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징계위원회 (3)
-파면 공고-
안녕하십니까, 청운대 가족 여러분.
최근 불거진 한명석 교수의 비리·비위 행위와 관련하여, 윤리위원회의 결정을 알리고자 합니다.
먼저 제기된 연구비 횡령 의혹입니다.
산학협력단이 맡게 된 [농촌 지역 오염원 연구]에서 다수의 유령 업체 고용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당한 노무비 지급 없이 대학원생들을 동원한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윤리위는 이와 관련, 한명석 교수에게 소명을 요구하였지만 당사자의 불출석으로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음은 논문의 원저자 논란입니다.
대자보에 게시된 내용대로 현재 다수의 학생들이 논문 ‘저자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첨삭·번역 등의 사소한 지도로 1저자를 뺏기거나, 단독 논문을 뺏겼다는 것이 학생 측
주장이었습니다.
윤리위는 즉각 관련 전문가들을 소집하였고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약식 조사에서 학생 측 주장을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했습니다만, 논문 기여도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 아직은 과실이 있다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관련 내용은 더욱 심층 재검토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찰 담합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한명석 교수의 산학협력팀은 공정위로부터 담합 조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환경부가 공고한 [농촌 지역 오염원 연구]에 타 대학과 조직적으로 경합을 벌였단 의혹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내용은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낙찰사인 저희 청운대엔 5천만 원이 부과되었습니다.
저희 청운대는 이 과징금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며, 이 과실의 전적인 책임은 주도자인 한명석 교수에게 있다 판단하였습니다.
하여 이 내용들을 종합해 판단한 바.
한명석 교수의 파면이 결정되었음을 알립니다.
***
한 교수의 파면 공고는 청운대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철밥통으로 소문난 교수 사회의 예상을 뛰어넘는 중징계였다.
총학은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는 첫 걸음’이라며 징계위 결정에 지지를 보냈지만. 일각에선 대학원생들의 잦은 내부 고발로 교권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단 우려도 나왔다.
“이거 생각보다 반론도 만만치 않은데요?”
“막상 파면이 결정되니까 교수 사회도 꿈틀하는 것 같습니다.”
엇갈린 반응을 두고 공정위의 고민도 짙어졌다.
교수들의 연구비 횡령 문제는 암암리에 있어 왔던 관행이다. 한 교수가 조금 심했을 뿐 다른 업계에도 비일비재했다.
“교직 사회는 이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양새입니다.”
“어떡할까요, 팀장님.”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한 교수의 비리를 예정대로 모두 기소할 것인지를 묻는 말이다.
이 문제엔 준철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별건수사.
이건 주로 본수사가 잘 안 풀릴 때 쓰는 조커 카드다. 지금처럼 입찰 담합이 다 밝혀진 상황에선 굳이 만지작댈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밝혀진 범죄를 어떻게 자의적으로 덮어요. 그렇다고 지금 한 교수가 석고대죄하는 상황도 아니고,”
“맞아. 그 사람 징계위 출석 안 한 거 보면 딱 답 나옵니다.”
“그것도 맞지만 너무 몰아붙여서 좋을 건 없어. 파면 결정과 별개로, 청운대도 자대 교수가 큰 처벌 받는 건 원하지 않을걸.”
반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준철은 한동안 설전을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한 교수 다시 만나 보겠습니다.”
***
재소환된 한 교수는 얼굴이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담합을 모의했던 대학들에겐 배신을 당하고, 자대에선 파면까지 당했으니 심정이 말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이건 아직 서막에 불과하지 않나.
청운대 윤리위원회는 논문 재심사 TF를 열 것이라 발표했다. 하루아침에 수질 업계 최고 권위자에서 갑질 교수로 전락했으니 세상이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직 내게 더 할 말이 남았나.”
“왜 윤리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교수는 힘없이 웃었다.
“어차피 당신들끼리 차고 친 징계 심사 아니야. 내가 그 자리에서 조림돌림까지 당해야 성이 풀리나?”
“참석했더라면 오늘 이 자리는 없었을 겁니다. 징계 수위도 서로 합의할 수 있었고요.”
“어설픈 동정은 됐으니 부른 이유나 말씀하시오.”
대화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준철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서류를 건넸다.
“별건수사 진행될 겁니다. 환경부한테 수주받은 사업 철회는 물론, 지금까지 횡령했던 돈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내 치부를 다 들춰내겠다? 그리하시오. 나야 뭐 이젠 잃을 것도 없는데.”
“그 전에 먼저 협상하실 마음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협상이란 단어에 그의 눈빛이 변했다.
“아시다시피 청운대 윤리위가 논문 재심사 TF를 꾸리겠다 했습니다. 근데 논문 기여도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 하더군요.”
“……그래서?”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기여도가 어느 정도인지 누구 보다 잘 알겠죠.”
“…….”
“학생들 논문 돌려주고 그만 교단 떠나세요. 이게 저희가 드리는 마지막 기횝니다.”
한 교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연구 방향 지도라는 명목하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빼앗았나.
번역 한 번 해 줬다고 1저자를 꿰찬 논문도 있었다. 취업을 목적으로 온 대학원생에겐 기업 추천서를 대가로 논문을 양도 받기도 했다.
이걸 다 인정하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다.
“대단히 큰 착각들을 하는군. 자기 논문이 무슨 수질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줄 아나 보지?”
그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꿈 깨. 대한민국에 수천 개가 넘는 강 중 하나 잡아서 수질 상태 조사한 게 전부야.”
“그 작은 연구 성과들이 모여 큰 국책 사업을 결정하는 거 아닙니까.”
“뭐? 당신이 뭘 알아?”
“소싯적에 댐 보수공사 많이 나가 봤죠. 참 재밌는 업계더군요. 무슨 물고기 하나 발견되면 수십억짜리 공사가 중단되기 일쑤였으니.”
수질 업계는 김성균도 일가견이 있는 분야였다.
과거엔 미친놈들이라 부르지 않았나. 천연기념물이 발견되면 수십억짜리 공사가 무산되고, 때론 물고기 하나 때문에 수억의 추가 공사비가 들기도 하였다. 아파트 공사하다 문화재 발견되는
것 다음으로 무서운 게 이 천연기념물들이다.
그래서 더 잘 안다.
학생들의 연구 성과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어디서 미친 소리를!”
“긴 말 안 하겠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논문 자진 철회하고 본 주인한테 돌려주세요. 다음엔 소환이 아니라 영장이 나올 겁니다.”
그쯤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사무실로 복귀하는데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싸우면 우리도 실형 떨어질 때까지 싸울 거란 얘기를 꼭 했어야 하는데.
“후우…….”
말하지 않아도 그건 전달됐으려나?
***
그로부터 보름 뒤.
청운대에서 작은 승전보가 들려왔다.
“정말입니까?”
“응. 논문 세 편을 자진 철회했더구먼. 물론 아직 더 많은 논문이 남았지만 첫 시작은 순조롭네.”
한 교수가 논문 세 편을 자진 철회하며, 저자권을 반납한 것이다.
예기치 못한 진척에 신 교수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이게 파면 결정에 승복했단 뜻은 아니야. 뒤로는 우리한테 이의 제기 신청했고, 곧 법정 싸움까지 갈 것 같네.”
“……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엔 동의 못 한다는 뜻인가요.”
“그래.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꼴을 보아하니 파면 문제는 3심까지 갈 성싶네.”
기나긴 법정 공방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신 교수의 얼굴은 밝았다.
한 교수가 자진 철회한 논문은 모두 제보자 학생들의 논문이었다. 하지만 참고 있던 제보자가 비단 이들뿐이겠나? 이 건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파면 결정에 힘이 실리게 된다.
“피곤해지시겠군요.”
“그놈도 안 될 걸 알면서 마지막 발악하는 거야. 그것밖엔 방법이 없으니.”
그리 말하며 슬쩍 준철에게 웃음을 보였다.
“차라리 이런 종류의 피곤이 나아. 기준도 없는 논문 기여도보단 이런 싸움이 낫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별건수사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사실 한 교수 반응을 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근데 논문 자진 철회했으니 문제 삼지 않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신 교수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준철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맙네. 자네는 마뜩지 않겠지만 사실 교수 사회에서도 많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어. 학교 위상 때문에 한 교수 처벌을 적극 주장 못 했지.”
“예. 이해합니다.”
“파면 결정은 걱정 말게. 놈이 아무리 발악해도 우린 결정 번복 안 할 거야.”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되었다.
본래 한쪽이 막무가내로 나오면 다른 쪽이 못 이기는 척 들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파면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신 교수도 고집은 어디 가서 질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이 원칙은
지킬 것이다.
“근데 한 교수가 파면되면 대학원생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놈 말고도 실력 있는 교수들은 많아. 일단 부교수, 조교수들이 남은 학생들 지도하기로 했네.”
“그분들은 믿을 만…….”
“예끼! 뭐 청운대가 비리 온상인 줄 알아. 이번 사태 겪으면서 혼쭐 제대로 났어. 다들 경각심 가지면서 지도할 거야.”
두 사람은 껄껄 웃었다.
서로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정말 일이 끝나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 팀장. 혹시 자네가 학생들 전화 안 받았나?”
“아, 예.”
“왜 그랬어?”
“뭐 사태도 다 정리됐고, 일도 좋게 끝났는데 볼 필요 있나요.”
“사람이 그래도 그게 아니지. 자네한테 특별히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대. 내가 한번 자리 마련할까?”
“괜찮습니다. 그냥 할 일 했습니다.”
몇 번 더 권유해 봤지만 도통 설득될 것 같지 않았다.
“제가 한 일이 얼마나 있다고요. 교수님께서 징계위 열어 주신 덕분입니다.”
신 교수도 설득을 그만두었다.
“그래, 좋은 일 해 줘서 고맙고 다음엔 좀 좋은 자리에서 보지.”
“네,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사무실로 복귀할 때.
핸드폰이 재난 문자 온 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열어 보니 학생들에게서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흐뭇한 얼굴로 핸드폰 넣을 때 한 사람의 메시지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민석입니다. 10년 동안 뺏겼던 제 논문…… 팀장님 덕분에 찾게 됐습니다. 꼭 좀 뵙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