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명백한 다단계
“이게 웬 개망신이야!”
직무교육이 끝난 직후.
특수거래과 팀장들은 줄집합을 당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더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네가 올린 기획안 허락 안 해 줬다고 이렇게 똥칠을 해?”
송 과장은 길길이 날뛰며 꼴뚜기를 노려봤다.
“김 팀장. 한 사람 때문에 부서 전체가 이런 망신을 당하는 게 맞아?”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건의였습니다.”
“뭐?”
“바이포인트…… 정말 실체가 없는 회삽니다. 수익원이 없는데 소비자들에게 퍼 주기만 해요. 이건 다단계입니다.”
김민호는 창백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송 과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교육 자료를 팽개쳤다.
“소비자한테 혜택을 안 주면 안 줬다고 지랄. 퍼 주면 퍼 줬다고 지랄. 공정위에서 일하니까 세상이 다 부당하게 보이지?”
“그게 아니라.”
“그럼 가상화폐는 어떻게 설명할래. 이것도 수익원 없어. 누가 지급 보증을 해 주는 것도 아니야. 근데 사람들은 못 사서 안달이네.”
“…….”
“김 팀장 잣대로 보면 이것도 다단계 아니야. 이거 수사해야 돼?”
김민호는 고개를 수그렸다.
바이포인트는 수익원이 없는 회사로 고객들에게 돈을 퍼 주는 업체였다. 신규 가입자를 끌어들여 기존 가입자에게 배당금을 주는 폰지사기와 너무 닮았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이보다 더한 기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적인 석학들도 가상화폐가 왜 오르는지 이유를 못 대는 세상이다. 아낌없이 퍼 주는 포인트 업체도 이런 세계관에선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다른 팀장들 생각은 어때. 우리 벌써 이 문제 가지고 세 번이나 회의했잖아.”
“……디지털 화폐 시장은 기존 시장 문법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당장에 수익원은 없지만, 고객을 먼저 확보한 후 수익 사업을 진행할 가능성이 크죠.”
“……문제가 있다고 볼 순 없습니다.”
동료 팀장들에게 확인사살을 당하자 김민호의 머리가 땅끝까지 처박혔다.
“김 팀장. 이게 우리 특수거래과의 결론이야. 나 혼자 네 기획안 묵살시킨 게 아니라 우리가 거듭된 회의 끝에 도달한 결론이 이거라고.”
“…….”
“같은 안건 가지고 세 번이나 회의에 부친 적 없다. 너는 왜 네 말 들어 달라면서 남의 말은 안 듣지?”
“한 번만…… 조사하게 해 주십쇼.”
“뭐?”
“제가 직접 바이포인트 대표 만나 보고 싶습니다. 회사 재무제표랑 질의 몇 개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또다시 엉뚱한 대답이 나왔을 때, 송 과장은 더 이상 분개하지 않았다.
말로는 설득할 수 없는 구제불능이다. 체념할 수밖에.
“우 팀장, 최 팀장. 바이포인트 자료 인계받아.”
“……예?”
“앞으로 바이포인트 전담 팀장은 두 사람이야. 다른 사람은 모두 손 뗀다.”
“과, 과장님.”
“그리고 김 팀장은 이번 주 안으로 시말서 가져와. 작년에 100억대 다단계 적발한다고 호들갑 떨다가 허탕 친 거 있지? 그때도 지금처럼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실패한 것 같은데.”
“그건…….”
“내 생각이 짧았다. 그때 징계위 회부하고 엄중하게 경고했어야 돼. 그때 매를 아낀 결과가 오늘인 것 같다.”
무어 항변할 새 없이 송 과장이 덧붙였다.
“모두 잘 들어. 몽둥이 하나 쥐고 있다고 막 휘두르면 그게 깡패 새끼지 경찰이겠냐.”
“…….”
“우리 조사권은 위험한 칼이야. 기업 조사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해. 이걸 어기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봐.”
송 과장의 말이 끝났을 땐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소한 정직(停職) 이상의 중징계가 떨어질 것임을 암시한 말이다.
***
“막판에 십년감수했다. 세상에나. 무슨 깡으로 본청에 그런 건의를 하지?”
“그러게요. 얘기 들어 보니까 원래 그 사람 특수거래과에서 꼴통으로 유명하대요.”
“꼴통?”
“네. 뭐 작년엔 100억대 다단계 업체 조사 들어갔다 허탕 쳤다나 뭐라나. 업무 스타일이 완전 모 아니면 도래요. 성공할 때 크게 성공하고, 실패할 때 크게 자빠지고.”
“듣기만 해도 피곤하네.”
직무교육의 여운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본청에게 도발적인 건의를 올렸던 김민호 팀장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행시 출신의 4년 차인 그는 진급에 목숨을 건 미친 사람이었다. 항상 큰 수사를 좋아하고 직진밖에 모른다고 한다.
“근데 대체 왜 저런데?”
“바이포인트라고 신종 업체가 있는데, 그게 조사 보류당했더랍니다.”
“그게 뭔데?”
“그냥 전형적인 디지털 화폐예요. 통신사 할인처럼 제휴 맺은 가맹점에 포인트를 쓸 수 있게 하는 곳인데, 그게 좀 수상했나 봐요.”
직무교육에서 들이받은 목적이 ‘공론화’였다면 확실히 성공한 건 맞다.
그의 기행으로 바이포인트란 업체가 공정위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이곳이 뭘 하는 회사며, 얼마나 사업이 커졌는지도.
“뭐…… 듣고 보니 다단계 냄새가 좀 나긴 나네. 수익 사업도 안 하는 업체가 고객들한테 어떻게 그리 퍼 줄 수 있어?”
“근데 요즘 이런 업체가 한두 갭니까. 그냥 적당히 세상이 달라졌구나 하고 이해해야지.”
“특수거래과도 같은 안건으로 세 번이나 회의를 했대요.”
“그럼 그놈이 잘못한 거 맞네. 회의에서 보류 결정 났으면 자기도 승복해야지.”
김민호에 대한 동정 여론은 없었다.
회의 결과도 수용 못 하는 독단적인 놈. 자기 출세를 위해 마구잡이로 들쑤시는 놈. 이것이 공정위 직원들의 냉혹한 평가였다.
“어, 과장님.”
“점심 먹고 복귀하는구먼?”
“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나야 팀장들이 사고 안 치면 매일 맛있게 먹지. 요새 큰일 없다고 벌써 얼굴 좋아졌네.”
얼굴만 좋아졌겠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불쑥 과장님을 만나도 부담스럽지가 않다. 이 평화가 얼마나 오래갈진 모르겠지만.
“요새 공정위 분위기 어수선하지?”
“네. 어딜 가도 그 얘기네요.”
“그 친구 때문에 특수거래과는 완전 비상 걸렸더라. 그 얘기 듣고 내가 이 팀장한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저한테요?”
“응. 딱 너랑 똑같은 캐릭터잖아. 해야겠다 싶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
“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흐흐. 그래. 우리 이 팀장은 기획안 보류됐다고 본청한테 고자질은 안 하지.”
어쩐지 앞으로도 그러지 말란 뜻으로 들린다.
“또 한번 맡은 수사는 어떻게든 수사 성과 내 오는 놈이고.”
“네…….”
“잘 부탁한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팀장한테 저격당하는 거 상상만 해도 끔찍해.”
“걱정 마십쇼, 과장님. 저 정말 그러진 않습니다.”
“그래. 들어가 봐.”
준철은 고개를 꼬박 숙이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사실 어지간하면 공정위 뒷소문에 신경 안 쓰려 했는데 도통 그럴 수가 없는 분위기다. 어딜 가든 그 문제의 김 팀장 얘기뿐이지 않나.
공정위 과장들은 초비상사태였다. 조사 보류된 사건을 전부 재검토하고 팀장들 달래기에 들어갔다. 두 번 다시 벌어져선 안 될 쿠데타다.
“일이나 하자.”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섰을 땐,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원들이 초점 잃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싶기도 잠시.
“아, 오셨군요.”
준철이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불쑥 일어났다.
“이, 이렇게 불쑥 찾아 봬서 죄송합니다. 전 특수거래과 김민호 팀장이라고 합니다.”
당황스러웠다.
귀한 분이 이 누추한 곳은 왜…….
“아, 예. 종합팀 이준철 팀장입니다.”
“다름 아니라 제가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여긴 좀 그렇고. 혹시 따로 뵐 수 있을까요.”
준철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반원들이 온갖 수신호를 보냈다.
‘절대 안 됩니다!’
‘저거 시한폭탄이에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이 팀장님.”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기엔 너무 절실한 얼굴이었다.
***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팀장님은 올해의 공정인상도 타셨다고요.”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2년 차 때 그 상 타는 건 결코 운이 아니에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무슨 용건인진 모르겠지만 부탁을 하러 온 게 틀림없다.
김민호는 장황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한껏 준철을 추켜세웠다. 본의 아니게 갑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칭찬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선배님. 그냥 편하게 말씀하십쇼. 저에게 하실 부탁이라도…….”
김민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지만 그도 이 자리가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도 안다.
그래도 선배라 불러 주는 그 한마디 호칭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뭐 제 사정은 다 아실 테니 그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업체가 하나 있어요. 혹시 아시나요?”
“바이포인트라고…… 얼핏 들었습니다.”
“대강 아시는군요. 이 바이포인트에 현금을 충전하면 제휴점에서 물건을 10-20%씩 싸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영업 방식이 아무리 봐도 다단계입니다. 이 회사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폰지사기가 의심된다는 건가?
“근데 우리 부서 사람들은 원래 요즘 이 업계가 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다 하네요.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이거 한 번만 검토해 주시고, 본인 생각은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준철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도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그렇게 주변 모두가 다 반대하는데 이렇게 나서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궁금한 부분이었다.
실적 욕심에 눈먼 팀장이라서?
아니다. 그런 부류들은 절대 이렇게 일 안 한다. 누가 봐도 될 것 같은 수사, 크게 터질 사건을 가져간다. 그런 부류들은 좋은 사건 배당받는 데 혈안이지, 절대 남들이 뜯어말리는
수사 진행시키려 안 한다.
“그냥 명백하니까요.”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너무 허무했다.
“범행 수법이 너무 단순해요. 근데 공정위, 금감원, 경찰, 검찰. 왜 안 나서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게 전부인가요?”
“또 하나 있죠. 이놈들 사세가 무섭게 불었어요. 처음엔 가입자가 200명도 되지 않았는데 불과 4년 만에 회원수 100만명, 운영금도 500억대가 넘어갔어요. 이 속도면 곧
1천억입니다.”
“…….”
“제가 좀 과장되게 말하면요. 이 기업 내일 당장, 아니 5분 뒤에 갑자기 부도 처리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이상할 게 없는 회사예요.”
그의 목소리에선 조바심이 느껴졌다.
“이 단순한 범행을 왜 아무도 안 나서는지, 정말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