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바보처럼 살았군요 (2)
텁텁한 취조를 끝내고 돌아오니 윤 과장의 굳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얘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송지훈이 쪽은 어땠어?”
“……소득이 없었습니다. 구속영장 얘기까지 꺼내 봤습니다만 겁먹는 기색이 아니더군요.”
“카메라 끄고 독대까지 해 봤다며. 무슨 얘길 했지?”
“이 사건으로 임 사장이 형살이를 할 수도 있다 했습니다.”
소용없었을 거다.
그들에게 임원은 사람이 아니라 소모품이다. 주군을 위해 죽는 장수가 대수겠는가.
“임 사장은 어땠습니까.”
“충심이 보통 아니더라. 송 회장이 자기 은퇴하고 나서 챙겨 준 회사라 하더군.”
“말도 안 됩니다. 그런 회사에 이렇게 일감을 몰아줬을 리 없습니다.”
“그놈은 이 말도 안 되는 폭탄을 혼자 떠안을 생각인가 봐.”
창진인베스트는 분명 송 회장의 뒷계열사다. 하지만 일감을 몰아 받았단 정황 말고는 이걸 입증할 방법이 없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건 창진의 소유주인 임 사장의 자백이지만 그것도 요원해 보인다.
답답한 상황에 서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준철이 말을 이었다.
“과장님. 혹시 제가 한번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누구? 임 사장?”
“네. 제가 한번 취조해 보겠습니다.”
“소용 없대두. 솔직히 이 사건 처벌은 미미할 거다. 고작해야 일감 몰아주기로 과징금 몇 억이지. 놈도 그걸 잘 아니 저렇게 버티는 거야.”
“저도 처벌 얘긴 안 꺼낼 겁니다. 그냥 자신이 얼마나 이용당하고 살았는지만 이해시켜 주겠습니다.”
윤 과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말이야?”
“개도 꼬리 밟히면 주인 뭅니다. 송지훈한테 임 사장 얘길 꺼내니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더군요.”
“그런 얘기야 놈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각오한 일이라 해도 막상 당하면 심정이 또 다릅니다. 슬쩍 건드려 보고 반응이 어떨지 보고 싶습니다.”
배신감.
충심을 단번에 증오로 바꿀 수 있는 무서운 감정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아니라,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된다.
당해 봐서 더 잘 안다.
아직도 한명 그룹에게 당한 배신에 치가 떨리며, 단 한 순간도 최영석 부회장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대신 카메라, 녹취 끄고 좀 편안한 분위기에서 만나 보고 싶습니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임진수의 취조는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죽기 전 김성균의 마지막 모습이지 않았을까.
윤 과장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고민이 길진 않았다.
지금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놈의 자백을 받아 내야 한다. 편법 상속 입증 못 하면 조사 실패나 다름없다.
“그래. 들어가 봐. 대신 녹취 없다고 너무 이상한 말 꺼내지 마. 괜히 절차적 문제에 흠 잡혀서 역공당하고 싶진 않다.”
“네, 알겠습니다.”
***
무거운 마음으로 취조실 문을 여니, 임 사장이 설렁탕을 비우고 있었다.
그는 힐끗 살피더니 다시 밥그릇에 집중했다.
“6시간이나 취조를 해 대더니,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아 있는 거요?”
“식사 다 마치셨습니까.”
“내 숱하게 검찰 취조실 와 봤지만 저녁까지 얻어먹는 건 처음이네.”
“그럼 취조 시작하겠습니다.”
준철이 서류를 들자 그가 쾅 소리를 내며 숟가락을 놓았다.
“젊은 팀장님, 그만합시다. 내가 취조실에서 설렁탕, 육개장을 한두 번 먹어 봤겠소. 당신들이 원하는 대답은 절대 안 나와.”
“혹시 모르죠. 몇 그릇 더 잡수시면 생각이 바뀔지도.”
“뭐?”
“저도 여기서 설렁탕 많이 먹어 봤는데, 먹을 때마다 체하더군요. 내 잘못도 아니고 남 잘못인데 왜 내가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나…… 그런 인간적인 자괴감이 들지 않습니까?”
먹다 만 밥그릇만 봐도 놈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의연한 척해 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젊은 팀장님. 뭔 얘긴진 모르겠다만 지금 허튼소리나 지껄이려고 온 거요?”
그의 말에 아랑곳 않고 준철은 서류를 쓱 내밀었다.
“창진인베스트. 누구 겁니까?”
“말하지 않았소. 내 회사야. 회장님이 전직 임원들 챙겨 준다고 분양 업무를 다 이쪽에 맡겼어. 공무원들 퇴직하고 연금 받듯이, 우리도 회장님께 노후 선물 받은 거야.”
“그거 치곤 물량이 너무 많던데요. 자사 물량의 99%를 다 창진에 준 거 아닙니까.”
“내가 그래서 혐의를 부정했소? 이걸 일감 몰아주기로 처벌한다면 달게 받겠다잖아. 근데 무슨 편법 승계를 위한 회사네 뭐네 떠들어 대는 건 그만해. 당신들이 잘못 짚었어.”
윤 과장 말대로 놈은 단단했다.
송 회장이 퇴직 후에도 자신을 챙겨 줬다는 거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딱하구만. 내가 보기엔 퇴직한 임원 단물까지 쏙 빼먹는 걸로 보이는데, 이걸 노후 선물로 생각하다니.”
“뭐?”
“임진수 씨. 현실을 직시하세요. 당신은 더 이상 태광건설에서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송 회장은 마침 지저분한 일을 하나 해야 했는데, 해결사가 필요했고요. 내가 송 회장이었다면 참
고민됐을 겁니다. 회사 맡겨 놨는데, 딴 맘 먹고 날름 먹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요.”
“지금 무슨 소리를……”
“회사를 안전하게 맡아 줄 충성심이 검증된 사람. 두둑한 수수료를 줘도 별반 아깝지 않은 사람. 여차해서 문제 생겨도 알아서 뒤집어써 줄 사람.”
쾅!
“젊은 놈의 새끼가 어디서 개소리야!”
“그게 당신이었을 뿐이야. 노후 선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이용해 먹었던 거라고.”
임진수는 탁자를 내리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반박할 순 없었다.
“내가 하나 맞혀 볼까요. 사건 터졌을 때 송 회장한테서 연락 간 거 있죠. 이 창진인베스트와 관련해서.”
“없어!”
“그거 사실상 할복하란 뜻이에요. 문제 생기면 뒤집어쓰라는 부탁.”
“없다니까!”
“내가 송지훈 취조 담당인데 그런 말을 해 봤습니다. 당신이 인정 안 하면 창진의 소유주인 임 사장에게 처벌이 쏠릴 수도 있다. 불쌍하지도 않느냐.”
“……”
“근데 반응이 가관이더군. 하랍니다. 세무조사를 하든, 처벌을 하든 마음껏 하래요. 자신하곤 정말 관계가 없는 회사라고.”
놈은 참담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 심정,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이건 송 회장이 자신을 챙겨 주려고 세운 회사가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다.
그 적나라한 사실을 젊은 놈 입으로 확인했을 땐 비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만약 송 회장이 정말 당신들에게 고마웠다면, 스톡옵션이나 퇴직금 같은, 문제가 전혀 없는 돈으로 보상했을 거요.”
“……”
“이용당한 겁니다. 마지막까지.”
준철은 그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진 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젠 이 현실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
임 사장은 취조실을 겨우 벗어났지만 젊은 놈이 지껄인 헛소리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충성심이 검증된 사람, 문제 생겨도 뒤집어써 줄 사람…… 내가 정말 이 두 이유 때문에 창진을 맡게 된 걸까?
무엇보다 젊은 놈의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송 회장이 정말 고마웠다면 문제 되지 않을 돈으로 보상해 줬을 거라는 게.
무거운 마음으로 태광건설에 도착한 그는 송 회장 앞에서도 얼굴을 수습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아닙니다…… 취조가 생각보다 길어서.”
“욕 많이 봤네. 공정위에서 뭐라든?”
“내막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진이 승계 작업을 위한 회사라는 건 파악했더군요.”
송 회장이 뜨뜻미지근한 눈빛을 보내자 임 사장이 바로 답했다.
“물론 저는 한마디도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회장님께서 전직 임원들을 챙겨 주려고 세워 준 회사라 둘러댔습니다.”
“고맙네. 역시 자네야.”
“다만 이게 언제까지 먹힐지 모르겠습니다. 일감을 몰아준 정황이 너무 많아서.”
송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이대로만 있으면 절대 드러나지 않을 회사니까.”
“회장님…….”
“물론 일감 몰아주기 같은 사소한 문제로 처벌은 떨어질 거야. 근데 뭐 과징금 말고 더 할 게 있겠나? 걱정하지 말게.”
임 사장은 점점 혼란해졌다.
무엇을 걱정 말라는 건가. 피해가 안 가게끔 잘 해결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처벌이 떨어져도 미미할 테니 좀 감수해 달란 건가.
“솔직히 현직에 있을 땐 더한 일도 해 줬잖아. 임 사장한텐 내가 참 할 말이 없네.”
비정하게도 후자였다.
처벌이 미미할 테니 감수해 달란 뜻이다.
“그나저나 공정위 저것들이 언제까지 날뛸지 모르겠네. 지훈이한텐 구속영장 얘기까지 꺼냈다더군.”
“……그렇습니까.”
“물론 겁주려고 한 얘기겠지. 이거 가지고 무슨 영장이야. 다만 공정위가 하루 이틀 칼춤 추다가 끝낼 것 같진 않으니 좀 더 고생해 주게.”
고개를 끄덕이던 임 사장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 송구스럽지만 다른 방안은 생각에 없습니까.”
“응?”
“어차피 공정위가 다 파악한 것 같은데…… 그냥 인정하는 것도 고려하시지요.”
“무슨 소리야?”
“요즘은 대기업 총수도 신용 대출까지 받아 상속세 냅니다. 더 이상 편법 승계가 먹히지 않아요. 이 작은 불 때문에 괜히 회사가 위태로워질까 걱정됩니다.”
송 회장은 바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임 사장.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 못 드렸는데 사실 전직 임원들의 동요가 큽니다. 공정위가 현직에 있을 때 결재했던 서류들까지 들먹이며 죄를 묻는다더군요.”
“그래서?”
“다들 은퇴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과거의 일로 처벌받고 싶지 않아 하는……”
“돌려 말하지 말고 말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만약 문제가 잘못되면 저희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겁니까.”
사실 처음부터 이 얘길 묻고 싶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회장님께선 어떻게 하실 거냐고. 그 상속세를 아끼기 위해 평생 충성을 바쳤던 임원들을 대신 희생시킬 거냐고.
“임 사장답지 않군.”
하지만 그 얘기가 회장님껜 불편하게 들리기만 했나 보다.
“그냥 한번 눈 딱 감고 해 주면 안 되나.”
“……예?”
“이거 가지고 무슨 구속 수사를 하겠어, 아님 실형이 떨어지겠어? 고작해 봐야 집행유예야. 과징금 떨어지는 거야 내가 당연히 낼 거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네들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네. 내가 자네들한테 챙겨 준 퇴직금이 얼만데.”
입이 다물어졌다.
“임 사장. 부탁함세. 귀찮겠지만 나를 위해 한 번만 더 수고를 해 줘.”
“…….”
“내가 꼭 사례하겠네.”
뒷얘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퇴직하고 나서도 이용당한 거란 젊은 놈의 말이 이제야 실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