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3
13화
담판 (2)
준철은 취조실에서 나와 담당 검사에게 모든 걸 설명했다.
검사는 신석준이 버티기에 들어간다는 건 알아들었지만, 뒷말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3심까지 오래 끌 거라고요?”
“예.”
“그걸 어떻게 압니까?”
“코앞에 증거 들이밀어도 모른대요. 아직도 하청 탓, 부하직원 탓입니다. 이건 3심까지 끌다가 여론 잠잠해지면 그때 제대로 붙겠다는 겁니다.”
그제야 담당 검사도 온전히 이해했다.
기업 소송은 늘 이런 식이다. 여론이 불리할 땐 납작 엎드리고, 잠잠해지면 절차 위배, 증거 불충분 같은 온갖 저열한 방식으로 자길 변호할 것이다.
“근데 좀 이상하네요. 대형 로펌에선 절대 저렇게 자문 안 해 줬을 텐데.”
“무슨 말씀이죠?”
“대한민국 최고 변호사들이 붙었을 텐데, 방식이 너무 촌스러워요. 다툴 여지가 없는데 계속 무의미한 시간을 끈달까.”
탈세, 비자금, 횡령 사건은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형량과 벌금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산업재해 은폐는 단순히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다. 3심까지 끌 필요가 없다. 판사의 주관이 끼어들지 못하는 영역이니까.
그래서 준철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신석준의 만행이 아무리 잘못되었어도 이건 집행유예로 끝날 사건 아닌가?
징역 1년짜리 집행유예나, 2년짜리 집행유예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불붙은 여론을 빨리 잠재우고 당국에 선처를 바라는 게 제일 현명하다.
“설마 진짜로 무죄를 주장하나?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대체 뭔지.”
준철이 미간을 짚으며 고민하자 담당 검사가 슬며시 웃었다.
“여기까진 말씀 안 드리려 했는데…… 눈치가 상당하시군요.”
“예?”
“사실 신석준이 출석하기 전에 변호사 먼저 만나 봤습니다. 근데 대형 로펌 사람이 아니더군요.”
준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성중공업 정도면 전관 변호사까지 쓸 수 있는데, 대형 로펌이 아니다?
“설마 개인 변호사 썼습니까?”
“예. 근데 그렇게 몸값 높은 변호사는 아닙니다.”
“아니 대성중공업에서 변호사 선임해 줬을 텐데 왜……?”
“선임을 안 해 준 것 같습니다. 사정을 모르겠지만 대성에서도 저 사람 정리하는 것 같아요.”
“아…….”
검사의 설명에 준철은 맥이 빠졌다.
등잔 밑이 제일 어둡다더니. 대성에서 신석준을 손절할 거란 생각을 왜 못 했을까!
‘아이고- 왜 저리 뻔뻔한가 했더니.’
그제야 신석준이 왜 말도 안 되는 걸 우기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제 놈은 끈 떨어진 원청 임원이다. 대성 그룹의 간판을 보며 참아 왔던 하청들이 이젠 어떤 폭로를 할지 모른다.
“진짜 제대로 물어뜯기겠군요.”
“네. 하청 사장들이 지금까지 했던 향응, 접대 모든 걸 다 폭로할 겁니다. 돈 찔러 준 거 있으면 그것도 나올걸요.”
“그럼 검사님. 이거 생각보다 오래 끌 수도 있겠습니다. 신석준이 계속 버티는 건 회사에 대한 불만도 있어 보이네요.”
딴에는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손절을 당하니 그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심정은 자신도 당해 봐서 더 잘 안다.
“근데 저쪽에서 눈치 싸움 하는 거 마냥 기다릴 순 없잖아요.”
“무슨 대책이 있으십니까?”
“최 회장 한번 소환하시죠. 그럼 저쪽도 정리하는 거 서두를 겁니다.”
검사가 아무리 증거 들이밀어도 안 먹힌다.
그놈 위에 있는 회장이 그만두라고 압박하는 게 빠르다.
“아…… 근데 최 회장 소환하기엔 명분이 너무 없는데요. 저희가 압수한 자료에 회장 결재는 없지 않았습니까?”
“만들면 되죠. 임원의 비리를 회장이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당사자가 계속 부정하는 걸로 보아 최종 결재까지 따로 있을 거 같다.”
“허허. 이거 좀 속 보이는데.”
“꼭 입건 처리를 안 해도 됩니다. 참고인으로 한번 부릅시다.”
소환의 진목적은 회장님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영감님을 검찰로 불러와 망신을 주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명분 하나 만들어 보죠.”
막힘없는 시원한 대화에 두 사람은 격 없이 웃었다.
소환장은 검사에게는 등기만 부치면 끝나는 간단한 서류지만, 그걸 받는 최 회장 머릿속엔 오만 생각이 다 들 것이다.
***
한 시간째 줄담배를 물고 있던 최대성 회장은 이윽고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김 비서 들어오라 그래. 지금 당장!”
인터폰까지 박살 내 버렸지만 분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굴지의 기업 대성 그룹이 매매 정지 사흘째다. 중공업 리스크가 전 계열사로 퍼져 이젠 대성 불매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
황급히 들어온 사내는 널브러진 인터폰과 재떨이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그때 공정위한테 압수당한 서류. 거기에 분명 내 결재는 없다 하지 않았어?”
“예, 회장님 명의의 결재는 없었습니다. 법무팀에서 수십 번 검토했습니다.”
“그럼 이따위 소환장이 왜 내게 오냔 말이야!”
최 회장이 소환장을 허공에 던지자 그가 착잡하게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사실…… 신석준 상무가 검찰에 협조하고 있지 않는다 합니다.”
“그놈이? 내가 분명 조속히 해결하라 했을 텐데?”
“아무래도 섭섭해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회사를 위한다고 한 일인데 저희가 나서 주질 않으니…”
최 회장은 기가 찼다.
어디 감히 충견 주제에 주인에게 섭섭한 감정을?
“죄송합니다. 법률팀도 계속 자수를 권하고 있습니다만…… 신 상무가 사내 기밀을 많이 알고 있어 함부로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이래서 머리털 검은 것들은 쯧쯧- 그간 나 몰래 하청들한테 챙겨 받은 돈도 많을 텐데.”
사내 감사팀을 동원해 놈의 향응, 비리, 불법 접대를 찾는 건 일도 아니다. 하청 관리 임원이 이를 안 받았을 리도 없다.
하지만 김 비서의 말대로 신석준은 사내 기밀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고, 지금은 잃을 것도 없는 놈이다.
“그놈 들어오라 그래.”
“예, 알겠습니다.”
얼마 뒤 들어온 신석준은 회장님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은 뭘. 회사 위해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제 충정 하나만 이해해 주십쇼. 정말 회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해를 바라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회장님의 반응은 묘하게 차가웠다.
“충정이라. 근데 무식한 놈들이 하는 충정은 나도 사양이야. 꼭 사고를 치거든.”
“……예?”
“하청들 산재를 막은 거는 이해해. 근데 전치 50주짜리 사고를 왜 막았을꼬?”
“산재 기록이 남으면 일감 받을 때 치명적입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아니, 내 말은. 그럼 나중에 치료비 전액을 줄 것이지 왜 그 돈까지 아꼈냐고. 3천이면 끝날 문제를 이젠 300억으로 덮게 생겼네?”
그제야 회장의 진의를 깨닫고 신석준이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면 그다음엔 다른 보상을 또 요구할 것 같아 그만…….”
“피해 보상 요구해 봤자 300억보다 커? 네놈이 회사에 끼친 피해보다 그 돈이 더 커?!”
최 회장은 타이르듯 말하겠다 다짐했지만 놈의 변명을 들으니 기어코 울화통이 터졌다.
“내가 그냥 덮으라고 언질 줬는데, 왜 가서도 인정을 안 해?”
“죄, 죄송합니다. 근데 시간을 좀 주십쇼. 이 문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해결? 이제 와 뭔 해결?”
“법률상 저희가 직접 고용한 사람은 아닙니다. 1차적 책임은 하청 사장에게…….”
최 회장이 코웃음 쳤다.
“네놈 변호사가 그리 말하든?”
“일단 구속 심사는 막았습니다. 재판도 충분히 해 볼만 합니다.”
“신 상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구먼?”
“……예?”
“구속 심사 막은 건 내 아는 연줄 다 동원해서지, 네 변호사가 대단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네놈 구속 막은 건, 회사 위신을 생각해서 숨줄만 붙여 놓은 거야. 그게 너
좋으라고 한 줄 알아?!”
최 회장의 호통에 신석준은 사지가 굳는 느낌이었다.
이건 회장님이 내리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회, 회장님…… 한 번만 살려 주십쇼. 제가 일반인 신분으로 재판받으면 온 하청들이 저를 물어뜯을 겁니다. 그래도 제가 대성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까.”
신석준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 바닥을 기었다.
“무죄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재판까지만 살려 주십쇼.”
“살려 달라? 사내 기밀 알고 있다고 법률팀 은근히 협박한 것 같던데, 내가 자넬 왜?”
“아닙니다. 그런 뜻 없었습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네놈 하는 거 보면 견적이 다 나오는데.”
“믿어 주십쇼. 기필코 그런 뜻 없었습니다.”
신석준은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 콧물 쏟아 냈지만 최 회장은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신 상무. 나한테 섭섭해하지 마. 이걸 빌미로 네놈이 저지른 비리 찾아내는 거 그리 어려운 일 아니야. 하청한테 접대 안 받았다고 내 앞에서 말할 수 있나?”
“…….”
“섭섭은 내가 자네한테 해야지. 난 자네 퇴직금까지 건들 생각 없네. 그러니 이쯤에서 그냥 나가.”
***
최 회장은 신석준이 바닥에서 작성한 사직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극상 진압은 완료가 되었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그는 다른 손에 들려 있는 소환장을 보고 김 비서에게 물었다.
“이거 진짜로 검찰에 출두해야 하는 게야?”
“보여 주기식 소환장일 겁니다. 신 상무 압박용으로요.”
“아니, 출두해야 하냐고.”
“……예. 출두는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검찰에 가 봤자 간단한 사실 확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에서 대기하고 있을 기자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까마득하다.
대성 불매 운동까지 벌어지는 시점이니, 계란 폭탄을 맞아도 이상할 게 없다.
“회장님. 그러지 말고 미리 출석하시지요.”
“먼저 가라고?”
“예. 어차피 예정된 날짜에 출석하면 기자들 전부 다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차라리 먼저 출석해 선처를 구하십쇼.”
최 회장 머릿속에도 이보다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희 잘못 인정하고 재발 방지 대책 가져가면 그래도 선처해 줄 겁니다. 그리고…… 저희 지금 제일 급한 건 작업 중지 해제입니다. 당국과 합의하는 건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그럼 검찰보단 차라리 공정위로 가는 게 어때. 이쪽이 고발 부처니까.”
“예. 그편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차피 과징금 논의도 공정위랑 해야 합니다.”
“그럼 공정위에 연락해. 검찰 출석은 따로 할 테니 그 전에 한번 보자고.”
최 회장은 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자고 하는 게 아니라 뵙자고 해야 한다.
앞으로 당할 치욕을 생각하면, 신석준의 퇴직금도 회수해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