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배보다 큰 배꼽 (1)
“뭐? 인정을 했다고?”
“예. 지금 태광건설 부회장이 찾아왔습니다. 계열사 파악할 때 착오가 있었다는군요. 저희가 문제 삼은 다섯 곳 모두 순순히 인정하겠답니다.”
“부회장이 그놈인가. 송 회장 장남?”
“아니요. 그건 송지훈 사장입니다. 부회장은 그냥 임원 중 하나입니다.”
원하는 답변이 보름도 채 되지 않아 나왔지만 윤 과장은 열만 더 뻗쳤다.
현재 파악된 다섯 개 계열사는 모두 송 회장 주변 인물들 회사로, 절대 임원들의 착오로 벌어질 수 없는 실수다.
“아무래도 태광은 부회장의 업무상 과실로 얘기를 정리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게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데?”
“부회장이 4년 치 누락 혐의를 모두 인정했습니다…… 과장님, 이거라도 사법 처리시킬까요?”
업무상 과실.
최대 형량이 1년이었나, 2년이었나.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업인한테 이 정도 가지고 실형이 떨어진 사례는 없었으니 사법 처리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됐다. 먼저 한 톨 찾았다고 요란 떨면 우리 꼴만 우스워지지. 규모도 인정했나?”
“네. 3천억대 지분 다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태광건설은 자산 총액이 10조를 넘어 출자 제한 집단 대상입니다.”
여기까지가 기업집단과의 역할이다. 놈들의 빠른 자백으로 기대 이상의 빠른 성과가 나왔다.
하지만 윤 과장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부회장 그놈 아직 안 갔지?”
“예. 아직 조사실에 있습니다. 근데 1시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일정을 맞춰 달라는…….”
“아주 상전이 따로 없구만. 앞장서라. 내가 직접 만나 봐야겠다.”
***
윤 과장은 자백하러 온 놈의 얼굴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묘하게 고압적인 태도. 심심찮게 드러나는 웃음. 이건 아무리 봐도 자백하러 온 놈의 상판대기가 아니다.
“모쪼록 선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아직 규모가 큰 건 아니라 이런 대기업 관행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대기업 관행이라…… 누락된 계열사들을 보니 이미 대기업 다 되셨던데요.”
“송구스럽습니다.”
“진짜로 송구스러우면 책임 있는 사람을 이 자리에 보냈어야지.”
“지정 자료 준비했던 게 접니다. 법적 책임을 원하시면 모든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요? 우릴 속인 게 벌써 4년인데, 정말 각오가 돼 있는 것 맞습니까?”
윤 과장이 변죽을 올리자 부회장도 곧 본색을 드러냈다.
“과장님. 하시고 싶은 말이 뭡니까.”
“태광건설은 이미 4년 전에 자산 총액 10조가 넘었어. 그간 대기업 지정을 피한 이유가 뭐요.”
“착오…….”
“착오 같은 소리 하지 마시고. 본 목적을 말해 보시오.”
부회장은 수세에 몰렸지만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가득했다.
“혹시 저희한테 듣고 싶은 대답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요?”
“줄 대려고 계열사 속인 거 아니요.”
“무슨 말인지.”
“송 회장이 이 회사로 비자금 많이 조성했더군. 이거 다 로비 자금으로 쓰인 거 아니요?”
전혀 엉뚱한 지적이 나왔을 때, 부회장이 코웃음을 터트렸다.
“저희가 국회에 로비를 댔다 이 말씀입니까?”
“우린 그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소.”
“제가 지금 조사를 받는 건지 공상과학소설을 읽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의심되는 거 다 까 보십쇼. 우리가 로비를 해서 공사 땄으면 뭐 그린벨트 해제나 재개발 인허가 같은 게 금방 나오겠네요.”
그런 내역은 없다. 공사로 번 돈을 속였지, 공사 자체를 위법하게 따내진 않았으니.
윤 과장이 미간을 굳히자 부회장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착오는 인정하겠습니다만 공정위의 과잉 의혹에 대해선 저희도 엄정 대응하겠습니다.”
“엄정 대응? 지금 우리한테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저희 태광도 이번 대기업 집단 선정을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실수가 있었지요. 그 책임에 대해
모두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모쪼록 선처 부탁드립니다.”
부회장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자 윤 과장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긴 한데, 드러난 사건만으론 이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면담을 끝난 윤 과장은 곧 전 팀장들을 소집했다.
준철도 사건이 개운치 않게 끝났으며, 과장님이 망신까지 당했단 소식을 들었지만 예상외로 윤 과장 얼굴은 한결 가벼웠다.
“그만하자. 내가 그 정도로 겁줬는데 저렇게 나오는 거 보면 더 이상 없는 게 맞아.”
윤 과장의 말이 끝나자 팀장들이 거들었다.
“네. 뭐 여의도 비자금 이런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흰 대기업 선정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놈들이 자백 빨리했으니 오히려 성공한 겁니다.”
윤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유 팀장. 다섯 개 계열사에서 돈 샌 흔적 있나?”
“네. 비자금을 상당히 챙겼던데, 이거 신고하면서 전부 메워 놨습니다. 아무래도 목적 자체가 비자금 조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거라도…….”
“됐다. 비자금 다 채워 놨으면 우리도 문제 삼지 않는다. 홍 팀장.”
“예. 과장님.”
“자기들이 신고 누락했다는 거 시인했으니까 과징금도 승복할 거야. 최대치로 매겨. 처벌은 이걸로 끝내자.”
고작 이 정도 사안 가지고 실형이나 집행유예가 떨어지진 않을 것이니, 형사소송은 의미가 없다.
팀장들도 윤 과장의 당연한 지시에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과장님. 그럼 이번 사건은 여기서 끝내는 겁니까?”
“응. 이 팀장, 파견 나와 줘서 고맙다.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우리 본연의 목적은 이뤘으니 여기서 끝낼 거야. 왜, 뭐 더 하고 싶은 말 있나?”
“이 자백은 꼬리 자르기 아닐까요……?”
“뭐?”
“이렇게 순순히 자백하는 게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계열사를 감추기 위한 꼬리 자르기 같습니다.”
절대로 안 된다.
대기업 집단 선정은 놈들의 최종 목적지가 아닌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선정을 왜 피하려 했는지 이유도 듣지 못했는데 여기서 끝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 달리 윤 과장은 이미 체념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당연히 이놈들 꿍꿍이가 더 있겠지. 하지만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순 없다. 여의도에 로비 자금을 흘렸거나, 공사를 불법적으로 승인받았거나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면, 이 이상 무리야.”
사실 건설사 비자금 문제는 해마다 끊이지 않은 논란이다.
송 회장도 다른 총수들 다 하는 정도의 비자금을 조성해 왔지만, 공정위 신고를 앞두고 모두 원상복귀시켰으니 더 이상 문제 삼긴 힘들다.
“하지만…….”
준철은 무어라 더 말을 떼려다 말고 주저했다.
윤 과장의 체념보다 더욱 무서운 건 주변 팀장들의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다 끝나 가는 사건에 계속 불 지피려 드는 준철에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쏘아 댔다.
“이 팀장님. 의혹 제기는 좋습니다만 뭐 좀 근거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저놈들은 우리의 과잉 조사를 법적 대응하겠다 나오고 있어요.”
“작은 의심 가지고 이 사건 더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젠장.
분명 더 있을 것 같은데, 파면 나올 것 같은데 이걸로 끝인가.
준철도 해당 사건을 조사하며 태광건설의 모든 계열사를 다 파헤쳐 본 참이었다. 그냥 파헤친 게 아니라 거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검토했다.
하지만 송 회장의 실력은 죽지 않았다.
밤을 새워 가며 파악한바, 위장 계열사는 다섯 곳이 전부였다. 더러 의심되는 게 몇 개 더 보이긴 했지만, 그리 큰 계열사는 아니었다.
“그건 없습니다만, 놈들이 대기업 선정을 왜 회피하려 했는지 그 이유는 들어야…….”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오너 일가의 비자금 창구였겠지.”
“근데 빼돌린 거 다 채워 놨으니,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 하면 열 마디의 반박이 나온다.
팀장들의 날 선 반응에 윤 과장이 안쓰러운 얼굴로 제지했다.
“그만들 해. 충분히 해 볼 만한 의심이야. 놈들의 작태가 이해 안 되는 건 나도 사실이니까.”
“…….”
“이 팀장, 좋은 의견 고맙네. 하지만 이쯤 하자. 우리 목적은 대기업 집단 선정이었어. 예상외로 빠르게 해결됐으니 충분히 성공한 조사야.”
“알겠습니다. 괜한 얘기 꺼내서 죄송합니다.”
사냥감의 꼬리만 겨우 잡았는데 이게 정말 성공한 수사일까.
윤 과장의 자축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답답한 현실에 분노만 드는 준철이었다.
***
“어떻게 됐습니까?”
“보기 좋게 깨졌네요.”
회의실에서 있었던 굴욕을 말해 주자 반원들 표정도 붉어졌다.
“어휴. 그러게 팀장님 왜 고생을 사서 하세요. 뭐 대기업 선정 하고 말고는 딱히 우리 일도 아니잖아요.”
“이만하면 성공한 수사 맞아요. 뚜렷한 증거 없이 덤비면 저희도 위험합니다.”
사고 치기 좋아하는 팀장 때문에 반원들도 밤낮없이 계열사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다섯 곳의 계열사 말곤 크게 이상해 보이는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오는 게 쥐뿔 없었으니 반원들도 윤 과장의 결정에 수긍했다.
“왜요? 팀장님은 아직도 찝찝하세요?”
“4년 동안 공정위에 숨겨 오다가 갑자기 인정해 버린다는 게……. 전 납득이 안 돼요.”
“그래도 인정하겠다잖습니까. 그 다섯 개는.”
“…….”
“미련 버리세요. 솔직히 이것들 너무 치밀해서 상대하기 싫습니다.”
반원들까지 만류하자 준철의 생각도 바뀌었다.
어쩌면 나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 과거의 악연 때문에 태광이 비리 기업이라는 편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뭐 대기업 집단에 지정되면 앞으론 당국의 살벌한 감시를 받게 될 터.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옳은 선택은 아니더라도 현명한 선택은 맞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럼 저도 그만하겠습니다.”
“생각 잘하셨어요.”
“저 자료실 좀 다녀올게요.”
준철은 서류를 들며 한결 가벼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혼자 남게 됐을 땐 또다시 얼굴이 복잡해졌다.
‘이건 아무리 봐도 편법승계인데.’
놈들이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에 대해 깊이 고민해 봤다. 그 고민에 끝에 나온 결론은 편법승계였으며, 이 예상이 맞는다면 수상한 계열사가 더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잡듯 뒤져 봐도 송 회장의 장남 송지훈과 관련한 회사는 보이지 않았다.
‘송 회장 족보를 다 까 봤는데 이게 왜 안 나오지……?’
설마 족보가 아닌 사람을 통해 지분 세탁을 한 건 아닐까?
무수히 많은 의심들이 또 쏟아졌지만 준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부에서 다 반대하는 수사를 혼자 우겨 가며 진행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설득할 만한 결정적 증거도 나온 게 전혀 없었으니.
“됐다. 나도 그만하자.”
그렇게 준철은 복잡한 생각을 비우며 태광건설 자료를 파쇄기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윽…… 악!”
불명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