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
14화
담판 (3)
“혐의를 모두 인정하겠습니다. 대성중공업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소환장을 날린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최 회장이 전 계열사 사장들을 대동해 공정위에 직접 출두했다.
“그냥 사과만 하러 오신 건 아니겠죠?”
준철이 묻자 비서로 보이는 사내가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재발 방지 대책입니다. 그 전에 먼저 신 상무 거취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해당 임원은 오늘부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날 겁니다.”
“잠깐 물러나는 겁니까, 아주 물러나는 겁니까?”
“……잠잠해졌다고 다시 불러들일 생각 없습니다. 완전히 해고됐습니다.”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할 겁니다. 안 그럼 저희도 이 대책안이 진정성 있다고 판단하기 힘들어요.”
최 회장까지 끄덕인 걸 확인한 후 준철이 서류를 들었다.
그들이 가져온 대책안엔 경영진이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향후 대책은 물론, 기존 피해자들에게 어떤 보상을 해 줄지도 나와 있었다.
“흠…….”
하지만 어떤 대목은 이해가 가지 않았고, 또 어떤 대목은 너무 협조적이라 의심이 갔다.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이 상생기금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세요.”
“네. 지금까지 산재 신청 못 한 하청 근로자가 꽤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여 저희는 30억 상당의 기금을 마련해 모든 피해자에게 지원할 계획입니다.”
“치료비를 대신다고요?”
“예.”
언뜻 들으면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기업들 꿍꿍이를 훤히 아는 준철에겐 헛웃음만 나오는 얘기였다.
“그걸 왜 회삿돈으로 내요?”
“예?”
“산재 처리 시킬 수 있는 문제를 왜 회삿돈으로 내냐고요. 보험으로 처리해야죠.”
“어찌 됐건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 주니…….”
“그게 아니라 산재 기록 안 남기고 싶어서 사비로 지원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피해자 보상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겠단 겁니다.”
“뜻이 그러시면 이 돈은 임원들 월급을 깎거나, 회장님 사비로 만들죠.”
“…….”
“주주들은 이 사건의 2차 피해자입니다. 이미 까먹은 돈만 수백억인데, 회삿돈을 또 허튼 데 쓰실 겁니까?”
준철의 지적에 사장단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산재 기록이 남으면 추후 일감을 따낼 때 치명적이다.
저 작은 꼼수를 부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씨름했는데. 젊은 팀장 놈이 그걸 간파해 버렸다.
“그게 아니라 저희도 법률 자문을 다 마치고…….”
“그만들 하지.”
무어라 변명하려 할 때, 최 회장의 날카로운 음성이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단도 급히 대책을 내느라 미흡했습니다. 말씀해 주신 의견을 반영해 산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근데 이와 별개로 상생기금 자체는 좋은 생각 같네요. 이 돈으로 현장 점검 더 하고, 미흡한 안전 장비 보완하시죠. 노동부가 적발한 안전 수칙 위반만 20건이
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반영하겠습니다.”
그 뒤 하청사 대표를 뽑겠다, 내부 윤리 규정을 강화하겠다 등의 방지 대책이 있었지만 별로 유심히 보지 않았다.
‘어차피 안 지키면 그만인 거.’
중요한 건 이따위 공수표가 아니라, 놈들의 두려움이다.
또 갑질을 해 대면 그땐 회사가 기울어 버릴 수도 있다. 이 경고 메시지야말로 가장 좋은 재발 방지 대책이다.
준철은 펜대를 굴리며 계속해서 서류를 검토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영진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저…… 이제 처벌 수위를 논의드리고 싶은데.”
한 사내가 그리 말하자 준철은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처벌 수위 말씀드려야죠. 여기 있습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부당 행위, 산재 은폐 혐의를 확인. 원청사 대성중공업에 150억의 과징금을 부과한다.]
[상기 내용을 근거로 공공사업 입찰에 자격정지 1년에 처한다.]
경영진들은 망연자실한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과징금 150억과 공공기관 사업에 입찰 금지.
예상했던 수위보다 훨씬 더 큰 처벌이 떨어졌다. 공정위 처분은 1심 판결과 같으니 이대로 처분이 결정되면 회사에 재앙이었다.
“이건 너무 과합니다.”
“과징금 150억은 주로 사망 사고 벌어질 때나 나오는 거 아닙니까?”
“입찰 금지라니요. 저희 대성은 공공기관 물량이 20%데 이건 굶으란 거나 다름없습니다.”
재발 방지 대책이 반성하는 척하는 서류였다는 건 금세 드러났다.
처벌 수위를 말하니 바로 밑천을 드러내지 않는가?
“어떤 부분이 과하다는 겁니까?”
“일단 과징금 150억은 너무 많습니다.”
“그간 산재 은폐해서 이득 많이 보셨잖아요. 일감 따낼 때 안정성 평가는 거의 만점 아니었습니까?”
“…….”
“원칙대로 따지면 그것 또한 부당이득입니다. 그리고 공공기관 일감은 저희가 제한하지 않아도 당연히 배제될 겁니다. 1년이면 그간 덮었던 사고들 보상하기에도 벅찬 시간이죠.”
“…….”
“저희 처분이 과하면 불복하셔도 됩니다. 근데 행정소송 제기하면 저희는 200억으로 부를 겁니다.”
이게 가장 싼 가격이다.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정말 법원에서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잠자코 있던 최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이 처분에 따르면 작업 중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재발 방지 대책을 진정성 있다 판단하겠습니다. 인정하시는 대로 즉각 해제될 겁니다.”
“…….”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희도 책임 소재 분명히 밝혀야죠. 해당 임원의 비리는 그간 회사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지금…… 저에게도 책임을 묻겠다는 겁니까?”
“최고 경영자니까요. 처벌 못 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그럴 순 없다.
아무리 불법적인 일이라 해도 최 회장의 이름이 들어간 결재는 못 찾았으니까.
하지만 피 말리게 할 순 있다.
암묵적 지원이 있었을 거다, 최 회장이 구두로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등의 논리를 제시하면 증거 없이도 법정 싸움이 가능하다.
최 회장은 펼쳐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모두 고려했고, 결국 무겁게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공정위 처분에 모두 따르겠습니다. 회사 정상화만 도와주십쇼.”
작업 중지를 풀어 달란 말.
회장님의 의지를 확인한 사장단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다.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무거운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회사를 대표하는 그룹 회장으로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모든 책임을 통감합니다.”
검찰 소환 당일.
지금껏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최 회장이 기자들 앞에 섰다.
“하청 근로자의 사고를 은폐하고, 안전 장비를 미흡하게 설치한 점. 이는 두말할 여지없이 비판받아야 일입니다. 저희 대성은 추후 같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관련자를 해임하는 한편,
안전 조사를 전 계열사로 확대시켜 점검할 계획입니다.”
항복 선언에 가까운 발표가 나오자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아울러 다른 사고가 있었다면, 즉각 산재 처리하여 피해자분들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과실을 통감하고 있기에, 공정위의 엄중한 처벌을 모두 수용할 것입니다.”
5분 남짓한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공정위의 처벌 수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최 회장은 빗발치는 질문에 묵묵히 답했다.
“아직 공정위와 처벌 수위는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처벌이 내려지든 이의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경영권과 관련한 말씀도 해 주십쇼.”
“현재 저희는 내부 조사를 통해 관련자 징계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대표로서 책임질 일이 있다면 저 또한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작업 중지 명령으로 인한 회사 피해가 막심합니다. 해제 명령은 언제 떨어지는 겁니까?”
“그 또한 모두 당국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주 여러분들에게 거듭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
“그럼 취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신석준 상무는 이튿날 바로 2차 소환을 당했다.
이전에 봤던 수심 가득한 얼굴은 한결 가벼웠고, 때론 웃음까지 지었다.
“쓸데없는 말 안 하겠습니다. 모든 걸 인정하지요. 사인해야 할 거 있음 얼른 가져오쇼.”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말투. 마치 할 말은 많지만 더러워서 안 하겠단 뉘앙스다.
준철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억울하세요?”
“억울이라…… 회사를 위해 개처럼 일했는데, 이런 대접 받으니 우습긴 하군. 뭐 당신 눈엔 나만 나쁜 놈으로 보이겠지만.”
“그럴 리가요. 대성 그룹 다른 임원이나 당신이나 비슷한 사람이겠죠.”
“하하- 맞아. 딴 놈들도 다 나처럼 일했는데, 재수 없게 나만 걸렸어.”
비단 대성 그룹뿐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원청이 다 이런 방식으로 일한다.
“억울해도 별수 있나. 회장이 죽으라면 죽어야지. 서류 주쇼. 모두 인정해 드릴 테니.”
놈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준철은 이를 말없이 보더니 무심코 내뱉었다.
“짠한 놈.”
갑자기 왜 신석준이 과거의 자신으로 보였을까?
“뭐?”
“당신은 재수가 없는 게 아니라, 하늘이 도운 거야. 막말로 그 사람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죽었어. 근데 뭐 그리 억울하다고 취조실에서 푸념이야.”
“지금 당신 나한테…….”
“당신이 다친 사람보다 억울해? 산재 신청 못 해서 치료비 자기가 낸 것보다 억울해? 사람 새끼면 그게 억울해선 안 되지. 받으쇼. 이게 다른 하청사들이 당신 고발한 내용이니까.”
이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절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김성균도 그랬으니까.
준철은 긴말 대신 다른 하청사들의 증언을 놈에게 던져 줬다.
그 기록은 더욱 가관이었다. 전치 5주짜리 추락 사고부터, 식중독 사고까지 은폐한 혐의가 모두 나와 있었다.
하청 근로자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던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내용 다 재판에서 다뤄질 거요. 아, 3심까지 재판 끄는 거 원했지? 갑시다. 집행유예 나오면 실형 떨어질 때까지 계속 항소해 드릴게요.”
3심까지 가도 실형을 받긴 어렵다.
하지만 그 긴 소송을 감당하려면 놈도 막대한 변호사비를 써야 한다.
신석준은 아파트 평수가 줄어드는 걸 직감했는지 돌연 태도를 바꿨다.
“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억울한 마음에 넋두리한다는 게 그만…… 여기 나와 있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죄하고 용서받겠습니다. 아까의 태도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은 보통 사과할 타이밍을 한참 놓쳤을 때 하는 소리다.
준철은 그를 훑어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늦었어. 정 미안하면 이젠 합의금이라도 가져와서 그런 소리 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