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대기업 집단 지정 (1)
종합국으로 복귀한 준철은 황당한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과장님. 이게 뭡니까.”
“바가지야. 함으로 만든 바가지. 우리 땐 신부가 신랑 친구들한테 이 함 바가지를 샀었는데 요새 사람들은 이거 모르나?”
“……함진아비요. 근데 이 바가지는 갑자기 왜.”
“한 두어 개 깨라. 이게 액운을 막는 데 그렇게 좋단다.”
빠직.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가지 깨는 소리가 들렸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리자 오 과장이 다그치듯 말했다.
“재수 없는 데 많이 돌아다녔잖아. 액땜 안 할 거야?”
“아…….”
“세트로 한 열 개 사다 놨다. 가져가서 반원들한테도 돌려.”
돈 찾으러 다닐 땐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정말 벼락 맞을 짓이다. 죽은 사람이 잠들어 있는 선산을 파헤쳤고, 본의 아니게 묘지도 이장하게 만들었다.
빠직, 빠직, 빠직!
한 개는 고인의 명복을 바라며.
한 개는 어찌 됐건 죄를 뉘우치며. 그리고 앞날을 기원하며 연달아 바가지 세 개를 깨뜨렸다.
“궂은일 하느라 고생했다. 이번 사건은 좀 싱숭생숭했지?”
“아닙니다. 바가지라도 깨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요.”
“김민호 팀장은 아예 응급실까지 갔다며?”
“네. 근데 허리 약간 삐끗한 거라 금방 퇴원했습니다.”
“나머지 일은?”
“과징금, 형량 관련한 일은 김민호 팀장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환불을 40%까지 끌어올렸지만 이 또한 만족할 만한 액수가 아니다.
못 갚은 돈은 형량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막대한 과징금이 부과될 것이니 사회에 나와선 평생 신용불량자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럼 공식적으로 끝이네?”
“예. 근데 이놈들이 분명 3심까지 갈 놈들이라서…….”
“너도 이제 미련 버려.”
“예?”
“이젠 눈빛만 봐도 알겠어. 또 머릿속으로 과징금 얼마 때려야 될지, 형량은 얼마가 적당한지 계산하고 있지?”
“…….”
“돈다발 그 정도 찾아냈으면 할 만큼 했다. 이제 우리 손을 떠난 문제야.”
오 과장은 준철이 깬 바가지 파편들을 가리켰다.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이젠 하늘에 맡기자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준철이 수긍하자 오 과장도 마음을 좀 놓으며 미안한 얘기를 전했다.
“수사 성과를 보면 금일봉이라도 내려줘야 하는 건데…… 알다시피 지금 웃을 분위기가 아니야.”
“물론이죠. 회수 못 한 돈이 더 많습니다. 저희도 성공한 수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해해 준다면 고맙다. 어차피 우리 사건 아니라 내 결재는 따로 필요 없어. 이대로 업무 복귀해라.”
“네. 그럼.”
그렇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갈 때, 오 과장이 다시 불렀다.
“바가지 중 하나는 김 팀장한테 전해 줘. 그 친구도 액땜은 해야지. 만약 법정에서 그놈들이 허튼소리 하면 그냥 머리통에 깨 버리라고 해.”
“좋아하겠는데요, 흐흐. 꼭 그리 전하겠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이런 작은 이벤트를 준비한 오 과장이 새삼 고마웠다.
덕분에 이번 년엔 운수 대통할 것 같다.
***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정리되며 공정위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준철은 밀린 민원 업무에 주력했는데, 함바가지가 정말 액운을 물리쳐 준 건지 한동안 큰 사건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순탄한 6월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공정위 부위원장 홍명준입니다.
금년에 선정된 대기업 목록에 대해서 발표드리겠습니다.
먼저, 공정거래위원회는 자산 총액 5조 이상인 기업을 [공시 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할 계획입니다.
또한, 자산 총액 10조 이상인 기업에 [상호 출자 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할 계획입니다.
공정위의 최대 이벤트라 할 수 있는 대기업 명단이 발표된 것이다.
-명단을 발표하기에 앞서 본 법의 취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저희 공정위는 대기업 그룹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 계열사 간의 부당 지원을 방지하고자 매년 대기업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부자 거래, 일감 몰아주기, 편법 승계 등 오너 일가의 사익 편취를 막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이번에 선정된 대기업 집단은 보유 주식에 대한 공시 의무가 있고, 각 계열사 간에 출자 총액이 제한됩니다.
재계 순위까지 발표되는 이 행사는 명실상부 공정위의 최대 이벤트다.
비유하자면 약간 지명수배범을 발표하는 느낌인데, 대기업으로 선정되면 주식 변동 내역을 반드시 금감원에 신고해야 하며(공시 대상), 각 계열사 간의 주식 거래 및 자본 흐름이
차단된다.(출자 제한)
온갖 제약이 다 붙는 만큼 중견기업들이 가장 기피하는 발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부위원장이 대기업 명단을 발표하고 있을 때.
종합국 오 과장실엔 낯선 이가 방문했다.
“윤 과장?”
“오랜만일세. 잘 지냈지?”
“우리야 뭐 별일 있나.”
“요즘 아주 종합국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더만. 특수거래과랑 바이포인트 맡았다며?”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
“공정위에서 모를 사람이 없지. 종합국이 참 궂은일 잘 맡아 주는 것 같아. 덕분에 우리 일이 편한 것 같네.”
오 과장은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지만 마음 한편이 떨떠름했다.
상대방의 과한 칭찬은 늘 불순한 목적을 동반했다.
“그나저나 웬일이야. 오늘 자네들 많이 바쁘잖아. 대기업 집단 발표하는 날 아니야?”
“덕분에 무사히 끝났네. 부위원장님이 오전에 발표했어.”
“그럼 고생한 팀장들 데리고 막걸리집이나 가지. 왜 이런 따분한 데를 왔어.”
“겸사겸사. 얼굴도 볼 겸.”
윤 과장 얼굴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변했다. 1년 중 가장 바쁜 일을 마무리했단 성취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젠장. 왜 불운한 직감은 틀린 법이 없는 거냐.
오 과장은 찻잔을 내려놨다.
“뜸 들이지 않아도 돼. 용건이 뭔가.”
“그게 참…….”
“혹시 이번 대기업 집단 선정과 관계된 일이야?”
윤 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히 끄덕였다.
“기업 하나가 우릴 속인 것 같아. 지정 자료를 제출하라 했는데, 계열사 상당수를 누락시켰어.”
“아니 왜……?”
“대기업 집단에 선정 안 되려는 수작이지.”
오 과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하는 기업이라면 최소 규모가 10조 원 이상일 터. 대한민국 법이 아무리 우스워도 이건 물리적으로 숨길 수가 없는 규모다.
금방 꼬리가 잡힐 텐데 대체 왜?
“혹시 기업에서 실수를…….”
“아니 고의가 명백해. 벌써 4년이나 속여 왔으니까.”
“뭐? 4년?”
윤 과장은 분통을 터트리며 [태광건설] 자료를 내밀었다.
“사실 처음부터 말이 안 됐지. 작년엔 충청권 아파트를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가져갔는데 자산이 10조가 안 된다니.”
“……계열사가 몇 갠데?”
“신고한 계열사는 30개. 근데 최소한 5곳 이상을 누락시켰어.”
“그건 어떻게 파악했어?”
“태광건설 기업 자료를 보니 자꾸 이상한 업체에 일감을 주는 거야. 건설과 전혀 관계도 없는 무슨 배터리 회사. 수상하다 싶어 파 보니 송 회장 매제 이름으로 되어 있더군.”
윤 과장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 짓거리를 막으려고 대기업 집단을 선정하고, 모든 계열사를 파악해 놓는 거다. 근데 마치 법을 비웃듯 명의 위장을 다 해 놨다.
“당연히 이 회사 실소유주는 송 회장이겠지.”
“……진짜로 이걸 4년이나 했다는 거야?”
“그래. 사위, 사돈, 매제 가리지 않고 다 동원했어. 아직 증거는 못 잡았지만 다섯 곳은 무조건 송 회장 거야.”
“진짜야…… 대기업 지정 피하려고 이런 간 큰 짓을 했다고?”
“그래! 출자 제한에 선정되면 뒷돈 못 빼먹으니까 꼼수 쓴 거야. 아니지, 이미 이놈들은 빼돌린 돈이 수두룩할걸. 이거 계열사 다 뒤지면 구린 돈 분명 나와.”
여기까진 윤 과장의 추측이었으나 굉장히 현실적인 얘기이기도 했다.
명의 위장 계열사는 횡령 업계의 줄기세포다.
위장 계열사로 빼돌린 돈을 국회 로비 창구로 쓸 수도 있고, 오너 일가의 용돈으로 쓸 수도 있고, 편법 승계를 위한 지렛대로 쓸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비자금을 조성했을지도 모른다.
윤 과장은 한숨을 내쉬는 오 과장에게 부탁 조로 말했다.
“나중에 일손 부족하면 도울게. 이 사건 한 번만 도와줘.”
“……뭘 하면 되는데?”
“우리가 지금 의심하고 있는 다섯 개 계열사. 실소유주 밝혀내야 하는데 인력이 너무 부족해. 최소 두세 개의 팀을 더 동원해야 돼.”
행위만 놓고 보면 당장 엄벌해야 할 일인데, 급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어디 무슨 사고가 터진 것도 아니고, 분초를 다투는 일도 아니다.
이러면 당연히 조사 우선순위에 밀릴 수밖에 없다.
“2-3개 팀은 차출 못 해. 종합국도 만성 인력 부족이야.”
“그러니 내가 찾아온 거 아니겠나. 부탁 좀 함세.”
오 과장은 긴 한숨을 내쉬다 말을 이었다.
“1개 팀만 파견 보내지.”
“오 과장…….”
“대신 2-3인분 하는 놈이야. 믿고 맡겨도 돼.”
시원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윤 과장도 그쯤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고맙네.”
그렇게 폭탄을 떠안게 된 오 과장은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회사가 성장세에 있는데 계열사를 숨긴 이유가 뭘까? 사세로 봐선 곧 대기업 집단에 선정될 텐데 말이다.
그것도 한두 해가 아니라 무려 4년이나 공정위를 속였다.
‘젠장…….’
어쩐지 구린내가 폴폴 났다.
밝히지 않은 계열사가 이미 오너 일가의 비자금 창구라면? 단순히 신고 의무 위반이 아니라 횡령 혐의로 검찰까지 투입되어야 한다.
-똑똑.
“부르셨습니까, 과장님.”
“응. 들어와.”
준철은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과장실에 도착했다.
널브러진 서류만 봐도 대강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사건이 방금 이 과장실을 다녀갔다는 게.
긴장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피자 오 과장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이 팀장. 어떤 회장이 자꾸 계열사를 숨기는 것 같은데, 이거 이유가 뭘까?”
“……대기업입니까?”
“응. 몸뚱어리는 이미 대기업인데 자꾸 안 맞는 옷을 입으려고 한다네.”
“혹시…… 오늘 발표한 대기업 집단 선정과 관련한 얘긴가요?”
오 과장은 헛웃음이 나왔다.
눈치 하난 기가 막힌 놈이다.
“맞아. 사위, 사돈, 매제를 총동원해서 계열사를 숨겼다더군. 근데 이게 단순히 대기업 집단 지정을 피하려고 이러는 걸까?”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숨긴 계열사로 이미 구린 짓을 했으니 숨겼을 겁니다.”
자신의 생각과 똑같은 얘기가 나오자 오 과장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적임자다.
“역시 이런 건 이 팀장이 제격이겠어.”
“예?”
“기업집단과로 잠시 파견 좀 다녀와라. 회장님이 숨긴 계열사가 많단다. 얼마나 숨겼는지 파악하고, 그쪽에 보고해.”
“하지만 전 경험이…….”
“이게 그 기업 자료야. 별거 없더라.”
준철은 쫓겨나다시피 과장실을 나왔다.
젠장. 그냥 모르겠는데요 한마디면 이렇게 귀찮은 사건은 안 받는 건데. 가만 보면 이 가벼운 입이 일을 버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푸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를 펼쳐 봤을 때. 잠시 다리가 휘청거렸다.
누구보다 잘 아는 건설 업계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