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을이 된 갑들 (2)
자동차는 만드는데 바퀴는 못 만드는 나라.
이것이 국내 조선 업계에 대한 글로벌 시장의 냉혹한 평가다.
한국은 LNG 화물선(천연가스 수송선)의 전통적 강자로, 글로벌 시장의 87%를 독점하고 있는 나라다. 국제 천연가스는 전부 한국 배로 수송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술 한 가지를 보유하지 못했으니…… 기체 상태인 천연가스를 액체로 저장할 수 있는 저장 탱크 기술이 없었다.
모든 문제의 원흉은 이 원천 기술 하나였다.
프랑스 ATT사는 독보적인 저장 탱크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무려 95%나 되었다.
말해 뭣 하겠나.
95% 점유율이면 독점이 아니라 독재 시장이다. 알짜배기 특허를 쥔 ATT사는 선박당 5%의 로얄티를 받아 갔으며, 국내 조선 업계가 이 돈으로 쓴 로얄티만 해도 한 해 4천억이
넘었다.
이쯤 해도 돈은 여우가 벌어 간다 소리가 나오건만, 이들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끼워 팔기를 당했다는 거야?”
“네. 국내 조선 업계가 필요한 건 저장 탱크 하나인데, ATT에서 엔지니어링 서비스까지 팔았답니다.”
“엔지니어링이면 시공 작업?”
“그렇습니다. 업계 입장을 들어 보니 시공은 자기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더군요. 근데 ATT사가 무조건 이 두 가지를 함께 팔았답니다.”
사는 놈은 냉장고만 사겠다 하는데, 파는 놈은 자꾸 설치까지 해주겠다 한다.
문제는 이 설치비가 냉장고 못지않게 비싸다는 거다.
“바가지를 얼마나 씌웠기에 그래?”
“엔지니어링 세 번 받을 돈이면 저장 탱크 한 대 살 돈이었답니다. ATT가 가진 특허가 워낙 독보적이라 부르는 게 값이었다고…….”
“그럼 좀 다른 업체 거 쓰면 안 되나. 저장 탱크 기술이 ATT한테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안정성이 입증된 건 ATT밖에 없습니다. 사실 국내 업체들도 여러 번 국산화하려고 시도해 봤습니다만 번번이 실패했다 하더군요.”
김태석 국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실패했겠지. 국내 하청들이 이런 기술 국산화하면 뭐 하나, 원청은 뒤통수치고 기술 빼먹기 바쁜데.
“자업자득이구만. 이런 게 업보지.”
말은 그리 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갑질하던 놈들이라고, 당한 거까지 모른 척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ATT에선 뭐래?”
“라이선스는 시공 작업이 중요해 함께 팔 수밖에 없었다 합니다. 그리고 시공을 맡겨 주면 기술 유출 우려가 있다는 게 그쪽 설명입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일리가 있어 보여?”
“솔직히 전 ATT사의 해명이 억지처럼 보였습니다. 굳이 냉장고 설치 비용까진 필요 없어 보입니다.”
할리우드에서 건너온 어벤져스 영화 한 편이 있다 치자.
국내 극장은 이를 개봉하고 관객수만큼 로열티를 지불하면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반드시 우리가 선정한 사운드 업체와 스크린으로 봐야 작품의 정수를 알 수 있다고 생떼를 부리면? 명백한 갑질이다.
ATT사의 논리가 그러했다. 시공은 라이선스와 무관한 사업으로 만약 국내 기업이 같은 갑질을 했다면 당연히 제재가 들어갔을 일이다.
하지만 여기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ATT사는 프랑스 국적 회사로 자칫하면 무역 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김태석 국장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서류를 쓱 밀어내었다.
“오 과장. 난 솔직히 이거 맡기가 좀 꺼림칙하다. 그 바닥이야 당연히 특허 가진 놈이 왕이지.”
“그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거 제재하면 분명히 또 뒷말 나온다. 한국은 자국 기업 보호하기 위해 행정 권력을 남용하는 나라라고.”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다.
“서로 화해시켜 봐. 솔직히 ATT랑 조선 업계가 경쟁 업체도 아니잖아? 공생 업체지. 깊게 관여하지 말자.”
그냥 부부 싸움이 좀 크게 일어났을 뿐이다.
이혼하네 마네 하면서 위자료 얘기 오갔던 거고, 그 과정에서 감정도 약간 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둘은 절대로 이혼할 수 없는 관계다. 한 놈은 탱크만 만들 줄 알고, 다른 한
놈은 배달만 할 줄 아는데 어떻게 헤어지겠나.
“근데 국장님…… 이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사실 산업통상부에서 몇 번이나 중재하려 해 봤더군요. 하지만 서로 입장 차가 너무 분명했답니다. 빅5 국내 조선 업계가 합심해서 저희한테 고발한 것만 봐도 이 둘의 관계는 이미
파탄 난 것 같습니다.”
김 국장은 쓴 침을 삼켰다.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순 없는 문제구나.
“그럼 하자. 인력 얼마나 필요할 것 같아?”
“사실 뭐 증거를 찾고, 입증을 해 대고 할 문제는 없어서 많은 인력은 필요 없습니다. 이준철 팀장이 남는데, 그 친구에게 이 사건 맡길까 합니다.”
“그럼 그놈한테 맡기고. 뭐 더 필요한 거 있나?”
“없습니다.”
김태석 국장은 제쳐 두었던 서류를 다시 펴서 사인을 갈겼다.
끼워 팔기를 했느냐, 안 했느냐.
말은 간단하지만 정말이지 피 말리는 조사가 될 것이다. 이 두 놈들은 다 체급이 큰 놈들이라 어떤 쪽으로 결론 나든 승복을 안 할 테니 말이다.
무조건 불복할 게 빤한 사건을 맡는 것만큼 괴로운 게 없다. 그렇다고 국내 조선 업계가 딱히 편들어 주고 싶은 놈들도 아니었고.
“가만. 이준철이?”
그렇게 서류를 넘길 때. 김 국장이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놈 그거 대웅조선 배 한 척 다 까 본 놈 아니야?”
“예. 대성중공업 산재 은폐 혐의도 밝혀냈죠.”
“아니 그런 놈한테 이 사건 배당시키면 어떻게? 이건 절대 편파 시비 나오면 안 된다고.”
“그래서 더 제격이죠. 이 사안을 가장 냉정하고 까다롭게 평가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런 외적인 부분과 별개로 일처리를 가장 잘하는 놈이기도 합니다.”
김태석 국장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놈이라면 누구보다 이 사안을 냉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다.
***
“……과장님. 이거 진짜 제가 하는 게 맞을까요.”
“왜? 평소엔 일 달라고 아우성인 놈이.”
“아시잖습니까. 제가 그쪽 업계에서 평판이 안 좋다는 거.”
조사가 결정되었을 때, 준철은 난감함을 금할 수 없었다.
국내 조선 업계가 가장 증오하고 있는 게 바로 자신 아닌가?
빅5 중 한 놈은 배 한 척을 다 까서 특허 도용을 밝혀냈고, 다른 한 놈은 작업 중지 명령으로 산재 은폐 혐의를 밝혀냈다.
“불편하냐?”
“저야 뭐 때린 입장이라 아무 감정 없는데, 국내 조선 업계는 앙금이 가시지 않았을 겁니다.”
“네가 그놈들 앙금을 왜 걱정해 줘? 아닌 말로 이건 너 같은 놈을 너무 늦게 만나서 벌어진 참사다.”
“예?”
“그놈들이 하청 특허 존중해 주고, 정당한 로열티 지불해 봤어 봐. 저장 탱크 기술도 금방 따라잡았겠지. 이건 지들이 하청들 뒤통수쳐서 아낀 로열티, 지금 이자까지 쳐서 내는
거야.”
뭔가 위로를 해 주려고 준비한 멘트 같은데,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준철은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히 말했다.
“과장님. 사실 좀 불편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너무 심하게 조사한 업체들이에요. 이 사안만큼은 다른 팀장들한테 맡기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네가 제격이야.”
“예?”
“ATT사 프랑스 업체라 분명 또 편파 시비 나올 거다. 근데 너만큼 그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넌 냉정하게 하나만 판단해라. 이거 끼워 팔기인지
아닌지.”
젠장.
뭔가 부드러운 말투라서 부탁하면 사건 안 맡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얘길 들어 보니 이미 낙점해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냉정하게 따져 보겠습니다.”
준철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오 과장이 일 얘기를 시작했다.
“사건은 어디까지 파악했어?”
“업계 사정만 겨우 파악했습니다. 국내 조선 업계가 배는 만드는데 저장 탱크는 못 만든다고…….”
“그거 알면 됐다. ATT사의 저장 탱크가 시장점유율 95%인데. 이놈들이 이거 가지고 갑질을 했어.”
“필요한 건 저장 탱크 하난데, 불필요한 엔지니어링 서비스까지 팔았단 말씀이시죠.”
오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그게 전부야. 이건 뭐 입증하고, 증거 찾고 할 필요도 없어.”
“그럴 것 같습니다…….”
“이 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입으로 그놈들을 변호해 주는 날이 올 줄이야.
“솔직히 끼워 팔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ATT의 해명을 읽어 봤는데, 시공을 왜 꼭 자기들이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되더군요. 다만 문제는…….”
“우리 제재안을 놈들이 승복 안 할 거라는 거?”
“네.”
“맞아. 사실 이건 뭐 법리를 따지고 말 것도 없어. 패배한 쪽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관건이야.”
그래서 더 준철을 추천한 오 과장이었다.
“근데 과장님. 저장 탱크는 다른 업체가 없는 겁니까? 글로벌 시장에서 저장 탱크 만드는 업체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닐 텐데요.”
“ATT의 안정성이 독보적이란다.”
“안정성이 조금 떨어져도 쓸 만한 탱크는 있잖아요.”
“그건 국내법에 막혔어. 국내 LNG 선박 기준이 굉장히 까다롭거든. 그 요건을 맞출 수 있는 건 ATT밖에 없다.”
준철의 눈빛이 빛났다.
저장 탱크. 다른 나라들은 이걸 아예 못 만들어서 없는 게 아니다. 국내 LNG 선박 기준은 굉장히 까다로웠고, 그 기준을 충족하는 건 ATT밖에 없었을 뿐이다.
물론 그들이 가진 기술력이 독보적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그건 왜 물어?”
“아닙니다. 뭔가 좀 걸리는 게 있어서.”
“그게 뭔데.”
“아직은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
오 과장은 길게 묻지 않았다.
확신이 생기면 말하지 말라 해도 다 보고를 해 댈 놈이다. 거대 기업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겠지.
“뭔 꿍꿍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큰 돌발 행동은 하지 마라. 상대는 외국 기업이다.”
“네. 걱정 마십쇼.”
“내일 먼저 국내 조선 업계랑 면담이 있다. 이 팀장한텐 불편한 얼굴들이 많을 거야. 정 불편하면 첫 면담은 내가 해 줄까?”
“아닙니다. 일인데요, 뭐.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대답은 씩씩하게 했지만 속내는 불편했다.
내일 면담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가시방석일 것 같다.
그놈들이나 나나.