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직무교육
“진짜로 별건수사 안 할 거냐?”
“네.”
“웬일이야. 이놈이 횡령한 연구비 탈탈 털면 집행유예도 무리 없겠는데.”
“어차피 실형 아니면 하나 마나 한 처벌입니다. 교수직 파면으로 충분한 처벌은 했다 봅니다.”
“이거 원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무슨 꿍꿍이야?”
“정말 이게 전부입니다. 한 교수가 논문 자진 철회한 점, 정상참작하겠습니다.”
청운대가 과징금에 승복하며 사건은 무사히 마무리되었지만, 오 과장은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공정위가 재미 볼 수 있는 대목 아닌가?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횡령, 허 위하청 비리는 훌륭한 전리품들이다. 한 교수의 추잡한 만행이 증명될수록 조사 실적도 커진다.
하지만 놈은 막판에 기소를 포기해 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논문 기여도는 법원이 판단하기 어려운 애매한 문제다. 학생들의 처지를 감안한 것이겠지.
평소 실적 욕심 없는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리 이상한 결심도 아니었다.
“나라면 뒤통수쳤다.”
“예?”
“한 교수 엉뚱한 짓 한다며. 죄는 인정하는데 파면 결정엔 승복 안 한다고? 이런 놈들 뭐 예쁘다고 정상참작을 그대로 들어 줘.”
말은 그리했지만 오 과장은 이미 서류를 덮었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 결과에 흡족한 얼굴이었다.
“농담한 거니까 괜히 이상한 생각은 말고.”
“네. 흐흐.”
“고생했다. 큰 사건 접수된 거 없어서 당분간 일 없을 거야. 4월 초순에 직무교육 있는 건 들었나?”
“네. 본청에서 가상화폐 관련 교육을 한다고.”
“요즘은 이게 아주 유행인가 봐. 종합국에도 피해 사례가 종종 접수되네.”
준철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조심히 물었다.
“과장님. 혹시 또…….”
“걱정하지 마. 괜히 또 팀장들 뽑아서 발표시키고 그런 자리 아니니까. 그냥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한번 듣는 자리라 생각해.”
준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수, 교육, 발표. 이제 이런 단어들은 듣기만 해도 경기가 일어날 것 같다.
특허 관련 발표할 땐 갑자기 위원장님이 앉아 계시고, 해외연수에선 연방거래위원장이 앉아 있지 않았나.
졸지만 않으면 되는 교육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아니다. 걱정은 내가 해야지. 너 또 괜히 교육 간사한테 이것저것 물어봐서 눈총받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저도 입 다물 땐 잘 다 뭅니다.”
“혹시 모르니까 넌 맨 뒷줄에 앉아. 이거 원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알겠습니다. 꼭 뒷줄에 앉겠습니다.”
오 과장은 흐흐 웃으며 서류를 돌려줬다.
“고생했다. 이 팀장.”
***
큰 사건 없을 거란 오 과장 말대로 3월은 순탄하게 지나갔다. 공정위에 접수된 제보 자료를 검토하는 게 일의 전부였다.
다만 4월의 여의도는 정말이지 일에 집중하기 힘든 계절이었다.
여의도 전역에 퍼진 벚꽃들이 사람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 놓지 않겠나.
한강 주변은 나들이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불꽃놀이가 예정된 날이면 주중 오후부터 일대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침 일도 없는 종합팀은 한산하게 이 여유를 즐겼다.
때론 취하기도 했다.
혼란을 틈타 점심에 반주도 마셨고, 미세먼지가 없는 날엔 아예 한강 근처로 피크닉도 갔다.
그리 보면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크게 다를 것 없다. 신입사원 때 대리들 따라서 참 사우나 많이 갔었는데.
-펑~ 펑~ 펑!
그렇게 벚꽃이 모두 시들었을 무렵.
여의도에선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불꽃 축제가 열렸고, 어느 때보다 많은 가족 관광객들이 찾았다.
“에휴. 좋은 시절 다 갔네요. 내일 직무교육 이후엔 다시 바빠질 것 같은데.”
“그러게요.”
“팀장님은 뭐 약속 없으세요? 저런 건 애인이랑 같이 봐야 즐거운데. 흐흐.”
“글쎄요…… 먼저 들어가세요. 전 세미나 교육 자료나 좀 보다 들어가겠습니다.”
혼자 남은 준철은 멍한 얼굴로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사실 불꽃놀이보다 그걸 보는 가족 관광객들에게 더 눈이 가는 밤이었다.
‘…….’
만약 그렇게 살지 않았더라면.
저 불꽃놀이를 함께 감상할 수 있었을까?
‘…….’
최근에 너무 여유로운 일상이 계속됐나 보다. 차라리 일에 치여 사는 일상이 나은 것 같다.
설령 그게 죄책감으로부터의 도피일지라도.
***
[가상화폐의 현실과 미래 전망] -사례1. 코인 거래소 먹튀 사건-사례2. 불법 총판
“오늘 교육 자료가 무지하게 살벌하네요.”
“그러게. 요즘 이쪽 업계 왜 이렇게 어수선하냐.”
“4년 새 시장이 200배나 커졌답니다. 요즘엔 공정위에 피해 신고도 엄청 많아졌대요.”
“옌장. 이러다가 조만간에 뭐 하나 맡는 거 아니야?”
“에휴- 그때 몇 개 사 뒀으면 이런 고민 안 해도 되는데.”
직무교육 당일.
벚꽃놀이의 여운이 아쉬웠는지 본청에서 큰 축제를 열어 주었다. 무시무시한 주제를 암시한 교육은 직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직무교육은 분기마다 있는 행사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거라 들었는데 세미나 주제를 보면 꼭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어, 이 팀장 왔네. 자리 맡아 놨다. 여기 앉아.”
교육관에 도착하니 오 과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설마 제가 앞에 앉을까 봐 와 계신 겁니까.”
“겸사겸사. 저 앞엔 특수거래과가 앉아야 돼. 교육 자료 읽어 봤어?”
“네. 사례 중심으로 나와 있더군요. 근데 과장님.”
준철은 뜸을 들이다 물었다.
“얼핏 보면 이거 다 금감원 업무 같던데…… 왜 저희를 교육시키는 겁니까?”
“감시 사각지대가 심하다더군.”
“사각지대요?”
“불법 총판들이 전부 뒷광고 때려서 회원들 모았잖아. 코인 거래소 약관도 다 엉망이고.”
“아…….”
“그리고 이놈들 영업 방식이 다 불법 다단계야. 총판은 회원들 다 사설 거래소로 유인하고, 거래소는 날라 버리고 아주 개판이지. 변종 범죄가 많아져서 우리도 교육받을 필요는 있어.
모르는 거 있음 다 나한테 물어봐.”
오 과장은 무척 친절하고 세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예측을 불허하는 놈이다. 본교육 때 이상한 질문을 못 하게 막아야 한다.
“뭐 변종 화폐나 유사 사례 궁금한 거 없어?”
“네. 없습니다.”
“또 내 뒤통수치지 말고 그냥 다 물어봐.”
“과장님. 저 진짜 이런 분야는 관심 없습니다. 걱정 마십쇼.”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을 때.
교육 간사가 등장하며 교육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안녕하십니까. 교육 간사 박수호입니다.
무시무시한 주제를 예고했던 교육이 시작되었다.
***
“가장 큰 문제점은 시장 규모가 너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도가 이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고리타분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직무교육은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정도가 아니라 PPT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가상화폐가 급성장하며 이 업계는 사실상 무법지대라고 한다. 눈 뜨고 일어나면 새로운 화폐가 생겨나 있고, 그다음 날엔 그게 또 없어지기도 한단다.
규제가 없으니 통정거래, 선취매매, 작전거래 등 감히 주식시장에선 구경도 못 해 볼 범죄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왜곡된 정보들이 전부 스트리머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겁니다.”
PPT가 넘어갔다.
“이게 저희가 적발한 가장 최근의 사건입니다. 인터넷 방송인 A씨가 한 사설 거래소를 홍보했어요. 하지만 이 사설 거래소는 그래프 업체였습니다. 거래 체결 내역 등이 모두 다
거짓이었죠.”
고객은 계좌에 입금하고, 일반 주식거래처럼 거래를 한다.
하지만 그래프만 보일 뿐 사실 거래되는 내역은 없다.
“보통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돈을 잃는단 점을 악용해 벌인 행각입니다. 고객이 가진 가상화폐가 올랐다면 당연히 먹튀로 이어지겠죠.”
그러고 보니 한 뉴스가 떠올랐다.
미국판 로또인 슈퍼볼을 사 주겠다고 직구 사이트를 열었는데, 그게 실은 다 가짜 구매였지 않나.
어차피 될 확률보다 안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으니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다.
낯선 범죄가 주는 흥미에 준철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웬만한 범죄는 전생에 다 짓고 살았다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늘 발전하는 모양이다.
간사의 교육이 다 끝났을 땐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어려운 얘기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 사무소 직원들은 열의가 대단한 것 같군요. 한 분도 안 졸고 교육을 마친 건 처음입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흥미로운 시간이었는지 주변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불쑥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특수거래과 김민호 팀장입니다.”
쭈뼛쭈뼛 일어선 남자는 또래로 보였는데, 창백한 얼굴이 훤히 보일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가상화폐 말고 다른 디지털화폐 범죄 사례는 없습니까?”
“다른 디지털화폐라 함은?”
“이를테면 포인트 제휴 업체들이요. 최근엔 통신사 제휴 포인트처럼 혜택을 주는 업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고객들이 포인트를 사면 이를 현금처럼 쓸 수 있죠.”
“그와 관련한 사례는 없었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죠?”
“그럼 저희가 직권조사를 한번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네?”
“사실 이건 가상화폐보다 더 위험합니다. 코인은 투자의 개념이지만 포인트는 환금의 개념이거든요. 모두들 현금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현재 대부분의 포인트 업체들은 실체가 없고
수익원도 없습니다. 영업 방식이 완벽한 다단계입니다.”
사내의 말이 조금씩 거칠어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간사의 얼굴도 조금씩 일그러졌다.
“뭐…… 저희에게 건의를 주시는 건가요?”
“네. 실무진이 조사 기획을 올렸을 때 본청에서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상한 기업이란 걸 알면서도 손 놓고 있어야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법적 근거가 애매하다,
공정위 소관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교육 간사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냈지만 김민호는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다단계나 폰지 사기는 터질 때 크게 터집니다. 이에 이르기까지 증후는 잘 보이지 않고요. 본청에서 저희 실무진의 보고를 더 적극적으로 검토해 주십쇼.”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한마디로 본청한테 일 좀 제대로 하라 다그친 것 아닌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