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내부자 (2)
말뜻을 이해한 이민석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내부자? 나더러 교수님 뒤통수쳐 달라 이 소리예요?”
“아는 사실만 말씀해 주세요.”
“한 교수가 청렴결백한 사람은 아닙니다. 근데 다른 교수들도 그 정도는 하고 살아요. 이게 내가 아는 전부입니다.”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그가 덧붙였다.
“공정위도 애들 그만 부추기세요.”
“부추기다니요?”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거 학생과 교수의 감정싸움이라는 거. 원래 한 교수 욕심 많아서 남의 논문에 손 많이 대요. 나도 1저자 뺏긴 논문, 홀라당 뺏긴 논문 많아요.”
“그걸 왜 당연하다는 듯 말하세요. 이것도 범죄인데.”
“난 그렇다고 없는 죄 만들어서 신고하진 않아요. 그것도 범죄니까.”
준철은 이민석을 빤히 바라봤다.
“희한하군요. 가장 억울한 게 많은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리 말씀하시다니.”
“누구나 다 실적 뺏기면서 삽니다. 우리 나이 때 사회 초년생들이라면 더욱더.”
하나만 생각하자.
한평생 공부 뒷바라지만 해 줬던 내 가족들.
이 고비만 넘기면 한 교수가 박사 논문을 통과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만 믿으면 된다.
“그러니 자꾸 싸움 키울 생각 마세요. 다른 학생들 모두 이 사태가 얼른 진정되고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이민석은 팽하니 돌아서 연구실로 발걸음을 틀었다.
“민석 씨. 정말 사태가 빨리 해결되길 원하면 그냥 저희 조사에 협조해 주세요.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우린 이거 담합이란 거 확신하거든요. 한 교수가 연구비 부풀려 받으려고 타
대학들 들러리 세웠다.”
“아니 지금.”
“학생들도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싸우겠답니다. 곧 대자보 올리고 학교 전체와 싸우겠다는군요.”
이민석의 안색이 굳었다.
대자보 게시는 겨우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강행한다고?
“민석 씨한테 파편이 크게 튈 겁니다. 연구비 회계 내역을 총관리했던 건 민석 씨였으니.”
“…….”
“전 민석 씨가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걸 원치 않아요. 그건 제보자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생각 바뀌면 연락 주세요.”
준철은 명함을 손에 쥐여 주며 자리를 떠났다.
더 몰아붙일 수 있었지만 그쯤 했다.
원청이 무너질 것 같으면 갑질 당하던 하청들이 나서서 보호해 준다.
이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
“이 팀장, 순서가 좀 뒤바뀐 거 아니냐. 명백한 증거도 안 나왔는데 일단 기소부터 하겠다고?”
“네. 일단 기소를 해야 명백한 증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폭탄선언이 이어지자 오 과장은 잠이 확 깼다.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수사 기획이다.
“그러다 담합 증거 못 찾으면 어떡하려고?”
“저희가 지금 주시하는 내부고발자가 있는데…… 잠깐 고민 중입니다.”
“잠깐 고민은 얼어 죽을! 그게 설득 못 했단 소리 아니야.”
“곧 할 겁니다, 과장님. 가장 당한 게 많은 사람이에요.”
오 과장이 짙은 한숨을 내쉬자 준철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냥 하겠다는 거 아닙니다. 보험도 다 준비해 놨습니다.”
“보험?”
“한 교수가 연구비를 횡령한 게 한두 건이 아니더라고요. 담합 정황 못 잡으면 횡령으로라도 처벌하겠습니다.”
본수사가 안 풀리면 별수 있나. 별건 수사라도 성공시켜야지.
다행스럽게도 한 교수는 무척 지저분한 인물이었다. 사건을 키워도 절대 소득 없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오 과장은 헤실헤실 웃는 준철은 떨떠름하게 훑었다.
“하나만 묻자, 이 팀장.”
“예.”
“이거 입찰 담합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증거도 없고, 내부고발도 확보 못 했는데.”
“연구비 자체가 너무 터무니없는 돈입니다.”
준철은 서류를 들고 설명을 이었다.
“이게 연구비 회계 내역인데요. 보시는 대로 연구비보다 회식비가 더 많습니다. 애초에 10억짜리 프로젝트가 아니었어요.”
“그 짓거린 공무원들도 해. 어떤 정직한 놈이 남는 예산을 반납하냐. 회식으로 경비 처리시키지.”
“그럼 보통 회식이라도 거하게 하잖아요. 근데 한 교수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연구비 내역은 가관이었다.
랍스터, 한우 스테이크, 고급 술집들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연구원들은 구경도 못 해 봤다고 한다.
한 교수가 10인분씩 먹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내역들이다.
“그리고 이 용역 업체들 보십쇼. 학생들 말로는 다 대학원생들이 파견 나가서 한 일이랍니다. 근데 한 교수는 이걸 마치 고용한 업체들인 것처럼 비용 처리를 시켜 버렸어요.”
“그 돈을 다 뒤로 찼다는 거야?”
“네. 이거 완전 선숩니다.”
오 과장은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뒤적거리다 끙- 하니 앓는 소리를 냈다.
이놈을 말릴 만한 근거를 찾아보려 했는데, 도리어 기가 찰 지경이었다.
“문제 된 네 개 대학도 입건시키고, 관련자 소환하겠습니다.”
“이 팀장 이런 말 뭣하지만 다른 방법 없냐. 난 그래도 내부고발은 확보하고 움직이고 싶다.”
“사실 전 내부고발 확보는 거의 포기한 상탭니다.”
“뭐?”
“대학원생들 전부 다 교수한테 목줄 잡힌 사람들인데, 이걸 바라는 건 저희 욕심일 수도 있죠.”
“그럼 입건은 왜 해. 어차피 증거 안 나올 거.”
“어쩌면 들러리 대학에서 증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오 과장의 눈빛이 번쩍였다.
“설마 다른 대학 흔들겠다는 건가?”
“네. 타 대학들이야 한 교수와 수평적 관계니 눈치 덜 볼 겁니다. 만약 내부고발이 나온다면 이들 중에서 나올 공산이 큽니다.”
준철은 아직도 이민석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당한 게 가장 많지만 그래도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사정.
어쩌면 이민석은 영원히 한 교수의 편을 들 수도 있다. 누구보다 절실한 사람이기에.
“놈들이 쉽게 무너지겠어? 결국 자기 비리 드러내는 일인데.”
“분위기 이상해지면 제일 먼저 배신할 사람들입니다. 대학원생 설득하는 것보단 수월할 겁니다.”
오 과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놨다.
사실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눈이 돌아간 대학원생들은 이미 대자보 게시를 예고했고, 끝장 투쟁을 벌이겠다 해왔다.
공정위가 어설프게 손 뗐다 문제가 커지면 직무유기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 그럼 기소해 봐.”
준철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최소 사나흘 정도는 끌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즉답을 받았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 아까 네가 말한 그 보험들 있지.”
“예.”
“담합 못 잡을 것 같으면 그 횡령이라도 들춰내서 제대로 묻어. 한 가지만 강조하자면, 이런 사건은 절대 소득 없이 끝나선 안 돼.”
“물론입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준철은 황송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자리를 벗어나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과장님이 좀 달라지신 것 같다. 보통 이런 문제에 즉답을 해 주는 사람도 아니고, 제대로 묻어(?)란 말도 잘 안 하시는 분인데.
‘흠……’
신중한 건 여전한데 그래도 뭔가 좀 호의적으로 변한 것 같다.
기분 탓이겠지.
***
오 과장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입건 처리가 곧 완료되었다.
공정위는 이 문제를 검찰에 기소했고, 곧 다섯 개의 대학이 입건 처리되었다.
학계에서도 연구비 부풀리기 논란은 늘 끊임없이 있어 왔지만 주요 대학들이 입찰 담합으로 기소된 사례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
“…….”
한자리에 모인 주요 대학 네 곳은 말없이 눈치만 살폈다.
처음부터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업이었다. 청운대가 단독 입찰하면 무산되니 이름 한 번 빌려줬고 그 대가로 떡값 몇 푼 챙긴 게 전부다.
물론 한 교수가 프로젝트를 따낼 때 떡값도 연구비에 포함시켰겠지만, 그 정도야 학계에서 만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관례를 문제 삼으면 사건이 얼마나 커질지 안다. 입건은 곧 소환이 되고 구속으로 이어질 것이다.
모두들 초조한 얼굴로 물만 넘길 때 느지막이 한 교수가 식당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학교에서 처리할 문제가 많아서.”
씻지도 못한 그의 얼굴이 현 상황을 모두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사태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먼저 결례를 끼쳐 죄송하다는…….”
“한 교수.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얘기를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옆에 있던 교수가 말했다.
“그 친구들 논문 다 돌려주시지요.”
“무슨 말씀인지…….”
“우리라곤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겠소. 대학원생들이 공익을 위해 신고했다 생각하지 않아요. 한 교수가 실수한 부분이 있으니, 그 친구들도 악에 받쳐 싸우는 거겠지.”
“홍 교수님 말이 맞습니다. 이게 웬 망신이요, 얼른 사태 수습해야지.”
한 교수는 시큰둥한 얼굴로 시선을 외면했다.
“당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이봐요, 한 교수님!”
“난 내 학생들한테 딱히 실수한 부분 없습니다. 뭐 연구비 횡령, 담합 문제도 업계 사람 다 하는 거, 재수 없이 내가 걸렸을 뿐이고.”
“지금 그게 사람 불러 놓고 할 소리요?”
“제가 오늘 모신 건 조심하잔 당부를 드리기 위해서지, 실수를 지적해 달라 모신 게 아닙니다.”
교수들은 사색이 됐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직까지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공정위한테 먹히겠소? 이미 우릴 입건까지 했는데.”
“그럼 이제 와 빠져나갈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그건…….”
“물론 처음은 나와 제자들의 감정싸움으로 시작됐지요. 한데 이 상태에선 돌이킬 수 없어요. 공정위는 담합 정황 더 조사할 거요.”
그것 또한 맞는 말이었다.
들러리를 서 준 순간 한배를 탄 것이었으니.
“……그럼 우린 어쩌라는 거요.”
“입조심합시다. 서로를 위해.”
“되겠습니까. 공정위가 저렇게 움직이는 건 분명 확실한 증거가 나와서 저런 걸 텐데.”
한 교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이라면 염려 마십쇼. 아직 아무것도 파악한 게 없으니.”
“뭐?”
“전 오늘 소환돼서 취조까지 받았습니다. 한데 계속 유도신문만 해 댈 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더군요.”
“지금은 그래도 내부고발자 나오면 달라질 거요.”
“우리 말곤 나올 내부고발자가 없습니다. 설마 제 밑에 있는 놈이 절 배신하겠습니까.”
교수들도 이 말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대학원생들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 비슷한 문제로 징계위까지 가 봤습니다. 한데 무사히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
“잠깐 시끄럽고 말 문제예요. 다만 여러모로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한 교수가 고개를 푹 숙이자 이들은 바삐 눈빛을 움직였다.
정말 이대로 끝날 수 있을까?
여기 있는 사람들만 입을 다물면?
“…….”
“…….”
아무런 확신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