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내부자 (3)
[한명석 교수를 규탄합니다!]이튿날.
예고했던 대로 대자보 게시가 강행되었다.
석박사 원생들이 한명석 교수를 공개 저격한 것이다.
절대적인 ‘을’들이 이름까지 내걸며 싸우는 건 학업을 포기하겠단 뜻과 다름없다. 전례 없는 대자보가 게시되자 청운대는 중앙도서관부터 정문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다음은 연구비 횡령 의혹입니다.
저희 연구팀 경비 내역엔 수많은 용역 업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 이 작업엔 대부분 대학원생들이 투입되었습니다.
안 쓴 외부 용역을 고용한 것처럼 포장한 저의가 무엇인지요.
저희는 현장실습이란 미명하에 최소한의 노무비도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수차례나 윤리위원회에 제기해 왔으나 번번이 묵살당해 왔습니다. 심지어 한 교수님께선 비슷한 전력으로 과거에 징계위에 회부된 적 있으나, 엄중경고라는 납득할 수
없는 조치로 사안이 무산되었습니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이건 비단 대학가에 만연한 연구비 부풀리기 문제가 아닙니다.
지도교수가 마음만 먹으면 대학원생들을 머슴처럼 부리고, 연구 실적도 뺏을 수 있으며, 연구비도 제멋대로 쓸 수 있는 절대 권력에 대한 비판입니다.
고심 끝에 저희는 이 문제를 공정위에 신고하였고, 현재 관련 대학들을 모두 입건 처리되었습니다.
하여 저희 일동은 마지막으로 청운대 윤리위원회에 진상조사를 요구합니다.
투명한 연구비 내역과 대학원생들의 빼앗긴 연구 실적을 명명백백히 밝혀 주십시오.』
“서명 한 번만 해 주세요!”
“여러분들의 관심이 저희들에겐 큰 힘이 됩니다!”
“무너진 연구 윤리를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보자들은 도서관 앞에서 좌판을 깔고 촉구 성명을 받았다.
수많은 학생이 기꺼이 이름을 올리며 지지를 밝혔다.
이틀 만에 1만 성명을 돌파하자 청운대 커뮤니티도 들끓었다.
-한마디로 열정페이라는 거네?
용역 고용했으면 돈 나가는데, 그걸 대학원생들한테 짬 때렸단 거지?
⌞ㅇ.ㅇ 그렇게 아낀 돈은 교수 뒷주머니로 가고.
-갑자기 내 지도교수가 악마로 보인다.
졸업할 때 되니까 계속 대학원 권유하던데, 목적이 이거였어?
⌞ㅊㅋㅊㅋ 너 리포트 좀 썼나 보다. 논문 대필로 제격인가 보네.
-환경공학 재학생인데 난 솔직히 잘 안 믿긴다.
한명석 교수님이 내 지도교수님이었거든. 근데 장학금 잘 챙겨 주고 논문 첨삭 잘해 주시고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ㅋㅋㅋㅋ 모든 교수가 다 학부생한텐 친절해. 대학원 가면 달라지는 거지.
-근데 주요 대학 네 곳이 입찰 담합했다는 게 말이 되냐?
다 명문 대학들인데 진짜 이런 짓을 했다고?
⌞친구야…… 대학 교수들은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ㅠ
⌞이 정도면 약과다. 솔직히 공정위에서 입건 처리했다는 건 뭐 하나 켕기는 게 있단 얘기.
캠퍼스가 완전 전쟁터로 변했을 때, 준철은 절차대로 각 대학들을 한자리에 소환했다.
***
“그쯤 하시구려. 온 대학가를 다 벌집으로 만드셨구만.”
한자리에 모인 들러리 대학교의 첫마디였다.
“청운대 대자보 때문에 애먼 우리까지 피해를 입고 있소.”
“공정위는 이 피해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 거요.”
기가 차서 한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백하러 오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자백? 무슨 자백?”
“한 교수가 이 프로젝트 따낼 때 들러리 서 줬잖아요.”
“그거 증거는 있는 얘기요?”
“한 교수가 10억에 낙찰받았습니다. 근데 돈이 어찌나 남는지 전부 다 이상한 대로 경비 처리 시켰어요. 다른 대학에선 왜 11, 12억씩 부른 겁니까.”
“그게 뭔 대수라고! 우리 셈법엔 그 돈이 맞았으니까!”
“아니 그럼 정부 주관 사업에서 떨어지면 전부 들러리야? 그럴 거면 공개 입찰을 뭐 하러 해!”
준철은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이 예상한 것보다 더 최악으로 돌아간다.
뚜렷한 증거가 남지 않은 이번 담합은, 이렇게 무작정 우기기만 해도 수사처에 불리했다.
이들에게 사과와 반성을 바라는 건 처음부터 너무 큰 기대였을까.
‘하아…….’
사실 사안이 이쯤 되면 놈들도 불안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주가 게시판이 지금처럼 불붙으면 회사는 대번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 알고 있던 상식이 여기선 적용이 되지 않았다.
대학원생들이 아무리 불붙어도 결국 자기들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단 뜻이리라.
“보아하니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건 진행시킨 것 같구먼.”
“…….”
“젊은 팀장님. 우리 죄가 확실한 거 같으면 무슨 증거라도 가져와 봐요. 뭐 하나 걸리는 건 있으니까 일을 이 지경까지 키운 게 아니요.”
자신감 넘치는 이들의 목소리가 모든 걸 말해 준다.
대학들끼린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지금이라도 자백하시면…….”
“아, 왜 자꾸 없는 죄를 자백하래요!”
“우리도 더는 못 참아. 해당 사태가 무혐의로 끝나면 우리도 공정위를 검찰에 고발할 거요.”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할 때였다.
문득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도착했다.
취조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 그냥 끊으려 했는데,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전화 좀.”
그렇게 준철이 나가자 교수들이 쑥덕댔다.
“한 교수 말이 맞네. 진짜 잡은 증거 하나 없이 움직였구먼.”
“딱 봐도 애송이야. 변호사 괜히 오라 했어.”
“쉿! 그래도 취조실인데 말조심해.”
“걱정 마. 변호사 오기 전까진 서로 녹취 안 하기로 했잖아.”
“만약 녹취 돌렸으면 우리야 더 좋지. 이거 불법 녹취로 바로 걸어 버릴 수 있는데.”
“생각해 보니 진짜 괘씸해. 뭐 절차적 하자 이런 거 없나?”
“없으면 무고라도 걸자고. 우리가 당한 망신 그 이상은 갚아 줘야지!”
참을 수가 없었다.
청운대 대자보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사방에서 공격받지 않았나.
이 사태를 잘 넘기는 건 이젠 걱정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고초를 겪게 한 이놈을 아예 이 바닥에서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작당을 모의하고 있을 때 준철이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들어섰다.
“그럼 모두들 입찰 담합 혐의 인정 안 하시는 거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소?”
“그럼 취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준철이 짐을 주섬주섬 챙기자 한 사내가 팔목을 잡았다.
“뭐? 여기서 끝이라고?”
“네. 변호사 오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무고한 사람 불러다 갖은 고초를 겪게 해 놓고 이게 끝?”
“오늘은 끝이라는 겁니다. 나중에 진술 번복하지 마세요.”
“뭐?”
“절대로 저희한테 자백하지 마시라고요. 자백한다 해도 이제 정상참작은 없을 겁니다.”
준철은 허겁지겁 자료를 챙겨서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민석이 초조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넥타이를 가다듬고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한동안 준철을 노려봤다.
“당신들 땜에 다 망쳤어요…… 알아요?”
“…….”
“이 정도는 다른 교수도 다 하는 일이라고…… 근데 당신들 때문에…… 지금 내 입장이 어떤지 알아요?”
힘없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하지만 따지러 온 것 같진 않아 보인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고, 말투는 거의 체념한 듯 보였다.
준철은 그의 한풀이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넋두리가 다 끝났을 때 조심히 입을 열었다.
“민석 씨도 피해자잖아요. 그렇죠?”
“나는…….”
“어려울 겁니다. 현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건.”
“…….”
“저흰 지금 입찰사로 참여했던 대학들 전부 소환했어요. 곧 자백 나올 겁니다.”
이민석은 체념한 얼굴이다.
교내에 대자보가 게시되며 이미 내막이 다 퍼진 상태였다. 한 교수의 비리는 물론, 중간에서 이를 덮어 주려 했던 이민석의 시도도 어느새 파다하게 퍼졌다.
커뮤니티에선 곧 실명까지 거론되었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단 비난이 솟구쳤다.
마지막이란 위안으로 견뎌 내기엔 너무 큰 산이었다.
그런 마당에 공정위가 너무 확고한 처벌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이 그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 공정위 말대로 담합이 밝혀지면 한 교수의 추락은 자명한 일이다. 어쩌면 한 교수와 함께 순장당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알기론 민석 씨는 가장 오래 일하면서 부조리도 많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긴 시간이 흘렀고 결국 그의 뺨에 눈물 한 줄이 흘렀다.
“나도…… 무사치 못하겠죠.”
“네?”
“한 교수가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박사 학위 통과시켜 주겠다 했거든요. 만약 한 교수가 무너지면…… 나도 무사치 못하겠죠.”
준철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무슨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빠져나오는 게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학생들이 이렇게 분노하는데 청운대도 이번 사안 쉬이 못 넘겨요.”
“…….”
“담합을 못 밝혀도 횡령은 밝혀낼 겁니다. 그럼 중간에서 무마하려 했던 민석 씨에게도 큰 피해가 올 겁니다.”
이민석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다 한 서류를 건넸다.
“담합…… 했습니다.”
준철의 눈이 커졌다.
“장 대표가 나랑 상의하면서 다른 대학이 얼마에 입찰할 건지 알려 줬거든요. 이게 그 기록입니다.
준철은 서둘러 서류를 살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메신저에는 들러리 대학들의 입찰 가격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당연히 횡령도 했습니다. 사실 한 교수가 들러리 대학에 돌릴 떡값 마련하려고 1억가량 현금화시켰거든요.”
“혹시…….”
“네. 제가 그 과정에서 돈세탁 도왔습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처벌받겠죠.”
“강압 때문에 그러셨죠?”
“……예?”
“한 교수가 이거 안 하면 논문 탈락시켜 버리겠다, 업계에서 매장시켜 버리겠다 이런 협박 했죠?”
“그런 협박은 없었…….”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그랬을 겁니다.”
이민석이 눈만 껌뻑거리자 준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직접적인 말은 안 들었어도, 그런 배경 때문에 거절 못 한 거 아니에요.”
“……아, 예.”
“꼭 그렇게만 말하세요. 위계에 의한 협박, 아니 그냥 거부할 수 없는 지시가 있었다고.”
법은 말장난이다.
협박이란 단어는 책임질 게 너무 많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지시 같은 완곡한 단어는 뜻도 전달되고 책임질 일도 없다.
“그리고 이건 민석 씨에게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
“저희는 이 문제 윤리위원회에 제기하고, 그간 뺏겼던 논문 다 주인 찾아 줄 거거든요. 민석 씨 논문도 반드시 찾아가세요.”
준철은 그쯤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조실에서 뻔뻔하게 굴던 교수들 얼굴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마음 같아선 돌아가는 즉시 재소환해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