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바보처럼 살았군요 (4)
“그냥 겁을 줬습니다. 전직 임원들이 당시에 한 일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그 얘긴 나도 해 봤어. 나랑 얘기할 땐 끄떡없던데?”
“끄떡없던…… 척을 했던 거죠.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동요하고 있었을 겁니다.”
적당히 둘러댔지만 윤 과장은 믿지 않았다.
피의자 취조를 한두 번 해 봤겠나. 임진수는 전혀 동요하던 눈빛이 아니었다. 전직 임원들을 왜 소환했느냐고 득달같이 따져 댄 놈이다.
그런 놈이 갑자기 모든 죄를 시인했고, 이를 시작으로 전직 임원들이 송 회장의 뒷계열사를 폭로했다.
“왜 그러십니까.”
“임 사장이 나한테 한 마지막 말이 걸려서. 짝사랑이 끝났다더군. 뒤에서 무슨 얘기가 오간진 몰라도 송 회장한테 큰 배신감을 느낀 눈치였어.”
짝사랑이라…….
그 한마디 말로 대충 뒤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것 같다.
임진수는 송 회장의 밑바닥을 확인했을 것이다.
자신이 평생 모셔 왔던 주군의 배신. 내가 무엇을 위해 일했나 싶은 허망함……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자신의 일평생이 전부 부정당한 느낌일 것이다.
“아무튼 저희한텐 좋은 거 아닙니까. 충신들이 다 배신을 했는데.”
윤 과장은 묻고 싶은 말이 더 많았지만 그쯤 했다.
이제 겨우 결정적 증거를 찾았다 뿐이지, 아직 수사가 끝난 게 아니다.
“그래,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이 팀장, 우린 근시일 안으로 바로 태광 칠 거야. 아마 그 전에 먼저 주가 공시 나갈 거다.”
언론은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이다.
멀쩡한 건설사와 뭣도 없는 분양 대행사. 이걸 합병시키려고 6 : 1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견적이 오고 갔다.
사전에 이 자료를 입수했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시행됐더라면 기존 주주들의 피해가 막심했을 터이다.
“금감원도 이 문제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가 입수한 자료는 당사자들이 직접 나눈 대화록이라 분명 증거로 인정될 거야.”
“네. 그럼 저희는 일감 몰아주기만 파헤치면 될까요.”
“그래. 몇 년 동안이나 이 짓 했는지 빠짐없이 파악해.”
본래 일감 몰아주기는 그렇게 처벌 수위가 센 편이 아니다.
하지만 편법 상속을 위한 일감 몰아주기는 가중처벌 대상으로 횡령에 주가조작 혐의까지 적용시킬 수 있다.
“과장님. 그럼 영장까지는…….”
“필요하다면 쳐야지. 멀쩡한 건설사가 웬 구멍가게랑 6 : 1로 합병이야.”
“그렇습니다. 이건 오너가 주도해서 작전 세력 짠 거나 다름없습니다.”
“근데 그건 기다려 보자.”
윤 과장은 영장 카드를 아껴 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밝혀졌는데, 놈들도 이젠 자백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준철은 적이 아쉬운 눈치였지만, 윤 과장의 결정을 존중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 많이 바쁠 거다. 좀만 더 고생하자.”
“네.”
그렇게 자리에서 나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준철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러 생각이 오갔다.
짝사랑이 끝났다……라는 말을 듣는데 왜 공감이 가고 마음이 아리는지.
사실 준철도 의문이었다. 송 회장과 뒤에서 무슨 얘기를 했기에 그가 이토록 차갑게 변한 걸까. 그리고 전직 임원들의 마음이 돌변했을까.
‘…….’
뭐 별거 없었을 거다. 일평생 송 회장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지.
그래도 늦게라도 알았으니 다행인 일이다.
그걸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
[주가 공시 – 태광건설 편법 승계 의혹 조사] [子회사, 창진인베스트와 6 : 1 합병] [공정위, 상당한 정황 파악했다고 밝혀]윤 과장의 예고대로 포문을 가장 먼저 연 건 금감원이었다. 공정위가 입수한 모든 자료가 주가 공시를 통해 여실히 보도되었다.
오너 일가의 뒷계열사는 늘 있어 왔던 문제라 반향이 크지 않았다만, 6 : 1의 합병 비율이 보도를 탔을 땐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이거 무슨 건설 업계의 어린왕자냐?
뱀이 코끼리를 삼키고 있네?
⌞ㄹㅇㅋㅋ 뱃가죽 찢어지겠다. 건설 업계 10위가 분양 대행사한테 먹혀 버리네.
⌞편법 승계 하나 해 보자고 기존 주주들 다 x신 만드는 거지. 사실상 우리가 그놈들 상속세 대신 내주는 거다.
-도대체 분양 대행사가 뭐냐?
분양권을, 대신 팔아 주는 업체. 이게 설명의 끝이네? 동네 부동산이랑 뭐가 달라?
⌞ㅇㅇ 동네 부동산 맞아. 그걸 오너가 키워 주면 기업이 되는 거.
⌞더 키워 주면 건설사 주인도 됨.
태광건설은 막대한 일감을 몰아주며 창진인베스트를 기형적으로 키웠다.
창진의 순이익 또한 주주들에게 환원되었어야 할 배당금이다.
그나마 태광건설이 성장세에 있었기에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합병 비율을 들었을 땐 있던 정이 싹 달아났다.
주주들의 실망감은 곧 주가 그래프로 나타났다.
공시 이후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고, 금감원이 매매 정지를 고려해야 될 수준까지 내려왔다.
“반박 자료 내! 합병 비율은 사실무근이라고!”
“공정위의 강압 수사와 전직 임원의 악의적 진술이야! 우린 피해자야!”
발등에 불 떨어진 송 회장은 전력을 다해 반박 자료를 내놨지만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박 자료라는 게 사실무근 이 한마디뿐이었다.
무의미한 싸움이 일주일째 계속되자 임원 하나가 결심한 듯 직언을 던졌다.
“회장님…… 임 사장까지 공정위에 협조한 마당에, 더 이상 사실무근은 안 통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철회하시죠. 창진인베스트와의 합병은 무산되었다고 발표하는 게 낫겠습니다.”
이게 이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송 회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꼬리가 어떻게 주인을 버릴 수 있는가. 감옥이 아니라 지옥도 대신 가줄 것처럼 굴던 임원들이다. 그들에게 배신당했단 사실은 송 회장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이걸 인정하면 잃는 게 너무 많았다.
“부사장. 그럼 내가 이 짓거리 왜 한 거냐?”
“……”
“합병 안 시킬 거면 애초에 대기업 집단 지정도 안 피했어! 내가 뭣 땜에 이 쌩쇼를 다 했는데.”
그렇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순 없잖습니까.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
임원들은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대기업 총수들 다 하는 일이야. 여기서 물러나면 죽도 밥도 안…….”
그렇게 송 회장의 굳은 의지를 다시 확인할 때,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양복쟁이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뭐야?!”
“공정거래위원회 이준철 팀장입니다. 마침 여기 다 계셨네요.”
준철은 싱긋 웃으며 서류를 건넸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이건 핵심 관계자들 소환장인데, 여기 다들 계시죠?”
소환장과 압수수색영장을 본 임원들은 사색이 됐다.
“이미 다 공정위가 뒤져 갔으면서 뭘 또 압수수색한다고?”
“뒷계열사가 더 있었더군요. 오늘은 이 자료 압수하러 왔습니다.”
준철이 뒷계열사 네 곳을 호명하자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송 회장이 꽁꽁 숨겨 둔 계열사가 모조리 다 적발되었다.
“반장님. 소환자 명단 확인해서 검찰로 모셔 가 주세요.”
“네.”
“특별히 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우린 좀 따로 얘기할까요?”
송 회장은 준철의 도발적인 눈빛을 받곤 고개를 떨구었다.
이윽고 둘만 남게 되자 준철이 슬쩍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째 기다렸습니다. 왜 합병 철회 안 하십니까.”
“무슨 말인지.”
“더 이상 딴청 피워 봤자 소용없어요. 창진인베스트, 아드님 주시려고 만든 회사잖아요. 이거 공짜 상속 하려고 지금까지 대기업 지정도 피하신 거 아닙니까.”
“난 모르는 일이오.”
“역시나 합병 철회할 생각이 없었구만.”
익히 예상했다. 편법 상속을 위해 지금까지 쇼해 왔는데, 그걸 쉽게 철회하겠나.
“끝까지 싸우시면 지훈 씨도 피 봐요.”
“뭐?”
“구속영장입니다. 이틀 내로 우리가 원하는 대답 안 나오면 송 사장 구치소 갈 거예요.”
허겁지겁 영장을 확인한 송 회장은 얼굴이 완전 무너져 버렸다.
영장은 금감원과 국세청이 동시에 신청했고, 그 증거가 명확해 당장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요 금융 당국이 동시에 영장 신청하는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송지훈 씨 정말 구속시킬까요.”
쾅!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편법 승계를 해도 내가 했고, 도운 것도 임원이 했어. 왜 아무 잘못도 없는 그 애가 영장 대상이지?”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잖아요. 송지훈 씨가.”
“웃기는 소리! 지금 나 흔들려고 그 애 건드는 거잖아. 아니야?”
준철은 물끄러미 그를 봤다.
“그래도 인정(人情)은 있나 보군. 제 새끼 다칠까 봐 발끈하는 거 보면.”
“뭐야?”
“그 인정을 왜 전직 임원들한텐 안 썼습니까. 여느 자식새끼보다 더 충성을 바쳤던 게 전직 임원들인데.”
이건 최영석 부회장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한 사람에게만 충성했던 나인데.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다니.
“흥. 꼴을 보아하니 임진수 그놈이 할 말 못 할 말 다 떠든 모양이지?”
하지만 송 회장은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아니었다.
“뭔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나 음해하는 거야. 인적 쇄신 차원에서 전직 임원들 다 물갈이했는데, 나한테 악감정이 남은 모양이구만. 그래도 나 그놈들한테 할 만큼 다 했어.
따로 회사 차려 줘서 두둑이 배당금까지 챙겨 줬다고.”
그가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들은 거두지 말란 모양이야.”
“이제 연극 놀이 그만하쇼. 그 회사 편법 상속하려고 세운 회산 거 이미 다 들통났어. 계속 모른 척하면 실력 좋은 로펌이 수습해 줄 것 같아? 천만에. 이거 맡겠다는 로펌 찾기도
힘들걸.”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실력으로 어떻게 한명 그룹 돈세탁까지 해 주셨지?”
“뭐, 뭐야?”
“당신들 한명건설 하청으로 일할 때, 부회장 비자금까지 마련해 줬잖아. 그때도 뒷계열사 세워서.”
“그걸 어떻게…….”
“전직 임원들이 다 진술했습니다. 더 해 볼까요.”
삽시간에 송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전직 임원들은 부하들이자 크고 작은 비리들을 해결했던 동료들이다. 놈들이 작정하고 진술을 해 대면 어떤 치부가 드러날지 모른다.
“선택은 알아서 하쇼. 근데 이틀 안으로 합병 철회하고, 그간 비리 모두 인정하길 바랍니다.”
“자, 잠깐만. 그 얘긴 나랑 한명 그룹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준철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내가 출처까지 말해 줘야 합니까?”
“……”
“이틀 안으로 결정 내리세요. 우리랑 끝까지 싸우면 더한 사건도 끄집어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