 외부 용역 썼다는 내역인데, 이거 사실 외부 용역 안 썼어요.”
“맞아요. 전부 다 저희 대학원생들 갈아 넣어서 공짜로 일 시켰어요. 그래 놓고 마치 업체 고용해서 돈 나간 것처럼 비용 처리했습니다.”
준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횡령에 대한 증거로는 볼 수 있겠다. 근데 담합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팀장님. 이 정도면 부풀린 연구비라는 건 증명한 거 아닙니까.”
“애초부터 이 정도로 큰 예산 필요 없었어요. 한 교수가 다른 대학하고 짜고 친 거예요.”
준철이 말없이 서류만 살피자 그들이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내역에 안 나와서 그렇지 한 교수 우릴 머슴처럼 부렸습니다! 자기 막내딸 어린이집 등교, 담배 심부름, 책 반납 심부름이나 시켰어요.”
“전 그 집 사모가 미국에서 올 때마다 공항에 마중 나갔어요.”
“논문은 또 어떻고요! 첨삭 몇 번 해 줬다고 자기를 1저자로 올리고, 우릴 2저자로 내리고. 어떤 건 아예 홀라당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 반드시 처벌해야 돼요!”
준철은 눈을 질끈 감고 서류를 덮었다.
“외람되지만 저희는 개인적인 원한을 들으러 온 게 아닙니다.”
“……예?”
“저희도 여러분들이 공익을 위해 한 교수를 고발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말씀하신 대로 연구 실적 등 다양한 원한이 있겠죠. 하지만 그 원한을 갚아 드리려 온 게 아닙니다.”
“…….”
“한 교수가 다른 대학과 담합해 이 프로젝트를 따낸 게 맞습니까? 거기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연구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당연하겠지만 결정적 증거를 알 리 만무하다.
“혹시 이런 건 증거가 안 됩니까……?”
“말씀하세요.”
“한 교수가 이 프로젝트 따내고 다른 대학교수들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강남의 한 고급 유흥업소에서.”
“그걸 어떻게 아시죠?”
“제가 새벽에 대리운전하러 불려 나갔습니다. 갔더니 다 수질 업계 교수라면서 어디 대학 누구라고 인사까지 시켰습니다.”
쳐 죽일 놈.
프로젝트 따내고 들러리 대학들한테 접대까지 했구나. 아마 그 자리에서 떡값까지 돌렸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파렴치한 일인데, 갈 땐 대학원생들한테 대리운전을 맡겼다니.
기가 차서 욕도 나오지 않았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어떤…….”
“한 교수가 그들과 나눈 메시지라든지, 아님 대화 녹취록. 이렇게 법원에서 증거로 쓸 만한 내용들이요.”
“그 정도 증거는 저희도 없습니다. 근데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입찰 담합인데, 처벌 안 되는 겁니까?”
준철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담합으로 볼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아니 어떤 게 증거인데요.”
“이를테면 건설사에서 입찰 담합으로 계약을 따내면 그 일감을 다른 들러리사와 나누죠. 법원에선 그 일감 나눈 흔적이 증거가 됩니다. 근데 지금은 그게 없어요.”
달리 말해 법대로 가면 진다.
“가격 담합이라 하면, 시세를 나눈 내역, 혹은 시세를 크게 벗어난 내역 등이 있을 겁니다. 근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요. 연구비는 제각각이라.”
그들은 흥분해 있어도 이해는 빠른 사람들이었다.
이건 일회성 담합이다. 부르는 게 값인 사업이며, 어쩔 수 없이 교수들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다.
현실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하단 얘기다.
상황 파악이 끝났을 땐 그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 그런 법이 어디 있나요. 저흰 지금 공정위만 믿고 대자보도 게시 안 했어요. 흑흑”
“저희 같은 대학원생들이 그런 증거를 어떻게 찾아요…….”
“……대학 내부 징계위에서 이를 파악하고 엄벌하는 수가 있습니다.”
“징계위야 그 나물에 그 밥들이에요.”
“그게 아니면 핵심 내부자 증언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 말하자 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한 교수는 원체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도 잘 믿지 않았다. 겨우 3-4년 차인 이들은 사업에 필요한 핵심 일에는 배제되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면.
“내, 내부자라면 민석 선배 정도는 되지 않아?”
“맞아. 민석 선배는 이 프로젝트 회계 자료 다 관리했잖아.”
“문제 될 내용 다 뒤집어써 주고 한 교수 대신 자폭까지 하려 했어.”
준철의 눈빛이 빛났다.
“민석 선배가 누구죠?”
***
“돌아가세요. 난 할 말 없습니다.”
어렵게 만난 이민석은 준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찬바람 풀풀 날리며 바로 연구실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지 말고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요.”
“아, 글쎄 나는 몰라요.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저희가 뭐 때문에 온 건지는 아십니까?”
“그 헛소문 때문에 오신 거 아녜요. 교수님이 다른 대학과 짜고 연구비 부풀렸다.”
“네. 지금 연구비 입찰 담합으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자칫하면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걸음을 재촉하던 그의 발길이 멈췄다.
“뭐?”
“연구비 회계 내역을 다 관리하셨더군요. 근데 왜 이거 갑자기 정정했습니까.”
“…….”
“안 쓴 용역 업체 다 정리하고, 몇몇 비는 돈 다 맞춰 놓고. 근데 그 과정에서 생긴 과실을 다 본인 책임으로 돌려 놓으셨더군요.”
이민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원체 실수가 많아서 회계 자료 정정 좀 했습니다. 그게 죄예요?”
“사정은 전해 들었습니다. 한명석 교수 밑에서 가장 오래 일하신 연구원이라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당신!”
“이건 실수가 아니라 지시였을 거란 게 저희 파단이거든요. 저흰 지금 내부자 증언이 필요합니다. 해당 연구를 따낼 때 깊이 관여했던 내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