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선산
경악스러운 보고서 한 장 때문에 공정위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비자금의 행방을 찾지 못해 수사가 난항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암매장지가 선산인 것 같다?”
“네.”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일가 형제들이 전부 같은 진술을 했습니다. 사태가 터지자 갑자기 큰형님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고. 무슨 부모님 뵐 낯이 없다 둘러대는데, 꼭 출입하지 말아 달란 부탁 같았답니다.”
“그게 끝이야? 목격했다, 선산 어디에 암매장을 했다 이런 진술이 나온 게 아니라?”
“국장님. 그 큰돈을 연고도 없는 곳에 묻어 두진 않았을 겁니다. 오랜 감옥살이를 해도 변하지 않을 곳, 외부인의 출입이 없는 곳. 선산 말곤 없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과장들이 들고 일어났다.
“안 됩니다 국장님! 이미 연좌제 논란까지 나온 마당에 선산이라뇨.”
“선산을 건들면 공정위가 부관참시한단 소리가 나올 겁니다.”
준철도 굽히지 않았다.
“파묘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차피 김영호는 핵심 연루인으로 자산 몰수해야 합니다. 당연히 선산도 예외가 아니죠.”
“이 팀장, 그게 무슨 말장난이야? 선산 팔아서 피해자들한테 돌려주자고 하는 말이 아니잖아.”
“그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캠코(한국자산공사)한테 넘기고 처분해 달라 그래. 국장님, 삽 대는 건 절대 안 됩니다.”
“묘지를 직접 건드는 것만이 파묘가 아닙니다. 선산에 있는 나무 한 그루도 건드려선 안 돼요.”
과장들의 극렬한 반대가 계속될 때, 이 국장이 조용히 시선을 옮겼다.
“김 팀장, 이놈들 자산 파악된 거 얼마야.”
“사내유보금 20억에 개인 자산 5억 정도…….”
“일가친척 다 구속시켰는데도 30억이 안 돼?”
“죄송합니다……. 이미 오랜 시간 돈세탁을 꾸준히 해와 행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
피해된 신고액이 200억을 훌쩍 넘었는데 확보한 자산은 30억이 채 되질 않는다.
이대로라면 10%의 환불도 장담 못 한다.
“그럼 좀 열어 두고 생각하자. 비자금이 없을 가능성도 있나.”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놈들이 쓴 카드 내역 다 분석했고, 회사 적자도 파악했는데 돈 100억이 빕니다.”
“차명 계좌나 해외 계좌 이런 건 정말 안 나와?”
“네……. 분명 현금화시킨 자산에 함께 묻어 놨을 겁니다. 외람되지만 저도 사실 선산이 의심되긴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과장들이 가세했다.
“김 팀장, 분쟁조정위원장은 팀장처럼 막 질러 대는 자리 아니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
“의심되는 내용 말고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보고를 하란 말이야.”
“그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조사 실패입니다.”
“뭐?”
“우리 범죄 수익금 하나도 못 찾아냈어요. 법원에서 10년 20년 떨어지면 뭐 합니까. 어차피 살다 나오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데.”
“아니 지금…….”
“저 같아도 선산에 숨겨 놨을 겁니다. 어쩌면 관짝에 숨겨 놨을 수도 있죠. 사람이 돈에 눈멀면 더 한 짓도 합니다.”
김민호는 분통이 터졌다.
특수 거래과에서 일하며 가장 많이 상대해 본 게 경제사범이다.
이들은 흉악 범죄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치지만 처벌은 늘 솜방망이에서 그쳤다.
형기를 마치면 냉혹한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다른 범죄와 달리, 이들은 마치 군 복무하듯 감옥을 제대했고 이후엔 훨씬 더 윤택하고 안락한 삶을 누렸다.
그 기시감이 이번 사건에서도 보인다.
“다들 그만.”
한동안 이 언쟁을 지켜보던 국장님이 입을 열었다.
이젠 결정을 해야 할 때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이 문제의 원흉에게 눈을 돌렸다.
“이 팀장, 이 선산 어디에 있다고?”
“예. 경남 사천에 있습니다.”
“이거 땅값이 얼마나 나갈 것 같아?”
“토지 값은 얼마 나가지 않는 걸로…….”
“그럼 캠코한테 의뢰해서 자산 감정 받아 봐. 몰수한다.”
몰수? 결국 뺏겠다는 건가?
회의실의 희비가 엇갈렸다.
“구, 국장님!”
“물론 이게 파묘를 허락한다는 얘기는 아니야. 내 개인적인 도덕관으로도 남의 묘를 함부로 뒤집는 건 용납 못 해.”
“네…….”
“대신 이걸 좋은 카드로 써 봐. 뭐 유도심문을 하든, 협박을 하든 사소한 법적 문제는 넘어가 준다.”
“하면…….”
“반드시 자백 받아 와. 은닉 자금 어디에 묻어 놨는지.”
이 국장은 긴 뜸을 들이다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도 자백이 안 나온다면……. 우린 이 땅값으로 만족한다. 단념하자.”
***
-다음 소식입니다.
비자금의 행방을 쫓던 공정위가 오늘 아침, 선산 압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연좌제 논란에 이어 연일 파격 수사를 이어 가고 있는데요.
당국은 경남 사천에 있는 선산을 처분해 피해액을 보전할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암매장지를 찾는 것 아니냔 관측이 나옵니다.
-유례가 없는 수사 행보에 시민들의 반응도 엇갈립니다.
[바이포인트 피해자 연대]는 금일 환영 성명을 내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줄 것을 촉구했는데요. 반인륜적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공정위는 파묘 작업에 대해선 선을 그었지만, 선산이 암매장 유력지라는 것에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현재까지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 신고된 피해액은 230억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직 환수한 금액이 30억이 되지 않아 큰 진통이 예상됩니다.
-해야지.
언제까지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볼 거냐? 사기꾼은 잡혀도 3대가 먹고살 돈이 따로 있다더라.
⌞ㅇㅈ 경제사범들 보면 만날 다 떵떵거리고 살더라. 왜 당국은 항상 그 돈 다 못 찾아?
⌞선례를 만들어야 돼. 사기 치다 걸리면 3대가 잘 사는 게 아니라, 죽은 조상도 죗값 치러야 한다는.
-이놈들 대체 은닉 자금 어디다 둔 거야?
일가친척 전부 구속했는데 하나도 안 나왔다며. 진짜…… 없는 건가?
⌞없긴 개뿔. 경제사범이 감방 나와서 빌빌 대는 거 봤음?
⌞그냥 죽어도 안 말하는 거야. 잠깐 살다 나오면 다 지 돈 되는 거니까.
-피해액이 200억댄데, 환수액이 30억이면…….
이거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럼 10% 환불해 주고 끝난다는 거야?
⌞ㅇㅇ 놀랍지만 그게 끝. 형량이야 10년 안팎일 테고.
⌞다른 뉴스 보면 특가법 대상이라 무기징역 가능성도 있다던데?
⌞ㅋㅋㅋ 개소리지. 금융 범죄는 기본이 100억대라 무조건 다 특가법 대상임. 근데 무기 때렸단 얘기 들어 봤음?
-이거 사실상 밸런스 게임 아니냐.
감방 10년 살고 100억 받기 vs 그냥 살기.
⌞ㄹㅇㅋㅋㅋㅋ 무조건 전자. 안 하면 등신.
⌞돈 못 찾으면 그냥 끝난 거야. 근데 선산에 묻어 놨으면 답도 없겠네.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뉴스에 네티즌들도 활활 타올랐다.
공정위는 ‘반인륜적 처사는 없을 것이라’ 분명히 선을 그었지만, 당한 사람들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소재지가 알려지자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삽을 들고 경남 사천에 모였다.
“이거 놔요! 내 돈이 지금 저기에 묻혀 있다는 거 아니야!”
“경찰이 범죄자 편을 들어도 돼?!”
“묏자리고 자시고 내 돈 내놔! 이 새끼들아.”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긴급 투입된 경찰들이 부랴부랴 파묘를 막긴 했지만, 이미 나무가 뽑히고, 봉분까지 무너져 내렸다.
그 뒤로 긴 행렬이 이어져 아예 선산 일대에 폴리스 라인이 그어졌다.
“네놈들이 사람 새끼야? 죽은 사람 묘지까지 파헤쳐?”
그 소식은 곧 대표 형제의 아버지인 김영호의 귀로 들어갔다.
김영호는 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세요. 부모님 묘지가 훼손된 거, 아니면 선산 압류당한 거.”
“이 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이게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앞으로 돈 찾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거예요.”
준철은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니 그만합시다. 지금은 저 사람들이 산을 찾아가지만 나중엔 사람도 찾아다닐 거예요.”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 협박을.”
“협박이 아니라 걱정입니다. 요즘 세상 흉흉해요. 금융 사기범의 가족이 다친 사례 많아요.”
김영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삽자루를 들고 몰려든 사람들을 보니 위압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감옥이 안전할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은닉 자금 어디 있습니까.”
“…….”
“선산에 있어요?”
“어, 없어. 없다고! 이렇게 떼쓴다고 쓴 돈이 다시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
“선생님. 우리가 근거도 없이 이런 말 하겠습니까. 회사 지출 내역, 적자, 개인카드 내역 깡그리 다 뒤져서 나온 계산이 100억입니다.”
“그 돈은 현금…….”
“돈 100억을 어떻게 현금으로 써요.”
“그럼 나도 몰라. 내가 애들 돈 쓰는 것까지 어떻게 알아.”
“아버지인 김영호 씨가 이상한 업체까지 세워서 세탁 다 해 주셨던데. 왜 자꾸 모르는 척합니까.”
오늘은 취조실의 분위기가 달랐다.
허튼소리를 일절 용납 안 하고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묻는다.
준철도 조바심을 느끼는 중이었다.
자백이 안 나오면 단념하겠다고 국장님이 말씀하지 않았나. 여기서 끝나면 수사 실패다.
마음 같아선 정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취조를 하고 싶다.
“김영호 씨. 자꾸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우리가 정말 저 땅을 팔기만 하려고 압류한 줄 아세요?”
“뭐?”
“수틀리면 저거 파낼 수도 있어요. 언론엔 나가지 않았지만 우리도 모든 각오 하고 다 압류 진행한 겁니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 믿고 있었던 선산을 파내겠다니.
국민 정서상 묘지를 파는 패륜은 안 벌어질 줄 알았고, 그래서 은닉처를 거기로 정했다.
근데 공정위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망연자실한 놈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준다.
역시나 선산이 최적의 장소였다.
“우리 곧 첫 삽 뜰 겁니다. 나무 다 뽑고, 산 갈아서라도 이 돈 찾을 거예요.”
“……꼭 이렇게까지 막장 짓을 해야 돼?”
한동안 고개를 묻던 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경멸적으로 외쳤다.
“죽은 사람 눈에서까지 피눈물 뽑아야 성이 풀리겠어?”
“못 할 거 있나.”
“뭐?”
“산 사람 피눈물 났는데, 죽은 사람 피눈물이 어때서. 은닉 자금 찾아낼 수 있으면 더 한 짓도 할 수 있어.”
준철은 창백한 얼굴로 굳은 놈에게 서류를 건넸다.
“몇 년 살다 나올 생각일랑 마쇼. 우린 무조건 무기징역이니까.”
“이게 무슨…….”
“비자금 100억 소재지 안 밝히면 평생 자식들한테 사식 넣어 줘야 될 겁니다.”
무기징역이란 말이 충격이었을까.
아님 사태를 보니 정말 무기징역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나.
평소와 달리 김영호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곰곰이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떤 게 옳은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설 때.
불쑥 차가운 손이 준철의 손목을 잡았다.
“무, 무기는 봐주실 수 없습니까.”
그의 미세한 손 떨림이 손목을 타고 전신에 느껴졌다.
“그 돈 찾아오면 무기징역은 피할 수 있습니까.”
역시 사람은 내리사랑인가 보다.
죽은 부모 얘기 꺼낼 땐 꿈쩍도 않던 놈이, 자식 얘기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