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대기업 집단 지정 (2)
태광건설.
충청권에 기반을 둔 2군 건설사.
한명 그룹의 하청 물량을 많이 받아 갔던 건설사로, 나는 그를 회장이 아닌 송 사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나이 어린 원청 임원이 반말을 찍찍 내뱉어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던
처세의 달인이었다.
사실 내가 이사로 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정부 주관 사업을 단독으로 따낼 만한 규모도 아니었고, 시공 능력이 압도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기업이 갑자기 전국구로 세를 불렸고, 한명건설의 밥그릇까지 넘보게 됐다.
사실 언젠가는 태광건설이 전국구 건설사로 성장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만나 본 송 사장은 무서울 정도로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니.
“김 이사님. 그러지 말고 저희 쪽 제안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제안?”
“이번 공사를 300억에 넘겨주시지요. 그럼 저희가 고민하고 계신 문제 깔끔히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송 사장. 나 지금 계약서만 250억으로 쓰고, 230억 드리겠다 말하는 거요. 300억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제가 사업체는 작아도 대기업 사정은 잘 압니다. 다운(업)계약서 요구하시는 이유가 결국 비자금이 필요해서 아닙니까.”
“뭐……?”
송태수 사장은 하청이었지만 꽤 어려운 상대였다. 여느 하청처럼 원청 임원 앞에서 주눅 드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에게 부회장의 비자금을 간파당했을 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오해는 마십쇼. 누구를 위한 비자금인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이미 아는 눈치 같은데.”
“허허…….”
“계속해 보시오. 어디까지 알고 있지?”
잠시 뜸을 들였지만 그는 딱히 이 상황을 겁내고 있지 않았다.
“최영석 부회장님의 비자금 아닌지요.”
“누구요. 둘째나 셋째가 송 사장한테 찔렀나.”
“그럴 리가요. 회장님의 비자금이면 굳이 저희한테 다운 계약서를 부탁할 필요 없겠죠. 그룹 내부 사람은 다 알아도 되니까.”
“…….”
“근데 내부자들도 몰라야 할 비자금이면…… 아무래도 한 곳밖에 없더군요.”
한 치도 틀리지 않는 그의 추측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꼭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해서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굳이 이중 삼중으로 돈 빼지 마시고, 성능 좋은 저희 세탁기 한번 믿어 보십쇼.”
“원하는 게 뭐요.”
“시멘트랑 철근 공사에 굳이 하청 두 개 쓸 필요 있습니까. 이런 말 뭣하지만 저희도 철근 잘 올립니다. 허허.”
“일감을 몰아 달라?”
“예.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저희에게 전부 위임해 주시면 필요한 액수 다 맞춰 놓겠습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좋은 약점을 쥐었는데, 원하는 게 겨우 물량이라고?
“뭐 그렇게 성능 좋은 세탁기면 우리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믿겠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뭐요. 수수료? 아니면 부회장님 약점 잡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일감 몰아 달라는 협박?”
놈은 나를 비웃듯 말했다.
“저희 같은 중소 건설이 어떻게 원청 약점을 잡아 협박을 합니까.”
“그럼 용건을 말해 보시오.”
“꼭 원하는 게 하나 있다면…… 작년에 장마가 좀 길지 않았습니까.”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부에서 수해 복구 사업을 크게 공모할 계획이더군요. 뭐 그 규모도 우리한테나 크지 한명건설한테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규모일 겁니다.”
“설마 입찰하지 말아 달란 뜻인가?”
“네. 이 공사 저희가 단독으로 따내고 싶습니다.”
“겨우 우리 하나 따돌렸다고 그 공사가 태광한테 가겠소?”
“뒷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저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놈들이 정계에 줄을 댄 건 아닐 테고.
아마 다른 대형 건설사들의 약점도 한두 개씩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놀란 건 놈의 자제심이었다.
어쩌면 후계 구도가 단숨에 뒤바뀔 수도 있는 약점을 잡았는데, 딱히 이용하려는 눈치가 아니다.
만약 수수료나 장기 거래를 요구했다면 골치가 좀 아팠겠지만, 정부 입찰 사업에 참여하지 말아 달란 건 딱히 그룹 입장에서 손해를 볼 일도 아니었다.
“송 사장. 세탁비치곤 너무 저렴한 거 아니요. 성능이 진짜 좋은 건지 의심이 되는데.”
“염려 마십쇼. 제가 숨겨 놓은 계열사가 몇 개 됩니다. 처제, 처남 이름으로 되어 있는 회사라 금융권에서 절대 파악 못 하죠. 계약서대로 결재해 주시면 저희가 깨끗이 세탁해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자의 제안은 나의 구미를 확 당겼다.
그룹 내부자들까지 속이려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나. 그걸 한 번에 해결해 주겠다니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 같았다.
“숨긴 계열사가 많다…… 태광은 이런 일 많이 해 봤나 봅니다?”
“저희는 규모가 작아 금융 당국의 감시가 느슨한 편이잖습니까.”
“믿을 만한지 모르겠군.”
“김 이사님. 이거 사실 제가 아들놈한테 편법 승계하려고 꽁꽁 숨겨 둔 계열사들입니다. 저도 큰맘 먹고 도우려 하는데, 한번 믿어 주십쇼.”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나의 경계심도 풀렸다.
서로 약점을 공유했으니 일방적으로 배신하긴 힘들다.
“좋소. 그럼 한번 보고드려 보지.”
“감사합니다. 아마 만족하실 겁니다. 하하.”
그렇게 서로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며 우리의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해 태광건설은 수해 복구 사업을 싹쓸이했고, 이를 기회 삼아 2군 건설사도 졸업했다.
그게 송태수 사장과 나의 작은 인연이었다.
***
충청권을 기반으로 급격히 성장한 태광건설.
더 이상 한명건설의 외주나 받아 가던 태광이 아니다. 한참 어린 원청 임원한테 반말 찍찍 듣던 송 사장도 아니다.
공정위에 신고된 계열사는 30개를 넘었고, 자산 총액은 9조 9천억을 훌쩍 넘는다.
건설 업계 시공 순위 탑 10에 이름을 올릴 정도니 이젠 회장이란 직함이 이상하지 않았다.
“발표 시작하지.”
윤 과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피피티 화면엔 한 가계도가 그려졌다.
“이게 송태수 회장의 가계도입니다.”
발표를 맡은 팀장이 리모컨을 누르니 작은 글씨로 각 계열사 이름이 빼곡히 들어찼다.
“그리고 이건 태광건설의 자(子)회사들입니다. 하늘인베스트는 부동산 임대 업종으로 자산 규모가 200억대입니다. 장남 이름으로 되어 있고, 계열사 중 가장 큰 놈이라 아마 승계
작업할 때 전면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합니다.”
머리 큰 계열사 다섯 곳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차남, 삼남 이름이 거론됐다.
대부분 미심쩍긴 했으나 그래도 건설과 관련한 업종이라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여긴 주식회사 청람이란 곳인데 교육 서비스 업종입니다. 다음은 주식회사 버킷, 여긴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입니다.”
수상한 계열사들이 슬슬 등장하자 윤 과장이 손을 들었다.
“건설 업체한테 교육 서비스가 왜 필요하지. 이 계열사들은 뭐 하는 데야?”
“파악은 안 됩니다만 매출 전액이 태광건설로 잡혀 있습니다.”
윤 과장은 모두 아는 내용이었지만, 팀장들에게 중요한 내용을 숙지시키듯 예민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지분은?”
“모두 송 회장과 특수 관계인 100%입니다.”
“그럼 이것들 다 일감 몰아주려고 세운 법인들 아니야?”
“네. 그 목적 외엔 설명이 안 됩니다. 다만 여기까진 저희 공정위에 신고된 계열사들입니다.”
그래, 여기까진 모두가 다 하는 편법 사업이라 치자. 대기업치고 문어발 사업 안 하는 곳 없다.
하지만 피피티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곳들은 아예 신고도 안 했더군요.”
“여긴 뭐 하는 데야?”
“태광건설에서 일감을 많이 받아 갔던 하청들입니다. 배터리, 파이프, 물산 등 업종이 다양합니다. 근데 이 명의가 모두 송 회장 사위, 사돈, 매제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송 회장이 누락시킨 계열사 다섯 곳의 정황이었다.
이곳은 모두 송 회장의 일가친척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공정위엔 신고되지 않았다.
“여기 자산 총액이 얼마나 되지?”
“다섯 곳 합친 규모가 총 3천억대입니다.”
“그럼 합하면 10조가 넘네? 지금 태광이 우리한테 신고한 자산 총액이 9조 9천인데.”
“네.”
사실 숫자부터 구린내가 폴폴 풍긴다.
9조 9천억. 누가 봐도 출자 제한 10조를 회피하기 위해 어거지로 맞춘 숫자다.
“홍 팀장. 여기에서 혹시 민감한 이름 나온 거 있나?”
“다행히 정관계 인사들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아직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건설은 정경 유착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업종이다. 국회의원이 로비를 받고 재개발을 인허가해 주는 사건은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좋아. 이젠 팀장들 의견 들어 보지.”
숨죽이던 팀장들은 기다렸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다른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출자 제한 기업 회피죠.”
“계열사 간에 서로 구린 일을 많이 해 줬나 봅니다. 그러니 계열사를 숨겼죠.”
“전 사실 거물급 의원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봅니다. 위장 계열사를 통한 로비 사례도 있잖습니까.”
“맞습니다. 이 계열사로 변호사비를 대납해 준 건 아닌지, 의원들 자제를 고용해서 리베이트를 한 건 아닌지 꼭 파헤쳐 봐야 합니다.”
윤 과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모든 가능성 다 열어 놓고 준비한다. 드러난 게 이 정도지 이게 끝은 아니야. 누락 계열사 전부 파악해서 혹시 정관계 인사들한테 흘러 들어간 거 있나 파악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며 팀장들이 흩어졌지만, 준철은 답답함에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업집단과는 대기업만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곳이라 이 의도를 금방 파악할 줄 알았는데…… 역시 건설 업계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한다.
‘너무 갔는데…….’
무슨 국회의원 로비인가?
금배지한테 줄 대고 싶은 기업인은 수백 명을 넘는다. 의원들도 검증된 기업에서 절대 탈 나지 않는 돈을 받지 무작정 다 받아 대는 게 아니다.
만약 받았다 하면 그 내용이 금방 기업 자료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재건축 인허가가 갑자기 났거나.
그린벨트가 갑자기 해제됐거나,
층고 제한이 갑자기 풀리거나.
하지만 태광건설 시공 자료에 의하면 묻지마 허가는 보이지 않았다. 업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의 추측만 난무한 회의였다.
사실 준철은 몇 번이나 손을 들고 일어나고 싶었다.
놈들의 진짜 목적을 대강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참았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추측이 맞는다면 금방 그 내용이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